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이야기꾼들
전건우 지음 / 네오픽션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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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건우 작가의 첫 장편소설이다.
 전건우 작가는 이전에 단편으로 만나본 적이 있다. 단편의 전건우에서 내가 받은 인상은 약간 코믹해 보이는 설정을 현실적인 디테일들로 채워 이야기에 몰입하게 만드는 작가라는 모습이었다. 기발해 보이는 설정은 아무런 위화감없이 일상의 현실로 받아들이도록 만드는데 탁월한 능력이 있었다. 그렇게 뇌리에 새겨진 작가였기에 아무래도 그의 첫 장편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만나본 '밤의 이야기꾼들'은 정확한 의미에서 장편은 아니었다. 여섯 개의 단편을 '밤의 이야기꾼' 모임이라는 새끼줄로 굴비 엮듯 한 쾌로 묶어낸 작품이었다. 혹시, 아이작 아시모프의 '흑거미 클럽'이란 소설을 만나본 적 있는지? 그 소설과 비슷한 형식이다. 그 '흑거미 클럽'에서 주인에게 초대된 손님들이 저마다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듯이 '밤의 이야기꾼들'도 '밤의 이야기꾼들'을 찾아온 손님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이런 형식은 아이작 아시모프만은 아니었고 그와 더불어 세계 3대 SF 마스터로 불리우는 '아서 G 클라크'도 한 바 있다. 그것이 바로  '하얀 사슴' 연작인데 '하얀 사슴'이라는 선술집에서 누군가 풀어놓는 이야기를 두루 엮은 작품이었다. 그만큼이나 이런 형식은 장르 소설 팬에게 친숙하다는 것이다. 어쩌면 정말로 전건우 작가는 아이작 아시모프의 '흑거미 클럽'에서 영감을 얻었을 지도 모른다. '하얀 사슴'은 안 알려졌지만 '흑거미 클럽'은 우리나라에도 꽤나 알려졌기 때문이다.

 여하튼, '밤의 이야기꾼들'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된다.
 '그날 밤의 폭우로 60명이 죽고 32명이 실종되었다.'

 첫 문장부터 시선을 확 잡아챈다. 프롤로그처럼 제시되는 이 이야기는 예기치 못했던 폭우로 부모를 잃어버린 한 소년의 이야기다. 그 소년은 폭우 속에서 말없이 걷고 있는 한 무리의 사람들을 보게 되는데 거기서부터 이야기는 갑작스럽게 '밤의 이야기꾼'들로 방향을 튼다. 소년이 만나게 된 그 사람들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쏭달쏭한 상태에서 그보다 더 기묘한 주인공이 일하는 괴담 전문 출판사 '풍림'과 서울 중심가에 존재하는 '목련 흉가'에서 1년에 한 번 열린다는 괴담 모임인 '밤의 이야기꾼들' 모임이 소개된다. 어디까지고 실제이고 어디까지가 환상인지 그 환상과 현실의 경계가 차츰 모호해지면서 정말 이 작품이 들려주려고 하는 여섯 개의 괴담이 한 밤에 문득 들려오는 아련한 메아리처럼 도래하게 된다.

'과부촌','도플갱어','홈, 스위트 홈','웃는 여자','눈의 여왕','그 날 밤의 폭우'가 바로 그것이다.

'과부촌'은 현재 바람을 피고 있는 남편이 뜻하지 않게 아내를 통해 장인의 미스터리한 실종의 전모를 알게 되면서 불현듯 당사자라면 도저히 만나고 싶지 않았던 세상의 끔찍한 진실과 조우한다는 이야기다. '과부촌'은 그 제목에서 연상되듯이 가부장적인 남성 중심 사회에서 억압 받는 여성성을 그리고 있는데 남성에 대한 통렬한 보복(남성에게 있어선 오싹할 보복이겠지만)을 그리고 있다. 그런데 이야기 자체는 다른 작품의 설정을 빌려온 듯 하다.


 예전에 KBS에서 방영한 '환상특급'이라는 외화 시리즈가 있었다. 원래는 '나이트 메어'로 유명한 호러 영화 감독인 웨스 크레이븐이 80년대에 미국에서 제작한 'NEW TWILIGHT ZONE'이란 드라마 시리즈를 수입해 방영한 것으로 환상적이거나 괴담 같은 에피소드들을 한 회당 두 개나 세 개씩 묶어 방송했었다. 그 중 한 에피소드가 이 '과부촌'과 상당히 유사한 설정을 가지고 있다. 전체적인 이야기라기 보다는 공포를 가져오는 존재에 관한 것인데 그 에피소드는 시즌 1의 38번째 에피소드인 'A Matter of Minutes'이다. 원작자가 내가 가장 좋아하는 SF 작가인 할란 엘리슨(그는 '뉴환상특급'의 첫 에피소드였던 'Shatterday'의 원작자이기도 하다. '다이하드'로 뜨기 전의 풋풋한 용모의 브루스 윌릿스가 주연을 맡아 1인 2역을 연기했다.)이라 더욱 기억에 남아있는 이 에피소드는 한 부부가 우연히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 알게 된다는 줄거리의 이야기다.

 누구나 한 번쯤 도대체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 궁금히 여겨 본 적이 있을 것이다. 할란 엘리슨은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는 수많은 블루 칼라 노동자의 헌신으로 그 궁금히 여겼던 시간의 비밀을 재치있게 풀어간다. 그러니까 현재에서 미래로 나아갈 때 우리는 모르지만 시간은 마치 열차와 같아서 지금 있는 칸으로 비어 있는 앞칸으로 이동하는 것이며 그 앞칸은 백지처럼 비어있는데 우리가 그 공간으로 이동했다는 걸 모르는 것은 블루 칼라의 노동자들이 현재의 공간 그대로 미래의 공간으로 옮겨놓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이렇게 말이다.


 이들은 정말 공간의 거주자들이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게 빈틈없이 완벽하게 과거의 공간을 재현한다. 시간은 이렇게 흐르는 것이며 우리가 사실은 공간의 이동인데도 전혀 모르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보이지 않는 블루 칼라 노동자들의 헌신적인 노동 덕분인 것이다. 진실을 보았지만 그게 아직도 이해가 안 되는 부부에게 현장 감독자는 이런 말을 한다. "왜 그런 경험 있지 않습니까? 잃어버렸던 물건이 어느 순간 찾아보니 원래 그 자리에 있었던 경우 말이죠. 혹은 분명히 거기에 둔 것 같은데 갑자기 어디로 갔는지 안 보이는 경우도 말이죠.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바로 우리 직원들의 실수 때문이죠." 처음엔 시청자들도 실소를 머금고 보지만 바로 이 말 때문에 '아, 정말 저런 식으로 시간이 흐르는 게 아닐까?'하고 생각하게 된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도 그와 비슷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이 에피소드는 마르크스 테제를 SF적으로 형상화 한 것이다. 다름아닌 '역사를 만들어 가는 주체가 누구인가? 그것은 바로 노동자이다!'를 보여주는 에피소드인 것이다. 역사를 만들고 변혁을 뜻하는 미래의 창조자가 바로 노동자라는 것을 이 에피소드만큼 선명하게 보여준 에피소드도 또 없다. 그만큼 빼어난 에피소드인데 '과부촌'이 이 설정을 슬쩍 차용하고 있는 것이다. 좀 전에 소개한 현장 감독관의 말까지 이 소설엔 나온다. 물론 사용처는 다르지만.

 아무튼 그랬기에 조금은 씁쓸함도 있었던 '과부촌'인데, 그래도 할란 엘리슨의 단편을 모처럼 상기시켜주었기에 그것만으로도 난 만족한다.

