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 갈대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73
사쿠라기 시노 지음, 권남희 옮김 / 비채 / 2016년 9월
평점 :
절판


 그런 책이 있다. 한 번 읽게 되면 굉장히 재밌는 것은 아닌데 어쩐지 중도에 도저히 그만둘 수 없는 책이. 사쿠라기 시노의 '유리 갈대'가 그랬다. 왜일까? 끝까지 읽으면서도 이유는 잘 알 수 없었다. 뭔가 독특한 분위기 탓일까? 어쨌든 이 소설 상당히 음습하다. 세인의 상식 같은 것은 가볍게 뛰어 넘는다. 이제 갓 서른이 된 여성 세쓰코는 고다 기이치로라는 육십대 노인의 아내다. 머릿속으로 남편과 아내의 나이차를 계산할 필요는 없다. 그런 것은 비교도 안될 만큼 더 놀라운 사실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고다 기이치로는 원래 세쓰코 엄마의 애인이었다. 그녀는 오랫동안 엄마의 정부로 있었던 남자의 아내가 된 것이다. 더구나 그녀는 고등학교 1학년 때, 그와 관계를 가졌다. 그렇다고 세쓰코가 남편에게만 충실한 여자도 아니다. 다른 남자가 있는 것이다. 자신의 첫 직장이었던 회계 사무실의 운영자 사와키. 그녀는 자주 사와키에게 안긴다. 하지만 남편에게 죄책감은 들지 않는다. 문득 유하 감독의 영화 '결혼은 미친 짓이다'가 떠오른다. 세쓰코는 그 영화에서 엄정화가 분했던 캐릭터와 비슷하다. 그녀는 불륜의 상대인 감우성이 분한 남자가 이렇게 두 집 살림 하는 거 괜찮은 거야? 하고 묻자 이렇게 대답한다. "아무런 죄책감이 들지 않아. 그냥 조금 더 바쁘게 산다는 느낌 뿐이야." 세쓰코도 마찬가지다.


 

 어차피 남편과의 관계도 사랑이 아니라 돈을 매개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것도 남편 기이치로가 뭔저 권했다. 스물 셋의 세쓰코에게 평생 돈 걱정 없이 여유롭게 살도록 해 줄테니 자신과 결혼하자고 했던 것이다. 그는 객실이 열 두 개인 모텔 '호텔 로열'의 사장이었다. 세쓰코는 결국 노인의 아내가 되었고 그 대가로 여유와 안정을 얻었다. 세쓰코에겐 유일하게 즐기는 취미가 있다. 바로 단가다. 그녀는 마을의 단가 짓는 모임에 다니고 있다. 남편의 종용에 자신이 지은 단가를 모은 책도 하나 냈다. 그 책의 제목이 바로 '유리 갈대'다.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 '유리 갈대'란 제목을 가진 단가는 이러하다.


 축축한 땅 위 도도하게 선 저 유리 갈대. 대롱 속에는 바슬바슬 모래가 흘러가네. (p. 44)


 단가의 앞 부분은 그대로 소설의 비유 같다. 세쓰코를 둘러싸고 진행되는 이야기의 세계란 정말로 축축한 땅이나 다를 바 없는 것이다. 그것도 아주 음습하게 축축하다. 일단 남편이 세쓰코가 사와키에게 안긴 날, 교통 사고를 당해 의식 불명 상태에 빠진다. 내리막길 커브를 직진으로 달렸다고 한다. 세쓰코는 남편을 병문안 온 엄마를, 엄마가 운영하는 가게까지 데려다 주었다가 거기서 실은 남편이 여기서 엄마를 만나고 돌아가다 사고를 당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 사실을 추궁하자, 엄마 리쓰코는 세쓰코에게 이렇게 말한다.

  '너와 결혼한 뒤에도 우리 사이는 한 번도 끊어진 적이 없었어!'


