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프터 다크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64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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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프터 다크'를 읽다가 에드워드 호퍼의 '나이트호크'란 그림이 생각났다. 

 시간적 배경이 그림과 비슷하고 공간 역시도 그림처럼 식당이기 때문인지 모른다. 차이가 있다면 그림 속의 식당은 사람이 얼마없지만 소설 속 식당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다는 정도랄까. '나이트호크'는 1942년에 발표된 작품으로 진주만 이후 미국이 한참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고 있을 무렵에 그려졌다. 그림에서 등을 보이고 앉은 남자는 홀로 있는 데다 대화에서마저 소외되어 더욱 외로워 보이는데 호퍼가 그림을 통해 전달하고자 했던 느낌은 바로 그 남자에게 있는 지 모른다. 그도 그럴 것이 그림 속의 식당은 전면 유리로 외부에 한없이 개방되어 있는 것 같지만 사실 들어가는 입구가 존재하지 않는다. 게다가 약간 비튼 각도로 그려져 보고 있는 관객에게 더욱 거리감을 느끼게 한다. 평행하게 그려져 있는 내부의 바와 외부의 식당 벽은 겹겹인데다 높낮이마저 중심으로 갈수록 높아서 그 자체로 관객에게 저 외로운 남자만큼이나 중심의 대화에 참여할 수 없음을 주지시킨다. 어쩐지 가장 시선을 많이 받고 있는 붉은 드레스의 여인이 마치 우리를 보며 '당신은 여기 절대로 들어올 수 없어.'라고 말하는 것 같다.


 그 여인을 '애프터 다크'의 에리라 볼 수 있을 듯 하다. '애프터 다크'엔 두 여자가 나온다. 자매로 언니가 에리고 동생이 마리다. 마리는 등을 보이고 앉아 있는 남자에 가깝다. 에리는 빼어난 외모로 어릴 때부터 어디를 가든 '백설공주'처럼 주목을 받는 존재였다. 마리는 정반대였다. 그녀는 에리의 그늘에 가려 부모의 관심은 물론 어디서도 스포트라이트를 받아보지 못했다. 그림과 똑같이 에리는 중심에 있고 마리는 변방에 있다. 에리는 한낮의 사람이고 마리는 자정의 사람이다. 


 그래서 그녀는 밤마다 떠도는 것일까? 그녀는 밤이 아무리 늦어도 집에 돌아갈 생각을 안한다. 소설의 시작에서 마리는 저 그림과 비슷한 '데니스'란 식당 창가에 홀로 앉아 책을 읽고 있다. 그런 그녀는 남자와 똑같이 세상에서 뚝 떨어진 섬처럼 보인다. 그녀가 집으로 돌아가지 않는 이유는 에리 때문이다. 에리가 벌써 두 달째 잠만 자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몸이 아프다는 등의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다. 순전히 자의로 에리는 두 달 동안 내내 '잠자는 미녀' 상태를 계속 하고 있다. 그것은 너무나 갑작스러웠다. 그 돌변이 마리를 두렵게 만든다. 세상 그 누구보다 안정적으로 보이던 에리가 갑자기 그런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돌연 닥쳐온 어둠에 삼켜진 것만 같은 언니. 다카하시의 말을 빌어 표현하자면, 그것은 거대한 문어에게 갑작스레 끌려가 버린 것이라 할 수 있었다. 세상의 중심에 있는 것 같았던 언니마저 그렇게 될 수 있다면, 하물며 언니에 비하면 한없이 작고 위태로운 자신은 얼마나 쉽게 그럴 수 있을 것인가? 자신의 방에서 잠자는 에리의 모습은 그 자체로 마리에게 너무나 가볍고 약한 자신의 존재를 상기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그녀는 집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창가에 거한다는 것. 거기엔 두 가지 의미가 있었다. 하나는 마리가 경계에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는 존재라는 것. 다른 하나는 그런 까닭에 유리창이라는 보호막을 간절히 원하고 있다는 것. 그녀는 단절, 혹은 확실한 경계를 원한다. 예상치 못한 어둠에 먹히지 않도록 자신을 두텁게 보호해줄 수 있는 무언가를.

 어릴 때, 지진 때문에 엘리베이터에 에리와 단둘이 갇혔을 때, 자신을 보호하려 힘껏 안아주던 에리의 몸과 같은.


  어둠이 얼마 동안 계속됐는지는 기억 안 나. 아주 오랜 시간이었던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오래가 아니었을 지도 몰라. 그렇지만 오 분이건 이십 분이건 구체적인 길이는 문제가 아냐. 아무튼 그동안 에리는 캄캄한 어둠 속에서 내내 날 끌어안고 있었어. 그것도 그냥 끌어아는 거랑 달라. 우리 둘의 몸이 녹아서 하나가 될 만큼 꽉 끌어안았던 거야. 에리는 잠시도 힘을 풀지 않았어. 잠깐이라도 떨어지면 이제 두 번 다시 우리가 이 세상에서 만나지 못할 것처럼.(P.226)


 하지만 소설은 마리를 내버려 두지 않는다. 그녀가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을 보내어 그녀를 밤새 움직이게 만든다. 마리는 데니스에서 모텔 '알파빌'로, 이름모를 작은 바로, 스카이락 식당으로 계속 이동한다. 마리는 흐르고 나누고 섞인다. 마리는 에리를 회피하려고만 했었다. 하지만 소설은 그녀에게 회피가 아니라 응시를, 침묵이 아니라 대화를, 도피가 아니라 관통을 요구한다. 소설의 그러한 요구는 다음과 같은 말로 단적으로 선언된다.


 "도망치지 못해. 넌 잊어버릴 지 몰라. 우리는 잊지 않아."(p.216)


 이 불길한 협박의 진의는 무엇일까? 그런데 이 말을 우리는 하루키의 다른 소설에서도 들었다. 정확히는 '1Q84'에서다. 거기서 주인공 덴고의 아버지로도 보이는 NHK 수금원은 집에 없는 척 하고 있는 아오마메에게 이렇게 말한다.


 하지만 그런 짓을 해봤자 끝끝내 도망칠 수 없어요. 반드시 누군가 찾아와서 이 문을 엽니다. 정말이에요.(1Q84, 3권. P. 199)


 이렇게 '애프터 다크'와 '1Q84'는 이어진다. 그렇지 않아도 '애프터 다크'의 인물들은 대부분 '1Q84'처럼 도망치는 자들이라 할 수 있다. 이를테면  '알파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고오로기가 그렇고, 중국인 창부를 폭행한 시라카와도 그러하다. 아버지가 형무소에 가버리는 바람에 한 때 고아로 살았던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해 늘 다시 고아가 되지 않을까 두려움에 빠져 있는 다카하시도 그렇고 에리를 피하고 있는 마리도 여기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 그들에게 소설은 분명히 전하는 것이다. 절대 달아날 수 없다고. '1Q84'와 똑같이.


