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강. 신이 지시한 사명들(1)
소크라테스는 사람들의 시기와 비방으로 위험에 처했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자신의 일을 계속했다. 이 일을 지시한 것은 신이었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는 신의 지시를 전쟁에서 배치된 자리를 지키는 것에 비유한다. 지휘관의 지시를 받아도 죽음을 무릅쓰고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데, 신이 명령하는데 죽음이든 다른 어떤 일이든 두려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말은 마치 예언자의 말과 흡사하다. 그런데 델피 신탁은 소크라테스가 가장 현명하다고만 했지 소크라테스에게 캐묻고 다니라고는 하지 않았다. 알다시피 캐묻고 다닌 것은 신탁을 검토하기 위해 소크라테스 스스로가 찾아 낸 방법이었다. 소크라테스는 신의 지시라고 했지만, 실제로는 그 스스로 정립한 사명이 아닐까?
*13강은 28b~29c입니다.
14강. 신이 지시한 사명들 (2)
소크라테스는, 재판관들이 그가 캐묻는 삶을 그만두면 방면하겠다고 약속한다 해도, 신에게 복종하여 계속해서 캐물으며 다닐 것이라고 단언한다. 처음부터도 그랬지만 이쯤되면 재판에서 이기고자 하는 마음은 아예 없다. 강유원 선생은 소크라테스가 이 재판을 신명(神明)재판으로 이끌고 있다고 설명한다. 소크라테스는 神에게 판단을 맡기고 자신은 이 재판정을 아테나이 시민에 대한 연설의 장으로 삼는다.
<소크라테스의 변론>에서 가장 유명하고 가장 아름다운 문장이다. (혹은 그것들 중 하나다.) 아테나이인들에게 삶의 방식을, 그 근원인 신념의 체계를 바꾸라고 질타한다.
강유원 선생이 실감나는 비유들을 들어 설명하고 있는데, 내 식으로 바꾸면 이렇다. 형제자매들의 단톡방에서 아파트 매매와 벼락 거지에 대해 열띤 논쟁이 벌어지고 있는데, "언니, 클래스e에 '위기의 시대에 읽는 고전' 들어봐. 부와 명성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올바르게 사는 것이 중요하잖아." 라고 톡을 보낸다면? 나는 이런 미친 짓은 하지 않는다. 시기는 모르겠고 비방은 소크라테스가 들었음직한 비방을 듣게 될 것이 분명하니까.
<고르기아스, 1권 491e~492e>
소크라테스가 살았던 아테나이는 <고르기아스> 편에 나오는 바와 같이 우리 시대와 매우 닮았다. 무한히 욕망을 쫒고, 현명함과 용기로 욕망을 충족하는 것이 탁월함이며 행복이다. 명성과 명예와 재물을 위해 최대한 노력하는 쾌락 추구 사회이다.
이런 아테나이에서 소크라테스는 쫓아버려야 할 성가신 존재이다. 하지만 재판정에 세워야 할 만큼 성가신 존재라는 것은 역으로 소크라테스의 목소리가 그렇게 공허하지만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혼을 돌보라는 그의 외침에 공명하는 박수 소리도 상당히 있었고, 그것이 아마 쾌락을 탐닉하는 아테나이인들에게 뺨을 후려처진 듯한 분노를 일으킨 것이 아닐까.
"그러니까 아테네인 여러분, 지금 나는 나 자신을 위해서 항변을 하고 있는 게 전혀 아닙니다. 어떤 이는 그렇게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말입니다. 오히려 나는 여러분을 위해서, 즉 여러분이 나에게 유죄 표를 던짐으로 해서 신이 여러분에게 준 선물에 대해 뭔가 잘못을 범하지 않도록 하려고 항변을 하고 있는 겁니다 여러분이 날 죽인다면, 이런 유의 다른 사람을 쉽게 발견하지 못 할 테니까요. 좀 우습게 들릴 수도 있는 말을 하자면, 그야말로, 마치 크고 혈통 좋지만 큰 덩치 때문에 꽤 굼뜨고, 어떤 등에가 있어서 일깨워 줄 필요가 있는 말과도 같은 국가에 신이 붙여 놓은 그런 사람 말입니다. 신은 나를 바로 그런 사람으로 국가에 붙여 놓은 거라고 난 생각합니다. ( ....) 아마 여러분은 마치 꾸벅꾸벅 졸다가 깨어난 사람들처럼 짜증을 내면서 아뉘토스의 말을 따라 나를 탁 때려서 쉽게 죽이고는 나머지 삶을 쿨쿨 자면서 보내게 될지도 모릅니다. 신이 여러분을 걱정하여 다른 누군가를 여러분에게 보내주지 않는 한은 말입니다. " (30d~31a)
*14강은 29c~31d입니다.
