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트] 헤겔 레스토랑 + 라캉 카페 - 전2권 Less Than Nothing 시리즈
슬라보예 지젝 지음, 조형준 옮김 / 새물결 / 2013년 7월
평점 :
품절


4부 식후 끽연

 

 

 

12_

4인방 : 공포, 불안, 용기 ...... 그리고 열정

 

 

 

0.

 

  바디우와 지젝은 친구다.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에서 지젝은 ‘진정한 우정’을 과시하며, 이 책을 바디우에게 바친다고 썼다. 그럼에도 혹은 그렇기 때문일까?, 지젝과 바디우 사이에는 항상 철학적 차이와 논쟁이 있어왔다.

   12장은 바디우와 지젝 사이의 차이를 ‘존재/세계/사건’ 이라는 3항을 중심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것은 “어떻게 헤겔을 구할 것인가, 어떻게 철저한 우연성이 지배하고 있는 우리 세계를 그를 위해 되찾아올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일련의 변주”이기도 하다.

 

   「존재 수준에서 다수들의 다수(성)는 ‘빗금 처진 일자’, 일자의 일자-되기의 불가능성으로서의 공백에 의해 보충되어야 한다. 출현 수준에서 세계언어-제약적인 것으로 파악되어야 한다. 각각의 세계는 주인-시니피앙에 의해 지탱되고 있는 것이다. 사건 수준에서 불안과 (죽음)충동의 ‘부정성’은 사건에 대한 긍정적 열정에 선행하는 것으로, 그것의 가능성의 조건으로 상정되어야 한다. p1417」

 

   빨간색 부분은 바디우의 입장이고, 파란색 부분은 이에 대한 지젝의 비판이다. 어쨌거나 지젝은 바디우에게 결여되어 있는 것이 ‘사건의 존재론’ 이라고 한다.

 

 

1. 존재 / 세계 / 사건

 

  바디우가 주장하는 세계들의 ’다수성’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바디우는 『세계들의 논리』에서, 존재의 순수 다수성으로부터 어떻게 (출현의) 세계가 등장하는가에 대한 답을 자신의 과제로 공언했지만 실제로 그는 그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바디우는 “존재론적 비정합성과 존재적 정합성 사이의 관계” , 즉 존재로부터 세계로의 이행을 “명확히 하는 데 실패하고 있다.” 셸링과 헤겔이 공유하고 있는 핵심적인 특징은, 존재의 선행하는 질서 속에 존재하는 어떤 종류의 긴장 또는 적대성이나 모순과 관련해 출현의 등장을 설명하는 것이다. 그런데 바디우에게 이것은 선험적으로 배제된다. 또한 바디우는 진리들이 어떻게 상이한 세계들을 가로지를 수 있는지도 실제로 설명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바디우가 설명하는 것은 무엇일까? 일단 ‘안 존재하는 것’ 이란 개념에서 시작하자.

 

   “만약 세계의 다수성이 세계 안에 나타난다면 이 다수성의 한 요소 그리고 오직 한 요소만이 이 세계의 안 존재하는 것이다.”고 바디우는 말한다. 간단히 말하면 마르크스의 프롤레타리아 개념과 같다.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모든 것이 될 것이다.” 의 ‘우리, 프롤레타리아’가 바로 안 존재하는 것이다. 지젝이 흔히 인용해왔던 용어로는 ‘part of no part' 일 것이다. 그렇다면 왜 모든 세계는 ‘안 존재하는 것’을 포함하고 있을까?

 

   「존재(환원불가능한 다수성)와 출현(원자들-일자들의 영역) 사이의 간극 때문에 존재와 출현(실존)의 통일(겹침)은 오직 부정적인 방식으로, 안 존재하는 것, (출현을 조절하는 초월론적 틀 내부로부터) 비-일자인 일자, 출현의 세계의 일부인 한편 그것에 의해 제대로 포함되지 않으며 최소한으로 그것에 참여하고 있는 원자 형태로 출현의 (초월론적) 공간 내에서만 나타날 수 있다. 이 안 존재하는 것이 세계의 증상적 비틀림의 점이다. 그것은 ‘보편적 단독자’로 보편성에 직접 참여하지만 이 세계 안에서 특정한 자리를 결여하고 있는 단독적 요소로 기능한다. 시니피앙의 논리의 형식적 수준에서 이 안 존재하는 것은 ‘시니피에 없는 텅 빈 시니피앙’, 특정한 의미를 모두 박탈당했기 때문에 의미의 부재, 비의미와 반대로 의미의 현존 자체만을 대표하는 0-시니피앙이다. p1427 」