 다음의 '도플갱어'는 도플갱어라는 소재를 가지고 성형으로  비슷한 외모가 기성복처럼 양산화되고 있는 오늘의 현실을 재치있게 풀어내고 있고 다음의 '홈, 스위트 홈'은 오늘날 한국에서 가장 집요한 욕망의 대상인 '집'을 오히려 공포의 원인으로 삼고 있다. 사실 지금도 증가하고 있는 '하우스 푸어'들에게 집은 '홈, 스위트 홈'이라기 보다는 공포의 대상이 아닐까? 그런 사회적 현실을 공포로 은근히 풀어내는 작품이다.

 '웃는 여자'는 한 때 가장 무서운 괴담의 주인공이었던 '빨간 마스크'를 전건우 작가의 상상력으로 풀어낸 작품이고 '눈의 여왕'은  '설녀'(이 역시 '빨간 마스크'와 더불어 원래는 일본 괴담의 존재로 알고 있다. 다만 '빨간 마스크'가 현재라면 '설녀'는 고전적 괴담이다.) 소재로 호러에 집중한 작품이다. 그리고 마지막 '그날 밤의 폭우'에서 프롤로그에서 소년이 보았던 존재들의 정체가 비로소 밝혀진다.

 '밤의 이야기꾼들'은 이런 이야기였다. 설정을 다른 데서 가져온 것도 있고 원래 있던 것을 작가만의 상상력으로 복원한 것도 있었다. 이야기의 의미를 사회적으로 확장할 수 있는 것도 있었다. 일장 일단이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하나같이 을씨년스런 이야기였다. 다만 '눈의 여왕'은 좀 전개가 너무 전형적이지 않나 하는 아쉬움이 있지만.

 전반적으로는 만족한다. 단편집의 리뷰는 힘들다. 전체적으로 평가하자면 개별의 이야기가 가진 매력을 이야기할 수 없고 그 개별적인 매력을 이야기하자면 분량이 무한정 길어져 쓰는 이도, 읽는 이도 지치게 만들기 때문이다. 리뷰의 고수라면 이런 때 적당한 타협의 지점을 찾아낼 수 있겠지만 지금의 나로서는 내공이 부족하여 갈무리가 잘 안된다. 미진한 점이 많더라도 이대로 끝낼 수밖에. 현재 전건우는 '소용돌이'라는 장편 소설을 연재 중이라고 한다. 그게 한 권의 책으로 나올 때쯤이면 내 리뷰의 내공도 좀 높아져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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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헤세의 사랑 - 순수함을 열망한 문학적 천재의 이면
베르벨 레츠 지음, 김이섭 옮김 / 자음과모음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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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성은 헤세의 약점이었다. 여성에게 헤세는 눈물의 씨앗이었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아무리 대문호라도 순간마다 일어나는 욕정은 어찌할 수 없었나 보다. 여성들은 헤세에게 그물이 되고 싶었으나 결국 바람처럼 빠져나가고마는 헤세의 뒷 모습을 보며 좌절하고 괴로워하며 비통 속에서 결별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베르벨 레츠의 '헤르만 헤세의 사랑'에는 그의 작품으로는 도저히 볼 수 없었던 작가가 아닌 인간으로서의 헤세의 모습이 있다.


 현실의 인간으로서 헤세는 연약한 남자였다. 자주 불안을 느끼는 신경증 환자였고 상처를 많이 받는 영혼이었다. 그 불안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던 것일까? 헤세는 아랫도리를 주체하지 못하는 남자였다. 함부로 굴리지는 않았지만 혼인의 책임은 쉽게 저버릴 수는 있었다. 이 책의 첫 머리에는 다음과 같은 헤세의 고백이 나온다.

 나의 사상이나 예술관 때문에
내 인생에서, 혹은 여성들과의 관계에서 종종 어려움에 봉착한다.
나는 사랑을 부여잡을 수도, 인간을 사랑할 수도,
삶 자체를 사랑할 수도 없다.

- 헤르만 헤세 -

 이 고백 그대로였다. 헤세는 누구보다 사랑에 굶주렸던 사람이었으나 사랑받는 것만 알았지 사랑할 줄은 모르는 사람이었다. 사랑에 있어서 헤세는 늘 젖을 달라 칭얼거리기만 하는 아이와 다를 바 없었다. 끊임없이 자기를 보아달라, 자신의 사랑을 받아달라, 내 모자라는 부분을 채워달라 조르기만 할 뿐, 그 사랑을 주는 데 있어서는 인색한 남자였다. 그는 모든 것에 초연한 '데미안'과 같은 남자이고 싶었으나 그건 꿈일뿐, 결코 되지 못했다. 그는 크눌프처럼 모든 것을 버리고 얻는 자유를 바랐으나 머릿 속에서만 일어나는 몽상에 그치고 말았다. 그는 결코 껍질을 깨지 못한 아브락사스였으며 안락한 정원에서 잠깐의 백일몽으로 자유를 공상하는 존재였다. 그렇다고 그의 작품이 기만이며 허위이고 위선이라는 말은 아니다. 그의 영혼은 분명 그렇게 되고 싶어했다. 그는 자신이 정말 원하는 것에 대해 썼다. 하지만 그는 약했다. 인간으로서 그는 너무 약했다. 그 약함에 발이 걸려 그는 자주 넘어졌던 것이다. 특히 여성이 그에게 많이 돌부리가 되었다.

그렇다고 그의 책임이 면제되는 것은 아니다 베르벨 레츠의 책은 사랑과 욕망에 있어서는 한없이 이기적이었던 헤세의 모습을 충실하게 그려낸다. 그의 시가 아무리 청춘의 도망을 이야기하고 버리고 떠날 것을 찬미하더라도 그는 용기가 없었고 어쩌다 생겨도 그것은 오직 스스로 무책임하게 될 때만 생겨나는 것임을 말이다. 평생 결혼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헤세는 자신의 신념과 다르게 무려 세 번이나 결혼했다.

 하지만 그 어느 결혼도 행복한 결말은 없었다. 열 살이나 많았던 마리아와의 첫 결혼은 두 아들까지 낳았지만 이혼으로 끝이 났다. 마리아가 원한 것은 아니었다. 오로지 헤세가 요구했기 때문이었다. 마리아는 끝까지 이혼하지 않으려 했지만 헤세는 그녀를 의사와 짜고 정신병원에까지 가둬 결국 이혼 승낙을 받아냈다. 그 이혼으로 그는 두 아들까지 버렸다. 그 때 헤세는 이미 다른 여성과 사랑에 빠진 후였다. '사랑과 전쟁'에 흔히 나오는 막장 스토리를 그 누구도 아닌 헤르만 헤세가 연출했던 것이다. 당시 사랑에 빠졌던 여성의 이름은 '루트'였다. 그녀는 헤세보다 열 살이나 어렸고 촉망받는 오페라 가수였는데 결국 헤세의 두 번째 아내가 되었다. 모두들 영혼의 싱싱한 생명력이 가득한 여성이라고 보았던 루트였다. 헤세도 그 생기에 이끌렸다. 하지만 헤세와의 결혼은 흡혈귀 같았다. 루트는 결혼으로 인해 자신에게 있던 모든 생기를 빨리고 말았다. 루트의 결말은 마리아와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또 한 여성이 있었다. 이름은 니논. 그녀는 결코 한 때 스쳐 지나가는 인연은 아니었다. 니논은 헤세의 '페터 카멘친트'가 처음 나왔을 때 읽고 단번에 헤르만 헤세에게 매료되어 버렸다. 그 때, 그녀는 소녀였다. 엄마를 처음 본 아기새처럼 헤세와의 사랑에 빠지고 만 것이다. 하지만 헤세는 다가가기에 아주 먼 남자였다. 그렇지만 니논은 헤세에 대한 사랑을 포기하지 않았고 헤세의 새 책이 나올 때마다 감상을 편지로 써 보냈다. 니논의 사랑은 아주 오래도록 계속되었다. 도중에 결혼하여 한 남자의 아내가 되었지만 헤세를 향한 니논의 사랑은 그칠 줄 몰랐다. 결국 그 사랑은 결실을 맺어 헤세의 세 번째 아내가 되었다. 헤세의 결혼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니논은 헤세가 죽을 때까지 그의 아내로 남아있었다. 니논은 행복했을 지 몰라도 제3자의 눈에 그 둘의 결혼 생활은 그리 아름답다고 할 수만은 없었다. 니논은 헤세에게 아낌없이 헌신했지만 헤세는 그만큼 니논을 사랑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사랑은 결코 균형을 이루지 않았다. 한 쪽으로 너무 기운 사랑이었다. 니논은 희생하고 헤세는 그 혜택을 누렸다.

