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에서 조선후기의 유학을 공부하다 보면 어려운 용어들이 많이 나옵니다.

성리학이란 것도 말만 많이 들어봤지 이 학문의 요체에 대해서는 전혀 모른다고 해야 할 텐데요. 게다가 양명학이니 실학이니, 理니 氣니, 인성이니 물성이니 따위가 보태지면 정말 외우기 위해서 뜻도 모르는 단어들을 디립다 외우고 있다는 자괴감이 듭니다. 인터넷 뒤져서 몇 줄 읽어 본다고 알 수 있는 차원은 아니지만, 수박 겉핥기라도 해봐야지 하는 마음으로 대충 정리해 보았습니다. 개념 정리라기보다는 용어 정의라고 해야 맞을 텐데요. 그것도 제가 이해할 수 있는 수준에서 대~충 해 보았습니다. 당연 정확하지는 않고, 다만 기억하는 데에 도움이 될 수 있기를 바라면서 말입니다.

 

 

 <EBSi 최태성의 고급 한국사>

 

성리학의 교조화와 그 대안학문의 대두

 

성리학은 공자의 사상 즉 유학에 대한 일종의 해석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공자를 주희가 자기 나름으로 해석하고 체계화한 것이지요.

이 성리학이 조선의 건국이념이 되면서,

성리학이 마치 유학의 전부인양 인식되게 됩니다.

그런데 양란을 거치며 성리학적 가치관이 붕괴되기 시작합니다.

급변하는 경제적, 사회적 변화를 성리학으로 설명하거나 통제하기 어려워진 것입니다.

 

당연하게도 이론이 현실과 맞지 않을 때 이론에 대해 의문을 갖게 됩니다.

물론 현실을 이론에 꿰어 맞추려고 고집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만,

낡은 이론이 언제까지나 현실을 가둬두지는 못합니다.

 

성리학에 의문을 품은 양반들이 자연스럽게 들여다 보려한 것은 무엇일까요?

성리학이 해석한 그 원본, 바로 공자의 유학이 아닐까요?

남인의 윤휴, 소론의 박세당 같은 사람들이

원래의 유학, 즉 주자가 해석하기 전의 원시유학으로 돌아갑니다.

이걸 가지고 송시열을 필두로 한 노론이 '사문난적' 이라는 딱지를 붙였다는 겁니다.

성리학이라는 색안경을 벗는 사람을 '사문난적'으로 매도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문난적 斯文亂賊의 '斯文', 즉 그 문화는 원래 성리학이 아닙니다.

이 말은 논어에 나오는 공자의 말입니다. 공자는 BC 6세기 인물입니다.

斯文은 공자가 숭앙했던 주나라의 문왕과 주공이 만들어냈던 학문과 사상을 의미합니다.

그러니 사문난적은 공자가 모범으로 삼은 주나라의 학문과 사상 혹은 공자의 학문과 사상을 어지럽히는 무리들이어야 합니다.

이것을 왜곡하여 조선의 선비들은 공자가 아니라

주자의 성리학에서 벗어나는 모든 학문과 사상을 사문난적으로 몰아간 것입니다.

마치 주자가 곧 공자라는 듯이요.

하지만 공자는 주자가 아니지요.

 

 

양명학

 

명나라 말기에 중국에서도 성리학에 의심을 품은 학자들이 등장합니다.

그 중 왕수인이라는 사람이 유학을 새롭게 해석한 것이 양명학입니다.

양명학이 무엇인가를 제대로 알기는 어려울 것 같고요.

간단히 말하자면 이렇습니다.

 

성리학과 양명학은 모두 유학을 해석한 학문입니다.

유학의 유파들이라고 보면 되겠지요.

둘의 공통점은 인간은 성인에 이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황과 이이도 왕이 성인이 되는 방법을 놓고

<성학십도>와 <성학집요>를 각각 저술하지 않았습니까.

 

성리학이 강조하는 것은 독서입니다.

성인이 되려면 스스로하든 신하의 도움을 받든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는 거지요.

이에 반해 양명학은 마음의 수양이 중요하다고 합니다.

이미 인간의 마음에는 성인의 싹이 있기 때문에 그것이 발현되도록

수양하고 실천만하면 된다는 거지요.

즉 성리학은 先知後行을, 양명학은 知行合一을 강조합니다.

성리학은 性卽理, 양명학은 心卽理라고도 그 요체를 설명합니다.

그렇다면 性은 무엇인가부터 따져야겠지만 능력 밖의 일입니다.

다만 아래 소개하고 있는 칼럼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이(理)는 우주의 질서·법칙이자, 만물에 깃들어 있는 형성의 원리이기도 했다. 우주의 질서가 하나하나의 사물에 내재한다는 대담한 설정으로 인해, 인간의 본성은 하늘의 이치인 천리(天理)와 연결되었다. 이것이 ‘성즉리’(性卽理)이니, 성리학이란 명칭은 여기서 기인했다."