 그건 그렇고, 세쓰코는 남편이 사경을 헤매게 되자 남편이 죽기 전에 집을 나가버린 전처의 딸 고즈에와 만나게 해주려 한다. 사와키를 시켜 고즈에를 찾고 보니 고즈에는 생계가 궁지에 몰려 대마를 키우고 파는 일을 거들고 있다. 세쓰코는 고즈에에게 당장 그것을 그만두라고 하며 앞으로 생활비 일체는 자신이 담당하겠다고 선언한다. 하지만 아직 축축한 게 끝난 것은 아니다. 세쓰코의 단가 모임 중에 미츠코라는 여인이 있다. 그녀에겐 남편과 마유미라는 일곱 살의 딸이 있는데, 하루는 미츠코가 세쓰코에게 딸을 맡기고 사라져 버린다. 알고 보니 딸 마유미는 아빠 그러니까 미츠코의 남편에게 학대를 당하고 있었다. 미츠코는 딸을 보호하기 위해 믿을 수 있는 세쓰코에게 맡긴 것이었다. 세쓰코는 마유미를 고즈에에게 돌보게 한다. 이런 상황이니 어찌 축축한 땅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하지만 세쓰코는 꿋꿋하게 버텨내려 한다. 해야 할 일은 하고 맡아야 할 책임은 도맡으면서 어떻게든 자신의 세계가 붕괴되지 않고 굴러가도록 만든다. 쓰러지지 않는 도도한 갈대처럼. 그래서 유리 갈대는 세쓰코 자신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그녀를 흔들어대는 바람을 쉬이 그칠 줄 모른다. 더 기막힌 사실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실은 남편이 6개월도 채 살지 못하는 시한부 생명이었다는 것이 밝혀지고, 내리막길의 커브를 직진한 것도 자살하려 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 또한 드러난다. 붕괴는 이미 막을 수 없다. 마유미의 가족이 그랬듯, 벌써 되돌릴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해 버린 것이다. 이 소설이 세쓰코가 불에 타 죽는 것으로 시작하는 것도 그 때문이리라. 그녀에게 남은 것은 죽음밖에 없었다. 그것만이 그녀가 축축한 땅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인 것처럼. 애초부터 그녀의 삶은 그녀가 쓴 단가처럼 끝없는 유리관을 흐르는 모래 소리처럼 말라 비틀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삶이 그렇게 된 결정적인 원인은 바로 그녀의 엄마 리쓰코에게 있었다. 엄마 리쓰코는 세쓰코에게 이런 삶을 내내 선사했던 것이다.


 "난 네 엄마가 될 수 없다고 처음부터 포기했어. 열다섯 살 나이에 엄마를 떠났기도 하고. 우리 엄마도 멀쩡한 엄마가 아니었거든. 시도 때도 없이 남자 출입이 끊이지 않았어. 동시에 양다리, 세다리 걸치고. 어쩌면 더 있었을지도 몰라. 술집을 하는 건지 매춘을 하는 건지. 내가 집에 들락거리는 남자들에게 당하는 걸 보고 못 본 척하는 것까진 그렇다 치더라도 돈까지 가로챘던 여자야. 딸을 쓰러뜨리는 남자 뒤에서 끝날 때까지 보고 있었어. 그래서 열다섯 살에 바로 집을 나와버렸어. 이런 내가 엄마인 척하면 너도 싫었을 거야."(p. 142 ~ 143)


 이토록 커다란 과거의 상처를 지닌 자가 어떻게 현재를 제대로 살 수 있을까? 그렇게 될 수 있으려면 딱 하나, 과거와의 진정한 결별 뿐이다. 정녕 과거를 딛고 전혀 새롭게 태어나지 않으면 안된다. 그래서 소설의 처음이 그녀의 죽음인지도 모른다. 불새처럼 죽음을 통해 완전히 새로운 존재로 부활하는. 소설은 그런 순간을 준비한다. 이 소설엔 이상한 연대가 있다. 부모 세대로부터 갖은 상처를 받은 자들이 그 상처를 바탕으로 하여 이루어지는 연대가. 자신의 상처를 꾸미지 않고 진솔하게 드러내어 같이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이들이 진정한 소통으로 만들어지는 연대가. 그것이 마유미를 떠 안은 고즈에의 집에서, 그리고 스포일러가 되기에 밝힐 수 없는 반전의 공간에서 펼쳐진다.


