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철학>을 끝으로 『철학으로서의 철학사』를 마쳤습니다. <현대 철학> 부분은 다음으로 미뤄두었습니다. 솔직히 자신도 없고, 철학사 책마다 평가도 달라서 지금 우리 수준에서 하기에는 이른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열 명이 참석하였습니다.

19세기는 실증주의가 풍미한 시대였습니다. 프랑스 실증주의의 선구자 콩트와 영국의 공리주의를 알아보았고요.  생철학으로 분류된 키르케고르와 니체를 살펴보았습니다. 둘 다 비극적인 삶을 살았던 것 같은데요. 키르키고르는 실존을, 니체는 힘에의 의지를 철학의 핵심으로 삼았습니다.  

 

영국의 공리주의는 『인문 고전 강의 』에서 조금 더 심도있게 공부하였습니다.  벤덤의 <파놉티콘>을 공리주의 텍스트로 살펴보았는데요. 공리주의는 이기적 심성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당대의 윤리학이기도 했습니다. 공리주의 역시 고대 희랍처럼 '좋음'을 추구합니다. 다만 좋음을 '유용하고 쾌락을 주는 것'으로 규정한다는 것이 다릅니다. 이익 즉 유용성을 모든 것의 기준으로 삼기 때문이지요. 자세한 내용은 생략합니다. 말이 길어질 듯 한데, 시간이 ㅎㅎ

 

다음주는  『인문 고전 강의 』 마지막 시간입니다.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 입니다.

<논어>는 생략합니다. 동양철학은 다음 기회에 도전해보도록 하겠습니다.

 

 

  p 505 ~ 523

 

  강의 파일 : 20091022 ~ 2009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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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명이 참석하였습니다.

<철학으로서의 철학사> 는 낭만주의 시대의 사상을 다루었고요.

<인문 고전 강의>는 막스 베버의 '직업으로서의 정치' 를 하였습니다.

 

낭만주의 시대에서 특기할 사상가로는 마르크스와 쇼펜하우어입니다.

이 책의 저자는 쇼펜하우어는 그렇다고 쳐도

마르크스를 정말 간단하게 언급만 하고 넘어갑니다. 

우리도 자연 간략히 이름 정도만 짚었습니다. ;;

 

쇼펜하우어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상은 칸트와 불교입니다.

주저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는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표상된 세계라는 인식은 칸트의 초월론적 철학을 이어 받은 것이고요. 의지로서의 세계는 칸트와는 완전히 다른 길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칸트 윤리학의 핵심인 '자유 의지'를 연상하면 안됩니다. 쇼펜하우어의 의지는 무의식적인 생의 의지입니다.  '세계의 모든 객체는 존재하려는 열망 또는 의지로서 자신을 표명한다.' 라고 했는데요.

 

비이성적이고 맹목적인 의지는 곧 무한한 욕망이기도 합니다.  무한한 욕망은 당연히 채워지지 않습니다. 충족되지 않는 욕망은 고통을 불러일으킵니다. 따라서 쇼펜하우어에게 삶은 고통입니다. 고통의 원인인 생에의 의지는 악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세계는 악입니다. 악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생에의 의지를 물리치는 것입니다. 쇼펜하우어는 심미적 구원으로서의 예술과 윤리적 구원으로서의 열반을 제시하였습니다. 예술은 순간적 구원이니 영원한 구원은 불교식 해탈 뿐입니다. 그래서 일까요?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는 많은 독자들을 자살로 이끌었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본인은 헤겔을 죽음으로 몰고간 전염병에도 살아남아 일흔이 넘어서야 죽었습니다만.

 

 

다음주도 <철학으로서의 철학사>와 <인문고전강의>를 함께 읽습니다.

 

<철학으로서의 철학사>

19세기 철학 : p553 ~ 596

 

<인문 고전 강의>

제레미 벤담의 파놉티콘 : p469 ~ 503

강의 파일 : 20092008 ~ 20091015 (총 4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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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명이 참석하였습니다.

독일 관념론의 정점, 헤겔을 공부했습니다.

헤겔은 공부하자면 끝도 없겠지만 워낙 난해함으로 유명한지라

한 발짝 더 내딛기도 쉽지 않아서

진짜 진짜 개략적인 부분만 보는 것으로 하였습니다.

그래서 칸트는 두 주에 걸쳐 했지만, 헤겔은 한 주로 마치게 되었습니다.

 

헤겔 철학에서 가장 많이 회자되고 있지만, 또한 가장 많이 오해되고 있다는

변증법과

'의식의 경험의 학'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정신현상학』을 중심으로

헤겔 철학을 살짝 엿보았습니다.

