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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양이로소이다 - 개정판
나쓰메 소세키 지음, 임희선 옮김 / 더블유출판사(에이치엔비,도서출판 홍) / 2009년 10월
평점 :
품절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제목만 보고 현대 소설인 줄 알았다. 작가들의 트윗에 고양이 자랑이 하도 많아서, ‘고양이’라는 글자만 보고 또 어느 고양이 집사가 쓴 책이라 속단했다. 그야 물론 내가 ‘나쓰메 소세키’란 이름도 몰랐고, 일본 문학이라는 것 자체에 깜깜하기 때문이다. 뭐 그 유명한 ‘하루키’도 한 권 읽어보지 않았으니 길게 말할 것도 없다. 일본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반일감정 따위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다. 곰곰 생각해보니 어릴 때 일본 대하소설에 물려서 그런 것 같다.
막내 외삼촌과 오랫동안 한 집에서 살았다. ROTC 장교 복무를 끝내고 돌아오면서 외삼촌이 일본 대하소설을 여러 질 가져왔다. 제목이 기억나는 건 『대망』이고, 그 외에 료칸의 하녀로 시작해서 거부가 되는 여자 이야기, 우리로 치면 거상 김만덕 정도 될까?, 뭐 그런 대중소설(?)이었다. 국민학교 6학년 무렵이었으니, 책의 가치는 잘 몰랐지만, 진짜 재미있었다. 수 십 권의 책을 사탕 빨듯 빨아 읽었는데, 그러고 나서 뭔가 일본적인 것에 대한 감각 혹은 선입견이 생겼던 것 같다. 실컷 먹고 질려버린 것처럼 정형화된 인물과 한결같은 성공 스토리에 흥미가 뚝 떨어졌다. 그 이후로는 일본소설에 손을 대지 못했다. 『설국』은 읽었던 것 같은데, 역시 일본 냄새를 맡았던지, 그다지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지 않다. 이후로는 누가 뭐래도 일본소설은 읽고 싶지 않았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는 말하자면, 숙제니까 읽었다. 독서회 선정 책이니 어쩔 수 없었고, 한편으로는 일본소설에 대한 선입견에서 벗어나면 좋겠다는 마음도 있었다. 선입견이란 보존할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니까. 결과는 성공이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는 내가 읽었던 일본소설과는 전혀 달랐다. 1905년에 시작해서 1906년까지 연재된 소설인데, 그러니까 러일전쟁 직후였고, 심지어 을사늑약 체결기의 소설인데도 일본소설에 대한 반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책 안에 러일전쟁이란 말이 몇 차례 나오고 조선인삼이란 말도 한 번 나오지만, 제국주의적 시각도 반제국주의적 시각도 드러나지 않는다.
이 소설은 풍자소설이다. 서구문물을 받아들여 자본주의 체제가 생활 깊숙이 침투하기 시작한 시기의 (일본역사니 대충 짐작만할 뿐이다.) 지식인과 자본가에 대한 비판? 이라고 하면 될까? 여하튼 그 비판, 그 비꼬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다. 600쪽 가까이 되는데, 앞부분 반 정도는 정말 낄낄대며 읽었다. 뒤쪽으로 갈수록 글이 늘어져 파안대소할 기회를 상당히 상실하긴 했지만, 이만하면 최근에 읽은 책들 중 유쾌․ 상쾌․ 통쾌하기로 한두 손가락 안에 든다. 100여 년 전의 작품에 이렇게 웃을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현대적이기도 하고, 어쩌면 우리가 일본보다 많이 뒤져 쫒아가기 때문일 것도 같고, 소세키 할아버지의 글 솜씨가 뛰어나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이도 저도 아니면 봄바람이 허파를 파고들었거나.
‘나’는 고양이다. 팔자 좋게 사람 집사를 거느린 그런 고양이는 아니고, 식모 발길에 채이고, 애들한테 노리개로 시달리고, 몰래 먹다 들켜서 캑캑 거리는 옛날고양이다. 배가 고파 그냥 들어온 집에 눌러앉아 사는 눈치꾸러기지만, 인간 못지않은 총기와 혜안을 갖고 있다. 마침 눌러앉은 집의 주인이 학교 영어 선생이고, 주인뿐 아니라 주변 인물들이 괴짜들이어서, 보고 듣고 느낀 대로 쓴 글이 이렇게 훌륭한 풍자소설이 되었다. ‘나’는 이 소설의 화자, 이름도 없는 고양이(로소이)다.
