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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쁨의 집 1 ㅣ 펭귄클래식 25
이디스 워튼 지음, 최인자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08년 11월
평점 :
2009년 11월 23일 쓴 글입니다.
도서관의 서가를 훑어 가다가 <순수의 시대>에 눈이 멈춘 것은 순전히 슬라보예 지젝 때문이다. 그의 책에는 올렌스카 백작 부인과 아처의 은밀한 사랑이 이렇게 해석된다.
「이디스 워튼의 <순수의 시대>에서 젊은 뉴랜드의 물신은 그의 아내 자신이다. 그는 아내가 알지 못하는 한에서만 올렌스카 백작부인과의 불륜을 추구할 수 있다. 아내가 처음부터 그의 불륜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아처는 더 이상 백작부인과의 사랑을 지속할 수 없게 된다. 그의 아내가 죽고 더 이상 백작 부인과의 결혼을 방해할 사람이 아무도 없음에도 말이다. 」
지젝의 책에는 참으로 많은 영화와 책과 그림, 음악들이 등장한다. 어떤 것들은 여러 권의 책에 되풀이 인용되기도 하는데 그 중 하나가 <순수의 시대>이다. 나는 이디스 워튼을 한 번도 읽은 적이 없고, 더욱 솔직 하자면 이 이름을 알게 된 것도 지젝을 통해서이다. <순수의 시대>라는 영화에 대해서도 다만 니콜 키드만이 나오는 걸로 알고 있을 뿐이다.
하루만에 <순수의 시대>를 읽고, 그 다음날 <기쁨의 집>1,2권을 빌려왔다. 재미있는 것은 작가별로 정리된 서가에, <기쁨의 집> 바로 옆에 <열락의 집>이 나란히 꽂혀 있었다는 것이다. 기쁨과 열락이 동어일 수 있을까 잠깐 혼란스러웠다가, <기쁨의 집>을 읽기로 했다. 같은 책이긴 한데 번역 문체가 확연히 달라서 완전히 다른 느낌을 주었다. <열락의 집>은 마치 해방 전후의 한국 소설을 읽는 느낌이라고 할까.. 놀랍게도 2009년에 번역된 것인데도 말이다. 구약 성서에서 따온 the house of mirth의 mirth가 열락에 더 가깝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내가 읽었던 파멸한 여자들의 이름을 떠올렸다... 안나 까레리나, 보바리, 차탈레이..? 그 보다 스탕달의 적과 흙에서 줄리앙의 성별이 바뀐 것이 아닌가?
그러나 무엇보다 먼저 떠올랐던 것은 제인 오스틴의 여자들이다. <기쁨의 집>의 릴리에 비하면 <오만과 편견>의 엘리자베스는 얼마나 안전한 사랑 게임을 하고 있는 것인가? <오만과 편견>이 침대 머리맡에서 가슴을 두근거리고 들을 수 있는 동화라면, <기쁨의 집>은 벌떡 일어나 앉아 인상을 쓰고 읽어야 하는 냉혹한 이야기이다.
19C말~20C초 뉴욕 상류 사회의 위선과 허위와 공허가 릴리가 딛고 서 있어야 하는 얼음판 같은 현실이라면, 오스틴이 묘사한 영국 상류 사회의 위선은 다아시와 엘리자베스의 진정한 사랑을 위한 무대 장치로 여겨질 정도이다. 오스틴의 소설들은 브리짓 존스의 일기나 하이틴 로맨스물의 형태로 행복하게 반복(질이 떨어지긴 하지만;;) 될 수 있지만, 이디스 워튼의 소설은 1등만 기억하는 이 더러운 세상 (개콘의 술푸게 하는 세상은 얼마나 멋진 풍자인지!)에서 그 자체로 현실적인 의미를 가지며 우리 자신의 모습을 생생히 드러내고 있는 것 같다.
