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을 읽을 때 혹시 이런 생각 해 보신 적 없으셨던가요? 소설도 영화처럼 음악이 흐르면 좋겠다는 생각 말이죠. 영화는 음악이 많은 역할을 합니다. 이야기와 거기에 흐르는 감정을 훨씬 실감나게 만들어주죠. 로맨스나 스릴러 혹은 공포 영화에 음악이 없다고 상상해 보세요. 얼마나 많이 심심해질까요? 분명 그토록 애절하게 느껴지지도 않을 거고 긴장감이 넘치거나 무섭지도 않을 겁니다. 소설에도 어울리는 음악이 흐른다면 영화와 똑같이 이야기와 감정이 훨신 더 잘 살아나지 않을까요? 그런 음악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한 번 찾아봤습니다. 소설에 어울리는 음악이 있는지.


그런데 소설에 영감 받은 음악들이 정말 많더군요. 그 모든 음악들은 노래를 만든 아티스트 나름의 독후감이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자신이 읽은 것에서 느끼고 생각한 것을 음악으로 표현한 것이니까요. 그런 음악들을 영감을 준 소설을 읽을 때 듣는다면 그것 역시 영화의 OST(original sound track)처럼 소설을 위한 음악으로 여길 수 있지 않을까요? 어쩌면 무모할 지도 모를 이런 가정에 기대어 소설과 음악을 모두 좋아하는 당신에게 감히 몇 곡 추천하고자 합니다.


1. 조니 미첼 , 'Both Sides, Now'와 솔 벨로의 '비의 왕, 헨더슨'





 최근에 공포 영화 '유전'을 봤는데 영화가 끝날 때 이 노래가 흐르더군요. 물론 영화에 나오는 버전은 조니 미첼의 것이 아니라 주디 콜린스의 것이었지만요. 캐나다의 유명한 싱어 송 라이터인 조니 미첼이 68년에 발표한 이 노래는 지금은 미첼의 대표곡일 뿐만 아니라 유명 락음악 잡지인 롤링스톤즈가 지금까지 나온 모든 대중 음악의 순위를 500위까지 매긴 적이 있는데 거기서 171위를 차지한 바 있는 뛰어난 노래입니다. 그런데 이 노래는 미국 작가 솔 벨로가 59년에 발표한 '비의 왕, 헨더슨'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었다고 하는군요. 노래를 만들게 된 경위는 이러합니다. 67년, 미첼은 비행기에서 이 소설을 읽었습니다. 그런데 미첼이 탄 비행기가 이륙할 때, 소설에서 아프리카로 가기 위해 헨더슨이 탄 비행기 역시 이륙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 일치가 미첼이 비행기의 창 아래로 하늘에 떠 있는 구름을 보고 있을 때 이런 상상을 하도록 했습니다. 헨더슨 역시 자신과 똑같이 비행기에서 하늘에 떠 있는 저 구름을 보고 있겠지 하는 상상을 말이죠. 그러자 갑자기 노래에 대한 영감이 생겨났고 바로 노래를 써나갔다고 합니다. 그렇게 아직도 많은 이들이 좋아하는 'Both Sides, Now'는 태어났습니다. 비행기에서 말이죠. 이 노래를 쓸 때만 해도 이렇게 유명해지리라곤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고 하는군요. 휴가철이 다가옵니다. 이번에도 많은 분들이 낯선 타국을 찾아 비행기에 오르시겠죠. 저 역시 그렇습니다. 그 때, 조니 미첼의 이 노래와 솔 벨로의 소설을 들고 가는 것은 또 어떨까요? 비행기에서 구름을 바라보며 미첼의 노래와 벨로의 소설을 읽는다면 노래에 나오는 이 가사를 쓸 때의 미첼의 마음을 훨씬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난 구름의 양면을 모두 보았어요.

하늘의 위에서, 땅 위에서

그래도 여전히 내가 떠올리는 구름은 환상에 지나지 않아요.

난 구름이 뭔지 전혀 모르겠어요.

(...)

나는 삶도 양면에서 보아왔어요.

승자의 눈으로도, 패자의 눈으로도

내가 떠올리는 삶 또한 환상이에요.

나는 삶이 뭔지 전혀 모르겠어요.




2. 데이빗 보위, '1984' / 조지 오웰 '1984'





 지금은 유명을 달리한 영국의 팝스타 데이빗 보위는 70년대에 조지 오웰의 '1984'를 락 뮤지컬로 만들려고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웰의 저작권을 가지고 있는 단체가 허락하지 않은 바람에 무산되고 말았죠. 정말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만일 허락하여 데이빗 보위가 '1984'를 락 뮤지컬로 만들었다면 우리는 소설 '1984'의 훌륭한 OST를 가질 수 있었을텐데 말입니다. 그래도 실망하긴 이릅니다. 비록 뮤지컬 기획은 쓰러졌지만 거기에 쓰려고 했던 곡이 살아남아 그가 74년에 발표한 앨범에 수록되었으니까요. 그것이 바로 보위의 최고 음반 중 하나로 손꼽히기도 하는 'Diamond Dogs'이란 앨범입니다. 보위가 상반신만 빼고 개의 모습이 되어버린 커버로 유명한 음반이기도 하죠. 살아남은 곡은 이 곡 '1984'를 비롯하여 'Big Brother','We are the dead'으로 세 곡입니다. 분명 베트남 전쟁을 계기로 영국과 미국 모두에서 점점 되살아나는 보수 우익의 분위기를 경계하고자 보위는 오웰의 '1984'를 뮤지컬로 만들려했던 것 같습니다. 어쨌든 '1984'를 읽을 때 보위의 이 노래들을 들어보면 어떨까요? 소설이 좀 더 새롭게 다가올지도 모릅니다.



