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복과 반전의 순간 Vol.1 - 강헌이 주목한 음악사의 역사적 장면들 전복과 반전의 순간 1
강헌 지음 / 돌베개 / 2015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음악을 오래도록 많이 들었다. 자연히 신뢰하는 평론가가 있게 마련인데 강헌은 그 중에서도 가장 상위에 있다. '전복과 반전의 순간'은 강헌의 첫 책이다. 놀랐다. 얼마나 오래도록 활동했으며 유명세도 제법 있는 편인데 이제야 첫 책이라니!(가장 첫 페이지 마지막에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호는 의박이며 자는 산만이어서 나이 50이 넘도록 책 한 권 내지 못한다. 책 표지에 들어가는 프로필을 쓰게 되어 만감이 교차한다.) 또 하나 딱따구리가 뇌리를 쪼았던 순간은 강헌이 팟캐스트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것도 무려 2013년부터! 헉! 나는 그 사실을 이 책을 읽고서야 알았다. '진작 팟캐스트와 친하게 지내볼 것을!'하는 후회를 더운 여름 밤의 맥주처럼 벌컥벌컥 들이킨다. 그래도 다행이다. 이 책이 있어서. '전복과 반전의 순간'은 2013년부터 시작된 팟캐스트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라 한다. 물론 녹취록 그대로 옮긴 것은 아니고 한 권의 책이라는 완결된 형태로 만들기 위해 내용을 대폭 보완했다고 한다. 나처럼 뒤늦게 팟캐스트(나는 끝까지 팟캐스트가 방송법 적용을 받는 것을 반대하기 위해 '방송'이란 용어를 쓰지 않으련다.)의 존재를 알게 된 이를 위해 커다란 선물이 아닐 수 없다.(굳이 '커다란이란 형용사를 쓴 것은 이 책을 통해 정말로 많은 것들을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 20세기 이후 인간의 일상에 음악이 개입하지 않는 순간은 없었다.'고 믿는 강헌은 비록 음악이 인간이 의식과 무의식에 깊은 흔적을 남기긴 하였지만 '음악만큼 신비화의 추앙을 받은 예술도 없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그는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악 또한 시행착오의 존재인 인간이 만들어낸 수많은 역사적 생산물 중의 하나일 뿐이며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조건에 의해 생성되는 예술적 욕망의 결과물일 뿐이다.' 여기서 나는 어떤 문장을 특별히 볼드체로 했는데 이것이 바로 음악을 투시하는 데 있어 이 책이 취하는 방법론의 가장 기본이 되는 소실점이기 때문이다. 강헌은 음악을 사회적 생산물로 바라본다. 아무리 뛰어난 음악이라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전적으로 천재의 영감이나 내재된 가치의 탁월함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특정한 사회적 환경의 반향도 그 못지않게 중요한 요소라는 것이다. 마치 마르크스의 '생산양식'과도 같이 음악도 일정한 형식의 음악을 탄생시킨 사회의 정치적, 경제적 조건들이 중요하기에 그는 역사를 훑는다. 표지에 나오는 'MUSIC IN HISTORY, HISTORY IN MUSIC'이 나오는 이유다.



 그런 기나긴 음악사 속에서  '전복과 반전의 순간'은 특별히 네 개의 역사적 순간을 담는다. 제목 그대로 과거를 전복하고 음악의 진화를 가져온 대표적인 순간이다. 하나씩 간단히 열거해 본다면 이러하다. 먼저 메이저리티의 전유물이기만 했던 음악을 마이너리티의 손으로 쥐게 만든, 진정한 의미의 전복적인 순간이라 할 수 있는 재즈와 로큰롤의 탄생, 그리고 우리나라의 60년대, 독재의 시퍼런 칼날 아래서 숨죽인 민중들에게 자유와 저항의 바람을 불어넣었던 통기타 혁명과 그룹 사운드, 여기에다 지금은 가장 대표적인 클래식으로 추앙받으나 당대에는 왕정 중심의 클래식에 반발해 자신의 음악에서 공화주의적 정신을 고취한, 한 마디로 안티클래식이었던 모차르트와 베토벤(특히 이 부분에서 살리에르에 대한 평가는 그야말로 '반전이다. 강헌은 지금 우리의 살리에르에 대한 평가가 얼마나 오해에 불과한 지를 여기서 조목조목 밝히고 있는데 거기에 맞춰 모차르트와 베토벤 또한 재평가 된다.)에다 마지막으로 군부시절만큼이나 자유와 희망이 억압되었던 일본 제국주의 식민지 시절, 어떻게 일본의 엔카가 한국의 트로트가 되어 대중음악사를 비로소 열어젖히게 되었는지 그 '반전'의 순간을 윤심덕의 '사의 찬미'와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을 중심으로 담는다.


 그런데도 페이지는 357이나 되고 글자 폰트도 겨우 9(인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아무튼 보통의 책 폰트보다는 작다)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 겨우 네 개의 장면을 담는다지만 그와 관련해 얼마나 많은 말을 하고 있는 지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과연 이 책은 시쳇말로 '정보의 바다'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재즈부터 트로트까지 다양한 음악 형식에 관련된 것뿐만 아니라 그것을 태어나게 만든 미국과 유럽 그리고 우리나라의 6, 70년대와 일제 시대 사회상에 대한 것까지 페이지마자 정보들이 좁쌀처럼 빼곡하게 들어차 있다. 책도 음식과 같아서 알찬 정보들을 많이 섭취하다 보면 책 한 권을 다 읽었을 때 포만감을 느끼는 데 이 책이 정말 그렇다. 어쩌면 너무 많이 먹어서 한동안 책을 내려놓고 숨을 골라야 할 지도 모를 지경이다. 무엇보다 재즈와 로큰롤의 입문자라면 이 책을 꼭 권하고 싶다.