1등과 1등이 결혼하는 세상, 장동건은 고소영과만 결혼하는 세상에서, 장동건과 결혼하길 꿈꾸는, 가진 것 없이 콧대만 높은 아름다운 아가씨의 앞길이 얼마나 험난하고 비참할지 생각해 본다면... 루저녀 역시 그녀 자신이 가진 것이 달랑 170cm가 넘는 키 뿐이라면, 그녀의 앞에 놓인 것은 180cm가 안되는 루저남이거나, 키만 180cm가 넘는 또 다른 루저남일 가능성이 훨씬 높을 것이다.
그러니 소위 루저남들께서는 그렇게 핏대를 높일 필요도 없을 것이다. 위너를 꿈꾸는 태생적 루저녀의 비극적 행로가 이미 100년 전의 <기쁨의 집>에 고스란히 경고되어 있으니 어떻게 연민 없이 볼 수 있을까..
릴리는 아름답고 우아한 기품이 몸에 밴 상류계급의 아가씨다.
그러나 그녀에겐 그녀를 지켜 줄 부모도 없고 돈도 없다. 오로지 태생적인 아름다움과 명민함을 자산으로 상류 사회의 이 집 저 집에 유용한 식객으로 불려 다니고 있을 뿐이다. 그녀를 이 곤경에서 구해 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돈 많은 남자와 결혼하는 것 뿐이다. 그러나 그녀는 번번이 성공의 문턱에서 알 수 없는 이유들로 그 기회들을 스스로 놓치고 만다. 무엇인가 그녀를 가로막고 있다. 그렇게 계속해서 기회는 지나가고 그녀는 점점 궁지에 몰리게 된다. 경제적 곤궁 속에서 친구의 남편은 그녀의 얼마 남지 않은 돈을 투자해 주겠다고 하고 그녀는 아무 의심 없이 그 호의를 받아들이지만, 결국 그 돈은 투자의 대가가 아니라 그녀에게 모종의 호의를 기대하는 친구 남편이 지불한 일종의 부정한 돈임이 밝혀진다. 그녀는 친구로부터 버림받는다. 연이어 다른 돈 많은 귀부인이 그녀를 자신의 은밀한 사랑놀이에 대한 방패막이로서 이용하다가 그녀를 배반하고 그녀는 결국 상류 사회에서 완전히 추방당한다. 그녀는 다시 옛날의 상류 사회로 돌아가려는 열망 속에 계속해서 나쁜 선택을 하게 되고 그 결과 한 단계씩 한 단계씩 떨어지던 그녀는 결국 돌이킬 수 없는 추락을 한다. 결국 모자 가게의 견습공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처지가 되었지만 그녀는 결국 그 노동자의 세계에 적응하지 못하고 삶을 마친다.
「그리고 그렇게 자기 방어가 철저한 사람일수록 반드시 이기심을 분출할 한 가지 커다란 탈출구를 찾게 마련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릴리는 지금까지 그라이스 씨에게 아메리카나가 했던 역할을 자신이 대신할 작정이었다. 그가 아낌없이 돈을 쓸 만큼 충분한 자부심을 느낄 수 있는 단 하나의 소유물이 되려는 것이다. 릴리는 이런 식의 관대함이 사실은 천박함의 한 가지 형태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남편의 허영심과 자기 자신을 완전히 동일시해서, 그녀의 소망을 충족시켜 주는 것이 곧 남편에게는 가장 세련된 방식의 자기 탐닉으로 여겨지게끔 만들 것이라고 굳게 결심했다. 」
릴리가 상류 사회에서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은 바로 이런 것이었다. 상류사회의 관습에 수동적으로 얽매여 자동적으로 살아가고 있는 남자의, 완벽한 대상a, 주이상스가 되는 것이다. 아메리카나는 ‘역사적인 유물, 민담, 혹은 미국이나 미국인과 관련된 모든 자료’를 모아 놓은 일련의 간행물이다.(인것 같다) 릴리가 점찍은 이 남자는 역사학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단지 그것이 희소가치가 있다는 이유로 탐욕적으로 수집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릴리는 잘 알고 있다. 남자의 단조롭고 지루한 삶은 그 자체로 완벽하게 통제되는 것 같지만, 아무짝에 쓸모없는 과잉적 존재인 아메리카나라는 은밀한 탈출구에 의해 지탱되고 있다는 것을 릴리는 알고 있는 것이다. 릴리가 노리는 것은 릴리 자신이 바로 이 과잉적 존재가 되는 것이다. 아메리카나를 대신해 그녀 자신에게 막대한 돈을 쏟아 부음으로 해서 그 남자의 허영심은 완벽히 충족되고 바로 이 허영심이 그 남자가 속한 무의미한 세계, 자동적으로 돌아가는 상류 사회의 숨 막히는 속박, 공허로부터 그 남자를 지켜주는 환상의 역할을 하게 하는 것이다. 그 관대함은 그러나 천박함이다. 그 사회에 아무런 의문도 없는 그 남자는 그것을 관대함으로 믿고 그 자신의 세계가 아주 단단한 토대 위에 세워진 것이라고 생각하겠지만, 그녀는 그것이 천박함 혹은 그 남자의 의미 없는 세계를 가려주는 위태로운 장막일 뿐임을 느끼고 있다. 이것이 또한 그녀의 성공이 항상 마지막 문 앞에서 좌절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녀는 한 남자의 허영심과의 완벽한 동일시가 아니라 그녀 자신으로 살고자 하는 진정한 욕망에 의해 결국 상류 사회에의 정착에 실패하고 만다.
