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트] 닥터 슬립 - 전2권
스티븐 킹 지음, 이은선 옮김 / 황금가지 / 2014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직도 영화 '샤이닝'을 처음 보았을 때 받았던 충격을 잊을 수 없다. 두 가지 이름이 뇌리에 콕 박혔다. 하나는 감독인 스탠리 큐브릭이고 다른 하나는 원작자 스티븐 킹이다. 그것이 킹과의 첫 만남이었을 것이다. 스티븐 킹은 공개적으로 스탠리 큐브릭의 '샤이닝'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밝혔지만 영화가 그에게 득이 되면 득이 되었지 적어도 실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를 비롯하여 그 영화로 스티븐 킹의 세계에 입문하게 된 이도 적지 않으니.


 그런 까닭에 '샤이닝'은 개인적으로 의미 있는 작품이라 하겠다. 그러니 30년만에 속편이 나왔다는데 읽지 않을 도리가 없다. 1998년의 일이라고 한다. 당시 '자루속의 뼈'를 출간한 스티븐 킹은 홍보를 위해 미국을 돌고 있었다. 한 서점의 사인회 자리에서 누군가 손을 들고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저기, 샤이닝의 그 아이는 어떻게 되었나요?"


 킹도 궁금했다고 한다. 그에겐 한 가지 의문이 더 있었는데, '샤이닝'에서 대니의 알콜중독자 아버지인 잭 토런스가 혼자 알콜 의존증을 참으려 하지 않고 모임의 도움을 구했었다면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것이었다. 바로 그 의문들이 30년만에 대니를 우리 곁으로 돌아오게 했다. 그리하여 불현듯 재회는 도래하게 된 것이다. '닥터 슬립'이라는 이름으로.



 스티븐 킹 소설의 중심엔 무엇이 있을까? 그 수많은 작품들을 하나의 키워드로 관통한다는 것은 물론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여러 개의 키워드들 중에서 가장 비중 있어 보이는 것 하나를 고르라면 그건 집어낼 수 있을 것 같다. 그건 바로 아버지다.


 그에게 아버지란 존재가 숙고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그의 나이 두 살 때 담배 사러 간다며 나간 아버지가 그대로 킹의 인생에서 사라져 버렸던 것이다. 킹은 그 때부터 아버지 없이 살아왔다. 미처 아버지란 존재를 경험해 보지도 못했다. 그건 오로지 상상으로만 만날 수 있는 존재였다. 어쩌면 킹의 소설에서 아버지란 존재가 영웅에서 악마까지 실로 다양한 모습을 보이는 것도 그 탓일지 모른다. 자신의 머리 속에서만 존재하는 아버지였기에 혼자서는 확실한 결론을 내릴 수 없었던 것이다. 아버지에 대한 확고한 모습이 없었기에 그 아버지란 존재는 카멜레온이 되었다. 글 쓰던 당시 킹의 감정에 따라 그 때, 그 때마다 다른 가면을 쓰고 나타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스티븐 킹에게 있어서 소설의 아버지란 하나의 거울이었다. 그건 그대로 현재 스티븐 킹의 내면을 반영하고 있었던 것이다. 무리한 해석일까? 이렇게 추정하는 이유는 있다. 이 때의 그가 바로 아버지였기 때문이다.


 26살에 '캐리'로 프로 소설가의 길로 들어섰을 때, 그는 아버지였다. 그것도 두 아이의 아버지였다. 그는 세탁소에서 주당 50에서 60시간을 일했고 시급으로 1. 75달러를 받았다. 그의 말에 따르면 '하루하루가 '바탄의 죽음의 행진'과 다를 바 없었다'고 한다. 끔찍한 생활고만큼 가장에게 힘든 것도 없다. 카프카는 일상이야말로 작가를 망치는 것이라고 보았는데 그런 상황의 스티븐 킹도 카프카의 말에 반박하기란 불가능했을 것이다. 애들은 시끄럽게 울어대고 글 쓸만한 환경은 도저히 안되며 힘겹게 번 돈은 신기루처럼 곧장 사라졌다. 삶은 악몽이었다. 더구나 아버지가 어떤 존재인지 피부로 경험해 본 적이 없었기에 혼돈마저 가미된 악몽이었다. 그런 처지에 있는 아버지들은 무엇을 소망할까? 더구나 고도의 집중을 필요로 하는 작가라면?