3. 엘튼 존, 'Goodbye Yellow Brick Road' / 라이먼 프랭크 바움, '위대한 마법사 오즈'





 우리나라에도 유명한 이 노래는 제목에서 바로 드러나듯이 '위대한 마법사 오즈'에 영감을 받아 만들어졌습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 소설을 원작으로 하여 1935년에 만든 영화가 직접적인 영향을 줬지만 말이죠. 엘튼 존은 그 영화에서 도로시 역할을 했던 주디 갈란드의 심정을 헤아리며 이 노래를 만들었다고 하는군요. 이 때, 엘튼 존은 자신이 이룩한 화려한 성공 속에서 음악을 시작할 때 가졌던 초심을 잃은 것은 아닌지 우려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예술 보다는 상업성에 치중하여 음악 활동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고 말이죠. 그렇게 엘튼 존은 도로시가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위대한 마법사 오즈를 찾아 노란 벽돌길을 걸었던 것처럼 자신에게도 원래 음악을 할 때 가졌던 마음으로 돌아갈 수 있는 노란 벽돌길이 있었으면 한 것입니다. 그런 자신의 뿌리에 대한 그리움을 담아 이 노래를 만든 것입니다. 그러나 엘튼 존은 삶이라는 게 그런 길을 쉽게 찾을 수 있을 정도로 단순하지 않다는 것도 잘 압니다. 아니, 이렇게 불안하고 고민하며 걸어가는 게 실은 진정한 삶이라는 걸 깨닫고 있습니다. 정답을 쉽게 찾고 걸어갈 수 있는 단순한 삶이란 그저 애완 동물의 삶과 그리 다르지 않다고 말이죠. 그런 마음이 이 노래엔 담겨 있습니다. 소설 속에서 도로시와 그의 세 친구들이 자신이 오래도록 바랐던 것을 찾기 위해 오즈를 찾아가지만 그것이 정말 삶의 정답인지 아니면 그저 환상에 지나지 않는지 몰랐던 것처럼, 우리 역시 지금 걷고 있는 이 길이 우리를 어디로 데려다 줄 지 모릅니다. 하지만 엘튼 존이 말하듯이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도달하는 장소가 아니라 지금 걸어가고 있는 과정 자체인 지도 모릅니다. 그런 것을 생각하며 이 노래와 오즈를 벗해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하네요.




4. 롤링스톤스, 'Sympathy for the Devil' / 미하일 불가코프 '거장과 마르가리타'





 롤링스톤스가 68년에 발표한 앨범, 'Beggars Banquet'의 첫번째 트랙으로 실린 이 노래, 'Sympathy for the Devil'는 러시아 작가 미하일 불가코프가 쓴 고전인 '거장과 마르가리타'에 영감을 받아 만들어졌습니다. 원래 이 소설은 믹 재거의 여자 친구인 페이스풀이 믹 재거에게 한 번 읽어보라고 권해준 것이라고 해요. 하층 계급 출신이었던 페이스풀은 믹 재거가 접하지 못했던 새로운 사상들을 많이 접하게 해줬는데요, 미하일 불가코프의 소설도 그 중 하나였죠. 믹 재거는 이 소설을 읽고 감명을 받은 나머지 '거장과 마르가리타'에 나오는 악마를 주인공 삼아 노래까지 만들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믹 재거에 따르면, 이 노래는 악마 찬양 노래가 아니라 실은 인간이 가진 어두운 면에 대한 것이라고 합니다. 얼굴의 표정이 천변만화하는 것처럼 어느 것 하나로 고정할 수 없는 인간의 삶을 노래한 것이라고 말이죠. 생각해 보면, 불가코프의 소설에 나오는 거장과 마르가리타도 그러했죠. 본래 아주 평범한 박물관 직원에 지나지 않았던 거장은 길거리에서 우연히 만난 여인, 마르가리타와 운명적인 사랑을 하고 그 결실로 본디오 빌라도에 관한 소설을 쓰는 소설가가 되었다가 끝내 비밀 경찰에 체포 되다가 스스로 정신병원에 들어가고 맙니다. 이토록 삶의 굴곡을 다양하게 겪은 것이죠. 그건 마르가리타도 다르지 않습니다. 본래 저명한 과학자의 아내로 상류층이었던 그녀는 거장과 운명적인 사랑에 빠지고 거장이 정신병원에 들어간 뒤로는 악마와의 계약에 따라 악마가 주최하는 대 무도회의 여왕이 되었다가 계약에 따라 다시 거장과 만난 후로는 반지하의 아파트에서 살아갑니다. 결코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없는 참으로 다변하는 삶인 것이죠. 이 소설에 나오는 악마 또한 그러합니다. 사실 이들은 정해진 것을 허물고 단면만이 허락되는 세상에 이면을 들춰내는 존재들이죠. 의도적인 카오스의 창출자이자, 단일한 진리를 산포시켜 그 족쇄에 매인 자들을 해방하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이성은 결국 광기가 되고 광기가 끝내 합리가 되는 진리를 역설하는 자인 것입니다. 노래는 이러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단일한 의미로 규정되지 않는 삶의 복잡한 면모들을 직시하라는 의미로 말이죠. 아마도 그렇기에 프랑스 영화 감독 장 뤽 고다르는 이 노래에 영향을 받아 영화를 만들었고 잡지 '롤링스톤스'가 뽑은 지금까지의 대중 음악 순위 500위 중 32위를 차지하고 있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거장과 마르가리타'를 읽게 된다면 이 노래를 꼭 한 번 들어보세요. 소설이 전혀 다른 새로운 얼굴을 지니고 다가올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소설에 영감을 받아 만들어진 노래를 한 번 소개해 봤습니다. 물론 이것만은 아니고 이 밖에도 정말 많은 노래들이 있지만 분량 때문에 이것밖에 소개하지 못하는 게 좀 유감이네요. 어쨌든 여기에 소개한 소설을 읽을 때 노래도 한 번 찾아 들어보세요. 혹시 아나요? 그 노래 때문에 책에 대한 기억을 쉽게 소환할 수 있게 될 지. 여러가지 이유로 책 읽기에 지치게 되면 그 책에 영감 받은 음악을 들으면서 독서의 기운을 충전하는 것도 좋겠지요. 책을 벗하는 방법은 다양합니다. 자신만의 방법으로 책을 벗하는 것도 좋은 독서 방법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독서를 향한 여러분의 분투를 응원하며 이만 글을 마치겠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모스크바의 신사
에이모 토울스 지음, 서창렬 옮김 / 현대문학 / 2018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삶은 때로 예기치 않은 곤경을 가져다 준다.