 이 책엔 빛나는 순간들이 많은데, '역시 강헌이구나!' 느끼게 되는 순간들로 '점원들'이나 '체이싱 아미' 같은 영화로 유명한 감독 케빈 스미스가 톰 크루즈를 인터뷰할 때 호들갑을 떨면서 톰 크루즈 영화엔 톰 크루즈가 빛나는 '톰 크루즈 순간'이 있다고 드립한 적이 있는데 그것을 따와 나도 '강헌 순간'이라 부르련다. 그런 '강헌 순간'에서 가장 눈부신 장면은 역시 김민기의 '아침 이슬'의 곡 전개를 설명하는 부분이다. <아침이슬>에 대한 설명은 138페이지에서 143페이지까지 6페이지에 걸쳐 전개되는데 그 중 절반이 '아침이슬'의 음악적 구조에 대한 설명에 할애되어 있다. 분량만 봐도 얼마나 곡을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는지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너무 길어서 인용하지 못하는 것이 유감인데 간단히 정리해 본다면 원래 대중음악은 형식적으로 A-B-A로 구성된다고 한다. 여기서 A와 B는 테마로 아름다운 선율로 청자를 이상향과도 같은 다른 세계로 인도하는 A테마가 있고 그것에 이어 열창을 통해 더욱 드라마틱하게 발전시키는 B테마가 있다는 것이다. 강헌은 이렇게 설명하지 않았지만 내 생각에 B테마는 A테마가 그리는 세상에 들어가지 못하는 지금 내 삶의 불안, 고통 같은 것이 반영된 게 아닐까 한다. 결코 열리지 않을 유리창으로 이상향을 바라본다면 내 삶의 누추함이 더 강조될 터이니까 말이다. 강헌은 가요가 대중적으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마지막에 가서 다시 A테마로 돌아와야만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A-B-A인 것이다. 거기엔 현실에서는 가 닿을 수 없는 세계를 노래로나마 닿고 싶어하는 대중의 마음이 투영된 한 편, 현실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현실을 변화시켜 A세상을 추구하겠다는 대중의 의지가 녹아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아침이슬'은 이 구조를 배반한다. '나 이제 가노라~' 후의 부분은 A테마로 돌아가지 않고 전혀 다른 C테마로 청자를 데려가 버리는 것이다. 여기서 당시의 기준으로 봤을 때 이 노래의 상업적 가치는 끝난 것이라 강헌은 말했다. 그것을 증명하듯 이 노래는 7080 세대의 가장 대표적인 노래이나 당시엔 3천장 밖에는 팔리지 않았다고 한다. 음악을 사회적 환경의 반향으로 보는 강헌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노래가 많은 이들에게 불려줬던 사회적 맥락을 읽어낸다. 바로 그것이 '대학생'이 주축이 되었던 청년 문화가 가진 한계의 반영이라는 것을 말이다.


 현실과 끝없이 타협해야 하는 선민 집단의 일원이면서도 기존의 기득권 세력의 비민주적인 전횡에 대해서는 비판적이고 대안적인 길을 새롭게 모색해야 했던 이 혁명적 낭만주의의 자식들에게, 이 대책없는 C테마로의 도약은 바로 낭만주의 그 자체였다. 혁명은 낭만으로 되는 게 아니다. 다시 A테마로 돌아와서 대중성을 쟁취하고 권력을 쟁취해야만 한다. 그런데 이 노래는 다시 현실로 돌아오지 않는다. 가장 낭만적인 초원의 지평으로 날아가 버린다. 이것이 1970년대 청년문화의 혁명적 낭만주의 감수성과 그 구조가 딱 들어맞았다.(P. 142)


 그렇다고 이게 딱히 그 세대에 대한 비판은 아니다. 당시 혁명은 낭만화 할 수밖에 없었다. 아직 혁명이 정말 무엇이어야 하는 지에 대해서는 치열한 고민이 없었다. 그저 자신들을 억압하고 폐를 조이는 군부독재라는 장막만 걷혀지기를 바랐던 것이다. 다른 나라에서 다 누리는 표현의 자유를 조금도 누리지 못한 채, 바보로 살아야 하는 시대를 끝장내고 싶었을 뿐이었다. 낭만화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물론 그 시대의 한계가 그대로 정체되어 또 다시 지금 이 시대를 과거로 회귀하게 만드는데 주역을 담당하도록 한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어쨌든, 노래 하나에 대한 치밀한 분석으로 이렇게까지 담아내는 것은 내게 무엇보다도 '강헌의 순간'이었다. '전복과 반전의 순간'은 이런 이야기로 가득찬 책이다. '아침 이슬'에 대한 이야기를 길게 인용한 것도 이 책이 어떤 식으로 말하고 있는지 보이기 위함이었다. 살리에르에 대한 부분도 그렇고, 엔카와 트로트의 역사나 음악에 대한 구조적 분석도 그렇고, 인용하고 싶은 부분이 참 많은데 리뷰가 너무 길어질까봐 하지 못하는 게 유감이다. 한대수와 신중현(신중현은 박정희에게 가장 많은 탄압을 받은 뮤지션이다. 이유는 너무도 약소했다. 박정희가 일제시대 총독부가 행했던 선동 가요를 본받아 정권 선전을 위해 자신이 직접 노래를 만들어 음반을 제작하려고 신중현에게 의뢰했는데 신중현이 가타부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신중현은 그 뒤 '대마초 사범 연예인 1호'가 되어 박정희가 죽을 때까지 탄압을 받는데 한 마디로 '괘씸죄'였다. 원래 우리나라는 그 때까지 대마초 흡연이 금지되지 않았다. 박정희의 '복수혈전'으로 비로소 범죄가 된 것이다.) 그리고 박정희 시절에 이루어졌던 노래 검열 부분도 빼놓을 수 없다. 세상에나 김세환의 '길가에 앉아서'가 금지곡이었고 그 이유가 '근로 의욕 저하~'라니. 과연 창조 경제의 전통은 거기서 시작되었나 보다. 검열의 이유들이 참 창조적이다. 하지만 그것도 화수분은 아니었던지 '아침이슬'은 금지된 이유조차 없이 금지되었다. 한 마디로 묻지마 금지곡.


 정말 많은 말을 들을 수 있는데 이처럼 흥미로운 부분이 많아 전혀 지루하지 않다. 음악과 사회의 연관성을 이만큼 뛰어나게 보여주는 책이 달리 없는 것 같지만 설령 그것에 관심이 없다 하더라도 음악에 대한 이야기, 문화에 대한 이야기 만으로도 제 값어치를 충분히 하는 책이다. 한 마디로 강추할 수 밖에 없는 책. 나는 지금 강헌의 팟캐스트 들으러 간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1세기컴맹 2015-08-22 15: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디테일한 서평 참 잘읽었습니다

오드득 2015-08-24 12:24   좋아요 0 | URL
21세기 컴맹님 말씀 정말 감사합니다^^

yamoo 2015-08-23 2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이 글만으로도 책의 가치를 알겠습니다. 얼른 구매하도록 하지요~
음악 평론에 관한 책은 좋은 책을 만나기 힘든데, 감사합니다!ㅎ

오드득 2015-08-24 12:25   좋아요 0 | URL
정말 음악 평론 책은 만족할만한 것을 찾기 힘든데 이 책은 정말 만족스럽더군요^^ 야무님 마음에도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말씀도 정말 감사합니다^^

이진 2015-08-30 15: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음악 참 좋아하는데요 ㅎㅎ 이 책 한 번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근데 정말 재밌어 보이는데요! 살리에르 부분 읽어보고 싶네요.
후 ㅠㅠ 헤르메스님 저 지금 페이퍼 쓰다가 다 날아가서 기분도 날리고,
에잇 오랜만에 컴백하려고 했는데 그냥 안해야 겠어요!!! ㅠㅠㅠ 엉엉
ㅋㅋㅋㅋ 헤르메스님도 잘 지내시죠?

