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방살의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65
나카마치 신 지음, 최고은 옮김 / 비채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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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읽기는 투명한가? 진정 글은 독자에게 자신의 존재를 마치 나신처럼 온전히 드러내고 있는가? 읽으면서 우리는 책에서 진실을 투명하게 길어내고 있다고 여기지만 실은 오로지 우리의 착각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닐까? 나카마치 신의 ‘모방 살의는 먼저 그런 의문을 막 쪄낸 만두에서 피어오르는 김처럼 무럭무럭 가지게 만드는 작품이었다. 놀랍게도 이 작품은 1971년에 나온 것이었다. 무려 44년 전의 작품! 하지만 세월의 격차가 줄 수 있는 낡은 느낌은 병따개로 따는 사이다 병 말고는 그 어디서도 느낄 수 없었다. 갓 나온 신작만큼이나 책은 따끈따근했고 그랬기에 막 배어 문 앙꼬의 뜨거움처럼 입을 호들갑 떨게 만드는 여운도 상당했다. 과연 어떤 작품이기에 이런 말을 하나 궁금해하실 분들을 위하여 줄거리를 간단히 소개해 본다.



 7월 7일, 오후 7시. 한 남자가 3층 자신의 방 창문에서 떨어져 죽는다. 이름은 사카이 마사오. 떨어질 때 이미 청산가리를 마신 상태였다. 방에 있는 뚜껑이 개봉된 사이다 병에서 청산가리가 발견되었다. 사카이 마사오는 사이다를 컵에 따라 마신 뒤에 청산가리로 괴로워하다 그만 창문으로 떨어져 죽은 것이었다. 당시 방은 밀실이었다. 유일하게 방으로 들어올 수 있는 열쇠는 두 개 있었는데 하나는 건물 관리인이 가지고 있었고 다른 하나는 사카이 마사오가 직접 자신의 지갑 속에 지니고 있었다. 다른 사람이 열쇠를 가지는 것은 불가능했다. 침입의 흔적은 없었고 범인에게 저항한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사카이 마사오란 남자는 원래 추리 작가로 신인상까지 수상하면서 화려하게 데뷔했으나 그 뒤 오래도록 두 번째 작품을 쓸 수 없어서 엄청 괴로워하고 있었다. 그러다 최근 겨우 작품을 완성하고 잡지에 게재했는데 그것이 그만 바로 얼마 전에 작고한 명망 있는 작가 세가와 고타로의 잘 알려지지 않은 단편을 표절한 것으로 밝혀져 더 큰 어려움에 빠져 있었다. 경찰은 그런 정황에 힘입어 작가로서의 생명이 끝났다는 것에 절망하여 자살한 것으로 결론 짓는다. 하지만 두 사람이 ‘과연 자살일까?’ 의혹을 품는다. 하나는 사카이 마사오의 연인, 나카다 아키코. 다른 하나는 동료 작가, 쓰쿠미 신스케다.


 나카다 아키코는 출판사 편집자로 사카이 마사오가 표절했다는 세가와 고타로의 딸이기도 하지만 표절 사실은 전혀 모르고 있다. 문학에는 전혀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그녀가 의혹을 가지게 된 계기는 다른 데 있었다. 그건 두 가지다. 하나는 예전에 사카이 마사오 집에서 우연히 만난 도가노 리쓰코란 여자. 그리고 다른 하나는 '300만엔이나 되는 큰 돈을 받기로 되어 있다'라던 사카이 마사오의 말이다. 리쓰코를 처음 보았던 날, 아키코는 그녀가 마사오에게 거금 50만엔을 준 것을 알았다. 분명 300만엔도 그녀와 관련되어 있을 것이라 짐작한 아키코는 마사오의 죽음이 그 돈과 연결되어 있으리라 생각하고 리쓰코를 추적한다. 그러다 리쓰코의 언니 마사코의 아이가 유괴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뒤에 아키코는 리쓰코와 마사오가 같이 그 아이를 몸값을 목적으로 유괴한 것은 아닐까 의심한다. 마사오는 아직 300만엔을 받지 못했다. 그렇다면 리쓰코가 몸값을 가로챌 목적으로 살해했을 지도 모른다. 그런 의혹으로 아키코는 리쓰코의 7월 7일 알리바이를 세밀히 파헤친다. 하지만 드러난 그녀의 알리바이는 그야말로 철벽이다. 과연 리쓰코는 마사오의 죽음과 아무 관계가 없는 것일까?


