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러드차일드
옥타비아 버틀러 지음, 이수현 옮김 / 비채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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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옥타비아 버틀러가 우리나라에서 지금보다 조금만 더 유명했다면, 올해 '엑스맨 아포칼립스'가 개봉했을 때, 분명 이런 말이 나왔을 것이다. "어, 설정이 버틀러의 '야생종'과 너무 비슷한데 혹시 그 소설을 모델로 만든 거 아냐?"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분명 그랬다. 최초의 돌연변이로, 그 스스로 말하는 대로 많은 문명권에서 신으로 추앙받아온 '아포칼립스'는 정말로 '야생종'의 신적인 존재라 할 수 있는 '도로' 같았고, 거기에 맞서, 현재는 많은 돌연변이들이 그들의 리더로 동경하는 미스틱은  '야생종'의 안얀우 같았다. 

 도로는 인간과 다른 이종(異種)으로 자신의 초능력으로 그들을 지배하려 하고, 안얀우는 자신들만의 공동체를 만들어 공존하려 한다. 더하여, 안얀우는 미스틱과 똑같이 무엇이든 변신할 수 있는 능력도 가지고 있었다. 그렇게 '엑스맨 아포칼립스'와 '야생종'은 닮은 꼴이었다.  공식적으로 밝히지는 않았지만 분명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아니, 받지 않을 수 없다. 옥타비아 버틀러의 소설들은, '엑스맨'처럼 남들과 다른 존재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면, 그런 삶의 양태와 의미를 헤아리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먼저 거쳐가야 할 작품이니까 말이다. 타자의 감각으로 타자와의 진정한 공존을 추구하는 작가. 그가 바로 옥타비아 버틀러다.


 '블러드 차일드'는 2006년에 작고한 그녀가 세상에 남긴 유일한 단편집이다. 표제작 블러드 차일드를 비롯한 단편 7개와 두 편의 에세이로 되어 있는 이 단편집은 옥타비아 버틀러의 작품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필독서라 말해도 전혀 무리가 없다. 흔히들 버틀러를 SF 작가로 분류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버틀러를 다 설명한다고 할 수 없다. 버틀러를 담기에 SF란 범주는 너무나 협소하다. 사실 그녀에게 SF는 목적도 아니다. 다만 수단일 뿐이다. 평생 백인 남성 중심 사회인 미국에서 흑인 여성으로 살아온 그녀가 주류에서 소외되고, 차별받은 타자로서 체득한 경험과 성찰을 독자에게 좀 더 쉽게 전달하기 위해 택한 통로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 SF 작가라는 선입견을 가질 필요는 없다. 한번쯤 사회에서 차별받는 타자에 대한 문제의식을 지녀보았다면, 자신의 취향이 무엇이든 상관없이 만나도 되는 작가인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오히려 SF 팬들이 버틀러를 삐딱하게 볼 지도 모르겠다. '괜히 전하고픈 테마에만 집착해 SF적인 재미는 별로 찾아볼 수 없나 보다' 하면서. 하지만 그것도 오해라고 말해주고 싶다. 버틀러는 SF적인 재미에도 충실하니까. 그렇지 않았다면, '블러드 차일드'가 SF 계 최고상의 양대 산맥인 휴고와 네블러 상을 모두 수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상을 받은 단편은 또 있다. '말과 소리' 역시 84년에 휴고 상을 수상했다. 

  '블러드 차일드'는 71년에 자신의 작품을 처음으로 할란 엘리슨에게 판 그녀가 84년부터 그녀가 죽기 직전인 2005년까지 발표한 단편들을 담고 있는데, 그런 의미에서 거의 평생에 걸쳐 발표한 단편들이 담겨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더구나 다섯 번째 단편, '넘어감'은 71년에 처음으로 돈을 받고 원고를 팔 수 있었던 두 단편 중 하나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책을 통해 버틀러의 생 초짜 모습도 살펴볼 수 있는 것이다. 

 모든 단편엔 공통점이 있다. 주인공이 대부분 경계 위에 서 있다는 것이다. 그/그녀는 언제나 세상 전체를 지배하는 거대 세력과 그들에게 종속되었으나, 존재론적으로 다른 존재들 사이에 끼어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그/그녀는 온전히 주체도 아니고, 그렇다고 온전히 타자도 아니다. 그/그녀는 주체와 타자라는 층이 겹쳐진, 중층의 존재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그녀가 남들보다 구속의 강도가 두 배가 될 것이니 힘들 것이라 지레짐작한다. 때로 그렇기도 하다. 하지만 버틀러가 보여주는 궁극적인 모습은 구속의 강도만큼 선택의 자유 또한 확장되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단순하게 그/그녀가 양쪽 모두에게 속했다는 사실로 오는 혜택은 아니다. 그 보다는 선택할 수 있는 주체가 되었다는 것에 뒤따르는 당연한 권리의 향유라고 해야 한다. 
 