 그게 헤세였다.
 읽다보면 어쩔 수없이 서서히 그려지는 초상은 허세의 헤세다.
 '도대체 그가 시와 소설로 쓴 모든 말들은 다 무엇이었던가, 그냥 다 말장난에 불과했던 것인가?'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책에 나오지 않는 이야기를 해 보자. 헤세의 첫사랑에 관한 이야기다. 청춘의 헤세는 연상을 좋아했다. 그의 첫 사랑이었던 유제니 콜프는 그보다 무려 일곱 살이나 많았다. 헤세는 그녀를 열렬히 숭배했으나 유제니 콜프는 겨우 열 다섯 살에 불과한 헤세를 어린애와 다를 바 없다고 여겼다. 구애를 거절하자 헤세는 권총을 가지고 와서 괴테의 '베르테르'처럼 사랑을 받아주지 않으면 자살해버리겠다고 협박했다. 하지만 유제니 콜프는 '첫 사랑은 결코 이뤄지는 법이 없어요'하며 거절했다. 자살은 수포로 돌아갔지만 헤세는 결국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헤세는 첫 사랑부터 그랬다. 사랑을 어떻게 하는지 몰랐고 사랑하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전혀 모르는 영혼이었다. 그저 자신의 사랑이 받아지나 안 받아지나만 중요했다. 타인의 감정보다는 자신의 감정만 소중했던 사람, 그것이 바로 헤세였다. 

 베르벨 레츠의 '헤르만 헤세의 사랑'은 그런 헤세의 모습을 가득 보여준다. 이 책의 원제는 '헤세의 여자들'이다. 제목 그대로 헤세를 중심에 두지 않고 헤세의 여인들을 중심에 두고 이야기가 진행된다. 사이 사이에 헤세와 그 여인들이 진실로 주고받은 서신들을 통해 책의 이야기가 전혀 근거없는 것은 아님을 밝혀두고 있다는 것도 이 책이 가진 하나의 특색이다. 포르투칼의 시인 페르난도 페소아는 '글을 타인의 손을 통해 꾸는 꿈'이라고 말했다. 베르벨 레츠의 책을 읽다보니 정말 그렇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헤세의 작품을 통해 감명받고 깨달았던 것은 헤세의 진실은 아니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듯이 말하는 것과 행위하는 것만이 일치했을 때만 진실하다고 할 수 있으면 말이다. 그건 헤세의 꿈에 불과했다. 아니, 어쩌면 바로 우리 자신의 꿈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정녕 바라던 것을 우리는 헤세의 손을 통해 꿈 꾼 것이다. 그 꿈결에 우리를 젖게 했기에 우리는 헤세의 소설들을 좋아했을 지도 모른다. 문학을 즐기고 사랑하는 것은 도대체 뭘까? 베르벨 레츠의 이 책은 결국 우리가 읽고 쓴다는 게 지극히 나르시시즘적인 행위가 아닐까 내비친다. 정말로 어쩌면 우리 모두는 타인의 글이 아니라 그 글이라는 수면 위에 비친 내 그림자만 보고 사랑하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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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간평가단 인문 파트는 이번이 처음인데

 그 때문일까요? 선정 타율이 그리 좋지 못합니다.

 지금까지 추천한 책들 중 딱 두 권만 선정되었네요. 흑흑...


 그렇다고는 해도 선정된 책들에서 실망감은 느끼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처음엔 뭐 이런 책이 다 왔나?' 하다가도 읽다보면 '오오! 의외로 괜찮은 걸!' 하게 될 때가 많았습니다.

 이런 걸 집단 지성의 힘이라고 하던가요?

 아무튼 이번엔 또 어떤 책이 선정될 지 모르지만 무슨 책이 되든 좋은 책이리라 믿고

 제가 추천하는 책들을 얘기해 보렵니다.



 첫 스타트는 역시 스티븐 핑커!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입니다.

 '빈 서판'을 읽고 단번에 매료된 작가(저는 하물며 기독교를 믿는데도 영혼을 부정하는 이 책에 설득되었습니다. 의식과 영혼에 있어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를 가져다 준 책의 저자인지라 아무래도 그 사유의 발전을 눈여겨 보지 않을 수 없군요.)인지라 신간이 나오면 읽어보지 않을 도리가 없습니다. 마음 역시 그저 진화론의 산물이라 여기는 무신론자가 이 책에서는 인간성에 대한 강한 긍정을 설파했다고 하니 지금까지 내가 스티븐 핑커를 잘못 이해하고 있었나 하는 생각도 들고 호기심이 가득 생기네요.


 문득 레베카 솔닛의 '이 폐허를 응시하라'가 생각납니다.

 이 책 역시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를 가져다 준 책이었죠.

(너무 많이 받았다구요? 원래 귀가 얇은 편입니다^ ^;)

레베카 솔닛은 우리가 가진 인간성 자체에 대해 근본적으로 다른 시각을 가지게 만들었습니다. 흔히 재난 영화를 보다 보면 인간성에 실망감을 가득 느낄 때가 많습니다. 닥쳐온 위기 앞에서 이타심 보다는 이기심을 더 많이 드러내기 때문이죠.


