아이티 혁명사 - 식민지 독립전쟁과 노예해방
로런트 듀보이스 지음, 박윤덕 옮김 / 삼천리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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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티혁명”이라고 말하면 주변사람들은 으레 “IT"로 알아듣는다. IT시대, 여기저기 남발되는 ‘혁명’ 이란 단어, 그리고 무엇보다 아이티공화국이 잘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나도 그랬다. 2004년은 아이티혁명 200주년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최근 몇 년 사이의 책들에서 몇 번 아이티혁명을 언급한 것을 본 적이 있고, 작년에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를 읽으며 다시 아이티혁명에 대한 짧은 내용을 보았다.

 

사실 아이티혁명은 서구가 중심이 된 세계사에서 지워진 혁명이다. 아이티혁명은 프랑스혁명의 일부일 뿐 아니라 영국혁명, 미국혁명, 프랑스혁명과 함께 자기 완결적인 혁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학교에서는 3대 혁명만을 근대 혁명으로 가르치고 있다. 왜 그럴까?

 

『민주주의는 죽었는가?』 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아이티는 처음부터, 즉 노예제에 맞서 1804년의 독립을 이끌어낸 혁명투쟁 자체에서부터 예외였다. “오직 아이티에서만 인간의 자유에 대한 선언은 보편적인 일관성을 지녔다. 오직 아이티에서만 이 선언은 당시의 사회질서와 경제논리에 직접 맞서 모든 희생을 감수하면서도 유지됐다.” 이런 이유로 “근대사 전체를 통틀어 지배적인 전지구적 사물의 질서에 대해 이보다 더 위협적인 함의를 지닌 단일 사건은 없다.” 아이티혁명은 진정으로 프랑스혁명의 반복이라는 칭호를 얻을 자격이 있다. 투생 루베르튀르가 이끈 아이티혁명은 분명히 ‘자기 시대를 앞선’ 것으로서 ‘성급’하고 실패할 운명을 짊어졌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프랑스혁명 자체보다 한층 더 사건이었을지 모른다. 식민지의 반란자들은 최초로 식민지배 이전에 자신들이 지녔던 ‘뿌리’로 되돌아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유와 평등이라는 극히 근대적인 원칙을 위해 봉기를 한 것이다. 그리고 아이티의 노예반란을 즉시 인정했다는 사실이야말로 자코뱅 당원들의 진정성을 보여줬다. 아이티의 흑인 대표는 국민의회에서 열렬히 환영받았다. (그리고 예측할 수 있듯이 테르미도르의 반동 이후 상황은 변했고, 나폴레옹은 즉시 아이티를 재점령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다.)

이런 이유에서 일찍이 샤를 모리스 드 탈레랑은 “아이티가 독립해 존재한다는 바로 그 사실”에 담긴 위협을 이렇게 표현한 바 있다. 아이티의 독립은 “모든 백인 국가들에게는 무시무시한 광경”이라고. 따라서 아이티는 다른 국가들이 동일한 경로를 택하지 않도록 단념시키기 위해서 경제 실패의 결정적인 사례가 되어야만 했다. p177~8」

 

아이티혁명은 서구 자본주의 탄생의 모태가 되었던 아메리카 식민지에 대한 전면적 부정이었던 것이다. 라틴아메리카 원주민의 절멸, 아프리카 노예무역, 사탕수수와 커피 플랜테이션이 없었다면, 17C 과학혁명과 18C 산업혁명으로 이어지는 자본주의의 발전과 시민사회의 성장이 가능했을까? 아이티혁명이 위대한 보편혁명으로 기록될 수 없었던 것은 아마도, 서구의 발전이 아메리카 식민지와 아프리카 노예들의 피눈물 위에 이루어졌다는 수치를 조용히 묻어두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어쨌거나 나는 단편적이지만 매혹적인 몇몇 글들을 통해 아이티혁명에 관해 알게 되었고, 이제야 본격적인 이야기를 읽게 되었다.

 

 

2004년에 출판된 로런트 듀보이스의 『아이티혁명사』는 “식민지 독립전쟁과 노예해방”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미국은 1776년에 독립선언을 하고 1783년에 독립을 승인 받았지만, 1863년에야 흑인 노예가 해방되었다. 미국의 독립과 노예해방에는 80년의 격차를 둔 두 번의 전쟁이 있었다. 아이티는 1791년 노예 봉기 이후 지속된 투쟁 끝에 1804년에 마침내 노예해방과 식민지 독립을 동시에 이루어냈다. 10여 년의 짧은(?) 기간 동안 그들은 어떻게 노예제를 폐지하고 독립 공화국을 이루어 낸 것일까? 그것도 백인 이주민이 아니라 아프리카 출신의 흑인들이 그야말로 맨손으로 서구 열강들의 침략을 물리치고! 『아이티혁명사』는 이 흥미진진하고도 슬픈 역사를 한 편의 다큐드라마처럼 풀어내고 있다. 혁명사를 머릿속에 도표처럼 그려 넣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다소 장황하고 복잡하게 보이기도 하겠지만, 혁명을 이끌어 낸 주체 세력들의 역학 관계가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고 혁명의 요체는 구질서를 파괴하는 것보다 그 폐허 위에 새로운 체제를 수립하는 것이라는 진실을 보여주고 있다.

 

 

  

 

서인도제도에서 두 번째로 큰 섬인 히스파니올라는 서쪽으로는 아이티공화국, 동쪽으로는 도미니카공화국으로 나뉘어져 있다. 1492년 콜럼부스가 이 섬을 발견한 후 에스파뇰라라고 불렀는데, 이것이 영어화 되어 히스파니올라가 된 것 같다고 한다. 섬 전체를 아이티라고도 부르는데 이 명칭은 섬의 원주민들이 식민지 시대 이전에 불렀던 것으로 추정된다. 마침내 프랑스를 물리치고 인종차별 없는 독립 공화국을 세운 아프리카계 해방노예들이 새로운 국가의 이름으로 원주민들의 명칭인 이 ‘아이티’를 선택했다는 것에 대해 『아이티혁명사』는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아이티라는 이름의 선택은 독립선언에 광범위한 역사적 의미를 불어넣었다. 아이티는 프랑스 식민주의뿐만 아니라 아메리카에서의 유럽 제국사 전체에 대한 부정이었다. 새로운 나라는 공식적인 식민 활동에 의해 주변으로 밀려난 사람들이 겪어야 했던 고난의 세기에서, 그 신성한 유권자들의 영원한 자유를 보장하는 새로운 정치 공동체로 나아가는 것이었다. p462」

 

아이티 공화국이 세워지기 전에 이 섬에서 에스파냐가 차지한 지역은 산토도밍고, 프랑스가 차지한 지역은 생도맹그라고 불렸다. 같은 이름을 자기 나라 식으로 부른 것이다. 에스파냐가 먼저 식민지를 개척했으나 나중에 서쪽 지방은 프랑스가 차지했기 때문이다. 산토도밍고는 현재 도미니카공화국의 수도 이름이기도 하다. 여하튼 이런 까닭으로 이 책에는 계속 생도맹그라는 명칭이 사용된다.

 

 

인종이 복잡하게 얽힌 라틴아메리카의 대부분이 그러했겠지만, 프랑스령 생도맹그의 정치적 대립은 한층 더 다층적이었다. 아이티혁명이 프랑스혁명과 맞물려 있었기 때문이다.

 

「생도맹그에서 반란은 프랑스 제국에 대한 도전으로 시작되었는데, 그 배경에는 식민지와 본국 사이의, 그리고 백인과 자유유색인 엘리트 사이의 대립과 갈등이 있었다. 자치를 주장하던 백인 농장주들의 정치적 행동은 재산에 입각해 동등한 권리를 주장하는 자유유색인 지주들에게 본보기가 되었고, 뒤이어 흑인노예들에게 해방의 가능성을 꿈꿀 수 있게 한 하나의 돌파구를 제공했다. 그렇기에 제임스가 반란 노예들을 프랑스의 상퀼로트와 비견되는 ‘흑인 자코뱅’ 이라고 부르지 않았던가! p477」

 

아이티혁명의 주체는 아프리카계 노예였지만, 제일 먼저 정치적 갈등이 표면화 된 것은 식민지 농장주와 본국 사이에서였다. 본국은 중상주의 정책을 통해 식민지가 오로지 프랑스 본국을 위해서만 존재하기를 바랐지만, 식민지 농장주들은 주변 여러 나라와 밀무역을 통해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였다. 게다가 유럽에서는 계몽주의자들을 중심으로 노예제 폐지론이 대두하면서 식민지 농장주들을 불안하게 했다.

 

여기에 자유유색인과 백인 식민지 농장주들의 대립도 가세했다. 자유유색인은 백인 식민지 농장주와 아프리카 흑인 여성 노예 사이의 혼혈들로서 백인 농장주는 혼혈 아들과 그 어머니를 해방하고 재산을 물려주는 경우도 많았다. 자유유색인은 농장주가 되기도 했지만, 군인으로 복무하며 식민지를 보호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들은 외부의 적과 더불어 내부의 위험한 적인 노예들에 맞서 생도맹그를 지켰다. 자유유색인의 기여도가 커지면서 이들의 정치적 권리에 대한 요구도 높아져 백인 농장주들의 경계를 불러 일으켰다.

 

식민지 농장주들은 본국에 대해, 자유유색인들은 백인 농장주들에 대해 더 많은 정치적 권리를 주장하는 가운데, 본국 프랑스에서 혁명이 일어났다. 프랑스혁명은 각 세력의 요구에 불을 붙였고, 프랑스혁명이 진전됨에 따라 식민지의 상황도 시시각각 변화해 갔다. <인간과 시민의 권리에 관한 선언>은 마침내 식민지 노예들에게도 인간적 권리에 대한 주장을 요구할 수 있는 정당성을 부여하면서, 본격적인 노예반란과 노예해방전쟁을 촉발하였다. 생도맹그의 중첩된 대립은 앞날을 예측하기 힘든 혼란 속으로 빠져 들었다.

 

1790년 국민의회는 <인권선언>이 노예에게는 해당하지 않으며 노예제와 노예무역은 변함없다는 법령을 발표 했다. 자유유색인 문제는 모호함 속에 회피되었다가, 1791년에 양쪽 부모 모두가 자유인인 자유유색인들에게만 정치적 권리가 부여되었다. 이 소극적인 권리부여마저 백인 농장주들의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백인들은 “자유유색인들의 목을 따고, 프랑스를 버리고, 영국인들을 불러들이는 것”만이 해결책이라고 공공연히 주장했다.

