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호랑이가 온다
피오나 맥팔레인 지음, 하윤숙 옮김 / 시공사 / 2014년 7월
평점 :
품절


 75세의 할머니 루스. 5년 전에 남편과 사별한 그녀는 장성한 두 아들이 있지만 혼자 지낸다. 그러던 어느날 새벽 네시. 그녀는 거실에서 들려오는 '커다란 짐승의 헐떡임과 숨소리의 울림. 몸집이 거대함과 의도를 암시하는 숨소리의 울림'을 듣고는 소스라치게 놀란다. 그것을 그녀는 호랑이라 생각한다. 두려움에 떨다 용기를 내어 거실로 나가보니 호랑이는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 새로운 느낌, 대단히 중대한 느낌. 뭔가 중요한 일이 벌어지는데 그게 무엇인지 확실히 알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호랑이인가, 아니면 중요한 일에 대한 느낌인가?(p. 11)


 정말로 대체 그 소린 무엇이었을까? 아들 제프리의 말대로 꿈결의 연장이었던 것일까 아니면 느꼈던 그대로 이제껏 별 탈 없이 굴러왔던 인생에 무언가 닥쳐오고 있다는 신호였을까? 다음날. 과연 그 호랑이 소리가 신호이기라도 한 듯이 정체모를 한 여성의 방문을 받는다. 육중한 몸으로 존재감을 한껏 드러내는 그녀의 이름은 프리다. 그 존재감의 과시와 이름 때문에 여성으로서의 자의식을 자화상으로 자주 드러내었던 화가 프리다 칼로가 얼른 연상되는 그녀는 루스에게 다짜고짜 앞으로는 자기가 루스를 돌보게 될 것이라 말한다. 루스는 썩 내키지 않는 그녀를 자신의 둥지에서 몰아내고 싶지만 프리다는 막무가내다. 역시 호랑이는 프리다를 뜻하는 것이었을까?



 이 느닷없이 도래한 두 여성의 흥미로운 동거 이야기는 조금은 기묘해 보이는 여성 사이의 연대를 보여준다. 소설 초반에 우리는 루스의 과거를 보게 된다. 그 과거에서 드러나는 루스의 삶이란 그야말로 '안정'이라는 말을 그대로 형상화한 것과 같은 모습이다. 루스는 이제껏 단 한 번도 모험을 해 본 적이 없었다. 남편 해리와 똑같이 주어진 삶의 궤도에 순응하는 삶을 살아왔다. 그랬기에 프리다의 출현은 그녀의 조용한 삶의 수면에 문득 생겨난 파문과 같았다. 느닷없는 동거는 변함없이 돌고 돌았던 궤도의 이탈이었다. 그건 지금껏 자신을 안전하게 보호하던 울타리를 벗어나는 것이었기에 위험이었고 모험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만큼 갇혀 있던 삶에다 바깥의 세상으로 나갈 수 있는 문을 만든 것이기도 했다. 그 모험은 탈옥에서 오는 두근거림이었다. 한 번 자유를 맛 본 이가 다시 예전의 감옥으로 돌아가지 않으려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제대한 병장이 다시는 부대를 뒤돌아보지 않듯이.


 그녀의 이름이 하필이면 '루스'인 것도 이런 의미가 아닐까? '루스'는 잃어버리다란 뜻의 'lose'를 연상시킨다. 그렇게 그녀는 이제까지 살아온 자신의 삶을 잃어버린다. 문학적 의미만은 아니다. 실제로도 그렇다. 그녀는 자꾸 기억을 잃어버리고 자신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도 잊어버리는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존재 자체를 점점 상실(lose)해 간다.


 이로서 호랑이 소리가 암시했던 중대한 일이 과연 무엇인지 분명해진다. 그건 바로 이제 다시는 예전 삶으로 되돌아가지 못한다는 하나의 신탁이었던 것이다.


 왜 그녀는 과거의 삶을 상실해야 했을까? 작가 피오나 맥팔레인은 이를 통해 무엇을 말하려 했던 것일까? 이 작품에 대해 흔히 할 수 있는 오해는 루스라는 존재 때문에 노년에 대한 소설이 아닐까 여기는 것이다. 노년이 가져다 줄 수 있는 소외감, 무력감을 말하는. 분명 그런 것도 있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진심은 다른 데 있다. '밤, 호랑이가 온다'는 흔히 말하는 페미니즘 소설이다. 식상한 표현이 될 지도 모르지만 감히 말한다면 남성이 만든 울타리 안에서 여성은 진정한 삶을 영위할 수 없으며 그 진정한 구원은 오로지 여성들만의 연대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소설인 것이다.