 

무슨 소리인지 잘 모르겠지만 일단 첨부해 둡니다.

우리가 배우는 한국사의 수준에서는

이해 못하는 것이 오히려 당연할 것입니다.

저 구절을 이해하면 아마도 동양철학이 될테지요.

 

여하튼 우리나라의 양명학은 정제두에 의해 정리, 활성화되었습니다.

강화도에는 유배 간 양반, 종친들이 많았다고 하지요.

정제두도 강화도에 들어가서 양명학을 퍼뜨렸습니다.

그래서 강화학파라고도 합니다.

 

어쨌거나 이렇게 정리하고 나니,

성리학의 대안 학문으로 대두했다는

양명학과 실학은 완전히 다르구나 하는 감이 듭니다.

 

 

실학

 

양명학이 여전히 철학의 냄새를 풍긴다면,

실학은 요즘으로 치면 경제학, 과학, 사회학, 농학 등에 더 가깝습니다.

실학을 대표하는 용어 두개만 비교해 보겠습니다.

 

실학은 크게 중농학파와 중상학파로 나뉩니다.

중농학파는 경세치용, 중상학파는 이용후생을 캐치프레이저로 내걸고 있지요.

 

중농학파는 당쟁에서 패배한 남인들이 낙향하거나 유배 가서 보고 느낀

농업의 문제점을 해결하려 한 것입니다.

그래서 균전론, 한전론, 여전론 등 토지분배를 어떻게 해서

자영농을 어떻게 육성해야 하는가에 초점을 맞춥니다.

농민이 국가의 근본이니까요.

 

경세치용經世致用 은 經世와 致用입니다.

經世는 세상을 경영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을 경영하기 위해 토지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것이지요.

致用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적절한 제도와 방법을 갖추고 실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로만이 아니라 쓸모 있는 행동을 해야 한다는 뜻 일 테지요.

아직은 약간 형이상학적인 냄새가 나지만,

성인이 되기 위해 운운하는 그런 것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대지주가 차지한 토지를 어떻게 해서 자작농들에게 분배할 수 있는가를

핵심적으로 고민하고 있으니까요.

 

중상학파는 한걸음 더 나아갑니다.

중상학파는 유학파지요.

청에 유학을 갔다 온 노론의 자제들이 핵심이라 북학파라고 합니다.

역시 예나 지금이나 권세가 있고 돈이 있어야 유학도 가고,

거기서 선진사상과 선진문물을 배워올 수가 있습니다.

말하자면 강남좌파쯤 된다고 할까요?

 

중상학파의 표어는 이용후생利用厚生 입니다.

利用. 이익이 되는 것을 이용하여,

厚生. 삶을 두텁게, 윤택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것이 과학기술과 경제학이지요.

선박이나 수레를 사용해야 한다.

절약이 아니라 소비가 미덕이다.

화폐를 많이 사용해야 경제가 살아난다.

농업이든 상업이든 공업이든 다 중요하고 전문화되어야 한다, 등등...

 

이쯤 되면 확실히 성리학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북학파가 탄생하기 전 집권 세력의 내부에서 논쟁이 있었다는 사실도 나오지요.

 

 

 

인물성동이 논쟁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까지 130여 년 간 청은 강건성세의 치세를 맞습니다. 청나라에 다녀온 사신 등을 통해 오랑캐의 이 발달한 문물이 전해지고 조선은 일대 가치관의 혼란을 겪게 됩니다. 오랑캐가 어떻게 저런 문화를!!

이 때 등장하는 논쟁이 그 이름도 생소한 인물성동이 논쟁입니다.

 

人性과 物性이 같은가, 다른가를 놓고 오랜 기간에 걸쳐 치열한 논쟁이 전개됩니다. 이걸 호락논쟁이라고도 합니다. 호(호서), 즉 충청도 노론과 낙(낙양), 즉 서울 노론이 갈라져 논쟁을 했기 때문입니다. 이 논쟁이 일어났다는 것 자체가 청의 문물이 엄청나게 발달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이제 남은 것은 비록 오랑캐의 것이나 이 선진 문물을 배워 따를 것인가 끝까지 거부할 것인가 입니다.

 

시골 양반들은 대체로 보수적이지요.

충청도 노론도 보수적이겠지요, 아마.

“청의 문물이 발달했다는 것은 인정하겠다.

그러나 물성과 인성은 다르다.

인간과 금수가 어찌 같겠는가?

아무리 발달했다고 하나 금수의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

뭐 이런 말이 아닐까요?

이 시골 양반들이 나중에 위정척사파가 됩니다.

 

반면 서울 양반들은 시류에 민감합니다.

“문물이 발달했으면 그만큼 인간도 성숙하다는 것이다.

물성이든 인성이든 본성은 같다.