 왜? 그/그녀를 둘러싼 두 세계는 모두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있다. 그들의 선택은 격리된 공동체의 내적 질서를  그저 따르는 것으로, 거기엔 아무런 주체적인 결단이 개입하지 못한다. 하지만 양쪽에 끼어 있는 그/그녀는 스스로 양쪽 중 어떤 질서를 따를 것인지 선택할 수 있다. 오로지 자신의 결단으로 자신의 운명을 선택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칸트가 한 말 그대로다. 칸트는 벤담의 공리주의를 공격하면서 이런 말을 했다. 공리주의가 말하는 이익은 단순히 동물적인 본능을 따른 것일 뿐, 이성적인 행위라고 할 수 없다. 우리는 배고프면 음식을 먹고, 졸리면 잔다. 그 행위는 우리에게 이익이 되지만, 그것은 순전히 동물적 욕구를 자연스럽게 따른 결과일 뿐이다. 그러니 그것을 자유라고 말할 수 없다. 자유는 오로지 스스로 선택할 수 있을 때 찾아온다. 그러므로 온전히 이성의 명령에 따를 때 사람은 자유롭다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자유는 자율적 주체만이 향유할 수 있으며, 자율적 주체는 오로지 이성적인 결단과 선택을 통해 태어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될 때 주체는 비로소 타자에 대한 책임마저 떠맡을 수 있다. 버틀러의 주인공들은 이런 경로를 그대로 따른다. '블러드 차일드'에선 누나를 대신해 자신을 희생하는 남동생이 나오고, '저녁과 아침과 밤'에선 자신도 걸린 질병의 환자들 생존을 위해서 자기에게 주어진 책임을 기꺼이 떠 맡으려는 여성이 등장한다. '말과 소리'의 주인공 여성은 유일하게 자신의 세계를 지켜줄 남자가 희생되었지만, 그것이 오히려 그녀를  주체로 만들어 고아가 된 두 어린 아이들마저 책임진다. 이렇게 중층의 존재는 결국 타자의 책임으로 나아가고, 그것을 통해 두 세계의 공존을 추구한다.

 '블러드 차일드'는 이런 이야기들의 집합이다. 그래서 너무나 늦게 나왔지만, 지금 우리들 앞에 나타난 것이 무슨 운명처럼 느껴진다. 왜냐하면 지금은 그야말로 혐오와 증오로 넘치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가장 최근에 전 세계를 놀라게 했던 브렉시트 또한 이민자들에 대한 혐오와 증오가 낳은 산물이었다. 많은 노동자들이 브렉시트에 찬성했는데, 그것은 그들이 현재 겪고 있는 삶의 어려움을 이민자들 탓이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한 마디로 이민자들에 대한 혐오와 증오를 투표를 통해 분출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들의 삶을 힘들게 만든 것은 정작 다른 데 있었다. 대다수 영국 노동자들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는 제조업이 눈에 띄게 쇠퇴하고 있었던 것이다.

 혐오와 증오는 자신의 불안을 잠재우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다. 그들이 조금만 지금 자신들의 상황이 어디서 비롯 되었는지 이성적으로 접근했다면 그런 혐오와 증오가 얼마나 말도 안되는 지 알았겠지만, 혐오와 증오는 자신이 너무나 손쉽게 할 수 있는 것이었기에, 그만 별다른 성찰없이 그것과 타협하고 만 것이다. 그래서 결국 어떻게 되었나? 불안을 잠재우려 한 행위였지만, 오히려 더 큰 불안만 증폭시키고 말았다. 우리도 쉽게 저지를 수 있는 잘못이다. 강남역 무차별 살인을 비롯하여 작금에 일어나는 여러 비극적인 사건들이 그걸 증명한다. 그러므로 버틀러가 보여주는 경로가 더욱 소중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특사'를 보면 자율적 주체가 될 수 있었던 이유가 양쪽, 그러니까 주체와 타자 모두 공감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단정이 아닌 이해, 배척이 아닌 대화 그리고 과시가 아닌 존중이 그런 주체를 만든다는 것을 말이다. 그렇게 하여, 더 강고한 책임으로써 구성원 모두를 공존으로 이끌 수 있는 것이다.

 버틀러는 자신의 작품에서 꾸준히 사회에서 타자로 소외당한 이들이 자신들만의 공동체를 만드는 것을 구현했다. 그러나 이 공동체는 '야생종'의 안얀우가 잘 보여주듯이, 상호 공존을 위한 일종의 '터 닦기'였다. 그러니까 진정한 공존을 위해 스스로 타자에 대한 윤리적인 태도를 정립하고 실천하기 위한 중간 단계인 것이다. '저녁과 아침과 밤'의 병원 공동체처럼.

 이 단편집 또한 그런 '터 닦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대상은 독자다. 어떤 SF 작가는 SF를 가리켜 하나의 상상 실험이라는 말을 했다. 그렇다면 이 단편집 또한 상상 실험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타자와 진정한 공존을 이루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테마로 한.

 그렇기에, 타자에 대한 혐오와 증오가 갈수록 깊어지는 시대라면 더욱 이 상상 실험이 소중하지 않을 수 없고 버틀러가 유명하든 안하든, 취향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무조건 널리 읽히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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