「비록 불만에 차서 다른 세계를 꿈꾼 적은 많지만, 그럼에도 릴리는 자신이 정말로 다른 세계의 축을 중심으로 맴돌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결코 해본 적이 없었다. 이 세계를 경멸하기는 쉬웠지만, 머물만한 또 다른 세계를 찾기란 몹시 어려운 법이었다.」
그러나 릴리에게는 대안도 없다. 상류 사회의 위선과 공허를 속속들이 알고 있지만 그녀는 그 세계를 떠나서 살 자신이 없다. 그녀에게 다른 세계란 더욱 나쁜 곳이다.
「릴리는 도시로 다시 돌아온 이후로 패리시 양의 셋집 계단을 자주 오르내리지 않았다. 거티가 베푸는 연민 속에는 무언의 질문들이 담겨 있었고 그것이 릴리에게는 짜증스러웠다. 자신과 너무나 판이한 가치관을 지닌 사람에게 자신의 상황에서 진짜 어려운 점이 무엇인지 솔직히 털어 놓기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엄격하고 절제된 거티의 삶이 한때는 자신의 삶과 너무나 대조적이어서 매력적으로 보이기도 했지만, 이제는 자신이 어쩔 수 없이 쫓겨 들어온 궁핍한 삶을 더욱 쓰라리게 상기시킬 뿐이었다.」
거티 패리시는 궁핍하게 사는 상류 계급 출신의 아가씨다. 어려운 노동자들을 도와주는 자선 활동을 하며 작은 수입으로 보잘 것 없는 생활을 유지하고 있다.
상류 사회의 모든 친구들과 지인들이 릴리를 버린 후에도 거티는 그녀를 위로하고 도와주려고 애쓴다. 거티는 릴리가 과거의 생활 방식을 모두 버리고 선하고 명민한 천성을 나누며 새로운 삶에 눈을 뜨기를 바라지만 릴리는 거티와 같은 삶을 받아들일 수 가 없다. 그곳은 어쩔 수 없이 쫓겨 들어 온 곳이지 그녀가 원하는 곳은 아닌 것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쫓겨서 막다른 골목에 이르는 것이지만, 상류 계급에 대한 환영에서 벗어날 수 없는 그녀는 그것을 인정할 수가 없다. 거기에도 삶이 있다는 것을. 혹은 그 곳에서만이 그녀가 그토록 소중하게 품었던 그 무엇, 그녀를 번번이 성공의 문턱에서 돌아서게 했던 그 무엇의 삶이 시작될 수 있다는 것을. 결국 거티의 삶을 받아들일 수도 없고, 완전히 자신을 하나의 허영으로, 허영 그 자체로 동일시하여 팔아 버릴 수도 없는 릴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없다. 그저 이 모든 것을 잊기 위해 잠드는 것 외에는...