 메세지가 이렇게 반복되는 것을 보면 이것이야말로 하루키가 전하고 싶은 진심이 아닐까 생각될만도 하다. 그리고 그 진심을 통해 하루키가 독자에게 촉발시키고자 하는 것은 바로 행위이다. 그것은 경계의 허뭄이고, 비유하자면 '나이트호크'에 그려진 소외된 남자에게 시선을 주고 참여를 유도하는 손을 내미는 것과 같다. 진심의 궁극은 여기에 있다. '애프터 다크'의 마지막 장면에서 마리가 하는 것에. 그러니까 다카하시와 손을 잡고, 에리의 침대로 올라가 언니의 몸에 가느다란 팔을 둘러 언니의 심장 고동 소리를 들으려 언니 가슴에 뺨을 대고 꼼짝하지 않는 것에 말이다. 바로 그 '함께', '참여'가 하루키가 '애프터 다크'를 관통한 독자들에게 바라는 것이다.


 우리는 마리와 몽환적이면서 어딘가 불안한 밤의 여정을 함께 하면서 정작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달아나려는 마음 자체 있음을 본다. 감금과 악몽은 수동이 아니라 능동의 산물이었다. 오로지 피하고 도망치려는 마음이 스스로 만든 감옥과 악몽이었던 것이다. 마리와 비슷한 또래의 여자가 이유없이 폭행당하는 '알파빌'은 그런 마음들이 만들어내는 장소였다. 


 이런 식으로 생각해보면 어떨까 싶은데. 그러니까 너희 언니는 어딘지는 몰라도 또 다른 ‘알파빌’ 같은 곳에 있으면서 누군가한테 무의미한 폭력을 당하고 있어. 그래서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면서 눈에 안 보이는 피를 흘리고 있어.(P. 156)


 시라카와가 단적으로 보여주지 않았던가. 그는 프로그래머다. 소설에서 그는 아침에 있을 화상 회의를 탈없이 할 수 있도록 밤새 작업하고 있다. 그의 일은 다른 이들을 서로 연결해주는 것이지만 정작 그는 어디에도 연결되지 않는다. 아내도 있지만 그는 철저히 혼자다. 마리와 같은 존재인 것이다. 마리와 똑같이 그는 그 상황을 관통하려고 하지 않는다. 거의 피부와 같아져버린 가면을 쓰고서 그렇지 않은 척 연기를 한다. 타인들에게 펼쳐보이는 능수능란한 연기는 그만큼 그저 달아나고만 싶은 그의 열망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도망칠 수 없다'는 전화 속 목소리 그대로 시라카와는 한계에 봉착한다. 중국인 소녀에게 한 이유없는 폭력이 그것이다. 심하게 폭력을 휘둘렀음에도 다른 건 하나도 기억에 안 남고 오직 욱신거리는 손의 통증으로 폭력만 기억난다는 점에서 그의 폭력이 실은 한없이 엷기만한 그의 존재감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걸 짐작할 수 있다. 남자들이 자신의 미약한 존재감을 지워버리려 폭력을 휘두르는 것을 우리는 왕왕 보지 않았던가. 이런 폭력은 차라리 항복에 가깝다. 이제 더 달아날 곳이 없다는 자백인 것이다. 그것을 우리는 '1Q84'에서 확인할 수 있다. 욱신거림은 거기서도 나온다. 바로 덴고가 회상하는 '멕베스'의 다음과 같은 대사다.


 엄지의 욱신거림이 알려주는구나,

 불길한 것이 이쪽으로 다가온다.

 노크를 하거든 그게 누구이든, 자물쇠여, 열려라.(P. 152)


 문을 열라고 요구하는 것은 NHK 수금원이다. 그는 절대 도망칠 수 없고 잊지 않는다고 말한다. '애프터 다크'의 전화 속 목소리가 하는 말 그대로다. 그 요구는 응시와 대면 그리고 관통의 요구다. 시라카와의 통증은 더이상 피할 수 없다는, 이제 관통해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는 신호와 같다. 


 이것이 대화의 요청이라면 그것은 육신의 언어이어야 한다. 그것의 강조일까? 하루키는 '애프터 다크'에서 좀 색다른 형식을 취했다. 관객의 입장을 공공연히 내세운 것이다. '알파빌'이 인용되었으니까 하는 말인데 '알파빌'은 프랑스의 영화 감독 장 뤽 고다르의 유명한 SF 영화다.



 하지만 지금 여기서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영화가 아니다. 장 뤽 고다르가 영화를 만들면서 취했던, 하루키 식으로 말하자면 고다르의 '애티튜드'다. 고다르는 브레히트의 영향을 받아 관객이 영화에 몰입하도록 만드는 것을 싫어했다. 그래서 영화가 실제가 아니라 환영에 지나지 않음을 관객들에게 지속적으로 일깨워주려고 했다. 그것이 바로 고다르의 특기라고 알려진 '점프컷'이었다. 레코드의 바늘이 튀는 것처럼 장면이 갑자기 튀어보인다고 해서 붙여진 그 이름은 관객들에게 지속적으로 지금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이 환영임을 주지시켰다. 다름아닌 브레히트의 '소외효과'를 응용한 것이었다. '알파빌'도 거기에 속했다. 늘 해왔던 그대로 고다르는 이 영화에서도 영화 속 세계가 허구와 관념의 집적에 지나지 않음을 알렸다. 그것을 통해 고다르가 원했던 것은 행위였다. 관객의 눈이 수동적인 거울이 아니라 능동적인 카메라가 되는 것이었다. 보여주는 것을 반사하는 게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것을 담도록 하는 것. 자신만의 사유가 동반된 그 적극적인 시선이 고다르가 원하는 것이었다.


 '애프터 다크'에서 하루키가 취한 형식도 근본엔 그런 마음이 있다. 하루키도 독자의 눈이 카메라가 되기를 원한다. 그래서 계속 독자들의 마음에 카메라를 상상시키는 문장을 던진다. 이런 식으로 고다르와 똑같이 소외효과를 주면서 독자를 작품에 대한 보다 능동적인 참여자로 만든다. 이 소설에 서려 있는 몽환과 불가해함도 마찬가지다. 몰입이 아니라 소외를 통하여 더 많이 보도록 하고, 듣도록 하며 생각하도록 하려는 것이다. 소설은 온전히 힘을 다해 독자를 움직이도록 한다. '나이트호크'의 그림에서 당신이 중심에 있다면 경계에 있는 자들에게 손을 건네게 하고, 등을 보인 남자라면 스스로 일어나 거기로 걸어갈 수 있도록. 그렇게 '애프터 다크'는 우리들에게, 이미 찾아왔거나,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어둠'을 관통하는 방법을 일러준다.