 통제일 것이다. 자신이 집중할 수 있게 가정의 환경을 정돈하는 것. 그것이 가장 바라는 소망일 것이다. 대부분 보통 아빠들이 그러하듯이. 그게 불가능 하다면 킹의 아버지처럼 스스로 홀연히 사라져 버리기를 꿈꾸리라. 대부분의 포유류 수컷들이 그러하듯이.


 나는 지금 다른 아버지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정확히 '샤이닝'과 '애완동물 공동묘지'에 나타났던 아버지의 모습을 말하고 있다. 잭과 루이스. 그들 모두 가정의 강력한 통제를 원했다. 두 이야기는 아버지가 가진 강력한 통제의 염원이 초래한 비극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샤이닝'에서 자신의 딸과 아내를 살해하고 유령이 되어 돌아와 잭과 만난 오버룩 호텔 전 관리인 그레이디는 잭에게 이렇게 충고한다.


 "자기 가족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는 남자는 우리 지배인님의 흥미를 끌지 못합니다. 자기 아내와 아들의 행동을 바로잡지 못하는 남자는 이 큰 호텔에서 높은 자리는커녕 자기 자신도 주체하지 못합니다." ('샤이닝' 1권, p. 207)


 '애완동물 공동묘지'도 마찬가지다. 매장지에서 다시 살아 돌아온 고양이 처칠의 변화된 모습은 그대로 루이스의 소망이 투영된 것이기도 하다. 루이스는 성질이 사나워 통제가 안되는 고양이가 제발 좀 통제가 되었으면 하고 바라는데 다시 살아돌아온 고양이는 쥐죽은 듯이 얌전히 지내는 것이다. 잭과 루이스 모두는 점점 통제가 안되는 가정을 고통으로 인지한다. 하지만 자신을 거기에 맞추기 보다는 그걸 자기 권위의 상실로 생각하고 오히려 환경을 자기 뜻에다 맞춰 실추된 권위를 회복하려고만 든다. 그것이 '샤이닝'에서는 잭의 살해로, '애완동물 공동묘지'에서는 가족을 다른 존재로 바꾸는 것으로 나타난다. 결국 그 때문에 비극은 도래한다. 그러면서 스티븐 킹은 묻는다. 통제의 집착은 보다 강화된 자기 본위 욕망의 형태가 아닌가 라고. 잭과 루이스에게 닥쳐온 위기란 사실 내가 변해야 한다는 것을 요청하는 타자들로부터의 부름으로 해석해야 하지 않는가 라고.


 '대니'가 가지고 있었던 '샤이닝' 능력은 바로 그러한 부름을 상징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30년 뒤, 대니의 이같은 능력이 가진 상징적 의미는 더 분명한 모습을 띠게 되었다. 결국 '닥터 슬립'을 낳은 '잭 토런스가 누군가의 도움에 의지하려 했었다면 과연 어땠을까'의 의문은 바로 이것을 말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혼자가 아니라 타인과의 교감 그리고 연결을 강조하기 위한.



 그건 소설의 시작부터 선명히 부각된다. 오버룩 호텔이 보일러 폭발로 사라지고 난 뒤에도 대니는 여전히 자신을 목조르던 메이시 부인과 바텐더 로이드를 본다. 대니는 공포에 떨고 그에게 샤이닝 능력을 알려준 스승이라 할 수 있는 딕 할로런에게 도움을 구한다. 딕 할로런은 대니에게 자신이 어릴 때 할아버지로부터 성적 학대 경험을 들려준다. 누구도 도와주지 않았고 딕 역시 누구에게도 도움을 구하지 않았기에 학대는 할아버지가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더 큰 문제는 죽은 다음에 찾아왔다. 죽은 할아버지가 계속 그에게 나타나 학대하려 했던 것이다. 그래서 결국 그는 대니와 같은 능력을 가진 '로즈' 할머니에게 도움을 구했다. 그리고 이제 그 방법을 대니에게 알려주려 한다. 대니의 문제가 해결된다. 딕은 대니에게 이렇게 말한다.


 내 말 잘 들어라, 대니. 이 세상은 균형을 유지하는 나름의 방법이 있어. 나는 그렇다고 믿는다. 이런 옛말이 있지. 학생이 준비되어 있으면 선생님이 등장하는 법이라고. 내가 네 선생이었어. (1권, p. 24)


 바로 이것이 소설의 주제가 아닐까 싶다. 들을 준비가 된 학생이 되는 것. 조언을 구할 일이 있다면 기꺼이 타인을 스승으로 초빙하는 것. '닥터 슬립'은 바로 이런 태도를 은연중에 던져주는 소설이라 생각된다. 어려울수록 자신에게 집착하지 말고 더욱 타인에게 마음을 열라는, 달리 말해 통제의 위기를 자기 존재 가치의 실추로 여기지 말고 변화의 부름으로 여기라는 소설인 것이다.