 

1791년에는 마침내 노예들이 봉기했다. 1791년 8월 생도맹그의 노예반란은 아이티혁명의 공식적인 시작이었다. 노예반란의 원인에 대해서는 계몽사상과 평등주의 이념 자체라는 주장도 있고, 그 배후가 반혁명적인 백인 농장주들이라는 상반된 보고도 있지만, 『아이티혁명사』의 저자는 반란노예들 자신이야말로 반란의 진정한 원동력이었다고 단호히 주장한다.

 

「그러나 폭도에게는 그들만의 이데올로기, 그들만의 역사, 그들만의 희망이 있었다. 왕당파와 공화파 백인들의 활동이 반란을 위한 무대를 마련하고 그 반란이 진행되는 데 기여했지만, 반란 노예들이야말로 반란의 진정한 원동력이었다. (․․․) 생도맹그의 노예들은 (로마에서 스파르타쿠스를 따른 노예들처럼) 선동가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족쇄를 깨라고 선동한 자유의 수호신”에 의해 행동에 나선 것이다. 식민지에 퍼진 자유에 관한 소문과 몇몇 백인들의 “경솔한” 발언에 노예들이 고무되었을지라도, 그들에게는 “자유에 대한 사랑과 억압자에 대한 증오” 말고 다른 “선동가”는 없었다. “노예들은 그들의 주인과 노예제를 유지하는 정부에 맞서 항구적인 전쟁 상태에 있었다. 그들은 그 어떤 수단, 심지어 폭력을 써서라도 자유를 요구할 권리가 있다”고 가랑쿨롱은 썼다. 그들은 폭력적이긴 하지만 때로는 기운을 북돋아 주기도 하는 혁명 과정에 뛰어들었고, 급변하는 세계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기 위해 투쟁하면서 다양한 이념들에 의지했다. p169~170」

 

1792년 4월, 노예반란에 대응하여 프랑스 국민의회(정확히는 입법의회)는 자유유색인들에게 백인들과 동등한 정치적 권리를 부여했다. 이제 식민지에는 두 부류의 사람들, 즉 자유인과 노예만이 존재하게 되었다. 그리고 자유인 사이에는 어떠한 인종차별도 없을 것임을 선언했다. 국민의회는 권리를 획득한 이 새로운 시민을 통해 식민지를 지키려 하였다.

 

「이는 대단한 진전이었다. 아메리카 노예제 사회의 한복판에서 인종에 의거한 법적인 차별이 금지된 것이다. 이 법령은 생도맹그의 수많은 자유유색인들과 함께 아프리카계 주민들이 의미 있는 정치권력을 가지게 될 것을 보장했다. 생도맹그의 노예 반란은 노예제를 구하기 위해서 인종 평등을 부여할 수밖에 없게끔 만들어 역설적인 방식으로 정치의 지평을 확대했다. p208」

 

백인들과 동등한 권리를 갖게 된 자유유색인들은 선봉에 서서 노예반란을 진압하였다. 그러나 노예반란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고 백인 농장주들도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1793년이 되자 노예반란은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생도맹그에서 제국들의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1793년 1월, 급진 공화파가 주도한 국민공회가 루이16세를 처형하였다. 그러자 영국과 에스파냐가 포함된 1차 대프랑스 동맹이 결성되었고, 유럽에서 뿐만 아니라 식민지에서도 전쟁이 일어났다. 영국과 에스파냐는 생도맹그의 반란과 내부 분열을 이용해 생도맹그를 손쉽게 차지하려고 하였다. 에스파냐는 자유를 대가로 반란 노예를 모집했고, 영국은 먼저 백인 농장주들을 끌어들였다.

 

「농장주들에게는 적의 편에 서는 것이 합리적이고 실용적인 선택이었다. 그러나 그 선택은 노예제를 구하는 대신 노예제 철폐를 위한 상황을 낳았다. 그들은 공화국의 배신자가 됨으로써 노예들이 프랑스의 시민이자 수호자가 되는 길을 열어 주었다. 농장주들은 고립무원의 공화국 감독관들이 새로운 동맹자를 찾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프랑스도 에스파냐처럼 반란 노예들을 이용했다. 1793년 2월 식민지 담당 장관은 송토나에게 프랑스를 위해서 싸우는 반란 노예들에게는 자유를 줄 것이라고 말했다. p246」

 

식민지 감독관은 공화국을 지키는 흑인전사들에게 자유와 함께 프랑스 시민이 누리는 모든 권리를 약속했다. 마침내 1794년 국민공회가 공화국의 모든 영토에서 노예제를 공식 폐지하고 모든 이들에게 시민권을 부여하였다. 피부색의 차별 없이 모든 인간은 프랑스 시민이 되었다. 비록 곧바로 훼손되고 공격당하긴 했지만 새로운 질서는 원칙적으로 비타협적인 평등을 토대로 삼았다. 유럽과 아메리카의 어느 곳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자유가 실현된 것이다.

 

 

 

아이티혁명의 아버지로 불리는 투생 루베르튀르는 처음 에스파냐를 위해서 싸우다, 1794년에 프랑스 공화국에 합류했다. 이때부터 루베르튀르는 생도맹그 노예들이 획득한 자유를 보호하고 확정하는 과업을 떠맡았다. 흑인 노예 출신인 그는 우리의 자연스런 추론과는 다르게 해방 노예들의 자유를 제한하고 억압적인 법질서를 수립하려고 했다. 왜 그랬을까? 혹은 왜 그래야만했을까? 투생 루베르튀르는 자유는 쟁취하기보다 지키기가 더 어렵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루베르튀르는 반란의 핵심에 있었고, 자유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쟁취하는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관심은 그 자유를 어떻게 보전할 수 있는가에 있었다. 1794년에 프랑스의 지도자들이 아무리 원칙에 충실했을지라도, 궁극적으로 프랑스 국민은 생도맹그가 지난 세기 동안 생산했던 상품들을 계속해서 대서양 건너로 보내 줄 때에만 노예해방의 원칙을 고수할 것이라는 점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자유는 달콤하지만 대가를 치러야 했다. 프랑스는 여전히 달콤한 설탕이 필요했고, 설탕과 함께할 커피도 필요했다. 한 당대인의 설명에 따르면, 루베르튀르는 이런 금언을 남겼다. “흑인들의 자유는 농업의 번영을 통해서만 확고해질 수 있다.” p302~3」

 

프랑스에는 여전히 노예폐지 반대론자들이 많았고, 해방노예들이 열심히 일하지 않는다면 식민지에 대한 프랑스의 정책이 바뀔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었다. 그러나 해방이 된 이후에도 여전히 강제적으로 농장에 머물러야하고 똑같은 일을 해야 하는 해방노예들은 불만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일부 농장 노동자들은 투생 루베르튀르의 목표가 노예제를 부활하는 것에 불과하다며 항거하기도 했다. 루베르튀르의 역설은 자유를 유지하기 위해서 자유를 제한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루베르튀르는 1800년 10월에도 노동규제를 강화하는 법령을 발표 했다. 이것이 결국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그의 지지층을 잃어버리게 만들었지만 그때까지 루베르튀르의 의지는 단호했다.

 

「1794년 이후 루베르튀르는 시종일관 해방노예들의 자유에 대한 제한을 강행하면서, 노예해방을 수호하고 확고히 하기 위해서 그러한 제한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1798년에 그가 선언한바, 식민지 경제를 발전시키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은 ‘생도맹그 인민’의 책임이었다. 1801년에 그는 “자유를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서 식민지 경제의 재건이 “특히 시급하다”고 설명했다. 식민지의 미래를 설계하고자 했던 그는 과거가 식민지를 꼼짝달싹 못하게 짓누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생도맹그는 설탕과 커피 생산자로 성장해 왔고, 현행 대서양 경제에서 생도맹그가 다른 역할을 맡는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생도맹그는 오랫동안 식량 수입에 의존해 왔는데, 1790년대 말에 프랑스와 영국이 전쟁을 질질 끌면서 대외 교역이 그 어느 때보다 더 중요해졌다. 외국 상인들을 끌어들이기 위해서 생도맹그는 식민지의 전통적인 상품을 생산하고 수출해야 했다. 이는 단지 경제적 필요뿐 아니라, 루베르튀르가 알아챘듯이 정치적 생존의 문제였다. 생도맹그 인민이 자신의 미래에 대한 발언권을 가지려면, 오직 강력한 플랜테이션 경제에서만 가능한 경제적 자립이 필요했다. 그리고 이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농장 너머의 미래를 내다보는 해방노예들의 열망을 억눌러야 했다. 그러나 1800년 10월 엄중한 법령으로 노동 규제를 강화하면서 그가 명확히 했듯이, 이는 루베르튀르가 지불해야 할 값비싼 대가였다. p370~1」

 

그런데 이 방법밖에는 없었을까? 루베르튀르가 제안한 체제는 그가 맞서 싸웠던 구질서와 여러 가지 면에서 너무나 흡사했다. 그래서 예전의 농장주와 지주들은 노예제가 부활할 것이라며 기뻐하기도 했다.

 

1801년 11월에 루베르튀르는 1800년 법령을 엄격히 실시하고 이를 감시하는 새로운 법령을 발표 했다. 이로써 루베르튀르는 독재자가 되었다.

 

「그가 지배하는 식민지는 사회 계서제, 강제 노동, 폭력 진압에 기초한 사회가 되었다. 그 포고령은 진정한 자유가 플랜테이션 경제와 공존할 수 있는 중도 노선을 찾아내는 데 루베르튀르가 실패했음을 보여주는 일종의 지표가 되었다. 몇 달 뒤, 루베르튀르를 박살내기 위해서 프랑스에서 함대가 몰려왔을 때, 그는 생도맹그의 경작자와 도시 주민들은 물론이고 장병들 사이에서도 자기를 위해 기꺼이 싸울 사람이 많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루베르튀르의 체제를 노예제와 혼동한 프랑스 사람들은 뜻밖의 깨달음을 얻게 될 것이다. 그가 자유에 가한 많은 제한에도 불구하고, 해방노예들은 현재와 과거 사이의 차이를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과거로 돌아가기보다는 기꺼이 목숨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었다. p388 」

 

물론 진짜로 어려운 것은 어둔 밤의 구질서를 무너뜨리는 것보다, ‘그 다음날 아침’에 시작되는 새로운 질서의 구축이다. 당연하게도 해방노예들의 이상과 희망은 하늘높이 닿아있었지만 현실은 냉정했다. 경제적 자립 없이는 정치적 자유가 유지될 수 없었고, 왜곡된 플랜테이션 산업 구조에서 경제적 자립을 이룩할 수 있는 길은 달리 없었다. 농장 노예에서 농장 노동자로 이름이 바뀌었을 뿐이지 해방노예들은 그들을 예속했던 농장으로 다시 돌아가야 했다.