오드득 2015-08-31 22:34   좋아요 0 | URL
와우! 소이진님 정말 반가워요^^ 이렇게 소이진님과 댓글 놀이 할 수 있다니 정말 꿈만 같네요. 하하
살리에르 부분이 관심있다면 더욱 추천합니다. 그간 받은 오해를 생각하니 살리에르가 참 불쌍하더군요.
저도 글 쓰다 많이 날려봐서 그 기분 정말 잘 아는데 그런 땐 그저 쓰는 것 그만두고 딴 일 하는 것만큼 좋은 게 없더군요. 그리고 컴백 꼭 해 주세요~ 부디!!
 
버드 박스
조시 맬러먼 지음, 이경아 옮김 / 검은숲 / 2015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OPEN YOUR EYES!'

 공포 영화에서 눈은 생존을 위한 필수품이다. 생명마저 빼았을 수 있는 위험이 어디에 도사리고 있을 지 모르기에 살려면 더욱 눈을 크게 뜨고 주위를 샅샅이 살피는 것이 중요하다. 대부분 그러지 못한 자들이 희생되었다. 숨어있는 살인마를 미처 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장면이 나올 때마다 관객들은 자주 이렇게 소리치지 않았던가! "제발 뒤좀 돌아봐!"


 공포는 어둠에 있고 눈은 그 어둠을 몰아낼 빛이었다. 이건 허다한 공포 영화에서 굳어진 RULE이었다. 그런데 신예 작가 조시 멜러먼의 데뷔작 '버드 박스'에선 이 룰이 역전된다. 오히려 공포는 눈에서 오고 어둠만이 유일한 생명줄이 되는 것이다. 



 이야기는 이러하다. 그것은 러시아에서 먼저 시작되었다. 잇달아 사람들이 주위의 사람들을 살해하고 자살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그들은 마치 자신을 비롯하여 주위의 모든 생명을 멸절시켜 버리겠다는 듯이 행동하는데 그 이유가 나중에 밝혀진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어떤 존재를 보고나서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 정체를 모르는 것은 그 존재와 눈이 마주치면 바로 광기에 사로잡혀 남들과 자신을 죽여버리기 때문이다. 즉 자신도 살고 주위의 사람도 살리려면 무조건 그 존재를 보지 않는 수밖에 없다. 하여 존재의 정체는 알 수 없는 것이다. 이제 그것은 미국에까지 내려온다. 소설의 주인공은 맬로리. 그녀는 어느새 미국이 정체불명의 존재에게 삼켜지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사람들이 잇달아 참혹하게 죽고 경찰도 군인도 그 어떤 것도 그것을 막지 못한다. 맬로리는 언니와 함께 살다가 윗층에서 언니가 자살한 것을 본 후 도움을 청하기 위해 집을 떠나기로 한다. 그녀의 뱃속에 아이가 잉태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야기는 맬로리의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전개된다. 현재는 이미 아이는 태어나 다섯 살이 된 시점이다. 


 아이들은 태어나서 바깥 세상을 한 번도 못 봤다. 창문을 내다본 적도 없다. 맬로리조차 창으로 바깥 풍경을 못 본 지 4년이 넘었다.(P. 11)


 그런데 그녀는 지금 4년 동안 살던 집을 떠나려 하고 있다. 그 집이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건 사실 벌써부터 알고 있었다. 하지만 4년을 기다려야 했다. 아이들이 자라서 충분히 자기 역할을 할 수 있을 때까지 말이다. 그녀에겐 아이들이 필요했다. 왜냐하면 살기 위해선 절대 눈을 떠서는 안되는데 안전이 보장되는 곳까지 무사히 탈출하려면 눈을 뜨지 않고서는 무척 힘들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강을 거슬러 올라가야 하기에 더욱 그렇다. 눈을 감고는 절대 할 수 없는 여정. 그래서 그녀는 다른 감각이 필요했다. 눈처럼 방향과 외부의 위험을 알려줄만한 것을. 그렇다. 고맙게도 신은 인간에게 두 개의 눈을 허락한 것처럼 두 개의 귀를 허락했다. 청각이 그녀가 의지할 유일한 대안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4년을 기다렸던 것이다. 아이들의 청각을 훈련시켜 잠수함의 소나 같은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그리고 드디어 떠날 날이 이제 다가왔다. 그녀는 안대로 자신과 두 아이의 눈을 모두 가리고 4년만에 처음으로 집을 나선다. 어둠 속에서 '그것'의 존재를 희미하게 감지하면서...


 동시에 4년 전의 과거가 진행된다. 도움을 찾아 떠났던 그녀가 간신히 찾은 보호처. 거기엔 모두 다섯 명의 남녀가 있었다. 바깥에서 볼 수 있는 모든 곳을 담요로 가로막은 그 곳에서 그들은 생존을 위해 서로 협력하면서 지내고 있었다. 미드 '워킹데드'에 나오는 공동체랑 비슷하다고 보면 될 것 같다. 거기서 생존을 위해 토론으로 좀비를 분석하고 대처 방법을 논의했듯이 이 공동체도 그렇게 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식량은 떨어지고 물품도 부족해지기에 아무래도 그 안에 있을 수만은 없고 바깥으로 나가야 하는 까닭이다. 즉 불안은 여전하다. 외부만이 아니라 내부 또한 그러하다. 아무리 협력이 잘 된다고 하더라도 생존이 절박한 상황인 이상 내가 살아야겠다는 마음이 들지 않을 리 없고 그런 이해관계가 얽히게 되는 이상 의견 대립이 일어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서로에 대한 의혹이 쌓여가고 점차 불신의 벽으로 굳어진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는 때로 목격하게 된다. 바깥의 적이 아무리 무섭다고 하더라도 내부의 지인보다 덜 공포스럽다는 것을. 

 맬로리가 속한 공동체도 그렇게 된다. 그녀가 우연히 발견한 누군가의 노트에서 읽었던 이 말과도 같이.


 인간이 두려워하는 크리처는 바로 인간 자신이다.(p. 275)


 그러고 보면 지금 맬로리가 아이들과 함께 탈출을 감행하는 현재나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끼리 함께 있었던 과거나 그 상황은 본질적으로 같다. 모두 갇혀 있는 것이다.

 물론 현재의 맬로리는 집을 탈출하여 바깥으로 나와 있으니 다르지 않은가 하고 반문할 수 있다. 하지만 그녀는 현재 시야를 모조리 안대로 가리고 있다. 그녀는 사방 어느 곳도 볼 수 없다. 그것은 과거의 공동체가 집의 창문을 모두 담요로 가려 바깥을 하나도 볼 수 없는 것과 똑같은 상황이다. 그러니 그녀도 과거의 공동체랑 똑같이 갇혀있다고 봐야 한다. 아니나 다를까 맬로리는 그렇게 철저히 준비했는 데도 여전히 불안하기만 하다. 현재의 이야기는 대부분 맬로리의 내면으로만 채워지는데 거기서 우리는 외부의 조그만 자극에도 금방 두려움에 빠지고 마는 그녀를 보게 된다. 과거 공동체가 그랬던 것과 똑같은 모습을 말이다. 그들도 생존을 위해 철저히 준비했었다. 하지만 아무리 철저하게 대비해도 불안은 늘상 존재했다. 마치 그것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이제 우리는 왜 이 소설의 제목이 '버드 박스'인지 알 수 있게 되었다. 그 직접적인 표현은 바로 다음과 같은 맬로리의 독백으로 제시된다.


