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정이란 존재는 오해의 산물입니다.

소설에서 탐정은 주로 명석한 두뇌로 미궁에 빠진 사건을 해결하고 누구도 보지 못했던 사건의 진실을 찾아내 숨어있는 범인을 잡습니다. 덕분에 탐정은 진실의 발견자이며 질서의 구현자라는 칭송을 얻습니다. 범죄는 질서정연하게 움직이고 있는 사회에 혼돈을 가져옵니다. 범죄의 본질은 법의 이름 아래 꽉 짜여 있는 직물과도 같은 질서를 끊고 교란하던 것이니까요. 탐정은 그 끊어진 직물을 다시 잇고 얽힌 질서를 잘 풀어 되돌리는 이를테면 수선공 같은 존재입니다. 그게 우리가 아는 탐정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하지만 착각입니다.



 탐정은 진실을 발견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만드는 존재죠. 또한 질서를 구현하는 존재도 아닙니다. 단지 그 얼룩을 덧칠해서 임시로 보이지 않게 할 뿐입니다. 그는 솜씨 좋은 수선공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저 그런 척을 할 뿐입니다. 솜씨 없는 자들일수록 대개 현란한 말솜씨로 자신의 무능을 가리기 마련입니다. 탐정도 그러합니다. 그의 화려한 수사는 진실을 찾지 못하고 질서를 바로 잡지 못하는 자신의 무능을 가리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가진 탐정의 모습은 허상입니다. 조작된 신화에 불과합니다. 그건 소문만 무성할 뿐, 정작 실체를 본 사람은 드문 망령과도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탐정은 자본주의의 망령입니다. 그는 느닷없이 출몰하고 배회하면서 사람들에게 사회가 안정적으로 지속되고 있다는 환상을 심어줍니다. 보통의 망령은 현실 세계를 상대화 시키지만 탐정이란 망령은 다릅니다. 그는 현실 세계를 절대화시키기 위해 나타납니다. 그의 화려한 수사는 이 세계를 빠져 나갈 출구가 없다는 흐느낌입니다. 그가 세우는 것은 질서가 아니라 창살입니다. 그는 우리를 감금하고 교도관이 되기 위해 태어난 존재입니다.


 자본주의가 그런 탐정을 낳았습니다. 그는 역사적으로 분명한 자본주의의 자식입니다. 탐정의 탄생이 가능했던 이유가 있습니다. 자본주의가 모든 가치 질서를 근본부터 뒤엎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신이 지배하던 중세에는 올라갈 수 있는 사다리의 높이가 정해져 있었습니다. 계급은 하늘이 정했고 한 번 정해진 이상 죽을 때까지 변하지 않았습니다. 경쟁은 원천적으로 배제되었습니다. 그건 오로지 더 많은 영토를 위한 왕과 귀족들만의 것이었고 나머지 농부들은 언제나 변함없는 소박한 일상을 살아갔습니다. 물론 쉽지 않았습니다. 원인을 알 수 없는 유행병이 있었고 자연은 언제 사납게 돌변할 지 몰랐으며 야밤에 강도떼나 이웃 나라 군사의 침입을 받게 되는 경우도 허다했습니다. 도처에 많은 위험이 있었지만 스스로 보호할만한 수단은 적었던 그들이었습니다. 정글에서 주위 사정에 민감한 쪽은 대부분 생태계의 약자들입니다. 육체로 부터 달리 생존 수단을 얻을 수 없는 이들이기에 바깥의 정보를 최대한 모으는 것으로 생존을 이어가려 합니다. 이렇게 약자일수록 정보가 중요합니다. 중세의 정보는 지금처럼 책에서 구할 수 없었습니다. 글을 아는 자는 압도적으로 적었습니다. 대부분 수도사만 글을 알았으니까요. 그러니 정보는 오로지 경험에서 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많은 경험을 한 자가 사회의 우대를 받게 됩니다. 그가 가장 많은 정보를 제공해줄 수 있으니까요. 아니면 많은 곳을 떠돌아다닌 여행자이거나. 보편적이었던 이방인에 대한 환대는 그런 이유인 것입니다. 오래 산 사람에 대한 존경도 그 때문입니다. 살아온 세월만큼 정보가 축적되어 있으니까요. 네, 중세 시대엔 연장자에 대한 존중이 현대보다 훨씬 높았습니다. 지금처럼 늙은이들을 뒷방 노인네 취급 하지 않았습니다. 그 연륜에 깃든 경험 때문이죠. 우리나라의 경로사상도 그와 같은 맥락입니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모든 것을 바꿨습니다.

 이제 계급은 하늘이 아니라 돈이 정합니다. 사다리가 올라갈 수 있는 고도의 제한은 이미 없어졌고 하늘 아래 무엇이든 될 수 있는 무한 경쟁 시대에 돌입했습니다. 경쟁이 치열해졌습니다. 하지만 이기는 방법은 오직 하나 밖에 없습니다. 자본주의는 오로지 상품 생산을 통해 목숨을 이어갑니다. 무조건 상품을 많이 만들어 많이 파는 것. 그게 자본주의의 지상 명령입니다. 뛰어드는 사람은 훨씬 많아졌는데 달릴 수 있는 루트는 하나 밖에 없습니다. 가치가 '돈'으로 단일하기 때문이죠. 자본주의 속의 사람들을 자주 경마장의 말에 비유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단일한 루트' 이것이 궁극적으로 지금의 노인 문제를 가져온 원인입니다. 경마장의 말에게 중요한 것은 연장자의 경험이 아닙니다. 오로지 필요한 것은 더 빨리 달릴 수 있는 근력 뿐이죠. 똑같이 자본주의는 상품을 많이 생산할 수 있는 노동력만이 최상의 수단입니다. 더이상 노인네 경험 따위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매일 똑같은 물건만을 만들 뿐인데 들어봐야 어디다 쓰겠어요? 근력이 딸리는 노인네들은 생산을 저하시키는 방해물일 뿐입니다. 노인의 지위 격하가 가속도로 이루어집니다. 하지만 누구나 노인이 됩니다. 육체의 쇠약은 필연적입니다. 궁극에 있는 죽음도 마찬가지 입니다. 하지만 싫습니다. 쇠약이나 죽음 모두 자신이 경쟁에 뒤쳐지게 만드는 것이니까요. 노인 혐오와 죽음에 대한 공포는 자본주의의 필연적인 산물입니다. 바로 그 공포가 추리 소설을 낳았습니다. 죽음이 삶의 당연한 결과로 여겼던 중세에선 추리 소설의 탄생은 불가능했던 것이죠.


 현대인들에게 지나치게 죽음에 대한 강박이 있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입니다. 기필코 피해야 할 것이기에 관심이 그만큼 높아집니다. 추리 소설은 그 강박을 먹고 자라났습니다. 죽음에 대한 호기심을 채워주기 위해 태어난 것이죠. 추리소설을 통해 이제 죽음은 분석의 대상이 됩니다. 탐정들은 무엇보다 임상의로 나타납니다. 그는 죽음이 가지고 있는 공포에 맞서 철저한 분석으로 죽음을 인간의 운명이 가진 사건이 아니라 하나의 사물로 만들며 결국 죽음이 가진 공포를 무화시켜 버립니다. 공포는 오로지 미지의 것에서만 옵니다. 정체를 알 수 없기에 무서운 것입니다. 파악 가능하다면 공포는 사라져 버립니다. 탐정이 하는 일이 그것이었습니다. 탐정은 죽음의 공포 때문에 벌벌 떨던 현대인들의 '고스트버스터'였습니다. 이제 왜 제가 탐정을 자본주의의 망령이라 언급하는 것인지 아실 것입니다. 자본주의가 가져온 죽음에 대한 공포에서 불현듯 출몰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죽음이란 음산한 묘지를 배회하는 존재입니다.


