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없는 자 - 속삭이는 자 두 번째 이야기 속삭이는 자
도나토 카리시 지음, 이승재 옮김 / 검은숲 / 2014년 8월
평점 :
품절


 도나토 카리시가 돌아왔다. 그것도 이탈리아 역사상 가장 많이 팔렸다는 소설 '속삭이는 자'의 속편으로. 어떤 이들에겐 단지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 작품을 벗할 충분한 이유가 된다. 내가 그렇다. '속삭이는 자'는 그 해 읽었던 미스터리 작품들 중에 최상의 만족감을 주었던 작품 중 하나였다. 그 속편이 나왔다는데 어찌 읽어보지 않을 수 있으랴. '이름없는 자'는 과연 도나토 카리시 작품답게 설정이 참으로 흥미롭다.



 시작부터 한 가족이 몰살당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희생자들은 토마스 벨런이라는 제약 회사 사장의 일가족. 유일하게 생존한 막내 아들의 신고로 출동하게 된 경찰들은 토마스 벨런과 아내 그리고 그들의 아들과 딸이 각각 자신의 방에서 총에 맞아 죽어있는 것을 발견한다. 토마스 벨런은 가장 마지막에 살해 되었는데 그건 범인이 그의 눈 앞에서 가족들 모두가 처형되는 것을 보여주고자 함이었다. 전편의 주인공이었던 밀라는 여전히 실종사건 전담반인 '림보'에서 일하고 있다. 그런데 그녀가 토마스 벨런 일가족 처형 사건 현장으로 호출된다. 살인사건인데 왜 실종사건 전담인 그녀를 부르는 것일까? 이유는 곧 밝혀진다. 알고보니 막내 아들의 신고 전화는 범인에 의한 것이었다. 범인은 막내 아들에게 자신의 이름까지 가르쳐주고 떠났다. 이름은 로저 벨린범인의 정체는 이미 밝혀진 것이다. 밀라는 그 이름을 듣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림보'의 벽에 붙은 아직 찾지 못한 실종자 명단에서 늘 보아왔던 이름이었더 것이다. 그는 무려 17년 동안이나 실종자 상태였다. 말리는 바로 그 때문에 호출된 것이었다. 실종 이전에 로저 벨린은 병든 어머니를 혼자서 정성껏 보살핀 착한 청년이었다. 그런데 17년만에 느닷없이 나타나 일가족을 처형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니다. 또 한 명의 로저 벨린처럼 실종되었던 인물이 갑자기 출현해 한 남자를 처참히 살해한 것이다. 이런 식으로 '장기간 실종자로 분류되어 있다가 홀연히 나타나' 누군가를 살해하는 일이 잇달아 벌어진다. 거기엔 예전 '림보'에서 같이 일했던 동료 형사도 있다. '도대체 이들은 그 오랜 시간 동안 어디에 있었으며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런 일들을 벌이는 것일까?' 밀라는 이런 의문 속에 수사에 나선다. 수사 도중 밀라는 이 사건의 배후에 20년 전에 일어났던 미궁 속에 빠져 버린 한 사건이 관련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이른바 '불면증 환자 실종 사건'.


 20년 전, 일곱 명의 불면증 환자 실종 사건은 결말이 있었다. 수사에 착수한 연방경찰은 동성애 성향이 있는 전직 군인, 배달원, 여대생, 은퇴한 과학 선생, 과부, 수제 속옷을 만들던 가게 여주인과 대형마트 여종업원 사이에 있을지 모를 연관관계를 밝히는 데 수사의 초점을 맞췄다. 하지만 모두가 불면증을 겪고 있다는 사소한 단서 외엔 뚜렷한 공통 분모를 찾아낼 수 없었다.(p. 265)


 경찰이 밝혀 낸 것은 이 일곱 명의 실종 사건이 오직 한 사람에 의해 저질러졌다는 것 뿐이었다.

 그의 이름은 '카이루스!'


 그 이름을 이번 '장기 실종자 연쇄 살인 사건'에서 보게 된 것이다. 바로 범인이 남겨 놓은 다음과 같은 쪽지에서.


 긴 밤이 시작됐다. 어둠의 전사들이 이미 도시에 침투한 상태다. 그들은 그분을 영접할 준비를 하고 있다. 왜냐하면 조만간 그분이 이곳에 오시기 때문이다. 마법사, 꿈의 주술사, 어둠의 주인, 천 개가 넘는 이름을 가진 카이루스님께서. (P. 188)


 20년을 사이에 둔 두 사건은 이렇게 연결되었다. 이 쪽지로 밀라는 한 명의 수사관을 만나게 된다. 그의 이름은 베리쉬. 20년 전 사건은 경찰 전체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그 사건으로 인해 가장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던, 베리쉬도 소속되어 있었던 '증인 보호 전담반'이 완전히 해체되었다. 그건 '카이루스'를 유일하게 목격한 한 여인이 증인 보호 도중 카이루스에게 납치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이름은 실비아. 경찰뿐만 아니라 베리쉬 또한 이 사건으로 뼈아픈 트라우마를 안게 된다. 그는 실비아를 사랑하고 있었다.


