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3일에 13번째 철학 스타디를 하였습니다.
기독교는 '3'을 신성시한다는데, 오늘 3이 여러번 들어갔네요.
하지만 오늘은 기독교가 중심이 되었던 중세 사회가 무너지고
그 '자연상태' 위에 새로운 체계를 세우기 위해
다양한 사상들이 경쟁하던
르네상스 시대의 철학을 공부하였습니다.
르네상스라고 하면 무조건
고대 희랍세계로의 복귀, 인문주의 따위를 떠올립니다.
하지만 인문주의 사상은 하나의 흐름일 뿐이고
오히려 더욱 강력했던 흐름은 근대 자연과학으로 이어지는 자연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근대는 결국 인문주의가 아니라 자연과학이 진리를 담지하는 시대가 되므로써 자연학이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자연학은 중세철학에 대립하여 불쑥 등장한 학문이 아닙니다. 13~14 세기에 보편개념 명칭론(유명론)을 주장했던 프렌체스코 학파에 의해 싹이 텄고, 16세기를 거쳐 17세기에 완성(?)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흔히 17세기를 과학혁명의 시대라고 부르는 것은, 16세기 코페르니쿠스를 시작으로 16세기와 17세기를 잇는 케플러와 갈릴레이, 마지막으로 17세기 뉴턴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뉴턴의 고전역학은 결정론이라고 불립니다. F=ma 라는 단순한 방정식을 바탕으로 인간은 이론상으로는 우주의 미래를 예측할 수 있습니다. 예측이 가능한 것은 미래가 결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정확한 예측을 못하는 이유는 방정식에 대입할 초기값을 무한대에 가깝도록 정확하게 입력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인간 능력의 문제일 뿐이라는 것이지요. 아마도 이것을 세계사에서는 '기계론적 우주관' 이라 표현한 것 같습니다. 방정식 안에서 법칙대로 진행되는 세계입니다. 인간의 이성으로 우주의 비밀을 푸는 것은 시간문제일 따름입니다.
하지만 현대 물리학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누구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할만큼 어렵다는 양자역학에 의하면 세계는 결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비결정론적 입장입니다. 양자역학의 세계는 고전역학의 세계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입니다. 양자역학에서는 관측 자체가 관측대상을 교란시키기 때문에 관측에 의해서 정확한 데이타를 얻는 것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비유하자면 가만히 서 있는 아이의 키는 잴 수 있지만(고전역학), 몸부림을 치며 누웠다 앉았다 굴렀다 하는 아이의 키를 잴 수는 없습니다(양자역학). 아니 아이가 몸부림을 칠 때마다 아이의 키가 달라진다면 어떻게 될까요? 여튼 양자역학에 대해 가장 많이 회자되는 것은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 입니다. 이 원리에 따르면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은 정확히 측정되지 않기 때문에 양자역학을 통해서는 단지 확률을 구할 수 있을 뿐입니다.
철학사를 하다가 물리학으로 넘어간 분위기인데요. 철학과 수학 그리고 과학은 불가분의 관계로 시작하였습니다. 사실 각각 별개의 학문이 아니라 하나의 학문에서 시작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공부한 르네상스 시대에 이르러 철학이 자연학으로 방향을 잡으면서 서서히 분리되기 시작하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플라톤은 수학을 못하는 자는 아카데미아에 들어오지도 말라고 했다는데, 오늘날에는 수학을 못하면 물리학을 할 수 없다고 합니다. 물리학의 언어가 수학이기 때문입니다. 18세기까지만 해도 위대한 철학자들은 모두 수학자이기도 했고요.
고전역학과 양자역학 그리고 자유의지 등에 관해서는 EBS 프로그램 <통찰>에서 좋은 강의를 발견했습니다 45강부터 48강까지인데요. 특히 45강과 46강을 들어보면 17세기 고전역학과 현대 양자역학에 대한 기본 개념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오늘 공부한 내용 중 가장 마음을 울렸던 것은 자연학이 아니라 쿠자누스의 '실존적 절망' 입니다. 유한자와 무한자 사이의 뛰어넘을 수 없는 간극을 확인하고도 쿠자누스는 무한자를 향한 열망을 버리지 못합니다. 신의 모상으로서의 인간이 신성을 간직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그 불가능성에 도전하는 절망적 열망 때문이니까요. 강유원 선생님은 이 인간 정신의 신성함을, 읽지 않으면서도 자꾸 사모으는 책에 비유하셨습니다. 죽을 때까지 다 읽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새로운 책들이 나올때 마다 사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산다는 행위 자체를 멈출 때 나는 오로지 물질적으로, 동물적으로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월요일마다 모여서 이 난해한 책을 뒤적이는 것도 바로 이런 까닭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어차피 이해하지 못할지 모르지만 이해하려는 노력을 멈출 때, 나는 오로지 재산, 물적 소유에 의해 평가받는 물화된 인간이 될 것이라는 두려움말입니다. 신이 될 수 는 없지만 신성함만은 포기하지 않는 인간이 될 때 비로소 교양인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오늘은 열 한명이 모였습니다.
다음주는 『인문고전강의』 중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공부하겠습니다.
책 : p261 ~ 318
강의 파일 : 090604-000 ~ 090625-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