 중요해진 것은 얼마나 철저하게 분석할 수 있느냐 입니다. 아주 작은 것까지 분석할수록 죽음에 대한 공포도 사라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탐정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자질이 관찰하고 파악하며 해석하고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이 됩니다. 사람들이 그러한 탐정의 능력에 열광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그 능력이 자신이 가진 죽음에 대한 공포를 희석시켜 주기 때문이죠. 셜록에 대한 찬사와 동경은 그가 나를 죽음의 공포에서 건져주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이 분석과 설명이 납득할만한 것이어야 한다는 데 있습니다. 납득하지 못하면 공포가 사라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많은 이들에게 보편적으로 납득 가능하게 하려면 무엇보다 필요한 것이 바로 규칙입니다. 중세에는 이런 규칙을 만들기가 어려웠습니다. 경험이 가진 개인차가 들쑥날쑥이라 보편적 잣대를 세우기가 어려웠으니까요. 하지만 근대에는 가능합니다. 무엇보다 분석과 설명이라는 데 있어서는 정말 좋은 심판이 존재합니다. 바로 과학입니다. 그 과학이 모두를 납득시킬 규칙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합리성'이 태어났습니다. '합리적이다'라는 말은, 달리 말하면 분석과 설명이 과학적으로 타당하다는 것입니다.


 과학이란 벗의 도움으로 탐정은 이제 '합리'의 망토를 두르게 되었습니다. 그가 아무리 말도 안되는 가설을 세우고 근거를 제시하더라도 '합리의 규칙'에 의거해 타당하기만 한다면 설득력을 가지게 되었고 급기야는 유일한 진실마저 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 아시겠지요? 왜 탐정이 궁극적으로 무능한 존재라고 하는 지를.


 탐정이 근거하는 것은 사건 자체가 아니라 오로지 규칙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현실에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합리성을 적용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합리성에다 현실을 그리스 신화의 프로쿠르테스의 침대처럼 끼워 맞춥니다. 그렇습니다. 그에겐 뉴얼이 있습니다. 모든 현실은 오로지 그것을 통해서 재현되고 해석되어야만 합니다. 진짜 현실은 탐정에게 필요없습니다. 필요한 것은 자신의 가설과 설명을 사람들에게 보편적으로 납득시켜 줄 매뉴얼 뿐입니다. 매뉴얼이 없으면 탐정은 무능으로 전락합니다. 진실도 입증받지 못합니다. 그러니 어떻게 질서를 구현하겠습니까? 현실의 질서는 이미 그에게 소용없는데. 탐정에겐 오로지 매뉴얼의 질서만이 중요합니다. 그는 그 질서를 현실에다 세우는 것입니다. 질서의 구현이 아니라 사실은 질서의 왜곡입니다.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구요? 바로 제더다이어 베리의 '탐정 매뉴얼' 때문입니다. 처음 이 책을 보고 제가 기대했던 것은 고전 스타일의 추리 소설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작품은 그런 저의 기대를 무참히 배반했습니다. 놀랍게도 이 소설은 제가 지금까지 말했던 탐정의 역설을 말하고 있었습니다. 모든 것을 다 아는 것 같지만 결국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탐정의 한계에 대해, 모든 질서의 구멍들을 메우고 바로 잡아줄 것 같지만 정작 하는 건 있는 질서마저도 왜곡 시키는 탐정의 사기에 대해 말하는 소설이었던 것입니다.


 어떤 장르가 발전하면 이런 작품이 나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스스로 자기가 기반하고 있는 장르의 규칙을 허물고 그 그라운드 제로에서 장르가 가진 규칙의 의미를 전혀 다르게 해석하여 새로운 의미를 밝혀주는 작품이 말입니다. 그런 것을 흔히 '자기 반영성의 작품'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한 장르가 궁극에 달했을 때 한 차원 더 높은 단계로 진화하기 위하여 필연적으로 태어나는 일종의 도약을 위한 발판과 같은 것입니다. 단언컨대, '탐정 매뉴얼'이 그런 작품입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설명하기 위하여 위에서 저렇게 구구절절 써내려갔던 것입니다.


               뉴욕대 교수인 로버트 스탬이 자기반영성을 테마로 문학과 영화를 분석한 책입니다.

자기 반영에 대하여 잘 알 수 있는 책이라 한 번 소개해 봅니다.(현재 이 책은 절판이네요. 아쉽게도.)

               

 과연 제가 설명을 잘 했는 지 모르겠습니다. 미흡하다면 바로 '탐정매메뉴얼'을 읽어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제 설명은 어디까지나 '탐정 매뉴얼'에서 나온 것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것이니까요. 물론 제더다이어 베리가 작품에 투영한 의미를 제대로 잡아내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만.


 그래도 탐정물의 진화된 형태를 구경하고 싶으시다면 한 번 읽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이야기는 꽤나 독특합니다. 저는 마치 데이비드 린치의 영화 세계에 초대된 듯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소설 자체가 환상과 현실의 모호한 경계에 대해서 말하고 몽유병자도 나옵니다만 정말 끝이 보이지 않는 몽환의 미로 속을 몽유병자가 되어 걷고 있는 듯 했습니다. 고전 스타일의 추리 소설을 기대하셨다면 어느 순간 길을 잃어버릴 수도 있는 소설입니다. 책이 벽으로 날아가지 않으면 다행일지도 모릅니다. 영화를 보셨다면 소설의 내용이 좀 더 수월하게 이해될 지도 모르겠습니다. 알렉스 프로야스 감독의 영화 '다크 시티' 보셨나요? 스포일러가 될 수 있기에 구체적으로 언급하지는 않겠습니다만 소설 속 어떤 부분의 설정이 이 영화의 세계와 많이 유사합니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 '인셉션'도 이해에 도움이 됩니다.



 와! 아직도 전 주인공의 이름조차 말하지 않았군요. 그런데도 이렇게나 길게 썼다니 새삼 제가 대견해질 정도입니다. 이름은 언윈입니다. 그는 한 탐정 회사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탐정은 아닙니다. 탐정이 한 일에 대해 보고서를 작성하는 '서기'입니다. 이 '서기'라는 게 왜 나왔는 지는 '왓슨'만 생각해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왓슨' 역시도 홈즈의 서기나 다름없었으니까요. 소설 자체가 홈즈가 한 활약에 대해 왓슨이 쓴 보고서라고 해도 무방하지 않을까요? 아가사 크리스티의 탐정 '엘큘 포와로'의 동반자 헤이스팅즈 대위도 왓슨과 똑같이 '서기'라고 할 수 있죠.


