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프터 다크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64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15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애프터 다크'를 읽다가 에드워드 호퍼의 '나이트호크'란 그림이 생각났다. 

 시간적 배경이 그림과 비슷하고 공간 역시도 그림처럼 식당이기 때문인지 모른다. 차이가 있다면 그림 속의 식당은 사람이 얼마없지만 소설 속 식당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다는 정도랄까. '나이트호크'는 1942년에 발표된 작품으로 진주만 이후 미국이 한참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고 있을 무렵에 그려졌다. 그림에서 등을 보이고 앉은 남자는 홀로 있는 데다 대화에서마저 소외되어 더욱 외로워 보이는데 호퍼가 그림을 통해 전달하고자 했던 느낌은 바로 그 남자에게 있는 지 모른다. 그도 그럴 것이 그림 속의 식당은 전면 유리로 외부에 한없이 개방되어 있는 것 같지만 사실 들어가는 입구가 존재하지 않는다. 게다가 약간 비튼 각도로 그려져 보고 있는 관객에게 더욱 거리감을 느끼게 한다. 평행하게 그려져 있는 내부의 바와 외부의 식당 벽은 겹겹인데다 높낮이마저 중심으로 갈수록 높아서 그 자체로 관객에게 저 외로운 남자만큼이나 중심의 대화에 참여할 수 없음을 주지시킨다. 어쩐지 가장 시선을 많이 받고 있는 붉은 드레스의 여인이 마치 우리를 보며 '당신은 여기 절대로 들어올 수 없어.'라고 말하는 것 같다.


 그 여인을 '애프터 다크'의 에리라 볼 수 있을 듯 하다. '애프터 다크'엔 두 여자가 나온다. 자매로 언니가 에리고 동생이 마리다. 마리는 등을 보이고 앉아 있는 남자에 가깝다. 에리는 빼어난 외모로 어릴 때부터 어디를 가든 '백설공주'처럼 주목을 받는 존재였다. 마리는 정반대였다. 그녀는 에리의 그늘에 가려 부모의 관심은 물론 어디서도 스포트라이트를 받아보지 못했다. 그림과 똑같이 에리는 중심에 있고 마리는 변방에 있다. 에리는 한낮의 사람이고 마리는 자정의 사람이다. 


 그래서 그녀는 밤마다 떠도는 것일까? 그녀는 밤이 아무리 늦어도 집에 돌아갈 생각을 안한다. 소설의 시작에서 마리는 저 그림과 비슷한 '데니스'란 식당 창가에 홀로 앉아 책을 읽고 있다. 그런 그녀는 남자와 똑같이 세상에서 뚝 떨어진 섬처럼 보인다. 그녀가 집으로 돌아가지 않는 이유는 에리 때문이다. 에리가 벌써 두 달째 잠만 자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몸이 아프다는 등의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다. 순전히 자의로 에리는 두 달 동안 내내 '잠자는 미녀' 상태를 계속 하고 있다. 그것은 너무나 갑작스러웠다. 그 돌변이 마리를 두렵게 만든다. 세상 그 누구보다 안정적으로 보이던 에리가 갑자기 그런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돌연 닥쳐온 어둠에 삼켜진 것만 같은 언니. 다카하시의 말을 빌어 표현하자면, 그것은 거대한 문어에게 갑작스레 끌려가 버린 것이라 할 수 있었다. 세상의 중심에 있는 것 같았던 언니마저 그렇게 될 수 있다면, 하물며 언니에 비하면 한없이 작고 위태로운 자신은 얼마나 쉽게 그럴 수 있을 것인가? 자신의 방에서 잠자는 에리의 모습은 그 자체로 마리에게 너무나 가볍고 약한 자신의 존재를 상기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그녀는 집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창가에 거한다는 것. 거기엔 두 가지 의미가 있었다. 하나는 마리가 경계에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는 존재라는 것. 다른 하나는 그런 까닭에 유리창이라는 보호막을 간절히 원하고 있다는 것. 그녀는 단절, 혹은 확실한 경계를 원한다. 예상치 못한 어둠에 먹히지 않도록 자신을 두텁게 보호해줄 수 있는 무언가를.

 어릴 때, 지진 때문에 엘리베이터에 에리와 단둘이 갇혔을 때, 자신을 보호하려 힘껏 안아주던 에리의 몸과 같은.


  어둠이 얼마 동안 계속됐는지는 기억 안 나. 아주 오랜 시간이었던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오래가 아니었을 지도 몰라. 그렇지만 오 분이건 이십 분이건 구체적인 길이는 문제가 아냐. 아무튼 그동안 에리는 캄캄한 어둠 속에서 내내 날 끌어안고 있었어. 그것도 그냥 끌어아는 거랑 달라. 우리 둘의 몸이 녹아서 하나가 될 만큼 꽉 끌어안았던 거야. 에리는 잠시도 힘을 풀지 않았어. 잠깐이라도 떨어지면 이제 두 번 다시 우리가 이 세상에서 만나지 못할 것처럼.(P.226)


 하지만 소설은 마리를 내버려 두지 않는다. 그녀가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을 보내어 그녀를 밤새 움직이게 만든다. 마리는 데니스에서 모텔 '알파빌'로, 이름모를 작은 바로, 스카이락 식당으로 계속 이동한다. 마리는 흐르고 나누고 섞인다. 마리는 에리를 회피하려고만 했었다. 하지만 소설은 그녀에게 회피가 아니라 응시를, 침묵이 아니라 대화를, 도피가 아니라 관통을 요구한다. 소설의 그러한 요구는 다음과 같은 말로 단적으로 선언된다.


