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정이란 존재는 오해의 산물입니다.

소설에서 탐정은 주로 명석한 두뇌로 미궁에 빠진 사건을 해결하고 누구도 보지 못했던 사건의 진실을 찾아내 숨어있는 범인을 잡습니다. 덕분에 탐정은 진실의 발견자이며 질서의 구현자라는 칭송을 얻습니다. 범죄는 질서정연하게 움직이고 있는 사회에 혼돈을 가져옵니다. 범죄의 본질은 법의 이름 아래 꽉 짜여 있는 직물과도 같은 질서를 끊고 교란하던 것이니까요. 탐정은 그 끊어진 직물을 다시 잇고 얽힌 질서를 잘 풀어 되돌리는 이를테면 수선공 같은 존재입니다. 그게 우리가 아는 탐정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하지만 착각입니다.



 탐정은 진실을 발견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만드는 존재죠. 또한 질서를 구현하는 존재도 아닙니다. 단지 그 얼룩을 덧칠해서 임시로 보이지 않게 할 뿐입니다. 그는 솜씨 좋은 수선공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저 그런 척을 할 뿐입니다. 솜씨 없는 자들일수록 대개 현란한 말솜씨로 자신의 무능을 가리기 마련입니다. 탐정도 그러합니다. 그의 화려한 수사는 진실을 찾지 못하고 질서를 바로 잡지 못하는 자신의 무능을 가리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가진 탐정의 모습은 허상입니다. 조작된 신화에 불과합니다. 그건 소문만 무성할 뿐, 정작 실체를 본 사람은 드문 망령과도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탐정은 자본주의의 망령입니다. 그는 느닷없이 출몰하고 배회하면서 사람들에게 사회가 안정적으로 지속되고 있다는 환상을 심어줍니다. 보통의 망령은 현실 세계를 상대화 시키지만 탐정이란 망령은 다릅니다. 그는 현실 세계를 절대화시키기 위해 나타납니다. 그의 화려한 수사는 이 세계를 빠져 나갈 출구가 없다는 흐느낌입니다. 그가 세우는 것은 질서가 아니라 창살입니다. 그는 우리를 감금하고 교도관이 되기 위해 태어난 존재입니다.


 자본주의가 그런 탐정을 낳았습니다. 그는 역사적으로 분명한 자본주의의 자식입니다. 탐정의 탄생이 가능했던 이유가 있습니다. 자본주의가 모든 가치 질서를 근본부터 뒤엎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신이 지배하던 중세에는 올라갈 수 있는 사다리의 높이가 정해져 있었습니다. 계급은 하늘이 정했고 한 번 정해진 이상 죽을 때까지 변하지 않았습니다. 경쟁은 원천적으로 배제되었습니다. 그건 오로지 더 많은 영토를 위한 왕과 귀족들만의 것이었고 나머지 농부들은 언제나 변함없는 소박한 일상을 살아갔습니다. 물론 쉽지 않았습니다. 원인을 알 수 없는 유행병이 있었고 자연은 언제 사납게 돌변할 지 몰랐으며 야밤에 강도떼나 이웃 나라 군사의 침입을 받게 되는 경우도 허다했습니다. 도처에 많은 위험이 있었지만 스스로 보호할만한 수단은 적었던 그들이었습니다. 정글에서 주위 사정에 민감한 쪽은 대부분 생태계의 약자들입니다. 육체로 부터 달리 생존 수단을 얻을 수 없는 이들이기에 바깥의 정보를 최대한 모으는 것으로 생존을 이어가려 합니다. 이렇게 약자일수록 정보가 중요합니다. 중세의 정보는 지금처럼 책에서 구할 수 없었습니다. 글을 아는 자는 압도적으로 적었습니다. 대부분 수도사만 글을 알았으니까요. 그러니 정보는 오로지 경험에서 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많은 경험을 한 자가 사회의 우대를 받게 됩니다. 그가 가장 많은 정보를 제공해줄 수 있으니까요. 아니면 많은 곳을 떠돌아다닌 여행자이거나. 보편적이었던 이방인에 대한 환대는 그런 이유인 것입니다. 오래 산 사람에 대한 존경도 그 때문입니다. 살아온 세월만큼 정보가 축적되어 있으니까요. 네, 중세 시대엔 연장자에 대한 존중이 현대보다 훨씬 높았습니다. 지금처럼 늙은이들을 뒷방 노인네 취급 하지 않았습니다. 그 연륜에 깃든 경험 때문이죠. 우리나라의 경로사상도 그와 같은 맥락입니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모든 것을 바꿨습니다.

