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스 디킨스의 영국사 산책
찰스 디킨스 지음, 민청기.김희주 옮김 / 옥당(북커스베르겐) / 2014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신간 평가단의 1월 주목신간으로 『찰스 디킨스의 영국사 산책』을 추천했다가 떨어졌다. 다행으로 생각한다. 선택되었다면 조금 욕을 먹지 않았을까 싶다. 그런점에서 'thanks to'를 주시고 구매하신 분께 참 죄송하다. 관점과 취향은 다양하므로, 좋게 평가하셨을 수도 있지 않을까, 위안을 해본다. 그러셨으면 좋겠다.

 

『찰스 디킨스의 영국사 산책』은 역사책이라기 보다는 이야기책이라고 해야 더 어울릴 것 같다. 원제목은 <A Child's History of England> 다. 디킨스는 "아이들이 행복하게 읽을 수 있는 책, 쉽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역사책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이 책을 썼다." 고 한다. 처음부터 책으로 쓴 것은 아니고, 디킨스가 자신이 창간한 주간지에 3년 간 연재한 내용을 책으로 묶은 것이다. 1851년 1월부터 1853년 12월까지 연재했으니, 160여 년 전의 관점으로 쓴 영국 왕실의 역사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읽은 어린이들이 행복했을까는 잘 모르겠다. 책 전체가 피로 물들어 있기 때문이다. 디킨스는 영국의 역사를 철저히 왕위 계승을 중심으로 서술했다.  카이사르(BC 100~ BC44)가 브리튼 섬을 원정해 영국이 로마의 통치 아래 들어간 때부터, 제임스 2세를 몰아내고 명예혁명을 이룬 1688년까지, 약 1700여년의 영국 역사는 줄곧 왕위를 차지하기 위한 반란과 숙청, 전쟁의 연속이었다. 순조롭게 왕위가 계승된 때가 있기는 한가 의심스러울 정도다. 한번은 기억난다. 왕위다툼이 재앙적인 이유는 이것이 단순히 왕과 그를 둘러싼 정치세력 사이의 투쟁에 그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반대세력 간에 정쟁이 일어나면 영주들과 기사 그리고 농노들까지 브리튼 전체가 전쟁에 돌입한다. 마을이 온통 불타고 귀족들은 런던탑에라도 끌려가지만 농노들은 그 자리에서 몰살된다. 이런 피바람이 왕이 바뀔 때마다 반복되는 걸 읽고 있노라면, 도대체 당시의 민중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싶으면서, 조선이 백번 나았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이번 겨울은 내내 팟캐스트 <박시백의 조선왕조 실록>을 듣고 있다. 왕조 자체가 바뀌는 조선 개국의 혼란기에도 백성들이 뿌린 피는 그다지 크지 않다. 고려말 왜구나 북방 오랑캐의 약탈이 물론 있었지만, 그것이 정쟁의 결과는 아니다. 정도전의 찬란한 이상으로 국가의 기틀을 다잡았던 조선초를 거쳐 중기 그리고 후기로 갈수록 나라꼴이 가관이지만, 전주 이씨의 왕조 자체는 유지되어 왔다. 왜란이나 호란으로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었고, 몇 차례의 반정도 있었지만, 왕권을 놓고 백성들끼리 칼질하는 일은 없었다. 사대부의 나라 조선은 영국에 비하면 순탄했다 할 수 있다. 조선은 사대부들이 입으로 싸우는 나라였다면, 영국은 곧바로 칼과 대포로 싸우는 나라였다. 영국보다 조선이 낫다는 것이 아니라, 디킨스가 서술한 왕위계승 중심의 역사를 보면 그렇다는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디킨스는 거의 모든 왕을 욕한다. 그 유명한 엘리자베스 1세도 디킨스에게는 "자질은 뛰어났지만 거칠고 변덕스러운 데다 위선적이었으며, 나이 먹어서도 젊은 아가씨처럼 허영심이 심했다. 전체적으로 나는 자기 아버지를 쏙 빼닮은 엘리자베스가 마음에 들지는 않는다. p493"  디킨스가 유일하게 칭찬하는 통치자는 왕이 아니라 호국경 올리버 크롬웰이다. 청교도 혁명으로 잘 알려진 크롬웰은 잉글랜드 공화국의 호국경을 직함을 받아 최고 통치자로 군림했다.

 

이 책의 문제점은, 디킨스 자신에게는 처음부터 그런 의도가 없었기 때문에 문제가 아니었겠지만, 역사를 전체적으로 조망할 수 없다는 것이다.  크롬웰이 호국경이 됨과 동시에 영국은 영국 역사상 최초의 공화국(The Commonwealth of England, 1649~1660) 이 되었다. 그런데 이 중요한 역사적 사건에 대해 어떤 설명이나 해석을 하지 않는다.  다만 "크롬웰은 전과 똑같은 방식으로 의회를 정리했고, 장교 위원회는 잉글랜드 공화국 호국경의 직함을 주어 크롬웰을 잉글랜드 최고 통치자로 추대하기로 결정했다.p568" 고만 적는다. 의회에 관한 부분도 마찬가지다. 의회라는 것이 어떻게 탄생했고 어떤 의미를 가졌는지 역사적 해석을 하지 않는다. 그냥 언제부턴가 슬그머니 의회라는 말이 나오기 시작해서 의회와 왕이 대립하는 양상만을 상세히 기술할 따름이다.

 

디킨스가 19세기 중반의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지, 이 책을 쓴 목적이 아이들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서기 때문인지, 궁금하다. 역사를 고대, 중세, 근대로 나누고, 지금처럼 체계적으로 분석하고 해석하게 된 것이 언제부터였을까? 하여튼 영국 역사를 일목요연하게 알기 위해 선택할만한 책은 아니다. 오히려 내가 어릴 때 보았던 드라마 <조선왕조오백년> 과 비슷하다. 왕가를 둘러싼 암투들에 그 초점이 맞춰져 있다.  출판사는 "책 속에 등장하는 인물은 왕을 비롯한 통치자들뿐만이 아니다. 때로는 열렬한 지지를 보내고, 때로는 냉혹한 비난과 감시의 시선을 보내면서 함께 역사를 일구어온 수많은 민중의 삶과 그들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 이 책 전체에 깔려있다." 고 홍보하고 있지만, 그 수많은 민중은 화면의 배경처럼 깔려 있다. 이 책에 더 많은 것은 민중들 보다는 디킨스 자신의 감정적 개입이다. 거의 모든 국왕들을 멍청이나 악당으로 비난하며 못마땅해 한다. 무성영화의 변사나 셰익스피어의 광대(잘은 모르지만;;) 같은 추임새를 넣고 있다. 그러니 역사서로서 객관성은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 많은 약점에도 불구하고, 영국 역사라는 것이 우리에게는 남의 나라 역사이고, 영국의 아이들만큼이나 아는 것이 별로 없다는 점에서, 비교적 쉽게 1700여년의 영국 역사를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읽듯 훑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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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 2021-11-15 08: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고 보면, 로마제국 쇠망사를 쓴 에드워드 기번이 비잔티움 제국을 황권을 둘러 싼 배신과 음모로 점철된 치욕스러운 역사라고 매도한 것이 참 자가당착이란 생각이 들죠. 비잔티움 제국은 권력자끼리의 배신과 음모가 대부분이었지만 정작 기번의 나라인 영국의 역사는 힘 없는 민초들의 삶을 담보로 한 살육과 만행의 역사였는데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