 

   다시, 그렇다면 어떻게 사건은 세계를 -그것은 세계의 진리를 구현한다.- 변화시킬 수 있을까? 여기서 바디우의 ‘빼기’ 개념이 나온다. 어떤 상황 속으로의 몰입으로부터 물러나 그런 빠져나감이 상황의 다수성을 지탱하고 있는 최소 차이를 드러내고, 그것의 해체를 초래한다. 물론 이 빼기의 지점이 바로 안 존재하는 것, 즉 보편적 단독자이다. 프롤레타리아가 모호한 배경이 아니라 보편성의 직접적 담지자로 나타날 때 사건적 변형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바디우에게 제기해야 할 질문은 이것이다. 왜 사건은 세계의 초월성의 내적 법칙들 자체의 수정을 가리켜서는 안 되는가? 왜 실제로 우리는 하나의 세계에서 또 다른 세계로 나가지 않는가? 안 존재하는 것이 최대의 강도의 실존을 가진 존재로 변하려면 존재의 강도를 측정하는 규칙들 자체가 바뀌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세계의 증상적 비틀림의 점인 안 존재하는 것은 오직 또 다른 세계로 이행해야만 완전히 존재할 수 있도록 만들어질 수 있지 않을까? 

   늘 그렇듯이 지젝은 여기에 곧바로 답하지 않고 이 질문이 정말로 복잡하고 모호한 바디우의 사유로 우리를 이끈다고 말한다. 비정합성과 진리 사이의 관계가 그것이다.

 

 

2. 진리, 비정합성 그리고 증상적 점

 

   진리는 세계와 어떻게 다른가? 사건은 모든 상황(또는 세계)과 마찬가지로 증상적 비틀림의 점을 갖고 있는가? 진리-사건은 그저 하나의 세계로부터 또 다른 세계로의 이행일 뿐인가? 물론 바디우의 대답은 그렇지 않다 이다. 세계는 역사적이며 존재의 영역의 초월론적·역사적 조직화인 반면 진리는 영원한 것으로, 그것을 촉성하는 가운데 현실에 영원한 이데아를 촉성하게 된다. 세계는 인간적 유한성의 형성이며, 해석학적이다. 사건적 진리는 영원한 것이며 모든 가능한 세계 속에서 계속하여 우리를 사로잡는 영원한 이데아의 초역사적 지속이다.

 

   「세계와 진리-사건 모두 출현의 양식들이다. 세계는 출현의 초월론적 좌표들로 구성되는 반면 진리-사건은 출현한다기보다는 오히려 ‘빛나는 것’ 현실 속에서 발산되는 어떤 것이다. 세계의 지위는 해석학적이며 현실에 대한 우리의 경험을 규정하는 의미의 지평을 제공하는 반면 이데아의 지위는 실재로, 현실 속에서 흔적들을 식별할 수 있는 잠재적인 부동의 X이다. 다시 말해 세계의 보편성은 마르크스주의적인 이데올로기 비판적 의미에서 항상 기만적이다. 모든 세계는 증상적 비틀림의 점을 통해 찾아낼 수 있는 배제 또는 억압에 기반 해 있는 반면 진리의 보편성은 무조건적이다. 그것은 구성적 예외에 기반 해 있지 않으며, 증상적 비틀림의 점을 만들어내지 않는다. p1436 」

 

   세계는 증상을 만들지만, 진리-사건은 증상이 없는 보편성이라고 한다. 그런데 라캉은 사드는 칸트의 진리라고 말했다. 라캉에 대한 지젝의 해석은 칸트는 사드의 직접적인 진리가 아니라 증상이라는 것이다. 칸트가 자신이 발견한 진리를 어떻게 배신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증상으로서의 진리이다. 세계의 증상적 점과 칸트의 증상은 다른 방식으로 기능한다. 증상적 점은 세계 자체의 실패 또는 기만성을 가리키는 것으로서의 진리이지만, 칸트의 경우 혹은 이데아의 경우는 이데아에 대한 주체의 충실성이 실패했음을 가리킨다. 주체가 욕망을 타협해버렸다는 증언이다.