 

 

 프레드릭 바이저의 『헤겔』에는

<변증법에 관한 신화들과 전설들>이라는 항목이 있습니다.

헤겔 철학은 모른다해도 누구나 들어본 적이 있는 변증법, 그리고 변증법이라고 하면 자동으로 연상되는 정반합의 도식, 고등학교 윤리 교과서에도 명시되어 있는 헤겔에 관한 가장 일반적인 오해에 대해 바이저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변증법'이란 용어 자체는 매우 암시적이다. 헤겔 철학의 어떠한 측면도 그 보다 더 많이 해석되지 않았으며 그보다 더 논쟁적이지 않았다. p212」

 

「비록 변증법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이 가능하다 하더라도 '정립-반정립-종합'의 도식에 의해 그것을 설명하는 가장 대중적인 방식을 피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헤겔 자신은 결코 이 용어법을 사용하지 않았으며 모든 도식의 사용을 비판했다. 『정신현상학』에서 헤겔은 칸트에 의해 다시 발전된 "삼분법적 형식"을 칭찬하여 그것을 "학의 개념"이라고까지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정립-반정립-종합의 방법이 아니라 칸트의 범주표의 삼분법적 형식을 언급하고 있다. 비록 칸트의 이율배반들이 헤겔의 변증법에 영감을 주긴 했지만. 헤겔은 결코 정립과 반정립을 개진하는 칸트의 방법을 사용하지 않았다. 이 방법은 피히테와 셸링에 의해 사용되었으며 그 후 잘못되게도 헤겔에게 확대 적용되었다고 이야기되어 왔다. 그러나 그것은 헤겔은 말할 것도 없고 피히테나 셸링에서의 그 어느 것에도 상응하지 않는다.  p214」

 

강유원 선생님도 여러 강의에서 반복적으로 정반합의 오해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그 오해 자체가 중대하다기 보다는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헤겔에 관한 유일한 지식이 잘못된 지식이라는 사실이 어처구니없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헤겔이 아닌 것을 헤겔로 아는 것보다는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 낫지 않을까요?

 

그러면 헤겔의 변증법은 무엇일까요?

바이저도 많은 해석과 그 해석들에 대한 그만큼 많은 논쟁이 있다고 하니, 일반인이 이해할 수 있게 요약하기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Erfahrung (겪음, 경험), 모순, Aufheben(지양), 생성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변증법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경험은 여행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겪음의 과정을 통해 시초에 내재되어 있던 목적이 귀결에 이르러 드러나게 됩니다. 바이저를 한번 더 인용해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헤겔의 용어 '경험'은 문자 그대로의 의미, 즉 결과에 도달하는(er-fahren) 여행 또는 모험(fahren)으로 받아들여져야 하는데, 따라서 '경험'은 그야말로 말 그대로 '여행의 성과'이다. 『정신현상학』에서 의식에 의해 수행된 여행은 의식 자신의 변증법의 여행이며, 이 변증법의 결과로서 계속해서 살아남는 것은 의식의 경험이다. p225」

 

헤겔의 변증법에서는 동시에 있을 수 없는 것들이 공존할 수 있습니다. 모순의 긍정이라고 표현하는데요. 그 비법(?)은 간단합니다. 강유원 선생님은 " 세상의 모든 사태는 바라보는 측면에 따라 다르다."고 설명합니다. 이를 지젝과 같은 철학자는 '시차적 관점'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루빈의 꽃병'이라고 불리는 그림입니다. 얼굴로도 꽃병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물론 꽃병과 얼굴을 동시에 볼 수는 없습니다. 꽃병이든지 얼굴이든지 한쪽을 선택해야 합니다. 이 그림에는 모순된 두 형태가 공존하지만 우리는 늘 한쪽만 선택하여 바라볼 수 밖에 없습니다. 늘 꽃병으로만 이 그림을 보던 우리가 어느 순간 그림에서 얼굴을 보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림이 세계의 구조라면?  어떤 사태가 발생했을 때 얼굴로 보는 것과 꽃병으로 보는 것은 단지 우리 주관의 변화에 그치지 않습니다. 우리 관점의 변화가 세계의 변화를 추동하는 힘이 되기도 합니다. 지젝이 변증법을 해석하는 하나의 방식이 대략 이런 식이었던 것 같습니다. 지젝은 관점의 변화를 부정의 부정이라고 합니다. 정확한 것은 아니고요. ;;  물론 강유원 선생님이 '모순의 긍정'을 지젝처럼 설명했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의 개념에 대해 철학자들이 해석하는 방법은 저마다 다른 것 같으니까요.