본성이 다만 때에 따라 人으로 혹은 物로도 발현되는 것이다.

문물이 발달했다는 것 자체가 훌륭한 본성을 의미한다.

고로 청의 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

정도로 대충 이해해도 되지 않을까요?

여하튼 낙론은 북학파로 발전하고 개화파로 이어집니다.

 

인물성동이 논쟁에 관해 아주 상세하게 연재한 칼럼을 찾았습니다.

조금 어려운 감도 있고 읽어도 여전히 잘 모르겠지만

꽤 재미있는 부분도 많습니다.

 

총 20편이나 되는데 그 중

 

10회 ‘오랑캐’도 윤리적 존재…청의 융성, 논쟁 지피다

16회 그에 이르러 이성으로서 조선 철학의 정점을 찍다

꼭 한 번 읽어 볼 만합니다.

 

4회 호락논쟁, 성리학의 난제에 대한 조선학자들의 응답

성리학에 관한 이해에 도움이 되니, 어렵지만 참고할만합니다.  

 

<이경구의 조선, 철학의 왕국 -호락논쟁 이야기> 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이 칼럼의 총 리스트는 다음과 같습니다.

 

20. 서로 해치지 않고, 어긋나지 않는 길을 찾아서

19. 아내는 낙론, 남편은 호론 “부부가 대단한 기세로 싸웠다”

18. 창조적 해석은 차단되고 철학은 힘을 잃었다

17. 세상사를 말할 수 없으니, 아아 입이나 다물자

16. 그에 이르러 이성으로서 조선 철학의 정점을 찍다

15. 모두가 논쟁의 옳고 그름보다 이익을 따졌다

14. “이이의 제자들과 성혼의 제자들이 원수가 되고, 송시열의 자손과 송준길의 자손이 원수가 되었다”

13. 왕실 척신들 간의 권력투쟁과 엮인 철학논쟁

12. 세계관 가른 “타자를 어떻게 볼 것인가?”

11. “임진·병자 전쟁 순국자 애도를 ‘개가 짖는가’ 여긴다”

10. ‘오랑캐’도 윤리적 존재…청의 융성, 논쟁 지피다

 9. “독서에 뜻을 두면 나이 귀천에 상관없이 입학을 허한다”

 8. 주자 무오류 이념의 바벨탑 쌓은 ‘제2의 송시열’

 7. 낙론 대학자들이 사도세자 성균관 입학식에 대거 참석한 이유

 6. 호론 중용한 영조와 한원진의 동상이몽 

 5. 노론, 경종에 세자 대리청정 요청했다 피바람 불러

 4. 호락논쟁, 성리학의 난제에 대한 조선학자들의 응답

 3. 한산사 이어 편지 논쟁, 스승들 개입으로 학파 갈라져

 2. 이간의 한산기행, 호락논쟁의 서막을 열다

 1. 호락논쟁, 유교 시스템을 허무는 원심력의 시작

 

이 연재는 조선 후기에 학계를 달구었던 호락논쟁(湖洛論爭)에 대한 것이다. 호락논쟁? 한국사에 관심 많은 독자에게도 이 용어는 조금 생소할 듯하다. 호락논쟁은 18세기 초반에 시작해서 19세기까지 진행되었던 철학 논쟁이었다. 당시 주류로 부상하고 있던 노론 학자들이 주인공이었는데, 대체로 충청도와 서울을 기점으로 의견이 갈렸다. 충청도의 다른 이름이 호서(湖西), 서울의 다른 이름이 낙양(洛陽)이었으므로 두 진영은 각각 ‘호론’과 ‘낙론’으로 불리게 되었고, 따라서 이름도 호락논쟁이 되었다.

 

호락논쟁은 16세기 중반에 이황, 이이 등이 전개하였던 ‘사단칠정(四端七情) 논쟁’, 17세기 후반 왕실의 복제(服制) 논쟁이었던 ‘예송’(禮訟)과 함께 조선의 3대 논쟁으로 꼽히기도 한다. 큰 비중에도 불구하고 인지도가 낮은 것은 사용된 개념과 논리가 난해하고, 시기도 길었으며, 철학 말고도 다른 변수들이 얽혀 복잡했기 때문이리라. 두툼한 분량의 한국사 개설서에서나 접할 수 있는 이 따분하고 현학적인 논쟁이 지금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경구는

서울대학교 국사학과를 나와 같은 학교에서 조선 후기의 사대부 가문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조선 후기 정치와 사상, 지식인 등에 관해 연구했으며, 지금은 한림과학원에서 동아시아 근대를 만든 개념들의 역사를 다양한 전공자들과 함께 공부하고 있다. <조선후기 안동 김문 연구> <17세기 조선 지식인 지도> <조선후기 사상사의 미래를 위하여> <17세기, 대동의 길>(공저) 등을 썼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