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틈 호가스 셰익스피어 시리즈
지넷 윈터슨 지음, 허진 옮김 / 현대문학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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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월호 유가족 인터뷰들 중 가장 가슴 아팠던 것은 한 아버지의 것이었다. 그는 세월호가 침몰할 때, 살아있는 아들과 통화할 수 있었다. 사태가 심상치 않다고 말하는 아들에게 그가 한 말은 "함부로 움직이지 말고, 시키는 대로 잘 따라라"는 것이었다. 그것이 아버지가 아들에게 한 마지막 말이었다. 그는 참사 뒤, 계속 마라톤에 참석했다. 이유는 단 하나. 자신을 벌주기 위해서였다. "그 때, 빨리 피하라고 말만 했어도 아들은 살 수 있었을텐데. 제가 그랬어요. 시키는 대로 따르라고. 그렇게 말한 절 용서할 수가 없어요." 마라톤 현장에서 이뤄진 인터뷰에서 아버지는 울면서 뒷 말을 반복했다.



 이 아버지가 생각났던 것은, 우리들에겐 이미 '오렌지만이 과일은 아니다'라는 소설로 잘 알려진 지넷 윈터슨의 '시간의 틈'을 읽었기 때문이었다. 버지니아 울프와 그의 남편 레너드 울프가 1917년 설립한 영국 호가스 출판사에서 셰익스피어 서거 400주년을 기념하여 하나의 거대한 프로젝트를 계획했다. 바로 세계의 유명한 작가들에게 셰익스피어 작품들을 현대적으로 새롭게 각색하여 쓰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이름하여 '호가스 셰익스피어 프로젝트'로, 이 계획에 따라 벌써 집필이 결정된 작가만 해도 그 면면이 꽤나 화려한데, '영국 남자의 문제'로 맨 부커상을 탄 하워드 제이컵슨, '시녀 이야기'로 SF계의 전설이 된 '매거릿 애트우드', '진주 귀걸이 소녀'의 트레이시 슈발리에, '우연한 여행자'의 앤 타일러, 그 뿐 아니라 스릴러 팬이라면 더욱 눈이 커질, 요 네스뵈와 길리언 플린까지 여기에 포진되어 있다. 개인적으로는 요 네스뵈와 길리언 플린의 셰익스피어가 가장 기대되는데, 지넷 윈터슨의 '시간의 틈'은 바로 그 프로젝트'의 시작을 여는 작품이다.



 셰익스피어 말년의 로맨스 '겨울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이 소설엔 세 명의 아버지가 등장한다.

 리오 그리고 지노다. 지넷 윈터스는 소설 마지막에서 셰익스피어에게 있어 결말은 세 가지 밖에 없다고 말한다. 바로 '복수. 비극. 용서(p. 395)'다. 공교롭게도, '시간의 틈'에 나오는 세 아버지가 다 여기에 해당된다. 복수는 리오, 비극은 지노 그리고 용서는 셉인 것이다.


 그런데 이 모두가 실은 다 과거에 대한 반작용이다.