 한편 쓰쿠미 신스케는 전혀 다른 용의자를 가지고 있다. 바로 계속해서 사카이 마사오의 원고를 거절해 온 부편집장 야나기사와란 남자다. 즉 사카이 마사오에게 작가의 절망을 한껏 가져다 준 장본인인 것이다. 하지만 신스케가 그 사실로 의심하는 것은 아니다. 정말은 야나기사와의 여동생이 사카이 마사오 때문에 열차에 뛰어들어 자살했다는 것을 알게된 것이 시작이었다. 원고 거절은 거기에 대한 야나기사와의 복수가 아니었을까 하고 신스케는 생각한다. 그러던 차에 표절 사건이 터졌다. 표절한 사카이 마사오의 단편이 실렸던 잡지는 마침 야나기사와가 일하는 출판사의 것이었다. 표절한 작품을 미리 걸러내지 못하고 잡지에 게재한 데 대한 책임을 물어 편집장은 사퇴하고 대신 야나기사와가 편집장이 된다. 편집장은 야나기사와의 오랜 꿈이었다. 그는 비로소 꿈의 자리에 오른 것이다. 그런데 야나기사와는 세가와 고타로의 열혈 팬이었다. 신스케는 야나기사와가 사카이 마사오가 표절했던 세가와 고타로의 단편을 절대 모를 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잡지에 게재되도록 방치한 것은 야나기사와에게 두 가지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여긴다. 하나는 표절이 드러나 사카이 마사오의 작가로서의 경력이 완전히 끝장나 복수를 완성하는 것. 다른 하나는 오래도록 염원인 편집장 자리를 차지하는 것. 그 두 가지 목적을 야나기사와는 훌륭히 완수했다. 그런데 전혀 예기치 못했던 사실이 밝혀진다. 사카이 마사오가 아니라 거꾸로 세가와 고타로가 사카이 마사오의 단편을 표절했다는 게 드러난 것이다. 이것이 알려지면 야나기사와의 모든 목적이 수포로 돌아간다. 그 입막음을 위해 야나기사와가 사카이 마사오를 살해한 것은 아닐까? 그런 의혹으로 신스케는 야나기사와의 7월 7일 알리바이를 조사한다. 그러나 야나기사와의 알리바이 역시 리쓰코 만큼이나 빈틈이 없다. 과연 야나기사와도 마사오의 죽음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일까?


 이렇게 ‘모방 살의’엔 두 명의 탐정 역할을 하는 사람과 두 명의 용의자가 등장한다. 두 명의 탐정은 서로의 존재를 모른 채로 각자 찾아낸 단서를 가지고 자신만의 용의자를 쫓는다. 그런데 탐정들만큼이나 용의자들 또한 서로 아무런 접점이 없다. 설령 탐정들의 생각대로 사카이 마사오가 살해된 것이라라 해도 공범의 가능성은 전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리쓰코와 야나기사와, 이 둘 중에 누가 진짜 범인일까? 과연 어떤 탐정이 진범을 쫓고 있는 것일까? 탐정인 나카다 아키코와 쓰쿠미 신스케, 이 둘의 입장에서 서로 병행하면서 전개되는 이 소설은 이런 아주 흥미로운 궁금증을 유발한다. 그러다 비슷한 시점에서 나카다 아키코와 쓰쿠미 신스케가 똑같이 리쓰코와 야나기사와 알리바이의 중대한 허점을 찾아냈을 때는 ‘와우! 이거 정말 누가 진짜 범인이야?’ 하는 생각에 끝까지 손에서 책을 놓지 못하게 된다. 


