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2 - 21세기, 희망의 미래 만들기, 개정판 살아있는 휴머니스트 교과서
전국역사교사모임 지음 / 휴머니스트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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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서와 두 달간에 걸친 세계사 공부를 마쳤다. 윤서가 아직 초등학생이고 시간도 그리 넉넉하지 않아 일단 2권 근대사를 유럽 중심으로 훑었다. 이 책의 취지와는 맞지 않지만 전 세계를 다루기에는 너무 방대한 분량이라 처음 세계사를 접하는 윤서에게는 부담이 될 것 같았다. 두 달 내내 내 이야기를 이해하고 있을까, 너무 어렵지는 않을까 걱정했는데, 개학하고 1권부터 다시 하고 싶다고 했다. 훨씬 많은 나라와 사건들이 나온다고 겁을 주었는데도 한다니 기특하다.

 

  사실 두 달간의 공부는 윤서의 공부라기 보다는 내 공부였다. 중학교 2학년 때 배운 것 말고는 나도 세계사를 체계적으로 읽어본 적은 없다. 강유원의 <역사고전강의>와 <인문고전강의>를 함께 읽으니 훨씬 재미있고 많은 공부가 되었다. 읽다보니 지도가 꼭 필요해서 <세계사 아틀라스>도 참고 하고 있다.

 

  윤서에게 세계사를 좀 가르쳐달라는 부탁을 받고 알라딘을 클릭하다 선택한 책이 <살아있는 세계사교과서>다. 우선 저자가 '전국역사교사모임'이라 신뢰가 갔다. 기존 교과서와 역사 교육의 문제점을 뼈저리게 느꼈을 선생님들이 쓴 책 보다 더 나은 책이 있을까 싶었다. 학자들처럼 깊지는 않아도 아이들이나 일반인들이 역사에 대한 개괄적인 흐름을 포착하는데 학교의 선생님들 보다 더 도움이 될만한 사람은 없을테니 말이다. 실제로 이 책은 그런 믿음에 충실하게 혹은 넘치게, 흥미롭고도 체계적인 역사서이다.

 

  이 책의 관점은  진보적이다. 역사적 사건을 선택하는 것에서도, 그것을 해석하고 설명해내는 것에서도 그런 관점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윤서에게 열심히 설명하다가 문득 내가 지금 너무 과격한 것은 아닌가 놀랄 때가 있다. 근대가 부르주아의 시대라고 설명할 때, 세계대전의 원인을 설명할 때, 자유주의 시장경제의 문제점을 짚을 때,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이 무엇을 주장하고 있는지 이야기할 때, 어린 시절 우리의 교육을 떠올리며 나는 속으로 깜짝깜짝 놀라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 덕분에 역사를 사건의 단순한 나열이 아니라 '살아있는 세계사'로서, 커다란 흐름으로서 읽어낼 수 있다.

 

  나는 이 책을 학생들뿐 아니라 어른들에게도 적극 추천하고 싶다. 세계사에 대한 기억이 너무 희미해졌거나, 역사적 인물의 이름이나 사건이 토막토막으로만 기억되는 어른들에게, 이 책은 빛바래고 조각난 기억들에 살아있는 숨결을 불어넣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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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헤겔 레스토랑 + 라캉 카페 - 전2권 Less Than Nothing 시리즈
슬라보예 지젝 지음, 조형준 옮김 / 새물결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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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부 식후 끽연

 

 

 

12_

4인방 : 공포, 불안, 용기 ...... 그리고 열정

 

 

 

0.

 

  바디우와 지젝은 친구다.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에서 지젝은 ‘진정한 우정’을 과시하며, 이 책을 바디우에게 바친다고 썼다. 그럼에도 혹은 그렇기 때문일까?, 지젝과 바디우 사이에는 항상 철학적 차이와 논쟁이 있어왔다.

   12장은 바디우와 지젝 사이의 차이를 ‘존재/세계/사건’ 이라는 3항을 중심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것은 “어떻게 헤겔을 구할 것인가, 어떻게 철저한 우연성이 지배하고 있는 우리 세계를 그를 위해 되찾아올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일련의 변주”이기도 하다.

 

   「존재 수준에서 다수들의 다수(성)는 ‘빗금 처진 일자’, 일자의 일자-되기의 불가능성으로서의 공백에 의해 보충되어야 한다. 출현 수준에서 세계언어-제약적인 것으로 파악되어야 한다. 각각의 세계는 주인-시니피앙에 의해 지탱되고 있는 것이다. 사건 수준에서 불안과 (죽음)충동의 ‘부정성’은 사건에 대한 긍정적 열정에 선행하는 것으로, 그것의 가능성의 조건으로 상정되어야 한다. p1417」

 

   빨간색 부분은 바디우의 입장이고, 파란색 부분은 이에 대한 지젝의 비판이다. 어쨌거나 지젝은 바디우에게 결여되어 있는 것이 ‘사건의 존재론’ 이라고 한다.

 

 

1. 존재 / 세계 / 사건

 

  바디우가 주장하는 세계들의 ’다수성’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바디우는 『세계들의 논리』에서, 존재의 순수 다수성으로부터 어떻게 (출현의) 세계가 등장하는가에 대한 답을 자신의 과제로 공언했지만 실제로 그는 그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바디우는 “존재론적 비정합성과 존재적 정합성 사이의 관계” , 즉 존재로부터 세계로의 이행을 “명확히 하는 데 실패하고 있다.” 셸링과 헤겔이 공유하고 있는 핵심적인 특징은, 존재의 선행하는 질서 속에 존재하는 어떤 종류의 긴장 또는 적대성이나 모순과 관련해 출현의 등장을 설명하는 것이다. 그런데 바디우에게 이것은 선험적으로 배제된다. 또한 바디우는 진리들이 어떻게 상이한 세계들을 가로지를 수 있는지도 실제로 설명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바디우가 설명하는 것은 무엇일까? 일단 ‘안 존재하는 것’ 이란 개념에서 시작하자.