 일단 리오는 아주 어릴 때, 어머니에게서 버림 받은 과거가 있다. 그것은 그가 처음으로 맞이한 세계의 붕괴였고, 너무나 갑작스러운 것이었기에 어른이 된 지금도 그 사태를 납득하지 못한다. 그는 예고 없이 찾아오는 이별, 상실을 두려워한다. 어릴 때, 지노와 연인이 됨으로써 그의 세계는 안정을 찾은 듯 보였으나 자전거 경주를 하다 뜻하지 않게 지노가 절벽 아래로 추락하자 그의 세계는 다시 불안 속에 빠져 든다. 때문에 그는 눈에 보이지 않는 우정, 사랑 같은 추상적 가치를 믿지 않는다. 보이지 않기에 예고 없는 불행으로부터 확실히 지킬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돈과 지위만 쫓는다. 내 영역이 어디이고, 잘 지켜지고 있나를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 직성이 풀리는 것이다. 그래도 불안은 사라지지 않는다. 과거의 상처는 계속해서 그를 괴롭힌다. 그런 그가 꿈꾸는 것은 단 하나다. 리처드 도너의 영화 '슈퍼맨'의 마지막 장면. 거기서 슈퍼맨은 이미 죽어버린 로이스 레인을 살리기 위해 빛의 속도를 초월하여 지구를 거꾸로 돈다. 현재의 상실을 없던 것으로 하기 위하여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다. 슈퍼맨은 다시 찾은 과거에서 로이스 레인을 살린다. 리오도 그것을 원한다. 상실의 시간으로 돌아가 상실을 소거할 수 있게 되기를. 인터뷰의 아버지도 그랬을 것이다. 다시 그 때로 돌아가 얼른 달아나라고 외치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기적은 일어나지 않는다. 리오는 계속 그 상처를 짊어지고 가야 한다.


 어떤 여자가 말하고 있었다. "항상 겨울이 떠나지 않고 폭풍이 몰아치는 황량한 산꼭대기에서 벌거벗은 채 주린 배를 움켜쥐고 천 번을 무릎 꿇고 만 년을 살아도 신들의 눈길을 돌릴 수는 없습니다."(p. 342)


 그에게 남은 것은 다시 또 그것을 겪게 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 뿐이다. 그러나 비극은 예고가 없다.


 과거란 던지면 폭발하는 수류탄이다.(p. 365)


 그래서 그는 버림받기 전에 버린다.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고 했던가? 그는 있지도 않은 지노와 아내 미미의 불륜을 의심하고 고집하여,  지노를 죽이려들고 이제 막 태어난 딸 퍼디타마저 버린다.


 지노 역시 과거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는 추락을 경험했다. 어릴 때 리오 때문에 절벽에서 추락한 것이다. 죽을 뻔한 일이었는데도, 그것은 아무런 예고도 없이 찾아왔다. 그 역시 리오와 똑같이 그것을 두려워했다. 하지만 지노는 리오와 전혀 다른 방식으로 두려움에 대응했다. 리오는 자신의 성채를 보다 더 크고 단단하게 구축하는 것으로 두려움에 대응했지만, 지노는 자신을 한없이 낮추고 포기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그는 자신의 영역을 없앴다. 이성애자든, 동성애자든 누구든 품었고 자신의 말과 이익을 고집하기 보다는 타인의 말을 더 많이 듣고 타인을 배려하길 원했다. 그러나 그의 두려움을 씻어주진 못했다. 그의 납득이 낳은 행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절벽에서의 추락이 있었던 과거를 납득할 수 없었다. 거기서 그가 절실하게 경험한 것은 인간 이란 존재의 너무도 연약한 삶이었다. 잠자리 날개만큼이나 바스라지기 쉬운 삶. 지노는 무엇을 해도 그 삶에서 달아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니 왜 구태여 나의 성채를 쌓을 것인가? 어차피 추락은 필연적인데. 지노는 원해서 아무 것도 안 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에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다. 그는 미미가 말해준 프랑스의 시인 네르발이 꾸었던 꿈의 추락 천사가 자신이라고 여긴다. 그 천사는 날개를 접은 바람에 집 사이에 추락한다. 그가 다시 날기 위해 날개를 펼치면 자신을 둘러싼 건물들이 무너질 것이다. 


 "천사가 날개를 펴고 벗어나려고 하면 건물이 무너젔을 거야. 하지만 날개를 펴지 않으면 천사가 죽겠지."

  (...)

 "당신이라면 어떻게 하겠어?" 미미가 말했다. "주변 모든 것을 파괴해야 자유로워질 수 있다면?"(p. 104)


 지노는 죽기로 결심한다. 그래서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무위(無爲)는 그의 신념이다.