 전통적으로 추리 소설에선 '서기'가 꼭 필요합니다. 기록을 통해 탐정의 천재성을 널리 알려야 하니까요. 옛날에 알렉산더 대왕은 '트로이'에 나오는 아킬레우스의 무덤 앞에서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아킬레우스에겐 호머와 같은 시인이 있어 그의 업적을 영원히 아름답게 남길 수 있는데 자신에겐 그런 시인이 없다는 이유로 말이죠. '서기'란 그런 존재입니다. 하지만 그가 정작 유포하는 것은 탐정의 천재성이 아니라 합리성의 환상이죠. 회사에서 언윈의 존재 가치도 그러합니다만 '서기'의 존재란 거의 제로에 가깝습니다. 왜냐하면 결국 그는 '메아리'에 불과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이 본 것에 대해 쓰는 것이 아닙니다. 탐정이 본 것을 대리해서 쓰는 것일 뿐입니다. 그는 자기가 알아낸 것에 대해 쓰는 것이 아닙니다. 탐정이 알아낸 것을 대리해서 쓰는 것일 뿐입니다. '서기'는 실은 자기가 본 적도 없고 아는 것도 없는 것에 대해서 쓰는 것입니다. 그러니 메아리와 무엇이 다를까요?


 '서기'는 탐정의 머리 속에만 있던 것을 '보고서'라는 물질로 실현시키는 존재입니다.

 진정한 현실은 사실 오로지 서기의 손에서 태어납니다. 하지만 그 '서기'가 하는 일은 근본적으로 자기는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는 것에 대한 환상을 만들어내는 것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사실 '서기'는 진실의 유포자가 아니라 환상의 유포자입니다. 메아리 자체가 실체 없는 허상이듯이.

 그렇게 '서기'의 신체란 현실과 환상의 변증법적 종합과도 같습니다. 그는 환상과 현실이 맞닿아 있는 곳이며 그 내부에선 파도가 쉴 새없이 밀려드는 해변과도 같이 환상과 현실의 경계선이 나날이 고쳐 그려지고 있습니다.


 앞서 '탐정 매뉴얼'이 현실과 환상의 모호한 경계에 대해서 말하는 소설이라 한 바 있습니다. 장자의 '호접지몽'을 혹시 아시나요? 장자가 어느날 꿈에서 나비가 되었는데 꿈에서 깨어나 보니 나비의 꿈을 꾼 것인지 아니면 나비가 사람의 꿈을 꾸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호접지몽'입니다. 소설이 말하는 주제이기도 합니다. 결국 소설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존재의 자유'입니다. 언윈이 늘 꿈꾸는 그것이죠. 하지만 언윈은 바깥으로의 자유를 꿈꿉니다. 소설은 굳이 그럴 필요가 있는가를 묻습니다. 바깥을 통한 자유는 영역이 확고한 경계를 이루고 있어야 가능한 것인데 현실과 환상의 경계조차 모호하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우리가 생각하는 그 경계마저 실은 존재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게 소설이 말미에서 우리들에게 던져주는 화두입니다.


 소설이 '탐정 회사'를 통해 '합리성'을 공격하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가장 선명한 경계선으로 구획을 나누는 것이 바로 '합리성'이니까요. 그들은 그들만이 진실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토마스 H 쿤의 '패러다임'이 잘 밝혀주었듯이 현실 세계의 진실이 아니라 매뉴얼의 진실일 뿐입니다. '합리성'이란 '매뉴얼 대로'의 의미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탐정 회사의 '탐정 매뉴얼'은 여러가지 판본이 있습니다. 어떤 판본은 중요한 내용이 누락되어 있기까지 합니다. 더구나 원본이 되는 매뉴얼은 '서기'가 작성했습니다. 현실을 만드는 중요한 기준이 되는 매뉴얼 자체가 환상 속에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매뉴얼이 만들어 내는 경계가 고정적일 수 있을까요? 가장 굳건한 경계선을 만드는 '합리성'이 그렇다면 나머지는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소설이 하는 말은 정말일지도 모릅니다. 세상에 경계선은 없습니다. 있다면 오로지 우리 머릿속에만 있겠죠. 초반에 언윈이 그랬듯이 우리는 혹시 있지도 않은 경계선에 구애받아 스스로의 자유와 가능성을 억압하고 있지 않을까요? 진정한 자유로움은 세계를 달리 보는 시선에 있는데 오로지 바깥으로 부터 얻으려고만 하여 스스로 힘들게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탐정 매뉴얼'은 어느 순간 그런 질문을 던지는 작품입니다.


 띠지의 안내 문구는 이 책을 '명탐정이 되기 위한 최고의 안내서'라고 하고 있지만 소설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바는 아닙니다. 사실 소설은 메뉴얼의 제거를 추구합니다. 탐정도, 매뉴얼도 존재하지도 않는 경계선을 머릿속에다 주입하여 우리와 자유와 잠재된 가능성을 억압하는 존재일 뿐입니다. 우리에겐 탐정도, 매뉴얼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옛날 한 선사는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라!'고 했다죠.

 '탐정 매뉴얼'이 말하고 싶은 것도 그것입니다.

'탐정을 만나면 탐정을 죽이십시요. 매뉴얼을 만나면 매뉴얼을 불태우십시요.'

 '탐정 매뉴얼'은 그것을 위한 총알이자 성냥입니다.












 곁다리로 탐정 매뉴얼과 비슷한 탐정의 모습을 보여주는 소설들을 아울러 추천해 봅니다.











 존 딕슨 카의 '화형 법정'과 벤틀리의 '트렌트 최후의 사건' 입니다.

 모두 탐정이 찾아냈다고 주장하는 진실이란 사실 탐정이 만든 수사에 불과하며

 그 자체가 합리의 환상임을 보여주는 멋진 작품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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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4-08-31 2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 헤르메스님...
이 책 감상문을 저도 써보려고 했으나, 난해해서, 머리가 헝클어져서 못 쓰고 있습니다.

글 잘 읽었네요~ ^^

오드득 2014-08-31 22:00   좋아요 0 | URL
앗! 마녀고양이님도 읽으셨군요. 마녀고양이님의 감상문이 정말 너무도 기다려집니다.
이 소설은 참 남은 어떻게 읽었는지 궁금하게 만드는 책이더군요^ ^ 잘 읽었다는 말씀도 감사합니다^ ^

tataaz 2020-05-26 15: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번 독서모임 책인데 전 꾸역꾸역 읽었는데,,리뷰 보고 감탄하고 갑니다, 글 잘쓰시네요
 
이름 없는 자 - 속삭이는 자 두 번째 이야기 속삭이는 자
도나토 카리시 지음, 이승재 옮김 / 검은숲 / 2014년 8월
평점 :
품절


 도나토 카리시가 돌아왔다. 그것도 이탈리아 역사상 가장 많이 팔렸다는 소설 '속삭이는 자'의 속편으로. 어떤 이들에겐 단지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 작품을 벗할 충분한 이유가 된다. 내가 그렇다. '속삭이는 자'는 그 해 읽었던 미스터리 작품들 중에 최상의 만족감을 주었던 작품 중 하나였다. 그 속편이 나왔다는데 어찌 읽어보지 않을 수 있으랴. '이름없는 자'는 과연 도나토 카리시 작품답게 설정이 참으로 흥미롭다.