 

경제적 자립을 위한 길은 진정 그것 뿐 이었을까? 모르겠다. 아이티뿐만 아니라 이후 독립한 라틴아메리카의 운명을 보면 대안을 찾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니었음은 분명해 보인다.

    

 

루베르튀르는 1798년 영국을 몰아내고, 1800년 자유유색인이 일으킨 내부의 반란을 진압하고, 에스파냐령 산토도밍고까지 점령했다. 루베르튀르가 히스파니올라 섬 전체를 정복한 것이다. 루베르튀르의 눈부신 군사적 성공과 생도맹그 경제를 되살리기 위한 독재로의 회귀에도 불구하고, 생도맹그에는 최후의 결전이 다가왔다. 프랑스를 장악한 나폴레옹이 식민지에 다시 노예제를 부활하려 했기 때문이다.

 

 

1802년 프랑스 군대가 생도맹그에 상륙했다. 보나파르트 정부는 생도맹그 원정을 “아메리카에서 일어나고 있는 흑인 야만주의에 맞서는 서양 문명인들의 십자군”으로 규정했다. 생도맹그의 아프리카 흑인들은 이제까지 다양한 세력과 연대와 대립을 거듭하며 투쟁했지만 그들이 원한 것은 오직 노예제 폐지와 자유였다. 자치권을 획득하려 했지만 식민지로서의 생도맹그에 대한 저항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이제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는 프랑스로부터의 독립 이외의 방법은 없었다.

 

낯선 땅에 도착한 프랑스군은 고전을 거듭했지만, 1802년에 투생 루베르튀르를 항복시켰다. 이 항복이 프랑스군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할 전염병이 창궐할 시기까지의 위장 항복이라는 분석도 있지만, 프랑스군의 계략에 넘어간 루베르튀르는 항복 조건과는 달리 프랑스로 이송되었다. 1803년 59세의 루베르튀르는 프랑스의 어느 감옥에서 뇌졸중과 폐렴으로 사망했다. 아이티공화국 독립의 아버지로 길이 남은 투생 루베르튀르지만 정작 자신은 아이티의 독립을 보지 못했고, 자유를 지키기 위해 자유를 억압했던 이율배반적 통치로 해방노예들의 불신을 초래하기도 했다.

 

루베르튀르에게 승리한 프랑스는 생도맹그의 흑인들이 고대하던대로 더 무서운 적을 만났다. 열병의 계절이 시작되자 그 섬에 적응되지 않은 프랑스 병사들 대다수가 황열병으로 쓰러졌다. 예를 들어 1803년 중반에 도착한 폴란드 연대는 열흘 만에 절반 이상의 병사를 잃었다. 여기에 때를 기다리고 있던 생도맹그 흑인들이 가세했다. 생도맹그 흑인노예들에게 기름을 부은 것은 노예제 부활 법령이었다. 나폴레옹은 노예제 부활의 의도를 숨기려 교묘히 작업하고 모호한 수사를 썼지만 해방노예들에게 그 의미는 명백했다. 전쟁은 점점 잔인해졌고 양쪽 모두 끔찍한 학살을 자행했다.

 

1803년 11월, 프랑스군이 철수했다. 생도맹그 흑인들의 승리였다. 그해 12월에 독립선언서가 작성되었다. 독립전쟁을 최후의 승리로 이끈 데살린은 원주민의 명칭을 복원하여 이 땅을 아이티라고 이름 붙였다. ‘아이티’는 아프리카 흑인 노예들이 끌려오기 전의 이름을 되찾음으로서, 이 땅에서의 아메리카 제국주의/식민주의 자체를 거부하는 상징이 되었다.

 

 

아이티 독립혁명은 성공했다. 그러나 아이티 공화국의 역사는 독립과 함께 막 시작되었을 뿐이고 이후 200년의 역사는 성공적이지 못했다. 투생 루베르튀르가 이미 예견하고 고심했듯, 제국주의 국가들의 봉쇄 속에 아이티 경제는 무너졌다.

 

1825년에 아이티 정부는 외교․경제 관계 수립에 대한 대가로 프랑스에 배상금을 지불하는 데 동의했다. 노예해방과 독립에 의해 농장주들이 상실한 것을 보상하라는 것이었다. 세계 어느 역사에 혁명을 성공시킨 대가로 그들이 패배시킨 구세력에게 배상금을 지불한 사례가 있을까! 하지만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아이티는 배상금을 지불할 능력이 없었고, 이 때문에 프랑스 은행에 돈을 빌려야 했고, 그것이 20세기까지 아이티 경제와 정치의 발목을 잡았다.

 

왜 프랑스는 이렇게 가혹하게 아이티를 짓밟았을까? 프랑스뿐 아니라 주변 열강들이 모두 그랬다. 아이티의 독립이 “모든 백인 국가들에게는 무시무시한 광경”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이티는 다른 국가들이 동일한 경로를 택하지 않도록 단념시키기 위해서 경제 실패의 결정적인 사례가 되어야만 했다. ‘성급한’ 독립의 대가는 참혹했다. 과거 식민지배 권력이었던 프랑스는 20년간의 봉쇄 이후인 1825년에야 무역과 외교관계를 정상화했고 아이티는 총 1억 5천만 프랑을 노예 손실에 대한 ‘배상금’으로 지불하는데 합의해야 했다. 이 액수는 당시 프랑스의 1년 예산에 거의 맞먹는 것으로서 얼마 뒤 9천만 프랑으로 줄어들었지만, 아이티의 경제적 성장을 끊임없이 저해하는 무거운 부담으로 작용했다. 19세기 말 아이티가 프랑스에 지불한 액수는 국가 예산의 약 80%에 해당했고, 1947년에야 마지막 지불이 이루어졌다. 2004년 독립 200주년을 축하하면서 라발라스의 대통령 장-베르트랑 아리스티는 이렇게 강탈한 배상금을 반환하라고 프랑스에게 요구했지만 그의 권리주장을 프랑스의 위원회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래서 미국의 자유주의자들이 미국 흑인들에게 노예제에 대해 배상할 수 있는 가능성을 숙고하는 동안, 프랑스의 자유주의자들은 노예상태에서 벗어나 자유를 받기 위해 지불해야 했던 엄청난 금액을 환불해달라는 아이티의 요구를 묵살했다. 처음에는 노예로서 착취당하고, 그 다음에는 힘들게 획득한 자유를 인정받기 위해 돈을 지불할 수밖에 없었다는 의미에서 이중으로 강탈당한 아이티의 요구를 말이다. p178~9 <민주주의는 죽었는가?> 」

 

 

아이티공화국의 현대사가 비록 빈곤과 독재와 혼란으로 점철되었다고 해도 그것이 제국주의 ‘백인국가’들이 바랐던 대로 아이티 혁명의 실패를 의미하지는 않았다. 『아이티혁명사』의 저자 듀보이스는 아이티혁명의 역사적 의의를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아이티혁명의 충격은 엄청났다. 역사상 성공한 흑인 혁명의 유일한 사례로서, 아이티혁명은 18~19세기의 정치적․철학적․문학적 흐름 가운데 가장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 아이티혁명은 온갖 피부색을 띤 모든 사람이 자유와 시민권을 누리는 사회를 만들어 냄으로써 영원토록 세계를 바꾸어 놓았다. 이 혁명은 아메리카에서 노예제 폐지의 핵심적 부분이었고, 따라서 인권을 위한 끊임없는 투쟁의 기초를 닦은, 인류의 민주주의 역사에서 결정적인 순간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모두 아이티혁명의 후예들이고, 또한 우리는 이 조상들에게 책임을 다해야 한다. p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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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불사조 - 이슬람국가IS의 정체와 중동의 재탄생 글항아리 이슬람 총서 2
로레타 나폴레오니 지음, 노만수.정태영 옮김 / 글항아리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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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를 공부하면서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 중에 하나가 이슬람세계이다. 전혀 몰랐던 세계여서 그렇기도 했고, 지금의 이미지와는 완전히 다르게 매우 관용적인 세계이기도 해서 그랬다. 또 아주 오랜 기간 아주 넓은 지역에 걸쳐 대제국을 수립했던 강대국이기도 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이슬람은 극단적인 자살테러나 일삼는 찌질한 세계가 결코 아니었다.

 

이번에 처음 치룬 세계사능력검증시험에도 IS 관련 문제가 나왔다. 현재 당면한 세계정세에 관해 네 문제나 나와 함께 시험 본 사람들이 모두 당황했다. 작년 겨울부터 흥미삼아 세계사 공부를 시작했는데 세계사도 한국사처럼 능력검정시험이 생긴다는 소식에 어차피 시작한 공부, 시험까지 가보자는 의견이 많아 시험을 목표로 공부를 했고, 지난 주말에 시험을 쳤다. 전반적으로 보자면 그렇게 어렵게 나오지는 않았고 EBSi 강의 수준에서 알뜰히 공부하면 크게 낭패하지 않을 수준이었다. 다만 예상보다 시사 문제가 많고 까다로웠다. 중국과 동남아시아 사이의 분쟁인 난사군도, 크림반도를 둘러싼 분쟁, 브렉시트, 시리아 내전과 IS에 관한 것이었는데, 크림반도가 가장 어려웠지만, 가장 복합적인 문제를 갖고 있는 지역은 역시 IS가 활동하고 있는 시리아 등의 중동지역이다.

 

우리 스타디 모임은 한국사 능력검정시험을 계기로 지난해 봄에 만든 것인데, 한국사를 끝내고 세계사까지 마쳤다. 각자 목표는 다르겠지만 시험이 최종 목표는 아니고 다들 늦게 해보는 공부가 재미있어서 모임을 지속하고 있다. 세계사를 끝내고 일단 합의한 다음 목표는 철학사에 도전하는 것이다. 역사, 문학, 철학, 이렇게 인문학의 세 분야를 겉이나마 조금 핥아보려는 것이 1차 목표인 셈이다. 목적은? 우리 삶을 조금 더 잘 이해해 보려고? ^^;; 목표가 무엇이든 목적이 무엇이든 간에, 일단은 매주 모여서 발표도 하고 토론도 하는 것이 재미있고 활력도 되기 때문에 다 늙어(?) 이 공부를 하고 있다. 남편이나 아이들이 도대체 무엇에 홀려 저러나 쳐다보고, 반찬에 소홀하다며 조금씩 짜증을 내는 것도 간단히 무시하고서 말이다.