 그런데 우리는 그것이 영화적 상상이 아니라 세상의 진실이라 여깁니다. 지금 우리 윤리의 리얼리티를 재현하고 있다고 보지요. 하지만 레베카 솔닛은 이러한 우리의 시각을 철저히 부숩니다. 그녀는 수많은 재난 현장을 돌아다녔고 생생한 취재와 연구를 통해 재난 현장에서 인간이 전혀 다르게 행동하고 있음을 아주 설득력있게 보여줍니다. 한 마디로 사람들은 영화적 재현과는 전혀 다르게 행동했던 것입니다. 레베카 솔닛은 당당히 주장합니다. 사람은 어려울수록 더 많이 협력하고 타인을 위해 움직이며 질서를 유지하려 든다고. 원래 인간의 위기 대처 방식이 그렇게 진화되었다고 합니다. 협력을 중시하게끔 말이죠. 이번 세월호 참사 때도 아이들은 순순히 지시에 따르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더구나 타인을 위해 행동하는 이들도 많았죠. 누구는 우리 교육의 부작용이다라고 말을 하는데 원래 인간이 그런 것입니다. 그랬기에 세월호 선장과 선원의 대처에 더욱 분노하게 되는 것이죠. 어차피 거짓 번명이겠지만 혼란을 막기 위해서라고 말하는데 사실 혼란을 일으킬만한 그 무엇도 없었을테니까요. 분명 아이들은 무질서 없이 피난 지시에 따랐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왜 그런 짐작을 했던 것일까요? 레베카 솔닛은 그것이 바로 UPPER 계급들이 심어준 악의적 환상이라고 말합니다. 영상 매체를 통해 재난 때마다 무질서한 군중의 모습을 반복적으로 보여주어 각인시킴으로써 엘리트들의 통제만이 유일한 구원임을 믿게 만든다는 것이죠. 즉 우리가 영화나 드라마등을 통해 익히 접해온 재난 시의 군중 모습은 모두 사회 엘리트 계층들이 자신들의 존립을 튼튼히 하고 군중 스스로를 못 믿게 만들어 통제를 손쉽게 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런 식으로 타인의 모습을 곡해하고 결국엔 우리 자신마저 못 믿게 만들어버렸습니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타인을 바라보는 시각, 또는 인간성 자체에 대해 가지고 있는 시각들은 대부분 그런 식으로 형성되었습니다. 즉 이것은 순도 100%의 진실은 아닌,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편집하고 왜곡하여 주입한 것도 상당하다는 이야기가 되겠죠. 레베카 솔닛의 책은 그런 왜곡된 타인과 인간의 모습을 교정시켜주는 책이었습니다. 아마 스티븐 핑커의 이 책도 그럴 것 같네요. 레베카 솔닛이 현실을 토대로 이야기했다면 스티븐 핑커는 과학에 기반하여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겠죠. 어쨌든, 새로운 시야를 접하게 해주는 것만은 틀림없는 듯 하여 읽어보고 싶습니다. 




 '후지와라 토모미' - '폭주 노인'


 요즘 저의 관심사는 '노인'입니다.

 그냥 지금 제 상식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부분들이 많아서 이해하려고 이것저것 찾아보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다 눈에 들어온 책입니다.


 이미 일본은 '무연사회'라 불릴 정도로 고령화 사회가 가져오는 부작용에 시달리고 있다고 합니다. 노년의 고독과 무력감이 사회 전반에 많이 팽배해있다고 하더군요. 동시에 노년의 분노 표출도 상당히 증가했다고 합니다. 이 책은 그런 추세를 담은 것인데 왜 노년의 폭력이 점점 심해지고 있는지 탐색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들의 분노 표출은 일종의 자기 증명이 아닐까 합니다. 끝도 없이 얇아져만 가는 자신의 존재가치에 대한 반발이 이런 식으로 나오는 것이겠죠. 저는 최근 우리나라의 노년층의 투표도 이와 연장선상에 있지 않나 생각됩니다. 이념이나 정책이 아닌 자신의 존재 증거의 일환으로 투표가 이뤄지고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신들의 존재를 인정해주고 그들을 위해 신경쓰는 정당에 아낌없이 투표한다는 것으로 말이죠. 뭔가 그런 흐름 같은 것이 보입니다. 이번 영화 '명랑'의 성공도 이와 무관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1700만 관객에 대한 계층 분석이 나왔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분명 이번 '명랑' 흥행은 노년층(50대 이상을 의미하는 것인데 '노년'이란 단어에 너무 구애받지 말 것을 부탁드릴게요^ ^;)이 주도한 것 같습니다. '이순신'에 대한 흠모 같은 것이 아니라 그들의 전성 시대에 가장 널리 알려졌던 인물로, 일종의 향수 같은 것이 주도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즉 자기 존재 가치에 대한 긍정 같은 것을 가져다 주었기에 '명랑'이 흥행에 성공했다고 보는 것이죠. 물론 어디까지나 제 생각입니다만.

 아무튼 분명 이 세대의 영향력은 날로 고령화사회로 치닫고 있는 우리 사회에서 더욱 커지리라 생각합니다. 관심을 갖고 지켜보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이미 늦은 것일지도 모르지만.

 


  브루스 왓슨, 프리덤 서머 1964


 미국이 가장 혼란스러웠던 1960년대. 가장 첨예한 갈등의 현장으로 모든 것을 각오하고 신념을 위해 싸우러 나간 '행동하는 젊음'을 보여주는 책입니다.


 신념과 이상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내던졌던 영혼들의 이야기.

 요즘 이런 것이 그리워요. 지그문트 바우만이 그러더군요.

 '오래 사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사는가가 중요하다. 한 순간이라도 인간답게 사는 것이 그저 오래 사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 자본주의 이전에는 그런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지금 우리가 가진 수명에 대한 집착은 자본주의가 만들고 주입시킨 것에 불과하다.'

 정확한 인용은 아닙니다. 하지만 분명 이와 비슷한 말을 했습니다.

 지금 대부분은 벽에 똥칠할 때까지 오래 사는 걸 좋다고 여기고 있죠.

 생존을 위해서는 귀머거리 3년, 봉사 3년, 벙어리 3년 하듯이 꾹 참고 살아야 한다고.

바우만은 그런 생의 무조건적 집착이 소심과 삶의 수동성을 가져왔다고 합니다. 그저 오래 사는 게 좋은 것일까 생각하고 있는 요즘입니다. 먹고 사는 거, 그게 그렇게 중요할까? '프리덤 서머, 1964'를 읽으면서 거듭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폴 콜리어, '엑소더스'


 동생이 이주학을 전공하고 있어서 저도 덩달아 관심이 생기는군요.

 앞으로 이주는 전세계적으로 가장 중요한 이슈로 떠오를 것은 틀림없어 보입니다.

 원래 '출애굽'을 뜻하는 엑소더스는 제목 그대로 대규모 국제 이주를 다루고 있는 책이더군요.

 무엇보다 그 원인으로 세계 불평등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제 사회 곳곳에 더욱 많이 도래할 이방인들과 어떻게 별 탈없이 융화할 것인가를 이 책으로 사전 탐색 같은 것을 해보고 싶네요.

 






 '라캉과 지젝'


 지젝 현상에 대하여 한국의 소장 연구자들이 '전문가적 안목으로 진지한 탐문과 논쟁을 시도'했다고 하네요. 한국의 지젝 연구 현주소를 엿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인 것 같아서 읽어보고 싶습니다.










 알렉스 캘리니코스의 '포스트모더니즘, 마르크스주의의 비판'


 마르크스주의적 입장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을 비판한 아주 유명한 책이죠.

 예전에 한 번 읽어 본 것도 같은데 기억이 잘 안 나네요.

 지금 읽어보면 와 닿는 게 더욱 많을 것 같기도 해서 벗해보고 싶습니다.  






















 키스 토마스, 종교와 마술 그리고 마술의 쇠퇴


 맙소사! 이 책이 나왔네요. 발견하고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중세에서 근세로 넘어오는 전환기인 16세기와 17세기 영국 마술 문화의 모든 것을 보여주는 책입니다. 이거 꼭 한 번 읽어보고 싶었는데 아, 가을에 시간이 나야 할 텐데요...





 노마 필드, 죽어가는 천황의 나라에서


 평범한 사람들이 일본 전체주의에 어떻게 저항했는가를 보여주는 꽤나 유명한 책이라고 들었습니다. '멘발의 겐' 같은 만화를 보면 일본 제국주의 시대에도 점점 전범국가화 되어가는 일본에 저항하는 일본인들이 존재했었음을 알 수 있더군요. 이건 오카자키 겐조의 투쟁을 다룬 하라 가즈오의 '가자가자 신군' 같은 다큐멘터리를 봐도 절실히 느낄 수 있는 부분입니다. 모두가 신변의 안전이 두려워서 '예'를 외치던 순간에도 상식과 자신의 신념에 따라 '아니오'를 당당하게 외치던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죠. 이 책을 읽고 싶은 마음은 '프리덤 서머, 1964'와 그리 다르지 않습니다. 