 시작부터 한 가족이 몰살당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희생자들은 토마스 벨런이라는 제약 회사 사장의 일가족. 유일하게 생존한 막내 아들의 신고로 출동하게 된 경찰들은 토마스 벨런과 아내 그리고 그들의 아들과 딸이 각각 자신의 방에서 총에 맞아 죽어있는 것을 발견한다. 토마스 벨런은 가장 마지막에 살해 되었는데 그건 범인이 그의 눈 앞에서 가족들 모두가 처형되는 것을 보여주고자 함이었다. 전편의 주인공이었던 밀라는 여전히 실종사건 전담반인 '림보'에서 일하고 있다. 그런데 그녀가 토마스 벨런 일가족 처형 사건 현장으로 호출된다. 살인사건인데 왜 실종사건 전담인 그녀를 부르는 것일까? 이유는 곧 밝혀진다. 알고보니 막내 아들의 신고 전화는 범인에 의한 것이었다. 범인은 막내 아들에게 자신의 이름까지 가르쳐주고 떠났다. 이름은 로저 벨린범인의 정체는 이미 밝혀진 것이다. 밀라는 그 이름을 듣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림보'의 벽에 붙은 아직 찾지 못한 실종자 명단에서 늘 보아왔던 이름이었더 것이다. 그는 무려 17년 동안이나 실종자 상태였다. 말리는 바로 그 때문에 호출된 것이었다. 실종 이전에 로저 벨린은 병든 어머니를 혼자서 정성껏 보살핀 착한 청년이었다. 그런데 17년만에 느닷없이 나타나 일가족을 처형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니다. 또 한 명의 로저 벨린처럼 실종되었던 인물이 갑자기 출현해 한 남자를 처참히 살해한 것이다. 이런 식으로 '장기간 실종자로 분류되어 있다가 홀연히 나타나' 누군가를 살해하는 일이 잇달아 벌어진다. 거기엔 예전 '림보'에서 같이 일했던 동료 형사도 있다. '도대체 이들은 그 오랜 시간 동안 어디에 있었으며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런 일들을 벌이는 것일까?' 밀라는 이런 의문 속에 수사에 나선다. 수사 도중 밀라는 이 사건의 배후에 20년 전에 일어났던 미궁 속에 빠져 버린 한 사건이 관련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이른바 '불면증 환자 실종 사건'.


 20년 전, 일곱 명의 불면증 환자 실종 사건은 결말이 있었다. 수사에 착수한 연방경찰은 동성애 성향이 있는 전직 군인, 배달원, 여대생, 은퇴한 과학 선생, 과부, 수제 속옷을 만들던 가게 여주인과 대형마트 여종업원 사이에 있을지 모를 연관관계를 밝히는 데 수사의 초점을 맞췄다. 하지만 모두가 불면증을 겪고 있다는 사소한 단서 외엔 뚜렷한 공통 분모를 찾아낼 수 없었다.(p. 265)


 경찰이 밝혀 낸 것은 이 일곱 명의 실종 사건이 오직 한 사람에 의해 저질러졌다는 것 뿐이었다.

 그의 이름은 '카이루스!'


 그 이름을 이번 '장기 실종자 연쇄 살인 사건'에서 보게 된 것이다. 바로 범인이 남겨 놓은 다음과 같은 쪽지에서.


 긴 밤이 시작됐다. 어둠의 전사들이 이미 도시에 침투한 상태다. 그들은 그분을 영접할 준비를 하고 있다. 왜냐하면 조만간 그분이 이곳에 오시기 때문이다. 마법사, 꿈의 주술사, 어둠의 주인, 천 개가 넘는 이름을 가진 카이루스님께서. (P. 188)


 20년을 사이에 둔 두 사건은 이렇게 연결되었다. 이 쪽지로 밀라는 한 명의 수사관을 만나게 된다. 그의 이름은 베리쉬. 20년 전 사건은 경찰 전체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그 사건으로 인해 가장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던, 베리쉬도 소속되어 있었던 '증인 보호 전담반'이 완전히 해체되었다. 그건 '카이루스'를 유일하게 목격한 한 여인이 증인 보호 도중 카이루스에게 납치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이름은 실비아. 경찰뿐만 아니라 베리쉬 또한 이 사건으로 뼈아픈 트라우마를 안게 된다. 그는 실비아를 사랑하고 있었다.


 20년이 지난 지금도 베리쉬의 트라우마는 여전하다. 그는 아직도 그녀를 잊지 못한다. 매일 눈에 밟힌다. 그녀가 사라진 이유를 알고 싶어 경찰 일은 뒷전으로 미루고 인류학을 따로 공부했을 정도다. 조직에서 그를 보는 눈이 곱지 않다. 이제는 마피아에게 뇌물을 받았다는 오해마저 사게 되어 왕따까지 당한다. 경찰에선 아무도 가까이 다가오려 하지 않는 베리쉬에게 인간적으로 다가와 편까지 들어주는 이는 오직 하나, 밀라 뿐이다. 그렇게 밀라와 베리쉬의 연대가 구축된다. 사실 둘은 닮았다. 둘 모두 트라우마가 있다. 밀라도 여전히 '속삭이는 자'에서의 트라우마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그건 무엇보다 그녀의 딸 '앨리스'와의 관계에서 드러난다. 엄마지만 밀라는 딸인 앨리스에게 섣불리 다가가지 못한다. 엄마 집에 맡겨두고 매일 밤 앨리스 방에 몰래 설치한 CCTV로 딸의 일상을 훔쳐보는 게 밀리가 엄마로서 하는 전부다. 밀라가 딸에 다가가지 못하는 이유는 자신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인간적인 감정을 느낄 수 없다. 타인의 아픔이나 괴로움, 고통 같은 것들을 그녀는 이해할 수 없다. 말리가 내내 실종 전담반 '림보'에서 일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사라진 인간을 찾는 것을 통해 그 감정들을 헤아리고자 함이다. 그녀가 이렇게까지 하는 까닭은 오직 하나다. 자신이 괴물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녀의 옷을 벗겨보면 그 알몸의 신체엔 곳곳에 흉터들이 즐비하다. 아픔과 고통을 알기 위해 스스로 자해한 탓이다.


 티셔츠를 벗으며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알몸을 쳐다보았다. 비쩍 마르고 상처로 뒤덮인 몸. 살이 찌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라 여겼다. 그랬다면 아마 칼로 그 살들을 다 도려냈을 테니까. 세월이 흐르며 그녀의 몸을 점점 뒤덮은 흉터들은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없는 그녀 자신만의 고통을 의미했다. 자해하는 길만이 오직 마음속 깊은 곳에 자기 역시 인간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P.96)


 밀라는 이런 존재였다. 딸인 앨리스에게 섣불리 다가가지 못하는 것도 혹시 자신이 괴물이 아닐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녀는 늘 생각한다.


 '넌 그 사람 거야. 그에게 속해 있어.'(P. 94)


 밀라가 인간다움을 이해하기 위해 자해를 했듯이 베리쉬는 인간이 무엇인지 알기 위하여 '인류학'을 전공한다. 둘 모두 상실이 가져온 두려움에 대한 나름의 대처였다.


 '이름없는 자'는 결국 무엇에 대한 이야기일까? 그건 바로 '두려움'이다. 하이데거는 인간에게 있어 가장 근본적인 감정은 다름 아니라 '불안'이라고 보았는데 그처럼 평생 그림자와도 같이 따라붙게 마련인 불안과 두려움에게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를  말하는 작품인 것이다. 밀라와 베리쉬만이 아니다. 실종자들 역시도 모두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의 실종 또한 밀라의 예전 동료인 빈첸티가 잘 보여주듯이 두려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카이루스는 바로 그 두려움이 낳은 틈을 비집고 들어가 그들의 존재 모두를 삼켰던 것이다. 