 

   “만약 세계의 다수성이 세계 안에 나타난다면 이 다수성의 한 요소 그리고 오직 한 요소만이 이 세계의 안 존재하는 것이다.”고 바디우는 말한다. 간단히 말하면 마르크스의 프롤레타리아 개념과 같다.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모든 것이 될 것이다.” 의 ‘우리, 프롤레타리아’가 바로 안 존재하는 것이다. 지젝이 흔히 인용해왔던 용어로는 ‘part of no part' 일 것이다. 그렇다면 왜 모든 세계는 ‘안 존재하는 것’을 포함하고 있을까?

 

   「존재(환원불가능한 다수성)와 출현(원자들-일자들의 영역) 사이의 간극 때문에 존재와 출현(실존)의 통일(겹침)은 오직 부정적인 방식으로, 안 존재하는 것, (출현을 조절하는 초월론적 틀 내부로부터) 비-일자인 일자, 출현의 세계의 일부인 한편 그것에 의해 제대로 포함되지 않으며 최소한으로 그것에 참여하고 있는 원자 형태로 출현의 (초월론적) 공간 내에서만 나타날 수 있다. 이 안 존재하는 것이 세계의 증상적 비틀림의 점이다. 그것은 ‘보편적 단독자’로 보편성에 직접 참여하지만 이 세계 안에서 특정한 자리를 결여하고 있는 단독적 요소로 기능한다. 시니피앙의 논리의 형식적 수준에서 이 안 존재하는 것은 ‘시니피에 없는 텅 빈 시니피앙’, 특정한 의미를 모두 박탈당했기 때문에 의미의 부재, 비의미와 반대로 의미의 현존 자체만을 대표하는 0-시니피앙이다. p1427 」

 

   다시, 그렇다면 어떻게 사건은 세계를 -그것은 세계의 진리를 구현한다.- 변화시킬 수 있을까? 여기서 바디우의 ‘빼기’ 개념이 나온다. 어떤 상황 속으로의 몰입으로부터 물러나 그런 빠져나감이 상황의 다수성을 지탱하고 있는 최소 차이를 드러내고, 그것의 해체를 초래한다. 물론 이 빼기의 지점이 바로 안 존재하는 것, 즉 보편적 단독자이다. 프롤레타리아가 모호한 배경이 아니라 보편성의 직접적 담지자로 나타날 때 사건적 변형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바디우에게 제기해야 할 질문은 이것이다. 왜 사건은 세계의 초월성의 내적 법칙들 자체의 수정을 가리켜서는 안 되는가? 왜 실제로 우리는 하나의 세계에서 또 다른 세계로 나가지 않는가? 안 존재하는 것이 최대의 강도의 실존을 가진 존재로 변하려면 존재의 강도를 측정하는 규칙들 자체가 바뀌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세계의 증상적 비틀림의 점인 안 존재하는 것은 오직 또 다른 세계로 이행해야만 완전히 존재할 수 있도록 만들어질 수 있지 않을까? 

   늘 그렇듯이 지젝은 여기에 곧바로 답하지 않고 이 질문이 정말로 복잡하고 모호한 바디우의 사유로 우리를 이끈다고 말한다. 비정합성과 진리 사이의 관계가 그것이다.

 

 

2. 진리, 비정합성 그리고 증상적 점

 

   진리는 세계와 어떻게 다른가? 사건은 모든 상황(또는 세계)과 마찬가지로 증상적 비틀림의 점을 갖고 있는가? 진리-사건은 그저 하나의 세계로부터 또 다른 세계로의 이행일 뿐인가? 물론 바디우의 대답은 그렇지 않다 이다. 세계는 역사적이며 존재의 영역의 초월론적·역사적 조직화인 반면 진리는 영원한 것으로, 그것을 촉성하는 가운데 현실에 영원한 이데아를 촉성하게 된다. 세계는 인간적 유한성의 형성이며, 해석학적이다. 사건적 진리는 영원한 것이며 모든 가능한 세계 속에서 계속하여 우리를 사로잡는 영원한 이데아의 초역사적 지속이다.

 

   「세계와 진리-사건 모두 출현의 양식들이다. 세계는 출현의 초월론적 좌표들로 구성되는 반면 진리-사건은 출현한다기보다는 오히려 ‘빛나는 것’ 현실 속에서 발산되는 어떤 것이다. 세계의 지위는 해석학적이며 현실에 대한 우리의 경험을 규정하는 의미의 지평을 제공하는 반면 이데아의 지위는 실재로, 현실 속에서 흔적들을 식별할 수 있는 잠재적인 부동의 X이다. 다시 말해 세계의 보편성은 마르크스주의적인 이데올로기 비판적 의미에서 항상 기만적이다. 모든 세계는 증상적 비틀림의 점을 통해 찾아낼 수 있는 배제 또는 억압에 기반 해 있는 반면 진리의 보편성은 무조건적이다. 그것은 구성적 예외에 기반 해 있지 않으며, 증상적 비틀림의 점을 만들어내지 않는다. p1436 」

 

   세계는 증상을 만들지만, 진리-사건은 증상이 없는 보편성이라고 한다. 그런데 라캉은 사드는 칸트의 진리라고 말했다. 라캉에 대한 지젝의 해석은 칸트는 사드의 직접적인 진리가 아니라 증상이라는 것이다. 칸트가 자신이 발견한 진리를 어떻게 배신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증상으로서의 진리이다. 세계의 증상적 점과 칸트의 증상은 다른 방식으로 기능한다. 증상적 점은 세계 자체의 실패 또는 기만성을 가리키는 것으로서의 진리이지만, 칸트의 경우 혹은 이데아의 경우는 이데아에 대한 주체의 충실성이 실패했음을 가리킨다. 주체가 욕망을 타협해버렸다는 증언이다.

   근대성에 대한 아도르노와 하버마스의 생각을 대비시킬 수 있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계몽의 변증법’의 핵심은 파시즘과 같은 현상은 근대성의 증상, 그것의 필연적인 결과라는 것이다. 하버마스에게는 정반대로 그것은 근대성이 아직 완수되지 못했다는, 미완의 기획이라는 사실에 대한 증상 혹은 지표들이다.