 그녀는 지금 이 집이 커다란 상자처럼 느껴졌다. 이 상자에서 나가고 싶었다. 톰과 줄스는 바깥에 있지만 여전히 이 상자에 있는 셈이다. 이 세상은 사방이 폐쇄되어 있다. 세상은 저 밖에 걸어놓은 새 상자 같은 종이 상자에 갇혀 있다. 맬로리는 톰이 그 뚜껑을 열 방법을 찾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안다. 하지만 그녀는 이 뚜껑을 열면 그 위에 두 번째 뚜겅이 있고 그 뚜껑을 열면 세 번째 뚜껑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다.

 '상자에 갇힌 거야. 영원히.' (p. 279)


 소설의 주제는 이 독백에 그대로 나타난다. 비록 독백은 4년 전의 것이지만 그 때의 예감 그대로 우리는 여전히 그녀가 상자에 갇혀 있음을 본다. 맬로리는 왜 이렇게 되어 버린 것일까? 아이들을 훌륭히 준비시킨 지금도 그녀는 왜 여전히 불안에 떨고 차라리 죽기를 바라는 것일까?


 여기서 왜 조시 맬러먼이 소설의 구성을 하필이면 현재와 과거로 나누어 병행시키는 지 알 수 있을 듯 하다. 바로 '갇힘'은 장소의 문제가 아니라 내면의 문제라는 것 때문임을 말이다. 즉 우리를 정말로 가두고 있는 것은 바로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불안이라는 것을 효과적으로 보여주기 위해서인 것이다.


 이것은 현재 맬로리의 모습에서 더욱 드러난다. 그녀가 불안에 빠지는 진짜 이유는 바깥의 '그것' 때문이 아니다. 실은 자신이 훈련시켜온 아이들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즉 그녀는 여전히 타인을 신뢰하지 못하기에 불안의 감옥에 갇혀 있는 것이다. 타인을 믿었다면, 자신처럼 전적으로 신뢰했다면 그녀의 여정은 좀 더 편안했을 것이며 애초에 이런 여정을 떠날 필요조차 없었을 것이다. 과거의 공동체가 무너져 내렸던 것도 바로 불신 때문이었으니까.


 이렇게 조지 맬러먼의 '버드 박스'는 역발상의 아이디어가 빚어낸 그 자체로 좋은 공포 소설이지만 작가는 독자에게 단순히 호러만 주려하지 않는다. 현대인에게 그림자처럼 달라붙어서는 늘 갇힌 느낌을 주는 불안을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덜어낼 수 있는지 그 방법에 대해서도 넌지시 알려주는 것이다. 그것은 물론 바로 타인을 신뢰하는 것이다. 현재의 맬로리 내면과 과거의 공동체는 모두 그것을 위한 반면교사라 할 수 있다.


 결국 우리를 가두고 있는 새장에서 어떻게 탈출할 것인가에 대한 해답을 작가 스스로 내놓는 셈이다. 탈출엔 무엇보다도 눈이 필요하다. 하지만 작가는 신체의 눈이 아니라 마음의 눈을 뜨는 게 먼저라고 말한다. 내 안전만 갈구하느라 타인을 위협으로만 보는 신체의 눈 보다는 서로가 나와 다르지 않다는 생각에 이해와 배려의 마음의 눈을 떠야 한다고 말이다. 그런데 그것은 어디까지나 타인에게서 얻는 게 아니라 자신이 먼저 내어줄 때 가능하다.  즉 자신의 마음을 먼저 상대방에게 열어야만 하는 진정으로 마음의 눈을 뜰 수 있다. 말 그대로 'OPEN YOUR HEART!'인 것이다.


 소설의 여정은 그런 여정이다. 'OPEN YOUR EYES'에서 'OPEN YOUR HEART'로 나아가는.

 그 여정 속에서 작가 맬러먼은 자신을 가두고 있는 빗장은 바깥이 아니라 바로 자기 내부에 있다고 말한다. 정말 갇히기 싫다면 먼저 자신부터 열어야 한다고 말이다. '버드 박스'는 그것을 위한 일종의 통과 의례라 할 수 있다. 열지 않았을 경우 얼마나 무시무시한 불안과 공포를 겪게 되는지 제대로 경험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스스로 'OPEN HEART'로 나아갈 필요성을 더욱 느낄 수 있도록.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5-08-17 00: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8-18 01: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탐정이 아닌 두 남자의 밤
최혁곤 지음 / 시공사 / 2015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탐정이 아닌 두 남자의 밤>은 <B컷>, <B파일>로 한국 스릴러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 시킨 최혁곤의 신작이다. 하지만 스릴러는 아니고 본격 미스터리에 가깝다. 제목 그대로 탐정이 아닌 전직 기자인 박희윤과 전직 경찰인 갈호태가 주인공이 되어 미스터리를 풀어가는데 서막과 종막 그리고 그 사이의 5막을 합하여 모두 일곱 개의 에피소드가 여기엔 담겨있다. 그렇다고 모두 별개의 사건으로만 이뤄지지는 않고 서막에 등장하여 주인공 박희윤에게 크나큰 상처를 입히는 연쇄살인마 '바리캉맨'을 거대한 줄기로 하여 일곱 개의 에피소드를 묶고 있는 구성이다.


(표지가 참 마음에 든다.)

 

 간단히 이야기를 소개해 본다면 서막에서 박희윤은 현직 기자인데 어느날 갑자기 헤어진 옛 애인이자 인기 텔런트인 채연수에게서 자신을 구해달라는 전화를 받는다. 그리고 잠시 후, 그녀를 납치한 것으로 보이는 한 남성에게서 채연수를 구하고 싶으면 2시까지 일산 호수 공원 앞 MBC로 나오라는 연락을 받는다. 사태가 심상치 않다고 생각한 박희윤은 그녀를 구하기 위해 원래 형사였지만 심문실에서 용의자인 여성과 눈이 맞아 '우쭈쭈'(이게 무엇인지에 대한 상상은 읽는 여러분들에게 맡긴다.)를 벌이다 발각되어 파면당한 뒤 이제는 세종문화회관 뒷골목에서 '이기적인 갈사장'이란 카페를 운영하고 있는 갈호태에게 도움을 청한다. 결국 둘은 채연수를 찾지만 그녀는 이미 머리가 잘린 싸늘한 주검이 된 뒤였고 범인이 이리저리 둘을 뺑뺑이 돌린 덕분에 살인 용의자까지 되어 버린다. 박희윤과 갈호태는 그제야 범인의 함정에 빠졌다는 것을 깨닫고 그 범인이 다름아닌 지금 한창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는 '바리캉맨'이라는 것을 알게된다. 그리고 그 때 박희윤은 왜 범인이 자신들을 채연수를 빌미로 이리저리 끌고 다녔는지 그 진짜 이유를 비로소 알아차리게 되는데...


