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강. 자신에 대한 규정과 세 집단과의 대화




이 대화편에서 가장 잘 알려진 내용이 이 부분이다. 소크라테스가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라는 평을 얻게 된 경위, 그리고 이를 검증 혹은 논박하기 위해 소크라테스가 아테나이에서 지혜롭다고 평판이 높은 사람들을 찾아가 그들의 무지를 확인하고, 신탁의 의미를 깨닫게 되는 과정이 서술되어 있다. 


카이레폰이라는 사람이 델피 신전에 가서 "소크라테스보다 더 지혜로운 사람은 없다." 라는 신탁을 받아 온 것이 이 모든 것의 발단이다.  소크라테스가 확신하는 단 하나는 자신이 어떤 점에서도 지혜롭지 않다는 사실이기 때문에 소크라테스는 이 신탁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다.  오랜 고뇌 끝에 소크라테스는 신탁을 검증해 보기로 하고, 지혜롭기로 이름난 사람들을 찾아 다니기 시작했다. 






처음 찾아간 집단은 정치가들이다.  정치인들을 한 사람 한 사람 찾아 다닌 끝에 소크라테스가 내린 결론은 그들이 아무 것도 모르면서 모른다는 사실조차 모른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이 사실을 조용히 알아 낸 것이 아니라 이 정치인들을 아포리아로 몰고 가는 논박 끝에 그들이 스스로의 무지를 대면하게 압박한다. 이 논박술을 엘렌코스라 한다. 





논박을 당한 사람들은 수치심에 분노한다. 그런데 이 수치심은 자기 자신을 향한 것이 아니라 타인을 향한 것이다.  아테나이 시민들 앞에서 자신의 무지가 드러난 것에 대해 부끄러워하며, 그렇게 만든 소크라테스를 미워하는 것이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자기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을 권한다.  사실은 모르면서 아는 것처럼 생각했다 혹은 보였다는 사실에 대해 부끄러워 하라는 것이다.  그것이 배움의 시작이다.  따라서 화가 난다면 그 대상은 자기 자신이어야 한다.  하지만 아테나이인들은 그 분노를 소크라테스에게 돌렸고 그것이 그를 법정에 세운 근본적 이유이다. 



<플라톤의 그리스 문화 읽기> 



다시 <변론>으로 돌아가서,  소크라테스가 찾아간 두 번째 집단은 시인들이다. 당대 아테나이의 시인은 일종의 시민 교육을 담당한 선생이다.  그들 역시 정치가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들은 멋진 말을 많이 지었지만, 그 말의 의미를 알고 있지는 못하다는 것이 논박술을 통해 드러났다. 






시인들은 자각적으로 시를 짓는 다기보다는 점쟁이가 신이 들려 예언을 하듯 그렇게 멋진 말들을 쏟아냈을 뿐이라고 소크라테스는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찾아간 집단은 장인들이다.  기술자들은 자신이 만드는 것들에 대해서는 정말 많은 실용적 지식을 알고 있다. 그런데 그들은 그런 이유로 자신이 다른 중대한 일들, 즉 정치적 일들에 대해서도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오류를 범한다. 이들 역시 소크라테스에 의해 그 무지가 드러난다. 


아테나이에서 가장 잘 나가는 세 집단을 이렇게 하나 하나 깨고 다닌 소크라테스가 미움을 샀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해 보인다.  소크라테스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잘났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잘나지 않았음을 인정하기도 어려울 뿐 아니라 그것을 드러낸 소크라테스를 증오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9강은 1권 20c~22e에 해당합니다. 







10강.  무지의 자각과 캐물음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미움을 받고 있고, 그것이 상당한 위험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이런 논박을 통해 신탁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 








"그런데 실은, 여러분, 신이야말로 진짜 지혜로우며 이 신탁을 통해서 인간적인 지혜는 거의 혹은 아예 가치가 없다는 말을 하려는 것 같아요. 그리고 신은 소크라테스가 이런 사람이라고 말하면서 내 이름은 그냥 덧붙여 사용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나를 본으로 삼으면서 말이죠. 마치 "인간들이여, 그대들 가운데 누구든 소크라테스처럼 자기가 지혜와 관련해서 참으로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가장 지혜롭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23a~23b) 


여기서 강유원 선생이 주목하는 것은 '인간적인 지혜'이다. 소크라테스는 신적인 지혜를 가진 사람이 아니라 인간적인 지혜를 가진 자이다.  인간적인 지혜란 자신의 오류 가능성을 인정하고, 나는 모른다에서 출발하는 겸손한 자세이다.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 진리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신적인 지혜를 가졌다고 자만하는 것이고 그런자야말로 실로 무지하고 오만한 자이다. 