  결국 모든 것은 손이 닿지 않는, 깊은 갈라진 틈새 같은 곳에서 벌어졌던 일이다. 한밤중부터 날이 밝을 때까지 그런 곳이 어딘가에 은밀히 암흑의 입구를 연다. 그 곳은 우리의 원리가 아무런 효력을 갖지 못하는 장소다. 언제 어디서 심연이 사람을 집어삼킬지, 언제 어디서 토해낼지 아무도 예견하지 못한다.(P. 210)


 정말로 그렇다. 그렇기에 더욱 우리는 피하려고만 하고 달아나려고만 하는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심연은 결코 우리를 잊지 않는다. 놓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정말 변해야 하는 것은 그것이 아니다. 바로 나인 것이다. 심연은 존재 자체로 내가 변해야 한다는 것의 증언이다. 필요한 것은 밀실로의 도피가 아니라 문을 열려는 손짓임을 알려주는.


 우리는 계속 막힘없이 흘러야 한다. 변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애프터 다크'에 음악이 무수히 나오는 까닭이 아닐까 싶다. 소설에서 이름 모를 작은 바의 바텐더는 이렇게 말한다. 


 한밤중엔 한밤중의 시간의 흐름이 있단 말이지.(...) 그걸 거역해봤자 소용없어. (P. 78)


 그 흐름의 시간에 우리가 순종해야 할 유일한 명령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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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방살의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65
나카마치 신 지음, 최고은 옮김 / 비채 / 2015년 9월
평점 :
절판


 읽기는 투명한가? 진정 글은 독자에게 자신의 존재를 마치 나신처럼 온전히 드러내고 있는가? 읽으면서 우리는 책에서 진실을 투명하게 길어내고 있다고 여기지만 실은 오로지 우리의 착각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닐까? 나카마치 신의 ‘모방 살의는 먼저 그런 의문을 막 쪄낸 만두에서 피어오르는 김처럼 무럭무럭 가지게 만드는 작품이었다. 놀랍게도 이 작품은 1971년에 나온 것이었다. 무려 44년 전의 작품! 하지만 세월의 격차가 줄 수 있는 낡은 느낌은 병따개로 따는 사이다 병 말고는 그 어디서도 느낄 수 없었다. 갓 나온 신작만큼이나 책은 따끈따근했고 그랬기에 막 배어 문 앙꼬의 뜨거움처럼 입을 호들갑 떨게 만드는 여운도 상당했다. 과연 어떤 작품이기에 이런 말을 하나 궁금해하실 분들을 위하여 줄거리를 간단히 소개해 본다.



 7월 7일, 오후 7시. 한 남자가 3층 자신의 방 창문에서 떨어져 죽는다. 이름은 사카이 마사오. 떨어질 때 이미 청산가리를 마신 상태였다. 방에 있는 뚜껑이 개봉된 사이다 병에서 청산가리가 발견되었다. 사카이 마사오는 사이다를 컵에 따라 마신 뒤에 청산가리로 괴로워하다 그만 창문으로 떨어져 죽은 것이었다. 당시 방은 밀실이었다. 유일하게 방으로 들어올 수 있는 열쇠는 두 개 있었는데 하나는 건물 관리인이 가지고 있었고 다른 하나는 사카이 마사오가 직접 자신의 지갑 속에 지니고 있었다. 다른 사람이 열쇠를 가지는 것은 불가능했다. 침입의 흔적은 없었고 범인에게 저항한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사카이 마사오란 남자는 원래 추리 작가로 신인상까지 수상하면서 화려하게 데뷔했으나 그 뒤 오래도록 두 번째 작품을 쓸 수 없어서 엄청 괴로워하고 있었다. 그러다 최근 겨우 작품을 완성하고 잡지에 게재했는데 그것이 그만 바로 얼마 전에 작고한 명망 있는 작가 세가와 고타로의 잘 알려지지 않은 단편을 표절한 것으로 밝혀져 더 큰 어려움에 빠져 있었다. 경찰은 그런 정황에 힘입어 작가로서의 생명이 끝났다는 것에 절망하여 자살한 것으로 결론 짓는다. 하지만 두 사람이 ‘과연 자살일까?’ 의혹을 품는다. 하나는 사카이 마사오의 연인, 나카다 아키코. 다른 하나는 동료 작가, 쓰쿠미 신스케다.


 나카다 아키코는 출판사 편집자로 사카이 마사오가 표절했다는 세가와 고타로의 딸이기도 하지만 표절 사실은 전혀 모르고 있다. 문학에는 전혀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그녀가 의혹을 가지게 된 계기는 다른 데 있었다. 그건 두 가지다. 하나는 예전에 사카이 마사오 집에서 우연히 만난 도가노 리쓰코란 여자. 그리고 다른 하나는 '300만엔이나 되는 큰 돈을 받기로 되어 있다'라던 사카이 마사오의 말이다. 리쓰코를 처음 보았던 날, 아키코는 그녀가 마사오에게 거금 50만엔을 준 것을 알았다. 분명 300만엔도 그녀와 관련되어 있을 것이라 짐작한 아키코는 마사오의 죽음이 그 돈과 연결되어 있으리라 생각하고 리쓰코를 추적한다. 그러다 리쓰코의 언니 마사코의 아이가 유괴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뒤에 아키코는 리쓰코와 마사오가 같이 그 아이를 몸값을 목적으로 유괴한 것은 아닐까 의심한다. 마사오는 아직 300만엔을 받지 못했다. 그렇다면 리쓰코가 몸값을 가로챌 목적으로 살해했을 지도 모른다. 그런 의혹으로 아키코는 리쓰코의 7월 7일 알리바이를 세밀히 파헤친다. 하지만 드러난 그녀의 알리바이는 그야말로 철벽이다. 과연 리쓰코는 마사오의 죽음과 아무 관계가 없는 것일까?