 이것은 딕과 대니 관계의 반복인 대니와 아브라 관계에서 전면으로 부각된다. 아브라는 대니보다 더 뛰어난 샤이닝 능력을 지니고 있는데 그렇다고 삶이 편한 것은 아니다. 평범한 것이 정상으로 인정되는 사회에서 아브라의 능력은 사람들 눈에 대니가 그랬듯이 흔히 괴물로 받아들여지기 쉽기 때문에 고립감과 부모에게마저 숨겨야하는 것에서 오는 고통이 크다. 대니는 그런 아브라에게 자신이 이미 경험했던 것을 토대로 적절한 조언을 해준다. 할로런이 대니에게 그랬듯이.


 트루낫에 대처하기 위한 상호 연대의 관계가 아니라 도움을 주고 받는 사제지간의 관계성을 강조하기 위해 스티븐 킹은 소설의 결말을 그렇게 끝냈던 것이다. 이왕 트루낫이 나왔으니 말인데, 소설에는 뚜렷이 대비되는 두 개의 조직이 존재한다. 하나는 물론 물리쳐야 하는 악의 역할을 맡은 트루낫이고 다른 하나는 대니와 아브라가 아니라 대니가 소속된 알콜 중독자 협회다. 


 일단 이 둘은 비슷하다. 특정된 구성원으로 형성된 모임이라는 점이 그렇다. 알콜 중독자 협회는 말 그대로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한 알콜 중독자들로 구성된 모임이고 '트루낫'은 자신의 존재를 지탱해 줄 '스팀'이 필요한 비인간(Not Human)들로 구성된 모임이다. 모두 무언가 특별한 도움이 필요해서 형성된 모임이라는 것도 똑같다. 하지만 같은 것은 여기까지다. 스티븐 킹은 이 두 모임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를 통해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선명히 부각시킨다. 가장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누군가 그리고 무언가의 도움이 필요한 건 같지만 그 구성원을 대하는 태도에서 '알콜 중독자 협회'와 '트루낫'은 뚜렷하게 갈라지는 것이다.


 알콜 중독자 협회는 새로 온 회원을 자기들과 똑같이 바꾸지 않는다. 있는 모습 그대로 존중해준다. 억지로 달라지기를 권하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알콜 중독자 협회가 구성원들을 대하는 근본적 방식이다. 반면 '트루낫'은 정반대다. 트루낫이 되기 위해선 그들과 똑같은 존재로 바뀌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소설 첫부분에서 바로 이 모습을 볼 수 있다. 가정 학대로 인해 성인 남자들을 증오하게 된 여성 앤디는 남자를 유혹하여 특이한 최면 능력으로 잠재운 뒤 돈을 강탈하며 살아간다. 그러다 '트루낫' 눈에 띄었고 그들의 일원이 되기로 결정한다. 하지만 인간 그대로의 모습으론 '트루낫'이 될 수 없다. 이건 무조건이다. 그래서 앤디는 '트루낫'의 리더 로즈에 의해 그들과 똑같은 존재로 변한다. 트루낫은 이를 '터닝'이라 부른다.  하지만 알콜 중독자 협회엔 이런 '터닝'이 없다. 그들은 타인을 있는 그대로 존중해 준다. 강제 변환과 최대한의 배려와 존중. 이것이 트루낫과 알콜 중독자 협회 사이에 존재하는 가장 커다란 차이점이다. 바로 이 때문에 자신 역시 알콜 중독자였고 협회 경험이 있는 스티븐 킹이 잭 토런스가 알콜 중독자 모임에게 도움을 구했으면 어땠을까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바로 이 알콜 중독자 협회에서 사람들을 대하고 참여하는 사람의 태도가 소설의 주제를 구현하고 있음은 두말할 것도 없다.


 이 주제는 모임이 가진 힘의 차이로도 부각된다. 공교롭게도 스티븐 킹은 '트루낫'과 '알콜 중독자 협회'를 비슷한 방식으로 묘사한다. 일단 '트루낫'의 묘사다.