 '유리 갈대'는 파격의 소설이다. 이런 내용의 소설에 흔히 나오는 용서라든가 화해 같은 건 하나도 나오지 않는 것이다. 대신 '유리 갈대'는 '썩은 것은 붕괴되어야 한다'고, '완전히 절멸시킨 뒤 새롭게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쪽이다. 소설엔 당신을 섬뜩하게 만드는 순간이 두 번 존재한다. 바로 그 순간에 소설은 진심을 내비친다. '당신도 이런 삶을 살고 있어? 그러면 끝내! 그 용기를 내가 빌려주겠어.'라고. 이것은 남성과 여성 관계에도 통용된다. 왜냐하면 소설에 남성과 여성 사이에 분명한 경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소설 세계에서 남성은 지배자로 군림한다. 여성은 그들의 세계에 종속되어 신체와 영혼에 지속적으로 새겨지는 아픔을 감내한다. 소설 속 남성들은 때로는 자비 없는 폭력을 또 때로는 달콤한 사랑의 밀어를 속삭이지만 주체인 여성들을 여전히 종속적인 존재로 만들고 있다는 점에서 본질은 똑같다. 여성들은 늘 식민지로 존재한다. 소설은 그들의 독립은 그들 스스로 쟁취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결국 그녀들은 남성들의 식민지를 탈주하여 진정한 주체가 되어 강고한 연대로 독립과 자유의 영토를 만들고 꾸려 나간다. 아마도 내가 끝까지 소설에서 눈을  뗄 수 없었던 것은 이 정도로 단호하고 굳건한 의지를 느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유리 갈대'는 아마도 우리나라에 네 번째로 소개되는 사쿠라기 시노의 작품이다. 난 이것 말고 '아무도 없는 밤에 피는'만 읽었는데 그 단편집을 읽었을 때도 이 작가 뭔가 심상치 않구나 생각했다. 그런데 '유리 갈대'를 읽은 지금은 이 작가가 거의 기리노 나쓰오 급으로 보인다. 그러고 보면 사쿠라기 시노나 기리노 나쓰오 모두 정식으로 데뷔하기 전에 평범한 주부였다는 공통점이 있다. 소설이 가진 파격이나 전복성을 생각하면 그저 평범한 일상을 영유하던 주부가 이력의 전부라는 게 얼른 믿겨지지 않는다. 공포 만화가로 유명한 이토 준지는 언젠가 자신을 가장 무섭게 만드는 것은 일본 여성이라고 고백한 바 있다. 기리노 나쓰오에 이어 사쿠라기 시노까지 만나고 보니, 왠지 그럴 것도 같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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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러 안데르스와 그의 친구 둘
요나스 요나손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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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에 세 번째로 소개되는 요나스 요나손의 소설, '킬러 안데르스와 그의 친구 둘'은 내게 그야말로 슈뢰딩거의 고양이 같았다. 나도 제법 장르 소설에 대한 경험이 많이 쌓인 탓에 책을 읽을 때 어느 정도는 뒷 얘기를 예측할 수 있는데 이 소설만큼은 그게 허락되지 않았다. 도대체 이 다음의 이야기에서 뭐가 튀어나올지 전혀 예측할 수 없었다. 이 부분에서 무턱대고 꺼낼 이야기는 아니지만, 하여간 그래서 그간 천편일률적으로 뻔한 전개에 이루 말할 수 없이 식상하셨던 분들이라면 얼른 이 책을 손에 들 것을 권해드리고 싶다. 종잡을 수 없는 예측불허의 전개만으로도 끝까지 읽게 만드니까 말이다.



 어쨌든 이 소설의 주인공은 킬러 안데르스가 아니다. 비록 제목에 유일하게 고유 명사로 표기되고 가장 앞에 나왔어도 얘는 조연에 불과하다. 진짜 주인공은 바로 뒤에 나오는 '그의 친구 둘'인 것이다. 이 '친구 둘'이란 하나는 남자, 다른 하나는 여자다. 얼른 커플인가 하는 생각이 드실 것도 같은데, 원래는 아니다. 둘은 주인공 남자가 점심을 먹다가 우연히 만났고, 더구나 그 때 여자는 남자에게 기도 하고 기도값을 받는 식으로 사기를 치려 했다. 그랬던 여자의 이름은 요한나 셸란데르. 전직 목사다. 그러나 지금은 설교 도중 사람의 성기 운운하는 쌍욕을 신에게 범해 강단에서 쫓겨나 노숙자 신세다. 그래서 신의 이름을 빌어 사기를 친 것이다. 사기를 당할 뻔 했던 남자의 이름은 페르 페르손. 작가 이름인 요나스 요나손 처럼 비슷한 발음의 나열이다. 그는 이 이름을 싫어한다. 그 이름을 물려준 가문에 대해 별로 좋은 기억이 없기 때문이다. 원래 남자의 집안은 아주 잘 살았다. 할아버지 때만 해도 엄청 부자였다. 그 때 할아버지는 말 사업을 했다. 하지만 디젤 기관이 발명되고 자동차 산업이 활황하면서 할아버지 주력 사업은 보기 좋게 실패했다. 그건 아버지 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마치 시대가 가문의 앞길을 작정하고 막아서는 것처럼 하는 사업마다 시류를 잘못 만나 망하고 말았다. 그래서 그는 현재 손님이 거의 찾지 않는 스웨덴에서 가장 음침하며 작고 허름한 호텔의 리셉셔니스트로 일하고 있다. 당연히 급료는 병아리 눈꼽만큼이고 사는 곳도 데스트 뒤에 딸린 원래는 창고로 쓰였던 작은 방이다. 사는 낙이 있을리 없다. 그에게 이름은 가문이 줄기차게 당한 불운의 겹침의 형상과도 같았다. 남은 것은 그런 이름을 가져다 준 가문에 대한 원망과 자신을 이렇게 만든 세상에 대한 복수심 뿐이다.