 리오가 멕베스에 가깝다면, 지노는 햄릿에 가깝다. 자유롭기 위해 주변 모든 것을 파괴해 버린 리오, 주변 모든 것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죽기로 결심한 지노. 하지만 이런 삶을 지노 역시 납득할 수 없다. 이런 삶이라도, 이런 삶이 있어야 하는 이유를 그는 알고 싶은 것이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만든 건 항상 자리를 비우는 신이 아니라 추락자, 루시퍼 같은 인물이라는 거지. 일종의 흑천사야. 우리는 죄를 짓거나 지위를 잃는 게 아니야. 우리 잘못이 아니었지. 우리는 이렇게 태어났어. 우리가 무얼 하든 그건 결국 추락이야. 걷는 것조차 일종의 잘 통제된 추락이지. 하지만 실패와는 달라. 우리가 이걸 안다면-영지, 그러니까 안다는 거야- 고통을 견디는 게 더 쉬울 거야."

  "사랑의 고통 말이야?"

  "그것 말고 뭐가 있어? 사랑, 사랑의 결핍, 사랑의 상실. 나는 지위와 권력이-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그렇고-별개의 동인이라고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어. 우리가 서 있는 곳, 혹은 추락이 시작되는 곳은 바로 사랑이야.(p. 108)


 그 바람을 담아 그는 열의를 다해 게임을 만든다. 게임의 제목은 '시간의 틈'. 게임에서 사람들은 세상의 존재 이유를 밝혀주는 존재를 찾아 다닌다. 그 존재는 아기다. 예수가 태어난다는 예언을 들은 헤롯왕은 나라의 모든 아기들을 죽이라고 명령했다. 어쩌면 예수란 그렇게 헤롯왕에게 자식을 잃었던 부모들이 자신이 당한 비극의 이유를 찾던 끝에 태어난 존재일 지도 모른다. 비극을 당한 자는, 자신이 당한 비극의 이유를 알고 싶어 하기 마련이다. 그 이유를 아는 것, 그것의 납득이 그에겐 구원이나 다름없다. 인터뷰에 나온 아버지도 그랬을 것이다. 그의 계속된 마라톤은 자학 외에도 그 이유에 대한 갈구의 몸부림일 지도 모른다. 이런 이유로, 난 '시간의 틈'을 읽으면서 그 아버지를 떠올렸던 것 같다.


 리오와 지노, 그들 모두 과거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리오는 욕망으로, 지노는 자학에 가까운 포기로 과거를 잠시 봉인해두고 있었을 뿐이다. 우리라고 다를 것인가? 리오와 지노의 모습은 과거의 상처를 지닌 자라면 누구나 닮을 수 있는 모습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 그렇다면 과거를 우리는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마지막 아버지 셉의 등장을 본다.


 셉은 소설에서 가장 먼저 나온다. 리오와 지노는 백인이지만, 그는 흑인이다. 그리고 병든 아내를 목졸라 죽였다. 지넷 윈터슨은 셉과 리오를 앞과 뒤로 나란히 배열한다. 둘 다 아버지고 돈독하게 지내는 아들 하나가 있다. 닮은 점 때문에 지넷이 마치 둘을 비교해 보여주는 것 같다. 셉과 리오, 둘 다 아내를 죽였다. 셉은 육신의 아내를 죽였고, 리오는 영혼의 아내를 죽였다. 미미는 리오의 만행으로 인해 결국 조각 같은 존재가 된다. 살아 숨쉬는 것은 다만 육체 뿐, 영혼은 마치 식물 인간과도 같이 어디로든 움직일 수 없다.


 폭포수처럼 사라지는 현재. 너무나 천천히 또 너무나 빨리 지나가는 시간의 맹렬한 흐름. 얼마나 오래되었을까?