 이제 계급은 하늘이 아니라 돈이 정합니다. 사다리가 올라갈 수 있는 고도의 제한은 이미 없어졌고 하늘 아래 무엇이든 될 수 있는 무한 경쟁 시대에 돌입했습니다. 경쟁이 치열해졌습니다. 하지만 이기는 방법은 오직 하나 밖에 없습니다. 자본주의는 오로지 상품 생산을 통해 목숨을 이어갑니다. 무조건 상품을 많이 만들어 많이 파는 것. 그게 자본주의의 지상 명령입니다. 뛰어드는 사람은 훨씬 많아졌는데 달릴 수 있는 루트는 하나 밖에 없습니다. 가치가 '돈'으로 단일하기 때문이죠. 자본주의 속의 사람들을 자주 경마장의 말에 비유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단일한 루트' 이것이 궁극적으로 지금의 노인 문제를 가져온 원인입니다. 경마장의 말에게 중요한 것은 연장자의 경험이 아닙니다. 오로지 필요한 것은 더 빨리 달릴 수 있는 근력 뿐이죠. 똑같이 자본주의는 상품을 많이 생산할 수 있는 노동력만이 최상의 수단입니다. 더이상 노인네 경험 따위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매일 똑같은 물건만을 만들 뿐인데 들어봐야 어디다 쓰겠어요? 근력이 딸리는 노인네들은 생산을 저하시키는 방해물일 뿐입니다. 노인의 지위 격하가 가속도로 이루어집니다. 하지만 누구나 노인이 됩니다. 육체의 쇠약은 필연적입니다. 궁극에 있는 죽음도 마찬가지 입니다. 하지만 싫습니다. 쇠약이나 죽음 모두 자신이 경쟁에 뒤쳐지게 만드는 것이니까요. 노인 혐오와 죽음에 대한 공포는 자본주의의 필연적인 산물입니다. 바로 그 공포가 추리 소설을 낳았습니다. 죽음이 삶의 당연한 결과로 여겼던 중세에선 추리 소설의 탄생은 불가능했던 것이죠.


 현대인들에게 지나치게 죽음에 대한 강박이 있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입니다. 기필코 피해야 할 것이기에 관심이 그만큼 높아집니다. 추리 소설은 그 강박을 먹고 자라났습니다. 죽음에 대한 호기심을 채워주기 위해 태어난 것이죠. 추리소설을 통해 이제 죽음은 분석의 대상이 됩니다. 탐정들은 무엇보다 임상의로 나타납니다. 그는 죽음이 가지고 있는 공포에 맞서 철저한 분석으로 죽음을 인간의 운명이 가진 사건이 아니라 하나의 사물로 만들며 결국 죽음이 가진 공포를 무화시켜 버립니다. 공포는 오로지 미지의 것에서만 옵니다. 정체를 알 수 없기에 무서운 것입니다. 파악 가능하다면 공포는 사라져 버립니다. 탐정이 하는 일이 그것이었습니다. 탐정은 죽음의 공포 때문에 벌벌 떨던 현대인들의 '고스트버스터'였습니다. 이제 왜 제가 탐정을 자본주의의 망령이라 언급하는 것인지 아실 것입니다. 자본주의가 가져온 죽음에 대한 공포에서 불현듯 출몰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죽음이란 음산한 묘지를 배회하는 존재입니다.


