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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신사
에이모 토울스 지음, 서창렬 옮김 / 현대문학 / 2018년 6월
평점 :
삶은 때로 예기치 않은 곤경을 가져다 준다.
1922년, 러시아의 유서 깊은 가문 출신인 로스토프 백작에게 그런 일이 일어났다. 볼셰비키가 혁명에 성공하여 정권을 잡자 그를 한 호텔의 스위트룸에 평생 가둬버린 것이다. 그는 죽을 때까지 단 한 발자국도 호텔을 떠날 수 없다. 추사 김정희가 그랬고 버마의 아웅산 수지가 그랬듯이, 한정된 공간에 못처럼 딱 박혀 버린 것이다. 미국 작가 에이트 토올스의 소설, '모스크바의 신사'는 이렇게 시작한다. 제목의 신사는 당연하게도 로스토프 백작이다. 그런데 이런 시작을 보노라면 조금 걱정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책의 분량은 무려 723페이지니까 말이다. 한 곳에서 내내 갇혀 살아야 하는 자를 가지고 이만한 길이의 이야기를 과연 계속 흥미과 재미를 느끼면서 읽도록 할 수 있을까?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그 어려운 것을 에이트 토올스는 해낸다. 그것도 사람만이 아니라, 공간까지 호텔을 벗어나지 않으면서 말이다. 한정된 사람과 공간을 가지고 이토록 풍성하고 흥미로운 얘기를 자아낼 수 있다니 실로 입이 떡 벌어질 수밖에 없다. 겨우 두 번째 작품이라는 말에 더 벌어져 버린다.
소설을 읽으면 역시 강하게 떠오르는 것은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다.
주인공이 이름이 '전쟁과 평화'에 나왔던 로스토프 백작 이름 그대로이고 호텔의 고양이 이름까지 역시 그 소설에 나왔던 '쿠투조프'라서 더 그렇게 된다. 톨스토이의 로스토프는 소설의 마지막에 자신의 밑에서 일하는 농부들을 사기꾼이라며 불신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에이트 토올스의 로스토프는 그와 완전히 정반대의 모습을 보여줘서 재밌다. 계층과 나이를 불문하고 늘 예의를 지키며 배려하고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 진솔한 우정을 나누는 것이다. 혹시 에이트 토올스는 '전쟁과 평화'의 로스토프 백작이 계속 나이를 먹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 속에서 자신의 로스토프를 빚었던 것은 아닐까? 진실은 모르겠지만 어쨌든 ‘전쟁과 평화’에서의 로스토프와 이 소설의 로스토프에게서 비슷한 점이 있는 건 사실이다. ‘모스크바의 신사’의 로스토프에게 가장 커다란 트라우마를 만들게 된 계기인 도박 사건 역시 ‘전쟁과 평화’의 로스토프도 겪는다. 재밌게도 ‘모스크바의 신사’에선 도박에 이겼지만, ‘전쟁과 평화’에선 함정에 빠져 계속 잃는다. 그런데 도박을 하는 동기는 같다. ‘모스크바의 신사’에선 로스토프가 복수를 위해 도박을 벌였지만, ‘전쟁과 평화’에선 로스토프에게 복수하려는 자가 도박으로 끌어들인다.
사정이 이러하다 보니, ‘전쟁과 평화’의 주제와 ‘모스크바의 신사’의 주제가 서로 이어지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전쟁과 평화’의 주제는 역사의 거대한 움직임인 전쟁과 한 개인의 사소한 삶이 결코 유리되어 있지 않다는 것으로 실은 우리 모두가 다 같은 거대한 운명 공동체를 이루기에 나밖에 모르는 협소한 시야보다는 다른 모두를 아우르는 넓은 시야를 지닐 것이며 닥쳐온 불행이나 고난이 있더라도 기나긴 삶의 시간 속에서 그것이 어떤 의미를 가질지는 누구도 알 수 없으니 섣불리 낙담하거나 좌절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모스크바의 신사’도 그와 비슷한 말을 들려준다.
우선은 불현듯 닥쳐온 고난이 그렇다. 주인공 로스토프에게 닥쳐온 것은 전쟁만큼이나 느닷없고 비극적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내내 실의에 빠져 주검처럼 살만한 일이다. 그러나 로스토프는 그러지 않는다. 비록 거할 수 있는 곳과 움직일 수 있는 곳, 거기다 말할 수 있는 사람이 턱없이 한정되어 있다고 해도 오히려 거기서 더 풍부한 드라마와 깊고도 친밀한 관계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사람이 환경에 쉽사리 지배되지 않는다는 것을 ‘모스크바의 신사’만큼 생생하게 알려주는 소설은 또 없을 것 같다. 설령 그것이 제아무리 척박한 환경이라도 말이다.