 그녀는 가만히 서 있지 않으려고 걷는다. 시간 밖으로 걸어 나갈 수 있다는 듯이. 과거를 원래 속한 곳에 두고 떠날 수 있다는 듯이. 하지만 그것은 항상 거기, 그녀의 바로 앞에 있기 때문에 불가능하다. 과거는 그녀 바로 앞에 놓여 있고 매일 그녀는 그것을 향해 걸어가 부딪친다. 과거는 반대쪽에서 들어오려는 미래를 막는 문 같다.(p. 323)


 미미는 과거의 비극과 현재의 불행 사이에 단단히 끼여 옴짝달싹 못하고 있다. 그렇게 셉과 리오, 둘 다 아내를 죽였으나 동기는 달랐다. 리오는 자신을 위해 죽였으나, 셉은 아내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죽였다. 하지만 그조차 행여 진실은 자신의 고통을 덜기 위해서 죽인 것이 아닐까 의심한다. 그는 '슬픔이 여기에 없는 사람과 함께 산다는 뜻이라는 걸 깨닫는다(p. 36)'. 셉도 과거에 붙들려 있다.


 그런데 그의 아내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을 위해서 죽음을 살아 낼 수 있다면 난 그렇게 할 거야."(p. 37)

 죽음을 산다? 모순처럼 들리지만 그렇지 않다. 사랑으로, 타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 사람은 그의 죽음도 사는 것이 된다. 그 혹은 그녀가 목숨을 바쳤던 대상을 통해 그와 더불어 삶을 영위할 테니 말이다. 부재(不在)는 무(無)가 아니다. 다만 우리의 편협한 시야가 그렇게 보게 할 뿐. 그런 아내 때문일까? 셉의 대응은 다르다. 그는 과거를 받아들이기로 한다. 상실을 사라짐이 아니라 다만 장소를 옮긴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에게 부재는 내재(內在) 혹은 타재(他在)다. 내재(內在)는 셉이 어머니의 자리에 서는 것으로 나타난다. 셉은 어머니가 되어(셉은 퍼디타의 양육을 위해 아내의 보험금으로 가게를 마련한다. 가게는 리오가 남긴 돈과 아내의 보험금을 정확히 절반씩 사용하여 마련했는데, 여기서 셉이 리오와의 관계에 있어, 어머니의 위치에서 퍼디타를 양육한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더우기 셉은 피아노 연주자로 음악에 종사하는데, 그것인 퍼디타의 어머니인 미미의 직업과 동일하다. 이렇게 셉은 미미를 이어 받는다.), 자신의 아이가 아닌 퍼디타를 자신의 아이로 기꺼이 받아들이고 아낌없이 사랑하고 양육하려 한다. 아내에게 못다한 사랑을 퍼디타에게 베푸는 것이다. 사랑이 장소를 옮긴다. 이렇게 부재(不在)는 타재(他在)가 된다. 


 리오와 셉의 대비는  셉이 가지는 차이를 더욱 선명하게 만든다. 셉은 리오처럼 과거를 되돌리고 싶어하지 않는다. 지노처럼 '시간의 틈'을 구태여 찾으려고 하지도 않는다. 과거의 매몰도 현실 도피도 그에겐 없다. 있는 것은 다만 타인에 대한 무한 책임 뿐이다. 그래서일까? 지넷 윈스턴은 리오와 지노가 그토록 찾았던 것이 셉에겐 이미 와 있었다는 것을 다음과 같이 문득 드러낸다. 셉이 아기 퍼디타를 안고 가다 어느 순간 과거의 자신으로 돌아가는 장면이다.


 나는 아기를 안고 길을 걷다가 어떤 시간과 다른 시간이 같은 시간이 되는 시간의 틈에 빠졌다. 내 몸이 곧게 펴지고 보폭이 넓어졌다. 나는 청년이었고 아름다운 여자와 결혼했는데 갑자기 우리는 부모가 되었다.(p. 34 ~ 35)


 리오와 지노가 염원한 구원이, 자신과 아무런 연고도 없는 아이를 책임지기로 한 순간 셉에게 문득 도래하는 것이다. 


 "난 퍼디타가 내 아이라고 믿지 않았습니다." 리오가 말했다. "지노의 아이라고 생각했지요."