 1922러시아의 유서 깊은 가문 출신인 로스토프 백작에게 그런 일이 일어났다볼셰비키가 혁명에 성공하여 정권을 잡자 그를  호텔의 스위트룸에 평생 가둬버린 것이다그는 죽을 때까지   발자국도 호텔을 떠날  없다추사 김정희가 그랬고 버마의 아웅산 수지가 그랬듯이한정된 공간에 못처럼  박혀 버린 것이다미국 작가 에이트 토올스 소설'모스크바의 신사' 이렇게 시작한다제목의 신사는 당연하게도 로스토프 백작이다그런데 이런 시작을 보노라면 조금 걱정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그도 그럴 것이  책의 분량은 무려 723페이지니까 말이다 곳에서 내내 갇혀 살아야 하는 자를 가지고 이만한 길이의 이야기를 과연 계속 흥미과 재미를 느끼면서 읽도록   있을까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하지만  어려운 것을 에이트 토올스는 해낸다그것도 사람만이 아니라공간까지 호텔을 벗어나지 않으면서 말이다한정된 사람과 공간을 가지고 이토록 풍성하고 흥미로운 얘기를 자아낼  있다니 실로 입이  벌어질 수밖에 없다겨우  번째 작품이라는 말에  벌어져 버린다.


 소설을 읽으면 역시 강하게 떠오르는 것은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주인공이 이름이 '전쟁과 평화' 나왔던 로스토프 백작 이름 그대로이고 호텔의 고양이 이름까지 역시  소설에 나왔던 '쿠투조프'라서  그렇게 된다톨스토이의 로스토프는 소설의 마지막에 자신의 밑에서 일하는 농부들을 사기꾼이라며 불신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에이트 토올스의 로스토프는 그와 완전히 정반대의 모습을 보여줘서 재밌다계층과 나이를 불문하고  예의를 지키며 배려하고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 진솔한 우정을 나누는 것이다혹시 에이트 토올스는 '전쟁과 평화' 로스토프 백작이 계속 나이를 먹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 속에서 자신의 로스토프를 빚었던 것은 아닐까진실은 모르겠지만 어쨌든 ‘전쟁과 평화에서의 로스토프와  소설의 로스토프에게서 비슷한 점이 있는  사실이다. ‘모스크바의 신사 로스토프에게 가장 커다란 트라우마를 만들게  계기인 도박 사건 역시 ‘전쟁과 평화 로스토프도 겪는다재밌게도 ‘모스크바의 신사에선 도박에 이겼지만, ‘전쟁과 평화에선 함정에 빠져 계속 잃는다그런데 도박을 하는 동기는 같다. ‘모스크바의 신사에선 로스토프가 복수를 위해 도박을 벌였지만, ‘전쟁과 평화에선 로스토프에게 복수하려는 자가 도박으로 끌어들인다.


 사정이 이러하다 보니전쟁과 평화 주제와 ‘모스크바의 신사 주제가 서로 이어지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전쟁과 평화 주제는 역사의 거대한 움직임인 전쟁과  개인의 사소한 삶이 결코 유리되어 있지 않다는 것으로 실은 우리 모두가  같은 거대한 운명 공동체를 이루기에 나밖에 모르는 협소한 시야보다는 다른 모두를 아우르는 넓은 시야를 지닐 것이며 닥쳐온 불행이나 고난이 있더라도 기나긴 삶의 시간 속에서 그것이 어떤 의미를 가질지는 누구도   없으니 섣불리 낙담하거나 좌절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모스크바의 신사 그와 비슷한 말을 들려준다.

 우선은 불현듯 닥쳐온 고난이 그렇다주인공 로스토프에게 닥쳐온 것은 전쟁만큼이나 느닷없고 비극적이다보통 사람이라면 내내 실의에 빠져 주검처럼 살만한 일이다그러나 로스토프는 그러지 않는다비록 거할  있는 곳과 움직일  있는 거기다 말할  있는 사람이 턱없이 한정되어 있다고 해도 오히려 거기서  풍부한 드라마와 깊고도 친밀한 관계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사람이 환경에 쉽사리 지배되지 않는다는 것을 ‘모스크바의 신사만큼 생생하게 알려주는 소설은  없을  같다설령 그것이 제아무리 척박한 환경이라도 말이다.


 그렇지만 물론 아무나   있는 일은 아니다로스토프가 그럴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자신을 주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그는 아무리 갑작스럽게 맞딱드린 변화라 해도 과거의 권위나 명성에 기대어 변화를 거부하지 않았다그저 겸손하게 온전히 받아들였다.


"시대가 해야  일은 변화하는 것입니다할레키 그리고 신사가 해야  일은 시대와 함께 변화하는 것이지요."(p. 122)


 이러한 겸허와 존중의 태도는 그를 감금시켰던 볼셰비키와는 얼마나 다른가?

 그들은 자신의 뜻에 따르지 않거나 맞지 않으면 로스토프에게 했던 것처럼 감금시키거나 숙청시켜 버리는  타자를 대하는 유일한 태도였다오로지 자신의 틀을 타인에게 절대적으로 강요할 개인이 가진 개성은 전혀 용납하지 않았다고통 속에서 거지처럼 유랑했던 로스토프의 친구 시인이  대표적인 사례다그가 하필이면 시인으로 설정된 것도 시야말로 개인의 독립적인 개성이 가장  드러나는 곳이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싶다.


 그렇다면  소설엔 뚜렷한 하나의 전선이 존재하는 셈이다.

 얼른 볼셰비키  로스토프의 싸움이라고 해도 불러도 좋을 정도로 개인을 지우기 위해 익명화 시키려는 세력과 반대로 개인이 지닌 고유한 개성을  드러내고 지켜주려는 로스토프가 만드는 전선이다이런 전선은 볼셰비키가 와인의 라벨을 모조리 지워버렸던 에피소드에서 선명하게 드러난다거기서 로스토프는 볼셰비키가  짓에 대해 이렇게 안타까움을 표시한다.


