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조자 1
비엣 타인 응우옌 지음, 김희용 옮김 / 민음사 / 2018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베트남 전쟁을 소재로 다룬 작품들은 지금까지 허다하게 만나보았다.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의 '지옥의 묵시록'이나 올리버 스톤의  '플래툰', '7월 4일생'을 비롯한 많은 영화가 있었고 황석영의 '무기의 그늘'이나 안정효의 '하얀 전쟁' 또 박영한의 '머나먼 쏭바강'을 포함한 많은 소설이 있었다. 그러나 비엣 타인 응우옌의 '동조자' 같은 소설은 처음이다. 왜냐하면 이 소설은 지금까지 베트남 전쟁을 다룬 작품들이 담고 있지 않았던 새로운 목소리를 들려주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베트남 사람 자신의 목소리를.


 생각해 보니 지금까지 내가 보고 읽은 베트남 전쟁에 대한 작품들은 모두 베트남 사람의 것이 아닌 제3자의 것이었다. 남의 전쟁에 할 수 없이 뛰어든 이들의 시선으로 바라봤던 전쟁만이 내가 만날 수 있는 베트남 전쟁의 전부였던 셈이다. 많은 영화와 소설들이 전쟁이 가져다 준 고통과 절망을 그리고 있었지만 그건 오로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전쟁에 휘말린 바깥에서 온 자들의 고통과 절망이었을 뿐, 정작 거기엔 전쟁의 당사자이자 다른 어떤 누구보다 많은 상처를 가졌을 베트남 사람들의 것은 빠져 있었다. '동조자'는 무엇보다도 그걸 깨닫게 했다. 지금까지 나는 단 한 번도 베트남 사람 자신의 목소리를 들어보지 못했다는 것을.




 소설 '동조자'는 베트남 전쟁과 그 이후를 시간적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월남 장교이지만 실은 북베트남을 위해 일하는 첩자가 주인공이다. 소설의 대부분은 주인공이 자신의 정체성을 증명하기 위해 수용소의 소장에게 쓰는 자술서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러한 자술서의 형식은 사실 주인공의 삶을 단적으로 집약하여 나타내고 있는데 왜냐하면 그는 평생 자술서를 쓰듯 남에게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야 했던 것이다. 어릴 때는 프랑스인 아버지와 베트남인 어머니 사이에서 '잡종 새끼'라고 놀리는 베트남 사람들에게 자신이 베트남인이라는 것을 증명해야했고 자라서는 북베트남의 첩자로 일하느라 자신이 남베트남에 충성하는 군인이라는 걸 증명해야 했다. 그리고 베트남이 패망하고 북베트남이 지배하게 되었을 때는 그들에게 자신이 서양 문명에 세뇌되지 않았으며 여전히 북베트남에게 충성하고 있다는 걸 증명해야했다.


 그는 단 한번도 남에게 있는 그대로 온전히 받아들여진 적이 없다.

 늘 자기 스스로 당신과 같은 사람이라는 걸 입증해야 했다. 그것을 위해 그는 두 사람을 희생시키기까지 한다. 그 희생자들이란 '무분별한 소령'과 '소니'다. 한 사람은 주인공이 장군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죽였고 다른 한 사람은 질투 때문에 죽였지만 희생자들의 공통점을 생각한다면 그들을 그 죽인 진짜 원인은 다른 곳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바로 그들이 가진 확고한 정체성 때문이라는 걸 말이다. 그들의 정체성은 '무분별한 소령'의 뚱뚱한 육체만큼이나 흔들리지 않는다. '소니'처럼 자신의 존재를 증명할 필요도 느끼지 못한다. 주인공의 눈에 그들은 더없이 자유로워 보이는데 우리는 그 자유가 그들의 안정된 정체성에서 비롯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주인공에게 부재한 그것을 그들은 아낌없이 누리고 있었기에 주인공은 그들을 죽음으로 내몬 것이다. 


 그는 늘 둘 사이에서 흔들렸다.

 프랑스와 베트남 사이에서, 북베트남과 남베트남 사이에서, 만과 본이라는 친구 사이에서, 민족 문화와 외래 문명 사이에서. 그는 베트남에서 미국으로 또 북베트남으로 이동하지만 그 어디서도 자신의 영토를 발견할 수 없었다. 어디를 가나 그는 의혹의 시선을 받는 이방인일 뿐이었다. 그에겐 자유가 허락되지 않았다. 정체성이란 덫에 완전히 속박되어 늘 상대가 요구하는 가면을 써야했다. 그것이 어릴 때부터 자신을 옥죄는 올가미와 다를 바 없었기에 그는 거기서 헤어나고자 했다. 그가 북베트남의 혁명에 동조했던 것도 죽이고 싶을 정도로 아버지를 원망했던 이유와 똑같이 그것에 기대서라도 자신의 정체성을 온전히 확립하고자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오히려 혁명에 철저하게 배반당한다.


 독립과 자유 - 나는 이 단어들을 말하는 데 너무 신물이 났다 -의 이름으로 스스로를 해방시켰지만, 그런 다음 곧 우리의 패배한 동포들에게서 그것을 박탈했던 것이다.(2권, p. 292)


 그리고 그제서야 깨닫게 된다. 자신이 혁명을 통해 이루고자 했던 독립과 자유가 아무 것도 아니듯, 자신이 그토록 목매달았던 확고한 정체성 또한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그것은 환영에 불과했다. 아무것도 아닌 것에 언젠가 누군가가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무언가 있는 것처럼 잔뜩 위장시켜 놓았던 것이 바로 '정체성'이었던 것이다.