 하지만 대처하는 방법은 달랐다. 밀리와 베리쉬는 스스로 깨닫고 이해하려고 했다. 무시와 제거의 선택지는 그들에게 없었다. 하지만 실종자들은 정반대였다. 그들은 알기 보다는 무시를, 이해 보다는 제거를 택했다. '이름 없는 자'에겐 이런 '전선(FRONT LINE)'이 존재한다. 베리쉬는 그런 실종자들의 태도를 '악의 논리'라 부른다. 베리쉬는 말한다. 실종자들의 연쇄살인은 카이루스가 '악의 논리'로 그들을 설득했기 때문이라고.



 '악의 논리' 이것은 이 소설의 원제이기도 하다. 베리쉬는 '악의 논리'를 이렇게 설명한다.


 "어미 사자는 자기 새끼들을 먹이기 위해 새끼 얼룩말을 사냥합니다. 그런데 이건 자비로운 행위입니까, 악의적인 행위입니까? 물론 어미 얼룩말은 새끼를 잃은 상실감에 괴로워하겠지만 그 반대의 상황으로 가면 어미 사자는 자신의 새끼들이 배고 고파 굶어죽는 장면을 지켜봐야 합니다. 선과 악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이유는 채식주의 사자가 없기 때문입니다."(P. 299)


 이렇게 악의 논리는 '선과 악의 모호성'을 전제로 한다. 선과 악의 절대적인 구분은 불가능하고 누군가의 선은 누군가에게 악이 되기 마련이고 그 반대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선행의 결과를 낳을 수 있다면 악행도 얼마든지 용납된다는 '악의 논리'가 만들어진다. 마키아 벨리의 말마따나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는 것이다. 아니면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죄와 벌'의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를 연상해도 좋다. 그는 돈은 전당포 노파와 같이 쓸모없는 이보다는 자기와 같이 사회에 도움이 될 지식인을 위하여 쓰여지는 게 더 가치있다는 이유로 노파를 살해한다. 어떻게 보면 범죄란 게 모두 사실 '악의 논리'에서 태어나는 것일지도 모른다. 카이루스 역시 바로 이 논리로 장기 실종자들을 살인으로 끌어들였던 것이다.


  "그들의 행동이 다른 이들의 삶을 개선시킬 수 있다고 설득하면 가능하다고 볼 수 있겠죠."

  "로저 벨린과 나디아 니버맨의 경우 단순한 복수가 아니었어요. 그들은 범행대상을 고를 때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는 대상 중에서 선택했던 거예요. 동기로 작용한 것은 단순한 앙심이나 복수가 아니라 그들의 경험이었던 거예요."(P. 301)


여기서 그들이 두려움이 결국 살인까지 낳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들은 제거로써 가진 두려움을 씻었고 '악의 논리'는 그것을 정당화해 주었다. 무시와 제거는 알고 이해하려는 것보다 손쉬운 방법이다. 감정적 차원의 시원함도 있다. 유혹은 거기서 온다. 덕분에 '악의 논리'는 꾸준하게 사랑받아왔다. 정당한 전쟁 논리엔 항상 그것이 동원되었다. 유럽의 십자군은 '악의 논리'로 이슬람 침공을 정당화 했고 독일의 나치는 '악의 논리'로 유태인 학살을 정당화했다. 우리나라도 북한으로부터 나라를 지킨다는 악의 논리로 민주화의 열망을 탄압했다. 지금의 세월호 참사 이후의 사태도 마찬가지다. 보다 나은 내일이라는 악의 논리로 현재의 고통과 범죄를 서둘러 무마시키려고만 들고 있다. 일본이 원전 사태가 일어났을 때 했던 것과 똑같이.


 '악의 논리'가 횡행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모두 그 근저에는 두려움이 있었다. 무조건 무시와 제거로 두려움을 없애버리고 싶다는 욕망이 악의 논리에 귀기울이도록 만들었다. 도나토 카리시의 '이름없는 자'는 '속삭이는 자'의 속편답게 빼어난 드라마 아래 우리가 왜 '악의 논리'에 솔깃해지는 것인지 그 이유를 '두려움'과 관련하여 잘 보여주고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지금 내가 이 두려움을 어떻게 극복하려고 하느냐에 있다는 것을 말이다. 밀라와 베리쉬는 그를 위한 하나의 대안이다.


 한나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으로 '악의 논리'의 무서움을 보여주었다. 악은 이성을 통한 합리적 선택의 산물로도 얼마든지 나올 수 있었고 심지어 학살과 같은 거대악조차 누구에게나 가능했다. 필립 짐바르도의 '스탠포드 교도소 실험'은 이것을 너무나 잘 보여주지 않았던가. 두려움을 가진 이라면 누구나 '악의 논리'에 유혹당할 수 있듯이 악은 어떤 특정한 자들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홀로코스트가 나치 때문에 가능했다고 생각하는 게 가장 큰 문제라고 한다. 그것을 오로지 나치의 책임으로만 돌리는 한 홀로코스트는 언제고 또다시 반복될 수 있다는 것이다. 바우만이 말하길, 그 비극의 반복을 끊을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 뿐이라고 한다. 그들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우리의 문제로 여기는 것. 즉 '악의 논리'는 존재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문제이고 생활 속에서 지속된 자기 성찰과 타자에 대한 이해와 배려가 수반되어야 풀 수 있는 문제라는 것이다. 무엇보다 소설에서 말리가 보여주는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말리의 삶은 괴물이 존재의 문제가 아닌 삶의 문제라는 것을 보여주는 단적인 여정이라 할 수 있다.


 원래 범죄학자인 도나토 카리시는 이렇게 해서 현대성의 가장 커다란 문제를 작품 속에 형상화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홀로코스트는 현대성 자체가 만들어낸 산물이라는 것을 분명히 했다. 그 비슷한 주제를 도나토 카리시는 소설로 말하는 것 같다. 도나토 카리시의 작품을 기다리는 것은 소설의 재미가 가장 크지만 이런 지점도 있기 때문에 다음 작품을 더욱 기대하게 된다. '이름없는 자'의 결말은 열려있다. 밀라는 아직 종착지에 이르지 못했다. 분명 후속작이 나올 듯 하다. 현대성이 가진 비극을 관통하는 말리의 여정이 어디로 이어질지 자못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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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는 존재 1 - 담박한 그림맛, 찰진 글맛 / 삶과 욕망이 어우러진 매콤한 이야기 한 사발
들개이빨 지음 / 애니북스 / 2014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아이큐 딸리는 머리로 생각해봤다.

삶의 비참함에 대해...

아마도 그건 살기 위해서 먹는 게 아니라

 먹기 위해서 살아야 하는 것에 있지 않을까 싶다.

허기를 채운다는 게 충분조건이 아니라

 그것 말고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필수조건이 되어버렸기에...


이 빌어먹을 허기!

그건 나의 삶을 대한민국에 허다한 그렇고 그런 삶들 중의 하나로 얽매었고

끝도 없는 타협과 불합리한 권위와 어리석은 맹목 앞에서의 굴종을 낳았으며

결국 내 두 날개를 모두 잘라 작고 소심한 키위로 만들어 버렸다.

사람으로 존재한다면 목이라도 조르고 싶은 심정이다.


나도 예전에 생각했다.

육두 문자를 오프닝으로 가볍게 읊조린 다음 왜 우리는 식물처럼 광합성을 못할까 하고.

설마 바로 그 말을 이 만화에서 보게 될 줄이야!