 트루낫은 법인이 아니었지만 만약 트루낫이 법인이었다면 메인, 플로리다, 콜로라도, 뉴멕시코의 몇몇 지역은 '기업도시'로 불렸을 것이다. 그런 지역의 주요 사업체와 넓은 땅덩이들은 복잡하게 얽힌 지주회사를 통해 모두 그들과 연결되었다. (1권, p. 235)


 트루낫은 겉보기와 다르게 아주 세력이 크고 가진 돈도 천문학적인 액수이다. 반면 알콜 중독자 협회는


 알콜 중독자 협회는 광고를 하지 않고 아무 상품도 판매하지 않으며 농구모자나 야구모자를 돌려서 기부 받은 꾸깃꾸깃한 지폐로 유지되는 단체이고, 모임이 열리는 각종 대관실이나 교회 지하실 훨씬 너머까지 조용하지만 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1권, p. 290)


 실상 알콜 중독자 협회는 트루낫에 전혀 상대가 안된다. 하지만 모임이 가진 힘은 알콜 중독자 협회가 훨씬 강하다. 트루낫은 그만한 세력을 가졌지만 '스팀'을 흡수했던 아이가 걸려 있던 홍역만으로도 쉽게 위기를 겪는다. 반면 알콜 중독자 협회에겐 위기 같은 것은 전혀 없다. 재정도 얼마없고 트루낫의 RV처럼 모임 자리를 구하기 위해 이리저리 떠돌아다녀야 할 형편이지만 모임 만큼은 굳건히 유지된다. 관계의 강도를 두고 보았을 때, 트루낫은 알콜 중독자 협회의 발 끝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이는 트루낫이 대등한 관계가 아니라 로즈를 중심으로 상하 관계란 것도 한 몫한다. 우리는 이야기가 진행됨에 따라 평등한 것처럼 보였던 트루낫이 실은 통제를 강조하는 위계적인 조직임을 점점 보게 된다. 이를 통해 우리는 이 '트루낫'과 닮은 게 하나 있었음을 떠올릴 수 있게 되는데 그건 바로 '샤이닝'의 '오버룩 호텔'이다.


 '샤이닝'에서 잭 토런스가 보는 오버룩 호텔의 유령 세계는 평등해 보인다. 저마다 대등하게 가면 무도회에 참석하고 있는 것 같다. 그는 그 세계에 매료되는데 하지만 그건 거짓이었다. 나중에 그 세계는 오로지 힘있는 하나를 주축으로 한 절대적 위계 질서의 세계라는 게 드러난다. 그 힘있는 하나란 바로 '오버룩 호텔'이다. 잭 토런스가 매료된 세계는 오버룩이 절대자로서 군림하고 있는 세계였다. 자기 본위적인 통제의 열망으로 가득한.


 '트루낫'도 마찬가지다. 특이하게도 이 '트루낫'은 통제의 열망이 강했던 '샤이닝'과 '애완동물 공동묘지'의 특성을 모두 가지고 있다. 그것도 오버룩과 루이스가 통제를 위해서 가했던 행동을 모두 취하고 있는 것이다.  오버룩은 대니를 자신의 통제에 두기 위해 잭 토런스라는 존재 자체를 마셔버렸다. 정확히 트루낫이 대니와 같은 존재들에게서 샤이닝 능력을 주는 '스팀'을 흡혈하는 그대로 말이다. 또한 그들은 루이스가 통제를 위해 고양이와 가족을 바꿔버렸듯이 사람을 자기들과 똑같이 '터닝'시켜 버린다.


 이런 특성까지 고려한다면 '트루낫'을 달리 해석할 수가 없다. '트루낫'은 '샤이닝'과 '애완동물 공동묘지'에 나왔던 나쁜 아버지의 재림이다. '스타워즈' 식으로 말한다면 다스 베이더의 귀환인 것이다.


 그러므로 주제의 구현은 '알콜 중독자 협회'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아니나 다를까 대니 역시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트라우마를 그 모임을 통해 치유하게 된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바닥이 있기 마련이지. (...) 자네도 누군가에게 자네 이야기를 해야만 하는 순간이 찾아올 거야.(1권, P 278)

 

 알콜 중독자 협회에서 대니는 이런 말을 들었다. 결국 우리는 마지막에 가서 대니가 오로지 자신만 간직했던 트라우마를 모임 사람들에게 고백하는 것을 보게 된다.


