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의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불교이다. 기독교에 대한 이해 없이 서양사를 공부하기가 어려운 것처럼 불교의 흐름을 모르고 한국사를 공부하기가 쉽지 않다.

 

석가모니는 기원전 563년 인도에서 태어났다. 인도는 브라만교를 믿는 엄격한 계급차별 사회였다. 석가모니는 카스트제도에 대항해 누구나 도를 닦으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평등사상을 전파했다.

 

불교는 기원전 3세기경 마우리아 왕조의 아소카왕에 의해 국가종교로 발전하며 널리 전파되었다. 당시 불교는 개인의 깨달음을 중시하는 상좌부 불교로 바닷길을 통해 주로 동남아시아로 전파되었다.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로 전파된 불교는 대승불교이다. 기원후 100년 무렵 북인도를 차지한 쿠샨왕조는 중국과 서아시아의 연결 통로를 차지하며 세력을 떨쳤다. 이 무렵 불교는 개인의 해탈이 아니라 더 많은 중생을 구제해야 한다는 사명을 갖게 되었다. 이때부터 불교 신앙을 이끄는 승려들의 교단 조직도 생기고, 불교 경전을 연구하고 교리를 가르치는 강의도 열렸다. 대승불교는 비단길을 통해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와 일본으로 전파되었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삼국 중 고구려와 백제는 4세기 소수림왕과 침류왕 때 각각 불교를 수용하였다. 4세기 중국은 위진남북조 시대로, 북부의 전진이 승려 순도를 고구려에, 남부의 동진이 인도 승려 마라난타를 백제에 보내 각각 불교를 전파하였다. 신라는 5세기 눌지 마립간 때 고구려의 묵호자가 불교를 가져왔으나, 6세기 법흥왕 때에 와서야 이차돈의 순교를 계기로 공인될 수 있었다.

 

석가모니의 불교는 평등사상을 중심으로 하였으나, 삼국시대 불교는 왕권 강화의 하나로 이용되었다. 군장국가 혹은 연맹왕국 단계의 국가를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로 전환하기 위해 영토 확장, 율령, 세습 체제를 구축했을 뿐 아니라, 이데올로기적 일체감을 부여하는 불교의 역할이 무엇보다 필요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불교는 크게 교종과 선종으로 나눌 수 있다. 교종은 경전을 중심으로 한 지식을 강조하고, 선종은 참선을 통한 깨달음을 강조한다. 지식에 대한 접근성이 일부 지배층에 한정되었던 고대에 교종은 왕권강화와 중앙집권화에 기여했다. 반면, 선종은 누구나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평등사상에 기초하고 있어 왕권을 약화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선종은 기존권력에 반기를 든 반란세력 혹은 혁명세력에게 인기가 높았다.

 

초기 우리나라에 들어온 불교는 교종이 중심이었고, 선종은 신라가 삼국통일을 하기 전후에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고 강력한 왕권을 확립했던 중기에는 선종이 별 인기를 끌지 못하다가, 신라 하대에 와서 지방의 호족 세력을 중심으로 유행하기 시작했다. 선종은 풍수지리와 함께 고려건국 세력의 이데올로기적 구심으로 작용하였다.

 

 

1. 원효

  

 

<한국사 능력 검정 시험>

 

삼국통일 전후로 교종은 다섯 개의 분파로 나누어졌다. 통일 전 계율종과 열반종이 개창되었고, 통일 후에는 법성종, 화엄종, 법상종이 개창되어 5교가 성립되었다. 교종은 의례적, 형식적, 지식추구적인 경향을 띠어 귀족에게 신봉되었다. 이 중 화엄종이 귀족층에서 가장 유행하였다.

 

원효(617~686)는 법성종을 창설하였으나, 교종을 통합하려 노력하였다. 원융회통, 화쟁 사상, 일심 사상 등이 불교 통합 작업의 결과인데, 다양한 사상이 모두 하나의 마음에서 나온다고 생각했다.

  

 <한국사 능력 검정 시험>

 

원효는 불교 대중화로도 유명하다. 왕실과 귀족 중심의 불교를 대중 불교로 확장하고 정토신앙을 도입하였다. 그는 ‘나무아미타불’ 즉 아미타불에 귀의한다는 염불만으로도 죽어서 극락정토에 갈 수 있다고 했다. 원효는 무애가를 지어 널리 퍼뜨렸다. 무애사상이란 “일체에 걸림이 없는 사람은 단번에 생사를 벗어난다.”란 말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무애의 자유는 그의 사생활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그는 어디에도 걸림이 없는 자유인으로 설총이라는 아들까지 두었다.