 안에  와인이 무엇이든 간에 이웃한 다른 와인과는 같지 않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같기는커녕 백작의 손에 들린  속의 내용물은  국가나  인간과 마찬가지로 독특하고 복잡한 역사의 산물이다와인의 색깔맛은  와인이 태어난 지역의 특유한 지형과 고유한 기후를 나타낼 것이다. (...) 그랬다 병의 와인은 시간과 공간의 최종 추출물이고개성  자체의 시적 표현이었다그런데도 이곳에서 와인은 익명의 바다로평균과 무지의 영역으로 던져졌다.(p. 232 ~ 3)


 이처럼 볼셰비키는 익명화의 바다 속에 개인을 침몰시키려 한다그런 볼셰비키에 맞서 로스토프는 개인의 고유한 개성을 건져내려 애쓴다바로 이런 싸움이 소설에 존재하는 것이다


 이것을 고려하면 작가가  하필이면 로스토프가 하나의 장소에 계속 부박히는 설정을 했는지도 어느 정도 이해가 간다로스토프가 결코 떠날  없는 호텔이라는 공간 자체가  개인의 모습을 상징하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호텔이란 공간은  사람의 삶이다 삶을 어떻게 바라보는가바로 그것에서 볼셰비키와 로스토프는 차이가 난다볼셰비키가 그러하듯이상대의 삶을 존중하지 않고 그저 이용만 하려는 자의 눈에  개인은 삶의 깊이와 폭을 전혀 지니지 않는 얇은 평면으로만 보일 것이다어떤 라벨을 붙여도 상관없는.

 반면에  개인이 가진 독립적인 개성과 삶을 최대한 존중하고 배려하는 사람의 눈에  개인은 저마다 자기의 폭과 깊이를 옹골차게 가지고 있는 것을 보일 것이다소설에서 로스토프 백작이 식당에서 풍경을 스케치하고 있는 건축가 지망생에게 이렇게 말했듯이.


 "방이라는   안에서 벌어진 모든 일들의 총체라는 말씀이군요."

 "바로 그거라고 생각해요." 백작이 말했다. " 특별한 방에서 이루어진 교류의 결과가 무엇인지는 정확히 꼬집어 말할  없지만 교류 덕분에 세상이 나아졌다는 것만큼은 확신할  있습니다."(p. 522)


 지배인 안드레이가 어느   보여준 놀라운 저글링 실력이나 지배인과 요리사 그리고 로스토프가 공모하여 러시아 전통 요리를 몰래 만든 것도 이러한 것의 표현이다 사람의 삶이란 함부로 라벨을 붙일  없는 존재라는 것을 선명하게 드러내기 위한.


 그리고 바로 이러한 삶의 무규정성불확실성이  사람의 삶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존중해야만 하는 이유가 된다또한 우리가 환난이 닥쳐왔다고 해서 쉽게 무너지거나 희망을 놓아버려서는 안되는 이유이기도 하다소피야의 말대로.


 아버지는 우리 인생은 불확실성에 의해 움직여 나아가는데그러한 불확실성은 우리의 인생 행로에 지장을 주거나 나아가 위협적인 경우도 많다고 했다그러나 우리가 관대한 마음을 잃지 않고 보존한다면 우리에게 극히 명료한 순간이 찾아들 거라고 했다우리이게 일어난 모든 일들이 갑자기 하나의 필수 과정이었음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순간이 찾아든다는 것이었다우리가 앞으로 살아가야  삶으로 꿈꿔온 대담하고 새로운 삶의 문턱에  있을 때조차도 그렇다는 것이다.(p. 687)


 이러한 말을 ‘모스크바의 신사 소설 자체로 놀랍도록 온전히 재현한다 사람에게는 얼마나 무궁무진한 힘과 가능성이 있는지그렇기에 우리는 삶의 완전히 끝날 때까지  어떤 어려움에 처하더라도 걸어가는 것을 포기해서는 안된다는 것을소설에서 로스토프가 있었던 방은 자신이 그동안 있었던 방들 가운데 가장 작은 방이었으나 바로  방에서 그는  속에 있었던  어떤 방보다  많은 일과 인연을 만들어냈다.


 말할 것도 없이  방은 지금껏 살아오면서 그가 사용했던 방들 가운데 가장 작은 방이었다하지만  사방   안에서 세상은 오고갔다. (p. 683)


 이만큼 삶이 가진 불확실성이 바로 삶의 활발한 역동성을 만들어내며, 그 역동성이 진정한 나를 만들어간다는 것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이야기가  있을까 싶다로스토프가 만들어내는 삶의 무늬를 보노라면 나도 그런 역동성을 가지고 싶어진다. 물론 로스토프는 어떻게 하면 그런 역동성을 가질  있는지도 보여준다하루하루 성실하게 계속 뚜벅뚜벅 걸어가는 것이다.

 알렉산드르 로스토프는 과학자도 아니고 현자도 아니었다하지만 예순넷이라는 나이를 먹은 그는인생이란 것은 성큼성큼 나아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만큼은 현명했다인생은 서서히 펼쳐지는 것이다주어진 하나하나의 순간마다  번에 걸친 변화를 보여주는 과정이다우리의 능력은 흥하다가 이울고우리의 경험은 축적되며우리의 의견은 - 빙하가 녹듯 매우 느리지는 않다 해도 적어도 천천히 점진적으로 - 진화한다소량의 후추가 스튜를 변화시키듯매일매일 벌어지는 사건들이 우리를 변화시킨다.(p. 630)


 소설을 읽고 나면  말이 지극히 옳다는  알게된다순간삶의 다양한 국면마다 조급하게 일희일비했던  자신이 조금 부끄러워지면서 삶을 보다 높은 안목으로 바라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아주 높이 나는 새에겐 높은 빌딩이나 낮은 주택이나  하나의 평면으로 보이듯이삶의 어려움과 고난도 그렇게 바라봐야겠다고.