 

헤겔의 형이상학은 사변철학이라고 합니다.

사변철학을 강유원 선생님은이렇게 정의하셨네요.

 

"절대적 반성을 통하여, 유한자를 계기로 삼아 정립되는 무한자를 인식한다." 혹은 "무한자는 유한자에 선행하는 내재적, 논리적 목적이지만, 역사적으로 전개된 다음에야 비로소 드러난다. 이를 유한자가 알게 되면 무한자의 입장에 올라선다."

 

헤겔철학에서 유한자와 무한자의 통일은 이렇게 성취됩니다. 무한자는 인격신이라기 보다는 '내재적 목적'이고 헤겔의 용어 중 '정신', '개념 Begriff' 가 동일한 의미입니다. 희랍철학에서는 플라톤의 형상 혹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인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내재적 목적은 유한자에 앞서 주어지지만, 이 목적의 실현은 반드시 유한자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무한자는 유한자보다 선행하지만 유한자 없이는 정립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유한자는 내재적 목적을 뚜렷이 알지 못합니다. 변증법의 과정을 통해 즉 겪음(경험)을 통해 내재한 목적이 드러난 이후에야 회고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그것도 철학자들 같이 절대지에 도달한 유한자만이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유한자를 무한자의 입장에 올라선 유한자 즉 주체라고 합니다.

 

『정신현상학』은 초보적 의식을 가진 유한자가 인식의아리스토 긴 겪음을 통해 절대지를 획득하고 무한자의 입장에 올라서는 과정을 서술한 것입니다. 오늘 이 말이 나오자마자 대부분 『정신현상학』을 읽어야 겠다고 말하긴 했지만, 그 '읽다'는 행위가 어쩌면 넘사벽인지도 모릅니다. 읽는다는 것은 이해한다는 것이어야 하는데, 난해하기로 이름난 책이기 때문입니다. 저도 몇 년 전에 도전해 보았는데 '읽었다'고 할 수는 결코 없는 방식으로 읽었습니다. 특히 아무런 사전 지식없이 무턱대고 읽었기 때문에 결국은 책장을 끝까지 넘긴다는 오기로 읽었을 뿐입니다. 저도 궁금합니다. 정말 이 책을 제대로 읽고나면 절대지에 도달할 수 있을까요? 철학자가 되면 무한자면 입장에 올라설 수 있는 걸까요?

 

 

다음주입니다.

2012 서양철학사 강의는 더 이상 없습니다.

 

<철학으로서의 철학사>

p 534 ~ 549

 

<인문 고전 강의>

직업으로서의 정치 : 베버 p443 ~ 466

강의 파일 : 090924 ~ 091001 (총 4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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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여름처럼 뜨거운 늦봄입니다.

저희의 철학 공부도 열기를 더해 ... ;; 가고 있는지 ^^

오늘은 열 한명이 참석했고요. (8개월 우리 가헌이까지 하면 열 둘이군요. )

칸트의 도덕철학을 공부하였습니다.

 

칸트는 정리해보려니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워낙 방대하고 또 섬세한 설명도 필요해서 대충 보다는 안하는 것이 낫다 싶습니다. (덥고 기력이 떨어지기도 하고 ㅎ,   문재인 정부 출범 후 쏟아지는 뉴스도 보아야 하고 ^^)

 

어쨌거나 두 주에 걸쳐 칸트의 <이론 이성 비판>과 <실천 이성 비판> 그리고 <판단력 비판> 까지, 그 개요를 살펴보았습니다. 

 

칸트에 의하면 '두 세계의 시민'인 인간은 자연적 법칙의 지배를 받으면서도 절대적 자발성을 갖고 그에 반하는 결단을 내릴 수 있는 자유로운 존재입니다. 인간 이성은 이론의 영역에서도 실천의 영역에서도 입법자입니다. 특히 실천의 영역에서 이성은 자기 입법을 통해 자율성을 확보하는 동시에 책임과 의무를 지게됩니다.

 

도덕이란 달리 말하면 책임을 지는 태도 즉 귀책성을 받아들이는 태도입니다. 책임을 회피하는 사람이 이끄는 사회가 얼마나 부도덕한 사회인지 우리는 박근혜 대통령 파면을 통해 생생하게 지켜보고 있습니다. 도덕적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사회적 원칙에 대한 구성원들의 합의 즉 공감이 필수 요소입니다. 칸트에게 도덕은 절대적으로 자율적이기 때문입니다. 합의의 과정을 거치지 않은 타율적 법칙은 인간의 자유를 말살합니다. 그러므로 공감 즉 공통감각 Sensus Communis을 통해 합의된 법칙들을 준수하고 그에 대한 책임을 지는 시민들이 만드는 사회가 도덕적 사회일 것입니다.

