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를 본다는 것은 전설의 확인이었다.

 59년에 나온 이 영화는 97년에 나온 타이타닉에 의해 기록이 깨어질 때까지, 무려 40년 동안이나  아카데미 영화제 12개 부문에 수상 후보로 오른(그 중에서 11개 부문을 수상했다.) 유일한 영화로 영화제 역사에 기록되어 있었다.(그리고 이 기록은 2003년, 피터 잭슨의 ‘반지의 제왕’에 의해 다시 한 번 깨어졌다.) 아직 못 읽었는데도 이름을 하도 많이 들어서 마치 아주 많이 읽은 것처럼 생각되는 책이 있듯이, 영화에도 그런 게 있다. 내게는 ‘벤허’가 그랬다. 일 때문에 나이 드신 분들과 이런저런 술자리를 가질 때가 많이 있었는데, 그 때마다 영화를 좋아한다고 말하면 꼭 ‘벤허’를 보았냐고 물었다. ‘아직…’이라고 대답하면, ‘허, 그 명작을 아직 못 봤다고, 당장 보게나. 내 인생의 영화야.’ 하는 말을 얼마나 많이 들었는지. 거기다 TV에서 하는 영화 소개 프로그램을 볼라치면, 참 자주 보이던 ‘벤허’의 전차 경주 장면. 그렇게 귀에 익고, 눈에 익었기에 ‘벤허’는 내게 보지 않아도 본 것처럼 느껴지던 영화였다. 어떤 분은 ‘이제 봐도, 진정한 벤허의 매력은 못 느끼지. 벤허는 반드시 커다란 화면으로 봐야, 영화가 가진 스펙터클을 제대로 느낄 수 있거든.’이란 말도 하셔서, 내 인생에 벤허의 진정한 매력을 느낄 수 있는 순간은 영영 오지 않겠구나 여겼는데, 웬걸 그런 기회가 불현듯 찾아왔다. ‘벤허’가 극장에서 재개봉된 것이다.


 

 알고보니 재개봉이 처음도 아니었다. 62년에 우리나라에서 처음 개봉된 뒤로 72년, 88년, 97년, 2007년 등 10년을 주기로 꾸준하게 재개봉되어 왔었다. 이번의 재개봉도 그 주기에 속해 있었다. 이렇게나 꾸준하게 재개봉된 것만 봐도 많은 어르신들이 당신 인생의 영화로 꼽는 것이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쨌든, 내겐 모처럼 찾아온 소중한 기회. 당장 극장으로 달려가 누리기로 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정말 좋은 영화는 시대를 초월해 늘 똑같은 평가를 가지도록 한다는 것을. 단언컨대, 좋은 영화였다. 상영 시간이 길다는 것은 전혀 문제되지 않았다. 원래 길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또 윌리엄 와일러의 영화들은 다 길었으니까. 그런데도 이야기에 푹 잠겨서 보았다. 

 

 전차 경주 장면은 지금봐도 정말 압권이었다. 너무나 실감나고 박진감이 넘쳤기에, 그 때는 정말 CG 기술도 없었을 터인데, 어떻게 이렇게 찍을 수 있었는지 그 촬영 과정이 몹시도 궁금할 정도였다. 나중에 찾아보니 이 장면에만 들어간 제작비가 100만 달러라고 했다. 그리고 동원된 엑스트라만 해도 만 오천 명. 물론 경기장도 이탈리아에 있는 한 스튜디오에 실제로 세워진 것이었다. 전차도 모두 18 개가 제작되었는데, 이런 저런 이유로 그 중 반만 실제 경주 장면에 사용되었다. 영화를 보면, 단 번에 찍은 것 같은데, 무려 5주에 걸쳐 찍었다고 한다. 이 사실을 알고나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 5주 동안 찍은 것이, 마치 하루에 컷 없이 찍은 것 같은 느낌을 가지게 할 수 있는지. 왜 이 영화가 아카데미 편집상을 탔는지 납득하는 순간이었다.

 


 제작비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이 영화의 총 제작비는 천 오백 구십만 달러라고 한다. 제작 연도가 50년대라는 것을 감안하면 정말 천문학적인 액수가 아닐 수 없다. 실로 엄청난 규모의 영화다. 그도 그럴 것이 다른 것을 다 제외하고 출연한 인원만 보더라도, 대사가 있는 인물만 350명이고 엑스트라는 5만명에 이르니까 말이다. 이 엄청난 제작비 때문에 몇몇 영화 비평가들은 ‘벤허’를 싫어했다고 한다. 그런데도 수익은 7배 가까이 났다. ‘벤허’는 무려 7천 4백 7십만 달러를 벌여들여 당시 파산 직전이었던 MGM을 기사회생시켰다. 이만한 규모의 영화를 감독이 통제하기란 쉽지 않다.(물론 헐리우드 스튜디오 시스템에서는 영화 제작의 전반적인 통제가 감독 보다는 프로듀서에 더 많이 이뤄진다고 하지만, 이 만한 규모에다 장시간 상영이라는 부담에도 불구하고, 영화를 흥행면에서나 비평적인 면에서나 성공적으로 안착시켰다는 것은 분명 감독의 역량이다.) 그걸 윌리엄 와일러 감독은 해낸 것이다.

 

 윌리엄 와일러는 1902년에 태어났다. 스위스 알자스 출신이나, 그 때는 독일 영토였다. 그리고 와일러는 유태인이었다. 그는 1923년에 미국 헐리우드로 건너갔지만, 2차 대전이 그에게 어떤 의미였을 지는 이걸로 조금은 짐작할 수 있다. 실제 그는 공군으로 전쟁에 참여했고 그 전쟁의 경험과 귀환한 뒤의 경험을 바탕으로 미국 영화사에 길이남을 최고 걸작, ‘우리 생애 최고의 해’를 만들었다. 이 영화가 얼마나 대단한 지를 알려면 폴 오스터의 ‘선셋 파크’를 읽어보면 된다.


우리 생애 최고의 해 (1946)


 그는 성공한 삶보다 실패와 전락한 삶을 그릴 때 훨씬 더 뛰어났는데, 그것은 그 역시 인생의 부침(浮沈)을 많이 겪었기 때문이다. 그가 헐리우드에서 초기 경력을 쌓을 때, 그는 “쓸모 없는 와일러’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영화 ‘벤허’에서 과거의 화려한 삶에서 추락한 벤허의 좌절과 고통이 실감났던 것도, 그런 인생의 그늘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어쨌든 그는 대립 보다는 평화를, 갈등 보다는 화해를 강조했던 감독이었다. 유태인으로서, 독일의 만행까지 목격한 그로서는 더욱 반전(反戰)이 신념일 수밖에 없었으리라. ‘우리 생애 최고의 해’는 말할 것도 없고, 이런 경향은 오드리 햅번의 매력을 미국에 최초로 알린 ‘로마의 휴일’에서도, ‘우정어린 설복’과 ‘벤허’ 바로 전에 만들어진 ‘빅 컨츄리’에서도 그대로 나타났다. 한 마디로 일관되게 유지되었다.


우정어린 설복 (1956)


빅 컨츄리 (1958)

 

 물론 ‘벤허’는 남북 전쟁 당시 장교로 복무한 루 윌리스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지만 바로 전작 ‘빅 컨츄리’와도 설정이 유사하다. ‘빅 컨츄리’는 농장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물을 둘러싸고 두 가문이 갈등을 일으키는 영화였다. ‘벤허’도 메살라와 벤허의 갈등 구도다. 이런 ‘벤허’의 설정은 사실 알렉상드르 뒤마의 ‘몬테 크리스토 백작’과 상당히 닮아있다. '벤허'의 이야기를 단순히 말하자면, 모든 것을 다 가진 남자가 자기보다 못한 친구가 그것을 질투하여 음모에 빠뜨리는 바람에 인생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그러다가 마치 운명의 장난과도 같은 아주 우연한 인연으로 기사 회생하여 다시 친구에게 복수한다는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이것은 그야말로 ‘몬테 크리스토 백작’이다. 하지만 루 윌리스의 개인적인 체험에서 발현된 용서가 ‘벤허’를 ‘몬테 크리스토 백작’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로 만든다.

