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나쁜 봄날씨입니다.
일기예보에서 먼지로 뒤덮인 북경을 보면 사람이 어떻게 사나 싶지만,
우리도 별반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럼에도 이 먼지 바람을 뚫고 열 한명이 모였습니다. ^^
교육 가신 고구마님도 담주에는 꼭 돌아오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시작하기도 전에 책읽기가 어려웠다고 말씀들 하셨습니다.
데카르트의 형이상학, 근대 관념론이 쉬울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강유원 선생님의 말씀대로 우리가 공부하는 철학사는
돌아서면 뭘 읽었는지, 뭘 이야기했는지, 하나도 머릿속에 남아있지 않지만
돌아오는 길에 뭔지 '뿌듯함' 같은 것이 남아 있으면 그걸로 만족할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머리를 훌훌 털고도 남아 있는 것이 혹시 있다면, 오늘은 무엇이었나요?
'Cogito' 명제는 데카르트 사상의 집약체이니 그 의미는 날라갔어도 이 단어는 남아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cogito란 사유 즉 정신이 바로 나 자신이라는 자각에 의해 획득된 것입니다. 나의 본질은 사유하는 것이고, 나의 정체성은 바로 정신에 달려있습니다. 만약 정신이 나갔다면, 나는 더 이상 내가 아닙니다. 데카르트는 인간을 res cogitans(사유하는 것)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술에 취해서 저지른 범죄를 정신이 또록또록할 때 저지른 범죄보다 가볍게 취급하는 우리 사법제도의 근저에 바로 데카르트의 인간 개념이 깔려있습니다. 정신이 나간 상태에서는 그가 그 자신이 아니기 때문에 죄에 대해 그의 책임을 묻기가 힘듭니다. 그가 아닌 무엇이 저지른 것이지 그가 저지른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정신이 들어 왔을 때에야 즉 사유할 수 있을 때에야 그는 책임과 의무를 진 그 자신, 인간이 될 수 있습니다.
데카르트는 인간의 정신과 신체를 완전히 분리하였습니다. 데카르트적 의미에서 신체는 인간의 본질이 아닙니다. 써니님이 목 윗부분을 통째로 이식한 사람 이야기를 하셨는데요. 그 사람은 도대체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데카르트는 쉽게 대답할 것입니다. 목 윗부분의 주인이 그 사람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답할까요?
관념론은 도식적으로 말하면 정신이 현존을 규정한다는 생각입니다. 데카르트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철학으로서의 철학사>에는 이렇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 이와 반대로 관념론은 자아가 그 자체(cogito) 이외의 어떤 것에 대해서도 확실한 앎을 가지지 않는다는 신념이며, 내가 사물들을 보고, 만지고, 생각하고, 욕구하는 동안에만 사물들을 알고 있다는 신념이다. 다른 말로 하면 나는 내가 사물들을 다루고 목격하고 있을 때에만 그것들을 안다는 것이다. 사물들이 나와 분리되어 있을 때 나는 사물들이 어떠한지 알지도 못하고 알 수도 없다. 사물들이 현전하지 않으면 그것들에 대해 아무것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사물들은 나에게 현존하는 것 또는 존재하는 것으로서 나타난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잠정적으로 나의 관념들이며, 그것들에 대응하는 실재는 관념적 실재다. 사물들의 존재는 자아에 기반하고 자아가 만든 관념들을 닮는다. 이것이 관념론이다. p367"
나 자신 즉 cogito가 없으면 사물도 세계도 없습니다. 세상의 중심에 내가 있는 것입니다. 철저한 개인으로서의 나입니다. cogito는 근대 주체주의(주관주의)와 개인주의의 길을 열어줍니다. 데카르트가 최초의 근대인으로 불리는 까닭입니다. 엄밀한 사유 방법이 까다로와서 그렇지 데카르트의 생각을 이해하는 것은 플라톤이나 토마스 아퀴나스를 이해하는 것보다는 훨씬 쉽습니다. 우리 자신의 사유가 데카르트의 방법론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은 여전히 근대적 사유의 틀 안에 놓여있습니다.
다음주에 한번 더 데카르트를 합니다.
교재는 <인문고전강의> 입니다.
오늘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 충분히 나누지 못한 이야기,
다음주에는 조금 여유를 갖고 토론해 보기를 바랍니다.
강유원 선생님의 강의도 인문고전강의가 훨씬 쉽고
역사적 배경을 많이 설명해 주시니 꼭 듣고 오시면 좋겠습니다.
책 : 인간 주체의 허약한 확실성 - 방법서설
p 321 ~ 366
강의 : 090709-000 ~ 090730-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