 요즘처럼 무더위에 쉽게 짜증을 내며 만사 귀찮다는 표정으로 모든  마냥 내버려 두고 있는 내겐 특히나 필요한 안목이다. ‘모스크바의 신사 본받아 ‘서울의 신사   있었으면 좋겠다평정심과 중심을 잃지 않고 나로 인해 다른 이들 또한 좋은 추억과 인연을 만들  있는 사람설령 아주 조그만 둥지라도 누군가 주저없이 날아와 편히 깃들  있는 사람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더 걸 비포
JP 덜레이니 지음, 이경아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올 여름은 진짜 무덥다. 살다 살다 이런 더위는 또 처음인 것 같다. 습한 더위에 휩싸이게 되면 만사가 다 귀찮아진다. 아무리 그래도 책만큼은 손에서 놓을 수 없는 지라, 이런 더위 속에서도 즐길 수 있는 책을 찾게 되는데, 이럴 때는 역시 장르 소설이 안성맞춤이다. 정말 한동안 더위를 잊게 만들었던 소설을 하나 만났다. 바로 '더 걸 비포'다.


 작가는 JP 덜레이니. 미국 작가다. 필명으로, 과거엔 다른 이름으로 베스트 소설을 발표했다고 한다. 다시 말해 JP 덜레이니란 필명으로 낸 소설은 '더 걸 비포'가 처음인 것이다. 지금 나는 이 작가의 과거 이름은 무엇인지 몹시 궁금하다. '더 걸 비포'가 썩 괜찮았기 때문이다. 이야기를 끌어가는 솜씨도, 여성의 불안한 심리에 대한 표현도, 반전도 좋았기 때문에 그의 소설을 더 찾아 읽어보고 싶은 것이다.책을 즐겨 벗하는 이에겐 뛰어난 기량의 작가를 새로이 아는 것만큼 커다란 선물도 없다. '더 걸 비포'는 그런 선물을 내게 주었다.


 그래서 '더 걸 비포'는 어떤 이야기일까?

 갑자기 비극을 마주하게 된 두 여성이 있다. 하나는 에마고 다른 하나는 제인이다. 에마는 자신의 집에서 강도를 당했다. 제인은 소중한 아이를 사산했다. 에마는 너무 무서워서 자신의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는 집을 찾아 나선다. 제인은 상실의 고통이 눅진하게 배여 있는 현재의 공간을 떠나 새로운 곳에서 삶을 다시 시작하려 한다. 두 사람 모두의 마음을 강렬하게 사로잡은 집이 마침내 나타난다. 그 집은 바로 원 폴 게이트 스트리트.



 이 말을 듣고 '응? 뭐야, 두 사람이 같은 집을 마음에 들어한다고? 그럼 같은 집을 두고 자신이 차지하려고 두 여자가 서로 싸우는 스릴러인가?'하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아니다. 여기서 제목이 왜 '더 걸 비포'인가가 드러난다. 에마와 제인은 같은 시간의 사람들이 아니다. 에마는 과거고, 제인은 현재다. 에마는 제인 이전에 그 집에 살았었다. 제목의 '더 걸 비포'는 바로 에마를 가리킨다. 소설은 에마가 주연인 과거의 시점과 제인이 주연인 현재의 시점을 번갈아가며 보여준다. 그렇게 같은 집에 살게 된 그들. 하지만 그들이 가지는 공통점은 그것 하나만이 아니다. 용모와 성격이 비슷할뿐만 아니라 똑같이 원 폴 게이트 스트리트의 주인이자 그 집을 설게한 건축가와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독자는 그 사랑이 혹시 위험한 사랑은 되지 않을까 염려한다. 왜냐하면 건축가 에드워드는 평범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조짐은 에마와 제인이 그 집에 살게 될 때부터 나타났다. 그곳은 세입자의 자유를 빼앗는 곳이다. 아주 사소한 것 하나까지 지켜야 할 규율이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어기면 곧 추방된다. 세입자의 의지는 하나도 개입할 수 없고, 오직 주인의 의지만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곳. 거기가 바로 원 폴 게이트 스트리트다. 싼 값에 황홀할 정도로 멋진 공간을 누리는 대신 자신의 자유와 개성을 아낌없이 바쳐야 하는 것이다. 에드워드는 그런 사람이다. 자신이 주도하지 않으면 안되는 사람. 남이 반항하는 것을 참지 못하는 사람. 이런 사람 주위엔 의혹의 그림자가 생기기 마련이다. 역시나 에드워드의 주변엔 원 폴 게이트 스트리트를 자기 뜻대로 만들고자 아내와 자식까지 사고로 위장하여 살해했다는 의혹이 감돌고 있다. 게다가 에마 역시 그 집에서 사고로 죽었다. 에마와 똑같이 에드워드와 사랑에 빠지게 된 제인은 에마에게 일어났던 일과 에드워드의 진실을 알게 위해 열심히 추적한다. 그러나 그것은 사건의 진실을 찾아내 정의를 바로 세우고자 함이 아니다. 자신이 위험한 사람과 사랑에 빠지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하고자 하는, 이를테면 자신의 사랑을 구원하고자 하는 여정이다. 과연 제인은 자신의 사랑을 구할 수 있을까?