‘내’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사람은 물론 주인인 쿠샤미 선생이다. 아내가 연말 선물로 연극을 보여 달라고 하니까, 갖은 핑계를 대다가 결국 나가기 직전에 오한이 들리는데, 연극시간이 지나자마자 씻은 듯이 나아버리는 그런 사내다. 그러고도 벗겨진 아내의 정수리를 보고 시집올 때 말하지 않았다고 시비를 한다. ‘내’가 비판하는 것은 이렇게 쪼잔한 사내가 지식인을 자처하며 보이는 행태다. 주인은 어느 날 편지 한통을 받고 “상당히 의미심장하네. 아무래도 어지간히 철학적인 논리를 연구한 사람인 모양이야. 대단한 식견이군.” 하며 감탄한다. ‘내’가 보기에는 정말이지 알아보기 힘든 문장이다. 결국 이 편지는 어느 정신병자가 보낸 것으로 밝혀진다.
「주인은 무엇이든 이해가 잘 되지 않는 것을 대단하게 여기는 버릇을 가지고 있다. 이런 버릇은 굳이 우리 주인에게만 한정된 일이 아닐 것이다. 이해가 되지 않는 것에는 무시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잠복해 있고, 헤아릴 수 없는 부분에 대해서는 뭔가 대단하다는 느낌이 들게 마련이다. 그러니까 보통 사람들은 모르는 것을 아는 것처럼 떠들고, 학자들은 아는 것도 알아듣지 못하게 말한다. 대학 강의에서도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하게 말하는 사람은 평판이 좋고, 알아듣게 설명하는 사람은 인기가 없다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주인이 이 편지에 감탄한 것도 의미가 명료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 취지가 어디에 존재하는지 도무지 파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갑자기 해삼이 나오기도 하고, 고뇌의 똥이 등장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인이 이 문장을 존경하는 유일한 이유는 도교에서 도덕경을 존경하고, 유교에서 역경을 존경하고, 불교에서 임제록을 존경하는 것과 매한가지로 전혀 뜻을 모르기 때문이다. 다만 전혀 모르는 채로 있어서는 마음이 놓이지 않으니까 자기 멋대로 주석을 붙여서 뭔가 이해한 척한다. 모르는 것을 알았다고 착각하며 존경하는 것은 예로부터 기분이 좋은 일이다. 주인은 공손하게 두꺼운 글씨의 명필을 둘둘 말더니 이것을 책상 위에 그대로 둔 채 품안에 손을 넣고 명상에 잠겨 있다. p409」
홍상수의 영화가 풍자하는 것과 비슷하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떠들고, 잘 알지도 못하는 것으로 사람들을 속여 넘긴다. 그렇다고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가치가 없다고 생각해야 하는 걸까? 오늘날의 문제는 지식을 숭배하는 것보다 지식을 폄하하는 것에 있는 것은 아닐까? 어쨌거나 100년 전에는, 아무리 일본이 우리보다 빨랐다고 해도, 100년 전에는 지식에 대한 무조건적인 숭배가 풍자의 대상으로 매우 정당하고도 급진적이었을 것 같다.
그렇지만 ‘나'의 주인은 오늘날 유능한 사람보다는 고급의 인간이다. 무능하기 때문에 고급이다. 지금 세상의 유능함은 거짓말로 남을 속이고, 허세로 남을 위협하고, 함정을 파서 남을 떨어뜨리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세상의 유능함이 이것이다. 주인은 잔꾀를 부리지 못하기 때문에, 무능하다는 점 때문에 고급하다.
여기에 서양문명에 대한 비판이 등장한다. 주인의 철학자(?) 친구 도쿠센이 주로 이 비판의 담당자이다.
「서양인들의 방법은 다 이런 식이야. 나폴레옹이든 알렉산더이든 승리하고 만족한 사람이 하나도 없네. 남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싸움을 하네. 상대방이 항복하지 않으면 법정으로 끌고 가는 거야. 법정에서 이기면 그것으로 끝났다고 생각하는데 천만의 말씀이지. 마음의 안정은 죽을 때까지 애써봐야 될 일이 아닌 거야. 과인정치가 나쁘다고 의회체제로 만들지. 의회체제가 쓸모없다고 또 다른 것을 하려고 드네. 강물이 문제라며 다리를 걸고 산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터널을 파지. 교통이 힘들다고 철도를 깐다네. 그렇게 한다고 영원히 만족할 수 있는 것이 아니야. 그렇다고 인간인데 어디까지나 적극적으로 자기 뜻을 관철시킬 수도 없지 않은가. 서양 문명은 적극적, 진취적일지 모르지만 말하자면 불만족스럽게 평생을 살아가는 사람이 만든 문명일세. 일본의 문명은 자기 이외의 상태를 변화시켜 만족을 얻으려는 것이 아니야. 서양과 가장 다른 점은 근본적으로 주변의 환경이 움직일 수 없는 것이라는 커다란 가정 하에서 발달해 왔다는 것일세. p388」
우리의 관점으로 이런 말을 일본인이 한다는 것이 신기하기까지 하다. 일본이 서양처럼 딱 그렇게 했고, 덕분에 우리는 나라를 짓밟혔다. 1867년에 태어나 1916년에 사망한 소세키로서는 일본의 제국주의적인 침략에 대해서 무지했을까? 아니면 서양문명을 추종하는 일본이 그렇게 될까봐 두려워 경고하고 있는 것일까? 여하튼 소세키는 서양문명의 적극성을 비판하고 있는데, 그렇다고 동양의 소극성이 더 나은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때 소극성은 현재 존재하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을 말한다. 군신관계든 부부관계든 계급관계든. 그런 면에서 여전히 카스트제도가 존재하는 인도보다 더 동양적인 곳이 있을까?
