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소포타미아에서 이집트까지 넓은 영역을 차지했던 고대근동 세계의 신화는 깊은 성찰과 아름다운 은유로 다양한 민족들의 종교와 문화에 큰 영향을 미치며 오늘날까지 전승되고 있다.  신화의 탄생지는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의 강력한 제국들이었지만, 주변 약소 민족들도 이를 수용/변용하여 나름의 독특한 신학 체계를 만들어 냈다. 그 대표적인 민족이 시리아-팔레스티나 지역의 후발 약소국가인 이스라엘이다. 


이스라엘 민족의 성경 속에 내재된 고대근동 신화의 주요 모티프들은 성경이 하나의 종교적 텍스트를 넘어 인문학적 텍스트로서 보편적 가치를 지니는데 기여했다. 






고대근동학을 전공하는 평신도 신학자 주원준 교수의 <성경과 고대의 신화>는 총 15강이며, 조금 특이하게 강의 개요와 배경은 중간쯤에 가서 7강과 8강에서 요약하는데, 앞서 1강에서 6강까지는 고대근동 신화의 대표적인 모티프인 물, 가시, 달에 대해 먼저 설명하고. 9강에서 14강까지는 밤, 산, 그리고 풍우신에 대해 고대근동의 신화와 성경의 연관성과 차이점을 설명하며, 15강은 '모든 성인 대축일'로 작고, 약하고, 이름없는 사람들에 대한 애정과 공경을 표하며 강의를 마무리 한다. 










1,2강 '물'의 모티프는 창조 신화의 핵심이다.  고대근동은 무로부터의 창조를 말하지 않는다. 처음에 혼돈 즉 물이 있었고, 창조주가 이를 갈라 놓으며 인간이 살 수 있는 세계가 탄생했다.  





구약의 창세기도 동일한 창조관을 갖고 있다.  물과 물 사이에 궁창을 만들고, 궁창을 곧 하늘이라 불렀다. 





창조로 상징되는 '물'을 가르고, 통제하는 사건은 창세기 이후에도 단순한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를 만드는 창조적 사건으로 이해된다.  모세의 이집트 탈출과 여호수아의 요르단강을 건너는 사건이 대표적인 재창조의 순간이다. 








구약의 '물' 모티프는 신약으로도 전승된다.  신약은 고대근동 세계가 쇠퇴하고 로마의 지배기에 씌어진 성경이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그 모티프는 남아서 예수의 신성을 드러내는 상징으로 쓰인다. 





예수가 물 위를 걷는 것은 단순한 기적이 아니다. 예수의 정체성 즉 창조주임을 드러내는 사건이다. 





제자들이 놀라는 것은 바람과 호수가 잔잔해 졌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다. 예수가 인간으로서 하느님께 기도를 하여 기적을 이룬 것이 아니라, 창조주만이 할 수 있는 물을 꾸짖고 통제하는 행위를 예수가 직접 실행했다는 사실이다. 고대근동에서부터 구약과 신약으로 전승된 '물' 모티프를 알고 있으면, 예수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 자연스럽게 이해된다.  성경 속의 사람들이 놀라는 그 순간에 우리도 따라서 놀랄 수 있다. 


시공간을 거슬러 공감한다는 것은 독립된 하나의 텍스트만으로는 불가능하다. 고전 속에 켜켜이 싸이고 겹겹이 더해진 수천년의 시간과 드넓은 공간을 경험(겪음)함으로써 비로소 인류의 지혜와 여정을 함께할 수 있다. 









3,4강은 길가메시의 '가시'로 시작된다. '가시' 모티프는 어느 것보다 철학적이다. 인류 최초의 서사시인 <길가메시 서사시>는 철없는 영웅이 친구의 죽음이라는 거대한 상실 앞에서 구도자가 되어 마침내 깨달음을 얻는다는 이야기다. 그 깨달음이 '가시'로 상징되는 진리이다. 




 

하지만 깨달음(영생)은 오래 가지 못한다. 곤하여 잠든 사이에 뱀이 가져가 버렸다.  강사는 이야기가 여기서 끝났다고 했지만, <길가메시 서사시>의 판본은 시대를 이어가며 다양한 버전으로 바뀌었고, 최근 출간된 수메르어 완역본에는 길가메시가 돌아와서 도시의 성벽을 세웠다는 것으로 끝이 난다. 인간의 영생이란 생물학적인 것이 아니라 성벽에 새긴 이름, 불멸의 명성이다. 







성경의 가시는 신의 현현 혹은 상징이다.  모세에게 신은 불타는 가시덤불로 나타났고, 예수는 가시관을 쓰고 십자가에 올랐다.  로마 병사는 가시관으로 예수를 조롱했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가시관은 예수가 신임을 극적으로 드러내 보였다.  









메소포타미아 신화의 진리, 영생, 최고의 권위를 상징하는 가시는 구약과 신약을 관통하며 신으로 자리매김하였다.  그런데 왜 최고의 권위 혹은 진리는 가시일까?  '고뇌를 통하여 지혜를 얻는다.' (파테이 마토스) 는 희랍의 오래된 격언이다. 현대의 우리도 알다시피 진리는 고통 없이 깨쳐지지도 추구되지도 않는다.  심연으로 뛰어 들어 가시를 움켜쥐어야 하는 두려움과 고통을 감수하지 않고는 가까이 갈 수도 없다. 진리는 나긋하지도 달콤하지도 않고 지키기도 어렵다. 잠깐 잠든 사이에 사라져 버린다. 가시는 진리가 그런 것임을 보여준다. 그런 가시를 움켜쥐거나 머리 위에 쓸 수 있는 사람만이 최고의 권위를 얻을 수 있다. 






고대근동 신화에서 5,6장이 다루는 '달'은 별이라는 군대를 거느린 강력한 왕권의 상징이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달을 숭배한 흔적은 여러 곳에 있는데, 태음력을 사용한 것이 대표적이다. 그리고 유독 초승달이 뜨는 초하루를 중요하게 여겼다.  





성경은 달신 숭배를 금지한다. 그러나 초하루를 특별히 여기는 고대근동의 관습은 성경 곳곳에 남았다. 달신을 숭배하는 것은 금지하지만, 고대근동에서 전해진 오래된 관습은 허용했던 것이다. 






이스라엘인들에게 초하룻날은 안식일 다음으로 특별히 취급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머지 날들은 축일이라는 말로 뭉뚱그려 놓은 것을 보면 그 특별함이 두드러진다. 





창세기의 물, 최고의 권위를 상징하는 가시, 금지 속에 남아 있는 달신 숭배의 흔적 등은 그 자체로도 흥미롭지만,  성경을 이해하고, 더 나아가 서양 인문학 속의 성경적 요소와 은유를 이해하는 데에 무엇보다 도움이 되는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