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이야기꾼들
전건우 지음 / 네오픽션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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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건우 작가의 첫 장편소설이다.
 전건우 작가는 이전에 단편으로 만나본 적이 있다. 단편의 전건우에서 내가 받은 인상은 약간 코믹해 보이는 설정을 현실적인 디테일들로 채워 이야기에 몰입하게 만드는 작가라는 모습이었다. 기발해 보이는 설정은 아무런 위화감없이 일상의 현실로 받아들이도록 만드는데 탁월한 능력이 있었다. 그렇게 뇌리에 새겨진 작가였기에 아무래도 그의 첫 장편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만나본 '밤의 이야기꾼들'은 정확한 의미에서 장편은 아니었다. 여섯 개의 단편을 '밤의 이야기꾼' 모임이라는 새끼줄로 굴비 엮듯 한 쾌로 묶어낸 작품이었다. 혹시, 아이작 아시모프의 '흑거미 클럽'이란 소설을 만나본 적 있는지? 그 소설과 비슷한 형식이다. 그 '흑거미 클럽'에서 주인에게 초대된 손님들이 저마다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듯이 '밤의 이야기꾼들'도 '밤의 이야기꾼들'을 찾아온 손님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이런 형식은 아이작 아시모프만은 아니었고 그와 더불어 세계 3대 SF 마스터로 불리우는 '아서 G 클라크'도 한 바 있다. 그것이 바로  '하얀 사슴' 연작인데 '하얀 사슴'이라는 선술집에서 누군가 풀어놓는 이야기를 두루 엮은 작품이었다. 그만큼이나 이런 형식은 장르 소설 팬에게 친숙하다는 것이다. 어쩌면 정말로 전건우 작가는 아이작 아시모프의 '흑거미 클럽'에서 영감을 얻었을 지도 모른다. '하얀 사슴'은 안 알려졌지만 '흑거미 클럽'은 우리나라에도 꽤나 알려졌기 때문이다.

 여하튼, '밤의 이야기꾼들'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된다.
 '그날 밤의 폭우로 60명이 죽고 32명이 실종되었다.'

 첫 문장부터 시선을 확 잡아챈다. 프롤로그처럼 제시되는 이 이야기는 예기치 못했던 폭우로 부모를 잃어버린 한 소년의 이야기다. 그 소년은 폭우 속에서 말없이 걷고 있는 한 무리의 사람들을 보게 되는데 거기서부터 이야기는 갑작스럽게 '밤의 이야기꾼'들로 방향을 튼다. 소년이 만나게 된 그 사람들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쏭달쏭한 상태에서 그보다 더 기묘한 주인공이 일하는 괴담 전문 출판사 '풍림'과 서울 중심가에 존재하는 '목련 흉가'에서 1년에 한 번 열린다는 괴담 모임인 '밤의 이야기꾼들' 모임이 소개된다. 어디까지고 실제이고 어디까지가 환상인지 그 환상과 현실의 경계가 차츰 모호해지면서 정말 이 작품이 들려주려고 하는 여섯 개의 괴담이 한 밤에 문득 들려오는 아련한 메아리처럼 도래하게 된다.

'과부촌','도플갱어','홈, 스위트 홈','웃는 여자','눈의 여왕','그 날 밤의 폭우'가 바로 그것이다.

'과부촌'은 현재 바람을 피고 있는 남편이 뜻하지 않게 아내를 통해 장인의 미스터리한 실종의 전모를 알게 되면서 불현듯 당사자라면 도저히 만나고 싶지 않았던 세상의 끔찍한 진실과 조우한다는 이야기다. '과부촌'은 그 제목에서 연상되듯이 가부장적인 남성 중심 사회에서 억압 받는 여성성을 그리고 있는데 남성에 대한 통렬한 보복(남성에게 있어선 오싹할 보복이겠지만)을 그리고 있다. 그런데 이야기 자체는 다른 작품의 설정을 빌려온 듯 하다.


 예전에 KBS에서 방영한 '환상특급'이라는 외화 시리즈가 있었다. 원래는 '나이트 메어'로 유명한 호러 영화 감독인 웨스 크레이븐이 80년대에 미국에서 제작한 'NEW TWILIGHT ZONE'이란 드라마 시리즈를 수입해 방영한 것으로 환상적이거나 괴담 같은 에피소드들을 한 회당 두 개나 세 개씩 묶어 방송했었다. 그 중 한 에피소드가 이 '과부촌'과 상당히 유사한 설정을 가지고 있다. 전체적인 이야기라기 보다는 공포를 가져오는 존재에 관한 것인데 그 에피소드는 시즌 1의 38번째 에피소드인 'A Matter of Minutes'이다. 원작자가 내가 가장 좋아하는 SF 작가인 할란 엘리슨(그는 '뉴환상특급'의 첫 에피소드였던 'Shatterday'의 원작자이기도 하다. '다이하드'로 뜨기 전의 풋풋한 용모의 브루스 윌릿스가 주연을 맡아 1인 2역을 연기했다.)이라 더욱 기억에 남아있는 이 에피소드는 한 부부가 우연히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 알게 된다는 줄거리의 이야기다.