 그런데 말이다. 그렇게 읽다보면 ‘제4부 진상’에서 일본 지진관측사상 최대이며 한신과 고베 대지진을 일으켰던 진도 7.2의 지진이 바로 나의 뇌리에서 일어나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서서히 '나는 도대체 무엇을 읽어왔던가' 하는 자문을 시작으로 이 글 처음에 적어놓았던 숱한 의문들이 여진처럼 덮쳐오면서 그것의 파고에 떠밀리듯 손이 저절로 앞장을 다시금 펼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미스터리 장르 중에 이런 일을 꼭 하게 만드는 것이 있지 않았던가? 맞다. 아야츠지 유키토의 '십각관의 살인'이 그랬고, '미로관의 살인'도 그랬다. 아비코 다케마루의 '살육에 이르는 병'은 또 어떠한가? 그리고 오리하라 이치의 '도착 시리즈'는? 모두 결말에서 세차게 뒤통수를 맞고선 얼얼한 뇌리를 달래며 내가 놓친 것이 무엇인가 하는 마음으로 다시 한 번 작품 전체를 복기하게 되지 않았던가! '모방 살의'도 마찬가지다. 여기에도 서술 트릭이 존재하는 것이다. 책의 뒷 표지에 아예 '서술 트릭의 시작'이라고 적어 놓았으니 이 정도는 밝혀도 문제 없으리라 생각한다. 일본 추리 소설사에서 서술 트릭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 지는 잘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서술 트릭의 대표작 대부분이 87년 이후로 나온 것을 보면('십각관의 살인'은 87년, '살육에 이르는 병'은 92년, '도착 시리즈'를 여는 '도착의 론도'는 89년에 나왔다) 71년에 나온 '모방 살의'를 그 시작이라고 불러도 그렇게 무리가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이는 서술 트릭이 일본 추리 소설에 있어서  실은 꽤나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바로 그 초창기 형태를 '모방 살의'에서 확인할 수 있음을 알려준다. 이 소설이 44년의 시간을 넘어 불현듯 우리 앞에 나타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2012년에 대형 서점인 '분쿄도'에서 '다시 만나고 싶은 복간 희망 도서'로 선정된 후, 불과 반 년만에 무려 34만부나 판매된 까닭이 컸을 터인 데 거기엔 분명 이러한 역사적 의의도 단단히 한 몫했을 것이다. 하지만 서술 트릭만으로 이 작품의 평가를 퉁치는 건 지극히 곤란하다. 줄거리 소개에서 밝혔듯이 여기엔 밀실 트릭알리바이의 허점 찾기 그리고 용의자 한정 하기 등, 본격 미스터리의 특성 또한 농후하기 때문이다. 책을 읽고난 뒤에 '모방 살의'라는 제목에서 엘러리 퀸의 대표작인 'Y의 비극'의 아우라를 느끼는 것은 비단 나만은 아닐 것이다. 그만큼 본격 미스터리에도 충실하며 사실 서술 트릭은 이 소설을 재밌게 만들기 위한 장치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니다. 때문에 본격 미스터리를 좋아하는 사람도, 서술 트릭을 좋아하는 사람도 모두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작품으로 보인다. 그러니 단기간내에 34만부 판매라는 놀라운 기록도 이룰 수 있었으리라.