 같은 집을 공유하며 과거와 현재를 오간다는 점에서 우리나라 영화 '시월애'가 떠올랐다. 그리고 군림하는 남자와 종속 당하는 여자의 구도에선 최근 미국과 영국 모두에서 센세이셔널한 반응을 일으켰던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가 생각나기도 했다. 이처럼 이 소설은 읽는 이의 시야에 따라 여러 모습으로 을 읽을 수 있다. 어떤 이는 여기서 결국 사랑이란 불신과 의혹 속에서 위태롭게 걸어가는 줄타기라는 걸 찾아낼 수 있을 것이며 또 어떤 이는 독립적인 여성이 어떻게 남성 권력에 포획되는가로 읽히기도 할 것이다. 이야기 자체도 재밌지만 이런 면이 있기에 더욱 몰입할 수 있는 소설이다. 부담없이 한동안 흠뻑 빠져 읽을 수 있으면서도 읽고나면 포만감을 느낄 수 있는 소설을 원했다면 당신의 식탁 위로 한 번 초대해 보시길...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8-08-16 03: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동조자 1
비엣 타인 응우옌 지음, 김희용 옮김 / 민음사 / 2018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베트남 전쟁을 소재로 다룬 작품들은 지금까지 허다하게 만나보았다.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의 '지옥의 묵시록'이나 올리버 스톤의  '플래툰', '7월 4일생'을 비롯한 많은 영화가 있었고 황석영의 '무기의 그늘'이나 안정효의 '하얀 전쟁' 또 박영한의 '머나먼 쏭바강'을 포함한 많은 소설이 있었다. 그러나 비엣 타인 응우옌의 '동조자' 같은 소설은 처음이다. 왜냐하면 이 소설은 지금까지 베트남 전쟁을 다룬 작품들이 담고 있지 않았던 새로운 목소리를 들려주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베트남 사람 자신의 목소리를.


 생각해 보니 지금까지 내가 보고 읽은 베트남 전쟁에 대한 작품들은 모두 베트남 사람의 것이 아닌 제3자의 것이었다. 남의 전쟁에 할 수 없이 뛰어든 이들의 시선으로 바라봤던 전쟁만이 내가 만날 수 있는 베트남 전쟁의 전부였던 셈이다. 많은 영화와 소설들이 전쟁이 가져다 준 고통과 절망을 그리고 있었지만 그건 오로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전쟁에 휘말린 바깥에서 온 자들의 고통과 절망이었을 뿐, 정작 거기엔 전쟁의 당사자이자 다른 어떤 누구보다 많은 상처를 가졌을 베트남 사람들의 것은 빠져 있었다. '동조자'는 무엇보다도 그걸 깨닫게 했다. 지금까지 나는 단 한 번도 베트남 사람 자신의 목소리를 들어보지 못했다는 것을.




 소설 '동조자'는 베트남 전쟁과 그 이후를 시간적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월남 장교이지만 실은 북베트남을 위해 일하는 첩자가 주인공이다. 소설의 대부분은 주인공이 자신의 정체성을 증명하기 위해 수용소의 소장에게 쓰는 자술서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러한 자술서의 형식은 사실 주인공의 삶을 단적으로 집약하여 나타내고 있는데 왜냐하면 그는 평생 자술서를 쓰듯 남에게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야 했던 것이다. 어릴 때는 프랑스인 아버지와 베트남인 어머니 사이에서 '잡종 새끼'라고 놀리는 베트남 사람들에게 자신이 베트남인이라는 것을 증명해야했고 자라서는 북베트남의 첩자로 일하느라 자신이 남베트남에 충성하는 군인이라는 걸 증명해야 했다. 그리고 베트남이 패망하고 북베트남이 지배하게 되었을 때는 그들에게 자신이 서양 문명에 세뇌되지 않았으며 여전히 북베트남에게 충성하고 있다는 걸 증명해야했다.


 그는 단 한번도 남에게 있는 그대로 온전히 받아들여진 적이 없다.

 늘 자기 스스로 당신과 같은 사람이라는 걸 입증해야 했다. 그것을 위해 그는 두 사람을 희생시키기까지 한다. 그 희생자들이란 '무분별한 소령'과 '소니'다. 한 사람은 주인공이 장군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죽였고 다른 한 사람은 질투 때문에 죽였지만 희생자들의 공통점을 생각한다면 그들을 그 죽인 진짜 원인은 다른 곳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바로 그들이 가진 확고한 정체성 때문이라는 걸 말이다. 그들의 정체성은 '무분별한 소령'의 뚱뚱한 육체만큼이나 흔들리지 않는다. '소니'처럼 자신의 존재를 증명할 필요도 느끼지 못한다. 주인공의 눈에 그들은 더없이 자유로워 보이는데 우리는 그 자유가 그들의 안정된 정체성에서 비롯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주인공에게 부재한 그것을 그들은 아낌없이 누리고 있었기에 주인공은 그들을 죽음으로 내몬 것이다. 


 그는 늘 둘 사이에서 흔들렸다.

 프랑스와 베트남 사이에서, 북베트남과 남베트남 사이에서, 만과 본이라는 친구 사이에서, 민족 문화와 외래 문명 사이에서. 그는 베트남에서 미국으로 또 북베트남으로 이동하지만 그 어디서도 자신의 영토를 발견할 수 없었다. 어디를 가나 그는 의혹의 시선을 받는 이방인일 뿐이었다. 그에겐 자유가 허락되지 않았다. 정체성이란 덫에 완전히 속박되어 늘 상대가 요구하는 가면을 써야했다. 그것이 어릴 때부터 자신을 옥죄는 올가미와 다를 바 없었기에 그는 거기서 헤어나고자 했다. 그가 북베트남의 혁명에 동조했던 것도 죽이고 싶을 정도로 아버지를 원망했던 이유와 똑같이 그것에 기대서라도 자신의 정체성을 온전히 확립하고자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오히려 혁명에 철저하게 배반당한다.


 독립과 자유 - 나는 이 단어들을 말하는 데 너무 신물이 났다 -의 이름으로 스스로를 해방시켰지만, 그런 다음 곧 우리의 패배한 동포들에게서 그것을 박탈했던 것이다.(2권, p. 292)


 그리고 그제서야 깨닫게 된다. 자신이 혁명을 통해 이루고자 했던 독립과 자유가 아무 것도 아니듯, 자신이 그토록 목매달았던 확고한 정체성 또한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그것은 환영에 불과했다. 아무것도 아닌 것에 언젠가 누군가가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무언가 있는 것처럼 잔뜩 위장시켜 놓았던 것이 바로 '정체성'이었던 것이다.