 누구나 한 번쯤 도대체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 궁금히 여겨 본 적이 있을 것이다. 할란 엘리슨은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는 수많은 블루 칼라 노동자의 헌신으로 그 궁금히 여겼던 시간의 비밀을 재치있게 풀어간다. 그러니까 현재에서 미래로 나아갈 때 우리는 모르지만 시간은 마치 열차와 같아서 지금 있는 칸으로 비어 있는 앞칸으로 이동하는 것이며 그 앞칸은 백지처럼 비어있는데 우리가 그 공간으로 이동했다는 걸 모르는 것은 블루 칼라의 노동자들이 현재의 공간 그대로 미래의 공간으로 옮겨놓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이렇게 말이다.


 이들은 정말 공간의 거주자들이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게 빈틈없이 완벽하게 과거의 공간을 재현한다. 시간은 이렇게 흐르는 것이며 우리가 사실은 공간의 이동인데도 전혀 모르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보이지 않는 블루 칼라 노동자들의 헌신적인 노동 덕분인 것이다. 진실을 보았지만 그게 아직도 이해가 안 되는 부부에게 현장 감독자는 이런 말을 한다. "왜 그런 경험 있지 않습니까? 잃어버렸던 물건이 어느 순간 찾아보니 원래 그 자리에 있었던 경우 말이죠. 혹은 분명히 거기에 둔 것 같은데 갑자기 어디로 갔는지 안 보이는 경우도 말이죠.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바로 우리 직원들의 실수 때문이죠." 처음엔 시청자들도 실소를 머금고 보지만 바로 이 말 때문에 '아, 정말 저런 식으로 시간이 흐르는 게 아닐까?'하고 생각하게 된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도 그와 비슷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이 에피소드는 마르크스 테제를 SF적으로 형상화 한 것이다. 다름아닌 '역사를 만들어 가는 주체가 누구인가? 그것은 바로 노동자이다!'를 보여주는 에피소드인 것이다. 역사를 만들고 변혁을 뜻하는 미래의 창조자가 바로 노동자라는 것을 이 에피소드만큼 선명하게 보여준 에피소드도 또 없다. 그만큼 빼어난 에피소드인데 '과부촌'이 이 설정을 슬쩍 차용하고 있는 것이다. 좀 전에 소개한 현장 감독관의 말까지 이 소설엔 나온다. 물론 사용처는 다르지만.

 아무튼 그랬기에 조금은 씁쓸함도 있었던 '과부촌'인데, 그래도 할란 엘리슨의 단편을 모처럼 상기시켜주었기에 그것만으로도 난 만족한다.

 다음의 '도플갱어'는 도플갱어라는 소재를 가지고 성형으로  비슷한 외모가 기성복처럼 양산화되고 있는 오늘의 현실을 재치있게 풀어내고 있고 다음의 '홈, 스위트 홈'은 오늘날 한국에서 가장 집요한 욕망의 대상인 '집'을 오히려 공포의 원인으로 삼고 있다. 사실 지금도 증가하고 있는 '하우스 푸어'들에게 집은 '홈, 스위트 홈'이라기 보다는 공포의 대상이 아닐까? 그런 사회적 현실을 공포로 은근히 풀어내는 작품이다.

 '웃는 여자'는 한 때 가장 무서운 괴담의 주인공이었던 '빨간 마스크'를 전건우 작가의 상상력으로 풀어낸 작품이고 '눈의 여왕'은  '설녀'(이 역시 '빨간 마스크'와 더불어 원래는 일본 괴담의 존재로 알고 있다. 다만 '빨간 마스크'가 현재라면 '설녀'는 고전적 괴담이다.) 소재로 호러에 집중한 작품이다. 그리고 마지막 '그날 밤의 폭우'에서 프롤로그에서 소년이 보았던 존재들의 정체가 비로소 밝혀진다.

 '밤의 이야기꾼들'은 이런 이야기였다. 설정을 다른 데서 가져온 것도 있고 원래 있던 것을 작가만의 상상력으로 복원한 것도 있었다. 이야기의 의미를 사회적으로 확장할 수 있는 것도 있었다. 일장 일단이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하나같이 을씨년스런 이야기였다. 다만 '눈의 여왕'은 좀 전개가 너무 전형적이지 않나 하는 아쉬움이 있지만.

 전반적으로는 만족한다. 단편집의 리뷰는 힘들다. 전체적으로 평가하자면 개별의 이야기가 가진 매력을 이야기할 수 없고 그 개별적인 매력을 이야기하자면 분량이 무한정 길어져 쓰는 이도, 읽는 이도 지치게 만들기 때문이다. 리뷰의 고수라면 이런 때 적당한 타협의 지점을 찾아낼 수 있겠지만 지금의 나로서는 내공이 부족하여 갈무리가 잘 안된다. 미진한 점이 많더라도 이대로 끝낼 수밖에. 현재 전건우는 '소용돌이'라는 장편 소설을 연재 중이라고 한다. 그게 한 권의 책으로 나올 때쯤이면 내 리뷰의 내공도 좀 높아져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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