 

철학이라는 난해한 학문에 도전하기 전에 일단은 세계지리를 훑어보기로 했다. 역사를 하다보면 지리가 필수적인데, EBSi의 세계지리 강좌를 찾아보니 지도만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인문지리라고 부르는지 모르겠지만, 세계 각지의 기후부터 인종, 종교, 문화까지 다양하게 구성되어 있어 세계사를 정리하는 차원에서도 유익할 것 같다. 여하튼 추석이 지나고부터는 세계지리를 두 세 달 하기로 했고, 그 사이 막간을 이용해서 시험에 나온 IS에 관해 조금 파 보기로 했다. 참 알뜰하기도 하다. ^^

어쨌거나 그렇게 해서 오늘 <이슬람 불사조> 란 책을 정리하게 된 것이다.

여기까지가 이 책을 읽게 된 배경;;;

 

 

2014년 6월에 쓰기 시작했다는 <이슬람 불사조>는 로레타 나폴레오니라는 이탈리아 출신의 중동 전문가가 IS에 관해 상세히 분석한 책이다. 이슬람세계의 분쟁은 날로 잔혹해지고 끊임없이 변화하기 때문에 2014년과 2016년의 상황은 또 다르지만 IS라는 조직이 어떻게 탄생하게 되었고, 어떻게 그렇게 빠른 속도로 다른 테러리즘 단체를 물리치고 이슬람세계의 최대 조직으로 떠올랐는가에 대해서는 이 책으로도 충분히 시대에 뒤처지지 않게 파악할 수 있는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IS의 탄생은 멀게는 7C 시아파와 수니파의 분화 시점까지 거슬러 올라가야하고, 비교적 가깝게는 1차 세계대전으로 오스만이 몰락한 중동지역에 서구열강이 자국의 이익에 따라 국경선을 인위적으로 긋는 과정을 짚어 보야 할 뿐 아니라 그 이후 민족과 종파 간의 갈등, 그 분쟁 속에 자라난 지하드조직 등이 너무나 복잡하게 얽혀 있어 여기서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기는 매우 어렵다. 다만 기억을 조금 더 붙잡아 두기 위해 두서없이 메모를 해 두는 수준에서 만족하려고 한다.

 

 

 

 

1. IS는 왜 이라크와 시리아에 둥지를 틀었는가?

 

시험문제에서부터 시작해 보자. 왜 IS는 시리아에서 이렇게 큰 문제가 되고 있는가?

IS에 관한 명칭은 계속 변화해 왔는데 한때는 ISI 혹은 ISIS로 불리었다. IS란 이슬람국가라는 뜻이고, ISI는 이라크 내의 이슬람국가, ISIS는 이라크와 시리아 내의 이슬람국가이다.

 

이라크와 시리아 두 국가는 모두 정권이 권력을 남용하고 민중들의 민주화 요구를 폭력적으로 진압하였다. 두 정권 모두 시아파 정권인데 수니파를 탄압하고 차별하여 수니파 민중들의 극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여기에 주변의 수니파 국가들이 시아파 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해 반군을 지원하면서 내전이 심화되었고, 이 혼란한 틈을 비집고 들어와 세력을 확장한 것이 IS이다. 강대국들은 모두 다 IS 척결을 외치고 있지만 실제로 미국은 수니파를, 러시아는 시아파를 지원하면서 IS를 제거한다는 명목 아래 각각 반대파의 공격에 더 열을 올리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해서, 이 지역의 IS 문제는 매우 복잡하게 얽혀있다. IS는 매우 영리하게도 이 상황을 적절히 이용해 가며 세력을 확장하고 있다.

 

2. IS는 어떻게 성장했나?

 

IS의 효시는 알 자르카위이다. 알 자르카위는 알카에다 이라크 지부의 수장이었다. 알 자르카위는 슈퍼테러리스트로 알려졌는데, 알 자르카위에 대한 신화는 다분히 미국이 만들었던 측면이 크다.

 

미국은 알카에다의 9.11.테러 이후 이라크를 공격했다. 사실 이라크는 알카에다와 아무 관련이 없었지만 미국은 이라크 침공 구실을 만들기 위해 알 자르카위의 전설을 만들었다. 알 자르카위를 알카에다와 이라크를 연결하는 고리로 이용했던 것이다. 미국이 이라크를 공격하여 후세인 정권을 붕괴시키면서 이라크는 권력의 진공상태가 되었다. 여하튼 알 자르카위는 2006년 미국의 공습에 의해 사망했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IS를 만든 것은 누구인가?

 

IS의 실질적 창시자는 알 자르카위 아래에서 성장한 알 바그다디이다. 2010년 알 바그다디가 알카에다 이라크 지부의 최고지도자에 오르면서 그 명칭을 이라크 이슬람국가 ISI라고 바꾸었다. (이전에도 이렇게 불린 적이 있었다.) 알 바그다디는 점차 인기가 떨어지고 있는 알카에다와 거리를 두면서 동시에 이라크의 시아파 정권이 수니파 주민들에게 인기가 없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시아파를 공격 표적으로 삼아 종파 간 갈등에 불을 지폈다.

 

하지만 아직까지 ISI는 미약했고 이라크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었다. 2011년 알 바그다디는 시리아 내전에 눈을 돌렸다. 시리아는 시아파 정권과 수니파 반군이 내전을 치르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시아파를 지원하는 중동국가들과 수니파를 지원하는 중동국가 그리고 시아파를 지원하는 러시아와 수니파를 지원하는 미국 사이의 대리전을 치르고 있었다. ISI는 이 대리전에 뛰어들어 주변국들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받았을 뿐 아니라 전쟁 기술까지 연마했다.

 

3. IS는 다른 테러리즘 조직과 어떻게 다른가?

 

IS는 알카에다에서 시작되었지만 알카에다와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알카에다는 머나먼 곳의 미국과 싸우느라 무슬림들이 살고 있는 영토 자체에는 무관심했다. 그러나 알 바그다디는 “중동 지역 안에 거대하고 강력한 영토라는 기반이 없으면 투쟁은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다는 알 자르카위의 신념에 공감했다.”

 

알 바그다디의 꿈은 시리아와 이라크를 지배하는 부패한 소수의 엘리트들 곧 시아파들을 상대로 정복 전쟁을 벌여서 바그다드 칼리프 국가를 부활시키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수 십 년간 지속된 전쟁에 대한 영구적인 해법에 목말라했다. 기존의 테러리즘 조직들은 이런 무슬림 민중의 요구에 무관심했다. 단지 내전에 뛰어들어 자신들의 세력을 확장하고 이권을 챙기는 것에 급급했다. 겉으로는 이슬람국가를 외쳤지만 실제로는 이슬람국가 건설을 위한 어떠한 청사진도 노력도 없었다.

 

그런데 IS는 진짜 이슬람국가, 그것도 7C 정통 칼리프 국가와 같은 이슬람 칼리프 국가에 대한 비전과 계획 그리고 실행력을 가지고 있었다.

 

IS는 정유지대를 확보하고 재정적 자립을 구축했으며 획득한 자원을 수니파 부족사회와 더불어 관리했다. 재정자립은 IS 대원들의 부패를 막을 수 있었고 주변국들의 지원에 휘둘리지 않고 독자적인 국가 건설을 수행해 나갈 수 있게 했다. IS는 정복지에 전기를 연결하고 학교를 만들고 예방접종까지 실시하며 주민들의 지지를 획득했다. 잔인한 자살 테러를 일삼는 IS지만 정복지에서는 법과 질서를 존중하고 정복지 주민들의 인정을 받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엄격한 살라피즘을 신봉하지만 누구나 살라피즘으로 개종하기만 하면 차별 없이 받아들였다. 아랍 지배자들의 부패에 지친 무슬림들에게 IS가 약속하는 이슬람 국가는 하나의 이상향이 되고 있는 것이다.

 

4. 살라피즘이란?

 

무함마드 이븐 압둘 와하브가 창시한 이슬람 종파이다. 와하브? 그렇다면 와하비즘과 어떤 관계일까? 살라피즘과 와하비즘을 같은 의미로 사용하는 사람들도 있어 보이는데, 대략 여러 글들을 종합해 보면 살라피즘이 좀 더 보편적인 의미인 것 같다. 살라피즘은 초기 이슬람 지도자들의 가르침인 코란과 순나를 글자 그대로 엄격하게 따르는 것을 추구한다. 즉 초기 이슬람 정신으로 돌아가자는 근본주의적 이슬람 개혁운동이다. 18C에 압둘 와하브가 주창한 이 운동은 아라비아반도에서 사우드 부족과 손을 잡으면서 와하브 운동으로 퍼져나갔다. 와하브의 종교적 이념을 바탕으로 사우드 부족이 아라비아 반도를 장악하면서 훗날 사우디아라비아의 모태가 되었다.

다시 말하면 넓은 의미의 살라피즘이 사우드 부족과 만나면서 와하비즘이 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현대의 살라피주의자들은 와하비즘을 경멸적으로 사용한다고 한다. 살라피즘은 더 순수한 의미를 지니면서 알 카에다와 같은 무장단체를 낳았다. IS가 신봉하는 것 역시 살라피즘이다.

 

5. IS의 궁극적 목표는 무엇인가?

 

IS의 목표는 중동의 재탄생이다. 즉 IS는 중동을 사이크스-피코 협정 이전으로 되돌리려 한다. 사이크스-피코 협정은 1916년 서구 제국주의가 중동을 분할하기 위해 비밀리에 맺은 협정이다. 오스만 제국이 쇠퇴하자 영국, 프랑스, 러시아는 오스만 제국의 영토를 자국의 이익에 따라 분할하면서 중동에 자의적인 국경선을 그었다. 영국은 현재의 요르단과 이라크 지역을, 프랑스는 지금의 시리아와 레바논 지역을, 러시아는 터키 동부 지역을 분할 점령할 계획을 세웠다. 이 협정은 영국의 벨푸어 선언과 함께 이후의 수많은 중동 문제를 야기한 화근이었다. 아랍은 무엇보다 종교적 종파와 부족이 우선이라는 사실을 도외시한 채 지도를 제멋대로 그려버린 서방은 어쩌면 지금 그 대가를 치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IS는 유대인이 이스라엘 국가를 건설한 것처럼, 중동지역에 서구가 멋대로 그린 국경선을 없애고 과거 이슬람 칼리프 국가의 영토에 근거하여 이슬람 수니파를 위한 칼리프 국가를 세우려하고 있다. 무함마드와 정통 칼리프 시대에 획득한 영토가 자신들의 정당한 땅이라는 주장이다.