 "난 내 애가 아니라는 걸 알았지요." 셉이 말했다. "하지만 이 아이를 사랑했습니다."(p. 366)


 이로써, 우리는 알 수 있다. 마지막 아버지 셉이 바로 지넷 윈터슨이 과거에서 자유롭지 못한 우리에게 제안하는 구원의 여정이라는 것을 말이다. 물론 소설에서 셉이 차지하는 비중은 작다. 셉이 표상하는 여정의 대부분은 미래 세대인 퍼디타에게서 구현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런 퍼디타가 있기 위해서는 셉이 있어야 했다. 아버지의 아집이 일으킨 비극은, 아버지의 환대로 치유되어야 했다.


 셉이 등장하는 순서는 원작 '겨울 이야기'와 다르다. 셰익스피어의 원작에서 가장 먼저 등장하는 아버지는 파멸의 원흉이자 리오의 원본인 '레온테스'다. 원작에서 세계는 붕괴로 시작한다. 그러나 지넷의 소설은 다르다. 셉이 폭풍우가 몰아치는 날, 한 남자가 살해당하는 장면을 목격하고 분명 그와 연관 있어 보이는 퍼디타를 베이비박스에서 구하는 장면으로 여는 것이다. 소설의 세계는 재건으로 시작한다. 이 점을 고려하면 '물의 별'이라는 이 장의 제목이 의미심장해 보인다. 지넷 윈터슨은 혹시 이 장을 성경의 '창세기'처럼 쓴 것이 아닐까? 백인이 아니라 흑인인 신이 파멸과 죽음의 잔여라 할 수 있는 어린 생명을 구하는 이야기. 그것도 인종도 다르고, 자신과 아무런 관계마저 없는 자를.


 만일 셉의 첫 등장이 이 소설의 창세기라고 한다면, 이러한 셉의 모습은 창세기의 신과 얼마나 다른가? 창세기의 신은 순종을 원한다. 순종은 자신과 동일할 것에 대한 요구에 다름 아니다. 그러므로 순종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의 타자가 되겠다는 표시이고, 그것이 드러난 순간, 신은 자신의 영역에서 배척한다. 조금의 배려도 없는 축출이라는 점에서 이런 신의 모습은 리오와 판박이다. 그러나 셉은 자신과 동일할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자신과 전혀 다른 타자라 할지라도 기꺼이 환대한다. 인종도 다르지만, 행하는 것도 다르다. 리오와 셉의 대비는 어쩌면 성경의 신과 지넷 윈터슨이 꿈꾸는 신의 대비이기도 하지 않을까? 만일 그렇다고 한다면 나는 이런 생각을 또 하게 된다.

 '혹시 이 소설 저변에 흐르는 이야기는 나와 다른 타자에 대한 태도에 관한 것이 아닐까?'


 그 생각으로 이끌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이야기 중심에 아버지가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왜, 이 소설엔 각자 다른 경로를 걷는 아버지들이 등장할까? 그 의문 끝에 나는 프랑스의 한 철학자를 떠올렸다. 바로 레비나스다. 그는 타자에 대한 책임을 강조했다. 그는 존재들이 서로 고유의 가치를 가지고 대등하게 공존하지 않고 어느 하나로 융합되어 동일자가 되는 것을 무엇보다 경계했는데, 그것은 물론 유태인으로 그가 경험한 아우슈비츠의 비극을 초래한 전체주의 때문이었다. 그는 '나'라는 자아조차 하나가 되어서는 안되고, 나이면서 동시에 타자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나와 하나이면서도 동시에 결코 나와 같을 수 없는 영원한 타자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  레비나스는 가능하다고 했고, 그 증거로 아버지란 존재를 들었다.