 물론 결말은 이것을 명백히 부정한다. 하지만 왜 그런 결말에 이르게 되었는가를 따져볼 필요가 있다. 과연 루스와 프리다, 그녀들 모두에게 닥쳐온 비극은 누구 때문이었나? 바로 남자들이다. 루스가 프리다에게 날로 의존하게 되었던 것은 예전의 연인 리처드 때문이었다. 리처드에 대한 집착이 프리다에 대한 무분별한 의존을 낳았다. 프리다는 남자 친구 조지를 신뢰했다. 그녀가 루스를 찾아와 헌신적인 노동을 한 것도 조지 때문이었다. 루스와 프리다. 둘은 결국 같은 존재였다. 그녀들의 세계는 남자를 중심으로 돌았다. 독립적으로 뭔가 하기 보다는 그들에게 의존했다. 비극은 바로 거기에서 비롯되었던 것이다. 루스에겐 두 아들이 있었다. 하지만 루스가 그렇게 될 때까지 아들은 아무 도움이 안 되었다. 그들은 그저 멀리서 전화로 걱정을 전할 뿐이었다. 다시 만나게 된 리처드조차 마찬가지였다. 루스의 세계는 남자를 중심으로 돌았지만 정작 그녀가 얻는 것은 소외와 착취 뿐이었다. 프리다도 다를 바 없었다. 이렇게 이야기를 차근차근 뜯어보면 남성들의 무력함과 그에 대한 불신이 드리워져 있음을 보게 된다. 이렇게 보면 소설 초반 해리의 죽음에 나왔던 앨런이라는 존재가 참 의미심장해진다. 앨런, 그녀는 착한 사마리아 인이었다.  5년 전 남편 해리는 버스 정류장에서 심장 마비로 갑자기 죽었다. 해리는 늙어서 '시궁창의 개'처럼 객사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정말로 그런 상황이 벌어졌던 것이다. 그런 해리 앞에 가던 차를 멈추고 다가와 그렇게 죽지 않도록 도와주었던 것이 바로 앨런이었다. 루스는 그녀를 착한 사마리아 인으로 불렀다. 루스는 앨런을 보면서 이렇게 생각한다.


착한 마음을 가진 낯선 이가 어느 날 나타나 다른 어떤 이유 없이 오로지 선의 하나만으로 그녀에게 사랑을 베풀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다. 앨런이 그 증거였다.(p. 32)


 이것이 바로 핵심이라는 것을 우리는 소설의 마지막에서 느끼게 된다. 바로 이 가능성이 무엇보다 여성에게서 왔다는 것이 중요하다. 이만한 정도의 구원은 소설에서 오로지 앨런만이 준다.


"당신은 정말 생명을 구해주는 사람이에요" 필립이 말했다.(p. 369)


 다른 이는 아무도 루스에게 주지 못했다. 그토록 사랑했던 예전의 연인 리처드도, 두 아들도.

 남자들은 사실 루스가 키웠던 수컷 고양이와 같았다. 최소한 하루에 한 번은 토해서 더럽히는 존재들.


 그걸 프리다가 걸레로 말끔히 닦아내듯 치유를 줄 수 있는 건 앨런 뿐이었다. 프리다도 줄 수 있었다. 루스는 (진짜였는지 연기였는지 알 수 없으나) 호랑이를 해치운 프리다를 보면서 자신이 그토록 갈구했던 안전을 그녀가 주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루스가 프리다가 하자는 대로 군말없이 한 것도 앨런이 주었던 것을 프리다가 주고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루스는 앨런에게 고마움을 느꼈고 아울러 프리다에게도 고마웠다. 프리다는 집과 고양이와 루스를 위해 끊임없는 관심을 쏟으며 자기 몸이 닳도록 일했고 호랑이를 쫓아내주었다.(p. 266)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다. 그 프리다마저 루스와 똑같이 여전히 남성에게 얽매여 있었기 때문이다. 만일 프리다가 그로부터 자유로워지려고 했었다면, 루스 역시 더이상 리처드나 아들들에게 연연해하지 않고 순수하게 프리다와 연대하려 했었다면 아마도 결말의 비극은 찾아오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중에 앨런은 이렇게 말하기 때문이다.


 "난 프리다와 겨우 몇 분 정도밖에 이야기하지 못했어요. 앨런이 말했다. "하지만 그녀가 당신 어머니를 정말로 사랑한다는 인상을 받았어요"(p.367)


 

소설의 표지를 넘기면 이렇게 내가 좋아하는 앙리 루소의 '이국의 숲에서 우산을 든 여인'의 그림이 나온다. 남성 중심의 세계에서 빠져나와 여성 홀로 우뚝 섰을 때 가지게 될 자유를 뜻하는 그림인데 커버 자체가 소설의 주제를 잘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밤, 호랑이가 온다'는 바로 이런 소설인 것이다. 결국 루스를 두려움에 젖게 했던 호랑이는 무엇이었을까? 그건 바로 남성 혹은 그 남성에 여전히 얽매인 자신이 아니었을까?


 좀 더 보편적으로 의미를 확장해 보자면 이 소설은 독립적으로 서는 것의 중요성을 말하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무엇인가에 얽매이거나 의존하지 않는 것. 그런 이유로 루스가 하필이면 노년이 된 게 아닐까 싶다. 노년이란 무엇보다 타인에게 의존하지 않을 수 없는 상태이니까 말이다.


 살면서 우리는 남성, 여성을 포함하여 여러가지 것들에 우리 자신을 얽매이게 한다. 그것들이 삶을 좀 더 쉽게 걸어가게 만들어주리라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그것들이 우리의 보행을 어렵게 하고 때로는 걸려 넘어지게 할 때가 많다. 얽매이면 얽매일수록 내 걸음만 늦춰질 뿐이라는 것을 깨닫는 때도 잦다. 이 소설은 문득 그런 과거를 떠오르게 한다. 그러면서 비록 이 세상에 온통 흙비가 내리더라도 나 홀로 우산을 받치고 견디려는 연습을 해야겠구나 생각하게 만든다. 진정한 연대도 그 때라야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서로가 독립한 나가 될 수 있었을 때에.


 난폭한 운명으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하나, 소설이 거꾸로 보여주듯이 그 어떤 그물에도 걸리지 않는 홀로 자유로운 바람이 되는 것 뿐이다. 프리다와 루스는 그를 위한 타산지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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