 중요해진 것은 얼마나 철저하게 분석할 수 있느냐 입니다. 아주 작은 것까지 분석할수록 죽음에 대한 공포도 사라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탐정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자질이 관찰하고 파악하며 해석하고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이 됩니다. 사람들이 그러한 탐정의 능력에 열광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그 능력이 자신이 가진 죽음에 대한 공포를 희석시켜 주기 때문이죠. 셜록에 대한 찬사와 동경은 그가 나를 죽음의 공포에서 건져주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이 분석과 설명이 납득할만한 것이어야 한다는 데 있습니다. 납득하지 못하면 공포가 사라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많은 이들에게 보편적으로 납득 가능하게 하려면 무엇보다 필요한 것이 바로 규칙입니다. 중세에는 이런 규칙을 만들기가 어려웠습니다. 경험이 가진 개인차가 들쑥날쑥이라 보편적 잣대를 세우기가 어려웠으니까요. 하지만 근대에는 가능합니다. 무엇보다 분석과 설명이라는 데 있어서는 정말 좋은 심판이 존재합니다. 바로 과학입니다. 그 과학이 모두를 납득시킬 규칙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합리성'이 태어났습니다. '합리적이다'라는 말은, 달리 말하면 분석과 설명이 과학적으로 타당하다는 것입니다.


 과학이란 벗의 도움으로 탐정은 이제 '합리'의 망토를 두르게 되었습니다. 그가 아무리 말도 안되는 가설을 세우고 근거를 제시하더라도 '합리의 규칙'에 의거해 타당하기만 한다면 설득력을 가지게 되었고 급기야는 유일한 진실마저 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 아시겠지요? 왜 탐정이 궁극적으로 무능한 존재라고 하는 지를.


 탐정이 근거하는 것은 사건 자체가 아니라 오로지 규칙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현실에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합리성을 적용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합리성에다 현실을 그리스 신화의 프로쿠르테스의 침대처럼 끼워 맞춥니다. 그렇습니다. 그에겐 뉴얼이 있습니다. 모든 현실은 오로지 그것을 통해서 재현되고 해석되어야만 합니다. 진짜 현실은 탐정에게 필요없습니다. 필요한 것은 자신의 가설과 설명을 사람들에게 보편적으로 납득시켜 줄 매뉴얼 뿐입니다. 매뉴얼이 없으면 탐정은 무능으로 전락합니다. 진실도 입증받지 못합니다. 그러니 어떻게 질서를 구현하겠습니까? 현실의 질서는 이미 그에게 소용없는데. 탐정에겐 오로지 매뉴얼의 질서만이 중요합니다. 그는 그 질서를 현실에다 세우는 것입니다. 질서의 구현이 아니라 사실은 질서의 왜곡입니다.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구요? 바로 제더다이어 베리의 '탐정 매뉴얼' 때문입니다. 처음 이 책을 보고 제가 기대했던 것은 고전 스타일의 추리 소설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작품은 그런 저의 기대를 무참히 배반했습니다. 놀랍게도 이 소설은 제가 지금까지 말했던 탐정의 역설을 말하고 있었습니다. 모든 것을 다 아는 것 같지만 결국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탐정의 한계에 대해, 모든 질서의 구멍들을 메우고 바로 잡아줄 것 같지만 정작 하는 건 있는 질서마저도 왜곡 시키는 탐정의 사기에 대해 말하는 소설이었던 것입니다.


 어떤 장르가 발전하면 이런 작품이 나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스스로 자기가 기반하고 있는 장르의 규칙을 허물고 그 그라운드 제로에서 장르가 가진 규칙의 의미를 전혀 다르게 해석하여 새로운 의미를 밝혀주는 작품이 말입니다. 그런 것을 흔히 '자기 반영성의 작품'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한 장르가 궁극에 달했을 때 한 차원 더 높은 단계로 진화하기 위하여 필연적으로 태어나는 일종의 도약을 위한 발판과 같은 것입니다. 단언컨대, '탐정 매뉴얼'이 그런 작품입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설명하기 위하여 위에서 저렇게 구구절절 써내려갔던 것입니다.


               뉴욕대 교수인 로버트 스탬이 자기반영성을 테마로 문학과 영화를 분석한 책입니다.

자기 반영에 대하여 잘 알 수 있는 책이라 한 번 소개해 봅니다.(현재 이 책은 절판이네요. 아쉽게도.)

               

 과연 제가 설명을 잘 했는 지 모르겠습니다. 미흡하다면 바로 '탐정매메뉴얼'을 읽어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제 설명은 어디까지나 '탐정 매뉴얼'에서 나온 것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것이니까요. 물론 제더다이어 베리가 작품에 투영한 의미를 제대로 잡아내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만.