 

 

3. 인간 동물은 없다

 

   이제 존재의 한가운데서 어떻게 사건이 폭발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할 때가 되었다. 바디우는 “사건은 주어진 상황의 일부에 다름 아니라는 것을, 존재의 파편일 뿐이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존재의 질서 속에 자신을 기입하는 존재 너머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양자물리학적으로 비유하자면 사건은 존재로의 기입을 통해 존재의 공간을 휘게 하지 않는다. 반대로 사건은 단지 존재의 공간의 이러한 휨 자체일 뿐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작은 틈, 존재의 비-자기일치, 존재의 질서의 존재론적 비-폐쇄이다. 사건과 존재 사이의 차이란 바로 중립적 관찰자 눈에는 그저 일상현실의 일부로 보일 뿐인 현실에서 발생하는 동일한 계열의 일들이 관여된 관찰자 눈에는 사건에 대한 충실의 기입으로 보이게 해주는 차이라고 할 수 있다.p1447」

 

   그러나 p1474에 가면 바디우는 이런 생각을 정정한다. 지젝 역시 그렇다. 10월 혁명은 관여된 혁명가에게만 일어난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끼친 것이 분명한 사건이었고 다만 그것에 반응하는 태도가 사람들에 따라 다를 뿐이다.

 

   이데아를 말할 때 바디우는 플라톤적이다. 그리고 바디우는 또한 칸트적인 입장을 드러낸다. 존재의 다수성과 특수한 세계(존재의 출현양식)를 구분하는 바디우의 입장이 그렇다. 즉자존재와 우리를 위한 존재를 구분하는 칸트적 입장과 일치한다. 이 관점에서는 사건과 존재 사이의 차이 자체는 우리 주관성의 유한성에 걸려 있게 된다. 우리의 유한성 때문에 존재의 무한성에 대해 중립적인 관점을, 존재의 파편으로서의 사건을 존재의 총체성 속에 위치시킬 수 있도록 해줄 관점을 받아들일 수 없다.

이런 칸트적 관점에 대한 유일한 대안은 헤겔적 관점뿐이다. 사건은 존재의 질서로 환원될 수 없다. 또한 그것이 즉자 존재로서 단지 ‘존재의 파편’ 이 아닌 것은 그것이 어떤 보다 높은 수준의 정신적 현실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존재의 질서 속의 공백으로부터 출현하기 때문이다. 봉합이 가리키는 것이 바로 이 공백이다.

 

   바디우는 필멸적인 ‘인간 동물’ 로서의 인간을 진리-공정의 행위자로서의 ‘비인간적’ 주체와 구분하고 있다. 지력과 도구를 사용할 수 있는 동물로서의 인간은 행복과 쾌락을 추구하며 죽음에 대해 걱정한다. 반면 오직 진리-사건에 충실한 주체로서만 인간은 진정 동물성을 넘어설 수 있다.

   그러나 인간 동물은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 존재는 태어날 때부터 동물적 제약들로부터 떨어져 나오며 그의 본능은 ‘탈자연화되며’, 죽음충동의 순환성에 휘말려 쾌락원리를 넘어 기능한다. 한마디로 바디우의 이론에는 죽음충동을 위한 자리가 없다. 인간을 동물과 구분해주는 것은 의식이 아니라 무의식이다. 동물들도 의식은 가지고 있지만 무의식은 없다. 무의식 또는 죽음충동의 영역만이 인간을 진리의 주체로 변형시키는 것을 가능하게 해준다. 오직 무의식을 가진 살아있는 존재만이 진리-사건의 용기가 될 수 있다. 단순한 동물적 삶과 사건의 기적을 대립시키는 바디우는 너무도 칸트적이다.

 

 

4. 바디우 대 레비나스

 

   레비나스하면 ‘타자’가 자동 연상된다. 레비나스에 의하면 주체는 무기력하게 고통 받는 타자와의 트라우마적 조우에 대한 반응으로 출현한다. 그러나 유약함만으로는 윤리를 설명할 수 없다. 윤리적 주체의 최소 두 가지 구성요소는 이 주체의 유약성과 불멸의 진리에 대한 충실성이다. 오직 불멸의 진리의 이런 현존만이 인간의 유약함을 상처 입은 동물의 유약함과 다르게 만들어준다. 그리고 여기에 하나 더 덧붙여야 할 것이 있는데 악마적 불멸성이다. 이것을 가리키는 프로이트적 용어는 이웃-물의 핵심 자체인 (죽음)충동이다.

   이웃은 보편성에 저항하는 단독자적인 심연이다. 그렇다면 보편화가 불가능한 이웃이 우리의 윤리적·정치적 활동의 궁극적 지평이란 말인가? 최고의 규범은 이웃의 타자성을 존중하라는 명령일까? 여기서 다시 질문해 보아야 한다. 윤리적 보편성이 정말 이웃이라는 심연의 배제에 기반하고 있는가 아니면 이웃을 배제하지 않는 보편성도 존재하는가? 대답은 그렇다 이다. ‘비-부분의 부분’에 기반하고 있는 보편성, 사회적 총체성 속에서 정해진 위치를 결여하고 있는 사람들, 그러한 총체성 속에서 ‘어울리지 않으며’ 그 자체로서 직접적으로 보편적 차원을 대변하는 사람들 속에서 전형적으로 볼 수 있는 단독자적 보편성이 그것이다.

 

 

5. 공포로부터 열정으로

 

   바디우의 ‘해방 정치의 네 가지 근본 개념’은 공포, 불안, 용기, 정의이다. 지젝은 정의를 열정으로 바꾼다. 왜? 일단 공포에서 시작하자.

 

   우리 실존의 토대 자체가 공포에 의해 산산 조각날 때, 단순한 존재적 두려움이 공포로 바뀔 때 즉 우리 존재의 존재론적 공백에 직면하게 될 때 우리는 바디우가 실용주의적·쾌락주의적인 ‘동물적 삶’이라 부르는 것으로부터 폭력적으로 뜯겨 나오게 된다. 그러나 바디우와 라캉 사이에는 궁극적 차이가 있다. 바디우에게 불안은 사건의 전제 조건이다. 반면 라캉에게 부정성은 본원적인 존재론적 사실이다. 인간 존재에게 그에 선행하는 ‘동물적 삶’은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공간이 하나의 사건을 위해 열리는 것은 오직 ‘정상성’의 모든 실정적 질서가 완전히 텅 비어 있는 것을 공포로 체험하는 것을 통해서일 뿐이다. 즉 바디우의 출발점은 긍정적인 기획 그리고 그에 대한 충실성인 반면 라캉에게 본원적인 사실은 부정성의 사실로, 진리-사건에의 충실은 이차적인 것, 하나의 가능성으로 그것의 공간은 부정성에 의해 열리게 된다.