 읽고 느껴보고 싶습니다.



여기까지가 이번 제 추천입니다.

과연 이번의 타율은 어떨지 궁금하네요.

벌써 추석입니다. 고속도로는 벌써부터 귀성 행렬로 붐빈다네요.

어디서 보내시든 즐겁고 좋은 추억 많이 가지시길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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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4-09-09 2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라캉과 지젝, 단연 돋보입니다...

오드득 2014-09-14 23:33   좋아요 0 | URL
저도 얼른 읽어보고 싶은 책입니다^ ^
 
한국 공포 문학 단편선 - 돼지가면 놀이 밀리언셀러 클럽 - 한국편 26
장은호 외 8인 지음 / 황금가지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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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공포 문학 단편선 6'이 출간되었다. 5집 이후 4년만의 출간이라고 한다. 그만큼 더 오래 묵힌 세월 탓인지 더 몰입하게 만들었고 더 재밌어졌다. 모두 10편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한국 공포 문학 단편선 6'의 표지는 가장 처음 나오는 단편인 '돼지가면 놀이'를 테마로 만들어졌는데 돼지의 모습이 얼른 감독 장 피에르 주네의 데뷔작인 영화 '델리카트슨' 포스터를 연상시킨다.


 한 때, 대표적인 컬트 영화로 여기저기에서 추천되던, 영화광들 사이에서는 아주 유명한 영화였는데 아무리 유명했어도 세월의 무게는 이길 수 없었는지 어느새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져 버렸다. 감독 장 피에르 주네의 이름조차 '델리카트슨'이나 '잃어버린 아이들의 도시' 보다는 '아멜리에'로 더 기억되고 있는 형편이니. 아무리 그래도 '델리카트슨'이 보여주었던 영화적인 새로움의 충격엔 '아멜리에'는 발 끝도 못 미친다. 진정한 주네의 대표작이자 최고작은 바로 이 '델리카트슨'이 아닐까 한다라고 쓰고 있지만 지금 내가 왜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이 글은 '델리카트슨'이 아니라 '한국 공포 문학 단편선 6'에 대한 것인데 말이다. 얼른 손가락으로 머리에 경고의 충격을 주고 항로를 수정한다.

 유재중의 '돼지가면 놀이'는 한국전쟁 직후, 강원도 해안면의 '펀치볼'이란 마을에서 괴기 사건을 경험한 한 할아버지가 자신의 말을 듣지 않아 싫어하는 손자에게 들려주는 독백으로 되어 있다. 사이 사이 손자가 할아버지의 말이 사실인지 흥신소에 의뢰해 보고 받은 글이 나와 있지만 '돼지가면 놀이'는 전형적인 괴담 형식으로 되어 있다. 나중에 가면 소설이 주고자 하는 공포 자체가 바로 이 '괴담'이 전해지는 형식 자체에 있었음이 밝혀진다. 읽을 분들을 위하여 그 공포가 어떤 것인지 자세히 밝히지는 않으련다. 다만 스즈키 고지의 '링'과 비슷하다고만 말하고 싶다. 이렇게 '돼지 가면 놀이'는 형식과 주제가 일치하고 있으며 진짜 공포는 돼지 가면을 쓴 자들의 살육이 아니라 훗날 어떤 여름이나 겨울 밤, 친구들과 괴담을 주고 받을 때 홀연히 상기될 지도 모른다. 그걸 마지막 할아버지의 모습에서 확인하게 될 것이다.

 돼지 가면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그 돼지 가면은 닐 조던의 영화 '푸줏간 소년'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이런 가면을 쓰고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살육한다. 패트릭 매케이브의 소설(제발 우리나라에 출간 좀 해 주길!)을 원작으로 한 이 영화는 미쳐버린 세상에서 진실과 희망을 모두 잃어버린 소년이 나름 세상을 바로잡고자 벌이는 살인을 그리고 있는데 누구나 한번쯤 겪는 시대에 대한 절망을 참 잘 그려낸 작품이다. 요즘 보면 더욱 소년의 절망에 공감하게 될 지도 모르겠다(라고 또 쓸데없이 영화 이야기를 해버렸군 ㅠ ㅠ).

 김재은의 '숫자꿈'은 환상을 혐오해 마지 않는 지극히 현실 중심적인 주인공이 어느날 갑자기 사람들의 머리 위에서 홀연히 떠오르는 숫자를 보게 된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그 숫자란 다름아닌 숫자의 주인공이 어떻게 죽을 것인지 알려주는 기호였다. 현실주의자에게 느닷없이 환상의 세계가 도래해 버린 것이다. 죽음의 방식을 말하는 숫자라는 아이디어가 좋았다. 무엇보다 주인공이 인사 담당으로 타인을 만나는 주된 매개체가 입사지원서의 증명 사진이라는 점을 얼굴 위로 떠오르는 숫자로 연결한 것이 마음에 들었다.

 소설에는 표현되지 않은 내용인데, 사실 숫자의 환상이 갑자기 그에게 도래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주인공은 입사 지원서의 증명 사진 얼굴들을 보면서 내내 자신이 채점한 점수를 떠올렸을 것이기 때문이다. 대부분 그 점수는 그대로 탈락으로 이어졌을테니 환상 세계에서 그가 보게 된 죽음 숫자와 무슨 차이가 있을 것인가? 자신의 주된 일상 행위가 그대로 공포의 매개체가 되어버렸다는 점이 이 소설의 탁월한 매력인데 멋진 설정만큼 그 연결을 잘 살리지는 못한 것 같고 전개가 이런 소재물에서 흔히 흐르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점이 좀 실망스러웠다.

 박해로의 '무당 아들'은 독자를 가지고 노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공포가 현실이 되고 현실이 공포로 능수능란하게 변한다. 하지만 역시 매끄럽지 못한 결말이 텁텁한 뒷맛을 남긴다.

 김희선의 '여관바리'는 일상과 공포를 잘 조합했는데 나도 그런 곳에 자야 했을 때는 혹시 여기가 누군가 자살한 곳은 아닐까 생각하곤 했었기 때문에 더욱 실감나게 느꼈다.

 정세호의 '낚시터'는 영화 '캐빈 인더 우즈'와 비슷한 설정으로 환상과 공포를 잘 조합했다. 블로그에 올린 글을 보고 함부로 연락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런 적도 없지만.


 장은호의 '며느리의 관문'은 지금처럼 조건이 결혼의 결정적인 동인이 된 세태에 경종을 울리는 작품인데 전개가 다소 식상한 편이다.

 우영희의 '헤븐'은 강렬한 도입부로 시선을 확 사로 잡는다. 잘 달리다가 후반에서 좀 휘청거린다. 마지막을 왜 굳이 그렇게 한 것인지 이해되지 않는다. 너무 반전에 구애받지 않았나 싶다.

 황태환의 '고양이를 찾습니다'는 처음 읽을 땐 전혀 공포스럽지 않은 소재와 전개인지라 왜 여기에 실렸을까 하는 의문이 들지만 무리없이 공포의 세계로 데려간다. 분위기를 돌변시키지 않으면서 자연스럽게 이끌어간다는 점이 이 소설의 매력이다. 하지만 미나토 가나에의 '고백'에서 썼던 방법을 여기서 쓰고 있다는 점이 좀 걸린다. 나만 괜히 그러는 것일 지도 모르지만.

 김유라의 '구토'는 다이어트를 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공포를 느낄 수밖에 없는 소설이다. 과음으로 도로에 구토하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환경 정화를 위해 권장 소설로 삼으면 어떨까 싶기도 하다.후반에 짧게 등장하는 무시무시한 장면이 있다. 짧지만 꽤나 강렬하다.