 어떤 면에서 '닥터 슬립'은 절대 타인에게 내비치지 않고 비밀을 혼자서 꼭꼭 숨겨두기만 하던 대니가 타인들에게 허심탄회하게 고백하게 되기까지의 여정이라고 할 수도 있다. 공교롭게도 '트루낫'의 형성과 해체는 이것과 궤적을 같이 하는데 이로써 '트루낫'을 오로지 자신의 힘으로 난관과 불안을 극복하려고 할 경우 생겨나는 통제 욕망의 은유로 볼 수 있는 여지를 남기기도 한다.


 그렇다는 것은 통제 욕망이 어느 한 순간 근절되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내내 당면해야 할 문제임을 뜻한다. 대니는 딕 할로런의 도움으로 통제 욕망의 부산물이라고 할만한 유령들을 단단히 봉인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곧 잭 토런스라는 나쁜 아버지와의 결별이기도 했다. 그는 아버지가 유산처럼 물려준 나쁜 아버지로 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소설의 말마따나 '착각'이었다. 이는 스티븐 킹의 자전적 경험으로도 증명된다. 앞서 소설 속 아버지의 모습을 스티븐 킹 내면의 반영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나쁜 아버지의 반복적인 출현은 스티븐 킹 역시 그런 권력과 통제의 유혹을 반복적으로 받았음을 뜻할 것이다.


 그렇게 잭 토런스는 한 순간에 사라지는 존재가 아니었다. 자기 본위의 욕망이 존재하는 곳이면 어디든 그림자처럼 출몰하는 것이다. 대니도 마찬가지다. 대니는 타인들에게 자신을 괴물처럼 여기게 만드는 샤이닝 능력을 억누르기 위해 술을 마셨고 그러다 급기야 평생 트라우마가 된 일을 저지르게 된다. 우연히 같이 술을 마신 여자의 돈을 슬쩍 한 것이다. 먼저 깨어나 돈을 훔쳐 나오는데 그녀의 아기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순간 대니는 샤이닝 능력으로 아기가 아기의 삼촌에게 학대받고 있으며 도와주지 않을 경우 죽게 되리라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외면했다. 결국 훗날 대니는 아기와 그녀 모두 죽었다는 것을 샤이닝으로 알게 된다. 이것이 대니의 트라우마였다. 도와줬어야 했는데 외면하는 바람에 죽게 만들었다는 죄책감. 그는 거기서 잭 토런스의 모습을 본 것이다. 디니라는 여자와 아기의 존재는 잭 토런스에게 살해 위협을 받던 엄마와 대니 모습 그대로였다. 딕 할로런은 그 때 그들을 도와주었다. 무려 플로리다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두려워하는 비행기를 타고 날아와서는 눈보라마저 무릎쓰고 도와주러 달려왔던 것이다. 그보다 훨씬 쉬운 상황이었음에도 그러나 대니는 도와주지 않았다. 어쩌면 대니의 고통은 실상 두려움일지 모른다. 어쩌면 자기도 아버지 잭 토런스가 될 지 모른다는 두려움.


 '닥터 슬립'은 결국 살면서 시시 때때로 찾아올 수 밖에 없는 유혹과 두려움을 어떻게 지혜롭게 극복할 것인가를 말하는 소설인지도 모른다. 그 방법은 딕 할로런, 알콜 중독자 협회가 잘 보여준 바대로 타인에게 있다. 하지만 '트루낫'처럼 내 본위대로 바꾸는 타인이어서는 안된다. 있는 그대로를 존중해주어야 한다. 나를 내려놓고 귀기울여야 한다. '닥터 슬립'으로서 대니가 했던 일이 바로 그것이지 않았던가. 그를 따스한 수건으로 닦아주고 가만히 손을 잡아주며 그의 기억을 내면으로 경청하는 것. 그럴 때 타인은 자신이 진정 바라는 도움을 얻을 수 있었다. 똑같이 대니도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었다. 양방향의 구원. 이런 관계로 맺어진 사제 지간은 일방적이지 않다. 부머랭처럼 도움을 주는만큼 도움을 받게 된다. 그것이 바로 딕 할로런이 말한 '세상은 돌고 도는 거지. 운명처럼.'의 진짜 의미이리라.


 결국 소설이 권유하는 대로 살면 언젠가 우리도 대니처럼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렇다. 그는 도와줄 수 있었다. 그것이 그의 서약이자 그가 태어난 이유였다. (2권, P. 406)


 이것이야말로 '잭 토런스'가 사라진 세상, '오버룩'이 사라진 세상이자 스티븐 킹이 진정 바라는 세상일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댓글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