  

 

2. 의상

 

 

 <한국사 능력 검정 시험>

 

원효가 서민적이라면 의상(625~702)은 귀족적이다. 둘이 함께 당나라로 떠나다 원효는 해골 물 한 바가지로 돌아오고 의상만 당나라에 갔다는 이야기는 너무도 유명하다. 의상은 당나라에 가서 화엄의 이치를 깨닫고 돌아와 부석사를 창건하고 해동화엄종의 시조가 되었다.

 

 

   <한국학 중앙 연구원 : 화엄일승법계도>

 

화엄 사상의 특징은 현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서로 의존하고 관계가 있다는 연기緣起설에 있다. 연기緣起는 서로가 걸림 없이 통하고 서로 거듭되어 끊임없이 이어지는 것이다. 언뜻 이해되지 않는 어려운 말이나 모든 것이 연(인연)으로 이어져 있다는 것 정도로 알면 되지 않을까.. 여하튼 여기서 의상의 『화엄일승법계도』가 나온다.

 

의상도 불교의 대중화를 위해 실천수행을 강조했다. 원효가 아미타 사상인데 반해 의상은 관음사상을 강조했다. 의상은 낙산사를 창건하여 그 주존으로 관음불을 모셨다.

 

 

  

<한국사 함께 공부한 지인이 그린 것> 

 

선종은 삼국통일 즈음에 들어왔으나 신라하대에 와서야 지방의 호족세력을 중심으로 성행하였다. 불경의 습득보다는 참선을 중시하는 선종은 누구나 깨달으면 부처가 될 수 있다고 설파하였다. 부처가 곧 왕과 동일시되던 신라사회에서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은 누구나 왕이 될 수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신라 하대에 장군이나 성주를 자칭하며 새로운 나라를 꿈꾸던 호족들에게는 매력적인 사상이 아닐 수 없었다. 특히 승려 도선은 풍수지리설을 들여와 신라는 이미 국운이 다했다고 주장했는데, 풍수지리설은 선종과 결합하여 더욱 폭발력 있는 이데올로기로 작용하였다.

 

 

 

  <한국학 중앙 연구원: 화순 쌍봉사 철감선사 승탑>

 

호족의 지원으로 성장한 선종은 지방에 근거지를 마련하여 9산 선문을 성립하였다. 산 속에서 참선을 통해 깨달음을 얻고자 하였다. 신라 하대에서 고려 초까지 선종과 함께 승탑이 유행하였다. 탑은 원래 부처의 무덤인데, 깨달음을 얻은 누구나 부처이기 때문에 승려들의 사리를 모신 탑이 성행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의 불교는 고려에 와서 완성되었다. 태조 왕권은 훈요십조를 통해 연등회와 팔관회를 성대히 치를 것을 당부했다. 태조 때 실시된 왕사, 국사 제도와 승록사는 광종 때에 와서 더욱 강화되었다. 광종은 과거제를 시행하면서 승과를 포함시켰다.

 

고려 초기에는 여전히 선종이 유행하였으나 왕권이 점차 안정되면서 왕권 강화에 유리한 교종이 세력을 넓혀 나갔다. 광종 때의 승려 균여는 귀법사를 중심으로 화엄종을 성행시켰다. 문벌귀족들도 교종을 지원하였다.

  

 

3. 의천

 

  <한국사 능력 검정 시험>

 

대각국사 의천(1055~1101)은 문종의 아들이다. 왕자 출신의 입지 덕분에 송, 요, 일본 등 각지에서 방대한 규모의 불교 서적을 수집하고 『신편제종교장총록』이라는 목록을 만들었다. 흥왕사에 교장도감을 설치하고 이 목록에 따라 교장을 인쇄하였다. 교장은 불경에 대한 해설서이다.