 한편 쓰쿠미 신스케는 전혀 다른 용의자를 가지고 있다. 바로 계속해서 사카이 마사오의 원고를 거절해 온 부편집장 야나기사와란 남자다. 즉 사카이 마사오에게 작가의 절망을 한껏 가져다 준 장본인인 것이다. 하지만 신스케가 그 사실로 의심하는 것은 아니다. 정말은 야나기사와의 여동생이 사카이 마사오 때문에 열차에 뛰어들어 자살했다는 것을 알게된 것이 시작이었다. 원고 거절은 거기에 대한 야나기사와의 복수가 아니었을까 하고 신스케는 생각한다. 그러던 차에 표절 사건이 터졌다. 표절한 사카이 마사오의 단편이 실렸던 잡지는 마침 야나기사와가 일하는 출판사의 것이었다. 표절한 작품을 미리 걸러내지 못하고 잡지에 게재한 데 대한 책임을 물어 편집장은 사퇴하고 대신 야나기사와가 편집장이 된다. 편집장은 야나기사와의 오랜 꿈이었다. 그는 비로소 꿈의 자리에 오른 것이다. 그런데 야나기사와는 세가와 고타로의 열혈 팬이었다. 신스케는 야나기사와가 사카이 마사오가 표절했던 세가와 고타로의 단편을 절대 모를 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잡지에 게재되도록 방치한 것은 야나기사와에게 두 가지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여긴다. 하나는 표절이 드러나 사카이 마사오의 작가로서의 경력이 완전히 끝장나 복수를 완성하는 것. 다른 하나는 오래도록 염원인 편집장 자리를 차지하는 것. 그 두 가지 목적을 야나기사와는 훌륭히 완수했다. 그런데 전혀 예기치 못했던 사실이 밝혀진다. 사카이 마사오가 아니라 거꾸로 세가와 고타로가 사카이 마사오의 단편을 표절했다는 게 드러난 것이다. 이것이 알려지면 야나기사와의 모든 목적이 수포로 돌아간다. 그 입막음을 위해 야나기사와가 사카이 마사오를 살해한 것은 아닐까? 그런 의혹으로 신스케는 야나기사와의 7월 7일 알리바이를 조사한다. 그러나 야나기사와의 알리바이 역시 리쓰코 만큼이나 빈틈이 없다. 과연 야나기사와도 마사오의 죽음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일까?


 이렇게 ‘모방 살의’엔 두 명의 탐정 역할을 하는 사람과 두 명의 용의자가 등장한다. 두 명의 탐정은 서로의 존재를 모른 채로 각자 찾아낸 단서를 가지고 자신만의 용의자를 쫓는다. 그런데 탐정들만큼이나 용의자들 또한 서로 아무런 접점이 없다. 설령 탐정들의 생각대로 사카이 마사오가 살해된 것이라라 해도 공범의 가능성은 전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리쓰코와 야나기사와, 이 둘 중에 누가 진짜 범인일까? 과연 어떤 탐정이 진범을 쫓고 있는 것일까? 탐정인 나카다 아키코와 쓰쿠미 신스케, 이 둘의 입장에서 서로 병행하면서 전개되는 이 소설은 이런 아주 흥미로운 궁금증을 유발한다. 그러다 비슷한 시점에서 나카다 아키코와 쓰쿠미 신스케가 똑같이 리쓰코와 야나기사와 알리바이의 중대한 허점을 찾아냈을 때는 ‘와우! 이거 정말 누가 진짜 범인이야?’ 하는 생각에 끝까지 손에서 책을 놓지 못하게 된다. 


 그런데 말이다. 그렇게 읽다보면 ‘제4부 진상’에서 일본 지진관측사상 최대이며 한신과 고베 대지진을 일으켰던 진도 7.2의 지진이 바로 나의 뇌리에서 일어나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서서히 '나는 도대체 무엇을 읽어왔던가' 하는 자문을 시작으로 이 글 처음에 적어놓았던 숱한 의문들이 여진처럼 덮쳐오면서 그것의 파고에 떠밀리듯 손이 저절로 앞장을 다시금 펼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미스터리 장르 중에 이런 일을 꼭 하게 만드는 것이 있지 않았던가? 맞다. 아야츠지 유키토의 '십각관의 살인'이 그랬고, '미로관의 살인'도 그랬다. 아비코 다케마루의 '살육에 이르는 병'은 또 어떠한가? 그리고 오리하라 이치의 '도착 시리즈'는? 모두 결말에서 세차게 뒤통수를 맞고선 얼얼한 뇌리를 달래며 내가 놓친 것이 무엇인가 하는 마음으로 다시 한 번 작품 전체를 복기하게 되지 않았던가! '모방 살의'도 마찬가지다. 여기에도 서술 트릭이 존재하는 것이다. 책의 뒷 표지에 아예 '서술 트릭의 시작'이라고 적어 놓았으니 이 정도는 밝혀도 문제 없으리라 생각한다. 일본 추리 소설사에서 서술 트릭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 지는 잘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서술 트릭의 대표작 대부분이 87년 이후로 나온 것을 보면('십각관의 살인'은 87년, '살육에 이르는 병'은 92년, '도착 시리즈'를 여는 '도착의 론도'는 89년에 나왔다) 71년에 나온 '모방 살의'를 그 시작이라고 불러도 그렇게 무리가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이는 서술 트릭이 일본 추리 소설에 있어서  실은 꽤나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바로 그 초창기 형태를 '모방 살의'에서 확인할 수 있음을 알려준다. 이 소설이 44년의 시간을 넘어 불현듯 우리 앞에 나타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2012년에 대형 서점인 '분쿄도'에서 '다시 만나고 싶은 복간 희망 도서'로 선정된 후, 불과 반 년만에 무려 34만부나 판매된 까닭이 컸을 터인 데 거기엔 분명 이러한 역사적 의의도 단단히 한 몫했을 것이다. 하지만 서술 트릭만으로 이 작품의 평가를 퉁치는 건 지극히 곤란하다. 줄거리 소개에서 밝혔듯이 여기엔 밀실 트릭알리바이의 허점 찾기 그리고 용의자 한정 하기 등, 본격 미스터리의 특성 또한 농후하기 때문이다. 책을 읽고난 뒤에 '모방 살의'라는 제목에서 엘러리 퀸의 대표작인 'Y의 비극'의 아우라를 느끼는 것은 비단 나만은 아닐 것이다. 그만큼 본격 미스터리에도 충실하며 사실 서술 트릭은 이 소설을 재밌게 만들기 위한 장치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니다. 때문에 본격 미스터리를 좋아하는 사람도, 서술 트릭을 좋아하는 사람도 모두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작품으로 보인다. 그러니 단기간내에 34만부 판매라는 놀라운 기록도 이룰 수 있었으리라.