 서막에서 박희윤은 범인에게 거하게 뒤통수를 맞고 그 대가로 기자직에서 쫓겨난다. 이제 그는 전직 기자가 된 것이다. 백수가 된 박희윤은 신문사가 아니라 갈호태가 운영하는 카페로 매일 같이 출근하여 손님이 뜸한 그 곳에서 갈호태 그리고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구양과 더불어 시간을 죽여가며 자신이 구하지 못했던, 그리고 아직 사랑하는 감정이 남아있는 채연수에 대한 회한을 곰곰이 되씹고 있다. 그러다 자신이 사수가 되어 기자로 훈련시켰던 후배 여기자 홍예리가 조언을 구하는 사건에 뛰어든다. 그렇게 1막, '신들이 속삭이는 밤'이 시작된다.


 에피소드는 그런 식으로 이뤄진다. 누군가에게 조언을 하다가 아니면 과거의 연줄로 부탁을 받거나 혹은 사건 당사자로서 말이다. 이것이 탐정이 등장하는 본격 미스터리물과 다른 점이다. 보통 탐정물은 정식 의뢰로 시작한다. 하지만 이들은 탐정이 아니니(아시다시피 우리나라에선 탐정이 법적으로 허용되지 않는다. 법적으로 허용하자는 법안이 상정된 것으로 아는데 논란이 많아 통과될 지는 미지수다.) 그럴 수가 없는 것이다. 제목에서 굳이 탐정이 아니라고 강조한 것도 이 탓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추정해 본다. 왜 시작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지 알려주기 위해서랄까?


 비록 시작은 다르더라도 에피소드에 담긴 본격 미스터리이 향취는 조금도 변함이 없다. '신들이 속사이는 밤'은 홍예리 기자에게 누군가의 제보로 들어온 두 장의 사진을 단서로 한 아랍 여인에게 얽힌 미스터리를 추적하며 '목숨 걸고 베이스 볼'은 박희윤과 개인적으로 인연이 있는, 부상을 입었다가 재활 치료로  훌륭하게 재기에 성공한 야구 선수들로 구성된 '부활파'에 얽힌 살인 미스터리를 푼다. 여기서는 본격 미스터리에서 빠질 수 없는 고전적 요소인 알리바이 공작이 핵심이다. CCTV로 사건 당일의 모든 정황이 녹화된 가운데 범행이 불가능한 시간에 이루어진 살인의 알리바이를 깨야 한다. 3막 '제4요일의 암호'는 제목 그대로 셜록 홈즈에서도 나온 바 있었던 신문 광고를 통해 전달되는 암호가 중심이다. 박희윤은 우연히 자신이 일했던 민주일보에 실린 개인 광고를 읽다가 이상한 점을 발견한다. 며칠에 걸쳐 그런 이상한 광고가 서로 다른 내용으로 계속 발견되자 그는 이것이 암호라는 걸 직감하고 풀이에 나선다. 4막 '세월이 가면 43초'는 한동안 잠적했다가 다시 활동을 시작한 여가수의 죽음에 얽힌 미스터리다. 그녀는 컴백의 첫 무대로 자신의 열혈 팬들만 초대하여 자신이 태어난 고향인 '증심도'란 섬에서 콘서트를 여는데 마지막 곡으로 최호섭의 '세월이 가면'을 부르는 동안 43초간 정전이 되고 그 뒤 그녀는 시체로 발견된다. 갈호태는 그녀의 입에서 약한 아몬드 향이 나는 것을 알아차리고 청산가리로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모든 사람들이 그녀를 주시하고 있던 가운데 일어난 43초의 암흑 속에서 과연 그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과연 그녀는 자살한 것일까 아니면 타살한 것일까? 섬이라는 고립된 공간, 한정된 용의자. 그리고 사방에서 그녀를 둘러싸고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라는 벽. 이렇게 이 에피소드는 밀실 미스터리를 담고 있다.


 "장소가 좀 넓지만 일종의 밀실 미스터리라고 봐야죠."(p.227)


 5막 '고도리 저택의 개사건'은 일단 제목을 잘 봐야 한다. '괴사건'이 아니라 '개사건'이다. 제목 자체에 은근 유머가 깃들어 있는데 과연 이 에피소드는 유머 미스터리에 가깝다. 아니면 일상 미스터리라고 해야 할까? 아무튼 갈호태가 너무도 존경하는(하지만 실력이 아니라 연줄과 운이 좋아 승진한 게 분명한) 전 경찰청장에게서 잃어버린 개를 찾아달라는 의뢰가 아닌 '부탁'이 들어오고 바로 작년에 한국 최고의 기자에게만 주는 상을 받았던 박희윤과 강력계 민완 형사 갈호태는 자신의 연줄로 복직시켜주겠다는 것과 바로 옆집이 인기 걸그룹 핫식스 숙소라서 매일 그녀들을 볼 수 있다는 전 청장의 말에 홀려서 (박희윤은 계속 툴툴 거리지만) 개 수색에 나선다. 설정대로 이 단편집에서 가장 편하게 그리고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에피소드다. 그리고 마지막 종막. 거기서 박희윤은 자신에게 계속 트라우마로 남아 있었던 '바리캉맨'과 최후 결전을 치르게 된다.


 이렇게 이 단편집은 본격 미스터리의 주 소재들을 두루 사용하면서 내용의 다양한 변주로서 독자의 흥미와 재미를 돋운다. 그렇다고 본격의 재미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 단편집은 사회파 미스터리의 모습마저 가지고 있는데 1막부터 종막까지 우리 사회의 부조리한 면모들을 골고루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1막은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차별을 그리고 2막에서는 용산 참사를 낳았던 과도한 부에 대한 욕망을 간접적으로 꼬집고 있다. 3막은 반값 등록금을 위한 대학생들의 시위와 기업의 비정한 정리해고 방식을 통해 현재도 미래도 암울한 우리 사회의 단면을 보여주며 4막에서는 성적 소수자에 대한 차별이 은연 중에 드리워진다. 그리고 종막에서는 요즘들어 더욱 문제시 되고 있는 내부고발자 보호 문제를 다룬다.


 책의 가장 마지막에 나오는 저자의 말에 따르면 그동안 썼던 무거운 스릴러와는 달리 캐릭터 중심의 '본격 사회파 코지 미스터리 스릴러의 짬뽕'을 시도해 보았다고 하는데 그 말 그대로다. 본격과 사회파 미스터리의 풍미가 짬짜면처럼 고루 감돌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둘 중 어느 쪽을 좋아하더라도 만족하지 않을까 한다.


 이 작품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아마도 그것은 작품 내적인 면이 아니라 작품 외적인 면에 있지않을까 싶다. 요즘 가장 신뢰받지 못하는 기자가 주인공이라는 사실, 바로 거기에.

