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커스 나이트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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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주 어릴 때의 일이다. 아버지와 함께 밤의 서커스 공연을 관람한 적이 있다. 그때의 아버지는 내가 첫 아들이라 그랬는지, 세상에서 자신이 놀랍다고 생각한 것을 내게 보여주길 원했다. 넓은 바다라든지, 새벽 안개가 수면 위로 서서히 걸어가는 호수라든지. 아마도 그런 경이로운 것들을 통해 내가 살아간다는 것의 즐거움을 알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싶다. 물론 그 이유를 아버지는 한 번도 말해준 적이 없고 그저 나만의 짐작에 불과하지만. 서커스 관람도 그 중 하나였다. 당시 아버지가 내게 보여준 많은 풍경처럼 처음 서커스를 보았던 그 밤의 광경 역시 내 기억에 여전히 선명하게 박혀있다. 그 곳은 신비의 장소였다. 일상에서 만나볼 수 없는 존재들이 출현했고, 커다란 공 위에서 자유롭게 저글링 하는 이가 있었으며 까마득한 높이에서 날개가 달린 듯 활공하는 이들이 있었다. 거기는 일상의 중력이 미치지 않았다. 우리를 속박하고 있는 세계의 질서도 가벼이 넘나드는 것 같았다. 사람에게 엄연한 한계로 주어졌다고 여겼던 것들이 더는 사람의 가능성을 막는 벽이 아니게 되었다. 그렇게 '서커스 나이트'는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를 바꾸었다. 세계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거대하다는 것을 감탄과 갈채의 시선 가운데 확인시켰다. 그 여백을 얼마나 많이 볼 수 있는가가 결국엔 나의 행복을 좌우한다는 것도.



 요시모토 바나나의 '서커스 나이트'를 읽다 보니 절로 그 밤의 서커스가 떠올랐다. 제목 때문이 아니다. 소설에 서커스가 나왔기 때문도 아니다. 소설에 담긴 이야기 전체가 그 밤의 서커스와 똑같은 것을 내게 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야카란 여성이 있다. 어릴 때 부모님을 모두 비행기 사고로 잃은 뒤로 그녀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집을 가져본 적이 없다. 그녀의 생애는 방랑과 더부살이도 점철되어 있었다. 언제나 거주는 일시적이었고 이제 정주를 하게 되나 안심하면 뜻하지 않게 추방의 운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장돌뱅이의 운명이 그러하듯이 사야카, 그녀의 삶도 자신이 주도하는 것은 없었다. 수면 위의 잎새처럼 누군가 일으킨 파문에 휩쓸리는 삶이었다. 적어도 지금까진 그랬다. 그런 그녀의 삶이 한 통의 편지로 변하기 시작한다. 과거의 상처가 눅진하게 배어든 그녀의 굽은 손가락이 펴지듯이, 위성처럼 누군가의 삶을 맴돌기만 했던 그녀가 이제 항성이 되어 남에게도 따스한 빛을 나눠주는 것이다. 세상이 그녀가 여기는 것보다 훨씬 거대하며 그것을 통해 삶에는 사야카 집 마당에 있는 히비스커스 나무 아래 묻혀 있었던 과거의 연인 이치로 쌍둥이의 형 뼈와도 같이 지금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삶의 여백들이 광장처럼 넓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밤의 서커스가 주었던 것과 똑같이.


 인생사 새옹지마(塞翁之馬)라 했던가. 그 고사에 나오는 변방 노인이 깨달았던 대로 더 넓은 시선으로 세상을 담아보면 우리는 알게 된다. 삶을 긍정한다는 것이 무지와 무력의 소치는 아니며 쐐기처럼 박힌 상처라 해도 담아두고 곱씹기 보다는 허허로이 흘려보내는 게 내일의 나를 위해서도 좋다는 것을 말이다. 사야카가 그런 깨달음과 함께 시어머니의 삶을 점차 자신의 삶으로 받아들이는 것 그대로. 소설은 그걸 전하고자 한다. 하지만 서커스처럼 현란하거나 소란스럽게 말하지 않는다. 그저 조용한 물결이다. 고요하게 독자를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바에 젖도록 한다. 소설도 언급하고 있듯이 한류 드라마라면 충분히 격한 갈등이 일어날 만한 설정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런 것 하나 없이 유유히 흘러가는 것이다. 어쩌면 소설이 간직한 전적인 포용과 대책 없는 낙관주의가 소설에서 시선을 거두게 할지도 모르겠다. '유유자적'이란 말을 글로 만나본 게 다인 일상으로 꽉 차 있고 대책 없이 남을 믿는 것만큼 바보 같은 짓은 또 없다는 말을 상시로 듣는 우리의 삶과는 너무나 거리가 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그동안 바나나의 문학 세계가 걸어온 여정을 생각한다면 이것을 다만 문학적 과장으로 여길 수는 없을 것 같다. 요시모토 바나나, 이전의 그녀는 현실이 아닌 곳에서 구원을 찾았다. 삶의 새로운 의미나 가능성은 먼 이국에서만 불어오는 미풍이었다. 하지만 '서커스 나이트'에서 그녀는 사야카의 고향인 '발리'가 어디나 될 수 있다고 말한다. 구원은 저 멀리 있는 어딘가가 아니라 바로 여기에 있다는 것이다. 그걸 강조하기 위해 현실을 좀 더 믿어볼 만한 곳으로 또 사랑할 만한 곳으로 구현한 것은 아닐까 싶다. 그런 삶에 봄날에 온천을 즐기는 곰처럼 마냥 젖어있다 보니 길들기라도 한 것인지 소설 속의 삶을 구태여 과장으로 여길 필요는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삶은 포용과 긍정으로 충만한 곳인데 내가 협소한 시야를 가진 탓에 그 반대로만 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그때, 문득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처음으로 보았던 밤의 서커스가 떠올랐다. 뒤이어 지금의 내가 경이로움에 말갛게 씻긴 눈으로 세상을 있는 그대로 힘껏 껴안았던 그때와는 너무 멀어졌구나 하는 자각까지도. 그 마음이 그리워지면서 하나의 갈망 또한 강렬하게 솟아났다. 다시 한번 그 밤의 서커스로 가고 싶다는.


 그러고 보면, 문학은 서커스가 아닐까? 서커스와 똑같이 문학도 일상의 중력에 속박되어 그저 삶의 편린만 바라보고서 불신과 불안으로 세상을 속단하기 바쁜 내게 삶의 새로운 면모를 한껏 재현하여 이전과는 전혀 다른 시선과 마음으로 삶을 대면하도록 만드니까 말이다. 이처럼 홀연히 경이와 구원의 장소로 우리를 데려갈 수 있기에 우리는 지금도 여전히 문학을 벗하는지도 모른다. '서커스 나이트'는 그런 문학의 힘을 그득 맛볼 수 있는 감미로운 만찬이다. 연일 폭염으로 더욱 피로와 비관에 물든 눈으로 삶을 바라보는 이가 있다면 이 만찬으로 초대하고 싶다. 그 날 밤, 아버지가 내 손을 이끌었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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