 그래도 탐정물의 진화된 형태를 구경하고 싶으시다면 한 번 읽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이야기는 꽤나 독특합니다. 저는 마치 데이비드 린치의 영화 세계에 초대된 듯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소설 자체가 환상과 현실의 모호한 경계에 대해서 말하고 몽유병자도 나옵니다만 정말 끝이 보이지 않는 몽환의 미로 속을 몽유병자가 되어 걷고 있는 듯 했습니다. 고전 스타일의 추리 소설을 기대하셨다면 어느 순간 길을 잃어버릴 수도 있는 소설입니다. 책이 벽으로 날아가지 않으면 다행일지도 모릅니다. 영화를 보셨다면 소설의 내용이 좀 더 수월하게 이해될 지도 모르겠습니다. 알렉스 프로야스 감독의 영화 '다크 시티' 보셨나요? 스포일러가 될 수 있기에 구체적으로 언급하지는 않겠습니다만 소설 속 어떤 부분의 설정이 이 영화의 세계와 많이 유사합니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 '인셉션'도 이해에 도움이 됩니다.



 와! 아직도 전 주인공의 이름조차 말하지 않았군요. 그런데도 이렇게나 길게 썼다니 새삼 제가 대견해질 정도입니다. 이름은 언윈입니다. 그는 한 탐정 회사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탐정은 아닙니다. 탐정이 한 일에 대해 보고서를 작성하는 '서기'입니다. 이 '서기'라는 게 왜 나왔는 지는 '왓슨'만 생각해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왓슨' 역시도 홈즈의 서기나 다름없었으니까요. 소설 자체가 홈즈가 한 활약에 대해 왓슨이 쓴 보고서라고 해도 무방하지 않을까요? 아가사 크리스티의 탐정 '엘큘 포와로'의 동반자 헤이스팅즈 대위도 왓슨과 똑같이 '서기'라고 할 수 있죠.


 전통적으로 추리 소설에선 '서기'가 꼭 필요합니다. 기록을 통해 탐정의 천재성을 널리 알려야 하니까요. 옛날에 알렉산더 대왕은 '트로이'에 나오는 아킬레우스의 무덤 앞에서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아킬레우스에겐 호머와 같은 시인이 있어 그의 업적을 영원히 아름답게 남길 수 있는데 자신에겐 그런 시인이 없다는 이유로 말이죠. '서기'란 그런 존재입니다. 하지만 그가 정작 유포하는 것은 탐정의 천재성이 아니라 합리성의 환상이죠. 회사에서 언윈의 존재 가치도 그러합니다만 '서기'의 존재란 거의 제로에 가깝습니다. 왜냐하면 결국 그는 '메아리'에 불과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이 본 것에 대해 쓰는 것이 아닙니다. 탐정이 본 것을 대리해서 쓰는 것일 뿐입니다. 그는 자기가 알아낸 것에 대해 쓰는 것이 아닙니다. 탐정이 알아낸 것을 대리해서 쓰는 것일 뿐입니다. '서기'는 실은 자기가 본 적도 없고 아는 것도 없는 것에 대해서 쓰는 것입니다. 그러니 메아리와 무엇이 다를까요?


 '서기'는 탐정의 머리 속에만 있던 것을 '보고서'라는 물질로 실현시키는 존재입니다.

 진정한 현실은 사실 오로지 서기의 손에서 태어납니다. 하지만 그 '서기'가 하는 일은 근본적으로 자기는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는 것에 대한 환상을 만들어내는 것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사실 '서기'는 진실의 유포자가 아니라 환상의 유포자입니다. 메아리 자체가 실체 없는 허상이듯이.

 그렇게 '서기'의 신체란 현실과 환상의 변증법적 종합과도 같습니다. 그는 환상과 현실이 맞닿아 있는 곳이며 그 내부에선 파도가 쉴 새없이 밀려드는 해변과도 같이 환상과 현실의 경계선이 나날이 고쳐 그려지고 있습니다.