 

 ‘벤허’를 쓴 루 윌리스는 원래 무신론자였다. 그는 남북 전쟁을 몸소 경험했고 전쟁의 참화를 통해 신은 없다는 것을 절감했다. 그는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현재 미국이 떠받들고 있는 예수가 실은 날조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밝히려 했다. 그는 자기가 모을 수 있는 한 최대치로 예수의 자료를 모았고, 그것도 부족해서 실제 예수가 복음을 전파했다는 예루살렘을 비롯하여 이스라엘까지 몇 차례나 실제로 답사했다. 그러나 예수에 대해 알면 알수록 그는 예수가 실존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결국 신은 있다고 믿게 되었고, 그런 회심을 바탕으로 쓴 소설이 ‘벤허’였던 것이다. 즉 소설 ‘벤허’에서 ‘벤허’는 루 윌리스 자신이었다.



 그래서 그는 예수를 통해 얻게 된 믿음을 바탕으로 이 지옥과 같은 세상에도 구원은 도래할 수 있으며, 그것은 바로 상대방을 용서하고 사랑을 통해 이뤄질 것이라고 소설로 보여주었다. 윌리엄 와일러도 이것을 강조한다. ‘우정어린 설복’은 남북 전쟁을 배경으로 반전을 부르짓는 영화이며, ‘빅 컨츄리’는 현재 미국의 기원이라는 서부 개척 시대로 돌아가 용서와 화해를 강조하는 영화다(.이 영화에서 윌리엄 와일러와 맺은 인연으로 찰턴 헤스턴은 ‘벤허’의 주연이 될 수 있었다.) 이렇게 윌리엄 와일러는 자신의 영화를 통해 내내 반전 그리고 용서와 화해를 말해왔다. 왜 그는 이렇게 줄기차게 이런 말을 해온 것일까? 그것은 이 영화들이 만들어졌던 시대를 생각하면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바로 냉전시대였다는 것이다.

 

 때는 소련과 미국이 가열차게 서로에 대한 적의를 드러내던 시기였다. 곳곳에서 분쟁이, 핵무기 실험이 이어졌다. 언제 또 다시 3차 대전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공포가 알게 모르게 만연해 있었다. 그래서 유태인으로서, 전쟁이 가져올 수 있는 비극의 밑바닥을 체험한 윌리엄 와일러는 서로에게 증오만 부추기는 냉전 시대가 하루빨리 종식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영화를 통해 내내 반전과 용서 그리고 화해를 부르짖어 왔던 것이다.

 물론 ‘벤허’도 마찬가지다.(그것이 너무도 잘 드러나 있었기에, 카톨릭을 신봉하는 바티칸마저 헐리우드 영화로써는 유일하게 진정한 종교 영화라고 인정한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런 신념, 용서와 화해를 통한 평화에 대한 절박한 간구가 영화에 투영되어 있었기에, 많은 이들이 자신의 인생 영화로 꼽는 게 아닐까 생각된다. 그리고 이제서야 본 내게도 이 영화는, 그것과 나 사이에 가로놓인 그 수많은 시간과 공간을 넘어 충분히 감동적이었다. 생각해 보면, 다시금 세상은 냉전의 그 때로 돌아가고 있는 것 같다. 최근 니스에서 어린이를 비롯하여 수 십명의 사망자를 낸 트럭 테러나 남중국해를 둘러싼 중국과 미국의 갈등에서 잘 볼 수 있듯이 말이다. 그래서일까? 비록 10년 주기로 우리들 앞에 찾아오는 ‘벤허’이지만 지금 우리 앞에 도착한 것이 그저 우연으로만 생각되지 않는다. 지금이야말로 ‘벤허’가 강조했던 용서와 화해가 정말 필요한 시점이 아닌가 생각되기 때문이다. 와일러가 영화에 담았던 진심이 많은 이들에게 전파되어, 사람의 삶이 무분별한 증오로 위협받지 않으며 조금은 더 평화의 시대로 다가가길 희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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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버스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71
미나토 가나에 지음, 김선영 옮김 / 비채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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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나토 가나에의 신작, '리버스(Reverse)'엔 한 가지 커다란 변화가 있다. 바로 주인공이 여성에서 남성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미나토 가나에는 데뷔작 '고백' 이후로 계속 여성이 주인공을 맡도록 했다. 그런데 이번엔 젊은 남성이다. 이름은 후카세. 삶이라는 무대에서 단 한 번도 스포트라이트를 받아보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그는, 원하지 않았던 직장에서 좋아하지 않는 일을 하며 다만 무채색의 존재가 되어 조용한 일상을 영위한다. 그런 그의 일상에 유일한 낙이 있다면, 바로 커피. 후카세는 로스팅 된 원두를 구입하여 직접 내려 마시는 것을 선호하고 더 좋은 커피를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양면으로 펼쳐야 그 매력이 잘 살아나는 것 같아서 펼쳐서 찍어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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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가 가장 중요한 소재이기 때문에 우리나라 표지 역시 커피를 메인으로 했다.

단 제목이 뒤집다는 뜻의 'Reverse'이므로, 그것을 나타내기 위해 커피잔을 뒤집어 놓았다. 



일본은 커피 원두의 이미지로 표지를 만들었다.

이 표지 역시 양면 디자인이다. 뒷표지는 원두로 꽉 차 있다.

일본 표지의 원두를 갈아 우리나라 표지의 커피가 된 것 같은 느낌^^.


 늘 수동적으로 끌려 가기만 하는 자신의 삶에서 커피만이 유일하게 자신만의 세계를, 그것도 능동적으로 구축하는 영토다. 커피가 없다면 물처럼 투명하기만 했을 그의 삶. 그러나 커피를 통해 후카세의 삶은 진한 깊이를 얻는다. 또한 커피는 후카세와 세계를 이어주는 접점이기도 하다.


시시한 특기인 지도 모르지만, 덕분에 그가 있을 자리가 존재한다. (p. 25)


 커피는 소외당하기 쉬운 후카세를 직장 동료와 이어주고, 원두를 사기 위해 들르는 가게 '클로버 커피'를 통해 이웃 사람과 이어준다. 그리고 사랑도. 태어나서 여자 사람과 단 한 번도 연애를 해 본 적이 없었던 후카세는 커피 덕분에 드디어 연애라는 것을 하게 된다. 서서히 달아 올랐던 연애의 온도는 결국 결혼의 수위에 오르고, 늘 다른 사람의 사무 기기는 잘 수리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인생은 잘 수리하지 못하는 것 같았던 후카세는 마침내 자신의 인생 또한 완벽하게 수리되는 기분을 맛본다. 하지만 삶은, 늘 그렇듯이 반전을 준비해두고 있었으니. 갑자기 만나자고 해서 찾아간 연인 미호코에서 그는 그녀가 내미는 한 장의 편지를 보게 된다. 익명으로 미호코 앞으로 보내진 것이었는데, 거기엔 이렇게 쓰여 있었다.


후카세 가즈히사는 살인자다. (p.55)


 그러자 바로 어제 일처럼 떠오르는 3년 전의 사고. 그 때, 후카세가 단 하나의 친구라고 생각했던 히로사와가 죽었다. 대학에서 세미나를 같이 하던 친구 다섯 명이 떠난 여행에서, 늦게 도착한 친구를 차를 몰고 데리러 가다 그만 절벽 아래로 추락하여. 단순 사고사로 결론났지만, 그건 후카세를 비롯한 세 명의 친구들이 중대한 비밀을 감추었기 때문이다. 바로 히로사와가 술을 마셨다는 것. 그들은 같이 술을 마셨고, 히로사와가 취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에게 차를 운전해서 가도록 떠밀었던 것이다. 쓰라린 죄책과 후회는 비밀을 저 깊은 곳에 감추도록 했다. 그러다 어느덧 묵은 과거가 되고 잘도 태연하게 살아왔던 것이다, 후카세는.


 그러나 자신은 잊었어도, 과거는 잊지 않는다. 과거는 포기를 모르는 술래다.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반드시 잡히게 된다. 후카세는 잡혔다. 그 편지로 그는 대번에 과거로 소환되었다. 그만이 아니다. 그 때 같이 갔었던 친구들마저 모두 소환된다. 선생님이 된 아사미는 자신의 자동차 유리창에 살인자란 종이가 붙여졌고, 무라이는 현의원 선거를 앞두고 있는 아버지의 선거 사무실 유리창에 붙여졌다. 그리고 다니히라는 지하철 역 플랫폼에서 누군가에게 등을 떠밀려 선로 위로 추락한다. 친구들은 급히 모임을 가진다. 그들은 생각한다. 이 모든 사건은 히로사와 죽음의 비밀을 알게 된 누군가의 복수가 아닐까?