 "도망치지 못해. 넌 잊어버릴 지 몰라. 우리는 잊지 않아."(p.216)


 이 불길한 협박의 진의는 무엇일까? 그런데 이 말을 우리는 하루키의 다른 소설에서도 들었다. 정확히는 '1Q84'에서다. 거기서 주인공 덴고의 아버지로도 보이는 NHK 수금원은 집에 없는 척 하고 있는 아오마메에게 이렇게 말한다.


 하지만 그런 짓을 해봤자 끝끝내 도망칠 수 없어요. 반드시 누군가 찾아와서 이 문을 엽니다. 정말이에요.(1Q84, 3권. P. 199)


 이렇게 '애프터 다크'와 '1Q84'는 이어진다. 그렇지 않아도 '애프터 다크'의 인물들은 대부분 '1Q84'처럼 도망치는 자들이라 할 수 있다. 이를테면  '알파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고오로기가 그렇고, 중국인 창부를 폭행한 시라카와도 그러하다. 아버지가 형무소에 가버리는 바람에 한 때 고아로 살았던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해 늘 다시 고아가 되지 않을까 두려움에 빠져 있는 다카하시도 그렇고 에리를 피하고 있는 마리도 여기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 그들에게 소설은 분명히 전하는 것이다. 절대 달아날 수 없다고. '1Q84'와 똑같이.


 메세지가 이렇게 반복되는 것을 보면 이것이야말로 하루키가 전하고 싶은 진심이 아닐까 생각될만도 하다. 그리고 그 진심을 통해 하루키가 독자에게 촉발시키고자 하는 것은 바로 행위이다. 그것은 경계의 허뭄이고, 비유하자면 '나이트호크'에 그려진 소외된 남자에게 시선을 주고 참여를 유도하는 손을 내미는 것과 같다. 진심의 궁극은 여기에 있다. '애프터 다크'의 마지막 장면에서 마리가 하는 것에. 그러니까 다카하시와 손을 잡고, 에리의 침대로 올라가 언니의 몸에 가느다란 팔을 둘러 언니의 심장 고동 소리를 들으려 언니 가슴에 뺨을 대고 꼼짝하지 않는 것에 말이다. 바로 그 '함께', '참여'가 하루키가 '애프터 다크'를 관통한 독자들에게 바라는 것이다.


 우리는 마리와 몽환적이면서 어딘가 불안한 밤의 여정을 함께 하면서 정작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달아나려는 마음 자체 있음을 본다. 감금과 악몽은 수동이 아니라 능동의 산물이었다. 오로지 피하고 도망치려는 마음이 스스로 만든 감옥과 악몽이었던 것이다. 마리와 비슷한 또래의 여자가 이유없이 폭행당하는 '알파빌'은 그런 마음들이 만들어내는 장소였다. 


 이런 식으로 생각해보면 어떨까 싶은데. 그러니까 너희 언니는 어딘지는 몰라도 또 다른 ‘알파빌’ 같은 곳에 있으면서 누군가한테 무의미한 폭력을 당하고 있어. 그래서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면서 눈에 안 보이는 피를 흘리고 있어.(P. 156)


 시라카와가 단적으로 보여주지 않았던가. 그는 프로그래머다. 소설에서 그는 아침에 있을 화상 회의를 탈없이 할 수 있도록 밤새 작업하고 있다. 그의 일은 다른 이들을 서로 연결해주는 것이지만 정작 그는 어디에도 연결되지 않는다. 아내도 있지만 그는 철저히 혼자다. 마리와 같은 존재인 것이다. 마리와 똑같이 그는 그 상황을 관통하려고 하지 않는다. 거의 피부와 같아져버린 가면을 쓰고서 그렇지 않은 척 연기를 한다. 타인들에게 펼쳐보이는 능수능란한 연기는 그만큼 그저 달아나고만 싶은 그의 열망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도망칠 수 없다'는 전화 속 목소리 그대로 시라카와는 한계에 봉착한다. 중국인 소녀에게 한 이유없는 폭력이 그것이다. 심하게 폭력을 휘둘렀음에도 다른 건 하나도 기억에 안 남고 오직 욱신거리는 손의 통증으로 폭력만 기억난다는 점에서 그의 폭력이 실은 한없이 엷기만한 그의 존재감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걸 짐작할 수 있다. 남자들이 자신의 미약한 존재감을 지워버리려 폭력을 휘두르는 것을 우리는 왕왕 보지 않았던가. 이런 폭력은 차라리 항복에 가깝다. 이제 더 달아날 곳이 없다는 자백인 것이다. 그것을 우리는 '1Q84'에서 확인할 수 있다. 욱신거림은 거기서도 나온다. 바로 덴고가 회상하는 '멕베스'의 다음과 같은 대사다.