 

칼리프 칭호를 획득한 알 바그다디는 무함마드의 권위를 계승하여, 칼리프의 이름으로‘현대 중동의 재탄생’을 약속하고 있다. 이것이 무슬림들이 IS를 지지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이다. IS는 단순히 과격한 테러조직이 아닌 것이다.

 

6. 왜 IS에 가담하는가?

 

중동지역 뿐만 아니라 서구에서 태어난 무슬림들도 IS에 가담하고 있다. 서구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이 자생적인 테러리스트들이다. 서구에서 성장한 그들이 왜 전근대적인 테러집단에 열광하는 것일까?

 

IS에 가담하는 행위는 중동 지역에서 고통 받고 있는 무슬림 형제자매들을 돕는 것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동기는 “중동에 새로운 정치적 질서를 세우고 (물론 어느 정도 인종청소를 벌인 뒤겠지만) 인종차별과 종파갈등이 없는 현대적 국가를 수립하는 대업에 참여한다는 것을 더없이 귀한 기회”로 여기기 때문이다. “부패하지도 않고 부패할 수도 없는 국가, 진정한 형제애로 가득한 국가, 서구 또는 서구화한 무슬림 여성들이 남자를 유혹하지 않는 사회, 명예를 고귀하게 여기는 국가, 신의 명령에 철저히 부합하는 현대국가”를 기대하면서.

 

 

 

<이슬람 불사조> 의 저자는 이슬람국가가 무슬림에게 가지는 의미는 이스라엘이 유대인에게 가지는 의미와 동일하다고 주장한다. 이런 이해 없이 IS를 단순한 테러단체로 간주하는 한 서구세계는 결코 중동문제와 테러리즘을 이해할 수도 해결할 수도 없다고 우려한다. 그렇다면 중동문제의 해법은 IS뿐일까?

 

9.11.이후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하면서 이라크에 권력 공백이 생기고 중동 각지가 극심한 혼란에 시달리면서 중동의 민중들은 서구적 민주화 운동 즉 ‘아랍의 봄’과 극단적 테러리즘인 ‘IS'를 모두 경험했다. 그러나 아랍의 봄은 실패했고 IS는 승승장구 중이다. 하지만 테러리즘이 해법일 수도 없고 해법이 되어서도 안 된다. 그렇다면 중동에 제3의 길이 있는 것일까? 저자는 간단히 ’교육, 지식, 그리고 정치에 대한 이해‘를 제안한다. 물론 글자 그대로 제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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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에서 조선후기의 유학을 공부하다 보면 어려운 용어들이 많이 나옵니다.

성리학이란 것도 말만 많이 들어봤지 이 학문의 요체에 대해서는 전혀 모른다고 해야 할 텐데요. 게다가 양명학이니 실학이니, 理니 氣니, 인성이니 물성이니 따위가 보태지면 정말 외우기 위해서 뜻도 모르는 단어들을 디립다 외우고 있다는 자괴감이 듭니다. 인터넷 뒤져서 몇 줄 읽어 본다고 알 수 있는 차원은 아니지만, 수박 겉핥기라도 해봐야지 하는 마음으로 대충 정리해 보았습니다. 개념 정리라기보다는 용어 정의라고 해야 맞을 텐데요. 그것도 제가 이해할 수 있는 수준에서 대~충 해 보았습니다. 당연 정확하지는 않고, 다만 기억하는 데에 도움이 될 수 있기를 바라면서 말입니다.

 

 

 <EBSi 최태성의 고급 한국사>

 

성리학의 교조화와 그 대안학문의 대두

 

성리학은 공자의 사상 즉 유학에 대한 일종의 해석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공자를 주희가 자기 나름으로 해석하고 체계화한 것이지요.

이 성리학이 조선의 건국이념이 되면서,

성리학이 마치 유학의 전부인양 인식되게 됩니다.

그런데 양란을 거치며 성리학적 가치관이 붕괴되기 시작합니다.

급변하는 경제적, 사회적 변화를 성리학으로 설명하거나 통제하기 어려워진 것입니다.

 

당연하게도 이론이 현실과 맞지 않을 때 이론에 대해 의문을 갖게 됩니다.

물론 현실을 이론에 꿰어 맞추려고 고집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만,

낡은 이론이 언제까지나 현실을 가둬두지는 못합니다.

 

성리학에 의문을 품은 양반들이 자연스럽게 들여다 보려한 것은 무엇일까요?

성리학이 해석한 그 원본, 바로 공자의 유학이 아닐까요?

남인의 윤휴, 소론의 박세당 같은 사람들이

원래의 유학, 즉 주자가 해석하기 전의 원시유학으로 돌아갑니다.

이걸 가지고 송시열을 필두로 한 노론이 '사문난적' 이라는 딱지를 붙였다는 겁니다.

성리학이라는 색안경을 벗는 사람을 '사문난적'으로 매도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문난적 斯文亂賊의 '斯文', 즉 그 문화는 원래 성리학이 아닙니다.

이 말은 논어에 나오는 공자의 말입니다. 공자는 BC 6세기 인물입니다.

斯文은 공자가 숭앙했던 주나라의 문왕과 주공이 만들어냈던 학문과 사상을 의미합니다.

그러니 사문난적은 공자가 모범으로 삼은 주나라의 학문과 사상 혹은 공자의 학문과 사상을 어지럽히는 무리들이어야 합니다.

이것을 왜곡하여 조선의 선비들은 공자가 아니라

주자의 성리학에서 벗어나는 모든 학문과 사상을 사문난적으로 몰아간 것입니다.

마치 주자가 곧 공자라는 듯이요.

하지만 공자는 주자가 아니지요.

 

 

양명학

 

명나라 말기에 중국에서도 성리학에 의심을 품은 학자들이 등장합니다.

그 중 왕수인이라는 사람이 유학을 새롭게 해석한 것이 양명학입니다.

양명학이 무엇인가를 제대로 알기는 어려울 것 같고요.

간단히 말하자면 이렇습니다.

 

성리학과 양명학은 모두 유학을 해석한 학문입니다.

유학의 유파들이라고 보면 되겠지요.

둘의 공통점은 인간은 성인에 이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황과 이이도 왕이 성인이 되는 방법을 놓고

<성학십도>와 <성학집요>를 각각 저술하지 않았습니까.

 

성리학이 강조하는 것은 독서입니다.

성인이 되려면 스스로하든 신하의 도움을 받든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는 거지요.

이에 반해 양명학은 마음의 수양이 중요하다고 합니다.

이미 인간의 마음에는 성인의 싹이 있기 때문에 그것이 발현되도록

수양하고 실천만하면 된다는 거지요.

즉 성리학은 先知後行을, 양명학은 知行合一을 강조합니다.

성리학은 性卽理, 양명학은 心卽理라고도 그 요체를 설명합니다.

그렇다면 性은 무엇인가부터 따져야겠지만 능력 밖의 일입니다.

다만 아래 소개하고 있는 칼럼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이(理)는 우주의 질서·법칙이자, 만물에 깃들어 있는 형성의 원리이기도 했다. 우주의 질서가 하나하나의 사물에 내재한다는 대담한 설정으로 인해, 인간의 본성은 하늘의 이치인 천리(天理)와 연결되었다. 이것이 ‘성즉리’(性卽理)이니, 성리학이란 명칭은 여기서 기인했다."

 

무슨 소리인지 잘 모르겠지만 일단 첨부해 둡니다.

우리가 배우는 한국사의 수준에서는

이해 못하는 것이 오히려 당연할 것입니다.

저 구절을 이해하면 아마도 동양철학이 될테지요.

 

여하튼 우리나라의 양명학은 정제두에 의해 정리, 활성화되었습니다.

강화도에는 유배 간 양반, 종친들이 많았다고 하지요.

정제두도 강화도에 들어가서 양명학을 퍼뜨렸습니다.

그래서 강화학파라고도 합니다.

 

어쨌거나 이렇게 정리하고 나니,

성리학의 대안 학문으로 대두했다는

양명학과 실학은 완전히 다르구나 하는 감이 듭니다.

 

 

실학

 

양명학이 여전히 철학의 냄새를 풍긴다면,

실학은 요즘으로 치면 경제학, 과학, 사회학, 농학 등에 더 가깝습니다.

실학을 대표하는 용어 두개만 비교해 보겠습니다.

 

실학은 크게 중농학파와 중상학파로 나뉩니다.

중농학파는 경세치용, 중상학파는 이용후생을 캐치프레이저로 내걸고 있지요.

 

중농학파는 당쟁에서 패배한 남인들이 낙향하거나 유배 가서 보고 느낀

농업의 문제점을 해결하려 한 것입니다.

그래서 균전론, 한전론, 여전론 등 토지분배를 어떻게 해서

자영농을 어떻게 육성해야 하는가에 초점을 맞춥니다.

농민이 국가의 근본이니까요.

 

경세치용經世致用 은 經世와 致用입니다.

經世는 세상을 경영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을 경영하기 위해 토지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것이지요.

致用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적절한 제도와 방법을 갖추고 실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로만이 아니라 쓸모 있는 행동을 해야 한다는 뜻 일 테지요.

아직은 약간 형이상학적인 냄새가 나지만,

성인이 되기 위해 운운하는 그런 것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대지주가 차지한 토지를 어떻게 해서 자작농들에게 분배할 수 있는가를

핵심적으로 고민하고 있으니까요.

 

중상학파는 한걸음 더 나아갑니다.

중상학파는 유학파지요.

청에 유학을 갔다 온 노론의 자제들이 핵심이라 북학파라고 합니다.

역시 예나 지금이나 권세가 있고 돈이 있어야 유학도 가고,

거기서 선진사상과 선진문물을 배워올 수가 있습니다.

말하자면 강남좌파쯤 된다고 할까요?

 

중상학파의 표어는 이용후생利用厚生 입니다.

利用. 이익이 되는 것을 이용하여,

厚生. 삶을 두텁게, 윤택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것이 과학기술과 경제학이지요.

선박이나 수레를 사용해야 한다.