 엄길윤의 '파리지옥'은 지극히 일상 공간인 '편의점'을 공포의 무대로 삼았다. 편의점 알바로 일하고 있거나 일한 경험이 있다면 환영할만한 대목이 있다. 강자 앞에선 약하고 약자 앞에선 한없이 강한 보편적 한국인의 비굴한 초상을 조롱하는 게 마음에 든다. 재밌게 읽었는데 마지막 장면은 도대체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인지 모르겠다. 내 이해가 짧은 탓으로 설마 마감 시간에 쫓겨 서둘러 결말을 내린 것은 아니니라 믿는다.

 이렇게 10편의 이야기를 읽은 소감을 말해본다. 일장일단은 있었지만 모두 가득한 몰입감을 선사하는 작품들이었다. 확실히 한국 공포 문학이 발전하고 있구나 하고 느꼈다. 다음 작품집은 또 얼마만한 세월을 기다려야 할 지 모르지만 그래도 얼른 만나게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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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닥터 슬립 - 전2권
스티븐 킹 지음, 이은선 옮김 / 황금가지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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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직도 영화 '샤이닝'을 처음 보았을 때 받았던 충격을 잊을 수 없다. 두 가지 이름이 뇌리에 콕 박혔다. 하나는 감독인 스탠리 큐브릭이고 다른 하나는 원작자 스티븐 킹이다. 그것이 킹과의 첫 만남이었을 것이다. 스티븐 킹은 공개적으로 스탠리 큐브릭의 '샤이닝'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밝혔지만 영화가 그에게 득이 되면 득이 되었지 적어도 실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를 비롯하여 그 영화로 스티븐 킹의 세계에 입문하게 된 이도 적지 않으니.


 그런 까닭에 '샤이닝'은 개인적으로 의미 있는 작품이라 하겠다. 그러니 30년만에 속편이 나왔다는데 읽지 않을 도리가 없다. 1998년의 일이라고 한다. 당시 '자루속의 뼈'를 출간한 스티븐 킹은 홍보를 위해 미국을 돌고 있었다. 한 서점의 사인회 자리에서 누군가 손을 들고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저기, 샤이닝의 그 아이는 어떻게 되었나요?"


 킹도 궁금했다고 한다. 그에겐 한 가지 의문이 더 있었는데, '샤이닝'에서 대니의 알콜중독자 아버지인 잭 토런스가 혼자 알콜 의존증을 참으려 하지 않고 모임의 도움을 구했었다면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것이었다. 바로 그 의문들이 30년만에 대니를 우리 곁으로 돌아오게 했다. 그리하여 불현듯 재회는 도래하게 된 것이다. '닥터 슬립'이라는 이름으로.



 스티븐 킹 소설의 중심엔 무엇이 있을까? 그 수많은 작품들을 하나의 키워드로 관통한다는 것은 물론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여러 개의 키워드들 중에서 가장 비중 있어 보이는 것 하나를 고르라면 그건 집어낼 수 있을 것 같다. 그건 바로 아버지다.


 그에게 아버지란 존재가 숙고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그의 나이 두 살 때 담배 사러 간다며 나간 아버지가 그대로 킹의 인생에서 사라져 버렸던 것이다. 킹은 그 때부터 아버지 없이 살아왔다. 미처 아버지란 존재를 경험해 보지도 못했다. 그건 오로지 상상으로만 만날 수 있는 존재였다. 어쩌면 킹의 소설에서 아버지란 존재가 영웅에서 악마까지 실로 다양한 모습을 보이는 것도 그 탓일지 모른다. 자신의 머리 속에서만 존재하는 아버지였기에 혼자서는 확실한 결론을 내릴 수 없었던 것이다. 아버지에 대한 확고한 모습이 없었기에 그 아버지란 존재는 카멜레온이 되었다. 글 쓰던 당시 킹의 감정에 따라 그 때, 그 때마다 다른 가면을 쓰고 나타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스티븐 킹에게 있어서 소설의 아버지란 하나의 거울이었다. 그건 그대로 현재 스티븐 킹의 내면을 반영하고 있었던 것이다. 무리한 해석일까? 이렇게 추정하는 이유는 있다. 이 때의 그가 바로 아버지였기 때문이다.


 26살에 '캐리'로 프로 소설가의 길로 들어섰을 때, 그는 아버지였다. 그것도 두 아이의 아버지였다. 그는 세탁소에서 주당 50에서 60시간을 일했고 시급으로 1. 75달러를 받았다. 그의 말에 따르면 '하루하루가 '바탄의 죽음의 행진'과 다를 바 없었다'고 한다. 끔찍한 생활고만큼 가장에게 힘든 것도 없다. 카프카는 일상이야말로 작가를 망치는 것이라고 보았는데 그런 상황의 스티븐 킹도 카프카의 말에 반박하기란 불가능했을 것이다. 애들은 시끄럽게 울어대고 글 쓸만한 환경은 도저히 안되며 힘겹게 번 돈은 신기루처럼 곧장 사라졌다. 삶은 악몽이었다. 더구나 아버지가 어떤 존재인지 피부로 경험해 본 적이 없었기에 혼돈마저 가미된 악몽이었다. 그런 처지에 있는 아버지들은 무엇을 소망할까? 더구나 고도의 집중을 필요로 하는 작가라면?


 통제일 것이다. 자신이 집중할 수 있게 가정의 환경을 정돈하는 것. 그것이 가장 바라는 소망일 것이다. 대부분 보통 아빠들이 그러하듯이. 그게 불가능 하다면 킹의 아버지처럼 스스로 홀연히 사라져 버리기를 꿈꾸리라. 대부분의 포유류 수컷들이 그러하듯이.


 나는 지금 다른 아버지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정확히 '샤이닝'과 '애완동물 공동묘지'에 나타났던 아버지의 모습을 말하고 있다. 잭과 루이스. 그들 모두 가정의 강력한 통제를 원했다. 두 이야기는 아버지가 가진 강력한 통제의 염원이 초래한 비극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샤이닝'에서 자신의 딸과 아내를 살해하고 유령이 되어 돌아와 잭과 만난 오버룩 호텔 전 관리인 그레이디는 잭에게 이렇게 충고한다.


 "자기 가족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는 남자는 우리 지배인님의 흥미를 끌지 못합니다. 자기 아내와 아들의 행동을 바로잡지 못하는 남자는 이 큰 호텔에서 높은 자리는커녕 자기 자신도 주체하지 못합니다." ('샤이닝' 1권, p. 207)


 '애완동물 공동묘지'도 마찬가지다. 매장지에서 다시 살아 돌아온 고양이 처칠의 변화된 모습은 그대로 루이스의 소망이 투영된 것이기도 하다. 루이스는 성질이 사나워 통제가 안되는 고양이가 제발 좀 통제가 되었으면 하고 바라는데 다시 살아돌아온 고양이는 쥐죽은 듯이 얌전히 지내는 것이다. 잭과 루이스 모두는 점점 통제가 안되는 가정을 고통으로 인지한다. 하지만 자신을 거기에 맞추기 보다는 그걸 자기 권위의 상실로 생각하고 오히려 환경을 자기 뜻에다 맞춰 실추된 권위를 회복하려고만 든다. 그것이 '샤이닝'에서는 잭의 살해로, '애완동물 공동묘지'에서는 가족을 다른 존재로 바꾸는 것으로 나타난다. 결국 그 때문에 비극은 도래한다. 그러면서 스티븐 킹은 묻는다. 통제의 집착은 보다 강화된 자기 본위 욕망의 형태가 아닌가 라고. 잭과 루이스에게 닥쳐온 위기란 사실 내가 변해야 한다는 것을 요청하는 타자들로부터의 부름으로 해석해야 하지 않는가 라고.