그렇지만 물론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로스토프가 그럴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자신을 주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아무리 갑작스럽게 맞딱드린 변화라 해도 과거의 권위나 명성에 기대어 변화를 거부하지 않았다. 그저 겸손하게 온전히 받아들였다.
"시대가 해야 할 일은 변화하는 것입니다, 할레키 씨. 그리고 신사가 해야 할 일은 시대와 함께 변화하는 것이지요."(p. 122)
이러한 겸허와 존중의 태도는 그를 감금시켰던 볼셰비키와는 얼마나 다른가?
그들은 자신의 뜻에 따르지 않거나 맞지 않으면 로스토프에게 했던 것처럼 감금시키거나 숙청시켜 버리는 게 타자를 대하는 유일한 태도였다. 오로지 자신의 틀을 타인에게 절대적으로 강요할 뿐, 개인이 가진 개성은 전혀 용납하지 않았다. 고통 속에서 거지처럼 유랑했던 로스토프의 친구 시인이 그 대표적인 사례다. 그가 하필이면 시인으로 설정된 것도 시야말로 개인의 독립적인 개성이 가장 잘 드러나는 곳이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싶다.
그렇다면 이 소설엔 뚜렷한 하나의 전선이 존재하는 셈이다.
얼른 볼셰비키 대 로스토프의 싸움이라고 해도 불러도 좋을 정도로 개인을 지우기 위해 익명화 시키려는 세력과 반대로 개인이 지닌 고유한 개성을 더 드러내고 지켜주려는 로스토프가 만드는 전선이다. 이런 전선은 볼셰비키가 와인의 라벨을 모조리 지워버렸던 에피소드에서 선명하게 드러난다. 거기서 로스토프는 볼셰비키가 한 짓에 대해 이렇게 안타까움을 표시한다.
안에 든 와인이 무엇이든 간에 이웃한 다른 와인과는 같지 않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같기는커녕 백작의 손에 들린 병 속의 내용물은 한 국가나 한 인간과 마찬가지로 독특하고 복잡한 역사의 산물이다. 와인의 색깔, 향, 맛은 그 와인이 태어난 지역의 특유한 지형과 고유한 기후를 나타낼 것이다. (...) 그랬다. 한 병의 와인은 시간과 공간의 최종 추출물이고, 개성 그 자체의 시적 표현이었다. 그런데도 이곳에서 와인은 익명의 바다로, 평균과 무지의 영역으로 던져졌다.(p. 232 ~ 3)
이처럼 볼셰비키는 익명화의 바다 속에 개인을 침몰시키려 한다. 그런 볼셰비키에 맞서 로스토프는 개인의 고유한 개성을 건져내려 애쓴다. 바로 이런 싸움이 소설에 존재하는 것이다.
이것을 고려하면 작가가 왜 하필이면 로스토프가 하나의 장소에 계속 부박히는 설정을 했는지도 어느 정도 이해가 간다. 로스토프가 결코 떠날 수 없는 호텔이라는 공간 자체가 한 개인의 모습을 상징하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호텔이란 공간은 한 사람의 삶이다. 그 삶을 어떻게 바라보는가? 바로 그것에서 볼셰비키와 로스토프는 차이가 난다. 볼셰비키가 그러하듯이, 상대의 삶을 존중하지 않고 그저 이용만 하려는 자의 눈에 한 개인은 삶의 깊이와 폭을 전혀 지니지 않는 얇은 평면으로만 보일 것이다. 어떤 라벨을 붙여도 상관없는.
반면에 한 개인이 가진 독립적인 개성과 삶을 최대한 존중하고 배려하는 사람의 눈에 한 개인은 저마다 자기의 폭과 깊이를 옹골차게 가지고 있는 것을 보일 것이다. 소설에서 로스토프 백작이 식당에서 풍경을 스케치하고 있는 건축가 지망생에게 이렇게 말했듯이.
"방이라는 건 그 안에서 벌어진 모든 일들의 총체라는 말씀이군요."