 요한나 셸렌데르도 다르지 않다. 그도 집안에 대한 원망이라면 페르 페르손 못지 않다. 그녀는 원래 대대로 목사인 집안 출신이었다. 그것이 여자인 그녀에겐 저주가 되어버렸다. 목사는 편견과 고집의 구현체나 다름없다. 요한나의 아버지가 그랬다. 그는 목사는 반드시 남자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여자가 목사가 되는 것은 불경이었다. 그런데 그만 딸이 태어나버린 것이다. 그는 딸을 태어날 때부터 원망했고, 그걸 신의 형벌이라 여겼다. 그는 딸을 용서할 수 없었고, 그 딸을 낳은 어머니도 용서할 수 없었다. 무시하는 것 정도는 귀여운 애교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갖은 학대가 자행되었다. 어머니는 그것을 방치했다. 딸은 결국 아버지가 원하는 대로 목사가 되었다. 마음 속에는 아버지를 향한 원망의 불길이 활활 타올랐지만 아버지가 죽을 때까지 끝내 반항 한 번 못했다. 그것이 결국 아버지의 장례식 날 터져 나오고 말았다. 아버지와 그런 운명을 허락한 신에 대한 원망이 그 날 강단 위에서 터져 나온 것이다. 그래서 쫓겨 났다. 이렇게 페르와 요한나는 혈통과 세상 그리고 신에 대한 원망과 복수심을 공유했다.


 그런 그들 앞에 '킬러 안데르스'가 나타났다. 모두가 두려워 하는 호텔 '7호실'의 손님. 만일 그가 잠에 취하는 바람에 그에게 올 의뢰비를 페르와 요한나가 맡지 않았다면 페르와 요한나의 기상천외한 사기극도 없었을 것이다. 그 의뢰비 때문에 그들은 킬러 안데르스가 한없이 가벼운 자신들의 주머니를 빵빵하게 채워 줄 '귀인'이라는 걸 깨닫는다. 그래서 그저 있는 것은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성깔과 탁월한 폭력 기술뿐 머리는 없는 안데르센을 꼬드겨 그의 매니저가 된다. 그러니까 누군가의 팔이나 다리를 뭉개버리고 싶은 사람을 킬러 안데르스과 연결시켜 주거나 홍보를 통해 얼마간의 수수료를 받는 일을 하게 된 것이다. 페르의 아이디어로 스웨덴 제일의 무서운 폭력배가 되어버린 안데르손 때문에 의뢰는 쉴 새 없이 들어오고 곧 페르와 요한나의 기대대로 그들 수중에 어마어마한 돈이 들어온다. 하지만 호사다마라 했던가? 전직 목사였던 요한나가 안데르스에게 무심코 하게 된 예수 이야기 때문에 안데르센은 그만 더이상 폭력을 쓰지 않으리라 결심하게 된다. 사업에 중대한 위험이 닥쳐왔다는 것을 감지한 페르와 요한나는 이미 눈도 맞고 해서 의뢰비를 사기쳐서 잔뜩 받아서는 그것만 들고 둘이 같이 튀자는 계획을 세운다. 그런데 안데르스이 또 우연히 그 계획을 알게 된다. 하지만 역시 요한나의 화려한 말빨에 설득되어 같이 탈출하기로 마음 먹는다. 셋은 그렇게 튀고 의뢰비를 사기 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스웨덴 최고의 범죄 조직의 수장 '백작'과 '백작 부인'은 그 대가로 그들의 죽음을 치르게 하기 위해 그들을 추적한다.