이디스 워튼은 참으로 놀랍다. 그 시대의 소설가가 (물론 영미 문학을 잘 모르지만) 심지어는 여자 소설가가 (정규 교육을 받지도 못했는데) 이토록 냉철한 글을 쓰다니... 뒤집어 보고 또 그것을 뒤집어 보는, 반성하고 또 반성하는 글쓰기를 하다니... 그것도 이렇게 이해하기 쉽고 가슴에 와 닿는 이야기로 말이다.
이디스 워튼에게 여성 최초의 퓰리처상 수상자란 수식을 붙여 준 작품은 1920년에 발표한 <순수의 시대>이다. <순수의 시대>는 주인공들이 파멸하지 않는다. 올렌스카 백작 부인은 남편에게 돌아가지 않지만 아처와 불륜의 관계도 맺지 않는다. <순수의 시대>가 보여 주는 것은 오히려 어떻게 그 상류 계급의 사회가 위선과 공허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고 탄탄히 그 환상의 세계를 유지할 수 있는가가 아닐까 싶다. 아처는 머뭇거리고, 올렌스카 백작부인의 사촌동생인 아처의 부인과 그의 일가는 소리 없는 경고와 압력으로 올렌스카 백작 부인을 조용히 물러나게 하는데 성공했다. 한때 열정으로 타올랐던 아처는 순순히 그에게 주어진 세계 속에 침잠하였지만, 그것을 가능하게 했던 것은 올렌스카 백작 부인과의 은밀한 사랑에 대한 추억이었다.
올렌스카 백작 부인은 아처의 대상 a인 것이다. 물론 지젝은 아처 부인이야 말로 ‘물신’이라고 했지만 말이다. 아처의 올렌스카 백작 부인에 대한 사랑은, 혹은 사랑에 대한 환상은 아처 부인의 무지에 의해 지탱된다는 면에서는, 지젝의 말처럼 물신의 기능을 하는 것은 아처 부인이다. 30여년의 세월 동안 올렌스카 백작 부인을 사랑할 수 있게 만든 것은 아처와 올렌스카 백작 부인 사이를 가로 막고 있는 장애물인 바로 그 아처의 부인, 혹은 그 둘의 은밀한 사랑에 대한 아처 부인의 무지이다. 그러므로 그녀는 사랑을 유지시켜 준 대상이자 그것을 불가능하게 만든 대상이다. 그러나 지젝의 지적대로 아처는 그녀가 죽고 난 뒤에도 올렌스카 백작 부인에게 돌아가지 못한다. 아들을 통해 그녀가 죽기 전에 한 평생 아처와 올렌스카 백작 부인의 은밀한 사랑을 알고 있었다는 암시를 전해 들었기 때문이다. 아처 부인의 무지를 통해서만 작동하던 둘 사이의 은밀한 사랑이라는 환상은, 아처 부인이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을 앎에 의해서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빛 속에 노출된 고대 동굴의 벽화처럼. 그러나 아처가 자동으로 돌아가는 상류 사회에서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유지하며 그 긴 세월을 살 수 있었던 것은 올렌스카 백작 부인을 사랑하고 있다는 그의 환상이라는 면에서 아처의 대상 a는 또한 올렌스카 백작부인이라고 하고 싶다. 그러므로 아처는 올렌스카 백작 부인의 창문 아래에서 천천히 돌아선다. 어쩌면 그것만이 아처의 남은 삶을 지탱해 줄 수 있는 환상일지도 모르니까.. 오직 자신이 사랑했던 30년 전의 올렌스카 백작 부인만을 기억하는 것....
이디스 워튼의 두 작품을 읽으며 왜 지젝이 <순수의 시대>를 되풀이 인용하는지 알 것 같았다. 단순히 세 사람의 관계가 적절한 비유가 되기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그녀의 작품 전반을 흐르는 기조가 대상a와 환상, 그것에 의해 굴러가는 세계를 유비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물론 물신과 대상a, 주이상스의 개념에 대한 적확한 이해가 없는 상태에서 생각나는 대로 적어 보는 이 감상문이 얼마나 큰 위험을 내포하고 있을지 끔찍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오류에 대한 두려움은 오류 자체다라는 지젝의 말을 다시 한번 오인용하는 만용을 부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