서양문명 중에서도 소세키가 가장 신랄하게 비판하는 것은 자본주의다. 주인과 한동네에 사는 실업가 가네다의 위력은 대단하다. 돈의 힘을 인정하지 않는 주인을 가네다는 갖은 방법으로 괴롭힌다.
「정말이지 실업가의 세력은 대단한 것이다. 타다 남은 석탄 같은 주인을 흥분하게 만드는 것도, 괴로워한 나머지 주인의 머리가 점점 파리가 미끄러지는 대머리가 되는 것도, 그 머리가 에스킬루스와 같은 운명에 빠지는 것도 모두 실업가의 세력이다. 지구가 지축을 회전하는 것은 무슨 작용 때문인지 모르지만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분명히 돈이다. 이런 돈의 힘을 잘 알고, 이런 돈의 영향을 자유롭게 발휘하는 자는 실업가 여러분 외에는 아무도 없다. 태양이 무사히 동쪽에서 나와서 무사히 서쪽으로 지는 것도 온전히 실업가들 덕택이다. 지금까지 고지식하고 가난한 학자의 집에서 살면서 실업가의 은혜를 몰랐다니 내가 생각해도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었다. p376」
소세키는 자본가와 자본주의를 넘어서 사유재산까지 비판한다.
「이렇게 널따란 대지에 약삭빠르게 울타리를 치고 팻말을 세워서 누구누구의 소유지랍시고 나누고 있는 행위는 마치 저 푸른 하늘에 줄을 둘러치고 이 부분은 내 하늘, 저 부분은 남의 하늘이라고 신고하는 꼴이다. 만약 토지를 이리저리 잘라서 한 평에 얼마씩 소유권을 매매한다면 우리가 숨쉬고 있는 공기를 한 척으로 된 정육면체로 나누어 잘라 팔아도 되지 않겠는가? 공기를 잘라 팔 수 없고 하늘을 가르는 것이 부당하다면 지면의 사유화도 불합리하지 않은가? p166」
소세키는 아무리 지식인이 우스꽝스럽다 해도 이런 실업가 따위에 비할 수 없이 훌륭하다는 자부심을 표출하기도 한다. 고대 희랍인들은 체육을 아주 중요시해서 모든 경기에 귀중한 상품을 주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학자의 지식에 대해서만큼은 상을 주었다는 기록이 없다. 왜 그랬을까?
「그들 그리스인들이 경기에 임해서 얻는 상은 그들이 보이는 기능 그 자체보다 귀중한 것이다. 따라서 포상이 되기도 하고 장려하는 기능을 갖기도 한다. 그러나 지식 그 자체의 경우는 어떠한가? 만약 지식에 대한 보수로 무엇인가를 주려고 한다면 지식 이상의 가치를 가진 것을 주어야 한다. 그러나 지식 이상으로 귀중한 보물이 과연 이 세상에 존재하는가? 물론 있을 리가 없다. p202」
소세키는 이외에도 미학자 친구 메이테이 선생, 이학사 제자 간게츠, 시인 제자 오치 도후 등을 통해 모든 사람들과 세태를 풍자한다. 어쩌면 사회란 미치광이들의 집합이고, 오히려 정신병원에 있는 사람들이 보통 사람이 아닐까 생각해 보기도 한다. 푸코 보다 앞질러 광기에 대한 통찰을 보인 것일까? 여하튼 두꺼운 책을 온통 세상에 대한 풍자로 가득 채우다니, 소세키의 눈도 당대 일반인의 그것과는 확실히 다른 것 같다.
* 대출한 도서관책은 H&book의 2006년판 옮긴이 임희선입니다. 인용페이지는 이 책에 의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