 여기까지도 흔한 전개라고 생각할 수 있다. 돈을 둘러싼 주인공 일행과 범죄자들의 쫓고 쫓기는 전개는 많이 봐 온 것이 사실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하지만 소설은 그런 식으로 전개되지 않는다. 예수를 영접하고 회심하게 된 안데르스는 교회가 보일 때마다 돈을 마구 헌금함에 집어 넣는가 하면 기부도 아끼지 않고 해 버린다. 이 사실이 전국적으로 알려져 안데르스는 여왕이 감사를 표할만큼 스웨덴에서 가장 유명한 기부 천사가 되고 그가 예수의 말씀을 따라 했다는 사실도 알려진다. 그래서 페르와 요한나는 안데르스를 목사로 내세워 헌금을 모아 가로챌 계획을 꾸민다. 처음은 세상에 대한 복수였고, 이제는 신에게 복수하기 위해서였다.


 마치 행운의 여신이 가문 대대로 불운을 선사한 것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는지 이번에도 행운이 마구 작용해 그들의 계획은 승승장구한다. 하지만 마냥 운이 좋았던 것은 아니다. 왕년에 스웨덴에서 가장 좋은 교회 지기라고 자부하던 한 인물에 의해 교회 사기극이 발각될 위험에 처하고, '백작'과 '백작부인' 또한 그들의 위치를 알아낸다. 한 쪽에서는 감옥의 창살이, 다른 한 쪽에서는 죽음의 창살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다. 과연 페르와 요한나의 사기극은 무사히 성공할 수 있을 것인가? 바랐던 돈을 들고 잘 달아나 꿈에 그리던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순진한 희생자의 위치에 서 있는 킬러 안데르스은 또 어떻게 될 것인가? 물론 이런 의문에 대한 답을 알고 싶다면 직접 이 소설을 읽는 수밖에 없다.


 요나스 요나손은 주어진 삶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가는 삶을 적극 지지하고 찬양해 온 작가다. 그의 이름을 우리나라에 처음 알린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부터 이 소설 '킬러 안데르스와 그의 친구 둘'까지 내내 그랬다. 생각해 보면 역사와 종교는 선험적으로 가장 굳어져 있는 것들이다. 다시 말해 개인의 힘으로 쉽게 바꾸지 못하는 것이 바로 역사와 종교라는 말이다. 하지만 요나스 요나손은 거기에 균열을 일으킨다.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에서는 역사가 개인에 의해 새롭게 쓰여지고, '킬러 안데르스와 그의 친구 둘'에서는 성경 말씀과 신이 전혀 다르게 응용되고 이용된다. 그렇게 역사와 종교는 더이상 인간을 지배하는 텍스트가 아니라 인간의 가능성을 더욱 넓히는, 일종의 사다리와 같은 역할을 하는 장(field)으로 바뀐다. 요나스 요나손은 그런 주체에게 간직된 역량을 무한히 펼쳐 보인다. 어쩌면 소설을 읽으면서 유쾌한 가운데 얻는 해방의 느낌은 바로 거기서 연유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네가 어디까지 강해지고 넓어질 수 있는지 어디 한 번 똑똑히 봐!' 나는 그것이 요나스 요나손의 소설 세계가 들려주고 싶은 진심의 모음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러니 신자유주의로 인해 더없이 개인이란 존재가 위축된 이 시대에 그의 소설이 각광받고 있는 게 아닐까 싶다. 아무튼 이런 나의 말은 어디까지나 사족에 불과하다. 때로 소설은 단 한 가지 이유만으로도 읽을 이유가 충분한 경우가 있다. 바로 재밌다는 것. 여기에 동의한다면 이 소설을 얼른 손에 들어도 좋지않을까 싶다. 솔직히 나는 정말 재밌게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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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소 충격적인 이번 미국 대선 결과는 결국 이제는 내수가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일깨워주는 듯하다.

 이번 미국 대선의 승패를 결정지은 것이 미국 백인 중산층인 것을 감안하면

 역시 이런저런 자유무역협정으로 해외에서 들여오는 값싼 수입품 때문에 미국 내 산업이 망한 것에 이유가 있지 않을까 싶다.