 이제는 기자라는 말보다 그들을 비하하는 '기레기'란 말이 더 보통명사처럼 쓰일 정도로 기자란 사람들에게 불신의 대상이다. 물론 그 책임은 전적으로 그들에게 있다. 세월호와 국정원 사태 등등 불법과 비리가 얼룩진 커다란 문제가 터질 때마다 기자들은 왜곡하거나 침묵하는 등의 돈과 권력에 약한 모습을 꾸준히 보여줬기 때문이다. 이 단편집엔 그런 기자로서의 자괴감 같은 것이 가득 드러나 있다. 오늘날 기자들은 왜 이렇게까지 추락해 버렸을까 하는. 아마도 박희윤이 전직 기자로 설정된 것도 그가 그렇게나 자주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도 그 진짜 이유는 이러한 현실에서의 기자 모습을 반영한 게 아닐까 싶다. 그 한계 지점을 솔직히 드러내고 있기에 개인적으로는 그래서 더욱 좋았던 작품이다. 때문에 정말 기자가 주인공이라는 사실 때문에 저어된다면 그리 구애받지 않아도 좋을 것 같다.


 종막에서 이 작품이 시리즈로 계속 이어질 것이라는 뉘앙스를 풍기는데 부디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 '밤의 노동자'로 활약하는 그들의 모습이 기대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최후의 일격 엘러리 퀸 컬렉션 Ellery Queen Collection
엘러리 퀸 지음, 배지은 옮김 / 검은숲 / 2015년 6월
평점 :
품절


  '마지막인데, 남의 눈치 볼 필요 없잖아!'

  '그렇고 말고! 그동안 우리가 취향을 얼마나 억누르고 살았냐? 이제 우리가 좋아하는 쪽으로 원없이 써볼 때도 됐지.그것으로 화끈하게 피날레 해 보자!'


 그리하여 사촌 지간인 만프레드 리와 프레드릭 다네이는 '엘러리 퀸' 시리즈 3기의 마지막 작품인 '최후의 일격'을 썼다.



 때는 1958년.

 세계 제2차 대전으로 엘러리 퀸의 신앙과도 같았던 이성은 그 신뢰를 잃었고, 언제라도 세계를 깡그리 파괴시킬 수 있는 핵무기 앞에서 금전이나 치정에 얽힌 살인 미스터리 따위는 한없이 보잘 것 없어 보이던 시절. 이제 제임스 본드나 루 아처를 찾을 지 언정 아무도 명탐정에게는 의뢰하지 않던 시절에 엘러리 퀸의 아버지 만프레드 리와 프레드릭 다네이는 쇠락해가고 있는 탐정들의 존재를 보노라면 더욱 가없이 향수에 젖을 수밖에 없는 미스터리의 황금기인 1930년대로 돌아가 엘러리 퀸에게 3기의 멋진 커튼콜을 해주려 했다. 그건 거의 30년을 함께 해 온 지기를 향한 당연한 배려이기도 했다. 


 그렇게 그들은 엘러리 퀸이 가장 전성기 시절의 가장 전성기의 모습으로 퇴장할 수 있도록 미스터리 황금기 시절의 특징들을 '최후의 일격'에 모조리 가져왔다. 사건의 배경은 크리스마스를 얼마 앞두지 않은 폭설로 고립된 저택이라는 클로즈드 서클이 되었고 저마다 동기가 있는 한정된 용의자에 출생에 관한 비밀도 얽혀 놓았다. 그리고 당시 미스터리라면 빠질 수 없는 암호문을 애거서 크리스티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의 동요처럼 한문장씩 날마다 배달되도록 해 놓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앨런에게는 이미 얘기했었지만, 이 수수께끼에서는 흥미롭게도 12라는 숫자가 계속 반복되는 양상을 보입니다. 우리 일행은 열두 명이고요. 크리스마스 축제는 12일 동안 지내지요. 그리고 이 열두 명은 우연히도, 정말 우연인지는 모르겠지만, 열 두 별자리 중 각각 하나씩에 해당됩니다. 오늘 밤엔 선물이 도착했고, 함께 온 카드에 적힌 시 구절은 '12일의 크리스마스'라는 영국 캐럴을 패러디 한 것이에요! (p. 92)


 2차 대전 이후로, 라이츠빌 시리즈 이후로 찾아간 적 없었던 아주 전형적인 30년대의 공간으로 형제는 엘러리 퀸을 데려 간 것이다. 이제 마지막이니 마음껏 이성의 칼날을 휘두르라는 의미로. 과연 수수께끼는 범상치 않다. 용의자는 분명 저택 내의 인물인데 도대체 어떻게 살인을 저질렀으며 매일 수수께끼의 시가 있는 선물을 보낼 수 있는지 알 수 없는 것이다. 출생의 비밀까지 가세해 이중 삼중의 수수께끼 장벽이 펼쳐지지만 역시나 엘러리 퀸! 이성의 해머로 모든 수수께끼의 담벼락을 부셔버린다.


 그리고 의기양양하게 독자들에게 커튼콜을 하고 두 작가와 더불어 환희의 칵테일을 마시려 할 때쯤,


 "이것봐요!" 하면서 편집자가 나타난다.


 그리고 두 손으로 허리의 양쪽을 잡고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이보세요들. 당신들만 생각하면 어떡합니까?

 아무리 마지막이라고 해도 그렇지. 이렇게 끝을 내면 책이 안 팔린단 말입니다.

 요즘이 어떤 세상인지 모르세요?  탐정이 추리로만 사건을 완벽하게 해결하는 걸 사람들은 믿지 않아요. 경탄하기는 커녕 억지스럽다고 여긴단 말이에요. 솔직히 독자들은 말이죠. 탐정의 성공을 바라지 않아요. 독자들이 정말 보고싶은 것은 탐정의 실패란 말입니다. 소파에 나른하게 누워 TV에서 원하는 프로그램을 하지 않아서 시간 때울 요량으로 읽는 그들은 처참하게 망가지는 탐정을 보며 잠깐의 우월감에 젖고 싶어 한단 말입니다. 그 잘난 체하는 탐정이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무기력하다는 것을 보고싶어 한다구요. 왜냐구요? 알만한 분들이 왜 이러실까? 그야 당연하죠. 지금의 세상은 스스로를 조소하거나 경멸하지 않고서는 살 수가 없으니까요. 희망이란 사탕 보다는 절망의 씁쓸한 수액이 더 나은 겁니다. 섣부른 낙관 보다는 익숙한 절망이 자신을 조금 더 버티게 한다는 걸 아는 까닭이죠. 그러니 다시 써요. 우리에게 슈퍼맨은 필요 없어요. 독자들은 자신들과 똑같이 아프고 무기력하지만 그런 상황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걸어가는 사람을 원해요. 리더인 영웅이 아니라 연민으로 연대할 수 있는 이를 말이죠. 솔직히 알고 계시잖아요? 마지막이라서 모른 척 한 것 뿐이잖아요? 안 그래요? 하지만 안 돼요. 당신들만 생각해서는. 난 이번에도 많이 못 팔면 실직할 참이라구요. 애가 셋인데 어떡하라구요? 그러니 다시 써요. 퀸이 패배하는 것으로. 패배하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더라도 포기하지 않아 결국 진실을 찾아내는 쪽으로. 만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제가 장담하건대 소송 폭탄을 맞게 해 드리죠."