 가장 친한 친구라고 생각했으면서도, 사건을 통해 히로사와에 대해 정작 아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 후카세는 이번 일을 계기로 히로사와의 삶도 잘 알고 사건의 장본인도 찾으려는 생각에 자청하여 탐정의 역할을 맡는다. 그리고 놀라운 진실을 알게 된다. 반전의 반전.('도로시 세이어스'의 '의혹'처럼 소설의 마지막 한 줄에 결정적인 반전이 펼쳐지는데, 놀랍다. 오랜만에 '고백' 시절의 미나토 가나에가 생각났다.)


 '리버스'까지 이르는 미나토 가나에의 작품을 다시 리버스 하다 보면, 두 번의 변화가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하나는 '경우'고, 다른 하나는 '리버스'다. '경우'에선 입장이 변했다. 그 전까지는 부모의 입장에서 말을 했는데, '경우'에선 자식의 입장에서 말을 한다. 부모가 자식을 바라보는 관점이, 자식이 부모를 바라보는 관점으로 전회한 것이다. '리버스'는 앞에서도 말했듯이 여성에서 남성으로 변했다. '경우'는 주제나 분위기에 있어 작품 세계가 근본적으로 달라졌기에 중후한 계기로 생각되지만, '리버스'는 아직 판단 유보다. 이것이 '경우'만큼 중후한 변화인지 아니면 단순 변모인 지는 아무래도 후속작이 더 나와봐야 알 것 같다. '경우'도 후속작들이 보여준 일련의 공통된 특징 때문에 그것이 커다란 변화였음을 알게 된 것이다.


 과거의 비극은 단순히 뚜껑을 덮는다고 해서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오히려 더 부패가 심해지고 악취가 퍼져 뚜껑마저 열지 않을 수 없게 되고 만다. 똑같이 과거의 비극이라는 억센 손아귀는 언제든 우리를 움켜쥘 수 있다. 시간을 지연시키면 지연시킬수록 남는 것은 더 큰 상처와 후회 뿐이다. 하루라도 빨리 대면하는 것이 필요하다. 직시와 성찰만이 온전한 치유를 가져올 수 있다. '리버스'는 바로 이런 것을 말하는 소설인데, 그래서 아무래도 3. 11 (후쿠시마 원전 사고)와 연관 지어 생각하게 된다. 최근 유투브로 후쿠시마의 현재 모습을 본 적 있다. 문자 그대로 유령 도시가 되어 있었다. 3. 11 이후 아무런 조치도 없이 가득한 방사능과 함께 고요히 가라앉고 있었다. 미처 피하지 못한 차들의 대열이 높게 자라난 수풀에 침식되어 가듯, 그렇게. 그것은 다만 들어가선 안 되는 금지구역일 뿐이었고, 버려진 땅이었다. 아베 정부는 아마 할 수만 있다면 그대로 일본 땅에서 도려내고 싶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미나토 가나에가 그리는 후카세는 어쩐지 지금의 후쿠시마와 많이 닮았다. 정작 고쳐야 할 것은 자신인데, 다른 것만 고치는 후카세나 정말 서둘러 치유의 노력을 해야 할 곳은 후쿠시마처럼 일본 내부에 있는데 외부 침략이 가능한 군대로 만드는 것에만 혈안인 일본 정부나 판박이처럼 보인다. 특히나 이런 부분은...


 "사람 좋은 히로사와가 나하고 똑같은 위치에 서주었던 것 뿐이야. 히로사와하고 함께 높은 곳에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원래 높은 곳에 있던 녀석을 그 호의를 이용해 낮은 곳으로 끌어내렸던 것 뿐이야. 주위 녀석들은 처음부터 그걸 알고 있었는데 나 혼자만 착각하고 있었던 거야."(p. 253)


 대놓고 미국에 알랑방귀 끼기에 바쁜 일본 정부를 디스(diss) 하는 게 아닌가 생각된다. 내부의 고통과 불안은 못본 체 하고, 강한 자에게 영합 해서라도 한사코 외부로 자신을 부풀리기에만 힘쓰는 일본 정부를 꼬집으며 '근거 없는 과대망상은 집어치워!'라고 말하는 것 같다. 정말로 미나토 가나에는 후카세를 일본 정부의 은유로 만든 것인 지도 모른다. 그래서 마지막 문장으로 결코 치유될 수 없는 상처를 후카세에게 줘 버린 것은 아닐 지.


 언제나 그랬듯이, 이번에도 순식간에 읽힌다. 정말 가독성만큼은 뛰어나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미나토 가나에가 방한했을 때, 독자와의 대화에 나도 참석했는데, 미나토 가나에는 자기가 쓴 문장을 꼭 입으로 발음해 본다고 한다. 한달음에 잘 읽어지는 지 검토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읽혀지지 않으면 그렇게 될 때까지 계속 문장을 고쳐 쓴다고 한다. 가독성의 뛰어난 것은 아마도 그 때문이 아닐까 싶다. 물론 이야기 자체도 흥미로웠다. 미스터리한 맛도 잘 살아 있고 작심하고 준비한 반전도 성공적이라 꽤 읽을만한 작품이었다.


 개인적으로는 이 소설이 3기의 시작인지, 아니면 그저 2기의 단순한 변화인지 궁금한데 그래서 더욱 '리버스'와 같이 나와 그 해 최고의 스토리텔링을 보여준 작품에게 준다는 야마모토슈고로상까지 받은 '유토피아'가 너무나 읽어보고 싶어진다. 듣기에 한 지방을 중심으로 하여 쓴 작품이라고 하던데, 그 지방이 혹시 후쿠시마의 은유는 아닐까 생각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3기는 현대 일본 정치에 대한 본격적인 발언인 것일까? 어쨌든, 백문이 불여일견. '유토피아'를 만날 때까지 답은 미뤄둘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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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틈 호가스 셰익스피어 시리즈
지넷 윈터슨 지음, 허진 옮김 / 현대문학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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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월호 유가족 인터뷰들 중 가장 가슴 아팠던 것은 한 아버지의 것이었다. 그는 세월호가 침몰할 때, 살아있는 아들과 통화할 수 있었다. 사태가 심상치 않다고 말하는 아들에게 그가 한 말은 "함부로 움직이지 말고, 시키는 대로 잘 따라라"는 것이었다. 그것이 아버지가 아들에게 한 마지막 말이었다. 그는 참사 뒤, 계속 마라톤에 참석했다. 이유는 단 하나. 자신을 벌주기 위해서였다. "그 때, 빨리 피하라고 말만 했어도 아들은 살 수 있었을텐데. 제가 그랬어요. 시키는 대로 따르라고. 그렇게 말한 절 용서할 수가 없어요." 마라톤 현장에서 이뤄진 인터뷰에서 아버지는 울면서 뒷 말을 반복했다.



 이 아버지가 생각났던 것은, 우리들에겐 이미 '오렌지만이 과일은 아니다'라는 소설로 잘 알려진 지넷 윈터슨의 '시간의 틈'을 읽었기 때문이었다. 버지니아 울프와 그의 남편 레너드 울프가 1917년 설립한 영국 호가스 출판사에서 셰익스피어 서거 400주년을 기념하여 하나의 거대한 프로젝트를 계획했다. 바로 세계의 유명한 작가들에게 셰익스피어 작품들을 현대적으로 새롭게 각색하여 쓰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이름하여 '호가스 셰익스피어 프로젝트'로, 이 계획에 따라 벌써 집필이 결정된 작가만 해도 그 면면이 꽤나 화려한데, '영국 남자의 문제'로 맨 부커상을 탄 하워드 제이컵슨, '시녀 이야기'로 SF계의 전설이 된 '매거릿 애트우드', '진주 귀걸이 소녀'의 트레이시 슈발리에, '우연한 여행자'의 앤 타일러, 그 뿐 아니라 스릴러 팬이라면 더욱 눈이 커질, 요 네스뵈와 길리언 플린까지 여기에 포진되어 있다. 개인적으로는 요 네스뵈와 길리언 플린의 셰익스피어가 가장 기대되는데, 지넷 윈터슨의 '시간의 틈'은 바로 그 프로젝트'의 시작을 여는 작품이다.



 셰익스피어 말년의 로맨스 '겨울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이 소설엔 세 명의 아버지가 등장한다.

 리오 그리고 지노다. 지넷 윈터스는 소설 마지막에서 셰익스피어에게 있어 결말은 세 가지 밖에 없다고 말한다. 바로 '복수. 비극. 용서(p. 395)'다. 공교롭게도, '시간의 틈'에 나오는 세 아버지가 다 여기에 해당된다. 복수는 리오, 비극은 지노 그리고 용서는 셉인 것이다.