 사회 생활에 연륜이 쌓이고 인간 경험이 깊어지면 어느 순간 득도하게 될 때가 있다.

한 눈에 보기만 해도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감히 잡히는 때가 말이다.

물론 그 감이 100% 맞는다는 보장은 없다. 그래도 웬만큼은 들어 맞는다.

때로 그 혜안은 작품에도 적용되는데

이 작품이 그랬다.

이 장면으로 이 만화는 지극히 내 취향의 만화일 것임을 직감했고

결국 더없이 정확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바로 이 장면으로!



나도 고수를 생으로 씹는다.

왜 고수를 꼭 빼달라고 하는지 이해 안되는 사람이 나다.


그러니 안면몰수하고 누군가는 '주접 떨고 있네'할만큼 이 작품에 찬사를 늘어놓아 보자.

이제와 경고하자면,

그만큼 작품에 대한 애정으로 똘끼 충만한 편견 가득한 리뷰다.

메롱, 속았지?

하지만 좋은 걸 좋다고 말하는 게 뭐가 나빠? 



 '먹는 존재'는 올해 읽은 그 어떤 작품보다 내가 가장 많이 공감한 작품이다.

 솔직히 나는 반했다.



거침없이 작렬하는 육두문자를 BGM으로 흘러나오는 그녀의 직설에 마조히즘을 느끼면서 반했고


상사에 대한 쉬발리얼리스틱한 저항에는 설레었으며


기존 만화의 음식 맛에 대한 표현을 모조리 작파하고 19금 애로의 경지로 승화시킨 것에는 경탄하였다.


 그럼에도 가볍지 않았고 직설로 무장한 분명 사회 밑바닥 삶에 대한 관심과 이해에서 길어진 그녀의 통찰은 열 권의 인문서보다 더 뇌리에 둔중한 충격을 주었으며 아픔과 분노에는 나도 모르게 덮고 있는 요를 꽉 쥘만큼 공감하게 만들었다. 하여 생각했다. '쉬르발! 이런 게 진짜 만화고 우리 인생사 아냐?'


 나는 이런 생각을 한다. 좋은 작품은 효자손 같은 거라고.

그냥 답답한 마음을 풀어주는 게 아니다. 알지만 표현의 능력이 모자라 말로 되어 나오지 못하는 것을 우리를 대신해 적당한 표현을 찾아주는 것을 일컫는 것이다.

 적당한 말을 찾지 못해서 답답할 때가 참 많지 않은가? 누군가 그 말을 딱 찾아 일러준다면 가려운 등을 효자손으로 긁은 것처럼 시원해질 때가 있지 않은가? 그래서 효자손이다.


 나는 그런 걸 주는 것을 좋은 작품이라고 여긴다. 알맞은 표현은 중요하다. 그건 어떤 구체성을 주기 때문이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이더라도 막연하다면 그건 나의 선택에, 행위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적합한 표현의 말로 구체화 되어야만 우리는 그것을 정초로 사유와 행위의 누각을 지을 수 있다.


 구약에서 신은 모세가 말을 잘 못해서 걱정이라고 하자 그를 대신해 말을 잘 할 수 있는 아론을 주었다. 나는 좋은 작품은 이런 아론이라 생각한다. 곰곰히 생각하면서도 적당한 말을 찾지 못해 흐지부지 사라져버렸던 사유에 다시금 생명을 불어넣고 잘하면 실천까지도 나아가게 하는 존재.


말이 되는 지, 과연 이해 될런 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진심이다.


 다른 거 없다.

 "앗! 이거야! 이런 말을 하고 싶었어!"할만한 것들을 많이 가져다 줄 수 있는 작품.

 그것이 내겐 정말 좋은 작품이다.


'먹는 존재'가 그랬다.

나의 '아론'


작가에 대한 애정으로 스토킹을 했다. 

그러다 찾아낸 작가의 블로그.

거기에 이게 있었다. 큭큭큭...


공자가 말하길 인생사 꼭 필요한 건 '음식남녀'라,

즉 '식'과 '성'이라고 했는데

실수겠지만 그걸 절묘하게 표현한 것 같다.

꿈보다 해몽이라고 말할 건가요?


후후...


아론의 다음 말을 기다린다.

얼른 나와서 갑갑증을 좀 뚫어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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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호랑이가 온다
피오나 맥팔레인 지음, 하윤숙 옮김 / 시공사 / 2014년 7월
평점 :
품절


 75세의 할머니 루스. 5년 전에 남편과 사별한 그녀는 장성한 두 아들이 있지만 혼자 지낸다. 그러던 어느날 새벽 네시. 그녀는 거실에서 들려오는 '커다란 짐승의 헐떡임과 숨소리의 울림. 몸집이 거대함과 의도를 암시하는 숨소리의 울림'을 듣고는 소스라치게 놀란다. 그것을 그녀는 호랑이라 생각한다. 두려움에 떨다 용기를 내어 거실로 나가보니 호랑이는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 새로운 느낌, 대단히 중대한 느낌. 뭔가 중요한 일이 벌어지는데 그게 무엇인지 확실히 알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호랑이인가, 아니면 중요한 일에 대한 느낌인가?(p. 11)


 정말로 대체 그 소린 무엇이었을까? 아들 제프리의 말대로 꿈결의 연장이었던 것일까 아니면 느꼈던 그대로 이제껏 별 탈 없이 굴러왔던 인생에 무언가 닥쳐오고 있다는 신호였을까? 다음날. 과연 그 호랑이 소리가 신호이기라도 한 듯이 정체모를 한 여성의 방문을 받는다. 육중한 몸으로 존재감을 한껏 드러내는 그녀의 이름은 프리다. 그 존재감의 과시와 이름 때문에 여성으로서의 자의식을 자화상으로 자주 드러내었던 화가 프리다 칼로가 얼른 연상되는 그녀는 루스에게 다짜고짜 앞으로는 자기가 루스를 돌보게 될 것이라 말한다. 루스는 썩 내키지 않는 그녀를 자신의 둥지에서 몰아내고 싶지만 프리다는 막무가내다. 역시 호랑이는 프리다를 뜻하는 것이었을까?



 이 느닷없이 도래한 두 여성의 흥미로운 동거 이야기는 조금은 기묘해 보이는 여성 사이의 연대를 보여준다. 소설 초반에 우리는 루스의 과거를 보게 된다. 그 과거에서 드러나는 루스의 삶이란 그야말로 '안정'이라는 말을 그대로 형상화한 것과 같은 모습이다. 루스는 이제껏 단 한 번도 모험을 해 본 적이 없었다. 남편 해리와 똑같이 주어진 삶의 궤도에 순응하는 삶을 살아왔다. 그랬기에 프리다의 출현은 그녀의 조용한 삶의 수면에 문득 생겨난 파문과 같았다. 느닷없는 동거는 변함없이 돌고 돌았던 궤도의 이탈이었다. 그건 지금껏 자신을 안전하게 보호하던 울타리를 벗어나는 것이었기에 위험이었고 모험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만큼 갇혀 있던 삶에다 바깥의 세상으로 나갈 수 있는 문을 만든 것이기도 했다. 그 모험은 탈옥에서 오는 두근거림이었다. 한 번 자유를 맛 본 이가 다시 예전의 감옥으로 돌아가지 않으려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제대한 병장이 다시는 부대를 뒤돌아보지 않듯이.