 

   진리는 지식과 반대로 오직 관여된 시선만, 그것을 믿는 주체의 시선만 볼 수 있는 어떤 것이라는 개념을 포기해야 한다. 바디우 본인도 그 명제를 정정하고 있다. 사건은 항상 세계 내에서, 세계의 초월론적 좌표들 내에서 일어나며 ,그것의 출현은 세계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 누구도 그것을 무시할 수 없다. 10월 혁명을 무시하려는 자유주의자는 이전의 자유주의자와 동일한 사람이 아니다. 어떤 것을 모르는 것과 모르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은 전혀 다르다.

   사건은 처음 출현할 때 불안을 초래한다. 규정상 세계의 초월론적 좌표를 산산조각내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에게, 세상의 모든 주체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이 불안이며, 이 사건을 부인하거나 무시하는 것, 구세계의 좌표들 속으로 그것을 재통합하려는 것 등은 그러한 불안에 의해 촉발된 반응들, 사건의 트라우마적 충격에 대처하려는 반동적 방식들이다.

   하지만 오직 사건에 대한 본래적 주체적 충실성만이 불안을 열정으로 전환 시킬 수 있다. 그것은 불안을 해방투쟁의 열정으로 변형시킬 수 있는 용기를 보여준다. 이런 의미에서 불안은 열정의 필수적인 배경이다. 불안 없이는 열정도 없다. 열정은 그 자체로 시작되지 않으며, 형식적으로는 불안의 전환의 결과이다. 따라서 주체성의 출현은 사건에 대한 열정적인 승인이 아니라 불안에 한정된다.

 

 

6. 바디우와 반철학

 

   바디우와 반철학? 반철학이란 용어를 처음 사용한 사람이 라캉, 그리고 이것을 이어받아 발전시킨 사람이 바디우라고 한다. 그런데 바디우는 반-반철학자가 아닌가? 플라톤의 진리 개념을 수용한 바디우니까... 아닌가;; 바디우의 다수성 개념이 관련이 있는 건가? 6절을 다 읽어도 바디우와 반철학의 관계를 한마디로 요약하기가 힘들다. 이 책 전체가 다 그렇기는 하지만.

 

   반철학의 기본주제는 철학적 개념들 또는 재현의 네트워크로 환원될 수 없는 그리고 이 네트워크와 관련된 초과적인 순수한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마르크스에게는 사회의 현실적 삶이, 키르케고르에게는 실존이, 쇼펜하우어와 니체에게는 의지가 그렇다. 포스트-헤겔적인 반철학의 위대한 주제는 재현에 대한 현존의 전-개념적 생산성의 초과이다.

 

   바디우와 관련해 문제는 현존/재현이라는 쌍을 존재/세계/사건이라는 3항과 어떻게 관련시킬 것인가이다. 존재가 비정합적인 다수성의 현존을 가리키는 이름인 한, 그리고 세계가 그것의 재현을, 세계의 내재적인 초월론적 요소들에 의해 규제되는 정합적인 상황 속으로 이 세계가 조직화되어 들어가는 것을 가리키는 이름인 한 현존과 재현의 쌍과 관련해 사건을 어떻게 파악할 것인가?

   여기서 딱 부러지게 답을 요약하면 좋겠지만 잘 모르겠다. 단지 바디우가 역사로부터 존재론으로 한발 물러섰다는 것, 그리고 경제는 항상 정치경제학이라는 마르크스주의의 근본 통찰을 무시했다는 것 등의 설명이 이어졌다고만 써둔다. 이어지는 내용들도 다 관련성을 가지겠지만...

 

   다수성에 대한 반철학적 찬양이 놓치고 있는 것은 일자의 자신과의 비일치, 일자를 자신의 대립물의 출현의 형식 자체로 만드는 비일치다. 모든 일자를 내부로 부터 폭발시키는 것은 일자의 통일성을 전복시키는 복잡성이 아니라 공백은 모든 일자의 일부라는 사실이다. 일자라는 시니피앙, 다수성을 하나로 통일시키는 또는 총체화하는 시니피앙은 자기 자신의 공백의 이러한 다수성 속으로 기입되는 지점이다. 들뢰즈의 ‘최소 차이’를 빌려 말한다면, 현실적인 동일성은 항상 잠재적인 최소 차이에 의해 유지되고 있다.

 

   「라캉의 S1, (악)명 높은 ‘주인-시니피앙’ 또는 ‘팔루스적 시니피앙’은 역설적으로 ‘일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존재하는 것’은 모든 일자로 셈해진 것 한가운데서 원래의 이접을 구성하는 공백이라고 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일자로 셈해진 것은 항상 이자이다. S1은 ‘일자는 존재하지 않는다.’로 묘사할 수 있는 것의 수학소이다... 존재하는 것은 순수 다수가 아니라 이자이다. 아마 이것이 라캉의 핵심적 통찰일 것이다. p1490 」

 

   헤겔의 사유는 철학과 반철학 사이의 이행의 계기를 나타내고 있다. 주인담론으로서의, 다수성을 총체화하는 일자의 철학으로서의 철학과 실재는 일자의 파악을 벗어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반철학 사이의 이행.

 

   「헤겔에게서 일자 속에서-총체화하기는 항상 실패하기 마련이며, 일자는 항상 이미 자신과 관련해 초과적이며, 자체가 자신이 달성하려고 하는 것의 전복이며, 일자를 일자로 만들며 동시에 그것을 탈구시키는 것 -이것이 변증법적 과정의 모터이다- 은 일자에 내재적인 그러한 긴장, 이 이자-임이다. 다시 말해 헤겔은 실제로는 개념적 재현들의 네트워크에 외적인 실재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가 정기적으로 절대적 관념론자로 오독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서 실재는 상징적 재현들의 포괄적인 자기 관계적 놀이 속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내재적 간극, 장애물로서 복수하기 위해 돌아오며, 그것 때문에 재현들은 결코 자신을 총체화할 수 없으며, 그것 때문에 비전체이다. p149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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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으로서의 정치 나남신서 1190
막스 베버 지음, 전성우 옮김 / 나남출판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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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인문고전강의』중 마지막 4개의 고전에 대한 발제이다. 발제를 위해 베버가 대학에서 강의한 내용을 엮은 책인 『직업으로서의 정치』를 읽었다.  짧지만 근대국가와 정치, 폭력의 관계가 잘 정의되어 있다. 리뷰가 아닌 요약 자료라서 읽기용으로는 적합하지 않다.

