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년 1~3권 세트 - 전3권
강풀 지음 / 재미주의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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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년 6월 22일 카페에 썼던 글입니다.

 

“지금부터 내가 검사고 이 총이 판사야.”

  영화 <부러진 화살>의 석궁을 떠올리게 하는 이 장면은 드라마 “추적자”의 첫 장면이다. 영화 <부러진 화살>이 전 성균관대 교수 김명호가 현실에서 쏘아 올린 화살을 스크린에 명중시킨 것이라면, TV에서 울리는 백홍석(손현주 역)의 총소리는 화면 밖 우리의 현실을 정 조준하고 있다. 그러나 법관을 겨눈 활, 법정을 울린 총이라는, 외형이 보여주는 것과는 정반대로 이들이 원하는 것은 법이 원칙대로 지켜지는 것뿐이다. 법전에 쓰인 대로 재판받기를 원하고, 죄 지은 자가 처벌받기를 바랄 뿐이다.

  비극의 시작은 이 당연한 바람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에 있다. 이유는 단순하다. 죄를 지은 자가 더 강하기 때문이다. 법이 중립적이지도 공정하지도 않다는 사실은 국회의원 강동윤(김상중 역)이 낮게 깔린 목소리로, “법대로 해야지” 라고 말할 때 극명하게 드러난다. 이 때 “법”은 보편적 합의나 절대적 가치가 아니라, 강자가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포장된 도구에 불과하다. 편리하게도 “법”은 대부분의 서민들을 자발적으로 복종하게 만드는 마법의 주문이다. 사악한 마법사들은 자신들이 만든 “법”이라는 주문으로 세상을 지배한다.

  사실 법은 대부분 상식적으로 작동한다. “법”이 주술력을 가질 수 있는 까닭도 거기에 있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 권력 스스로가 위협받을 때, 법은 본모습을 드러낸다. 중립적 가면 밑에 감춰진 법의 이면은 권력의 외설스런 욕망이다.

  그렇다면 어찌할 것인가? 바로 내가 무릎 꿇고 도와 달라 애걸했던 그 얼굴이, 나의 모든 믿음과 희망을 걸었던 그 얼굴이, 다름 아닌 범인의 얼굴이라면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법이 범죄의 도구라면 도대체 진실은 어떻게 밝힐 수 있을 것인가?

 

 

  강풀의 만화 <26년>이 이제 정말 영화로 만들어 진다. 출연자도 발표되었고, 첫 촬영에 들어갔다는 소식도 들린다. 지난 번 청어람에서 모집한 클라우딩 펀드가 실패했을 때, 아!.... 했다. 십만 명이 만원씩이면, 만 명이 십 만원씩이면 10억인데, 결과는 4억을 채우지 못했다. 카드결재만 가능하다는 문제도 있었고(나는 인터넷상에서 카드를 사용하지 않는다. 그래서 남편 카드를 흙..), 홍보의 문제도 있었겠지만, 광주 비디오를 보면서 이를 갈며 울었던 사람들이 도대체 얼마인데, 그럴 수 있는가 싶었다. 게다가 소위 “그 사람”은 그 유명한 29만 원짜리 도깨비 통장으로 별의별 호화생활을 하다하다, 최근엔 육군사관학교에 거액을 기부하고 사열까지 받았다고 하니, 세상이 뒤집혀도 단단히 뒤집혔다.

  국가내란죄의 수괴로 1심 사형선고, 2심 무기징역형을 받았고, 김대중의 요청으로 당시 김영삼 대통령이 사면했으니, “그 사람”에 대한 법적 단죄는 끝났다. 그래서 광주는 이제 끝난 것인가? 5.18은 애도를 마쳤는가?

  만화 <26년>은 그에 대한 단호한 응답이다. 끝나지 않았다. 현실은 여전히 그 때 그 시간에 붙잡혀 있다. “그 사람”은 경호원과 추종자에 둘러싸여 역사를 농락하며 활개를 치고 있다. 죽은 시민군의 자식들은 고통과 분노 속에 숨죽이고 있고, 학살의 죄책감은 암처럼 계엄군의 목숨을 갉아먹고 있다. 진실은 기록도 되기 전에 벌써 잊어지고 있다. 무엇이 끝났다는 말인가?

  법과 정치는 서둘러 “그 사람”을 용서하고 광주를 봉합하려 했다. 그러나 사죄도 없는 용서와 화해는 한바탕 쇼에 지나지 않았다. 이득을 챙긴 자들과 구경꾼들이 흥에 취해 떠난 자리에, 진정으로 상처받은 자들만이 모멸과 분노 속에 남겨졌다. 광주에서 벗어나길 누구보다 간절히 염원했던 그들만이. 이 현실이 <26년>의 그들을 모았다.

