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녀굴 - 영화 [퇴마 : 무녀굴] 원작 소설 밀리언셀러 클럽 - 한국편 17
신진오 지음 / 황금가지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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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진오의 '무녀굴'은 호러 소설이다. 호러의, 호러에 의한, 호러를 위한 소설이다.

 단적으로 말해 이만큼 장르에 충실한 작품도 또 없을 것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소설의 목적은 분명하다. 독자들이 머리를 쭈뼛거리게 만들고 한밤 중에 혼자 화장실에 가기 무섭도록 만드는 것. 그것을 위해 소설은 모든 연출과 장치를 총동원한다. 분위기는 요즘 호러 영화의 핫한 트렌드인 제임스 완 감독의 '컨저링'이나 '인시디어스'랑 비슷하다. 통칭해서 '컨저링류'라고 부를 수 있을만한 완의 영화들은 2013년에 나왔고 신진호의 '무녀굴'은 2010년에 나왔으니 당연히 영화로부터 소설이 영향을 받은 것은 없다고 하겠고 어떻게 보면 거꾸로 지금의 호러 유행을 선도했다고까지 말 할 수도 있는 작품이다. 물론 제임스 완이 '무녀굴'을 읽었을 리는 만무하겠지만 말이다. 어쨌든 '컨저링이나 '인시디어스' 시리즈를 좋아한다면 '무녀굴'도 마음에 들 것이 틀림없다. 중반에 '컨저링'이나 '인시디어스'에서 보았던 퇴마 의식이 펼쳐지는 장면이 있다. 이게 꽤나 무섭다. 맞부딪히는 힘들이 강렬하고 상황의 연출 또한 긴박한 데다 제임스 완과는 달리 유혈의 낭자도 마다하지 않아서 그렇다.


 아무튼 이 '무녀굴'은 제주도에 있는 '김녕사굴'에 전해 내려오는 설화를 바탕으로 쓰였다고 한다. 이름이 사굴인만큼 그 굴엔 아주 요력이 강해 날씨를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뱀이 살고 있었다고 하는데 그 뱀이 마을 사람들에게 해꼬지를 못하게 하려면 마을 처녀 한 명을 해마다 바쳐야 했다고 한다. 하루는 제주 판관으로 갓 부임한 서린이란 사람이 이 사실을 전해 듣고 크게 분개하여 굴을 찾아가 처녀를 먹으려는 뱀을 창으로 찔러 죽여버렸다. 그런데 이야기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뱀이 죽자 원혼의 힘이었는지 날씨가 갑자기 미친듯이 돌변한다.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낀 마을의 무당이 서린을 찾아와서는 얼른 성으로 돌아가라고 아뢴 뒤, 성안에 들어갈 때까지 절대 뒤를 돌아보지 말라고 경고한다. 서린 역시 귀담아 들었기에 뒤를 돌아보지 않으려 조심했지만 성 안에 들어가기 직전 뒤에서 어떤 군사가 '피비가 내린다'고 소리치기에 그만 뒤를 돌아다 보았다가 피비도, 외친 군사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순간, 그만 낙마하여 절명한다.


 이런 설화인데 전형적인 영웅담인 것 같다가 막판에 보복의 반전을 가져오는 변칙이 있다. 대부분 민간 전승 설화는 완결된 형태로 전해 내려오는 것이 아니고 전승되는 도중 여러 사람들에 의해 첨삭되는 경우가 많으므로 그런 면을 고려하자면 뒤의 서린이 복수당하는 장면은 아무래도 후에 결부된 것이 아닐까 싶다. 이는 당시 제주도와 조선의 관계를 고려한 데다, 섬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유달리 강한 폐쇄적인 면모를 생각한 것인데 그 때 제주도는 천대받는 땅이었고 그런 고로 제주의 민중들은 조선 왕조를 바라보는 마음이 곱지는 않았을 것이며 그런 차에 조선 중앙 정부에서 내려온 판관에 의해 자신들 삶의 바탕이 되고 있는 섬의 기존 질서가 마구 파헤쳐지는 것은 더더욱 싫었을 것이다. 즉 서린의 사굴 뱀 처리는 그런 중앙 질서에 의한 지방 질서의 교란 혹은 파괴로 볼 수 있으며 후에 그에 대한 반발로 아무리 중앙 정부가 제주도의 고유한 질서를 유린하려고 해도 결코 이뤄지지 않을 것이라는 의지의 표명 같은 것으로 서린이 뱀에게 복수를 당해 죽는 걸로 덧붙여진 게 아닐까 싶다. 그렇게 이 사굴 설화에는 뱀과 판관이라는 지역과 중앙의 대립, 그리고 그것이 매개로 사용하는 미신과 합리의 대결이 있다.


 이럴 경우 김녕 사굴 설화는 '합리'라는 것이 진리의 또 다른 이름이 아니라 그저 타자에게 자신과 닮을 것을 강요하는 선별과 배제의 다른 이름일 뿐이라는 것을 제주 민초들이 일찌기 눈치채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해방을 뜻했던 계몽이 지배에 천착하는 제국주의로 변질될 수밖에 없었던 근대의 해악을 말이다.


 그렇다고 이런 주제가 소설에 나온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시작부터 김녕사굴이 나오고 마지막에도 주 무대가 되지만 소설에서 김녕사굴은 동일화를 꾀하는 지배이데올로기에 맞서는 고유한 지역 문화의 저항 지점으로 나타나지 않고 오로지 호러의 공간으로만 소비된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지점까지 나아갔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원래 원혼이라는 것은 '아랑설화'나 '장화홍련전', 그것도 아니면 과거 '전설의 고향'에 등장했던 허다한 원혼들이 잘 보여줬듯이 지배 체제에 맞서는 존재가 아니었던가? 그런 사회적 의미가 분명 있지만 소설에선 그 의미를 잘 살리지 않는다.