 노인들은 전성기의 향수에 젖는 것만큼이나 말년에 주머니가 비게 되는 것도 두려워 한다.

 서슬 퍼런 편집자의 두 눈을 보면서 그들은 잠시 동안 세상을 너무 만만하게 생각했다는 것을 깨달았고 퀸의 어깨를 위로의 손으로 몇 번 토닥여 준 다음 서둘러 타자기 앞으로 돌아가 결말을 다시 쓰기로 한다.


 하여 퀸은 샴페인 잔을 떨어뜨리고 그 잔은 대리석 바닥에 부딪혀 산산이 깨어진다. 똑같이 사건 해결에 실패하고 찾아온 로맨스의 기회도 날려버린다. 퀸이 쓸쓸히 등을 돌리고 '그래, 좋은 건 그리 쉽게 얻어지는 것은 아니지.'라고 생각할 때, 노인들은 막 타자기로 마지막 마침표를 찍은 참이다.


 타이핑을 끝냈을 때,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노인들은 창을 보았고 하늘이 더 흐려진 것을 알았다.

 그것은 마치 세상에 더이상 명탐정을 위한 햇살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아 잠시 눈에 물기가 어렸다.



 주의 : 편집자가 나타난 뒤의 모든 부분은 전적으로 저의 상상임을 알려드립니다.

         물론 '최후의 일격'이 퀸 시리즈의 마지막 작품은 아닙니다. 하지만 저는 진정한 퀸 시리즈는 둘의 공저라고 생각하고 이 '최후의 일격'은 사실상 그들이 같이 쓴 마지막 작품이었기에 마지막이라고 한 것입니다. 마지막의 눈의 물기는 함께 즐거이 명탐정의 이야기를 썼던 나날이 이제 끝났음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는 것을 덧붙이고 싶군요.

 참, 그리고 '최후의 일격'은 초역입니다.

 그리고 날개에 있는 앞으로 번역될 작품들 입니다.

 


 '수수께끼이 038사건'이 제대로 된 번역으로 나올 모양입니다.(아, 팬더추리걸작시리즈의 추억이여...)

 거기다 그토록 보고 싶었던 'QBI' 도 드디어 나올 모양이군요. 이것도 나온다면 초역입니다.

 아, 이런 저도 왠지 눈물이 나는 걸요... 부디 빨리 만나게 되기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무녀굴 - 영화 [퇴마 : 무녀굴] 원작 소설 밀리언셀러 클럽 - 한국편 17
신진오 지음 / 황금가지 / 2010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신진오의 '무녀굴'은 호러 소설이다. 호러의, 호러에 의한, 호러를 위한 소설이다.

 단적으로 말해 이만큼 장르에 충실한 작품도 또 없을 것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소설의 목적은 분명하다. 독자들이 머리를 쭈뼛거리게 만들고 한밤 중에 혼자 화장실에 가기 무섭도록 만드는 것. 그것을 위해 소설은 모든 연출과 장치를 총동원한다. 분위기는 요즘 호러 영화의 핫한 트렌드인 제임스 완 감독의 '컨저링'이나 '인시디어스'랑 비슷하다. 통칭해서 '컨저링류'라고 부를 수 있을만한 완의 영화들은 2013년에 나왔고 신진호의 '무녀굴'은 2010년에 나왔으니 당연히 영화로부터 소설이 영향을 받은 것은 없다고 하겠고 어떻게 보면 거꾸로 지금의 호러 유행을 선도했다고까지 말 할 수도 있는 작품이다. 물론 제임스 완이 '무녀굴'을 읽었을 리는 만무하겠지만 말이다. 어쨌든 '컨저링이나 '인시디어스' 시리즈를 좋아한다면 '무녀굴'도 마음에 들 것이 틀림없다. 중반에 '컨저링'이나 '인시디어스'에서 보았던 퇴마 의식이 펼쳐지는 장면이 있다. 이게 꽤나 무섭다. 맞부딪히는 힘들이 강렬하고 상황의 연출 또한 긴박한 데다 제임스 완과는 달리 유혈의 낭자도 마다하지 않아서 그렇다.


 아무튼 이 '무녀굴'은 제주도에 있는 '김녕사굴'에 전해 내려오는 설화를 바탕으로 쓰였다고 한다. 이름이 사굴인만큼 그 굴엔 아주 요력이 강해 날씨를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뱀이 살고 있었다고 하는데 그 뱀이 마을 사람들에게 해꼬지를 못하게 하려면 마을 처녀 한 명을 해마다 바쳐야 했다고 한다. 하루는 제주 판관으로 갓 부임한 서린이란 사람이 이 사실을 전해 듣고 크게 분개하여 굴을 찾아가 처녀를 먹으려는 뱀을 창으로 찔러 죽여버렸다. 그런데 이야기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뱀이 죽자 원혼의 힘이었는지 날씨가 갑자기 미친듯이 돌변한다.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낀 마을의 무당이 서린을 찾아와서는 얼른 성으로 돌아가라고 아뢴 뒤, 성안에 들어갈 때까지 절대 뒤를 돌아보지 말라고 경고한다. 서린 역시 귀담아 들었기에 뒤를 돌아보지 않으려 조심했지만 성 안에 들어가기 직전 뒤에서 어떤 군사가 '피비가 내린다'고 소리치기에 그만 뒤를 돌아다 보았다가 피비도, 외친 군사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순간, 그만 낙마하여 절명한다.


 이런 설화인데 전형적인 영웅담인 것 같다가 막판에 보복의 반전을 가져오는 변칙이 있다. 대부분 민간 전승 설화는 완결된 형태로 전해 내려오는 것이 아니고 전승되는 도중 여러 사람들에 의해 첨삭되는 경우가 많으므로 그런 면을 고려하자면 뒤의 서린이 복수당하는 장면은 아무래도 후에 결부된 것이 아닐까 싶다. 이는 당시 제주도와 조선의 관계를 고려한 데다, 섬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유달리 강한 폐쇄적인 면모를 생각한 것인데 그 때 제주도는 천대받는 땅이었고 그런 고로 제주의 민중들은 조선 왕조를 바라보는 마음이 곱지는 않았을 것이며 그런 차에 조선 중앙 정부에서 내려온 판관에 의해 자신들 삶의 바탕이 되고 있는 섬의 기존 질서가 마구 파헤쳐지는 것은 더더욱 싫었을 것이다. 즉 서린의 사굴 뱀 처리는 그런 중앙 질서에 의한 지방 질서의 교란 혹은 파괴로 볼 수 있으며 후에 그에 대한 반발로 아무리 중앙 정부가 제주도의 고유한 질서를 유린하려고 해도 결코 이뤄지지 않을 것이라는 의지의 표명 같은 것으로 서린이 뱀에게 복수를 당해 죽는 걸로 덧붙여진 게 아닐까 싶다. 그렇게 이 사굴 설화에는 뱀과 판관이라는 지역과 중앙의 대립, 그리고 그것이 매개로 사용하는 미신과 합리의 대결이 있다.