  4부인 진상은 위와 같이 시작한다. 엘러리 퀸의 '독자에의 도전'을 흉내내고 있는 것이다. 서술트릭만 생각했다면 여기서 은근히 부아가 치밀어 오를 지도 모른다. 서술 트릭은 무엇보다 덫 안에 놓인 치즈처럼 독자가 알아야 할 중요한 사실을 빠뜨리거나 혼동하게 하여 얼마나 독자 스스로 자신이 읽은 것에 대하여 오류를 일으키도록 유인할 수 있느냐에 그 성공 여부가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유인이 성공적일수록 충격은 더 크고 그만큼 트릭은 굉장해진다. 그러니 파편화된 진술과 모호한 서술은 서술 트릭의 동맥과 마찬가지다. 그런 면에서 독자들이 온전하지 않은 문장들로 뭔가 당했다는 느낌과 함께 공정치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되어도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모방 살의'도 그런 느낌을 줄 수 있다. 하지만 오해에 지나지 않는다. 재독해 보면 작가가 곳곳에 단서를 놓아두었음을 알게 된다. 무엇보다 아키코가 리쓰코가 자신의 알리바이를 증명하기 위해 내놓았던 사진의 트릭을 푸는 순간 보았던 것은 가장 핵심적인 단서라 작가가 너무 무모하지 않나 생각될 정도이다. 작가는 공정하게 플레이하고 있다. 그러니 저 사진처럼 거리낌없이 독자에게 도전할 수 있는 것이다.


 때문에 나 역시 아주 오랜만에 다른 것은 하나도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미스터리 해결 자체에만 몰입해 읽을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작가 앞에 무릎을 꿇었지만 말이다. 크흑! (앞서 떠올렸던 의문에 대해서도 나름 이야기를 하고 싶지만 그 때문에 책이 가진 순수한 재미가 왜곡될까봐 그만두련다. 이 책은 온전히 읽는 재미로만 다가가는 게 좋을 것 같다.)


 나는 본디 '문신 살인사건'의 다카기 아키미쓰처럼 순수한 애호가에서 자신이 정말 읽고 싶은 것을 쓰기 위해 추리 소설 작가까지 된 이들의 소설을 좋아한다. 그런 이들의 작품은 아무래도 '작가로서의 의욕'이라는 창작자의 입장이 아니라 '독자로서 느끼는 재미'라는 수용자의 입장에 바탕을 두고 쓴다는 것이 느껴지는 까닭이다. 나카마치 신도 여기에 속했다. 그 역시 추리 소설에 대한 순수 애호가에서 작가가 된 사람이었던 것이다. 원래 교과서 회사에 다니던 작가는 ‘쥐꼬리만한 월급과 상사의 부당한 대우’를 견디지 못해 직장을 그만두고는 ‘실업 급여와 하루 600엔의 택배 아르바이트’로 연명하는 생활을 반 년 정도 했다. 경제적으로는 곤궁했지만 영혼만큼은 한없이 자유로웠던 그 때, 그는 추리 소설의 세계를 무한정 접했다. 그리고 그것이 가진 매력에 너무나 푹 빠져버린 나머지 자신이 직접 추리 소설을 써 볼 결심까지 하게 되었다. 결국 신인 추리 소설 작가의 등용문이라고 할 수 있는 ‘에도가와 란포상’에까지 투고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모방 살의’의 모태가 되는 단편인 ‘그리고 죽음이 찾아온다’였다. 최종 후보에까지 오르는 기염을 토했으나 정작 수상은 하지 못했다. 하지만 굴하지 않고 그 단편을 바탕으로 장편을 탈고했으니 그것이 지금 우리가 만난 '모방 살의'였다.


 실직하고 나서야 비로소 미스터리 세계에 눈을 뜨고 작가까지 되었다는 점에서 다카기 아키미쓰와 많이 비슷한 것 같다. 그래서 더욱 '문신 살인사건'에서 느꼈던 '애호가만이 줄 수 있는 재미'를 똑같이 '모방 살의'에서도 느낄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싶다. 그런 까닭에 작가 개인에게 여러모로 정이 많이 가고 다음 작품이 많이 기대되지 않을 수 없다. 다행히 그의 서술 트릭이 한층 더 정교해졌다는 평을 받는 '천계 살의'가 재빨리 출간되었다. 이 책은 '모방 살의'가 나온 지 9년 후에 출간된 작품이다. 그동안 그가 또 얼마나 진화했을 지 궁금하다. 얼른 만나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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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더스 블랙 로맨스 클럽
리사 프라이스 지음, 박효정 옮김 / 황금가지 / 2015년 8월
평점 :
절판


 '엔더스(Enders)'는 리사 프라이스의 디스토피아 소설 '스타터스'의 속편이다. '스타터스'에서 그리고 있는 세계는 아마도 10대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최악이라 할 수 있다. 전쟁에서 사용된 포자 형태의 생물학 병기로 인해 중장년들('스타터스' 세계에서는 '미들'이라 부른다.)이 모조리 죽고 오로지 미성년자와 노인 밖에는 없는 세상이다. 그 세계에서는 미성년자를 '스타터(STARTER)'로 노인을 '엔더(ENDER)'로 부른다. 이름의 의미는 단순하다. 이제 막 삶을 시작(START)하는 나이이기에 스타터고, 인생의 종막(END)에 접어들었기에 엔더인 것이다.



 중장년들이 없어졌다는 게 왜 최악이야 하고 궁금하실 분들이 있을텐데 물론 그것이 최악은 아니다. 진짜는 지금부터다. 미성년자들에게 부모가 될 중장년들이 모두 사망했으니 당연하게도 도시엔 부모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미성년자들이 엄청 많다. 이들은 홀로 생존해나가야 하는데 근로권을 비롯하여 누릴 수 있는 사회적 권리가 거의 없는 편이다. 구걸과 절도가 아니면 살아갈 수 없는 환경이라는 것이다. 부와 권력은 모조리 노인들 차지고 그들의 보호를 받는 스타터들만이 풍족한 삶을 산다. 그 세계에서 미성년자는 노인보다 우월할 수 있는 것이  딱 하나밖에 없다. 바로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젊음'이다. 그들을 부르는 '스타터'라는 말 자체에 담겨 있듯이 '엔더'라 불리는 노인에 비해 월등하게 강한 육체에 담긴 싱그러운 생명력이 그들이 자랑할 수 있는 유일한 자산인 것이다. 하지만 이제 그마저도 지키기 어렵게 되었다. 엔더들이 젊은 그들의 몸을 차지하기 위하여 '바디 뱅크'라는 것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그것은 스타터의 두뇌에 칩을 넣어 그 칩으로 엔더의 의식과 링크하여 엔더가 스타터의 육체를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게 만든다. 얼른 이해가 안된다면 영화 '아바타'를 떠올리면 될 것 같다. 주로 10대 청소년들의 육체가 그 대상이 되는데 그렇게 노인의 의식에 지배된 청소년을 '렌터(RENTER)'라고 한다. 그렇게 틀린 명칭은 아니다. 정말로 렌터가 된 청소년들의 육체는 렌트카와 다를 바 없으니까. 살인을 제외한 그 어떤 행동도 할 수 있기 때문에 엔더는 노인의 육체로는 못하는 온갖 익스트림 스포츠와 약과 술 그리고 섹스로 넘쳐나는 문란하기 그지 없는 환락을 즐긴다. 그것을 두고 소설에서 누군가 비아냥거리듯 말한다. 렌터가 된 엔더들은 렌트한 육체보다 자신의 차를 더 소중히 한다고. 이 말 그대로다.