 일본인들이 우리에게 황인종의 우월성을 가르쳐주지 않았다면, 프랑스인들이 우리를 문명화시키려 시도한 적이 결코 없었다면, 호찌민이 변증법적이지 않고 카를 마르크스가 분석적이지 않았다면, (2권, p. 258)


 이처럼 그가 아무것도 아닌 것을 의미가 있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은 바깥에서 주입받은 것이었다. 무언가 되어야만 한다고 말했던 바깥의 이념이나 사상들 모두가 실은 그를 옭아매는 사슬에 다름 아니었던 것이다. 친구이기도 한 정치의원의 혹독한 심문을 통해 그는 정체성이 무의미하다는 진실을 깨닫고 비로소 사슬에서 풀려난다. 이제 그에겐 모든 게 농담으로 보인다. 그는 아무것도 없는 것을 당당히 아무것도 없다고 비웃을 줄 아는 '익살꾼'이 된다. '벌거벗은 임금님'이란 동화에서 유일하게 임금님이 벌거벗었다고 말했던 아이가 쾌활하게 웃으며 임금님을 비웃었듯이.


 농담을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들은 정말로 위험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아무것도 없음'을 경건한 마음으로 말하고,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아무것도 없음'을 위해 죽을 것을 요구하고, '아무것도 없음'을 숭배하는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은 '아무것도 없음'을 비웃는 사람을 너그럽게 봐주지 못한다.( 2권, p. 284)


  진정한 독립과 자유는 하나였다. 웃는 것. 그것은 동화 속 아이와 같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자신의 모습도, 타인의 모습도. 그 어느 틀에 끼워맞추지 않고. 익살은 자신과 상대방을 사회가 온갖 것으로 덕지덕지 기워놓았던 정체성의 껍질을 산산히 깨뜨리고 본연의 모습으로 돌려놓는다. 태어났을 때와 똑같이 그 어떤 규정도 있지 않았던 순수한 현존(現存)으로. 순수하게 독립적이고 완전하게 자유로운 그 상태로.


 이것은 사르트르가 '인간은 실존이 본질에 선행하는 존재다'라고 말했던 것과 일맥상통한다. 이 말은 인간이 세상에 태어나 먼저 존재하고 정의되는 것은 그다음이라는 의미다. 그러면서 사르트르는 첫 순간에 인간을 아무 정의도 할 수 없는 것은 우선 인간이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그는 나중에야 비로소 무엇이 될 것이며 그 자신이 스스로 만들어 가는 대로 될 것이다.'라고. 이 사르트르의 말에서 우리는 주인공이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 알 수 있다. 남이 먼저 닦아두고 걸어가라며 내모는 길이 아니라 자신이 가고자 하는 길을 스스로 만들어 나갈 것이라는 걸. 세상에 되어야 할 존재 같은 건 없다. '답게'란 말만큼 폭력적인 것도 또 없다. '동조자'가 충분히 보여주었듯이 지금 가지고 있는 그 모습만으로도 우리가 존중받아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


 그러나 오늘의 시대는 이것을 완강히 거부하고 있다. 갈수록 인종과 국적 그리고 성별과 계층을 이유로 한 차별과 적대가 횡행하고 있다. 곳곳에 혐오의 말들이 넘쳐나고 갑질의 난무와 증오의 분출로 피해를 입는 사람들이 허다하게 생겨난다. 알고보면 이 모든 일의 근본엔 아무것도 아닌 것을 아주 무거운 의미가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우리의 착각이 있다. 지금 내가 입고 있는 정체성의 옷은 어쩌다 입게 된 옷일 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일시적이고 잠정적인 그 옷을 자기 존재 의미의 전부라고 여긴다. 그리고 고정 불변하며 나는 절대 너가 될 수 없다고도.


 프랑스의 인류학자 레비 스트로스는 언젠가의 연설에서 야만인이란 다른 사람을 야만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정체성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동조자'의 장군이나 소장이 잘 나타내고 있는 것처럼 타인에게 멋대로 고정된 정체성을 씌워 혐오와 증오의 말들을 쏟아내는 사람의 머릿속에만 존재한다. 자신이 타인보다 더 자유롭고자 타인을 차별과 모욕으로 공격하지만 그럴수록 더 갇히게 되는 건 자신이다. 진정으로 자유롭고자 한다면 우선 타인부터 정체성의 그물에서 해방시켜줘야 한다. 그래야 자신도 해방될테니까 말이다. 주인공이 잘 보여주었듯이. 


 결국 '동조자'는 제목 그대로 우리가 과연 어디에 최종적으로 동조해야 하는가를 알려주고 있는 셈이다. 그건 모든 인간이 그 자체로 오롯이 동등하다는 사실이다. 인간은 선행하는 어떤 개념의 실현 같은 것이 결코 아니다. 다만 순수한 시작일 뿐이다. 아무런 구분도, 우열도 없는. 그리고 누구에게도 그 시작을 자기 뜻대로 이끌고 갈 권리 역시 없다. 바로 이것에 우리는 동조해야 한다. 타인 뿐만이 아니라 나 또한 독립적이고 자유롭게 하는 이념의 동조자가 되어야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서커스 나이트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18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주 어릴 때의 일이다. 아버지와 함께 밤의 서커스 공연을 관람한 적이 있다. 그때의 아버지는 내가 첫 아들이라 그랬는지, 세상에서 자신이 놀랍다고 생각한 것을 내게 보여주길 원했다. 넓은 바다라든지, 새벽 안개가 수면 위로 서서히 걸어가는 호수라든지. 아마도 그런 경이로운 것들을 통해 내가 살아간다는 것의 즐거움을 알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싶다. 물론 그 이유를 아버지는 한 번도 말해준 적이 없고 그저 나만의 짐작에 불과하지만. 서커스 관람도 그 중 하나였다. 당시 아버지가 내게 보여준 많은 풍경처럼 처음 서커스를 보았던 그 밤의 광경 역시 내 기억에 여전히 선명하게 박혀있다. 그 곳은 신비의 장소였다. 일상에서 만나볼 수 없는 존재들이 출현했고, 커다란 공 위에서 자유롭게 저글링 하는 이가 있었으며 까마득한 높이에서 날개가 달린 듯 활공하는 이들이 있었다. 거기는 일상의 중력이 미치지 않았다. 우리를 속박하고 있는 세계의 질서도 가벼이 넘나드는 것 같았다. 사람에게 엄연한 한계로 주어졌다고 여겼던 것들이 더는 사람의 가능성을 막는 벽이 아니게 되었다. 그렇게 '서커스 나이트'는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를 바꾸었다. 세계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거대하다는 것을 감탄과 갈채의 시선 가운데 확인시켰다. 그 여백을 얼마나 많이 볼 수 있는가가 결국엔 나의 행복을 좌우한다는 것도.