"예, 바로 그거라고 생각해요." 백작이 말했다. "이 특별한 방에서 이루어진 교류의 결과가 무엇인지는 정확히 꼬집어 말할 수 없지만, 그 교류 덕분에 세상이 나아졌다는 것만큼은 확신할 수 있습니다."(p. 522)
지배인 안드레이가 어느 날 밤 보여준 놀라운 저글링 실력이나 지배인과 요리사 그리고 로스토프가 공모하여 러시아 전통 요리를 몰래 만든 것도 이러한 것의 표현이다. 한 사람의 삶이란 함부로 라벨을 붙일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선명하게 드러내기 위한.
그리고 바로 이러한 삶의 무규정성, 불확실성이 한 사람의 삶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존중해야만 하는 이유가 된다. 또한 우리가 환난이 닥쳐왔다고 해서 쉽게 무너지거나 희망을 놓아버려서는 안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소피야의 말대로.
아버지는 우리 인생은 불확실성에 의해 움직여 나아가는데, 그러한 불확실성은 우리의 인생 행로에 지장을 주거나 나아가 위협적인 경우도 많다고 했다. 그러나 우리가 관대한 마음을 잃지 않고 보존한다면 우리에게 극히 명료한 순간이 찾아들 거라고 했다. 우리이게 일어난 모든 일들이 갑자기 하나의 필수 과정이었음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순간이 찾아든다는 것이었다. 우리가 앞으로 살아가야 할 삶으로 꿈꿔온 대담하고 새로운 삶의 문턱에 서 있을 때조차도 그렇다는 것이다.(p. 687)
이러한 말을 ‘모스크바의 신사’는 소설 자체로 놀랍도록 온전히 재현한다. 한 사람에게는 얼마나 무궁무진한 힘과 가능성이 있는지, 그렇기에 우리는 삶의 완전히 끝날 때까지 그 어떤 어려움에 처하더라도 걸어가는 것을 포기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소설에서 로스토프가 있었던 방은 자신이 그동안 있었던 방들 가운데 가장 작은 방이었으나 바로 그 방에서 그는 삶 속에 있었던 그 어떤 방보다 더 많은 일과 인연을 만들어냈다.
말할 것도 없이 이 방은 지금껏 살아오면서 그가 사용했던 방들 가운데 가장 작은 방이었다. 하지만 이 사방 네 벽 안에서 세상은 오고갔다. (p. 683)
이만큼 삶이 가진 불확실성이 바로 삶의 활발한 역동성을 만들어내며, 그 역동성이 진정한 나를 만들어간다는 것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이야기가 또 있을까 싶다. 로스토프가 만들어내는 삶의 무늬를 보노라면 나도 그런 역동성을 가지고 싶어진다. 물론 로스토프는 어떻게 하면 그런 역동성을 가질 수 있는지도 보여준다. 하루하루 성실하게 계속 뚜벅뚜벅 걸어가는 것이다.
알렉산드르 로스토프는 과학자도 아니고 현자도 아니었다. 하지만 예순넷이라는 나이를 먹은 그는, 인생이란 것은 성큼성큼 나아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만큼은 현명했다. 인생은 서서히 펼쳐지는 것이다. 주어진 하나하나의 순간마다 천 번에 걸친 변화를 보여주는 과정이다. 우리의 능력은 흥하다가 이울고, 우리의 경험은 축적되며, 우리의 의견은 - 빙하가 녹듯 매우 느리지는 않다 해도 적어도 천천히 점진적으로 - 진화한다. 소량의 후추가 스튜를 변화시키듯, 매일매일 벌어지는 사건들이 우리를 변화시킨다.(p. 630)
소설을 읽고 나면 이 말이 지극히 옳다는 걸 알게된다. 순간, 삶의 다양한 국면마다 조급하게 일희일비했던 나 자신이 조금 부끄러워지면서 삶을 보다 높은 안목으로 바라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아주 높이 나는 새에겐 높은 빌딩이나 낮은 주택이나 다 하나의 평면으로 보이듯이, 삶의 어려움과 고난도 그렇게 바라봐야겠다고.
요즘처럼 무더위에 쉽게 짜증을 내며 만사 귀찮다는 표정으로 모든 걸 마냥 내버려 두고 있는 내겐 특히나 필요한 안목이다. ‘모스크바의 신사’를 본받아 ‘서울의 신사’가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 평정심과 중심을 잃지 않고 나로 인해 다른 이들 또한 좋은 추억과 인연을 만들 수 있는 사람, 설령 아주 조그만 둥지라도 누군가 주저없이 날아와 편히 깃들 수 있는 사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