 전작 '스타터스'는 주인공인 10대 여성 '켈리'가 아픈 동생 '타일러'의 치료비를 구하기 위해 '바디 뱅크'에게 육체를 대여했다가 전체 스타터들의 운명을 좌우하는 거대한 음모에 휩쓸리게 되는 이야기였다. 그 모든 음모의 배후에는 '올드맨'이란 수수께끼의 인물이 있었는데 그는 결국 잡히지 않고 끝난다. '엔더스'는 바로 그 올드맨과 켈리가 치르는 마지막 결전이다.


 일단 되도록 '엔더스'를 읽기 전에 '스타터스'를 먼저 읽으시라고 간곡하게 부탁드리고 싶다. '엔더스'의 이야기 자체로는 전작을 읽지 않아도 따라가는데 무리가 없으나 이 '엔더스'에서 '스타터스'의 놀라운 반전들이 다 밝혀지고 있기 때문에 거꾸로 읽으면 '스타터스'가 지닌 뛰어난 서스펜스의 감칠맛이 휘발되기 때문이다. '스타터스'는 정말 재밌다. 신체 대여 장르가 주는 정체성의 의혹과 반전을 잘 살려낸 작품으로 끝까지 뒷 페이지를 넘기는 흥미를 유지한다. 아마도 마지막 반전에선 꽤나 놀라게 되지 않을까 싶다. 물론 '엔더스'에게도 그만한 반전이 있다. 작가 리사 프라이스는 렌트된 육체의 진짜 정체성은 아무도 알 수 없다는 것을 가지고 능수능란하게 독자의 허를 찔러 반전을 만드는데 특출난 재능이 있는 것 같다. 도입부'는 '엔더스'가 더 굉장하다. 켈리가 우연히 예전에 알던 렌터를 만나 뒤따라갔는데 그만 눈 앞에서 그 렌터가 말 그대로 폭발해 버린 것이다. 알고보니 그 폭발은 올드맨이 일으킨 것이었고 그는 렌터의 뇌 속에 이식된 칩을 마음대로 폭발시킬 수 있었다. 이제 켈리는 자기뿐만 아니라 똑같이 칩을 이식당한 남자 친구 마이클과 동생 타일러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올드맨을 찾아야 할 상황이다. 그런데 그것은 사실 올드맨이야말로 바라는 것이었다. 그도 켈리가 필요했던 것이다. '스타터스'에서 켈리의 칩은 모종의 개조를 당했다. 덕분에 한 명만 접속할 수 있었던 칩이 여러 명이 동시에 접속할 수 있는 칩이 되어 버렸다. 다수의 엔더들이 하나의 육체를 소유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올드맨은 거기서 훌륭한 도구 혹은 병기로서의 효용성을 깨닫는다. 하나의 육체를 여러 명의 전문가가 동시에 접속하여 일한다면 그 육체는 얼마나 뛰어난 능력을 발휘할 것인가! 올드맨은 그 칩을 필요로 한다. 켈리의 뇌에서 떼내어 분석하고 연구해서 대량 생산할 수 있도록. 이렇게 켈리와 올드맨은 누군가 하나 떨어져야만 건너갈 수 있는 외나무 다리를 사이에 두고 서로를 노려보며 다가서고 있다.


 '렌트 가능한 신체'는 SF의 고전적 아이디어 중의 하나다. 내 기억으로 그 시초는 아마도 로버트 셰클리의 '불사판매 주식회사'일 것이다.



1959년에 나온 이 소설은 영혼과 내세가 정밀하게 규명되고 그리하여 영혼 이식 기술이 발달한 22세기를 그리고 있다. 거기서 '불사판매 주식회사'는 부유한 자들의 불사를 위해 과거의 죽기 직전의 사람들을 타임 슬립시켜선 그들의 몸을 부유한 자들에게 영구 임대한다. 이 소설은 그 자체로 당대 자본주의에 대한 선명한 비판이 되었는데 자본주의 사회에 들어와 더욱 가속화된 노동 착취 상태에 있어서도 노동자들은 자신의 육체 그리고 정신만은 자기 것으로 보유할 수 있었다. 그런데 셰클리의 '불사판매 주식회사'는 그마저도 자본주의는 착취할 것이라 예언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몹시도 불길한 예언이었지만 이제 우리는 그것이 실현되었음을 보고 있다. 바로 '신자유주의'에서 말이다. 미셀 푸코는 신자유주의가 다름 아니라 노동자들의 육체와 정신을 자본가처럼 만드는 것이라 간파했다. 자본가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신자유주의가 우리에게 궁극적으로 하고자 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정말로 이제 사람들은 자기계발서를 열심히 읽고 노동의 권리 보다 기업의 이익을 더 칭송하며 복지 보다 경쟁을 더 선호한다(물론 복지 역시도 원래는 노동 계급의 연대를 무너뜨리기 위해 나온 것이었지만.) 부자들이 원하는 방식대로 생각하고 행동하고 있는 것이다. 덕분에 현재 가정과 정부는 빚더미에 올라 앉았는데도 편파적인 기업 절세로 대기업의 사내 보유액은 9백조에 달하는 실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불황과 살인적인 고용란에도 대기업은 조금의 희생조차 하지 않으려 하며 말도 안되는 임금피크제 같은 것으로 노동자의 임금만 어떻게든 줄이려 한다. 그런 상황인데도 대다수의 사람들은 남의 일이라는 듯이 강건너 불구경만 하고 있으니 셰클리의 예언이 이루어졌다고 보아도 무방하지 않을까.