 그런데 이 모두가 실은 다 과거에 대한 반작용이다.


 일단 리오는 아주 어릴 때, 어머니에게서 버림 받은 과거가 있다. 그것은 그가 처음으로 맞이한 세계의 붕괴였고, 너무나 갑작스러운 것이었기에 어른이 된 지금도 그 사태를 납득하지 못한다. 그는 예고 없이 찾아오는 이별, 상실을 두려워한다. 어릴 때, 지노와 연인이 됨으로써 그의 세계는 안정을 찾은 듯 보였으나 자전거 경주를 하다 뜻하지 않게 지노가 절벽 아래로 추락하자 그의 세계는 다시 불안 속에 빠져 든다. 때문에 그는 눈에 보이지 않는 우정, 사랑 같은 추상적 가치를 믿지 않는다. 보이지 않기에 예고 없는 불행으로부터 확실히 지킬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돈과 지위만 쫓는다. 내 영역이 어디이고, 잘 지켜지고 있나를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 직성이 풀리는 것이다. 그래도 불안은 사라지지 않는다. 과거의 상처는 계속해서 그를 괴롭힌다. 그런 그가 꿈꾸는 것은 단 하나다. 리처드 도너의 영화 '슈퍼맨'의 마지막 장면. 거기서 슈퍼맨은 이미 죽어버린 로이스 레인을 살리기 위해 빛의 속도를 초월하여 지구를 거꾸로 돈다. 현재의 상실을 없던 것으로 하기 위하여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다. 슈퍼맨은 다시 찾은 과거에서 로이스 레인을 살린다. 리오도 그것을 원한다. 상실의 시간으로 돌아가 상실을 소거할 수 있게 되기를. 인터뷰의 아버지도 그랬을 것이다. 다시 그 때로 돌아가 얼른 달아나라고 외치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기적은 일어나지 않는다. 리오는 계속 그 상처를 짊어지고 가야 한다.


 어떤 여자가 말하고 있었다. "항상 겨울이 떠나지 않고 폭풍이 몰아치는 황량한 산꼭대기에서 벌거벗은 채 주린 배를 움켜쥐고 천 번을 무릎 꿇고 만 년을 살아도 신들의 눈길을 돌릴 수는 없습니다."(p. 342)


 그에게 남은 것은 다시 또 그것을 겪게 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 뿐이다. 그러나 비극은 예고가 없다.


 과거란 던지면 폭발하는 수류탄이다.(p. 365)


 그래서 그는 버림받기 전에 버린다.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고 했던가? 그는 있지도 않은 지노와 아내 미미의 불륜을 의심하고 고집하여,  지노를 죽이려들고 이제 막 태어난 딸 퍼디타마저 버린다.


 지노 역시 과거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는 추락을 경험했다. 어릴 때 리오 때문에 절벽에서 추락한 것이다. 죽을 뻔한 일이었는데도, 그것은 아무런 예고도 없이 찾아왔다. 그 역시 리오와 똑같이 그것을 두려워했다. 하지만 지노는 리오와 전혀 다른 방식으로 두려움에 대응했다. 리오는 자신의 성채를 보다 더 크고 단단하게 구축하는 것으로 두려움에 대응했지만, 지노는 자신을 한없이 낮추고 포기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그는 자신의 영역을 없앴다. 이성애자든, 동성애자든 누구든 품었고 자신의 말과 이익을 고집하기 보다는 타인의 말을 더 많이 듣고 타인을 배려하길 원했다. 그러나 그의 두려움을 씻어주진 못했다. 그의 납득이 낳은 행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절벽에서의 추락이 있었던 과거를 납득할 수 없었다. 거기서 그가 절실하게 경험한 것은 인간 이란 존재의 너무도 연약한 삶이었다. 잠자리 날개만큼이나 바스라지기 쉬운 삶. 지노는 무엇을 해도 그 삶에서 달아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니 왜 구태여 나의 성채를 쌓을 것인가? 어차피 추락은 필연적인데. 지노는 원해서 아무 것도 안 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에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다. 그는 미미가 말해준 프랑스의 시인 네르발이 꾸었던 꿈의 추락 천사가 자신이라고 여긴다. 그 천사는 날개를 접은 바람에 집 사이에 추락한다. 그가 다시 날기 위해 날개를 펼치면 자신을 둘러싼 건물들이 무너질 것이다. 


 "천사가 날개를 펴고 벗어나려고 하면 건물이 무너젔을 거야. 하지만 날개를 펴지 않으면 천사가 죽겠지."

  (...)

 "당신이라면 어떻게 하겠어?" 미미가 말했다. "주변 모든 것을 파괴해야 자유로워질 수 있다면?"(p. 104)


 지노는 죽기로 결심한다. 그래서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무위(無爲)는 그의 신념이다.


 리오가 멕베스에 가깝다면, 지노는 햄릿에 가깝다. 자유롭기 위해 주변 모든 것을 파괴해 버린 리오, 주변 모든 것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죽기로 결심한 지노. 하지만 이런 삶을 지노 역시 납득할 수 없다. 이런 삶이라도, 이런 삶이 있어야 하는 이유를 그는 알고 싶은 것이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만든 건 항상 자리를 비우는 신이 아니라 추락자, 루시퍼 같은 인물이라는 거지. 일종의 흑천사야. 우리는 죄를 짓거나 지위를 잃는 게 아니야. 우리 잘못이 아니었지. 우리는 이렇게 태어났어. 우리가 무얼 하든 그건 결국 추락이야. 걷는 것조차 일종의 잘 통제된 추락이지. 하지만 실패와는 달라. 우리가 이걸 안다면-영지, 그러니까 안다는 거야- 고통을 견디는 게 더 쉬울 거야."

  "사랑의 고통 말이야?"

  "그것 말고 뭐가 있어? 사랑, 사랑의 결핍, 사랑의 상실. 나는 지위와 권력이-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그렇고-별개의 동인이라고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어. 우리가 서 있는 곳, 혹은 추락이 시작되는 곳은 바로 사랑이야.(p. 108)


 그 바람을 담아 그는 열의를 다해 게임을 만든다. 게임의 제목은 '시간의 틈'. 게임에서 사람들은 세상의 존재 이유를 밝혀주는 존재를 찾아 다닌다. 그 존재는 아기다. 예수가 태어난다는 예언을 들은 헤롯왕은 나라의 모든 아기들을 죽이라고 명령했다. 어쩌면 예수란 그렇게 헤롯왕에게 자식을 잃었던 부모들이 자신이 당한 비극의 이유를 찾던 끝에 태어난 존재일 지도 모른다. 비극을 당한 자는, 자신이 당한 비극의 이유를 알고 싶어 하기 마련이다. 그 이유를 아는 것, 그것의 납득이 그에겐 구원이나 다름없다. 인터뷰에 나온 아버지도 그랬을 것이다. 그의 계속된 마라톤은 자학 외에도 그 이유에 대한 갈구의 몸부림일 지도 모른다. 이런 이유로, 난 '시간의 틈'을 읽으면서 그 아버지를 떠올렸던 것 같다.


 리오와 지노, 그들 모두 과거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리오는 욕망으로, 지노는 자학에 가까운 포기로 과거를 잠시 봉인해두고 있었을 뿐이다. 우리라고 다를 것인가? 리오와 지노의 모습은 과거의 상처를 지닌 자라면 누구나 닮을 수 있는 모습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 그렇다면 과거를 우리는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마지막 아버지 셉의 등장을 본다.


 셉은 소설에서 가장 먼저 나온다. 리오와 지노는 백인이지만, 그는 흑인이다. 그리고 병든 아내를 목졸라 죽였다. 지넷 윈터슨은 셉과 리오를 앞과 뒤로 나란히 배열한다. 둘 다 아버지고 돈독하게 지내는 아들 하나가 있다. 닮은 점 때문에 지넷이 마치 둘을 비교해 보여주는 것 같다. 셉과 리오, 둘 다 아내를 죽였다. 셉은 육신의 아내를 죽였고, 리오는 영혼의 아내를 죽였다. 미미는 리오의 만행으로 인해 결국 조각 같은 존재가 된다. 살아 숨쉬는 것은 다만 육체 뿐, 영혼은 마치 식물 인간과도 같이 어디로든 움직일 수 없다.