 어떻게 나는 너 안에 흡수되지 않고, 나를 잃지 않으면서, 너라는 타자 안에 나로 남아 있을 수 있는가? 어떻게 자아는, 나의 현재 속에 있는 자아가 아니면서, 다시 말해, 어쩔 수 없이 자신에게 돌아온 자아가 아니면서, 너 안에서 나로 남아 있을 수 있는가? 어떻게 자아는 자신에게 타자가 될 수 있는가? 아버지가 되는 길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 아버지란 존재는 전적으로 타인이지만 동시에 나이기도 한 '낯선 이'인 것이다. (레비나스, '시간과 타자' p. 112)


 레비나스가 아버지란 존재를 이렇게 중요하게 취급하는 이유는 자식과의 관계 때문이다. 아버지에게 아이는 자신의 분신이지만 소유할 수 없다. 소유란 동일화를 뜻한다. 아들은 자신에게서 난 존재이지만 자식은 아버지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아버지는 자식에게서 나이면서 내가 아닌, 타자로서 '낯선 나'를 본다. 레비나스는 그것이 바로 아버지의 구원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타자로서의 낯선 나인 자식이 내가 미처 실현하지 못했던 가능성을 실현시키고,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처럼 '걸어보지 못한 길'을 걸을 것이기 때문이다. 자식은 지금 고정된 나라는 존재의 영역을 넘어선다. 자식에 의해 아버지 자신에게는 주어지지 않았던 미래가 비로소 열리는 것이다. 그래서 레비나스는 출산도, 자식도 모두 소중한 경험이요, 존재라고 생각했다. 진정한 미래가 그를 통해 도래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미래란 단순히 시간적인 의미가 아니다. 레비나스에게 미래란 타자다. 우리는 미래를 알 수가 없다. 미래는 우리의 모든 능력을 아득히 넘어선 무엇이다. 우리에게 있어 절대적으로 바깥에 위치하는 존재가 '미래'다. 그래서 타자는 미래이고, 그 미래가 도래한다는 것은 현재에 고정된 나를 넘어서는 초월을 뜻한다. 아버지란 그 초월을 누려볼 수 있는 존재인 것이다. 바로 자식이란 미래를 통해서.


 지넷 윈터슨이 레비나스를 읽었는 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미래 세대가 과거로 붕괴된 세계를 재건한다는 생각은 레비나스와 이처럼 많이 닮아있다. 어쩌면 이것은 지넷 윈터슨이 찾아낸, 지노에게 있어 '시간의 틈'과도 같은 자기 존재의 의미일 지도 모른다.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지넷 윈터슨 또한 '입양아'였기 때문이다. 그녀는 '퍼디타'였다. 태어나자마자 버림 받았고 한 독실한 기독교인 가정에 입양되었다. 하지만 오순절교를 광신했던 양부모에 의해 지넷의 미래는 자신의 뜻과 상관없이 철저히 설계 되었다. 그녀는 그들이 원하는 것 이외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고 꿈꿀 수도 없었다. 지넷은 그들에게 소유되었고, 오렌지만이 과일이며 똑같이 신에게 순종하는 것만이 유일한 삶의 가치라고 강요받으며 자라났다. 그런 경험을 쓴 책이 바로 지넷의 첫 소설, '오렌지만이 과일은 아니다'였다.


 그런 그녀에게 진정한 미래가 열린 것은 사랑 때문이었다. 교회에서 우연히 만난 한 소녀와의 사랑이 '오렌지만이 과일은 아니다'라는 것을 깨닫게 해 주었다. '퍼디타'가 셉의 사랑을 통해 과거로 인해 모든 붕괴된 세계를 재건할 수 있었듯이 말이다. 이런 그녀였기에, 지넷에게 셰익스피어의 '겨울 이야기'는 각별했다. 자신과 똑같은 입양아가 나오고, 그 입양아를 통해 세계는 구원 받는다. 지넷은 '겨울 이야기'를 읽으면서 비로소 자기 존재의 의미를 찾았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녀 스스로 고백 했듯, 30년이 넘도록 내내 '겨울 이야기'를 개인적인 이야기로 여기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개작을 쓴 것은 30년이 넘도록 나에게는 이 희곡이 개인적인 글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것이 없다면 내가 살아갈 수 없는, 글로 쓴 세상의 일부였다는 뜻이다.(p. 394)