  4부인 진상은 위와 같이 시작한다. 엘러리 퀸의 '독자에의 도전'을 흉내내고 있는 것이다. 서술트릭만 생각했다면 여기서 은근히 부아가 치밀어 오를 지도 모른다. 서술 트릭은 무엇보다 덫 안에 놓인 치즈처럼 독자가 알아야 할 중요한 사실을 빠뜨리거나 혼동하게 하여 얼마나 독자 스스로 자신이 읽은 것에 대하여 오류를 일으키도록 유인할 수 있느냐에 그 성공 여부가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유인이 성공적일수록 충격은 더 크고 그만큼 트릭은 굉장해진다. 그러니 파편화된 진술과 모호한 서술은 서술 트릭의 동맥과 마찬가지다. 그런 면에서 독자들이 온전하지 않은 문장들로 뭔가 당했다는 느낌과 함께 공정치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되어도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모방 살의'도 그런 느낌을 줄 수 있다. 하지만 오해에 지나지 않는다. 재독해 보면 작가가 곳곳에 단서를 놓아두었음을 알게 된다. 무엇보다 아키코가 리쓰코가 자신의 알리바이를 증명하기 위해 내놓았던 사진의 트릭을 푸는 순간 보았던 것은 가장 핵심적인 단서라 작가가 너무 무모하지 않나 생각될 정도이다. 작가는 공정하게 플레이하고 있다. 그러니 저 사진처럼 거리낌없이 독자에게 도전할 수 있는 것이다.


 때문에 나 역시 아주 오랜만에 다른 것은 하나도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미스터리 해결 자체에만 몰입해 읽을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작가 앞에 무릎을 꿇었지만 말이다. 크흑! (앞서 떠올렸던 의문에 대해서도 나름 이야기를 하고 싶지만 그 때문에 책이 가진 순수한 재미가 왜곡될까봐 그만두련다. 이 책은 온전히 읽는 재미로만 다가가는 게 좋을 것 같다.)


 나는 본디 '문신 살인사건'의 다카기 아키미쓰처럼 순수한 애호가에서 자신이 정말 읽고 싶은 것을 쓰기 위해 추리 소설 작가까지 된 이들의 소설을 좋아한다. 그런 이들의 작품은 아무래도 '작가로서의 의욕'이라는 창작자의 입장이 아니라 '독자로서 느끼는 재미'라는 수용자의 입장에 바탕을 두고 쓴다는 것이 느껴지는 까닭이다. 나카마치 신도 여기에 속했다. 그 역시 추리 소설에 대한 순수 애호가에서 작가가 된 사람이었던 것이다. 원래 교과서 회사에 다니던 작가는 ‘쥐꼬리만한 월급과 상사의 부당한 대우’를 견디지 못해 직장을 그만두고는 ‘실업 급여와 하루 600엔의 택배 아르바이트’로 연명하는 생활을 반 년 정도 했다. 경제적으로는 곤궁했지만 영혼만큼은 한없이 자유로웠던 그 때, 그는 추리 소설의 세계를 무한정 접했다. 그리고 그것이 가진 매력에 너무나 푹 빠져버린 나머지 자신이 직접 추리 소설을 써 볼 결심까지 하게 되었다. 결국 신인 추리 소설 작가의 등용문이라고 할 수 있는 ‘에도가와 란포상’에까지 투고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모방 살의’의 모태가 되는 단편인 ‘그리고 죽음이 찾아온다’였다. 최종 후보에까지 오르는 기염을 토했으나 정작 수상은 하지 못했다. 하지만 굴하지 않고 그 단편을 바탕으로 장편을 탈고했으니 그것이 지금 우리가 만난 '모방 살의'였다.


 실직하고 나서야 비로소 미스터리 세계에 눈을 뜨고 작가까지 되었다는 점에서 다카기 아키미쓰와 많이 비슷한 것 같다. 그래서 더욱 '문신 살인사건'에서 느꼈던 '애호가만이 줄 수 있는 재미'를 똑같이 '모방 살의'에서도 느낄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싶다. 그런 까닭에 작가 개인에게 여러모로 정이 많이 가고 다음 작품이 많이 기대되지 않을 수 없다. 다행히 그의 서술 트릭이 한층 더 정교해졌다는 평을 받는 '천계 살의'가 재빨리 출간되었다. 이 책은 '모방 살의'가 나온 지 9년 후에 출간된 작품이다. 그동안 그가 또 얼마나 진화했을 지 궁금하다. 얼른 만나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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