 폭포수처럼 사라지는 현재. 너무나 천천히 또 너무나 빨리 지나가는 시간의 맹렬한 흐름. 얼마나 오래되었을까?

 그녀는 가만히 서 있지 않으려고 걷는다. 시간 밖으로 걸어 나갈 수 있다는 듯이. 과거를 원래 속한 곳에 두고 떠날 수 있다는 듯이. 하지만 그것은 항상 거기, 그녀의 바로 앞에 있기 때문에 불가능하다. 과거는 그녀 바로 앞에 놓여 있고 매일 그녀는 그것을 향해 걸어가 부딪친다. 과거는 반대쪽에서 들어오려는 미래를 막는 문 같다.(p. 323)


 미미는 과거의 비극과 현재의 불행 사이에 단단히 끼여 옴짝달싹 못하고 있다. 그렇게 셉과 리오, 둘 다 아내를 죽였으나 동기는 달랐다. 리오는 자신을 위해 죽였으나, 셉은 아내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죽였다. 하지만 그조차 행여 진실은 자신의 고통을 덜기 위해서 죽인 것이 아닐까 의심한다. 그는 '슬픔이 여기에 없는 사람과 함께 산다는 뜻이라는 걸 깨닫는다(p. 36)'. 셉도 과거에 붙들려 있다.


 그런데 그의 아내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을 위해서 죽음을 살아 낼 수 있다면 난 그렇게 할 거야."(p. 37)

 죽음을 산다? 모순처럼 들리지만 그렇지 않다. 사랑으로, 타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 사람은 그의 죽음도 사는 것이 된다. 그 혹은 그녀가 목숨을 바쳤던 대상을 통해 그와 더불어 삶을 영위할 테니 말이다. 부재(不在)는 무(無)가 아니다. 다만 우리의 편협한 시야가 그렇게 보게 할 뿐. 그런 아내 때문일까? 셉의 대응은 다르다. 그는 과거를 받아들이기로 한다. 상실을 사라짐이 아니라 다만 장소를 옮긴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에게 부재는 내재(內在) 혹은 타재(他在)다. 내재(內在)는 셉이 어머니의 자리에 서는 것으로 나타난다. 셉은 어머니가 되어(셉은 퍼디타의 양육을 위해 아내의 보험금으로 가게를 마련한다. 가게는 리오가 남긴 돈과 아내의 보험금을 정확히 절반씩 사용하여 마련했는데, 여기서 셉이 리오와의 관계에 있어, 어머니의 위치에서 퍼디타를 양육한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더우기 셉은 피아노 연주자로 음악에 종사하는데, 그것인 퍼디타의 어머니인 미미의 직업과 동일하다. 이렇게 셉은 미미를 이어 받는다.), 자신의 아이가 아닌 퍼디타를 자신의 아이로 기꺼이 받아들이고 아낌없이 사랑하고 양육하려 한다. 아내에게 못다한 사랑을 퍼디타에게 베푸는 것이다. 사랑이 장소를 옮긴다. 이렇게 부재(不在)는 타재(他在)가 된다. 


 리오와 셉의 대비는  셉이 가지는 차이를 더욱 선명하게 만든다. 셉은 리오처럼 과거를 되돌리고 싶어하지 않는다. 지노처럼 '시간의 틈'을 구태여 찾으려고 하지도 않는다. 과거의 매몰도 현실 도피도 그에겐 없다. 있는 것은 다만 타인에 대한 무한 책임 뿐이다. 그래서일까? 지넷 윈스턴은 리오와 지노가 그토록 찾았던 것이 셉에겐 이미 와 있었다는 것을 다음과 같이 문득 드러낸다. 셉이 아기 퍼디타를 안고 가다 어느 순간 과거의 자신으로 돌아가는 장면이다.


 나는 아기를 안고 길을 걷다가 어떤 시간과 다른 시간이 같은 시간이 되는 시간의 틈에 빠졌다. 내 몸이 곧게 펴지고 보폭이 넓어졌다. 나는 청년이었고 아름다운 여자와 결혼했는데 갑자기 우리는 부모가 되었다.(p. 34 ~ 35)


 리오와 지노가 염원한 구원이, 자신과 아무런 연고도 없는 아이를 책임지기로 한 순간 셉에게 문득 도래하는 것이다. 


 "난 퍼디타가 내 아이라고 믿지 않았습니다." 리오가 말했다. "지노의 아이라고 생각했지요."

 "난 내 애가 아니라는 걸 알았지요." 셉이 말했다. "하지만 이 아이를 사랑했습니다."(p. 366)


 이로써, 우리는 알 수 있다. 마지막 아버지 셉이 바로 지넷 윈터슨이 과거에서 자유롭지 못한 우리에게 제안하는 구원의 여정이라는 것을 말이다. 물론 소설에서 셉이 차지하는 비중은 작다. 셉이 표상하는 여정의 대부분은 미래 세대인 퍼디타에게서 구현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런 퍼디타가 있기 위해서는 셉이 있어야 했다. 아버지의 아집이 일으킨 비극은, 아버지의 환대로 치유되어야 했다.


 셉이 등장하는 순서는 원작 '겨울 이야기'와 다르다. 셰익스피어의 원작에서 가장 먼저 등장하는 아버지는 파멸의 원흉이자 리오의 원본인 '레온테스'다. 원작에서 세계는 붕괴로 시작한다. 그러나 지넷의 소설은 다르다. 셉이 폭풍우가 몰아치는 날, 한 남자가 살해당하는 장면을 목격하고 분명 그와 연관 있어 보이는 퍼디타를 베이비박스에서 구하는 장면으로 여는 것이다. 소설의 세계는 재건으로 시작한다. 이 점을 고려하면 '물의 별'이라는 이 장의 제목이 의미심장해 보인다. 지넷 윈터슨은 혹시 이 장을 성경의 '창세기'처럼 쓴 것이 아닐까? 백인이 아니라 흑인인 신이 파멸과 죽음의 잔여라 할 수 있는 어린 생명을 구하는 이야기. 그것도 인종도 다르고, 자신과 아무런 관계마저 없는 자를.


 만일 셉의 첫 등장이 이 소설의 창세기라고 한다면, 이러한 셉의 모습은 창세기의 신과 얼마나 다른가? 창세기의 신은 순종을 원한다. 순종은 자신과 동일할 것에 대한 요구에 다름 아니다. 그러므로 순종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의 타자가 되겠다는 표시이고, 그것이 드러난 순간, 신은 자신의 영역에서 배척한다. 조금의 배려도 없는 축출이라는 점에서 이런 신의 모습은 리오와 판박이다. 그러나 셉은 자신과 동일할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자신과 전혀 다른 타자라 할지라도 기꺼이 환대한다. 인종도 다르지만, 행하는 것도 다르다. 리오와 셉의 대비는 어쩌면 성경의 신과 지넷 윈터슨이 꿈꾸는 신의 대비이기도 하지 않을까? 만일 그렇다고 한다면 나는 이런 생각을 또 하게 된다.

 '혹시 이 소설 저변에 흐르는 이야기는 나와 다른 타자에 대한 태도에 관한 것이 아닐까?'


 그 생각으로 이끌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이야기 중심에 아버지가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왜, 이 소설엔 각자 다른 경로를 걷는 아버지들이 등장할까? 그 의문 끝에 나는 프랑스의 한 철학자를 떠올렸다. 바로 레비나스다. 그는 타자에 대한 책임을 강조했다. 그는 존재들이 서로 고유의 가치를 가지고 대등하게 공존하지 않고 어느 하나로 융합되어 동일자가 되는 것을 무엇보다 경계했는데, 그것은 물론 유태인으로 그가 경험한 아우슈비츠의 비극을 초래한 전체주의 때문이었다. 그는 '나'라는 자아조차 하나가 되어서는 안되고, 나이면서 동시에 타자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나와 하나이면서도 동시에 결코 나와 같을 수 없는 영원한 타자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  레비나스는 가능하다고 했고, 그 증거로 아버지란 존재를 들었다.