 물론 아예 없다고는 할 수 없다. 원혼이 제주 4.3 항쟁 당시 이승만의 사냥개인 서북청년단의 피해자로 나오기 때문이다. 사실 4.3에서 치뤄진 학살은 가장 극심한 중앙의 지역에 대한 해악이라 할 수 있다. 원혼은 타고난 기이한 능력으로 자신의 가해자들에게 가차없이 보복하는데 그런 면에서 김녕 사굴 설화가 진화한 현대판이 될 수도 있었다고 본다. 일단 작중 인물이 판관 서린에 대해 해석하는 장면이 나오기도 하는 데다 무엇보다 이 검사란 존재가 그렇게 여기게 만든다. 이 '이 검사'란 사람은 소설의 시작에서 김녕사굴로 들어갔다가 사라져 버린 일곱명의 산악 자전거부 사람들을 찾는 책임 검사인데 그는 이제 막 검사에 임용된 사람으로 제주는 첫 부임지다. 그런 면에서 조선 중종 시설 막 과거에 급제하여 첫 부임지로 제주에 내려온 판관 서린과 여러 모로 흡사하다. 더구나 이런 이 검사는 원혼에 의해 죽기까지 하므로 그야말로 현대판 서린이라 할 만하다. 즉 작가가 이렇게 이 검사를 서린을 강하게 연상시키는 인물로 설정한 것은 작가도 애초엔 '김녕 사굴 설화'가 간직한 저항성을 충분히 살리려 한 게 아닐까 여기게 만든다. 더구나 처음 사라진 그 산악 자전거부 사람들은 모두 서울에서 온 이들이었다. 그런 그들이 가장 토속적인 논리로 무장한 제주의 공간에서 사라지고 그 중 하나가 원혼에 빙의된 채로 서울로 돌아와 사람들을 공격한다. 이런 설정은 충분히 중앙과 지역 사이의 지배와 저항의 이야기로 볼 수 있지 아니한가?


 하지만 이러한 면모는 이야기가 원혼과의 본격적인 대결로 전개되자 점점 휘발해 버린다. 심히 유감이 아닐 수 없지만 이런 점까지 포용하려 했다면 분명 소설이 원래 치중하고자 했던 호러는 반감 되었을 것이므로 두 마리 토끼 중 하나를 고르는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어디까지나 내 개인적인 아쉬움이라 말해 두는 것이 옳겠다. 어쨌든 독자를 무섭게 만드는 소기의 목적은 달성하므로 공포물을 찾으시는 분들에겐 마춤한 작품이 될 듯 하다. 나는 바로 얼마 전에 김녕 사굴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하룻밤을 보냈는데 사실 그 때 이 책을 가져갈까 생각을 했었다. 지금 읽고 그 때 안 가져가서 정말 다행이라 생각한다. 가져갔다면 난 아마 그 날 밤, 내내 방 안에 틀어박혀 있어야 했을 것이다. 비까지 부슬부슬 내렸던 밤이라 더욱 그러지 않았을까 싶다.


 2010년에 나온 이 작품을 이제야 읽게 된 건, 최근에 영화로 만들어졌다는 이야기를 들어서다. 공개된 예고편을 보아하니 소설과는 좀 다르게 전개되는 듯 하다. 소설에서 여주인공인 금주는 단 한 번도 빙의를 당하지 않는데 영화에선 빙의된 금주가 주로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것 같다. 어쩐지 요즘 유행하고 있는 '컨저링류'를 따라가는 것 같은 냄새가 나기도 한다. 그래도 내겐 금주라는 여성의 신체가 나라는 자아와 낯선 타자로 분단되어 나온다는 게 기대를 가지게 만든다.


 이전 리뷰에서 몇 번 언급했듯이 페미니즘적인 입장에서 분단된 여성의 신체란 흥미로운 대상이다. 기독교의 마녀사냥에서 충분히 입증되었듯이 '퇴마'는 타자의 존재를 용납하지 않는 지배질서의 강요로, 반대로 그 대상이 되는 원혼은 그러한 지배질서에 대항하여 자신의 고유성을 드러내려는 몸짓으로 해석될 여지가 많다. 그런 면에서 원혼, 특히 여성의 원혼은 남성 지배 질서에 억눌린 목소리의 구현으로 볼 수도 있는데('아랑 전설'이나 '장화 홍련전'에서 모습이 나타나기 전에 목소리부터 들리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오로지 공포의 존재로만 보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이것은 그대로 프로이트의 말마따나  '초자아'가 자신이 길들일 수 없는 이드를 괴물로 왜곡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며 그런 면에서 공포감은 그 공포 때문에 여성 스스로 남성 지배 질서에 더 순응하도록 만들기 위한 남성 가부장제의 이데올로기적 조작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뭐, 그렇다고 무서운 것을 무섭지 않다고 할 수야 없겠지만.


 쓰다보니 이런, 더위를 먹어서 그런가 이야기가 자꾸만 본말과 상관없는 곁가지로 빠지고 있는데 (설마 지금 내가 설명충에게 빙의된 것은 아니겠지?) 이쯤에서 각설하고 딱 한 문장으로 말한다면 소설은 정말 무섭고 영화는 그런 쪽으로 기대된다는 것이다.(설명충아 물러가라! 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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