 

 

 

 

『직업으로서의 정치』, 1919

폭력으로서 다스려지는 세계

 

 

베버, 1864~1920

 

 

31강 물리적 강제력, 근대국가의 수단

 

1. ‘모던modern’ 의 두 가지 의미

   ① 패러다임 : 15C부터 오늘에 이르는 세계를 구조적 틀의 측면에서 가리킬 때

   ② 역사적 시기 : 15C부터 19C 중반 (1850년대)까지를 근대, 그 이후를 현대라고 세분한다.

   ③ 근대적 패러다임 안에 역사적 시기로서 근대와 현대가 존재하며, 막스 베버는 근대에서 현대로 넘어가는 전환기의 학문적 태도를 잘 반영하고 있다.

 

2. 독일 국민국가의 가장 취약한 문제

   독일 시민계층이 정치적으로 성숙하지 못했다는 것인데 베버는 이론적 작업을 통해 이 시민계층을 교육시키려 하였다. 베버 사후의 나치즘을 예견한 우울한 통찰이라고 할 수 있다. (독일은 1차대전 막바지인 1918년에야 비로소 공화국 수립)

 

3. 근대의 정치란?

   ① 권력’에 참여하려는 노력, 권력 배분에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노력

   ② 정치의 탈도덕화, 탈가치화, 탈德화 : 마키아벨리에서 시작

   ③ 영혼을 구제하려는 자는 정치를 해서는 안 된다. 정치는 ‘폭력’의 수단을 통해서만 완수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4. 근대국가의 정의

   ①「근대국가는 ... 한 특정한 영토 내에서, 정당한 물리적 폭력을 지배수단으로 독점하는데 성공한 지배조직입니다. 원문 p30」

   ②「국가는 정당한 강제력이라는 수단에 기반 하여 성립되는 인간의 인간에 대한 지배관계입니다. 원문 p21」

   ③ "모든 국가는 폭력에 기초를 두고 있다.“ (트로츠키)

 

5. 폭력이란 무엇인가? : 법이나 국가 자체가 폭력

   “법은 법이다.” “아버지는 아버지다” : 합리적 근거 없이 폭력적으로 규정

 

6. 지배 정당성 : 전통적, 카리스마적, 합법적

 

 

32강 근대의 정치, 악마적 힘들과 관계 맺기

 

1. 근대정치 사상의 출발 : 홉스와 폭력

   홉스는 개인이 가진 폭력이라는 자연권을 절대군주에게 양도함으로써 인간은、 만인에 대한 만인의 전쟁상태로부터 시민사회로 이행한다고 주장했다. 사적권력이 공권력으로 양도된 것이다. 그러므로 근대국가는 처음부터 폭력을 독점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권리만을 가졌으며, 종교와 도덕과는 아무 관련 없는 서양만의 아주 독특한 개념이다.

 

2. 악마적 힘들과 관계 맺기 : 모든 폭력에는 악마적 힘이 내재해 있다.

   정치의 수단은 합법적으로 획득한 폭력이다. 그러므로 정치가는 모든 폭력성에 잠복해 있는 악마적 힘들과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다.

 

3. 절대윤리, 신념윤리와 책임윤리 : ex) 안티고네 와 크레온 ?

   절대윤리, 신념윤리는 무조건적 윤리를 주장하며 결과를 중시하지 않는다. 책임윤리는 인간의 평균적 결함들을 고려하여 그 결과를 중요시하는 윤리다.

 

4. 삶의 구원으로서의 정치, 도덕의 정치는 불가능한가?

  

 

 

 

『파놉티콘 Panopticon』 1791

기계화 되는 인간

 

벤담, 1748~1832

 

33강 이익이 모든 것의 중심이 되는 사회

 

1. 근대의 심성구조

   ① 근대 구성의 3가지 요건 : 국민국가, 자본주의, 합리주의(계몽주의)

   ② 『파놉티콘』: 합리주의의 심성구조가 어떤 방식으로 제도화되는지를 보여줌

 

2. 벤담의 시대

   ① 인간의 삶을 극적으로 바꾼 기술혁명의 시대

   ② 1765년 와트 증기기관, 1770년 산업혁명

   ③ 기계가 생산의 주체가 되고 인간의 몸이 기계에 맞춰 움직이는 시대

 

3. 계산 가능성과 유용성 : “내 인생의 모든 순간은 계산되어 있다.”

   「그가 설계했던 파놉티콘은 기술공학적인 아이디어이고, 그것의 원리는 유용성의 원리입니다. 철학적으로 말하면 파놉티콘은 공리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모든 것을 철저하게 경제적 질서 아래에서 계산할 수 있는 시스템이며, 노동가치설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p478」

 

4. 감옥 : 소유권을 인식시키기 위한 처벌 강화

   「다수의 죄수들은 과거에는 그다지 큰 범죄로 취급하지 않던 행위를 저질렀으나 새로운 처벌제도에서 처벌 대상이 된 사람들이었다. 이들 다수는 음식을 훔치는 등의 경범죄를 저지른 사람이나 노동하지 않는 거지나 유랑자였다. 이들에게 노동의 가치와 자본주의 경제 질서를 습득하게 하는 것이 사회 혼란을 해결하는 근본적인 방법이라 여겨졌으며 감옥은 이를 위한 교육 장소였다. p481」

 

 

 

34강 내면화되는 감시의 시선

 

1. 『파놉티콘』: “국가가 여러 주요 목적에 사용할 수 있는 정말 유용한 도구 - 벤담” (Ex 감옥, 병원, 학교 등) 즉 ‘돈벌이를 위한 사업계획서’

 

2. 파놉티콘을 통한 새로운 질서의 원리 :감독inspection

감각보다 상상을 자극’ 하여 공포를 내재화 시키는 도덕극장을 목표

 

3. 관리의 원칙 : 경제성의 원칙

   ① 벤담의 경제성은 곧 사적 이익이므로 감옥의 민영화를 주장 : 공정하고 투명할 것이라고 판단

   ② 공리주의의 사회적 효용이란 모든 새로운 현상을 실질적인 이익의 관점에서 판단하는 것이다.