 

 

  사적 복수를 해야 하는 시대는 병들었다. 사적 복수로 내몰린 사람들은 처절하게 고통 받는다. 그러나 눈을 감고 살 수도 없다. <추적자>의 강동윤은 잡혀온 백홍석에게 소리친다. “왜! 왜! 왜! 왜! 포기하지 않는 거야!” 백홍석은 말한다. “난 수정이 아버지니까.” 백홍석이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딸의 죽음이 아니다. 딸의 죽음이 왜곡되고, 이용되는 방식이다. 짓이겨진 딸의 죽음은 딸을 정당하게 애도하고 떠나보낼 수 없게 만든다. 백홍석이 원하는 것은 거창한 정의가 아니다. 지지율 60%를 웃도는 대통령 후보의 사악한 실체를 만천하에 드러내야 한다는 사명감 따위는 더욱 아니다. 그런 것은 어떻게 되어도 좋다. 곱게 잠재운 딸 위에 그 자신 곱게 잠들 수 있기 위해서일 뿐이다.

  그러나 여기서 사적 복수는 뜻하지 않게 공적 정의와 만나게 된다. “추적”을 통해 드러나는 진실은, 공적 정의가 무너진 곳에서는 초라할 정도로 소박한 개인의 꿈마저도 보호될 수 없다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자신을 정략적 목적으로 도우려는 변호사에게 백홍석은 여전히, 싸움은 니들끼리 하라고 냉소하지만, 정작 그 자신은 점점 더 정치의 한 복판으로 떠밀리게 된다.

  만화 <26년>의 사적 복수는 훨씬 더 직접적으로 공적 정의와 일치한다. 사적 형식을 빌고 있지만, “그 사람”에 대한 처결이 정의의 실현이 아니라면 그 무엇일 수 있을까. “그 사람”이 주창한 ‘정의 사회 구현’이라는 도착적 구호는 “그 사람” 자신에게 돌아갈 때에야 비로소 그 의미를 획득할 것이다.

 

 

  만화 <26년>은 2006년 연재 당시 “일일 조회 수 200만 건과 매회 댓글 수 2,000 건 이상”의 기록적인 관심을 받았다. 이 관심은 그것 자체로 “그 사람”에 관한 공적 심판이기도 하다. <26>년의 그들은 사적 복수를 실행하지만, 만화<26년>이 표적하는 것은 공적 정의의 천명이다. 어떻게 보면 모든 사적 복수의 목적은 복수가 가진 정당성에 대한 공적 승인일 지도 모른다. 그것이 덧없는 복수가 될지, 여론의 전폭적 지지를 얻는 정의의 실현이 될지는 대중들의 평가에 달려있다.

  만화가 강풀은 <26년>에 관한 다음과 같은 작품 후기를 남겼다.  영화 <29년> 역시 그렇게 제작되었으면 좋겠다. 그것이 성공한다면, 재밌다는 소문만으로 영화관을 찾은 사람들조차 화인처럼 찍히는 그 무겁고 슬픈 역사에 뜨겁게 가슴을 불태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또 하나의 시작이 될 것이다. 정의란 그것에 관한 이야기가 시작될 때, 그것에 대한 공적 담론이 피어날 때, 드디어 첫 발을 디딜 것있기 때문이다.

 

 

사전 조사를 하고 직접 취재를 하면서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나는 이렇게 무거운 역사적 사실을 어떻게 만화로 풀어낼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이런 슬픔과 아픔을 만화로 풀어낼 수 있을까.

어떻게 이 만화를 그리는 것이 옳은 것일까.

.......

오랜 고민 끝에 나온 결론은 두 가지 였습니다.

첫 번째.

“무조건 재미있게 하자.”

내가 대중 만화가이니 다른 것은 다 차치하더라도

무조건 재미있게 그려서 더 많은 사람들이 보게 하자.

어떠한 방식의 전개를 하고, 어떤 소재를 끌어 쓰더라도

그것 하나만이라도 제대로 해보자.

무조건 재미있어야 한다.

두 번째.

“현재의 이야기를 해야 한다.”

우리는 광주 이야기를 할 때는 항시 과거의 시제로 이야기하게 된다.

광주의 이야기는 과거가 아니라

지금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현재 진행형의 사건이다.

광주로부터 지금까지

살아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자.

그 날의 아픔을 간직한 채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지금 현재에서 벌이는 이야기를 하자.

무조건 재미있게 그려서 더 많은 사람들이 읽게 하고,

지금 현재의 이야기로 현 시대 사람들의 공감을 얻도록 하자.

그런 고민 끝에 나온 만화가

바로 “26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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