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명이 참석하였습니다.
독일 관념론의 정점, 헤겔을 공부했습니다.
헤겔은 공부하자면 끝도 없겠지만 워낙 난해함으로 유명한지라
한 발짝 더 내딛기도 쉽지 않아서
진짜 진짜 개략적인 부분만 보는 것으로 하였습니다.
그래서 칸트는 두 주에 걸쳐 했지만, 헤겔은 한 주로 마치게 되었습니다.
헤겔 철학에서 가장 많이 회자되고 있지만, 또한 가장 많이 오해되고 있다는
변증법과
'의식의 경험의 학'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정신현상학』을 중심으로
헤겔 철학을 살짝 엿보았습니다.
프레드릭 바이저의 『헤겔』에는
<변증법에 관한 신화들과 전설들>이라는 항목이 있습니다.
헤겔 철학은 모른다해도 누구나 들어본 적이 있는 변증법, 그리고 변증법이라고 하면 자동으로 연상되는 정반합의 도식, 고등학교 윤리 교과서에도 명시되어 있는 헤겔에 관한 가장 일반적인 오해에 대해 바이저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변증법'이란 용어 자체는 매우 암시적이다. 헤겔 철학의 어떠한 측면도 그 보다 더 많이 해석되지 않았으며 그보다 더 논쟁적이지 않았다. p212」
「비록 변증법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이 가능하다 하더라도 '정립-반정립-종합'의 도식에 의해 그것을 설명하는 가장 대중적인 방식을 피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헤겔 자신은 결코 이 용어법을 사용하지 않았으며 모든 도식의 사용을 비판했다. 『정신현상학』에서 헤겔은 칸트에 의해 다시 발전된 "삼분법적 형식"을 칭찬하여 그것을 "학의 개념"이라고까지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정립-반정립-종합의 방법이 아니라 칸트의 범주표의 삼분법적 형식을 언급하고 있다. 비록 칸트의 이율배반들이 헤겔의 변증법에 영감을 주긴 했지만. 헤겔은 결코 정립과 반정립을 개진하는 칸트의 방법을 사용하지 않았다. 이 방법은 피히테와 셸링에 의해 사용되었으며 그 후 잘못되게도 헤겔에게 확대 적용되었다고 이야기되어 왔다. 그러나 그것은 헤겔은 말할 것도 없고 피히테나 셸링에서의 그 어느 것에도 상응하지 않는다. p214」
강유원 선생님도 여러 강의에서 반복적으로 정반합의 오해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그 오해 자체가 중대하다기 보다는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헤겔에 관한 유일한 지식이 잘못된 지식이라는 사실이 어처구니없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헤겔이 아닌 것을 헤겔로 아는 것보다는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 낫지 않을까요?
그러면 헤겔의 변증법은 무엇일까요?