 정녕 그 오랜 세월 동안 지넷에게 '겨울 이야기'는 지노의 '시간의 틈'이었다. 그녀는 이 이야기를 통해, 비극적 운명에 처해진 자신의 존재를 긍정할 수 있었다. 때문에 '시간의 틈'은 자신이 꼭 써야만 하는 이야기였고, 결국 그 모든 여정을 끝낸 지넷은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비로소 자신의 과거와 그 모든 순간에 존재했던 자신을 긍정할 수 있게 되었다고.


 어쩌면 그 때 나는 기억할 것이다, 역사는 스스로 반복되고 우리는 항상 추락하지만, 내 안에는 역사가 담겨 있고 내가 잠시 과거에 다녀와도 아무 흔적도 남지 않지만, 나는 알 가치가 있는 어떤 것을 알았었음을. 거칠고 존재할 것 같지 않고, 판에 박힌 모든 것을 거스르는 어떤 것을 알았었음을. 뒤집힌 배에 남아 있는 공기처럼.(p. 401)


 이렇게 지넷도 셉의 자리에 섰다. 과거에서 자유롭게 되었다. 미미가 그랬던 것처럼, 과거로 꽉 막혔던 문이 열리고 미래가 들어온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지넷이 독자인 우리도 자기처럼 되어야 한다고 강요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다만 그녀 개인의 경험과 깨달음일 뿐, 일반화시킬 것은 아니라고 한다. 물론 그녀가 소설에서 직접 말하는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내가 소설의 코다를 통해 넌지시 암시받은 것일 뿐. 암시는 소설의 마지막이 다소 이상하게 끝난 것에서 다가왔다. 지넷이 소설로 그냥 끝내지 않고 자신의 고백으로 갑자기 전환시켰던 것이다. 단순히 소설로 끝났다면, 셉과 퍼디타의 여정이 그녀가 제안한 일반적인 대안이라 여겼을 테지만, 예기치 않게 지넷이 아주 개인적인 고백으로 개입하여 그렇게 보기가 어려웠다. 무엇보다 지넷의 고백마저 셉과 퍼디타의 연장선상에 있었기에, 그 모든 것이 지넷이 찾은 개인적인 구원의 여정으로 보도록 이끌었다. 그녀는 자신의 작품을 통해 내내 다양성의 포용과 나를 벗어나 타자로 끊임없이 지향할 것을 말해왔다. 바로 그 마음이 여기에도 투영된 것이 아닐까 싶다. 그녀의 대안이 정답처럼 복사될 지도 모르기에.


 그러나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소박한 제시 정도는 하고 있다. 그것은 유일하게 '겨울 이야기'의 이름 그대로 나오는 오톨리커스의 입을 통해 나타난다. 셉의 아들 클로를 집까지 태워주다, 오톨리커스는 오디이푸스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된다. 오이디푸스도 입양아였다.


 오이디푸스는 노인이 자기 아버지인 줄 몰랐어. 입양아거든. 오이디푸스는 장차 부모를 죽이게 된다는 저주에 걸려 있었지. 그런데 오이디푸스는 부모님을 좋아했거든.(p. 208)


 그는 오이디푸스의 비극을 말하면서 우회로가 좀 더 일찍 만들어졌다면 서구 문화 전체가 달라졌을 것이라 말한다. 우회로가 있었다면 오이디푸스와 그의 진짜 아버지가 서로 먼저 비켜나라고 갈등을 일으키기 전에 피해 갔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우회로가 바로 지넷의 소박한 제시다. 우회로가 없었기에, 오이디푸스는 지넷, 퍼디타와 같은 입양아였음에도 불구하고 세계를 붕괴 시켰고 자신마저 나락에 빠뜨렸다. 여기서 오이디푸스는 '내 때는 아직 우회로가 발명되지 않았잖아? 어쩔 수 없었다고!' 항변할 지 모른다. 하지만 오톨리커스에 따르면 우회로는 존재의 문제가 아니다. 생각의 문제고, 시야의 문제다.