 '대니'가 가지고 있었던 '샤이닝' 능력은 바로 그러한 부름을 상징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30년 뒤, 대니의 이같은 능력이 가진 상징적 의미는 더 분명한 모습을 띠게 되었다. 결국 '닥터 슬립'을 낳은 '잭 토런스가 누군가의 도움에 의지하려 했었다면 과연 어땠을까'의 의문은 바로 이것을 말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혼자가 아니라 타인과의 교감 그리고 연결을 강조하기 위한.



 그건 소설의 시작부터 선명히 부각된다. 오버룩 호텔이 보일러 폭발로 사라지고 난 뒤에도 대니는 여전히 자신을 목조르던 메이시 부인과 바텐더 로이드를 본다. 대니는 공포에 떨고 그에게 샤이닝 능력을 알려준 스승이라 할 수 있는 딕 할로런에게 도움을 구한다. 딕 할로런은 대니에게 자신이 어릴 때 할아버지로부터 성적 학대 경험을 들려준다. 누구도 도와주지 않았고 딕 역시 누구에게도 도움을 구하지 않았기에 학대는 할아버지가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더 큰 문제는 죽은 다음에 찾아왔다. 죽은 할아버지가 계속 그에게 나타나 학대하려 했던 것이다. 그래서 결국 그는 대니와 같은 능력을 가진 '로즈' 할머니에게 도움을 구했다. 그리고 이제 그 방법을 대니에게 알려주려 한다. 대니의 문제가 해결된다. 딕은 대니에게 이렇게 말한다.


 내 말 잘 들어라, 대니. 이 세상은 균형을 유지하는 나름의 방법이 있어. 나는 그렇다고 믿는다. 이런 옛말이 있지. 학생이 준비되어 있으면 선생님이 등장하는 법이라고. 내가 네 선생이었어. (1권, p. 24)


 바로 이것이 소설의 주제가 아닐까 싶다. 들을 준비가 된 학생이 되는 것. 조언을 구할 일이 있다면 기꺼이 타인을 스승으로 초빙하는 것. '닥터 슬립'은 바로 이런 태도를 은연중에 던져주는 소설이라 생각된다. 어려울수록 자신에게 집착하지 말고 더욱 타인에게 마음을 열라는, 달리 말해 통제의 위기를 자기 존재 가치의 실추로 여기지 말고 변화의 부름으로 여기라는 소설인 것이다.


 이것은 딕과 대니 관계의 반복인 대니와 아브라 관계에서 전면으로 부각된다. 아브라는 대니보다 더 뛰어난 샤이닝 능력을 지니고 있는데 그렇다고 삶이 편한 것은 아니다. 평범한 것이 정상으로 인정되는 사회에서 아브라의 능력은 사람들 눈에 대니가 그랬듯이 흔히 괴물로 받아들여지기 쉽기 때문에 고립감과 부모에게마저 숨겨야하는 것에서 오는 고통이 크다. 대니는 그런 아브라에게 자신이 이미 경험했던 것을 토대로 적절한 조언을 해준다. 할로런이 대니에게 그랬듯이.


 트루낫에 대처하기 위한 상호 연대의 관계가 아니라 도움을 주고 받는 사제지간의 관계성을 강조하기 위해 스티븐 킹은 소설의 결말을 그렇게 끝냈던 것이다. 이왕 트루낫이 나왔으니 말인데, 소설에는 뚜렷이 대비되는 두 개의 조직이 존재한다. 하나는 물론 물리쳐야 하는 악의 역할을 맡은 트루낫이고 다른 하나는 대니와 아브라가 아니라 대니가 소속된 알콜 중독자 협회다. 


 일단 이 둘은 비슷하다. 특정된 구성원으로 형성된 모임이라는 점이 그렇다. 알콜 중독자 협회는 말 그대로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한 알콜 중독자들로 구성된 모임이고 '트루낫'은 자신의 존재를 지탱해 줄 '스팀'이 필요한 비인간(Not Human)들로 구성된 모임이다. 모두 무언가 특별한 도움이 필요해서 형성된 모임이라는 것도 똑같다. 하지만 같은 것은 여기까지다. 스티븐 킹은 이 두 모임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를 통해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선명히 부각시킨다. 가장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누군가 그리고 무언가의 도움이 필요한 건 같지만 그 구성원을 대하는 태도에서 '알콜 중독자 협회'와 '트루낫'은 뚜렷하게 갈라지는 것이다.


 알콜 중독자 협회는 새로 온 회원을 자기들과 똑같이 바꾸지 않는다. 있는 모습 그대로 존중해준다. 억지로 달라지기를 권하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알콜 중독자 협회가 구성원들을 대하는 근본적 방식이다. 반면 '트루낫'은 정반대다. 트루낫이 되기 위해선 그들과 똑같은 존재로 바뀌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소설 첫부분에서 바로 이 모습을 볼 수 있다. 가정 학대로 인해 성인 남자들을 증오하게 된 여성 앤디는 남자를 유혹하여 특이한 최면 능력으로 잠재운 뒤 돈을 강탈하며 살아간다. 그러다 '트루낫' 눈에 띄었고 그들의 일원이 되기로 결정한다. 하지만 인간 그대로의 모습으론 '트루낫'이 될 수 없다. 이건 무조건이다. 그래서 앤디는 '트루낫'의 리더 로즈에 의해 그들과 똑같은 존재로 변한다. 트루낫은 이를 '터닝'이라 부른다.  하지만 알콜 중독자 협회엔 이런 '터닝'이 없다. 그들은 타인을 있는 그대로 존중해 준다. 강제 변환과 최대한의 배려와 존중. 이것이 트루낫과 알콜 중독자 협회 사이에 존재하는 가장 커다란 차이점이다. 바로 이 때문에 자신 역시 알콜 중독자였고 협회 경험이 있는 스티븐 킹이 잭 토런스가 알콜 중독자 모임에게 도움을 구했으면 어땠을까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바로 이 알콜 중독자 협회에서 사람들을 대하고 참여하는 사람의 태도가 소설의 주제를 구현하고 있음은 두말할 것도 없다.


 이 주제는 모임이 가진 힘의 차이로도 부각된다. 공교롭게도 스티븐 킹은 '트루낫'과 '알콜 중독자 협회'를 비슷한 방식으로 묘사한다. 일단 '트루낫'의 묘사다.


 트루낫은 법인이 아니었지만 만약 트루낫이 법인이었다면 메인, 플로리다, 콜로라도, 뉴멕시코의 몇몇 지역은 '기업도시'로 불렸을 것이다. 그런 지역의 주요 사업체와 넓은 땅덩이들은 복잡하게 얽힌 지주회사를 통해 모두 그들과 연결되었다. (1권, p. 235)


 트루낫은 겉보기와 다르게 아주 세력이 크고 가진 돈도 천문학적인 액수이다. 반면 알콜 중독자 협회는


 알콜 중독자 협회는 광고를 하지 않고 아무 상품도 판매하지 않으며 농구모자나 야구모자를 돌려서 기부 받은 꾸깃꾸깃한 지폐로 유지되는 단체이고, 모임이 열리는 각종 대관실이나 교회 지하실 훨씬 너머까지 조용하지만 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1권, p. 290)


 실상 알콜 중독자 협회는 트루낫에 전혀 상대가 안된다. 하지만 모임이 가진 힘은 알콜 중독자 협회가 훨씬 강하다. 트루낫은 그만한 세력을 가졌지만 '스팀'을 흡수했던 아이가 걸려 있던 홍역만으로도 쉽게 위기를 겪는다. 반면 알콜 중독자 협회에겐 위기 같은 것은 전혀 없다. 재정도 얼마없고 트루낫의 RV처럼 모임 자리를 구하기 위해 이리저리 떠돌아다녀야 할 형편이지만 모임 만큼은 굳건히 유지된다. 관계의 강도를 두고 보았을 때, 트루낫은 알콜 중독자 협회의 발 끝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이는 트루낫이 대등한 관계가 아니라 로즈를 중심으로 상하 관계란 것도 한 몫한다. 우리는 이야기가 진행됨에 따라 평등한 것처럼 보였던 트루낫이 실은 통제를 강조하는 위계적인 조직임을 점점 보게 된다. 이를 통해 우리는 이 '트루낫'과 닮은 게 하나 있었음을 떠올릴 수 있게 되는데 그건 바로 '샤이닝'의 '오버룩 호텔'이다.