   근대성에 대한 아도르노와 하버마스의 생각을 대비시킬 수 있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계몽의 변증법’의 핵심은 파시즘과 같은 현상은 근대성의 증상, 그것의 필연적인 결과라는 것이다. 하버마스에게는 정반대로 그것은 근대성이 아직 완수되지 못했다는, 미완의 기획이라는 사실에 대한 증상 혹은 지표들이다.

 

 

3. 인간 동물은 없다

 

   이제 존재의 한가운데서 어떻게 사건이 폭발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할 때가 되었다. 바디우는 “사건은 주어진 상황의 일부에 다름 아니라는 것을, 존재의 파편일 뿐이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존재의 질서 속에 자신을 기입하는 존재 너머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양자물리학적으로 비유하자면 사건은 존재로의 기입을 통해 존재의 공간을 휘게 하지 않는다. 반대로 사건은 단지 존재의 공간의 이러한 휨 자체일 뿐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작은 틈, 존재의 비-자기일치, 존재의 질서의 존재론적 비-폐쇄이다. 사건과 존재 사이의 차이란 바로 중립적 관찰자 눈에는 그저 일상현실의 일부로 보일 뿐인 현실에서 발생하는 동일한 계열의 일들이 관여된 관찰자 눈에는 사건에 대한 충실의 기입으로 보이게 해주는 차이라고 할 수 있다.p1447」

 

   그러나 p1474에 가면 바디우는 이런 생각을 정정한다. 지젝 역시 그렇다. 10월 혁명은 관여된 혁명가에게만 일어난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끼친 것이 분명한 사건이었고 다만 그것에 반응하는 태도가 사람들에 따라 다를 뿐이다.

 

   이데아를 말할 때 바디우는 플라톤적이다. 그리고 바디우는 또한 칸트적인 입장을 드러낸다. 존재의 다수성과 특수한 세계(존재의 출현양식)를 구분하는 바디우의 입장이 그렇다. 즉자존재와 우리를 위한 존재를 구분하는 칸트적 입장과 일치한다. 이 관점에서는 사건과 존재 사이의 차이 자체는 우리 주관성의 유한성에 걸려 있게 된다. 우리의 유한성 때문에 존재의 무한성에 대해 중립적인 관점을, 존재의 파편으로서의 사건을 존재의 총체성 속에 위치시킬 수 있도록 해줄 관점을 받아들일 수 없다.

이런 칸트적 관점에 대한 유일한 대안은 헤겔적 관점뿐이다. 사건은 존재의 질서로 환원될 수 없다. 또한 그것이 즉자 존재로서 단지 ‘존재의 파편’ 이 아닌 것은 그것이 어떤 보다 높은 수준의 정신적 현실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존재의 질서 속의 공백으로부터 출현하기 때문이다. 봉합이 가리키는 것이 바로 이 공백이다.

 

   바디우는 필멸적인 ‘인간 동물’ 로서의 인간을 진리-공정의 행위자로서의 ‘비인간적’ 주체와 구분하고 있다. 지력과 도구를 사용할 수 있는 동물로서의 인간은 행복과 쾌락을 추구하며 죽음에 대해 걱정한다. 반면 오직 진리-사건에 충실한 주체로서만 인간은 진정 동물성을 넘어설 수 있다.

   그러나 인간 동물은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 존재는 태어날 때부터 동물적 제약들로부터 떨어져 나오며 그의 본능은 ‘탈자연화되며’, 죽음충동의 순환성에 휘말려 쾌락원리를 넘어 기능한다. 한마디로 바디우의 이론에는 죽음충동을 위한 자리가 없다. 인간을 동물과 구분해주는 것은 의식이 아니라 무의식이다. 동물들도 의식은 가지고 있지만 무의식은 없다. 무의식 또는 죽음충동의 영역만이 인간을 진리의 주체로 변형시키는 것을 가능하게 해준다. 오직 무의식을 가진 살아있는 존재만이 진리-사건의 용기가 될 수 있다. 단순한 동물적 삶과 사건의 기적을 대립시키는 바디우는 너무도 칸트적이다.