15강 무죄를 애걸하지 않는 까닭
소크라테스의 법정 연설은 그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한 대중 연설이다. 소크라테스는 개인적으로는 누구든 만나서 캐묻고 조언도 하고 돌아 다녔지만, 공적으로는 대중들 앞에 나서지도 않고, 공적인 업무에 종사하지도 않았다.
<고르기아스. 해설>
<고르기아스>에는 소크라테스의 이런 사적인 삶이 아테나이인들에게 비웃음을 당했음이 드러나 있다. 구석진 곳에서 젊은이들과 소위 '지혜-사랑'을 하는 것은 어른답지 않으며 매질을 당할 한심한 일이라는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공적인 일을 하지 않은 것은 한마디로 목숨을 보전하여 신의 지시를 수행하기 위해서였다.
"여러분에게든 다른 어떤 다수 대중에게든 진정성 있게 반대하여 많은 불의와 불법이 국가에 생겨나는 것을 막으면서도 목숨을 보전할 사람은 인간들 가운데 아무도 없거든요. 오히려 참으로 정의를 위해 싸우려는 사람은, 잠깐 동안이라도 목숨을 보전하겠다고 한다면, 공적인 삶이 아니라 사적인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31e~32a)
오해해서는 안 될 것은, 강유원 선생이 강조하거니와, 소크라테스의 사적인 삶이 개인주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나이라는 폴리스가 어떻게 하면 정의롭고 올바른 공동체로 나아갈 수 있는지를 캐묻고 탐색하며 살았고, 마지막 남은 목숨마저 그 봉사를 위해 내던졌다. 소크라테스의 사적인 삶은 지극히 공적인 활동이었던 것이다.
<계몽이란 무엇인가? / 칸트>
<계몽이란 무엇인가>에서 칸트는 이성의 공적 사용과 사적 사용에 대해 길게 설명한다. 계몽은 이성을 공적으로 사용하는 것에 의해 진전될 수 있다.
예를 들면 공무원이 행정 업무를 수행하는 것은 이성의 사적 사용이다. 업무에 대한 지침과 공무원 법 등의 범위 안에서만 이성을 사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공무원도 직업에서 벗어나 공동체 구성원의 한 사람으로서 이성을 사용할 수 있다. 자신의 직책에 따라 복종할 수밖에 없었던 법에 대해서도 비판할 수 있고 비판해야만 하는 것이 이성의 공적 사용이다. 계몽을 위해서는 이성의 공적 사용이 항상 자유롭게 허용되어야 한다.
그런데 현실은 이성의 사적 사용과 공적 사용이 조화를 이루기 힘들다. 요즘에도 공무원에게 영혼이 있어야 하느냐 마느냐에 대해 의견이 분분한 것이 현실이다. 이성의 공적 사용과 사적 사용은 부딪히기 일쑤이다.
소크라테스가 당면한 문제도 이 딜레마였던 것 같다. 자신이 국가의 명령을 거부하다가 위험해 처했던 구체적인 사례를 열거하면서 아마도 공적인 활동을 계속했다면 이렇게 살아있지 못했을 것이라고 한다.
소크라테스가 '사적인 삶'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칸트에게는 '이성의 공적 사용'이고, '공적인 삶'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이성의 사적 사용'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믿는 바 정의롭고 올바른 공동체를 위해 '이성의 공적 사용'을 평생의 임무로 받아들였고 이를 위해 '사적인 삶'에 몰두했다.
15강의 제목으로 돌아가서 소크라테스가 무죄를 애걸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 정리해 보자.
첫째는 아름답지 못한 일이고 소크라테스 자신뿐 아니라 아테나이에도 수치이기 때문이다.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는데 죽음이 무서워서 동정에 호소하는 것은 웃음거리가 될 뿐이다.
둘째는 재판관에게 사적인 탄원을 해서는 안된다. 재판관은 사적 이해관계에 따라 호의를 베푸는 것이 아니라 정의를 판단해야 하기 때문이다.
셋째는 결과적으로 소크라테스 자신도 재판관도 신에 대해 불경하게 된다. 법에 따라 재판을 하겠다고 신에게 서약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아테네인 여러분, 내가 아름답지도 정의롭지도 경견하지도 않다고 생각하는 일들을 여러분에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말아 주세요. " (35d)
이렇게 1차 재판은 종결되었다. <소크라테스의 변론>은 제목 그대로 변론만 싣고 있기 때문에 재판의 과정이나 결과에 대한 별도의 언급은 없다. 1차 재판에서 소크라테스는 유죄 판결을 받는다. 기록에 따르면 전체 배심원 500명 중 280대 220으로 유죄가 결정되었다.
*15강은 31d~35d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