   ③「권력에 대한 애정은 잠에 빠지는 것을 피할 수 없으나 금전적 관심은 잠을 자지 않는다. p496 」

 

4. 교화의 방식 : 노동

   사적 소유권과 노동의 가치를 확립하는 것이 감옥 교화의 목적이며, 노동을 통해 이윤을 창출할 수 있다.

5. 벤담의 문제점

   ① “여러 행정기관들이 입법부를 대체해 버리는 것 -폴라니”

   ② 근대 이후 의회를 경시하는 풍조는 벤담의 공리주의의 영향 : 유용성, 효율성

 

 

 

 

『거대한 전환』, 1944

현대 세계의 파탄과 혼돈의 시작

 

폴라니, 1886~1964

 

35강 자기조정 시장의 파탄

 

1. 폴라니의 ‘백년의 평화’

   ① 1815(나폴레옹 몰락) ~1915(Great War) : 빈체제로 시작된 보수반동 체제

   ② 국내정치 : 자유주의 입헌국가 - 사유재산권을 바탕으로 한 국가

   ③ 국내경제 : 자유주의 시장경제 - 토지, 노동, 화폐의 상품화

   ④ 국제정치: 세력균형 체제

   ⑤ 국제경제 : 금본위제

 

2. 붕괴의 원인 : 자기조정시장의 파탄(폴라니)과 자유입헌국가의 허구성(강유원)

   ① 자기조정 시장이라는 환상 : 토지, 노동, 화폐라는 상품화 불가능한 것마저 매매대상으로 삼은 자유주의 시장은 토대 자체가 불가능한 환상, 수요 공급의 원리에 맞지 않음

2차 산업혁명: 경기침제(1873) → 식민지쟁탈전 (세기말) → Great War (1914)

   ② 자유주의 입헌국가 : 데카르트적 자아의 몰락과 로크의 사적 소유권의 허구성

공동체와의 모든 연결을 끊고 오로지 개인으로만 존재할 수 있다는 데카르트적 개인중심주의나 노동의 산물은 오직 자신의 것이라는 로크의 사적 소유권 모두 허구적 사상

 

 

36강 물건으로 변해버린 인간

 

1. 개인주의와 자유주의의 병폐 : 인간 소외

 

2. 우리 삶의 최종 근거는 무엇인가?

   폴라니는 ‘자기조정 시장의 최종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 우리 삶을 시장에 통째로 맡길 수 있는 최종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와 같은 근본적인 물음을 던지고 있다. 벤담에게 그것은 이윤과 효율이었으며, 플라톤에게는 이데아, 단테에게는 ‘신의 사랑’ 그리고 공자에게는 ‘仁’ 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논어』

역사에게 묻는 인간

 

공자, BC 551~479

 

37강 정치적 현실, 유가의 출발점

 

1. 儒 : 장례절차 등을 조언하고 집행하는 집단

   ① 공자는 어릴 때 祭器를 가지고 놀기를 좋아했다.

   ② 공자는 전통을 익히고 예의와 올바름을 갖춘 군자를 지향했다.

 

2. 정치사상가, 공자

   『논어』는 제대로 된 정치를 위한 모든 것을 담고 있는 책

 

3. 不惑

   자신의 학문과 이론을 확고히 세우고 그것을 가르칠 수 있는 준비가 되었다.

 

 

38강 사심을 이겨내고 로 돌아간다

 

1. 사문斯文 : 문왕 사후의 문화전통 (공자는 내 몸에 있다고 말함) ↔ 사문난적

 

 

2. 이란? 克己復禮

   ① 를 기준으로 삼아 자신을 이기고 (克己)를 회복하는 것 (復禮)

   ② 상태가 아니라 끊임없는 극기복례의 활동

   ③ 이 활동은 역사 속에서 평가 받음

 

 

39강 ‘이 문화’의 보존과 계승

 

1. 군자란 인격적 완성에 도달한 사람이자 참다운 정치가

 

2. 「지식인의 역할은 사람들에게 자기 관조를 촉구하고, 관조할 때 기준으로 삼을 수 있는 당위를 제시하는 것입니다. p562」

 

 

 

40강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화내지 않는다

 

1. 공부법?

   ① 學而時習之

   ② 溫故而知新

   ③ 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

      ⒜ 사문을 배워서 연구하여 뭔가 보태진 사문을 만들어내는 것

          새로운 사문을 공론에 내어놓아 토론을 통해 검증받는 것

          즉, 배우고 생각해서 내놓은 것을 토론하면서 다시 배워야 한다.

      ⒝ 일반적인 해석은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그물에 갇힌 것처럼 어둡고, 생각만 하고 배우고 토론하지 않으면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위태롭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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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 정치사상 고전읽기 통합적 사유를 위한 인문학 강의 1
강유원 지음 / 라티오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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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유원의 『인문고전강의』를 공부하면서 그의『서구정치사상 고전읽기』를 참고하고 있다. 다음번 세미나 내용인 『통치론』부분을 조금 정리해 놓는다. 이글은 리뷰라기 보다는 일종의 발제문이다. 
 
 
 
 
『통치론』 

    
존 로크,  1689
 

  


  25강 물질주의적 인간관
  
 1. 『통치론』저술 동기 
    ① 토지 귀족 중심의 토리당과 산업상업 부르주아 계급의 정당인 휘그당이 ‘배척법안’을 둘러싸고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정치적 상황에서, 로크는 자신이 속한 휘그당의 이해관계를 옹호하고 그 당파성을 정당화하기 위해 『통치론』을 저술하였다. 
    ② 배척법안은 국왕의 권한에 대한 헌법적 제한을 강화하고 선출된 하원의 권리를 보호하며 찰스 2세의 가톨릭교도 동생인 제임스를 왕위계승에서 배척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서구정치 사상 고전 읽기』 p150) 
    ③ 처음에는 익명으로 출간할 만큼 위험을 무릅쓰고 휘그당을 옹호하였으나 명예혁명(1688)의 성공으로 ‘영광된 만년’을 맞이하면서, 『통치론』은 영국과 미국의 정치사상의 근간을 이루게 되었다. 출간은 1689년이었지만 저작은 명예혁명이 일어나기 전인 적어도 1683년에 완성된 것으로 인정된다. 
 