 요시모토 바나나의 '서커스 나이트'를 읽다 보니 절로 그 밤의 서커스가 떠올랐다. 제목 때문이 아니다. 소설에 서커스가 나왔기 때문도 아니다. 소설에 담긴 이야기 전체가 그 밤의 서커스와 똑같은 것을 내게 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야카란 여성이 있다. 어릴 때 부모님을 모두 비행기 사고로 잃은 뒤로 그녀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집을 가져본 적이 없다. 그녀의 생애는 방랑과 더부살이도 점철되어 있었다. 언제나 거주는 일시적이었고 이제 정주를 하게 되나 안심하면 뜻하지 않게 추방의 운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장돌뱅이의 운명이 그러하듯이 사야카, 그녀의 삶도 자신이 주도하는 것은 없었다. 수면 위의 잎새처럼 누군가 일으킨 파문에 휩쓸리는 삶이었다. 적어도 지금까진 그랬다. 그런 그녀의 삶이 한 통의 편지로 변하기 시작한다. 과거의 상처가 눅진하게 배어든 그녀의 굽은 손가락이 펴지듯이, 위성처럼 누군가의 삶을 맴돌기만 했던 그녀가 이제 항성이 되어 남에게도 따스한 빛을 나눠주는 것이다. 세상이 그녀가 여기는 것보다 훨씬 거대하며 그것을 통해 삶에는 사야카 집 마당에 있는 히비스커스 나무 아래 묻혀 있었던 과거의 연인 이치로 쌍둥이의 형 뼈와도 같이 지금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삶의 여백들이 광장처럼 넓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밤의 서커스가 주었던 것과 똑같이.


 인생사 새옹지마(塞翁之馬)라 했던가. 그 고사에 나오는 변방 노인이 깨달았던 대로 더 넓은 시선으로 세상을 담아보면 우리는 알게 된다. 삶을 긍정한다는 것이 무지와 무력의 소치는 아니며 쐐기처럼 박힌 상처라 해도 담아두고 곱씹기 보다는 허허로이 흘려보내는 게 내일의 나를 위해서도 좋다는 것을 말이다. 사야카가 그런 깨달음과 함께 시어머니의 삶을 점차 자신의 삶으로 받아들이는 것 그대로. 소설은 그걸 전하고자 한다. 하지만 서커스처럼 현란하거나 소란스럽게 말하지 않는다. 그저 조용한 물결이다. 고요하게 독자를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바에 젖도록 한다. 소설도 언급하고 있듯이 한류 드라마라면 충분히 격한 갈등이 일어날 만한 설정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런 것 하나 없이 유유히 흘러가는 것이다. 어쩌면 소설이 간직한 전적인 포용과 대책 없는 낙관주의가 소설에서 시선을 거두게 할지도 모르겠다. '유유자적'이란 말을 글로 만나본 게 다인 일상으로 꽉 차 있고 대책 없이 남을 믿는 것만큼 바보 같은 짓은 또 없다는 말을 상시로 듣는 우리의 삶과는 너무나 거리가 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그동안 바나나의 문학 세계가 걸어온 여정을 생각한다면 이것을 다만 문학적 과장으로 여길 수는 없을 것 같다. 요시모토 바나나, 이전의 그녀는 현실이 아닌 곳에서 구원을 찾았다. 삶의 새로운 의미나 가능성은 먼 이국에서만 불어오는 미풍이었다. 하지만 '서커스 나이트'에서 그녀는 사야카의 고향인 '발리'가 어디나 될 수 있다고 말한다. 구원은 저 멀리 있는 어딘가가 아니라 바로 여기에 있다는 것이다. 그걸 강조하기 위해 현실을 좀 더 믿어볼 만한 곳으로 또 사랑할 만한 곳으로 구현한 것은 아닐까 싶다. 그런 삶에 봄날에 온천을 즐기는 곰처럼 마냥 젖어있다 보니 길들기라도 한 것인지 소설 속의 삶을 구태여 과장으로 여길 필요는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삶은 포용과 긍정으로 충만한 곳인데 내가 협소한 시야를 가진 탓에 그 반대로만 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그때, 문득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처음으로 보았던 밤의 서커스가 떠올랐다. 뒤이어 지금의 내가 경이로움에 말갛게 씻긴 눈으로 세상을 있는 그대로 힘껏 껴안았던 그때와는 너무 멀어졌구나 하는 자각까지도. 그 마음이 그리워지면서 하나의 갈망 또한 강렬하게 솟아났다. 다시 한번 그 밤의 서커스로 가고 싶다는.


 그러고 보면, 문학은 서커스가 아닐까? 서커스와 똑같이 문학도 일상의 중력에 속박되어 그저 삶의 편린만 바라보고서 불신과 불안으로 세상을 속단하기 바쁜 내게 삶의 새로운 면모를 한껏 재현하여 이전과는 전혀 다른 시선과 마음으로 삶을 대면하도록 만드니까 말이다. 이처럼 홀연히 경이와 구원의 장소로 우리를 데려갈 수 있기에 우리는 지금도 여전히 문학을 벗하는지도 모른다. '서커스 나이트'는 그런 문학의 힘을 그득 맛볼 수 있는 감미로운 만찬이다. 연일 폭염으로 더욱 피로와 비관에 물든 눈으로 삶을 바라보는 이가 있다면 이 만찬으로 초대하고 싶다. 그 날 밤, 아버지가 내 손을 이끌었듯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