 엄지의 욱신거림이 알려주는구나,

 불길한 것이 이쪽으로 다가온다.

 노크를 하거든 그게 누구이든, 자물쇠여, 열려라.(P. 152)


 문을 열라고 요구하는 것은 NHK 수금원이다. 그는 절대 도망칠 수 없고 잊지 않는다고 말한다. '애프터 다크'의 전화 속 목소리가 하는 말 그대로다. 그 요구는 응시와 대면 그리고 관통의 요구다. 시라카와의 통증은 더이상 피할 수 없다는, 이제 관통해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는 신호와 같다. 


 이것이 대화의 요청이라면 그것은 육신의 언어이어야 한다. 그것의 강조일까? 하루키는 '애프터 다크'에서 좀 색다른 형식을 취했다. 관객의 입장을 공공연히 내세운 것이다. '알파빌'이 인용되었으니까 하는 말인데 '알파빌'은 프랑스의 영화 감독 장 뤽 고다르의 유명한 SF 영화다.



 하지만 지금 여기서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영화가 아니다. 장 뤽 고다르가 영화를 만들면서 취했던, 하루키 식으로 말하자면 고다르의 '애티튜드'다. 고다르는 브레히트의 영향을 받아 관객이 영화에 몰입하도록 만드는 것을 싫어했다. 그래서 영화가 실제가 아니라 환영에 지나지 않음을 관객들에게 지속적으로 일깨워주려고 했다. 그것이 바로 고다르의 특기라고 알려진 '점프컷'이었다. 레코드의 바늘이 튀는 것처럼 장면이 갑자기 튀어보인다고 해서 붙여진 그 이름은 관객들에게 지속적으로 지금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이 환영임을 주지시켰다. 다름아닌 브레히트의 '소외효과'를 응용한 것이었다. '알파빌'도 거기에 속했다. 늘 해왔던 그대로 고다르는 이 영화에서도 영화 속 세계가 허구와 관념의 집적에 지나지 않음을 알렸다. 그것을 통해 고다르가 원했던 것은 행위였다. 관객의 눈이 수동적인 거울이 아니라 능동적인 카메라가 되는 것이었다. 보여주는 것을 반사하는 게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것을 담도록 하는 것. 자신만의 사유가 동반된 그 적극적인 시선이 고다르가 원하는 것이었다.


 '애프터 다크'에서 하루키가 취한 형식도 근본엔 그런 마음이 있다. 하루키도 독자의 눈이 카메라가 되기를 원한다. 그래서 계속 독자들의 마음에 카메라를 상상시키는 문장을 던진다. 이런 식으로 고다르와 똑같이 소외효과를 주면서 독자를 작품에 대한 보다 능동적인 참여자로 만든다. 이 소설에 서려 있는 몽환과 불가해함도 마찬가지다. 몰입이 아니라 소외를 통하여 더 많이 보도록 하고, 듣도록 하며 생각하도록 하려는 것이다. 소설은 온전히 힘을 다해 독자를 움직이도록 한다. '나이트호크'의 그림에서 당신이 중심에 있다면 경계에 있는 자들에게 손을 건네게 하고, 등을 보인 남자라면 스스로 일어나 거기로 걸어갈 수 있도록. 그렇게 '애프터 다크'는 우리들에게, 이미 찾아왔거나,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어둠'을 관통하는 방법을 일러준다.


  결국 모든 것은 손이 닿지 않는, 깊은 갈라진 틈새 같은 곳에서 벌어졌던 일이다. 한밤중부터 날이 밝을 때까지 그런 곳이 어딘가에 은밀히 암흑의 입구를 연다. 그 곳은 우리의 원리가 아무런 효력을 갖지 못하는 장소다. 언제 어디서 심연이 사람을 집어삼킬지, 언제 어디서 토해낼지 아무도 예견하지 못한다.(P. 210)


 정말로 그렇다. 그렇기에 더욱 우리는 피하려고만 하고 달아나려고만 하는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심연은 결코 우리를 잊지 않는다. 놓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정말 변해야 하는 것은 그것이 아니다. 바로 나인 것이다. 심연은 존재 자체로 내가 변해야 한다는 것의 증언이다. 필요한 것은 밀실로의 도피가 아니라 문을 열려는 손짓임을 알려주는.


 우리는 계속 막힘없이 흘러야 한다. 변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애프터 다크'에 음악이 무수히 나오는 까닭이 아닐까 싶다. 소설에서 이름 모를 작은 바의 바텐더는 이렇게 말한다. 


 한밤중엔 한밤중의 시간의 흐름이 있단 말이지.(...) 그걸 거역해봤자 소용없어. (P. 78)


 그 흐름의 시간에 우리가 순종해야 할 유일한 명령이 아닐까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