 그녀의 이름이 하필이면 '루스'인 것도 이런 의미가 아닐까? '루스'는 잃어버리다란 뜻의 'lose'를 연상시킨다. 그렇게 그녀는 이제까지 살아온 자신의 삶을 잃어버린다. 문학적 의미만은 아니다. 실제로도 그렇다. 그녀는 자꾸 기억을 잃어버리고 자신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도 잊어버리는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존재 자체를 점점 상실(lose)해 간다.


 이로서 호랑이 소리가 암시했던 중대한 일이 과연 무엇인지 분명해진다. 그건 바로 이제 다시는 예전 삶으로 되돌아가지 못한다는 하나의 신탁이었던 것이다.


 왜 그녀는 과거의 삶을 상실해야 했을까? 작가 피오나 맥팔레인은 이를 통해 무엇을 말하려 했던 것일까? 이 작품에 대해 흔히 할 수 있는 오해는 루스라는 존재 때문에 노년에 대한 소설이 아닐까 여기는 것이다. 노년이 가져다 줄 수 있는 소외감, 무력감을 말하는. 분명 그런 것도 있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진심은 다른 데 있다. '밤, 호랑이가 온다'는 흔히 말하는 페미니즘 소설이다. 식상한 표현이 될 지도 모르지만 감히 말한다면 남성이 만든 울타리 안에서 여성은 진정한 삶을 영위할 수 없으며 그 진정한 구원은 오로지 여성들만의 연대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소설인 것이다.


 물론 결말은 이것을 명백히 부정한다. 하지만 왜 그런 결말에 이르게 되었는가를 따져볼 필요가 있다. 과연 루스와 프리다, 그녀들 모두에게 닥쳐온 비극은 누구 때문이었나? 바로 남자들이다. 루스가 프리다에게 날로 의존하게 되었던 것은 예전의 연인 리처드 때문이었다. 리처드에 대한 집착이 프리다에 대한 무분별한 의존을 낳았다. 프리다는 남자 친구 조지를 신뢰했다. 그녀가 루스를 찾아와 헌신적인 노동을 한 것도 조지 때문이었다. 루스와 프리다. 둘은 결국 같은 존재였다. 그녀들의 세계는 남자를 중심으로 돌았다. 독립적으로 뭔가 하기 보다는 그들에게 의존했다. 비극은 바로 거기에서 비롯되었던 것이다. 루스에겐 두 아들이 있었다. 하지만 루스가 그렇게 될 때까지 아들은 아무 도움이 안 되었다. 그들은 그저 멀리서 전화로 걱정을 전할 뿐이었다. 다시 만나게 된 리처드조차 마찬가지였다. 루스의 세계는 남자를 중심으로 돌았지만 정작 그녀가 얻는 것은 소외와 착취 뿐이었다. 프리다도 다를 바 없었다. 이렇게 이야기를 차근차근 뜯어보면 남성들의 무력함과 그에 대한 불신이 드리워져 있음을 보게 된다. 이렇게 보면 소설 초반 해리의 죽음에 나왔던 앨런이라는 존재가 참 의미심장해진다. 앨런, 그녀는 착한 사마리아 인이었다.  5년 전 남편 해리는 버스 정류장에서 심장 마비로 갑자기 죽었다. 해리는 늙어서 '시궁창의 개'처럼 객사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정말로 그런 상황이 벌어졌던 것이다. 그런 해리 앞에 가던 차를 멈추고 다가와 그렇게 죽지 않도록 도와주었던 것이 바로 앨런이었다. 루스는 그녀를 착한 사마리아 인으로 불렀다. 루스는 앨런을 보면서 이렇게 생각한다.


착한 마음을 가진 낯선 이가 어느 날 나타나 다른 어떤 이유 없이 오로지 선의 하나만으로 그녀에게 사랑을 베풀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다. 앨런이 그 증거였다.(p. 32)


 이것이 바로 핵심이라는 것을 우리는 소설의 마지막에서 느끼게 된다. 바로 이 가능성이 무엇보다 여성에게서 왔다는 것이 중요하다. 이만한 정도의 구원은 소설에서 오로지 앨런만이 준다.


"당신은 정말 생명을 구해주는 사람이에요" 필립이 말했다.(p. 369)


 다른 이는 아무도 루스에게 주지 못했다. 그토록 사랑했던 예전의 연인 리처드도, 두 아들도.

 남자들은 사실 루스가 키웠던 수컷 고양이와 같았다. 최소한 하루에 한 번은 토해서 더럽히는 존재들.


 그걸 프리다가 걸레로 말끔히 닦아내듯 치유를 줄 수 있는 건 앨런 뿐이었다. 프리다도 줄 수 있었다. 루스는 (진짜였는지 연기였는지 알 수 없으나) 호랑이를 해치운 프리다를 보면서 자신이 그토록 갈구했던 안전을 그녀가 주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루스가 프리다가 하자는 대로 군말없이 한 것도 앨런이 주었던 것을 프리다가 주고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루스는 앨런에게 고마움을 느꼈고 아울러 프리다에게도 고마웠다. 프리다는 집과 고양이와 루스를 위해 끊임없는 관심을 쏟으며 자기 몸이 닳도록 일했고 호랑이를 쫓아내주었다.(p. 266)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다. 그 프리다마저 루스와 똑같이 여전히 남성에게 얽매여 있었기 때문이다. 만일 프리다가 그로부터 자유로워지려고 했었다면, 루스 역시 더이상 리처드나 아들들에게 연연해하지 않고 순수하게 프리다와 연대하려 했었다면 아마도 결말의 비극은 찾아오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중에 앨런은 이렇게 말하기 때문이다.


 "난 프리다와 겨우 몇 분 정도밖에 이야기하지 못했어요. 앨런이 말했다. "하지만 그녀가 당신 어머니를 정말로 사랑한다는 인상을 받았어요"(p.367)


 

소설의 표지를 넘기면 이렇게 내가 좋아하는 앙리 루소의 '이국의 숲에서 우산을 든 여인'의 그림이 나온다. 남성 중심의 세계에서 빠져나와 여성 홀로 우뚝 섰을 때 가지게 될 자유를 뜻하는 그림인데 커버 자체가 소설의 주제를 잘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밤, 호랑이가 온다'는 바로 이런 소설인 것이다. 결국 루스를 두려움에 젖게 했던 호랑이는 무엇이었을까? 그건 바로 남성 혹은 그 남성에 여전히 얽매인 자신이 아니었을까?


 좀 더 보편적으로 의미를 확장해 보자면 이 소설은 독립적으로 서는 것의 중요성을 말하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무엇인가에 얽매이거나 의존하지 않는 것. 그런 이유로 루스가 하필이면 노년이 된 게 아닐까 싶다. 노년이란 무엇보다 타인에게 의존하지 않을 수 없는 상태이니까 말이다.


 살면서 우리는 남성, 여성을 포함하여 여러가지 것들에 우리 자신을 얽매이게 한다. 그것들이 삶을 좀 더 쉽게 걸어가게 만들어주리라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그것들이 우리의 보행을 어렵게 하고 때로는 걸려 넘어지게 할 때가 많다. 얽매이면 얽매일수록 내 걸음만 늦춰질 뿐이라는 것을 깨닫는 때도 잦다. 이 소설은 문득 그런 과거를 떠오르게 한다. 그러면서 비록 이 세상에 온통 흙비가 내리더라도 나 홀로 우산을 받치고 견디려는 연습을 해야겠구나 생각하게 만든다. 진정한 연대도 그 때라야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서로가 독립한 나가 될 수 있었을 때에.