 거기다 그것을 획책하고 있는 정당을 압도적으로 지지하고 있는 연령층을 감안한다면 '스타터스'와 '엔더스'의 이야기도 그저 공상만은 아닌 것 같다. 그렇지 않아도 '고령화 사회'는 소수의 젋은 세대가 다수의 노인 세대를 부양하게 된다. 출산율은 갈수록 떨어지고 의료 기술의 발전으로 인간 평균 수명은 자꾸 늘어나기만 하니 젊은 세대에 부과되는 짐은 시간이 흐를수록 무거워질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이면 젊은 세대들이 과연 자신의 육체를 자기의 것으로 여길 수 있을까 싶다. 육체가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부양에 따르는 온갖 사회적 의무의 쇠사슬로 칭칭 감겨져 있을테니 말이다. 그런 면에서 '스타터스'와 '엔더스'도 '불사판매 주식회사'처럼 예언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점차 진전되고 있는 고령화 사회, 그만큼 전면화 될 세대 착취를 우려하여 세대가 공존할 수 있는 활로를 이제라도 찾자는 뜻에서 한 편의 소설로 형상화 된 예언. 너무 앞서 나간 말일 수도 있지만 이 소설을 읽으면 아무래도 이렇게 생각하게 된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나라도 가열차게 '고령화 사회'로 나아가고 있는데다 다수의 노년들이 렌터가 된 엔더의 모습을 보이고 있으므로. '스타터스'와 '엔더스'는 실은 바로 그 노년들에게 읽히고 싶은 작품이다. 암울하기 그지 없는 미래를 앞둔 젊은 세대들을 부디 좀 헤아려 달라는 간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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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주목 신간 작성 후 본 글에 먼댓글 남겨 주세요.

  하면 은근히 마음의 짐이 되는데 안하면 좀이 마구 쑤시는 신간평가단. 행여나 정말 읽고 싶은 작품들이 선정되면 차암 부럽기도 하고.

  하여 다시 하게 되었다. 한동안 안 썼던 신간 추천글을 이렇게 쓰노라니 마치 처음 신간 평가단이 되어 글을 쓰는 듯한 느낌이다. 그래서 그 기분에 걸맞게 뭔가 변화를 주고 싶었다. 예전엔 신간 추천글을 쓸 때, 진짜 읽고 싶은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가리지 않고 나열하기만 했는데 이번엔 정말 읽고 싶은 것들은 따로 선별하기로 했다. 이러면 좀 더 추천글다워지지 않을까 싶어서다. 그것들을 'MOST WANTED'에 담는다. 그 외의 것들, 그러니까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꼭 읽고 싶은 작품들은 'SO SO...'에 담는다. 그렇게 첫 신간 추천을 해 본다.


  MOST WANTED


 지금 가장 읽고 싶은 책은 단연 이 것이다.

 책이 나오기 전에 댄 시먼스의 '올해의 학급 사진'을 사전 연재로 읽어봤는데 정말 굉장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수많은 좀비물을 읽고 보았기에 더 이상은 새로울 것도 흥미도 긴장도 자아내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댄 시먼스는 마치 좀비물을 처음 접했을 때의 재미와 긴장을 커다란 찜통 단위로 들이붓고 있었던 것이다. 역시 프로는 프로구나 하는 것을 가득 느꼈다고나 할까. '히페리온 시리즈'나 '일리움'을 쓸 수 있는 정도의 작가는 좀비물이라는 흔한 재료로도 이렇게  미슐랭 가이드 스타급의 음식을 내어놓을 수 있구나 감탄했다. 물론 어느 정도 설정상의 허점은 있었지만...


 그러니 이 책에 대한 기대가 커질 수밖에 없었다. 스티븐 킹, 조지 R. R 마틴, 클라이브 바커 같은 쟁쟁한 프로 작가들의 좀비물은 과연 어떤 맛일까 궁금했던 것이다.

 여러 번 클리어한 게임처럼 좀비물에 식상해 있는 나에게 부디 이제껏 몰랐던 숨겨진 스테이지를 문득 발견한 것처럼 새로운 긴장과 재미를 가져다 주기를 기대한다.



 창비에서 나온 '아디오스'에 이어 두 번재로 소개되는 우루과이 작가 후안 카를로스 오네티의 작품이다.

 1961년에 나온 조선소는 흔히 말하는 '산타마리아의 사가'에 속하는 작품이다. 오로지 산타마리아만 배경으로 하기에 그런 이름이 붙었다. 창비에서 나온 '아디오스'가 '산타마리아 사가'의 첫 작품이다. 출간은 1954년.



 '조선소'는 사가의 세번째에 해당하는 작품이다. 산타마리아 사가는 모두 여섯 작품인데 79년 '바람이 얘기하리라'가 그 마지막이다. 거기서 산타마리아 도시는 불에 타 버린다. 산타마리아 사가는 연속된 작품이라 전작을 읽지 않고서는 이야기를 따라가기가 어렵다고 알려져 있다. 그래서 창비도 첫 작품부터 출간한 것이다. 그런데도 이렇게 세번째 '조선소'가 나온 것은, 물론 오네스의 가장 대표작이라는 이유가 크겠지만 그나마 전작을 읽지 않고도 이야기를 따라갈 수 있는 산타마리아 사가의 유일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장부상으로만 존재하는 '조선소'를 둘러싼 탐욕과 광기의 이 이야기는 당시 우루과이 상황을 알고 읽으면 더욱 재밌을 것 같다. 오르도녜스 대통령 집권(1903~1929) 당시 민주주의적 제도와 사회 복지 제도의 구현과 정착으로 전 세계로부터 성공적인 체제의 모델로 인정받은 우루과이는 30년대 대공황을 계기로 테라 대통령이 쿠데타를 일으켜 독재의 늪으로 빠져버려 이전의 빛나는 과실들을 모조리 섞은 것으로 바꿔버리고 마는데 소설에서 껍데기만 남은 조선소는 오르도녜스의 우루과이를, 정부의 지원금을 받기 위해 허상의 조선소를 존속시키는 사주는 58년 선거로 정권을 잃기까지 계속 집권해 온 콜로라도 당을 은유한다고 해도 그리 무리가 있을 것 같지 않다. 콜로라도 당에게서 93년만에 정권을 탈환한 블랑코당은 19세기에 우루과이가 식민지에서 독립할 때부터 콜로라도 당과 함께 있었던 존재로 둘은 서로 대립해 독립 당시에 이미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아르헨티나의 지원을 받아 내전까지 치른 바 있는데 정작 국민이 변화를 위해 블랑코당에게 정권을 주었어도 우루과이의 사정은 좋아지기는 커녕 더 나빠지기만 했다. 그런 의미에서 '조선소'에서 사주를 협박해 자신의 야욕을 실현시키려는 라르센은 블랑코 당으로 읽힐 여지를 가지고 있다. 이렇게 '조선소'는 당시 정치와 경제 양 면에서 아주 혼란스러웠던 우루과이의 반영이며 보다 깊이 들어가면 우루과이에 대한 작가의 환멸이 드러난 작품이다. '헬조선'이란 유행어로 그 비슷한 환멸이 팽배해 있는 지금. 그것이 문학적으로 어떻게 승화되는가를 지켜보는 것도 의미 있는 경험이 아닐까 싶다.