예전에 어떤 책에서 본 말장난이 있다. 이 교묘한 말은 얼만 전 죽은 도널드 럼스펠드가 처음 사용했다.  그는 냉전 이후 미국이 일으킨 재앙적인 전쟁을 이끌었던 강성 매파이다.  여하튼 그가 사용한 known known, known unknown, unknown unknown은 이후 널리 회자되었다.  우리말과 어순이 다르기 때문에 언뜻 이해하기는 어렵다. 내가 이해한 대로 말해 보면, 알고 있는 것을 아는 것, 모르고 있는 것을 아는 것, 모르고 있는 것도 모르는 것이다. 여기에 정신분석의 무의식을 빗대 보자면 unknown known까지 보탤 수 있다. 알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







소크라테스의 인간적 지혜는 known unknown이다.  스스로를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아테나이 유명인들은 unknown unknown이다.  철학자는 중간자이다.  무지한 인간과 완전한 앎을 가진 신 사이에 있다.  무지한 자(unknown unknown)는 지혜를 사랑하지 않는다. 지혜가 무엇인지도 모르니까. 신(known known)도 지혜를 사랑하지 않는다. 이미 지혜로우니까. 여기서 사랑은 에로스이고, 에로스는 갈망이다.  무지에 대한 지라는 인간적인 지혜를 가지고 있으면서 신적인 지혜를 갈망하는 사람이 philo -sophia 를 하는 사람이다. 



"신들 가운데 아무도 지혜를 사랑하지 않고 지혜롭게 되기를 욕망하지도 않습니다. 이미 그렇기 때문이지요. 또한 다른 어느 누구라도 지혜로운 자라면 지혜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그런가 하면 무지한 자들도 지혜를 사랑하지 않고 지혜롭기 되기를 욕망하지도 않습니다. 무지가 다루기 어려운 건 바로 다음과 같은 점에서거든요. 즉 아름답고 훌륭한 자도 분별 있는 자도 아니면서 자신을 만족스럽게 여긴다는 것 말입니다. 자기가 뭔가를 결여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자가 있다면, 그는 자기가 결여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그것을 욕망하지 않습니다." <향연. 204a> 



플라톤은 <테아이테토스>에서 놀라움이 철학의 시작이라고 한다.  무지에 대한 자각이 철학의 출발점이라는 말이다.  관습은 우리가 사는 세계를 우리가 알고 있다고 믿게 하지만, 잠깐만 멈추어 되돌아 보면, 그리고 가만히 캐물어 보면 놀랍게도 알고 있는 것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 놀라움, 세계가 낯설어 보이는 것이 반성하고 탐색하게 만드는 힘이다. 







신탁의 의미를 이해한 소크라테스는 아테나이 사람들 또한 자신의 무지를 깨달아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실제로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자기도 모르는 말로 사람들을 선동하여 아테나이 민주정을 탐욕과 혼란에 빠뜨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소크라테스는 이것을 신이 내린 소명으로 받아들이고 평생을 신에 대한 이 봉사에 바침으로써 가난해 졌을 뿐 아니라 사람들의 미움과 비방을 받게 되었다.  아테나이인들의 대다수는 소크라테스의 캐물음을 받음으로써 자신의 무지를 발견하고 놀라기보다는 분노에 사로잡혔기 때문이다. 


아테나이인들은 신에 대해 재물을 바치고 정해진 의례를 치름으로써 신 또한 당연한 대가로 은혜를 주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런데 소크라테스의 신은 봉사의 대가로 그에게 가난을 주었다.  아테나이인들이 소크라테스에게 가진 혐의 중 '국가가 믿는 신들을 믿지 않고 새로운 신령스러운 것들을 믿음으로써' 에는 상반된 신 개념에 대한 위기 의식이 있다.  소크라테스는 일종의 거래 형태로서의 종교에 대해 부정적이었던 것이 분명하다.  숭배와 은혜의 맞바꿈은 쾌락주의에 기반한다고 생각했다. 근대의 공리주의와 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소크라테스가 종교를 거래가 아니라 봉사로 받아들인 것은 아테나이 사회에 만연한 쾌락주의(헤도니즘)에 대한 비판이기도 했다. 



* 10강은 23a~23c 입니다.  




추기 : 9강 및 10강과 관련 거스 리의 <희랍 철학 입문>에서 참고할 만한 내용을 덧붙여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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