 이럴 경우 김녕 사굴 설화는 '합리'라는 것이 진리의 또 다른 이름이 아니라 그저 타자에게 자신과 닮을 것을 강요하는 선별과 배제의 다른 이름일 뿐이라는 것을 제주 민초들이 일찌기 눈치채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해방을 뜻했던 계몽이 지배에 천착하는 제국주의로 변질될 수밖에 없었던 근대의 해악을 말이다.


 그렇다고 이런 주제가 소설에 나온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시작부터 김녕사굴이 나오고 마지막에도 주 무대가 되지만 소설에서 김녕사굴은 동일화를 꾀하는 지배이데올로기에 맞서는 고유한 지역 문화의 저항 지점으로 나타나지 않고 오로지 호러의 공간으로만 소비된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지점까지 나아갔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원래 원혼이라는 것은 '아랑설화'나 '장화홍련전', 그것도 아니면 과거 '전설의 고향'에 등장했던 허다한 원혼들이 잘 보여줬듯이 지배 체제에 맞서는 존재가 아니었던가? 그런 사회적 의미가 분명 있지만 소설에선 그 의미를 잘 살리지 않는다.


 물론 아예 없다고는 할 수 없다. 원혼이 제주 4.3 항쟁 당시 이승만의 사냥개인 서북청년단의 피해자로 나오기 때문이다. 사실 4.3에서 치뤄진 학살은 가장 극심한 중앙의 지역에 대한 해악이라 할 수 있다. 원혼은 타고난 기이한 능력으로 자신의 가해자들에게 가차없이 보복하는데 그런 면에서 김녕 사굴 설화가 진화한 현대판이 될 수도 있었다고 본다. 일단 작중 인물이 판관 서린에 대해 해석하는 장면이 나오기도 하는 데다 무엇보다 이 검사란 존재가 그렇게 여기게 만든다. 이 '이 검사'란 사람은 소설의 시작에서 김녕사굴로 들어갔다가 사라져 버린 일곱명의 산악 자전거부 사람들을 찾는 책임 검사인데 그는 이제 막 검사에 임용된 사람으로 제주는 첫 부임지다. 그런 면에서 조선 중종 시설 막 과거에 급제하여 첫 부임지로 제주에 내려온 판관 서린과 여러 모로 흡사하다. 더구나 이런 이 검사는 원혼에 의해 죽기까지 하므로 그야말로 현대판 서린이라 할 만하다. 즉 작가가 이렇게 이 검사를 서린을 강하게 연상시키는 인물로 설정한 것은 작가도 애초엔 '김녕 사굴 설화'가 간직한 저항성을 충분히 살리려 한 게 아닐까 여기게 만든다. 더구나 처음 사라진 그 산악 자전거부 사람들은 모두 서울에서 온 이들이었다. 그런 그들이 가장 토속적인 논리로 무장한 제주의 공간에서 사라지고 그 중 하나가 원혼에 빙의된 채로 서울로 돌아와 사람들을 공격한다. 이런 설정은 충분히 중앙과 지역 사이의 지배와 저항의 이야기로 볼 수 있지 아니한가?


 하지만 이러한 면모는 이야기가 원혼과의 본격적인 대결로 전개되자 점점 휘발해 버린다. 심히 유감이 아닐 수 없지만 이런 점까지 포용하려 했다면 분명 소설이 원래 치중하고자 했던 호러는 반감 되었을 것이므로 두 마리 토끼 중 하나를 고르는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어디까지나 내 개인적인 아쉬움이라 말해 두는 것이 옳겠다. 어쨌든 독자를 무섭게 만드는 소기의 목적은 달성하므로 공포물을 찾으시는 분들에겐 마춤한 작품이 될 듯 하다. 나는 바로 얼마 전에 김녕 사굴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하룻밤을 보냈는데 사실 그 때 이 책을 가져갈까 생각을 했었다. 지금 읽고 그 때 안 가져가서 정말 다행이라 생각한다. 가져갔다면 난 아마 그 날 밤, 내내 방 안에 틀어박혀 있어야 했을 것이다. 비까지 부슬부슬 내렸던 밤이라 더욱 그러지 않았을까 싶다.


 2010년에 나온 이 작품을 이제야 읽게 된 건, 최근에 영화로 만들어졌다는 이야기를 들어서다. 공개된 예고편을 보아하니 소설과는 좀 다르게 전개되는 듯 하다. 소설에서 여주인공인 금주는 단 한 번도 빙의를 당하지 않는데 영화에선 빙의된 금주가 주로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것 같다. 어쩐지 요즘 유행하고 있는 '컨저링류'를 따라가는 것 같은 냄새가 나기도 한다. 그래도 내겐 금주라는 여성의 신체가 나라는 자아와 낯선 타자로 분단되어 나온다는 게 기대를 가지게 만든다.


 이전 리뷰에서 몇 번 언급했듯이 페미니즘적인 입장에서 분단된 여성의 신체란 흥미로운 대상이다. 기독교의 마녀사냥에서 충분히 입증되었듯이 '퇴마'는 타자의 존재를 용납하지 않는 지배질서의 강요로, 반대로 그 대상이 되는 원혼은 그러한 지배질서에 대항하여 자신의 고유성을 드러내려는 몸짓으로 해석될 여지가 많다. 그런 면에서 원혼, 특히 여성의 원혼은 남성 지배 질서에 억눌린 목소리의 구현으로 볼 수도 있는데('아랑 전설'이나 '장화 홍련전'에서 모습이 나타나기 전에 목소리부터 들리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오로지 공포의 존재로만 보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이것은 그대로 프로이트의 말마따나  '초자아'가 자신이 길들일 수 없는 이드를 괴물로 왜곡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며 그런 면에서 공포감은 그 공포 때문에 여성 스스로 남성 지배 질서에 더 순응하도록 만들기 위한 남성 가부장제의 이데올로기적 조작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뭐, 그렇다고 무서운 것을 무섭지 않다고 할 수야 없겠지만.


 쓰다보니 이런, 더위를 먹어서 그런가 이야기가 자꾸만 본말과 상관없는 곁가지로 빠지고 있는데 (설마 지금 내가 설명충에게 빙의된 것은 아니겠지?) 이쯤에서 각설하고 딱 한 문장으로 말한다면 소설은 정말 무섭고 영화는 그런 쪽으로 기대된다는 것이다.(설명충아 물러가라! 훠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