  세 가지 점에서 정말 읽고 싶은 소설이다.

 하나는 세라 워터스의 신작이라는 점.

 둘은 내가 너무도 좋아하는 고딕 호러라는 점.

 그리고 마지막 셋은 여기서는 레즈비언 이야기를 다루지 않는다는 점.

 레즈비언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그녀의 본질과도 같았던 레즈비언 이야기가 들어가지 않은 작품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팬으로써 궁금한 까닭이다.

 여기에 굳이 하나를 더하자면 스티븐 킹이 2009년 최고의 소설로 꼽았다는 것이다. 적어도 내게는 그의 추천이 신뢰할만하다.







SO SO...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젠가 꼭 읽고 싶은...)



 3. 11 이후, 여전히 후쿠시마 원전 사태의 후유증이 계속되고 있는 지금에 원전 사태가 일어나기 전까지 전후 일본 최대의 비극적 사건으로 기록된 미나마타 병에 대한 이야기를 읽는다는 것은 과연 어떤 의미일까?


 그들의 탐욕으로 사건을 일으켰음에도, 그들의 아픔이 아니기에 쉽게 과오를 무시하고 같은 잘못을 반복하고 있는 사회의 헤게모니를 쥔 가해자들의 언어가 아니라 철저하게 희생자의 언어로만 이야기하는 이시무레 마치코의 이 이야기는 지금의 체제가 쉽게 배제해 버린 생명과 삶의 언어들을 본래적 모습으로 다시금 복원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편협된 관점과 언어로 삶이 관리 당하는 것은 우리의 현재이기도 하기에 지워진 목소리들로 들끓는 이 현장으로 들어가보고 싶다.




 

 개인적인 기억으론 토니 모리슨의 소설 중에 사람 이름을 제목으로 내세운 것은 딱 두 작품, '빌러비드'와 '술라' 밖에는 없는 것 같다. 여기에 또 하나 더 개인적인 생각을 더하자면 토니 모리슨은 이렇게 사람의 이름을 제목으로 내세울 때 작품이 훨씬 더 좋아진다.


 '빌러비드'를 읽고 '술라'를 읽었을 때, 나는 이 '술라'가 혹시 '빌러비드'인 것은 아닐까 생각했었다. 술라는 자신의 어머니를 죽이고 시이드는 자신의 딸 '빌러비드'를 죽인다. 이러한 관계의 역전된 순환엔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것은 실체가 유령이 된 이유와도 관련이 있을까? 개인적으로 궁금했던 대목이었다. 절판되었던 '술라'가 새 번역으로 다시 나와 반갑다. 다시금 벗하면서 예전에 품었던 의문을 좀 더 진지하게 추적해보고 싶다.

 



 

 

 백가흠의 소설을 읽어 본 적은 없다. 그런데도 이 책에 끌렸던 것은 '세대'에 대한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하나의 세대가 중심이 되었다고 하니 얼른 독일 작가 제발트가 떠오른다. 그의 소설 중심에도 세대가 있었다. 그는 세대를 단순히 동일한 시간이 아닌 동일한 사건으로 구성되는 존재라고 여겼다. 출판사 소개글을 읽어보니 세대에 대한 백가흠의 입장도 그와 비슷한 것 같다. 둘을 비교해서 읽어보면 흥미롭지 않을까 싶어서 선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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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5-10-05 19: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번에 신간평가단 같이 하게 되었군요. 다음 번에는 추천도서 빨리 올려주세요. 헤르메스님 추천 참고 좀 하게요.(반농담입니다)^^ 아니..근데 단지 농담만은 아니고요, 제가 소설(특히 외국소설) 쪽은 많이 잘 몰라서, 진짜 그래야할 듯 싶기도 합니다. 아무튼 일단 저랑 겹치는 책이 몇 권 있어서 반갑습니다.^^

오드득 2015-10-05 22:01   좋아요 0 | URL
저도 맥거핀님이랑 함께 되어 기쁘더라구요. 그러고 보니 신간평가단을 함께 하는 건 처음이군요^^ 저는 사실 후발주자의 이점으로 쓸 때 맥거핀님의 리스트를 많이 참고 했습니다. 하하^^ 저는 워낙 팬더 같은 데가 있어서 닥치지 않으면 잘 하지 않는 아주 안 좋은 습성이 있어요 ㅠ ㅠ 고치려고 노력을 참 많이 하는데 요 천성이 티라노사우르스급이라 잘 옮겨지지 않네요ㅠ ㅠ 그래도 다음 추천글을 맥거핀님의 말씀도 있고 하니 빨리 쓰겠습니다.^^
 
실종느와르 M 케이스북 - OCN 드라마
이유진 극본, 실종느와르 M 드라마팀.이한명 엮음 / 비채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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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스북을 많이 보진 않았지만 감히 케이스북의 모범 같은 책이라 부르고 싶다. 설령 드라마를 보지 않았었도 이 책 하나만으로 드라마 완전 정복이 가능함! 사라져야 비로소 보이는 사람들에 담겨진 의미들이 텍스트를 통해 더욱 선명하게 되살아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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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5-10-29 0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르메스님 안녕.

얼마전까진 오래 노트북이 고장나서 봐도 글을 쓰기가 어려워 대체로 댓글을 안했는데 한달 되어가나 이제 노트북 샀거든요. 속도도 빠르고 자판도 다다다다 잘 써져요.

이 책 신간 훑다가 보고 이런 게 있었네..했는데 케이스북은 대체 뭔가요? 당시 저 드라마 되게 좋았는데, 드라마는 길었는데 어떻게 책에 담겼는지..(왜인지 이런 게 궁금..)

오드득 2015-10-30 13:26   좋아요 0 | URL
와, 아이리시스님 오랜만이에요^^ 와우, 노트북 새로 장만하신 거 축하드려요. 제것도 지금 메모리가 한계에 달하기라도 했는지 성능 저하가 커서 더욱 부럽네요^^;

아, 케이스북이랑 쉽게 말하며 DVD로 치면 코멘터리 정도로 보면 되지 않을까 싶어요. 드라마의 제작에 관계된 이런저런 세부정보들이랑 에피소드들을 정리해 보여주는.
저도 이 드라마를 좋아해서 보게 되었는데 특히 에피소드에 대해선 기대 이상으로 잘 정리해 보여주더군요. 전 이 책으로 보고서야 첫 에피소드가 굉장히 좋은 것이었구나 느꼈어요. 드라마가 마음에 드셨다면 한 번 읽어볼만한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