 난폭한 운명으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하나, 소설이 거꾸로 보여주듯이 그 어떤 그물에도 걸리지 않는 홀로 자유로운 바람이 되는 것 뿐이다. 프리다와 루스는 그를 위한 타산지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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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파 마피아
토마스 키스트너 지음, 김희상 옮김 / 돌베개 / 2014년 6월
평점 :
절판


'피파 마피아'는 독일의 스포츠 저널리스트로 잔뼈가 굵은 토마스 키스트너의 르포르탸쥬다. 참으로 흥미진진하게 읽었는데 영화나 미니시리즈의 드라마로 만들어도 좋을 것 같았다. 공익을 위해서 만들어진 조직에서 사익 추구에만 혈안이 된 이들의 검은 커넥션을 흔히 '마피아'라고 하는데 제목 그대로 공익 단체라 세금까지 면제받고 있는 '피파'를 철저히 사익 추구의 도구로 이용해온 이들의 이야기를 꼼꼼하게 들려주는 책이다.


 국제축구연맹 '피파'의 역사는 꽤나 길다. 처음 결성된 것이 1904년으로 벌써 백년이 넘은 조직이다. 사실 이 때만 해도 힘이 미미한 조직이었다. 종주국인 잉글랜드조차 가입하지 않았다. 그러던 것이 한창 진행되던 제국주의에 발맞춰 축구의 인기가 유럽을 넘어 남아메리카 그리고 아프리카까지 파급되자 피파도 힘을 키워갔다. 오늘날 피파의 힘은 제국주의가 바탕된 것이었다. 본격적으로 피파의 힘이 강성해진 것은 3대 회장을 역임했던 쥘 미레 때였다. 그의 헌신과 노력으로 소수 나라들 간의 리그에 불과했던 월드컵은 무려 85개국 출전이라는 오늘날과 같은 월드컵의 모습이 될 수 있었다. 이 때까지만 해도 축구에 대한 순수한 사랑만으로 이루어진 조직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토마스 키스트너에 따르면 지금의 피파란 온갖 사적인 착복과 뇌물이 오고가는 추악한 부패의 온상이다.


 어쩌다 이렇게 변질되어 버렸을까? 토마스 키스트너는 그 최초의 계기로 1974년에 회장으로 취임한 아발란제를 꼽는다. 피파와 관련해 아발란제의 취임은 의미가 크다. 아바란제의 취임으로 피파의 성격이 협회에서 기업으로 변질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오늘날과 같은 피파의 모습은 아발란제가 만든 것이다. 아발란제는 오로지 주관하는 월드컵에서만 나오는 수익으로 근근히 운영되던 피파를 일신하여 적극적으로 수익을 창출해 나갔다. 덕분에 겨우 직원 12명에 불과하던 피파는 무려 120명의 직원들이 활발히 움직이는 조직이 되었다. 현재 피파의 매출은 작년만 해도 1조 4천 백억원. 실로 어마어마한 조직이 된 것이다. 그런데 그 많은 돈이 다 어디로 가는 지 알길이 없다. 피파는 월드컵이 열리는 해를 기준으로 4년마다 예산을 집행하고 결산한다. 하지만 제대로 된 감사를 받은 적은 아발란제 이후 단 한 번도 없다. 아니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토마스 키스트너에 따르면 피파는 회계와 감사를 한 민간 기업에게 전적으로 일임하고 있는데 그 기업은 회장의 통제 하에 있는 것이었다. 한 마디로 회장의 전횡을 감시할 만한 것은 아무 데도 없는 것이고 피파가 벌어들이는 그 많은 돈들은 모두 눈 먼 돈일 뿐이다. 엑셀 경이란 사람은 예전에 이런 현명한 말을 했다. "절대 권력은 절대적으로 부패한다."라고. '피파 마피아'는 전임 회장 아발란제와 현재의 회장인 블라터로 이어지는 악취로 들끓는 부패의 생생한 현장을 보여주는 책이다.


 스포츠는 공정이 생명이지만 그 배후에 도사리고 있는 것은 비열한 권력게임이다. 절대 권력을 얻을 수 있는 데다 그 많은 돈을 제 주머니에 마음껏 채워 넣을 수 있는 자리인만큼 회장 선거때마다 치열한 경쟁이 벌어진다. 부패의 악취는 결코 숨길 수 없다. 누군가는 맡고 조직을 변화시켜야겠다고 마음먹기 마련이다. 지금까지 많은 이들이 아발란제와 블라터의 악행에 맞서 피파를 지키려 해왔다. 하지만 그 때마다 아발란제와 블라터는 평소에 챙겨 놓은 비자금을 살포해 이들의 도전을 막았다. 거기에는 2002년의 한국 월드컵도 자유롭지 못하다. 토마스 키스트너는 의심한다. 그 때 한국이 전 세계의 예상을 뒤엎고 4강까지 가게 된 것엔 당시 블라터를 지지하지 않았던 정몽준과 모종의 거래를 했기 때문이 아니냐고. 특히 한국과 이탈리아의 16강 전에서 비론 모레노 심판이 페널티 박스 안에서 이탈리아 선수 토티가 일대일 상황에서 송종국의 태클에 걸려 넘어진 것을 두고 헐리우드 액션으로 판정하여 퇴장시킨 것은 많은 논란을 가져온 판정 중 하나인데 모레노가 그렇게 했던 것이 바로 블라터가 정몽준의 지지를 받아내기 위해 한 일은 아닐까 의심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 정몽준은 대통령이 되고 싶었고 그러기 위해서는 한국이 월드컵에서 높은 성적을 올려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둘의 이해관계는 그렇게 맞아 떨어졌다. 그래서일까 뒤이은 스페인과의 8강에서도 한국을 승리로 이끈 명백한 오심이 반복되었다. 정황은 있었다. 월드컵 후에 모레노 씀씀이가 커진 것이다. 월드컵 전만 하더라도 빚이 많아 생활에 쪼들렸던 모레노였는데 갑자기 어디서 큰 돈이라도 들어왔는지 돈을 펑펑 물쓰듯 했던 것이다. 그 당시 이탈리아 팀의 주장이자 수비수로 뛰었던 크리스티안 파누치는 "모레노 심판은 오직 한국이 8강에 진출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는 것 같았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기적과도 같았던 한국의 4강 진출. 과연 진실은 무엇이었을까? '꿈은 이루어진다'는 말 그대로 순수한 꿈의 성취였을까 아니면 모종의 뒷거래가 가져온 결과였을 뿐일까? 하지만 책에서 드러나는 자신의 절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면 어떠한 악행도 마다않는 블라터의 행보를 보노라면 그저 순수한 꿈의 성취라고 믿을 수만은 없을 것 같다.


 그렇게 피파의 현재는 경기에서 맛보는 순수한 감동마저도 오염시키고 있다. 토마스 키스트너는 서문에서 한 조직에서 일어나는 일로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차원에서 규제 없는 권력이 얼마나 끝없이 부패할 수 있는지의 사례로 보아줄 것을 당부한다. 마침 우리에게도 해수부 마피아, 원전 마피아 같은 관피아들이 쏙쏙 드러나고 있는 상황. 비록 축구에 관심이 없더라도 경종을 울리는 의미로다가 한 번 읽어보는 것은 어떨까 싶다. 재미까지 있어 읽는 부담도 적으니.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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