절약이 아니라 소비가 미덕이다.

화폐를 많이 사용해야 경제가 살아난다.

농업이든 상업이든 공업이든 다 중요하고 전문화되어야 한다, 등등...

 

이쯤 되면 확실히 성리학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북학파가 탄생하기 전 집권 세력의 내부에서 논쟁이 있었다는 사실도 나오지요.

 

 

 

인물성동이 논쟁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까지 130여 년 간 청은 강건성세의 치세를 맞습니다. 청나라에 다녀온 사신 등을 통해 오랑캐의 이 발달한 문물이 전해지고 조선은 일대 가치관의 혼란을 겪게 됩니다. 오랑캐가 어떻게 저런 문화를!!

이 때 등장하는 논쟁이 그 이름도 생소한 인물성동이 논쟁입니다.

 

人性과 物性이 같은가, 다른가를 놓고 오랜 기간에 걸쳐 치열한 논쟁이 전개됩니다. 이걸 호락논쟁이라고도 합니다. 호(호서), 즉 충청도 노론과 낙(낙양), 즉 서울 노론이 갈라져 논쟁을 했기 때문입니다. 이 논쟁이 일어났다는 것 자체가 청의 문물이 엄청나게 발달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이제 남은 것은 비록 오랑캐의 것이나 이 선진 문물을 배워 따를 것인가 끝까지 거부할 것인가 입니다.

 

시골 양반들은 대체로 보수적이지요.

충청도 노론도 보수적이겠지요, 아마.

“청의 문물이 발달했다는 것은 인정하겠다.

그러나 물성과 인성은 다르다.

인간과 금수가 어찌 같겠는가?

아무리 발달했다고 하나 금수의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

뭐 이런 말이 아닐까요?

이 시골 양반들이 나중에 위정척사파가 됩니다.

 

반면 서울 양반들은 시류에 민감합니다.

“문물이 발달했으면 그만큼 인간도 성숙하다는 것이다.

물성이든 인성이든 본성은 같다.

본성이 다만 때에 따라 人으로 혹은 物로도 발현되는 것이다.

문물이 발달했다는 것 자체가 훌륭한 본성을 의미한다.

고로 청의 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

정도로 대충 이해해도 되지 않을까요?

여하튼 낙론은 북학파로 발전하고 개화파로 이어집니다.

 

인물성동이 논쟁에 관해 아주 상세하게 연재한 칼럼을 찾았습니다.

조금 어려운 감도 있고 읽어도 여전히 잘 모르겠지만

꽤 재미있는 부분도 많습니다.

 

총 20편이나 되는데 그 중

 

10회 ‘오랑캐’도 윤리적 존재…청의 융성, 논쟁 지피다

16회 그에 이르러 이성으로서 조선 철학의 정점을 찍다

꼭 한 번 읽어 볼 만합니다.

 

4회 호락논쟁, 성리학의 난제에 대한 조선학자들의 응답

성리학에 관한 이해에 도움이 되니, 어렵지만 참고할만합니다.  

 

<이경구의 조선, 철학의 왕국 -호락논쟁 이야기> 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이 칼럼의 총 리스트는 다음과 같습니다.

 

20. 서로 해치지 않고, 어긋나지 않는 길을 찾아서

19. 아내는 낙론, 남편은 호론 “부부가 대단한 기세로 싸웠다”

18. 창조적 해석은 차단되고 철학은 힘을 잃었다

17. 세상사를 말할 수 없으니, 아아 입이나 다물자

16. 그에 이르러 이성으로서 조선 철학의 정점을 찍다

15. 모두가 논쟁의 옳고 그름보다 이익을 따졌다

14. “이이의 제자들과 성혼의 제자들이 원수가 되고, 송시열의 자손과 송준길의 자손이 원수가 되었다”

13. 왕실 척신들 간의 권력투쟁과 엮인 철학논쟁

12. 세계관 가른 “타자를 어떻게 볼 것인가?”

11. “임진·병자 전쟁 순국자 애도를 ‘개가 짖는가’ 여긴다”

10. ‘오랑캐’도 윤리적 존재…청의 융성, 논쟁 지피다

 9. “독서에 뜻을 두면 나이 귀천에 상관없이 입학을 허한다”

 8. 주자 무오류 이념의 바벨탑 쌓은 ‘제2의 송시열’

 7. 낙론 대학자들이 사도세자 성균관 입학식에 대거 참석한 이유

 6. 호론 중용한 영조와 한원진의 동상이몽 

 5. 노론, 경종에 세자 대리청정 요청했다 피바람 불러

 4. 호락논쟁, 성리학의 난제에 대한 조선학자들의 응답

 3. 한산사 이어 편지 논쟁, 스승들 개입으로 학파 갈라져

 2. 이간의 한산기행, 호락논쟁의 서막을 열다

 1. 호락논쟁, 유교 시스템을 허무는 원심력의 시작

 

이 연재는 조선 후기에 학계를 달구었던 호락논쟁(湖洛論爭)에 대한 것이다. 호락논쟁? 한국사에 관심 많은 독자에게도 이 용어는 조금 생소할 듯하다. 호락논쟁은 18세기 초반에 시작해서 19세기까지 진행되었던 철학 논쟁이었다. 당시 주류로 부상하고 있던 노론 학자들이 주인공이었는데, 대체로 충청도와 서울을 기점으로 의견이 갈렸다. 충청도의 다른 이름이 호서(湖西), 서울의 다른 이름이 낙양(洛陽)이었으므로 두 진영은 각각 ‘호론’과 ‘낙론’으로 불리게 되었고, 따라서 이름도 호락논쟁이 되었다.

 

호락논쟁은 16세기 중반에 이황, 이이 등이 전개하였던 ‘사단칠정(四端七情) 논쟁’, 17세기 후반 왕실의 복제(服制) 논쟁이었던 ‘예송’(禮訟)과 함께 조선의 3대 논쟁으로 꼽히기도 한다. 큰 비중에도 불구하고 인지도가 낮은 것은 사용된 개념과 논리가 난해하고, 시기도 길었으며, 철학 말고도 다른 변수들이 얽혀 복잡했기 때문이리라. 두툼한 분량의 한국사 개설서에서나 접할 수 있는 이 따분하고 현학적인 논쟁이 지금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경구는

서울대학교 국사학과를 나와 같은 학교에서 조선 후기의 사대부 가문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조선 후기 정치와 사상, 지식인 등에 관해 연구했으며, 지금은 한림과학원에서 동아시아 근대를 만든 개념들의 역사를 다양한 전공자들과 함께 공부하고 있다. <조선후기 안동 김문 연구> <17세기 조선 지식인 지도> <조선후기 사상사의 미래를 위하여> <17세기, 대동의 길>(공저)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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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 세계사를 공부할 때는 무엇보다 큰 그림을 그리는 것이 필요한 것 같다.

        사실 한무제가 장건을 대월지에 보냈다는 둥, 도편추방제를 클레이스 테네스가 했다는 둥 하는 것들은 지엽적인 것이다.  

        4대 문명에서 시작한 인간의 역사가 지역별로 어떻게 발전해 왔는지,

        서로 어떤 관련을 갖고 있는지,

        그것들이 현재 우리의 모습을 어떤 방식으로 만들어 왔는지를

        큰 흐름 속에서 파악하는 것이 역사 공부의 첫 걸음이 아닌가 싶다.

        그런데 세계 각 지역의 생소한 이름들과

        이것이 저것 같고  저것이 이것 같은 왕조들의 난립을

        한참 공부하고 나면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 되버린다.

         

        오늘은 머리에 든 것을 정리하며 새로운 연표를 만들어 보았다.

        그려놓고 나니 단순해 보이는데, 꽤나 끙끙거리며

        책과 자료들을 앞뒤로 뒤적이며 완성했다.

        약간 뿌듯하기도 하다. ^^;;

         

         

         

         

        크게 중국과 유럽 그리고 서아시아와 인도로 나누어 그려보았다.

        연도를 모두 외우는 것은 매우 힘들뿐 아니라 어쩌면 멍청한 짓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당나라의 장안에서 이백이 양귀비를 칭송하는 시를 짓고 있을 때 바그다드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었는지, 유럽은 어떤 시대를 맞고 있었는지 정도는 머리에 넣어두어야  세계사를 조금이라도 공부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위 아래로 각 지역을 맞춰 볼 수 있게 가능하면 연대를 맞추어 그리려고 했다.

         

        각 지역마다 역사의 발전 모습은 다르다.

         

        중국은 비록 한족과 유목민족이 번갈아 가며 왕조를 세우기도 하고 서로 싸우기도 했지만, 대체로 왕조의 교체에 연속성이 있고 한 시대에 한 왕조가  중국을 다스렸다. (송나라 때 요에 이어 금과 공존한 경우도 있지만) 우리와 비슷하기 때문에 아주 익숙한 형태이기도 하다. 그래서 중국을 기점으로 다른 지역의 왕조나 사건을 기억하면 매우 편리하다.

         

        인도에서는 드넓은 대륙을 통치하는 강력한 통일 왕조가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이  반복되었다. 100~200년 정도 한 왕조가 장악하고 나면 분열기가 와서 여러 왕조가 난립하다가, 또 다시 강력한 왕조가 100여년 정도 지배하고, 또  분열기가 오고, 하는 식이다. 거의 16세기가 될 때까지 이런 패턴이 지속되다가 1526년 무굴 제국이 통치하면서 근대까지 이어진다. 근대는 대부분의 아시아 국가들이 그러했듯 서양 제국주의 국가의 식민지 통치를 겪는 과정이다. 인도는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다가 2차세계대전 이후 독립하였다. 

         

        서아시아는 아주 역동적이다. 7세기까지는 조로아스터교를 믿는 페르시아계가  연이어 제국을 세웠고, 7세기 중반부터는 이슬람세력이 서아시아를 지배하였다. 처음에는 아랍인들이 세운 이슬람 왕조가 이어졌으나,  11세기부터는 현재 터키의 조상인 튀르크족이 이 지역을 차지하고 이슬람 왕조를 이어나갔다. 대제국을 경영하고 유럽을 위협했던 오스만제국(오스만 튀르크)도 근대에 이르러 유럽에 의해 쇠퇴하다가 1차 세계 대전 이후 여러 민족들이 독립해 나가고 현재의 터키로 재탄생하였다.