 20년이 지난 지금도 베리쉬의 트라우마는 여전하다. 그는 아직도 그녀를 잊지 못한다. 매일 눈에 밟힌다. 그녀가 사라진 이유를 알고 싶어 경찰 일은 뒷전으로 미루고 인류학을 따로 공부했을 정도다. 조직에서 그를 보는 눈이 곱지 않다. 이제는 마피아에게 뇌물을 받았다는 오해마저 사게 되어 왕따까지 당한다. 경찰에선 아무도 가까이 다가오려 하지 않는 베리쉬에게 인간적으로 다가와 편까지 들어주는 이는 오직 하나, 밀라 뿐이다. 그렇게 밀라와 베리쉬의 연대가 구축된다. 사실 둘은 닮았다. 둘 모두 트라우마가 있다. 밀라도 여전히 '속삭이는 자'에서의 트라우마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그건 무엇보다 그녀의 딸 '앨리스'와의 관계에서 드러난다. 엄마지만 밀라는 딸인 앨리스에게 섣불리 다가가지 못한다. 엄마 집에 맡겨두고 매일 밤 앨리스 방에 몰래 설치한 CCTV로 딸의 일상을 훔쳐보는 게 밀리가 엄마로서 하는 전부다. 밀라가 딸에 다가가지 못하는 이유는 자신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인간적인 감정을 느낄 수 없다. 타인의 아픔이나 괴로움, 고통 같은 것들을 그녀는 이해할 수 없다. 말리가 내내 실종 전담반 '림보'에서 일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사라진 인간을 찾는 것을 통해 그 감정들을 헤아리고자 함이다. 그녀가 이렇게까지 하는 까닭은 오직 하나다. 자신이 괴물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녀의 옷을 벗겨보면 그 알몸의 신체엔 곳곳에 흉터들이 즐비하다. 아픔과 고통을 알기 위해 스스로 자해한 탓이다.


 티셔츠를 벗으며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알몸을 쳐다보았다. 비쩍 마르고 상처로 뒤덮인 몸. 살이 찌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라 여겼다. 그랬다면 아마 칼로 그 살들을 다 도려냈을 테니까. 세월이 흐르며 그녀의 몸을 점점 뒤덮은 흉터들은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없는 그녀 자신만의 고통을 의미했다. 자해하는 길만이 오직 마음속 깊은 곳에 자기 역시 인간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P.96)


 밀라는 이런 존재였다. 딸인 앨리스에게 섣불리 다가가지 못하는 것도 혹시 자신이 괴물이 아닐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녀는 늘 생각한다.


 '넌 그 사람 거야. 그에게 속해 있어.'(P. 94)


 밀라가 인간다움을 이해하기 위해 자해를 했듯이 베리쉬는 인간이 무엇인지 알기 위하여 '인류학'을 전공한다. 둘 모두 상실이 가져온 두려움에 대한 나름의 대처였다.


 '이름없는 자'는 결국 무엇에 대한 이야기일까? 그건 바로 '두려움'이다. 하이데거는 인간에게 있어 가장 근본적인 감정은 다름 아니라 '불안'이라고 보았는데 그처럼 평생 그림자와도 같이 따라붙게 마련인 불안과 두려움에게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를  말하는 작품인 것이다. 밀라와 베리쉬만이 아니다. 실종자들 역시도 모두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의 실종 또한 밀라의 예전 동료인 빈첸티가 잘 보여주듯이 두려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카이루스는 바로 그 두려움이 낳은 틈을 비집고 들어가 그들의 존재 모두를 삼켰던 것이다. 


 하지만 대처하는 방법은 달랐다. 밀리와 베리쉬는 스스로 깨닫고 이해하려고 했다. 무시와 제거의 선택지는 그들에게 없었다. 하지만 실종자들은 정반대였다. 그들은 알기 보다는 무시를, 이해 보다는 제거를 택했다. '이름 없는 자'에겐 이런 '전선(FRONT LINE)'이 존재한다. 베리쉬는 그런 실종자들의 태도를 '악의 논리'라 부른다. 베리쉬는 말한다. 실종자들의 연쇄살인은 카이루스가 '악의 논리'로 그들을 설득했기 때문이라고.



 '악의 논리' 이것은 이 소설의 원제이기도 하다. 베리쉬는 '악의 논리'를 이렇게 설명한다.