 

의천 당시의 고려 불교계는 교종과 선종의 대립이 첨예하였다. 의천은 교종과 선종을 통합하는 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삼았다. 귀족출신인 의천은 교종의 입장에서 선종을 통합하려 하였다. 이를 위해 교관겸수를 주장하였다. 교관겸수는 불교의 이론적 가르침인 교敎와 실천수행 방법인 관觀을 함께 닦아야 한다는 사상이다. 이에 앞서 의천은 화엄종을 중심으로 교종을 통합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5교를 통합한 연 후에 다시 교종과 선종을 통합하려 했던 것이다.

 

의천은 중국에서 천태교학을 연구하고 돌아와 국청사를 완공하고 해동천태종을 열었다. 선교의 화합을 도모해 국론을 통일하고 통치 기반을 공고히 하기 위함이었다.

 

 

4. 지눌   

 

 

<한국사 능력 검정 시험>

 

지눌(1158~1210)은 무신 집권기에 활동한 승려이다. 문벌귀족을 누르고 정권을 잡은 무신세력은 선종을 강력 후원하였다. 그러나 교종과 선종은 의천의 사후에 다시 분열하여 대립하고 있었다.

 

   <한국사 능력 검정 시험>

 

지눌은 타락한 불교를 개혁하기 위해 결사운동을 전개하였다. 지눌은 수행공동체를 결성하고 <권수정혜결사문>을 발표했다. 처음에는 경상도 팔공산 자락의 거조암에서 시작했으나, 십 수 년 후에 조계산 송광사로 옮겨 결사운동을 지속하였다. 사람들이 몰려들자 송광사를 중창하고 이름을 수선사로 바꾸었다. 우리가 지눌의 불교개혁을 수선사 결사운동이라고 알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지눌은 정혜쌍수定慧雙주장했다.이란 마음을 집중하여 고요하게 하는 것이며, 혜란 지혜를 닦는 것이다. 정과 혜는 별개가 아니라 반드시 ‘함께 닦아야 한다.’ 지눌이 선종과 교종을 통합하기 위해 정혜쌍수를 내세운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의천과 달리 지눌은 선종의 입장에서 교종을 통합하려 하였다. 정혜쌍수의 바탕이 된 돈오점수도 깨달음을 먼저 얻은 연후에 계속해서 연마할 것을 주장한다.

 

지눌은 선은 부처의 마음이요, 교는 부처의 말씀이라고 정의하며, 이를 원래 하나인 선종과 교종을 통합하는 논리로 삼아, 조계종을 창시하였다.

 

 

5. 그 외  

 

요세는 수선사 결사와 대비되는 백련사(만덕사) 결사를 주창하였다. 천태종에서 시작해서 지눌의 권유로 참선에 참여하였으나, 정혜定慧가 무지한 일반대중이 수행하기에는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 천태종으로 돌아와 독자적인 결사운동을 전개하였다. 요세는 법화사상을 바탕으로 참회하고 염불하면 극락왕생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요세의 법화사상은 민간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백련사는 강진 만덕산에 위치한 만덕사를 개칭한 것이다.  

 

지눌의 대표 제자는 혜심이다. 그는 스승보다 더욱 참선에 치중했다. 혜심의 역사적 의의는 유불 일치설을 내세움으로써 불교국가인 고려가 유교국가인 조선으로 이행하는데 있어 사상적 거부감을 완화시킨 것이다. 혜심은 조계종의 2대 종사로 알려져 있다.

 

 

조선은 억불숭유의 나라이다. 조선 건국의 주역 정도전은 『불씨잡변』을 써서 불교를 비판했고, 태조 때 도첩제를 실시하여 승려가 되는 길을 엄격히 제한했다. 태종은 사원전을 몰수하고, 세종은 선교 36개 이외의 사찰을 철폐했다. 그러나 민간이나 심지어 왕비를 중심으로 하는 궁궐 여인들은 여전히 불교를 숭상하기도 했다. 특히 세조는 스스로 불교에 애착을 드러내어 원각사지 10층 석탑을 건립하고 간경도감을 설치하여 불경을 간행하기도 했다. 수양대군 시절에는 세종의 명으로 석가모니의 일대기인 『석보상절』을 간행하였다. 명종 때에는 수렴청정을 하던 문정왕후가 불교를 중흥시키려 노력했다. 보우를 등용하여 승과를 부활하면서 집권 사대부와 마찰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조선후기에는 양반지주나 부농거상들이 후원한 사찰들이 생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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