         

        유럽은 그리스-헬레니즘-로마를 거치면서 동서로 쪼개졌다. 서로마제국은 현재의 서유럽으로 발전하고 동로마제국은 현재 동유럽과 그리스 지역 등에서 중세 천년을 지속하였다. 서유럽은 이후 여러 국가로 분화되어가며 현재 유럽의 모습을 갖추어 나갔다. 콜럼부스로 대표되는 신항로개척의 시대를 맞아 그때까지 아시아에 비하면 말할 수 없이 낙후되었던 유럽이 드디어 세계 역사를 주도하게 되었다. 시민혁명과 산업혁명을 이루고 제국주의 국가로 탈바꿈한 서유럽은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침략하였으며 식민지 쟁탈전의 와중에 1,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다.  

         

        양차 대전후 유럽의 패권은 미국으로 넘어갔으나 서구 문명은 현대 사회의 사상적, 물질적 토대가 되어 지금까지도 우리의 삶을 규정하고 있다.  

         

        첨부 : 예전에 그려 올린 적이 있는 동아시아 연표도 한번 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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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냉전과 냉전의 해체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냉전은 2차 대전의 종식과 함께, 어쩌면 훨씬 전부터, 시작되었지만 냉전을 공식화한 것은 1947년 3월의 트루먼 독트린이다. 미국 대통령 트루먼은 “오늘날 세계의 모든 국민들은 두 가지 생활양식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도록 강요받고 있다.”고 하면서 그리스 내전에 적극 개입하였다.

         

          

          <EBSi 이다지의 세계사>

         

         

        그리스는 2차 세계대전 중 좌•우 두 세력 모두 독일과 투쟁하다가, 독일이 물러가면서 좌•우가 본격적으로 대립하였다. 여기에 영국과 미국, 사회주의 국가들이 개입하면서 그리스 내전은 전후 최초의 이념전쟁 혹은 냉전의 전초전이 되었다. 6.25전쟁과 비슷하게 그리스 내전은 국토의 파괴와 대량살상 뿐 아니라 민족 간의 이념 갈등이라는 깊은 상처를 남겼다. 미국의 개입으로 그리스와 터키는 공산화 되지 않았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2 p225>

         

         

        소련은 연방수립 이후 경제개발 계획을 통해 빠르게 성장하였고, 주변 국가들에 경제적, 군사적 지원을 하였다. 특히 2차 세계대전 중 소련군이 동유럽 지역의 독일군을 몰아내면서 동유럽은 소련의 세력권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동유럽 국가들은 공산당 일당 독재의 사회주의 국가를 수립하였고, 소련은 원조를 빌미로 동유럽에 대한 간섭을 강화하였다.

         

         

          <EBSi 이다지의 세계사>  

         

         

        사회주의 세력의 확장을 두려워 한 미국은 서유럽의 경제를 부흥시켜 사회주의 세력이 확산되는 것을 막으려고 하였다. 트루먼 독트린 이후 곧바로 미국은 경제 원조 정책인 ‘마셜 계획’을 발표하였다. 이에 대항하여 사회주의 세력은 코메콘과 코민포름을 결성하였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그 결과 동유럽과 서유럽은 ‘철의 장막’에 의해 사회주의 세계와 자본주의 세계로 나뉘게 되었다. 각 진영은 독자적인 군사기구도 마련하여 대립을 첨예화하였다. 자본주의 진영은 NATO, 즉 북대서양조약기구(녹색)를, 사회주의 진영은 WTO 즉 바르샤바조약기구(적색)를 결성하였다.

         

        『역사 고전 강의』에서 강유원은 현대사의 가장 중요한 사건을 마셜 플랜으로 설명하고 있는데, 그 내용을 조금 읽어보자.

         

        「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역사는 한마디로 미합중국의 패권이 관철되고, 각국의 정치적 경제적 구조가 전면적으로 재편되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현대사에서 가장 중요하게 거론해야 할 것은 마셜 플랜(유럽 부흥 계획)입니다. 미합중국은 돈을 써서 패권을 장악했고 그 출발점이 바로 마셜 플랜이었습니다. 미합중국은 1947년 7월부터 4년에 걸쳐 130억 달러를 유럽에 제공한 대가로 유럽 국가 간의 관세 철폐를 요구하고 -이것이 유럽 경제 통합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과 국제통화기금IMF을 만들어 전후 경제체제를 성립시켰습니다.

           마셜 플랜은 복지의 차원에서 실시한 것이 아닙니다. 미합중국은 경제적 지원의 대가로 유럽 정부에 노동운동 저지를 요구했습니다. 미합중국과 유럽을 하나로 묶어서 중심부 블록을 형성하고 그 안에 있는 개별 국가의 정치 경제 시스템을 재구조화한 것입니다. 이때부터 유럽 여러 나라에서는 국가 공권력이 기업과 노조의 이해관계를 조정하였습니다. 또한 유럽 국가들은 완전고용 시행과 사회보장 확대를 추진하는 이른바 유럽형 복지를 시작했습니다. 이에 발맞춰 노동운동은 사회혁명을 포기하고 노조의 지위를 법률상으로 인정받는 데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노동자계급은 일정한 배당금을 받는 대가로 기업의 생산성 향상에 협력했고, 자본가계급의 동반자의 위치에 자리 잡았습니다. 이것이 코포라티즘 즉 담합주의라고 합니다. p464~5 」

         

        마셜플랜을 대가로 미국이 수립한 경제체제를 브레튼우즈 체제라고 한다. 1945~1973년 사이를 ‘전후 자본주의의 황금기’라고 하는데 브레튼우즈 체제와 혼합경제 체제가 황금기를 이끈 주요 요소라고 보는 시각이 있다. 『장하준의 경제학 강의』에서 그 내용을 찾아볼 수 있다. 물론 2차 대전을 치르며 쌓인 기술들과 재건 사업도 주요 요소 중 하나이다.

         

        「   1944년 미국 뉴햄프셔주 브레튼우즈에서 회동한 2차 대전 승전국들은 전후 국제 금융 시스템을 주도할 두 개의 중요한 기관을 설립했다. ‘브레튼우즈 기구’라는 별명을 얻게 된 이 두기관은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으로 더 잘 알려진 국제부흥개발은행IBRD이다.

           IMF는 국제 수지 위기를 겪는 국가들에게 단기 자금을 제공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국제 수지 위기는 한 나라가 다른 나라로부터 받는 돈보다 그들에게 지급할 돈 이 훨씬 많아 아무도 더 이상 그 나라에 돈을 빌려 주지 않을 때 생긴다. 그렇게 되면 보통 금융 공황이 닥치고 심각한 불황이 뒤를 잇는다. 이런 나라들에 비상 대출을 해 줌으로써, IMF는 위기에 봉착한 나라가 어려움을 극복하고 부작용을 최소화하도록 돕는 것이다.

           세계은행은 ‘프로젝트 대출’을 위해 만들어졌다. 댐 건설 등의 특정 프로젝트에 쓸 돈을 빌려 주고, 민간 부문 은행보다 더 긴 상환 기간 혹은 더 낮은 이자율을 제공하기 때문에 세계은행에 돈을 빌리는 나라들은 더 공격적인 투자를 할 수 있다.

           전후 경제 체제의 세 번째 버팀목은 1947년 서명된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 협정GATT이었다. 1947년에서 1967년 사이 GATT는 ‘라운드’라고도 부르는 협상을 여섯 차례 주도해 주로 부자 나라들의 관세를 삭감하는 데 성공했다. 경제 발전 단계가 비슷한 나라들 사이에 관세를 삭감하자 시장이 더 넓어지고, 그 결과 경쟁이 더 치열해지면서 생산성이 향상되는 긍정적인 효과가 생겼다. (......)

           그러나 자본주의 황금기의 원인에 대해 가장 영향력 있는 설명은 경제 정책과 제도를 개혁해 혼합 경제 체제를 탄생시키고 운용했기 때문이라는 이론이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장점을 섞었다는 의미이다.

           대공황 이후 자유방임주의적 자본주의로는 한계가 있다는 사실이 널리 받아들여졌고, 규제되지 않은 시장의 결함에 대처하기 위해 정부가 능동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는 데에 합의가 이루어졌다. 이와 동시에 2차 대전을 치르는 동안 실시되었던 경제 계획이 성공을 거둔 것을 목격한 후 정부 개입의 실효성에 대한 회의적인 태도가 많이 줄어들었다. 또 많은 유럽 국가에서 파시즘에 맞서 싸우는 데 큰 역할을 한 좌파 성향의 당들이 선거에 승리해 복지 국가와 노동권 보장을 더 강화했다. p86~8」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는 정치체제는 물론 경제체제, 군비체제에서도 치열한 경쟁을 일삼았고 세계 곳곳이 언제 터질지 모르는 격전장이 되어갔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2차 대전의 패배로 연합국에 의해 분리점령 당한 독일, 특히 베를린은 소련에 의한 베를린 봉쇄에 이어, 동독에 의해 베를린 장벽이 세워지기까지 했다. 대한민국의 6.25전쟁은 말할 것도 없이 동서 진영의 열전, 냉전이 폭발해 열전으로 바뀐 전쟁이었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2 p210>

         

          

        1962년 쿠바 미사일위기는 세계를 핵전쟁에 휘말리게 할 아찔한 순간이었다. 소련이 미국의 앞마당인 쿠바에 비밀리에 미사일 기지를 만들고 있었고, 이를 감지한 미국이 미사일을 철수하지 않으면 쿠바를 공격하겠다고 선언했다. 이 위기는 소련의 흐루시초프와 미국의 케네디가 편지를 주고받으며 슬기롭게 해결되었다. 흐루시초프는 미사일을 철수했고 케네디는 승리를 주장하는 어떤 발표도 하지 못하도록 하여 소련의 체면을 세워주었다. 또한 터키의 미국 미사일 기지에 대한 철수 명령도 내렸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2 p248>

         

         

        미국과 소련의 평화로운 해결을 이끌어 낸 것은 ‘두려움’ 이었다. 수백만 명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 문명 자체의 운명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잃어버린 대의를 위하여』에는 흐루시초프가 카스트로에게 보낸 편지가 실려 있는데, 왜 흐루시초프가 철수 결정을 했는지 알아 볼 수 있다.