 어떻게 나는 너 안에 흡수되지 않고, 나를 잃지 않으면서, 너라는 타자 안에 나로 남아 있을 수 있는가? 어떻게 자아는, 나의 현재 속에 있는 자아가 아니면서, 다시 말해, 어쩔 수 없이 자신에게 돌아온 자아가 아니면서, 너 안에서 나로 남아 있을 수 있는가? 어떻게 자아는 자신에게 타자가 될 수 있는가? 아버지가 되는 길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 아버지란 존재는 전적으로 타인이지만 동시에 나이기도 한 '낯선 이'인 것이다. (레비나스, '시간과 타자' p. 112)


 레비나스가 아버지란 존재를 이렇게 중요하게 취급하는 이유는 자식과의 관계 때문이다. 아버지에게 아이는 자신의 분신이지만 소유할 수 없다. 소유란 동일화를 뜻한다. 아들은 자신에게서 난 존재이지만 자식은 아버지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아버지는 자식에게서 나이면서 내가 아닌, 타자로서 '낯선 나'를 본다. 레비나스는 그것이 바로 아버지의 구원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타자로서의 낯선 나인 자식이 내가 미처 실현하지 못했던 가능성을 실현시키고,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처럼 '걸어보지 못한 길'을 걸을 것이기 때문이다. 자식은 지금 고정된 나라는 존재의 영역을 넘어선다. 자식에 의해 아버지 자신에게는 주어지지 않았던 미래가 비로소 열리는 것이다. 그래서 레비나스는 출산도, 자식도 모두 소중한 경험이요, 존재라고 생각했다. 진정한 미래가 그를 통해 도래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미래란 단순히 시간적인 의미가 아니다. 레비나스에게 미래란 타자다. 우리는 미래를 알 수가 없다. 미래는 우리의 모든 능력을 아득히 넘어선 무엇이다. 우리에게 있어 절대적으로 바깥에 위치하는 존재가 '미래'다. 그래서 타자는 미래이고, 그 미래가 도래한다는 것은 현재에 고정된 나를 넘어서는 초월을 뜻한다. 아버지란 그 초월을 누려볼 수 있는 존재인 것이다. 바로 자식이란 미래를 통해서.


 지넷 윈터슨이 레비나스를 읽었는 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미래 세대가 과거로 붕괴된 세계를 재건한다는 생각은 레비나스와 이처럼 많이 닮아있다. 어쩌면 이것은 지넷 윈터슨이 찾아낸, 지노에게 있어 '시간의 틈'과도 같은 자기 존재의 의미일 지도 모른다.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지넷 윈터슨 또한 '입양아'였기 때문이다. 그녀는 '퍼디타'였다. 태어나자마자 버림 받았고 한 독실한 기독교인 가정에 입양되었다. 하지만 오순절교를 광신했던 양부모에 의해 지넷의 미래는 자신의 뜻과 상관없이 철저히 설계 되었다. 그녀는 그들이 원하는 것 이외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고 꿈꿀 수도 없었다. 지넷은 그들에게 소유되었고, 오렌지만이 과일이며 똑같이 신에게 순종하는 것만이 유일한 삶의 가치라고 강요받으며 자라났다. 그런 경험을 쓴 책이 바로 지넷의 첫 소설, '오렌지만이 과일은 아니다'였다.


 그런 그녀에게 진정한 미래가 열린 것은 사랑 때문이었다. 교회에서 우연히 만난 한 소녀와의 사랑이 '오렌지만이 과일은 아니다'라는 것을 깨닫게 해 주었다. '퍼디타'가 셉의 사랑을 통해 과거로 인해 모든 붕괴된 세계를 재건할 수 있었듯이 말이다. 이런 그녀였기에, 지넷에게 셰익스피어의 '겨울 이야기'는 각별했다. 자신과 똑같은 입양아가 나오고, 그 입양아를 통해 세계는 구원 받는다. 지넷은 '겨울 이야기'를 읽으면서 비로소 자기 존재의 의미를 찾았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녀 스스로 고백 했듯, 30년이 넘도록 내내 '겨울 이야기'를 개인적인 이야기로 여기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개작을 쓴 것은 30년이 넘도록 나에게는 이 희곡이 개인적인 글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것이 없다면 내가 살아갈 수 없는, 글로 쓴 세상의 일부였다는 뜻이다.(p. 394)


 정녕 그 오랜 세월 동안 지넷에게 '겨울 이야기'는 지노의 '시간의 틈'이었다. 그녀는 이 이야기를 통해, 비극적 운명에 처해진 자신의 존재를 긍정할 수 있었다. 때문에 '시간의 틈'은 자신이 꼭 써야만 하는 이야기였고, 결국 그 모든 여정을 끝낸 지넷은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비로소 자신의 과거와 그 모든 순간에 존재했던 자신을 긍정할 수 있게 되었다고.


 어쩌면 그 때 나는 기억할 것이다, 역사는 스스로 반복되고 우리는 항상 추락하지만, 내 안에는 역사가 담겨 있고 내가 잠시 과거에 다녀와도 아무 흔적도 남지 않지만, 나는 알 가치가 있는 어떤 것을 알았었음을. 거칠고 존재할 것 같지 않고, 판에 박힌 모든 것을 거스르는 어떤 것을 알았었음을. 뒤집힌 배에 남아 있는 공기처럼.(p. 401)


 이렇게 지넷도 셉의 자리에 섰다. 과거에서 자유롭게 되었다. 미미가 그랬던 것처럼, 과거로 꽉 막혔던 문이 열리고 미래가 들어온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지넷이 독자인 우리도 자기처럼 되어야 한다고 강요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다만 그녀 개인의 경험과 깨달음일 뿐, 일반화시킬 것은 아니라고 한다. 물론 그녀가 소설에서 직접 말하는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내가 소설의 코다를 통해 넌지시 암시받은 것일 뿐. 암시는 소설의 마지막이 다소 이상하게 끝난 것에서 다가왔다. 지넷이 소설로 그냥 끝내지 않고 자신의 고백으로 갑자기 전환시켰던 것이다. 단순히 소설로 끝났다면, 셉과 퍼디타의 여정이 그녀가 제안한 일반적인 대안이라 여겼을 테지만, 예기치 않게 지넷이 아주 개인적인 고백으로 개입하여 그렇게 보기가 어려웠다. 무엇보다 지넷의 고백마저 셉과 퍼디타의 연장선상에 있었기에, 그 모든 것이 지넷이 찾은 개인적인 구원의 여정으로 보도록 이끌었다. 그녀는 자신의 작품을 통해 내내 다양성의 포용과 나를 벗어나 타자로 끊임없이 지향할 것을 말해왔다. 바로 그 마음이 여기에도 투영된 것이 아닐까 싶다. 그녀의 대안이 정답처럼 복사될 지도 모르기에.


 그러나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소박한 제시 정도는 하고 있다. 그것은 유일하게 '겨울 이야기'의 이름 그대로 나오는 오톨리커스의 입을 통해 나타난다. 셉의 아들 클로를 집까지 태워주다, 오톨리커스는 오디이푸스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된다. 오이디푸스도 입양아였다.


 오이디푸스는 노인이 자기 아버지인 줄 몰랐어. 입양아거든. 오이디푸스는 장차 부모를 죽이게 된다는 저주에 걸려 있었지. 그런데 오이디푸스는 부모님을 좋아했거든.(p. 208)


 그는 오이디푸스의 비극을 말하면서 우회로가 좀 더 일찍 만들어졌다면 서구 문화 전체가 달라졌을 것이라 말한다. 우회로가 있었다면 오이디푸스와 그의 진짜 아버지가 서로 먼저 비켜나라고 갈등을 일으키기 전에 피해 갔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우회로가 바로 지넷의 소박한 제시다. 우회로가 없었기에, 오이디푸스는 지넷, 퍼디타와 같은 입양아였음에도 불구하고 세계를 붕괴 시켰고 자신마저 나락에 빠뜨렸다. 여기서 오이디푸스는 '내 때는 아직 우회로가 발명되지 않았잖아? 어쩔 수 없었다고!' 항변할 지 모른다. 하지만 오톨리커스에 따르면 우회로는 존재의 문제가 아니다. 생각의 문제고, 시야의 문제다.


 우회로는 절대로 그렇게 심오하거나 시적이지 않아. 안 그래? 내 말은, 근엄한 표정으로 저는 인생의 우회로에 다다랐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고. 아니지, 다들 갈림길이라고 한다니까.(p. 211)


 갈림길 밖에 못 보는 마음과 눈이 문제인 것이다. 살면서 우리는 자주 마치 갈림길에 선 것처럼, 양 극단에 치우친다. 이것 아니면 저것, 성공 아니면 실패, 남성 아니면 여성, 백인 아니면 흑인, 이성애자 아니면 동성애자 등등. 그리고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길은 아예 없거나 내 삶에 위협이 되는 것으로 치부해 버린다. 리오가 그랬듯이, 모든 비극은 바로 거기서 파생되는 것이다. 갈림길밖에 없다는 생각, 혹은 그것밖에 보지 못하는 시야에게서.