 "어미 사자는 자기 새끼들을 먹이기 위해 새끼 얼룩말을 사냥합니다. 그런데 이건 자비로운 행위입니까, 악의적인 행위입니까? 물론 어미 얼룩말은 새끼를 잃은 상실감에 괴로워하겠지만 그 반대의 상황으로 가면 어미 사자는 자신의 새끼들이 배고 고파 굶어죽는 장면을 지켜봐야 합니다. 선과 악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이유는 채식주의 사자가 없기 때문입니다."(P. 299)


 이렇게 악의 논리는 '선과 악의 모호성'을 전제로 한다. 선과 악의 절대적인 구분은 불가능하고 누군가의 선은 누군가에게 악이 되기 마련이고 그 반대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선행의 결과를 낳을 수 있다면 악행도 얼마든지 용납된다는 '악의 논리'가 만들어진다. 마키아 벨리의 말마따나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는 것이다. 아니면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죄와 벌'의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를 연상해도 좋다. 그는 돈은 전당포 노파와 같이 쓸모없는 이보다는 자기와 같이 사회에 도움이 될 지식인을 위하여 쓰여지는 게 더 가치있다는 이유로 노파를 살해한다. 어떻게 보면 범죄란 게 모두 사실 '악의 논리'에서 태어나는 것일지도 모른다. 카이루스 역시 바로 이 논리로 장기 실종자들을 살인으로 끌어들였던 것이다.


  "그들의 행동이 다른 이들의 삶을 개선시킬 수 있다고 설득하면 가능하다고 볼 수 있겠죠."

  "로저 벨린과 나디아 니버맨의 경우 단순한 복수가 아니었어요. 그들은 범행대상을 고를 때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는 대상 중에서 선택했던 거예요. 동기로 작용한 것은 단순한 앙심이나 복수가 아니라 그들의 경험이었던 거예요."(P. 301)


여기서 그들이 두려움이 결국 살인까지 낳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들은 제거로써 가진 두려움을 씻었고 '악의 논리'는 그것을 정당화해 주었다. 무시와 제거는 알고 이해하려는 것보다 손쉬운 방법이다. 감정적 차원의 시원함도 있다. 유혹은 거기서 온다. 덕분에 '악의 논리'는 꾸준하게 사랑받아왔다. 정당한 전쟁 논리엔 항상 그것이 동원되었다. 유럽의 십자군은 '악의 논리'로 이슬람 침공을 정당화 했고 독일의 나치는 '악의 논리'로 유태인 학살을 정당화했다. 우리나라도 북한으로부터 나라를 지킨다는 악의 논리로 민주화의 열망을 탄압했다. 지금의 세월호 참사 이후의 사태도 마찬가지다. 보다 나은 내일이라는 악의 논리로 현재의 고통과 범죄를 서둘러 무마시키려고만 들고 있다. 일본이 원전 사태가 일어났을 때 했던 것과 똑같이.


 '악의 논리'가 횡행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모두 그 근저에는 두려움이 있었다. 무조건 무시와 제거로 두려움을 없애버리고 싶다는 욕망이 악의 논리에 귀기울이도록 만들었다. 도나토 카리시의 '이름없는 자'는 '속삭이는 자'의 속편답게 빼어난 드라마 아래 우리가 왜 '악의 논리'에 솔깃해지는 것인지 그 이유를 '두려움'과 관련하여 잘 보여주고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지금 내가 이 두려움을 어떻게 극복하려고 하느냐에 있다는 것을 말이다. 밀라와 베리쉬는 그를 위한 하나의 대안이다.


 한나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으로 '악의 논리'의 무서움을 보여주었다. 악은 이성을 통한 합리적 선택의 산물로도 얼마든지 나올 수 있었고 심지어 학살과 같은 거대악조차 누구에게나 가능했다. 필립 짐바르도의 '스탠포드 교도소 실험'은 이것을 너무나 잘 보여주지 않았던가. 두려움을 가진 이라면 누구나 '악의 논리'에 유혹당할 수 있듯이 악은 어떤 특정한 자들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홀로코스트가 나치 때문에 가능했다고 생각하는 게 가장 큰 문제라고 한다. 그것을 오로지 나치의 책임으로만 돌리는 한 홀로코스트는 언제고 또다시 반복될 수 있다는 것이다. 바우만이 말하길, 그 비극의 반복을 끊을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 뿐이라고 한다. 그들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우리의 문제로 여기는 것. 즉 '악의 논리'는 존재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문제이고 생활 속에서 지속된 자기 성찰과 타자에 대한 이해와 배려가 수반되어야 풀 수 있는 문제라는 것이다. 무엇보다 소설에서 말리가 보여주는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말리의 삶은 괴물이 존재의 문제가 아닌 삶의 문제라는 것을 보여주는 단적인 여정이라 할 수 있다.


 원래 범죄학자인 도나토 카리시는 이렇게 해서 현대성의 가장 커다란 문제를 작품 속에 형상화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홀로코스트는 현대성 자체가 만들어낸 산물이라는 것을 분명히 했다. 그 비슷한 주제를 도나토 카리시는 소설로 말하는 것 같다. 도나토 카리시의 작품을 기다리는 것은 소설의 재미가 가장 크지만 이런 지점도 있기 때문에 다음 작품을 더욱 기대하게 된다. '이름없는 자'의 결말은 열려있다. 밀라는 아직 종착지에 이르지 못했다. 분명 후속작이 나올 듯 하다. 현대성이 가진 비극을 관통하는 말리의 여정이 어디로 이어질지 자못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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