 2. 홉스의 자연권과 사회계약론 
    ① 「인간은 두려움과 이기심으로 움직이는 존재다. 자연 상태의 인간은 자연권을 가지고 있다. 그중에서 개명된 이기심을 가진 인간들이 자연법의 명령에 따라 시민사회로 이행한다. 이때 자연권의 일부를 절대주권에게 양도하는 사회계약이 만들어진다. 절대주권은 공권력을 가진다. 계약을 어긴 자는 공권력이 제재를 가한다. p379」
    ② 만인 대 만인의 투쟁이 이루어지는 자연 상태 즉 전쟁 상태에서 살아남으려면 계약을 통해 시민사회로 이행해야 한다는 것이고, 잉글랜드 내전(청교도 혁명 1642~1651) 을 고스란히 겪은 홉스는 최소한의 평화를 위해 『리바이어던』이라는 평화의 정치학을 제공했다.
  
3. 다윈의 진화론을 왜곡한 사회진화론  : “진화는 진보가 아닌 다양성의 증가다.” 
    ① 스티븐 J. 굴드는 진화론의 핵심을 “.. 국지적으로 변하는 환경에 우연히 가장 적합한 특성을 가진 개체들” 이 생존하게 되고, 이 개체들이 유전을 통해 “오랜 세월 유리한 변이가 축적되면서 진화적 변화”가 일어나는 것으로 요약했다.  다윈의 진화론은 경쟁을 통한 진화나 진보가 아니라 ‘변이’를 통한 생명의 ‘다양성’을 밝혀낸 이론이다.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적자생존’의 ‘적자’는 경쟁에 살아남은 강한 개체가 아니라 우연히 변화하는 환경에 잘 적응하게 된 변이체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사회진화론이 다윈의 진화론을 근거로 힘을 가진 놈이 진화되고 진보된 존재라고 주장하는 것은 다윈에 대한 왜곡 일뿐이다. 
    ② 한국 현대사에서 서구 근대 사상이 수용되는 전형적인 사례는 윤치호이다. 전통적 화이관, 기독교의 형식적 수용과 사회진화론적 세계관, 철저한 내선일체를 받아들임으로써 힘을 통한 제국주의적 지배를 근대화, 문명화의 길로 정당화하는 것이다. 친일파와 이어지는 뉴라이트 운동 역시 아마도 이런 사상적 근거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 
  



 26강 자유주의 국가의 목표 : 자산가의 이익을 극대화

 1. 『통치론』이해의 배경 지식
    ① 신흥 부르주아의 당파성을 대변하는 테스트 
    ② 인클로저 운동으로 경제적 이익의 맛을 알게 된 사람들, 로크도 속함
    ③ 부르주아들은 명예혁명을 통해 자신의 이익을 관철한 ‘자유주의국가’를 건설
    ④ 자유주의 국가의 목표는 자산가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국가 
 
 2. 『통치론』을 편집한 레슬릿의 정리
  「『통치론』은 역사적으로 굉장히 중요한 저작이다.
       존 로크가 전제왕정에 대한 역사적 공격을 개시한 것이 바로 이 책이다. - 지상의 통치자는 그들의 통치권을 신으로부터가 아닌 인간에 의해 체결된 계약으로부터 이끌어낸다는 것, 그리고 인민은 계약을 위반한 통치자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킬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논증하면서. 
       여기서 로크는 자연법사상과 인간의 자유와 평등에 관한 사상을 전개하는데, 이 사상들은 미합중국의 건국의 아버지들, 특히 토머스 제퍼슨에게 깊은 영향을 끼쳤다. 
      로크가 전개한 재산권 이론은 부르주아 사회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의 본질적인 사례이자 중요한 겨냥점이 되었다. p397」
   


27강 재산으로 증명되는 인간의 정체성 

 1. 『통치론』의 재산 property : 생명life, 자유liberty, 자산estate . 재산을 지키자는 것은 곧 자유를 지키자는 말과 같은 호소력을 지님. 서구근대사상에서 자유는 곧 재산인임이 드러나는 듯. 자유주의란 곧 재산을 늘리고 소유할 자유가 되는 듯. 
  2. 로크의 자연법 혹은 자연 상태 
    자신의 소유물과 인신을 처분할 수 있는 완전한 자유의 상태. 사적 소유권이 자연적 권리임을 역설
  3. 사회계약을 맺는 이유 : 이런 자유를 더 안전하게 누리기 위해 즉 재산의 보존 
  4. 로크는 인간의 권리, 자연 상태, 정치사회로의 이행 모두를 ‘재산’을 중심으로 설명한다. 인간의 가치는 재산의 소유와 재산을 위한 활동에 의해 결정된다.   
  


 28강 세계의 중심을 차지한 ‘소유권’  
  