 

 

4. 바디우 대 레비나스

 

   레비나스하면 ‘타자’가 자동 연상된다. 레비나스에 의하면 주체는 무기력하게 고통 받는 타자와의 트라우마적 조우에 대한 반응으로 출현한다. 그러나 유약함만으로는 윤리를 설명할 수 없다. 윤리적 주체의 최소 두 가지 구성요소는 이 주체의 유약성과 불멸의 진리에 대한 충실성이다. 오직 불멸의 진리의 이런 현존만이 인간의 유약함을 상처 입은 동물의 유약함과 다르게 만들어준다. 그리고 여기에 하나 더 덧붙여야 할 것이 있는데 악마적 불멸성이다. 이것을 가리키는 프로이트적 용어는 이웃-물의 핵심 자체인 (죽음)충동이다.

   이웃은 보편성에 저항하는 단독자적인 심연이다. 그렇다면 보편화가 불가능한 이웃이 우리의 윤리적·정치적 활동의 궁극적 지평이란 말인가? 최고의 규범은 이웃의 타자성을 존중하라는 명령일까? 여기서 다시 질문해 보아야 한다. 윤리적 보편성이 정말 이웃이라는 심연의 배제에 기반하고 있는가 아니면 이웃을 배제하지 않는 보편성도 존재하는가? 대답은 그렇다 이다. ‘비-부분의 부분’에 기반하고 있는 보편성, 사회적 총체성 속에서 정해진 위치를 결여하고 있는 사람들, 그러한 총체성 속에서 ‘어울리지 않으며’ 그 자체로서 직접적으로 보편적 차원을 대변하는 사람들 속에서 전형적으로 볼 수 있는 단독자적 보편성이 그것이다.

 

 

5. 공포로부터 열정으로

 

   바디우의 ‘해방 정치의 네 가지 근본 개념’은 공포, 불안, 용기, 정의이다. 지젝은 정의를 열정으로 바꾼다. 왜? 일단 공포에서 시작하자.

 

   우리 실존의 토대 자체가 공포에 의해 산산 조각날 때, 단순한 존재적 두려움이 공포로 바뀔 때 즉 우리 존재의 존재론적 공백에 직면하게 될 때 우리는 바디우가 실용주의적·쾌락주의적인 ‘동물적 삶’이라 부르는 것으로부터 폭력적으로 뜯겨 나오게 된다. 그러나 바디우와 라캉 사이에는 궁극적 차이가 있다. 바디우에게 불안은 사건의 전제 조건이다. 반면 라캉에게 부정성은 본원적인 존재론적 사실이다. 인간 존재에게 그에 선행하는 ‘동물적 삶’은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공간이 하나의 사건을 위해 열리는 것은 오직 ‘정상성’의 모든 실정적 질서가 완전히 텅 비어 있는 것을 공포로 체험하는 것을 통해서일 뿐이다. 즉 바디우의 출발점은 긍정적인 기획 그리고 그에 대한 충실성인 반면 라캉에게 본원적인 사실은 부정성의 사실로, 진리-사건에의 충실은 이차적인 것, 하나의 가능성으로 그것의 공간은 부정성에 의해 열리게 된다.

 

   진리는 지식과 반대로 오직 관여된 시선만, 그것을 믿는 주체의 시선만 볼 수 있는 어떤 것이라는 개념을 포기해야 한다. 바디우 본인도 그 명제를 정정하고 있다. 사건은 항상 세계 내에서, 세계의 초월론적 좌표들 내에서 일어나며 ,그것의 출현은 세계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 누구도 그것을 무시할 수 없다. 10월 혁명을 무시하려는 자유주의자는 이전의 자유주의자와 동일한 사람이 아니다. 어떤 것을 모르는 것과 모르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은 전혀 다르다.

   사건은 처음 출현할 때 불안을 초래한다. 규정상 세계의 초월론적 좌표를 산산조각내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에게, 세상의 모든 주체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이 불안이며, 이 사건을 부인하거나 무시하는 것, 구세계의 좌표들 속으로 그것을 재통합하려는 것 등은 그러한 불안에 의해 촉발된 반응들, 사건의 트라우마적 충격에 대처하려는 반동적 방식들이다.

   하지만 오직 사건에 대한 본래적 주체적 충실성만이 불안을 열정으로 전환 시킬 수 있다. 그것은 불안을 해방투쟁의 열정으로 변형시킬 수 있는 용기를 보여준다. 이런 의미에서 불안은 열정의 필수적인 배경이다. 불안 없이는 열정도 없다. 열정은 그 자체로 시작되지 않으며, 형식적으로는 불안의 전환의 결과이다. 따라서 주체성의 출현은 사건에 대한 열정적인 승인이 아니라 불안에 한정된다.