 

공통감각은 영국에서 독일로 들어오며 '판단력 Urteilskraft'으로 번역됩니다. 실천 영역에서의 판단력은 '특수들을 비교하여 그것들을 포섭하는 보편을 상정하고 연결시키는 힘'으로서의 반성적 판단력입니다.  자유의 영역 즉 실천 영역에서는 자연의 영역에서와 같은 보편법칙이 규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다양한 특수들에 대해 논의와 합의를 거쳐 보편법칙을 상정 즉 만들어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능력이 바로 반성적 판단력입니다.

 

판단력을 기르는 힘은 상상력입니다. 어릴때부터 상상력을 길러야 한다고 말할 때, 우리는 단순히 현실에 없는 무엇을 생각하는 힘 정도를 떠올립니다. 그러나 진정한 상상력은 공감의 능력입니다. 아담 스미스는 상상력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상상을 통해 우리는 자신을 다른 사람이 처한 상황에 놓고 우리 자신이 그 사람과 같은 고통을 겪는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고통을 인식하는 방식은 우리가 그 사람의 몸속에 들어가 어느 정도 그와 같은 사람이 되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 사람의 감각에 대한 어떤 관념을 형성하며 그 정도는 약하더라도 그 사람의 것과 유사한 감각까지 느끼는 것과 같다. (....) 우리가 다른 사람의 고통에 대해 동류의식을 느끼는 원천은 바로 이것이다. 상상을 통해 고통을 받는 자와 입장을 바꿔봄으로써 우리는 고통을 받는 사람이 느끼는 것을 느낄 수있거나 그가 느끼는 것에 영향을 받는다."  어릴 때부터 상상력을 키우는 것이야말로 사회를 건강하게 만드는 탄탄한 초석이 될 것입니다. 유니콘이나 외계인을 생각하는 그런 상상력을 넘어서는 상상력 말입니다.  

 

칸트는 서로 분리된 자연의 영역과 자유의 영역을 매개하기 위해 판단력을 탐구했습니다. 판단력은 실천 이성이 만든 형식적 도덕 법칙을 자연의 영역에서 구현할 때 필요한 '실천적 지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실천이성이 행위의 측면에서는 아무 내용이 없다고 비판받기도 한다지만, 칸트의 정언명령은 실천적 실천 원리의 절대적 기준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나 자신이 만든 법칙 즉 준칙이 보편적 법칙이 되도록 행위하라는 정언명령은 아무리 생각해도 지나침이 없습니다. 쉽게 말해 내가 남한테 하는 것을 남이 그대로 나에게 해도 된다고 생각할 때에만 그 행위를 하라는 것입니다. 칸트의 정언명령이라고 하면 허공에 붕 뜬 이상적 생각으로 치부되기 쉽지만, 현실의 곳곳에서 순간순간 우리 행위를 반성하고 이끄는 강력한 힘이 있습니다. 오늘 샤르릉님이 사례를 주신 문제도 정언명령이 행위의 원칙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물론 그 위에 개개의 특수들에 대해 '요리조리 따져보는' 반성 능력이 필요합니다만. ^^

 

 

다음주는 형이상학의 최고봉 (?), 헤겔입니다. 피히테와 셸링은 읽어 보는 정도로 넘어가겠습니다.

 

<철학으로서의 철학사>

p499 ~ 533

 

<2012 서양 철학사>

파일 39와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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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사의 정점, 칸트와 헤겔이 눈앞에 다가왔습니다.

칸트 첫 시간, 제가 뻥을 많이 친 덕분일까요?

열 두명 전원이 참석하였습니다.

말그대로 공사다망한 가운데 시간을 쪼개 참석한 보람이 있어야 할텐데요.

어떠셨는지 ...

 

오늘은 강유원 선생님의 <2102 서양철학사 강의>와 <2015 서양근대사상사 강의> 를 중심으로 먼저 칸트사상의 개략적인 윤곽을 살펴보았습니다.  더불어 칸트의 3대 비판서 중 <순수이성비판>에 대해서도 조금 알아보았습니다. 

 

다음주에는 <실천이성비판>과 <판단력비판>의 내용을 공부하겠습니다. 이번주와 마찬가지로 강유원 선생님의 강의 파일을 먼저 들어보고, 교재를 참고하시면 되겠습니다. 

 

<철학으로서의 철학사> 

p 478 ~ 498

 

<2012 서양철학사> 

38강 

 

<2015 서양근대사상사>

칸트 판단력 비판 서론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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