         

        「10월 27일 전신에서 당신은 우리가 적의 영토를 향한 최초의 핵공격에 착수할 것이라고 제안했다. 물론 당신은 그것이 어떻게 진행될지 알고 있다. 그것은 단순한 공격이 아니라 세계적인 핵전쟁의 시작일 것이다. 친애하는 피델 카스트로 동지, 비록 나는 당신의 동기는 이해하지만 당신의 제안이 부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핵전쟁이 발발할 수도 있는 가장 위험한 순간을 살고 있다. 확실히 그 경우 미국은 엄청난 시련을 겪을 것이다. 하지만 소련과 다른 사회주의 진영 역시 막대한 고통을 겪을 것이다. 쿠바가 문제인 한, 이것이 어떤 의미를 지닐지 일반적인 차원에서 말하기는 어렵다. 의심할 여지없이 쿠바 인민들은 용감하게 싸울 것이며 영웅적으로 죽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죽기 위해서 제국주의와 투쟁하는 게 아니라, 우리의 모든 가능성들을 향상시키기 위해, 투쟁 속에서 좀 덜 상실하고 극복 속에서 좀 더 많이 얻어서 공산주의의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서 투쟁하는 것이다. p326 」

         

        그러나 인류절멸이 아닌 한나라의 수많은 사람들의 절멸에 대한 두려움은 없었던 것일까? 베트남은 통일의 목전에서 미국의 개입에 의해 길고 끔찍한 전쟁을 다시 시작해야 했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2 p253>

         

         

        1954년 베트남은 프랑스를 물리치고 총선에 의한 통일국가 수립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그런데 미국이 끼어들어 공산당이 지배하는 북베트남과 친미 정권이 지배하는 남베트남으로 분단되었다. 남베트남에서는 친미 정권에 대항하는 게릴라전이 벌어졌고, 미국은 북베트남이 이들을 지원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북베트남에 폭격을 퍼부었다. 1965년 베트남 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미국의 ‘명분 없는 전쟁’에 우리나라도 끌려들어갔다. 미국의 요청에 의해 군사적, 경제적 지원을 대가로 베트남에 파병을 하였다. 국제사회는 국군을 미국의 용병으로 인식하였다. 명분 없는 전쟁은 명분이 있는 베트남의 승리로 끝나고 1976년 베트남에는 통일된 ‘사회주의 베트남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냉전의 완화는 베트남 전쟁으로부터 비롯되었다. 1969년 7월 닉슨은 “길지 않은 기간 동안 미국은 세 번이나 태평양을 건너 아시아에서 싸워야 했다. 일본과의 태평양전쟁, 한국전쟁, 그리고 아직도 끝이 나지 않은 베트남 전쟁이 그것이다. 2차 대전 이후 아시아처럼 미국의 국가적 자원을 소모시킨 지역은 일찍이 없었다. 아시아에서 미국의 직접적인 출혈은 더 이상 계속되어서는 안 된다”고 선언하였다. 이것은 아시아에 대한 미국 군사개입의 축소와 함께 전 세계적 데탕트를 의미하였다.

         

         

         <EBSi 이다지의 세계사>  

         

         

        1969년에는 미•소 사이에 전략무기 제한 협정이 체결되었고, 1972년에는 소련과 적대적이던 중국이 고립을 피하기 위해 미국과 화해, 1979년에 미•중 수교가 체결되었다. 1972년에는 우리나라도 북한과 7.4 남•북 공동 성명을 발표하였다. 남북 모두 데탕트 분위기에 밀려 평화통일 3대 원칙에 합의하였으나, 실제로는 독재체제 강화에 이용했을 뿐 통일을 위한 노력에는 관심이 없었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2 p271>

         

         

        소련의 해체와 동유럽 사회주의 세력의 붕괴는 1985년 고르바초프의 개혁 정책에서 시작되었다. 물론 1950년대 흐루시초프 시대부터 개혁에 대한 시도가 있었지만 실패하였다.

         

          <EBSi 이다지의 세계사>  

         

         

        고르바초프는 ‘더 많은 사회주의를, 더 많은 민주주의를!’ 이라는 구호를 내걸고 페레스트로이카(개혁) 정책을 실시하였다. 일당 독재를 완화하고 시장 경제를 도입하려 하였다. 그러나 글라스노스트(개방)는 공산당과 국가에 대한 불신을 더 깊게 만들었고 개혁을 둘러싼 내부 갈등이 깊어갔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2 p276>

         

         

        1991년 소련 공산당은 고르바초프의 개혁에 반발하여 쿠데타를 일으켰다. 러시아 공화국 옐친은 민중을 이끌고 공산당의 쿠데타를 막아내었다. 공산당은 해산되었고 옐친 대통령의 러시아 공화국을 비롯한 여러 공화국이 소비에트 연방을 탈퇴하고 따로 독립 국가 연합을 결성하였다. 마침내 소련이 해체된 것이다. 1922년 탄생한 인류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 소련이 70년 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2 p272>

         

         

        고르바초프의 개혁을 전후로 동유럽의 국가들도 소련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도입하기 시작했다. 1989년 11월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고, 1990년 동독은 자유 총선거를 실시하여 서독과의 통일에 조인하였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다음 달인 1989년 12월, 미국의 부시 대통령과 소련의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정상회담을 갖고 냉전의 종식을 공식적으로 천명한 몰타 선언을 발표하였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2 p277>

         

         

        냉전이 끝났다고 세계에 평화가 찾아온 것은 아니었다. 한편으로 냉전의 종식은 그 동안 억눌려 왔던 종족 간 종교 간 갈등을 폭발시켰다. 유고슬라비아의 민족 분쟁은 보스니아, 코소보 등에서 ‘인종 청소’의 비극을 일으켰다.

         

         

         

         

         

        다극화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양차 세계대전은 제국주의 국가들 간의 전쟁이었다. 제국주의 국가들은 전쟁 기간 중 독립을 약속하고 아시아•아프리카 식민지를 이용했지만, 전쟁이 끝나자 독립을 외면하거나 도리어 탄압을 가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고도 전쟁이 끝나자마자 미소 양 체제로 나뉘어 아시아•아프리카 나라들을 자신들의 편으로 줄 세우려 들었다.

         

        여기에 맨 먼저 반기를 들고 나선 것이 인도와 중국이었다. 인도의 네루와 중국의 저우언라이는 이념을 초월해 인류 평화를 위해 협력할 것을 호소하였다. 1954년의 콜롬보 회의는 평화 5원칙을 발표하였고, 이듬해인 1955년에는 아시아•아프리카의 29개국 대표가 인도네시아 반둥에서 만나 평화 10원칙을 발표하였다. 이 회의를 통하여 아시아•아프리카는 서로 연대하기로 합의하였고, 이런 자신감을 토대로 아시아•아프리카에서는 독립의 열기가 분출하였다. 아시아•아프리카의 이런 자각은 미국과 소련 중심의 냉전 질서에 큰 타격을 주었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2 p236>

         

         

        비동맹 운동에 관한 공부를 통해 새롭게 알았던 사실은 우리나라가 제3 세계 국가가 아니라 제1 세계 국가라는 사실이다. 이제껏 무심하게 혹은 무식하게 나는 우리나라를 제3 세계 국가라고 표현해 왔는데, 우리나라가 제1 세계라니!!! 그리고 제1 세계가 선진 자본주의를 뜻하는 말도 아니었다. 나는 제3 세계는 가난한 개발도상국인 줄로만 알았다. 제1 세계는 냉전체제에서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자본주의 국가들의 패거리를 의미하는데, 우리나라는 말하자면 미국의 꼬붕인 셈이다. -.-.;; 제2 세계는 소련과 그 패거리들이고. 사실 우리나라는 6.25 전쟁 이후 한-미-일 삼각 체제 안에 꼭 묶여있다.

         

         

        냉전체제라고 해서 자본주의 국가는 모두 미국을 중심으로, 사회주의 국가는 모두 소련을 중심으로 똘똘 뭉친 것만은 아니다. 자신들의 이념을 지키면서도 미•소의 패권으로부터 자주적 자립을 추구한 국가들도 있다. 티토가 이끈 유고슬라비아의 독자노선이 그렇고, 프랑스의 드골 정부가 그랬다. 한편 중•소 분쟁으로 사회주의 강대국 간에 대립이 심각하기도 했다.

         

         

        여하튼 냉전 체제 아래에서도 다극화와 지역화의 움직임이 확산되었고, 이것은 세계각지의 독립운동과 혁명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2 p245>

         

         

        2차 세계대전이 끝났다고 해서 제국주의 국가가 식민지를 완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영국은 이집트의 수에즈 운하를 포기하지 못해 수에즈 전쟁을 일으켰고, 프랑스는 아프리카의 알제리와 아시아의 베트남에서 무력으로 독립투쟁을 짓밟았지만 독립에의 강력한 열망 앞에서 끝내 쫓겨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집트와 알제리의 저항은 아프리카 곳곳에서 독립운동을 일으켰고, 1960년대 중반에는 아프리카 대부분이 식민지에서 벗어나 독립을 이룩하였다. 독립한 아프리카 국가들은 반둥 회의의 정신을 이어받아 비동맹과 중립 노선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아프리카의 시련은 또 다른 측면에서 이어졌다. 아프리카의 국경선이 대부분 제국주의 국가들에 의해 그어졌고, 이 국경선을 기초로 아프리카 국가들이 독립했기 때문에 같은 나라 안에도 여러 종족들이 섞여 있었다. 독립 이후에 이 종족 간 민족 간의 갈등이 폭발하면서 학살과 인종청소 그리고 난민 문제 들이 터져 나오게 되었다. 아직도 이 문제는 진행형이며, 이것이 요즘 한창 이슈가 되는 난민문제의 원인이기도 하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2 p255>

         

         

        미국의 앞마당 노릇을 하던 라틴아메리카에서도 혁명의 움직임이 일어났다. 1823년 먼로 선언 이후 미국은 아메리카 대륙의 종주국을 자임했으며, 직접적 식민 지배를 하지는 않았지만 라틴아메리카를 정치•경제적으로 종속시켰다.

         

        2차 세계대전 후 라틴아메리카에서도 사회주의가 확산되었고, 민주화와 개혁의 기운이 높아졌다. 그러나 미국이 보수 세력과 군부를 노골적으로 지원하여 쿠데타를 통한 군사 독재 정권들이 수립되었다.

         

        1959년 완료된 쿠바혁명은 친미 정권을 무너뜨리며 라틴아메리카 각지의 혁명을 촉발하였다. 칠레의 아옌데 정권은 라틴아메리카 최초로 선거를 통해 수립된 사회주의 정부였으나 미국의 지원을 업은 피노체트에 의해 붕괴되었다. 라틴아메리카는 우여곡절을 거치며 현재는 브라질, 베네수엘라 등에서 사회주의 정권이 수립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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