  살인을 부른 여성 혐오도, 영국에게 브렉시트라는 자충수를 가져온 인종 혐오도 알고 보면 갈림길만 있다는 생각이 낳은 산물이었다. 그러나 셉과 퍼디타 그리고 지넷 자신이 보여주듯이, 우회로는 어디든 존재한다. 이것과 저것 사이엔 수많은 길이 스펙트럼처럼 펼쳐져 있는 것이다. 그러니 그것이 존재한다는 생각, 그것을 볼 수 있는 눈만 있으면 된다. 우회로는 바로 그럴 때 홀연히 등장한다. 고정된 상황과 굳어진 나에게서 벗어날 때 우회로가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것이다. 그런 벗어남은 그대로 나와 나를 둘러싼 현실에 틈을 내는 것과 같다. 지노는 오해하고 있었다. 틈은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것이었다. 퍼디타에 대한 책임을 떠 맡기로 작정했을 때, 셉이 문득 시간의 틈 사이로 들어갔던 것과 마찬가지로. 어디든 우회로가 있다는 생각을 해라. 그것은 찾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나는 지넷의 소박한 제시라고 생각한다. 틈은 종결을 거부한다. 틈은 끝에서 오히려 시작을 열어젖힌다. 더 넓고, 다양한 세계가 그 틈으로 계속 들어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지넷이 소설의 마지막을 그렇게 처리한 것은 더없이 합당해 보인다. 제목이 '시간의 틈'이고 소설이 이런 말을 하는 이상, 이 소설에 코다는 어울리지 않으니까. 이런 세계엔 과거가 되는 것이 하나도 없다. 틈이 창출하는 세계에선 어디든 무한의 미래 뿐이다. 겨울의 이야기는 더이상 자리할 수 없다. 뒤집힌 배에는 언제나 에어 포켓이 존재하기 마련이니까.




끝으로, 노래 하나를 첨부 한다. 바로 제니스 조플린의 '섬머 타임'이다.

 소설에서 이 노래는 꽤 의미심장하게 쓰인다. 아이에게 더이상 과거의 불행은 없고 밝은 미래만 있을 것이니 울지말라는 뜻의 이 노래는 리오로 인해 붕괴된 세계가 셉과 퍼디타에 의해 완전히 재건될  때, 마치 그것을 선언하듯 퍼디타의 목소리로 셉의 피아노 반주에 맞춰 집 안 가득 울려퍼진다. 아마도 이 장면을 영화로 만들면 노래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카메라가 천장에서 방안의 사람들을 담으며 천천히 이동하는 것으로 찍지 않을까 싶다. 많은 가수들이 이 노래를 불렀는데, 굳이 제니스 조플린의 것을 고른 것은 가장 좋아하는 버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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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러드차일드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옥타비아 버틀러 지음, 이수현 옮김 / 비채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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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옥타비아 버틀러가 우리나라에서 지금보다 조금만 더 유명했다면, 올해 '엑스맨 아포칼립스'가 개봉했을 때, 분명 이런 말이 나왔을 것이다. "어, 설정이 버틀러의 '야생종'과 너무 비슷한데 혹시 그 소설을 모델로 만든 거 아냐?"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분명 그랬다. 최초의 돌연변이로, 그 스스로 말하는 대로 많은 문명권에서 신으로 추앙받아온 '아포칼립스'는 정말로 '야생종'의 신적인 존재라 할 수 있는 '도로' 같았고, 거기에 맞서, 현재는 많은 돌연변이들이 그들의 리더로 동경하는 미스틱은  '야생종'의 안얀우 같았다. 

 도로는 인간과 다른 이종(異種)으로 자신의 초능력으로 그들을 지배하려 하고, 안얀우는 자신들만의 공동체를 만들어 공존하려 한다. 더하여, 안얀우는 미스틱과 똑같이 무엇이든 변신할 수 있는 능력도 가지고 있었다. 그렇게 '엑스맨 아포칼립스'와 '야생종'은 닮은 꼴이었다.  공식적으로 밝히지는 않았지만 분명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아니, 받지 않을 수 없다. 옥타비아 버틀러의 소설들은, '엑스맨'처럼 남들과 다른 존재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면, 그런 삶의 양태와 의미를 헤아리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먼저 거쳐가야 할 작품이니까 말이다. 타자의 감각으로 타자와의 진정한 공존을 추구하는 작가. 그가 바로 옥타비아 버틀러다.


 '블러드 차일드'는 2006년에 작고한 그녀가 세상에 남긴 유일한 단편집이다. 표제작 블러드 차일드를 비롯한 단편 7개와 두 편의 에세이로 되어 있는 이 단편집은 옥타비아 버틀러의 작품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필독서라 말해도 전혀 무리가 없다. 흔히들 버틀러를 SF 작가로 분류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버틀러를 다 설명한다고 할 수 없다. 버틀러를 담기에 SF란 범주는 너무나 협소하다. 사실 그녀에게 SF는 목적도 아니다. 다만 수단일 뿐이다. 평생 백인 남성 중심 사회인 미국에서 흑인 여성으로 살아온 그녀가 주류에서 소외되고, 차별받은 타자로서 체득한 경험과 성찰을 독자에게 좀 더 쉽게 전달하기 위해 택한 통로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 SF 작가라는 선입견을 가질 필요는 없다. 한번쯤 사회에서 차별받는 타자에 대한 문제의식을 지녀보았다면, 자신의 취향이 무엇이든 상관없이 만나도 되는 작가인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오히려 SF 팬들이 버틀러를 삐딱하게 볼 지도 모르겠다. '괜히 전하고픈 테마에만 집착해 SF적인 재미는 별로 찾아볼 수 없나 보다' 하면서. 하지만 그것도 오해라고 말해주고 싶다. 버틀러는 SF적인 재미에도 충실하니까. 그렇지 않았다면, '블러드 차일드'가 SF 계 최고상의 양대 산맥인 휴고와 네블러 상을 모두 수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상을 받은 단편은 또 있다. '말과 소리' 역시 84년에 휴고 상을 수상했다. 

  '블러드 차일드'는 71년에 자신의 작품을 처음으로 할란 엘리슨에게 판 그녀가 84년부터 그녀가 죽기 직전인 2005년까지 발표한 단편들을 담고 있는데, 그런 의미에서 거의 평생에 걸쳐 발표한 단편들이 담겨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더구나 다섯 번째 단편, '넘어감'은 71년에 처음으로 돈을 받고 원고를 팔 수 있었던 두 단편 중 하나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책을 통해 버틀러의 생 초짜 모습도 살펴볼 수 있는 것이다. 

 모든 단편엔 공통점이 있다. 주인공이 대부분 경계 위에 서 있다는 것이다. 그/그녀는 언제나 세상 전체를 지배하는 거대 세력과 그들에게 종속되었으나, 존재론적으로 다른 존재들 사이에 끼어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그/그녀는 온전히 주체도 아니고, 그렇다고 온전히 타자도 아니다. 그/그녀는 주체와 타자라는 층이 겹쳐진, 중층의 존재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그녀가 남들보다 구속의 강도가 두 배가 될 것이니 힘들 것이라 지레짐작한다. 때로 그렇기도 하다. 하지만 버틀러가 보여주는 궁극적인 모습은 구속의 강도만큼 선택의 자유 또한 확장되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단순하게 그/그녀가 양쪽 모두에게 속했다는 사실로 오는 혜택은 아니다. 그 보다는 선택할 수 있는 주체가 되었다는 것에 뒤따르는 당연한 권리의 향유라고 해야 한다. 
 