 

 

6. 바디우와 반철학

 

   바디우와 반철학? 반철학이란 용어를 처음 사용한 사람이 라캉, 그리고 이것을 이어받아 발전시킨 사람이 바디우라고 한다. 그런데 바디우는 반-반철학자가 아닌가? 플라톤의 진리 개념을 수용한 바디우니까... 아닌가;; 바디우의 다수성 개념이 관련이 있는 건가? 6절을 다 읽어도 바디우와 반철학의 관계를 한마디로 요약하기가 힘들다. 이 책 전체가 다 그렇기는 하지만.

 

   반철학의 기본주제는 철학적 개념들 또는 재현의 네트워크로 환원될 수 없는 그리고 이 네트워크와 관련된 초과적인 순수한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마르크스에게는 사회의 현실적 삶이, 키르케고르에게는 실존이, 쇼펜하우어와 니체에게는 의지가 그렇다. 포스트-헤겔적인 반철학의 위대한 주제는 재현에 대한 현존의 전-개념적 생산성의 초과이다.

 

   바디우와 관련해 문제는 현존/재현이라는 쌍을 존재/세계/사건이라는 3항과 어떻게 관련시킬 것인가이다. 존재가 비정합적인 다수성의 현존을 가리키는 이름인 한, 그리고 세계가 그것의 재현을, 세계의 내재적인 초월론적 요소들에 의해 규제되는 정합적인 상황 속으로 이 세계가 조직화되어 들어가는 것을 가리키는 이름인 한 현존과 재현의 쌍과 관련해 사건을 어떻게 파악할 것인가?

   여기서 딱 부러지게 답을 요약하면 좋겠지만 잘 모르겠다. 단지 바디우가 역사로부터 존재론으로 한발 물러섰다는 것, 그리고 경제는 항상 정치경제학이라는 마르크스주의의 근본 통찰을 무시했다는 것 등의 설명이 이어졌다고만 써둔다. 이어지는 내용들도 다 관련성을 가지겠지만...

 

   다수성에 대한 반철학적 찬양이 놓치고 있는 것은 일자의 자신과의 비일치, 일자를 자신의 대립물의 출현의 형식 자체로 만드는 비일치다. 모든 일자를 내부로 부터 폭발시키는 것은 일자의 통일성을 전복시키는 복잡성이 아니라 공백은 모든 일자의 일부라는 사실이다. 일자라는 시니피앙, 다수성을 하나로 통일시키는 또는 총체화하는 시니피앙은 자기 자신의 공백의 이러한 다수성 속으로 기입되는 지점이다. 들뢰즈의 ‘최소 차이’를 빌려 말한다면, 현실적인 동일성은 항상 잠재적인 최소 차이에 의해 유지되고 있다.

 

   「라캉의 S1, (악)명 높은 ‘주인-시니피앙’ 또는 ‘팔루스적 시니피앙’은 역설적으로 ‘일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존재하는 것’은 모든 일자로 셈해진 것 한가운데서 원래의 이접을 구성하는 공백이라고 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일자로 셈해진 것은 항상 이자이다. S1은 ‘일자는 존재하지 않는다.’로 묘사할 수 있는 것의 수학소이다... 존재하는 것은 순수 다수가 아니라 이자이다. 아마 이것이 라캉의 핵심적 통찰일 것이다. p1490 」

 

   헤겔의 사유는 철학과 반철학 사이의 이행의 계기를 나타내고 있다. 주인담론으로서의, 다수성을 총체화하는 일자의 철학으로서의 철학과 실재는 일자의 파악을 벗어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반철학 사이의 이행.

 

   「헤겔에게서 일자 속에서-총체화하기는 항상 실패하기 마련이며, 일자는 항상 이미 자신과 관련해 초과적이며, 자체가 자신이 달성하려고 하는 것의 전복이며, 일자를 일자로 만들며 동시에 그것을 탈구시키는 것 -이것이 변증법적 과정의 모터이다- 은 일자에 내재적인 그러한 긴장, 이 이자-임이다. 다시 말해 헤겔은 실제로는 개념적 재현들의 네트워크에 외적인 실재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가 정기적으로 절대적 관념론자로 오독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서 실재는 상징적 재현들의 포괄적인 자기 관계적 놀이 속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내재적 간극, 장애물로서 복수하기 위해 돌아오며, 그것 때문에 재현들은 결코 자신을 총체화할 수 없으며, 그것 때문에 비전체이다. p149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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