 우회로는 절대로 그렇게 심오하거나 시적이지 않아. 안 그래? 내 말은, 근엄한 표정으로 저는 인생의 우회로에 다다랐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고. 아니지, 다들 갈림길이라고 한다니까.(p. 211)


 갈림길 밖에 못 보는 마음과 눈이 문제인 것이다. 살면서 우리는 자주 마치 갈림길에 선 것처럼, 양 극단에 치우친다. 이것 아니면 저것, 성공 아니면 실패, 남성 아니면 여성, 백인 아니면 흑인, 이성애자 아니면 동성애자 등등. 그리고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길은 아예 없거나 내 삶에 위협이 되는 것으로 치부해 버린다. 리오가 그랬듯이, 모든 비극은 바로 거기서 파생되는 것이다. 갈림길밖에 없다는 생각, 혹은 그것밖에 보지 못하는 시야에게서.


  살인을 부른 여성 혐오도, 영국에게 브렉시트라는 자충수를 가져온 인종 혐오도 알고 보면 갈림길만 있다는 생각이 낳은 산물이었다. 그러나 셉과 퍼디타 그리고 지넷 자신이 보여주듯이, 우회로는 어디든 존재한다. 이것과 저것 사이엔 수많은 길이 스펙트럼처럼 펼쳐져 있는 것이다. 그러니 그것이 존재한다는 생각, 그것을 볼 수 있는 눈만 있으면 된다. 우회로는 바로 그럴 때 홀연히 등장한다. 고정된 상황과 굳어진 나에게서 벗어날 때 우회로가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것이다. 그런 벗어남은 그대로 나와 나를 둘러싼 현실에 틈을 내는 것과 같다. 지노는 오해하고 있었다. 틈은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것이었다. 퍼디타에 대한 책임을 떠 맡기로 작정했을 때, 셉이 문득 시간의 틈 사이로 들어갔던 것과 마찬가지로. 어디든 우회로가 있다는 생각을 해라. 그것은 찾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나는 지넷의 소박한 제시라고 생각한다. 틈은 종결을 거부한다. 틈은 끝에서 오히려 시작을 열어젖힌다. 더 넓고, 다양한 세계가 그 틈으로 계속 들어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지넷이 소설의 마지막을 그렇게 처리한 것은 더없이 합당해 보인다. 제목이 '시간의 틈'이고 소설이 이런 말을 하는 이상, 이 소설에 코다는 어울리지 않으니까. 이런 세계엔 과거가 되는 것이 하나도 없다. 틈이 창출하는 세계에선 어디든 무한의 미래 뿐이다. 겨울의 이야기는 더이상 자리할 수 없다. 뒤집힌 배에는 언제나 에어 포켓이 존재하기 마련이니까.




끝으로, 노래 하나를 첨부 한다. 바로 제니스 조플린의 '섬머 타임'이다.

 소설에서 이 노래는 꽤 의미심장하게 쓰인다. 아이에게 더이상 과거의 불행은 없고 밝은 미래만 있을 것이니 울지말라는 뜻의 이 노래는 리오로 인해 붕괴된 세계가 셉과 퍼디타에 의해 완전히 재건될  때, 마치 그것을 선언하듯 퍼디타의 목소리로 셉의 피아노 반주에 맞춰 집 안 가득 울려퍼진다. 아마도 이 장면을 영화로 만들면 노래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카메라가 천장에서 방안의 사람들을 담으며 천천히 이동하는 것으로 찍지 않을까 싶다. 많은 가수들이 이 노래를 불렀는데, 굳이 제니스 조플린의 것을 고른 것은 가장 좋아하는 버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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