 앞서 '탐정 매뉴얼'이 현실과 환상의 모호한 경계에 대해서 말하는 소설이라 한 바 있습니다. 장자의 '호접지몽'을 혹시 아시나요? 장자가 어느날 꿈에서 나비가 되었는데 꿈에서 깨어나 보니 나비의 꿈을 꾼 것인지 아니면 나비가 사람의 꿈을 꾸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호접지몽'입니다. 소설이 말하는 주제이기도 합니다. 결국 소설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존재의 자유'입니다. 언윈이 늘 꿈꾸는 그것이죠. 하지만 언윈은 바깥으로의 자유를 꿈꿉니다. 소설은 굳이 그럴 필요가 있는가를 묻습니다. 바깥을 통한 자유는 영역이 확고한 경계를 이루고 있어야 가능한 것인데 현실과 환상의 경계조차 모호하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우리가 생각하는 그 경계마저 실은 존재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게 소설이 말미에서 우리들에게 던져주는 화두입니다.


 소설이 '탐정 회사'를 통해 '합리성'을 공격하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가장 선명한 경계선으로 구획을 나누는 것이 바로 '합리성'이니까요. 그들은 그들만이 진실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토마스 H 쿤의 '패러다임'이 잘 밝혀주었듯이 현실 세계의 진실이 아니라 매뉴얼의 진실일 뿐입니다. '합리성'이란 '매뉴얼 대로'의 의미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탐정 회사의 '탐정 매뉴얼'은 여러가지 판본이 있습니다. 어떤 판본은 중요한 내용이 누락되어 있기까지 합니다. 더구나 원본이 되는 매뉴얼은 '서기'가 작성했습니다. 현실을 만드는 중요한 기준이 되는 매뉴얼 자체가 환상 속에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매뉴얼이 만들어 내는 경계가 고정적일 수 있을까요? 가장 굳건한 경계선을 만드는 '합리성'이 그렇다면 나머지는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소설이 하는 말은 정말일지도 모릅니다. 세상에 경계선은 없습니다. 있다면 오로지 우리 머릿속에만 있겠죠. 초반에 언윈이 그랬듯이 우리는 혹시 있지도 않은 경계선에 구애받아 스스로의 자유와 가능성을 억압하고 있지 않을까요? 진정한 자유로움은 세계를 달리 보는 시선에 있는데 오로지 바깥으로 부터 얻으려고만 하여 스스로 힘들게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탐정 매뉴얼'은 어느 순간 그런 질문을 던지는 작품입니다.


 띠지의 안내 문구는 이 책을 '명탐정이 되기 위한 최고의 안내서'라고 하고 있지만 소설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바는 아닙니다. 사실 소설은 메뉴얼의 제거를 추구합니다. 탐정도, 매뉴얼도 존재하지도 않는 경계선을 머릿속에다 주입하여 우리와 자유와 잠재된 가능성을 억압하는 존재일 뿐입니다. 우리에겐 탐정도, 매뉴얼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옛날 한 선사는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라!'고 했다죠.

 '탐정 매뉴얼'이 말하고 싶은 것도 그것입니다.

'탐정을 만나면 탐정을 죽이십시요. 매뉴얼을 만나면 매뉴얼을 불태우십시요.'

 '탐정 매뉴얼'은 그것을 위한 총알이자 성냥입니다.












 곁다리로 탐정 매뉴얼과 비슷한 탐정의 모습을 보여주는 소설들을 아울러 추천해 봅니다.











 존 딕슨 카의 '화형 법정'과 벤틀리의 '트렌트 최후의 사건' 입니다.

 모두 탐정이 찾아냈다고 주장하는 진실이란 사실 탐정이 만든 수사에 불과하며

 그 자체가 합리의 환상임을 보여주는 멋진 작품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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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4-08-31 2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 헤르메스님...
이 책 감상문을 저도 써보려고 했으나, 난해해서, 머리가 헝클어져서 못 쓰고 있습니다.

글 잘 읽었네요~ ^^

에일로이 2014-08-31 22:00   좋아요 0 | URL
앗! 마녀고양이님도 읽으셨군요. 마녀고양이님의 감상문이 정말 너무도 기다려집니다.
이 소설은 참 남은 어떻게 읽었는지 궁금하게 만드는 책이더군요^ ^ 잘 읽었다는 말씀도 감사합니다^ ^

tataaz 2020-05-26 15: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번 독서모임 책인데 전 꾸역꾸역 읽었는데,,리뷰 보고 감탄하고 갑니다, 글 잘쓰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