 '샤이닝'에서 잭 토런스가 보는 오버룩 호텔의 유령 세계는 평등해 보인다. 저마다 대등하게 가면 무도회에 참석하고 있는 것 같다. 그는 그 세계에 매료되는데 하지만 그건 거짓이었다. 나중에 그 세계는 오로지 힘있는 하나를 주축으로 한 절대적 위계 질서의 세계라는 게 드러난다. 그 힘있는 하나란 바로 '오버룩 호텔'이다. 잭 토런스가 매료된 세계는 오버룩이 절대자로서 군림하고 있는 세계였다. 자기 본위적인 통제의 열망으로 가득한.


 '트루낫'도 마찬가지다. 특이하게도 이 '트루낫'은 통제의 열망이 강했던 '샤이닝'과 '애완동물 공동묘지'의 특성을 모두 가지고 있다. 그것도 오버룩과 루이스가 통제를 위해서 가했던 행동을 모두 취하고 있는 것이다.  오버룩은 대니를 자신의 통제에 두기 위해 잭 토런스라는 존재 자체를 마셔버렸다. 정확히 트루낫이 대니와 같은 존재들에게서 샤이닝 능력을 주는 '스팀'을 흡혈하는 그대로 말이다. 또한 그들은 루이스가 통제를 위해 고양이와 가족을 바꿔버렸듯이 사람을 자기들과 똑같이 '터닝'시켜 버린다.


 이런 특성까지 고려한다면 '트루낫'을 달리 해석할 수가 없다. '트루낫'은 '샤이닝'과 '애완동물 공동묘지'에 나왔던 나쁜 아버지의 재림이다. '스타워즈' 식으로 말한다면 다스 베이더의 귀환인 것이다.


 그러므로 주제의 구현은 '알콜 중독자 협회'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아니나 다를까 대니 역시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트라우마를 그 모임을 통해 치유하게 된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바닥이 있기 마련이지. (...) 자네도 누군가에게 자네 이야기를 해야만 하는 순간이 찾아올 거야.(1권, P 278)

 

 알콜 중독자 협회에서 대니는 이런 말을 들었다. 결국 우리는 마지막에 가서 대니가 오로지 자신만 간직했던 트라우마를 모임 사람들에게 고백하는 것을 보게 된다.


 어떤 면에서 '닥터 슬립'은 절대 타인에게 내비치지 않고 비밀을 혼자서 꼭꼭 숨겨두기만 하던 대니가 타인들에게 허심탄회하게 고백하게 되기까지의 여정이라고 할 수도 있다. 공교롭게도 '트루낫'의 형성과 해체는 이것과 궤적을 같이 하는데 이로써 '트루낫'을 오로지 자신의 힘으로 난관과 불안을 극복하려고 할 경우 생겨나는 통제 욕망의 은유로 볼 수 있는 여지를 남기기도 한다.


 그렇다는 것은 통제 욕망이 어느 한 순간 근절되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내내 당면해야 할 문제임을 뜻한다. 대니는 딕 할로런의 도움으로 통제 욕망의 부산물이라고 할만한 유령들을 단단히 봉인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곧 잭 토런스라는 나쁜 아버지와의 결별이기도 했다. 그는 아버지가 유산처럼 물려준 나쁜 아버지로 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소설의 말마따나 '착각'이었다. 이는 스티븐 킹의 자전적 경험으로도 증명된다. 앞서 소설 속 아버지의 모습을 스티븐 킹 내면의 반영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나쁜 아버지의 반복적인 출현은 스티븐 킹 역시 그런 권력과 통제의 유혹을 반복적으로 받았음을 뜻할 것이다.


 그렇게 잭 토런스는 한 순간에 사라지는 존재가 아니었다. 자기 본위의 욕망이 존재하는 곳이면 어디든 그림자처럼 출몰하는 것이다. 대니도 마찬가지다. 대니는 타인들에게 자신을 괴물처럼 여기게 만드는 샤이닝 능력을 억누르기 위해 술을 마셨고 그러다 급기야 평생 트라우마가 된 일을 저지르게 된다. 우연히 같이 술을 마신 여자의 돈을 슬쩍 한 것이다. 먼저 깨어나 돈을 훔쳐 나오는데 그녀의 아기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순간 대니는 샤이닝 능력으로 아기가 아기의 삼촌에게 학대받고 있으며 도와주지 않을 경우 죽게 되리라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외면했다. 결국 훗날 대니는 아기와 그녀 모두 죽었다는 것을 샤이닝으로 알게 된다. 이것이 대니의 트라우마였다. 도와줬어야 했는데 외면하는 바람에 죽게 만들었다는 죄책감. 그는 거기서 잭 토런스의 모습을 본 것이다. 디니라는 여자와 아기의 존재는 잭 토런스에게 살해 위협을 받던 엄마와 대니 모습 그대로였다. 딕 할로런은 그 때 그들을 도와주었다. 무려 플로리다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두려워하는 비행기를 타고 날아와서는 눈보라마저 무릎쓰고 도와주러 달려왔던 것이다. 그보다 훨씬 쉬운 상황이었음에도 그러나 대니는 도와주지 않았다. 어쩌면 대니의 고통은 실상 두려움일지 모른다. 어쩌면 자기도 아버지 잭 토런스가 될 지 모른다는 두려움.


 '닥터 슬립'은 결국 살면서 시시 때때로 찾아올 수 밖에 없는 유혹과 두려움을 어떻게 지혜롭게 극복할 것인가를 말하는 소설인지도 모른다. 그 방법은 딕 할로런, 알콜 중독자 협회가 잘 보여준 바대로 타인에게 있다. 하지만 '트루낫'처럼 내 본위대로 바꾸는 타인이어서는 안된다. 있는 그대로를 존중해주어야 한다. 나를 내려놓고 귀기울여야 한다. '닥터 슬립'으로서 대니가 했던 일이 바로 그것이지 않았던가. 그를 따스한 수건으로 닦아주고 가만히 손을 잡아주며 그의 기억을 내면으로 경청하는 것. 그럴 때 타인은 자신이 진정 바라는 도움을 얻을 수 있었다. 똑같이 대니도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었다. 양방향의 구원. 이런 관계로 맺어진 사제 지간은 일방적이지 않다. 부머랭처럼 도움을 주는만큼 도움을 받게 된다. 그것이 바로 딕 할로런이 말한 '세상은 돌고 도는 거지. 운명처럼.'의 진짜 의미이리라.


 결국 소설이 권유하는 대로 살면 언젠가 우리도 대니처럼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렇다. 그는 도와줄 수 있었다. 그것이 그의 서약이자 그가 태어난 이유였다. (2권, P. 406)


 이것이야말로 '잭 토런스'가 사라진 세상, '오버룩'이 사라진 세상이자 스티븐 킹이 진정 바라는 세상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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