1. 소유를 욕망하는 개인 : 자유주의 정치철학의 출발점 
    「사람들에게 세계를 공유물로 주신 하느님은 또한 그들에게, 삶에 최대한 이득이 되고 편의에 봉사하도록 세계를 이용할 수 있는 이성을 주셨다.p407 」
  소유에 대한 욕망의 도구로 전락한 이성에 대해 흄은 ‘이성은 정념의 노예’라 했다. 
  2. 노동가치설 : 공유물로부터 소유권을 만들어내는 ‘노동’ 
    자연이 제공한 것에 자신의 노동을 섞고 뭔가를 보태면 자신의 소유가 된다는 것. 노동이 소유권의 핵심요소이다. 토지 소유권은 합리화했지만 노동이 포함되지 않은 상속권은? 로크는 이 문제는 설명하지 못했다.   
    노동가치설이나 당파성 같은 개념은 흔히 오해하듯 마르크스주의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라 잉글랜드의 자유주의 정치철학에서 비롯되었다. 
  3. 소유와 합리의 일치 : 경제학은 인간을 합리적인 행위자로 전제한다.  부자는 합리적이고 가난한 사람은 비합리적 인간이 된다. 소유가 합리성의 기준이 된다. 
  4. 국가commonwealth 의 역할 : 부주아 계급의 소유권을 보호하는 도구 
    소유는 법적으로 보호받아야 하며, 소유를 침해하는 일체의 폭력으로부터 재산을 지키는 것이 국가의 임무. 로크의 국가는 소유권 보호를 최고의 임무로 삼는 경찰국가 혹은 도구적 국가
    로크가 사용한 국가는 state가 아닌 commonwealth이다. 즉 국가를 재산의 관점에서 바라고 있다. 영국에서 발전된 이 독특한 개념은  영연방의 공식명칭인 Commonwealth of Nations에 지금도 남아있다. 
  5. 인민의 저항권 : 부르주아 혁명론 
    정부가 동의 없이 개인의 재산을 건드리면 인민은 복종의 의무를 면제받고 혁명을 일으킬 수 있다. 이 때 로크의 인민은 합리적인 사람 즉 재산으로써 합리성을 입증할 수 있는 사람이다. 
  6. ‘인간’에서 ‘소유권’으로 
    「데카르트에서 인간은 세계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로크는 이것을 이어받아 인간의 소유권을 중심에 놓았습니다. 그러나 시대가 흐르면서 ‘인간’은 사라지고 ‘소유권’만 남았습니다. 다시 말해서 소유권이 세계의 중심에 놓이게 된 것입니다. 로크도 21세기가 이런 세상이 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p4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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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포클레스 비극 전집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소포클레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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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온 : 그리고 누구든지 자기 조국보다 친구를 더 소중히 여기는 자 역시 나는 조금도 존중하지 않소이다.  .. 우리를 지켜주는 것은 조국 땅이며, 조국이 무사히 항해해야만 우리가 진정한 친구를 사귈 수 있음을 내가 잘 알기 때문이오. 이런 원칙에 따라 나는 이 도시를 키워나갈 작정이오.

 

 

안티고네 : 나는 또 그대의 명령이, 신들의 확고부동한 불문율들을 죽게 마련인 한낱 인간이 무시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하다고는 생각지 않았어요. …아무튼 하데스는 이런 의식을 요구해요.

 

하이몬 : 아버지의 눈초리가 하도 무서워 일반 시민은 아버지의 귀에 거슬릴 만한 말은 입 밖에 내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저는 그 소녀를 위하여 도시가 이렇게 비판하는 소리를 어둠 속에서 들을 수 있습니다. “모든 여인들 중에서 가장 죄 없는 그녀가 가장 영광스러운 행위 때문에 가장 비참하게 죽어야 하다!”

 

클레온 : 나는 이 나라를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뜻에 따라 다스려야 하니?

하이몬 : 한 사람에 속하는 국가는 국가가 아닙니다.

레온 : 국가는 그 통치자의 것으로 간주되지 않느냐?.

 

 

『안티고네』는 오디푸스 3부작 중 내용상으로는 가장 나중의 이야기지만, 가장 일찍 쓰여진 소포클레스의 비극이다.  소포클레스의 현존하는 비극 7편은 대부분(혹은 모두?) 소포클레스 자신의 순수 창작물이 아니다. 전설로 전해져 오거나 역사상 존재했다고 알려진 이야기들을 비극의 형식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동침한 오디푸스도 이미 있던 있던 이야기이다. 그렇기 때문에 『안티고네』 - 『오디푸스왕』 - 『콜로노스의 오디푸스』 순으로 창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 앞뒤가 딱딱 맞는 이야기가 전개될 수 있었던 것 같다. 내용상으로는 오디푸스가 스핑크스의 비밀을 풀고 테바이의 왕이 되어서 신탁의 불길한 예언대로 어머니와 결혼하여 자식들을 낳고 비극적 최후를 맞는 『오디푸스왕』이 첫 번째이다. 어머니이자 아내였던 이오카스테의 브로치로 자신의 눈을 찌른 후 테바이에서 쫒겨나 방랑하던 오디푸스가 콜로노스에서 죽음을 맞는 『콜로노스의 오디푸스』가 두 번째다. 아버지 오디푸스를 끝까지 수발하던 안티고네가 테바이로 돌아가 오빠인 폴리네이케스의 시신을 묻어주려다 클레온에 의해 산채로 무덤에 갇히는 이야기인 『안티고네』가 마지막 작품이다.   

  디오니소스 축제의 하이라이트인 비극 경연대회를 보고 있던 아테나이의 시민들은 아마도 익히 알던 이야기들일 것이다. 그러므로 앞뒤 세세한 설명이 없어도『안티고네』의 두 오빠들이 왜 싸움을 하다가 한날 한시에 죽게 되었는지 궁금해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2500년 후의 아무것도 모르는 우리들은 이야기가 일어난 순으로 읽어야 내용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

 

  『안티고네』는  『오디푸스왕』만큼 유명하지는 않지만, 철학책을 읽다 보면 가끔 인용되는 것을 볼 수 있다. 헤겔같은 근대 철학자도, 라캉이나 들뢰즈같은 현대 철학자들도 언급하고 있다. 헤겔은 『안티고네』를 통해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을 대비하고 있다.

  당시 아테나이 시민들에게는 신들의 불문율과 인간의 도리를 주장하는 안티고네가 더 큰 정당성을 얻었던 듯 하다.  왕권을 차지하기 위해 외국 군대를 끌고 조국을 쳐들어온 폴리네이케스의 장례를 금지하고 국가의 법을 주장했던 클레온이 자식과 아내를 모두 잃고 파멸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

  그러나 지금 나의 눈에는 안티고네의 주장이 더 막무가내로 보인다. 클레온은 합리적인 반면 안티고네는 아무튼 신이 그렇게 원한다고 주장한다. 당연한 것이다. 우리 현대인은 여전히 '근대성'의 정신을 갖고 있다. 합리성이 판단의 절대 기준이다. '이성의 권위에 대한 계몽의 신앙' 이란 표현이 있다.  신으로부터 인간의 눈을 뜨게 한 이성 역시 또 하나의 신앙이다. 그 맹목적인 신앙으로부터 1,2차 대전이라는 대파국이 일어났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이성의 신앙 속에 산다. 또 다른 신을 찾아내기 이전에는 아마도 이성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다시 유일신으로 혹은 올림푸스의 신전으로 돌아갈 수도 없다, 안티고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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