바이저도 많은 해석과 그 해석들에 대한 그만큼 많은 논쟁이 있다고 하니, 일반인이 이해할 수 있게 요약하기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Erfahrung (겪음, 경험), 모순, Aufheben(지양), 생성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변증법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경험은 여행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겪음의 과정을 통해 시초에 내재되어 있던 목적이 귀결에 이르러 드러나게 됩니다. 바이저를 한번 더 인용해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헤겔의 용어 '경험'은 문자 그대로의 의미, 즉 결과에 도달하는(er-fahren) 여행 또는 모험(fahren)으로 받아들여져야 하는데, 따라서 '경험'은 그야말로 말 그대로 '여행의 성과'이다. 『정신현상학』에서 의식에 의해 수행된 여행은 의식 자신의 변증법의 여행이며, 이 변증법의 결과로서 계속해서 살아남는 것은 의식의 경험이다. p225」
헤겔의 변증법에서는 동시에 있을 수 없는 것들이 공존할 수 있습니다. 모순의 긍정이라고 표현하는데요. 그 비법(?)은 간단합니다. 강유원 선생님은 " 세상의 모든 사태는 바라보는 측면에 따라 다르다."고 설명합니다. 이를 지젝과 같은 철학자는 '시차적 관점'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루빈의 꽃병'이라고 불리는 그림입니다. 얼굴로도 꽃병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물론 꽃병과 얼굴을 동시에 볼 수는 없습니다. 꽃병이든지 얼굴이든지 한쪽을 선택해야 합니다. 이 그림에는 모순된 두 형태가 공존하지만 우리는 늘 한쪽만 선택하여 바라볼 수 밖에 없습니다. 늘 꽃병으로만 이 그림을 보던 우리가 어느 순간 그림에서 얼굴을 보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림이 세계의 구조라면? 어떤 사태가 발생했을 때 얼굴로 보는 것과 꽃병으로 보는 것은 단지 우리 주관의 변화에 그치지 않습니다. 우리 관점의 변화가 세계의 변화를 추동하는 힘이 되기도 합니다. 지젝이 변증법을 해석하는 하나의 방식이 대략 이런 식이었던 것 같습니다. 지젝은 관점의 변화를 부정의 부정이라고 합니다. 정확한 것은 아니고요. ;; 물론 강유원 선생님이 '모순의 긍정'을 지젝처럼 설명했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의 개념에 대해 철학자들이 해석하는 방법은 저마다 다른 것 같으니까요.
헤겔의 형이상학은 사변철학이라고 합니다.
사변철학을 강유원 선생님은이렇게 정의하셨네요.
"절대적 반성을 통하여, 유한자를 계기로 삼아 정립되는 무한자를 인식한다." 혹은 "무한자는 유한자에 선행하는 내재적, 논리적 목적이지만, 역사적으로 전개된 다음에야 비로소 드러난다. 이를 유한자가 알게 되면 무한자의 입장에 올라선다."
헤겔철학에서 유한자와 무한자의 통일은 이렇게 성취됩니다. 무한자는 인격신이라기 보다는 '내재적 목적'이고 헤겔의 용어 중 '정신', '개념 Begriff' 가 동일한 의미입니다. 희랍철학에서는 플라톤의 형상 혹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인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내재적 목적은 유한자에 앞서 주어지지만, 이 목적의 실현은 반드시 유한자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무한자는 유한자보다 선행하지만 유한자 없이는 정립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유한자는 내재적 목적을 뚜렷이 알지 못합니다. 변증법의 과정을 통해 즉 겪음(경험)을 통해 내재한 목적이 드러난 이후에야 회고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그것도 철학자들 같이 절대지에 도달한 유한자만이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유한자를 무한자의 입장에 올라선 유한자 즉 주체라고 합니다.
『정신현상학』은 초보적 의식을 가진 유한자가 인식의아리스토 긴 겪음을 통해 절대지를 획득하고 무한자의 입장에 올라서는 과정을 서술한 것입니다. 오늘 이 말이 나오자마자 대부분 『정신현상학』을 읽어야 겠다고 말하긴 했지만, 그 '읽다'는 행위가 어쩌면 넘사벽인지도 모릅니다. 읽는다는 것은 이해한다는 것이어야 하는데, 난해하기로 이름난 책이기 때문입니다. 저도 몇 년 전에 도전해 보았는데 '읽었다'고 할 수는 결코 없는 방식으로 읽었습니다. 특히 아무런 사전 지식없이 무턱대고 읽었기 때문에 결국은 책장을 끝까지 넘긴다는 오기로 읽었을 뿐입니다. 저도 궁금합니다. 정말 이 책을 제대로 읽고나면 절대지에 도달할 수 있을까요? 철학자가 되면 무한자면 입장에 올라설 수 있는 걸까요?
다음주입니다.
2012 서양철학사 강의는 더 이상 없습니다.
<철학으로서의 철학사>
p 534 ~ 549
<인문 고전 강의>
직업으로서의 정치 : 베버 p443 ~ 466
강의 파일 : 090924 ~ 091001 (총 4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