 일본인들이 우리에게 황인종의 우월성을 가르쳐주지 않았다면, 프랑스인들이 우리를 문명화시키려 시도한 적이 결코 없었다면, 호찌민이 변증법적이지 않고 카를 마르크스가 분석적이지 않았다면, (2권, p. 258)


 이처럼 그가 아무것도 아닌 것을 의미가 있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은 바깥에서 주입받은 것이었다. 무언가 되어야만 한다고 말했던 바깥의 이념이나 사상들 모두가 실은 그를 옭아매는 사슬에 다름 아니었던 것이다. 친구이기도 한 정치의원의 혹독한 심문을 통해 그는 정체성이 무의미하다는 진실을 깨닫고 비로소 사슬에서 풀려난다. 이제 그에겐 모든 게 농담으로 보인다. 그는 아무것도 없는 것을 당당히 아무것도 없다고 비웃을 줄 아는 '익살꾼'이 된다. '벌거벗은 임금님'이란 동화에서 유일하게 임금님이 벌거벗었다고 말했던 아이가 쾌활하게 웃으며 임금님을 비웃었듯이.


 농담을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들은 정말로 위험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아무것도 없음'을 경건한 마음으로 말하고,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아무것도 없음'을 위해 죽을 것을 요구하고, '아무것도 없음'을 숭배하는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은 '아무것도 없음'을 비웃는 사람을 너그럽게 봐주지 못한다.( 2권, p. 284)


  진정한 독립과 자유는 하나였다. 웃는 것. 그것은 동화 속 아이와 같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자신의 모습도, 타인의 모습도. 그 어느 틀에 끼워맞추지 않고. 익살은 자신과 상대방을 사회가 온갖 것으로 덕지덕지 기워놓았던 정체성의 껍질을 산산히 깨뜨리고 본연의 모습으로 돌려놓는다. 태어났을 때와 똑같이 그 어떤 규정도 있지 않았던 순수한 현존(現存)으로. 순수하게 독립적이고 완전하게 자유로운 그 상태로.


 이것은 사르트르가 '인간은 실존이 본질에 선행하는 존재다'라고 말했던 것과 일맥상통한다. 이 말은 인간이 세상에 태어나 먼저 존재하고 정의되는 것은 그다음이라는 의미다. 그러면서 사르트르는 첫 순간에 인간을 아무 정의도 할 수 없는 것은 우선 인간이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그는 나중에야 비로소 무엇이 될 것이며 그 자신이 스스로 만들어 가는 대로 될 것이다.'라고. 이 사르트르의 말에서 우리는 주인공이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 알 수 있다. 남이 먼저 닦아두고 걸어가라며 내모는 길이 아니라 자신이 가고자 하는 길을 스스로 만들어 나갈 것이라는 걸. 세상에 되어야 할 존재 같은 건 없다. '답게'란 말만큼 폭력적인 것도 또 없다. '동조자'가 충분히 보여주었듯이 지금 가지고 있는 그 모습만으로도 우리가 존중받아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


 그러나 오늘의 시대는 이것을 완강히 거부하고 있다. 갈수록 인종과 국적 그리고 성별과 계층을 이유로 한 차별과 적대가 횡행하고 있다. 곳곳에 혐오의 말들이 넘쳐나고 갑질의 난무와 증오의 분출로 피해를 입는 사람들이 허다하게 생겨난다. 알고보면 이 모든 일의 근본엔 아무것도 아닌 것을 아주 무거운 의미가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우리의 착각이 있다. 지금 내가 입고 있는 정체성의 옷은 어쩌다 입게 된 옷일 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일시적이고 잠정적인 그 옷을 자기 존재 의미의 전부라고 여긴다. 그리고 고정 불변하며 나는 절대 너가 될 수 없다고도.


 프랑스의 인류학자 레비 스트로스는 언젠가의 연설에서 야만인이란 다른 사람을 야만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정체성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동조자'의 장군이나 소장이 잘 나타내고 있는 것처럼 타인에게 멋대로 고정된 정체성을 씌워 혐오와 증오의 말들을 쏟아내는 사람의 머릿속에만 존재한다. 자신이 타인보다 더 자유롭고자 타인을 차별과 모욕으로 공격하지만 그럴수록 더 갇히게 되는 건 자신이다. 진정으로 자유롭고자 한다면 우선 타인부터 정체성의 그물에서 해방시켜줘야 한다. 그래야 자신도 해방될테니까 말이다. 주인공이 잘 보여주었듯이. 


 결국 '동조자'는 제목 그대로 우리가 과연 어디에 최종적으로 동조해야 하는가를 알려주고 있는 셈이다. 그건 모든 인간이 그 자체로 오롯이 동등하다는 사실이다. 인간은 선행하는 어떤 개념의 실현 같은 것이 결코 아니다. 다만 순수한 시작일 뿐이다. 아무런 구분도, 우열도 없는. 그리고 누구에게도 그 시작을 자기 뜻대로 이끌고 갈 권리 역시 없다. 바로 이것에 우리는 동조해야 한다. 타인 뿐만이 아니라 나 또한 독립적이고 자유롭게 하는 이념의 동조자가 되어야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