 왜? 그/그녀를 둘러싼 두 세계는 모두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있다. 그들의 선택은 격리된 공동체의 내적 질서를  그저 따르는 것으로, 거기엔 아무런 주체적인 결단이 개입하지 못한다. 하지만 양쪽에 끼어 있는 그/그녀는 스스로 양쪽 중 어떤 질서를 따를 것인지 선택할 수 있다. 오로지 자신의 결단으로 자신의 운명을 선택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칸트가 한 말 그대로다. 칸트는 벤담의 공리주의를 공격하면서 이런 말을 했다. 공리주의가 말하는 이익은 단순히 동물적인 본능을 따른 것일 뿐, 이성적인 행위라고 할 수 없다. 우리는 배고프면 음식을 먹고, 졸리면 잔다. 그 행위는 우리에게 이익이 되지만, 그것은 순전히 동물적 욕구를 자연스럽게 따른 결과일 뿐이다. 그러니 그것을 자유라고 말할 수 없다. 자유는 오로지 스스로 선택할 수 있을 때 찾아온다. 그러므로 온전히 이성의 명령에 따를 때 사람은 자유롭다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자유는 자율적 주체만이 향유할 수 있으며, 자율적 주체는 오로지 이성적인 결단과 선택을 통해 태어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될 때 주체는 비로소 타자에 대한 책임마저 떠맡을 수 있다. 버틀러의 주인공들은 이런 경로를 그대로 따른다. '블러드 차일드'에선 누나를 대신해 자신을 희생하는 남동생이 나오고, '저녁과 아침과 밤'에선 자신도 걸린 질병의 환자들 생존을 위해서 자기에게 주어진 책임을 기꺼이 떠 맡으려는 여성이 등장한다. '말과 소리'의 주인공 여성은 유일하게 자신의 세계를 지켜줄 남자가 희생되었지만, 그것이 오히려 그녀를  주체로 만들어 고아가 된 두 어린 아이들마저 책임진다. 이렇게 중층의 존재는 결국 타자의 책임으로 나아가고, 그것을 통해 두 세계의 공존을 추구한다.

 '블러드 차일드'는 이런 이야기들의 집합이다. 그래서 너무나 늦게 나왔지만, 지금 우리들 앞에 나타난 것이 무슨 운명처럼 느껴진다. 왜냐하면 지금은 그야말로 혐오와 증오로 넘치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가장 최근에 전 세계를 놀라게 했던 브렉시트 또한 이민자들에 대한 혐오와 증오가 낳은 산물이었다. 많은 노동자들이 브렉시트에 찬성했는데, 그것은 그들이 현재 겪고 있는 삶의 어려움을 이민자들 탓이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한 마디로 이민자들에 대한 혐오와 증오를 투표를 통해 분출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들의 삶을 힘들게 만든 것은 정작 다른 데 있었다. 대다수 영국 노동자들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는 제조업이 눈에 띄게 쇠퇴하고 있었던 것이다.

 혐오와 증오는 자신의 불안을 잠재우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다. 그들이 조금만 지금 자신들의 상황이 어디서 비롯 되었는지 이성적으로 접근했다면 그런 혐오와 증오가 얼마나 말도 안되는 지 알았겠지만, 혐오와 증오는 자신이 너무나 손쉽게 할 수 있는 것이었기에, 그만 별다른 성찰없이 그것과 타협하고 만 것이다. 그래서 결국 어떻게 되었나? 불안을 잠재우려 한 행위였지만, 오히려 더 큰 불안만 증폭시키고 말았다. 우리도 쉽게 저지를 수 있는 잘못이다. 강남역 무차별 살인을 비롯하여 작금에 일어나는 여러 비극적인 사건들이 그걸 증명한다. 그러므로 버틀러가 보여주는 경로가 더욱 소중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특사'를 보면 자율적 주체가 될 수 있었던 이유가 양쪽, 그러니까 주체와 타자 모두 공감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단정이 아닌 이해, 배척이 아닌 대화 그리고 과시가 아닌 존중이 그런 주체를 만든다는 것을 말이다. 그렇게 하여, 더 강고한 책임으로써 구성원 모두를 공존으로 이끌 수 있는 것이다.

 버틀러는 자신의 작품에서 꾸준히 사회에서 타자로 소외당한 이들이 자신들만의 공동체를 만드는 것을 구현했다. 그러나 이 공동체는 '야생종'의 안얀우가 잘 보여주듯이, 상호 공존을 위한 일종의 '터 닦기'였다. 그러니까 진정한 공존을 위해 스스로 타자에 대한 윤리적인 태도를 정립하고 실천하기 위한 중간 단계인 것이다. '저녁과 아침과 밤'의 병원 공동체처럼.

 이 단편집 또한 그런 '터 닦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대상은 독자다. 어떤 SF 작가는 SF를 가리켜 하나의 상상 실험이라는 말을 했다. 그렇다면 이 단편집 또한 상상 실험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타자와 진정한 공존을 이루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테마로 한.

 그렇기에, 타자에 대한 혐오와 증오가 갈수록 깊어지는 시대라면 더욱 이 상상 실험이 소중하지 않을 수 없고 버틀러가 유명하든 안하든, 취향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무조건 널리 읽히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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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오후 8시 33분. 방어진 앞바다에서 진도 5.0의 지진이 발생했다고 한다.

 근처 사는 이들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지진이라는 게 이렇게 무서운 것이구나 느낄 정도로

 건물이 흔들렸다고. 이럴수가!



 고향이 울산이고, 아직도 부모님이 거기서 사시고 계시는 지라,

 이런 뉴스에 민감할 수 밖에 없다.

 아무래도 근처에, 수명이 다한 고리 원자력 발전소가 있으니까.

 오늘 지진은 바로 그 고리 원전 앞바다에서 발생했다.



 작년에도 경주에서 진도 2.5의 지진이 있었고 울산에서 발생한 지진만 해도 무려 4차례가 된다고 한다.

 상황이 이런데도 원전 철거는 할 생각도 않고, 2기를 더 짓는다니!

 원전 마피아들의 탐욕 때문에 부산, 울산, 경주, 포항쪽 사람들은 다 죽어도 좋다는 건가?


 고리 원전에 후쿠시마 같은 사고가 일어났을 때, 받는 피해는 이 정도다.

 

 원전이 가동 되지 않아도 정부가 말하는 식의 블랙 아웃은 전혀 일어나지 않는다고 한다.

 지금의 원전은 오로지 원전 마피아의 탐욕 때문에 짓고 가동되고 있는 것이다. 세금으로 자신의 배를 불리는 사악한 세력들!

 다음 대선 때는 부디 이것이 최대 이슈가 되어 우리나라도 독일처럼 모든 원전이 철거 되었으면 좋겠다.

 일본의 후쿠시마 원전 비극이 우리와 결코 멀리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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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집 2016-07-05 2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 말입니다. 좁은 땅에 그것도 경상도쪽으로 옹기종기 모여 있으니... 원전 폐쇄가 답이고 다른 대체 에너지를 찾아야하는데 원전마피아와 부패정권과의 짝짜궁 무섭습니다.

오드득 2016-07-05 21:58   좋아요 0 | URL
오늘 일 때문에 그런 짝짜궁이 더욱 치가 떨리네요. 국가의 존립마저 위태롭게 만들 수 있는 중대사가 몇몇 개인들의 탐욕으로 좌지우지 되는 지금의 현실이 개탄스러울 뿐입니다.

qualia 2016-07-06 0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지진, 정말 무섭더라고요. 여긴 청주인데요. 집이 좌우로 막 흔들리더라고요. 이거 무너지는 건 아닌가? 순간적으로 공포감에 휩싸였었죠. 처음엔 지진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단순한 장마철 지반 꺼짐 현상일 수도 있겠다며 공포심을 달랬는데요. 나중에 뉴스 보고 진짜 지진인 줄 알았답니다. 청주조차 이 정도였는데, 진앙지 가까운 울산/부산 지역 분들은 정말 엄청나게 놀라셨을 것 같아요. 더군다나 원전이 그쪽에 몰려 있으니... 우리나라, 말로만 말고 정말 대지진 대비 구체적으로 진짜로 해야겠어요. 집이 좌우로 흔들리고 의자에 앉은 저도 좌우로 흔들리고 우두둑 소리까지 나니까 정말 무섭더라고요~

건조기후 2016-07-06 1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빨간 영향권 안에 제가 사는 동네도 있네요. 어제 제 방 양쪽 벽에 가득한 책장들이 막 삐걱대면서 앞으로 넘어질 것처럼 흔들리는데 정말 공포였어요. 책장 높이를 낮추거나 책장을 줄여야겠다는 생각을 심각하게 하고 있습니다 ㅜ

울산쪽에 활성단층이 있어서 지진이 그렇게 잦다는데 도대체 아무런 조사나 평가도 하지 않은 건지 알면서도 무시하고 지은 건지 정말 분노가 치밉니다. 잘살고 못살고가 아니라 죽고 사는 문제인데 이 썩을 놈의 나라는 어쩜 이렇게 일관되게 사람 목숨보다 돈이 중요한지. 아 그들 일부에게는 잘살고 못살고의 문제일 뿐일 수도 있겠네요. 한숨만 계속 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