 갈수록 붕괴되어만 가는 중산층의 불만이 이번 대선을 계기로 결집해 폭발한 것이다.

 미국은 이제 보호무역주의로 나갈 것이다.

 더이상 우리나라가 고수했던 대기업 중심의 성장 주의도 큰 난관에 봉착할 수밖에 없다.

 경제정책을 근본부터 뒤집어 엎고 내수 진작 중심의 틀을 짜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나저나 이걸로 싸드는 이제 설치 되지 못할 것 같다. 트럼프는 먼로식의 고립 주의를 지향하므로

 중국이 아시아에서 뭘하든 별 관심이 없을 것이기에.

(이것 하나는 좋은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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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lmo 2016-11-09 16: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미국은 어찌되었건 헤쳐나갈 잠재적인 힘이 있다고 생각해요.
문제는 우리나라의 지금 현재이지.
`하늘은 스스로 돕는자를 돕는다`는 옛 속담이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요?

오드득 2016-11-09 16:25   좋아요 1 | URL
저도 격하게 동감합니다^^ 솔직히 무당이 수렴청정을 하고 온갖 신을 다 끌어들인 굿판을 벌이고 전봉준과 접신했다는 말을 하는 사람이 장관 후보에 오르는 나라에 살고 있는 우리가 미국을 걱정하는 것은 넌센스죠.^^
 
인민이란 무엇인가 컨템포러리 총서
알랭 바디우 외 지음, 서용순 외 옮김 / 현실문화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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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민간인이 대통령을 조종하고 마음껏 국정 농단을 행하고 있는 와중이다 보니 '국민주권'이란 의미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된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 민주주의의 위기와 관련하여 가장 많이 재검토 되고 있는 말이 '국민'이라는 말이다. 학술적인 측면에서는 '국민' 보다는 '인민'이라는 말이 더 보편적으로 쓰인다. 사실 역사적으로 국민주권이 기원이 되는 것이 바로 '프랑스 대혁명'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때 시에예스나 루소는 '인민 주권'이라고 말했다. '프랑스 대혁명'의 슬로건도 '우리는 인민의 의지에 의해 여기에 있다.'였다.


 원래는 국적을 초월한 개념이었는데, 우리에게선 국적에 한계지어진 개념이 된 것은 아무래도 지금 우리나라가 처한 분단 상황과 상관있을 것이다. 북쪽에 있는 정권이 공공연히 인민 정부라는 말을 운운했으니, 쓸 수 없었던 것이리라. 아무튼 알랭 바디우와 피에르 부르디외 그리고 주디스 버틀로와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 여기에 사드리 키아리와 자크 랑시에르까지 가세한 오늘날의 인민의 의미에 대하여 다시 생각해 보는 여섯 개의 논문이 모인 '인민이란 무엇인가'는 민주주의의 위기가 여기저기서 현실화되고 있는 요즘에 다시금 재검토되고 재확인되어야 할 인민의 의미에 대해 아주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드는 책이다.


 알랭 바디우는 역시 과정에 더 많은 의미를 부여하는 그답게 '인민'이란 결코 국적으로 제한 받아서도, 완성형의 의미로 받아들여서도 곤란하다고 말하며 인민이란 어디까지나 국제주의적이어야 하고 현재 있는 것이 아니라 도래할 그 무엇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바디우는 인민이 국가의 승인을 받고, 현재적 상태로 규정되어 그 자체로 인민 외부의 것에 대해 인민 자체가 폭력적인 상황이 되는 것을 피하려 한다. 이것은 그대로 주디스 버틀러의 논의와도 이어지는데, 그녀 역시 인민은 고정된 무엇이 아니라 수행을 통해 발현되는 것이라 본다. 그녀는 특히나 집회와 시위가 인민의 출현 장소로 보는데, 그렇게 모두가 함께 모여 육체적인 발화로서 스스로 인민을 말할 때 비로소 진정한 의미의 인민이 호출되는 것이라 말하고 있다. 버틀러의 말에 따르면, 우리가 거리에 나가 지금 잘못된 것에 대해 국가에게 구체적으로 말할 때 우리는 진짜 인민(우리나라 용어로 하자면 국민)이 된다. 여섯 개의 논문에서 반복적으로 주장하는 것은, 인민이 결코 국적으로 분리되지도 현재 상태로 고정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인민은 국적을 초월하며 더구나 현재 상태가 절대적이지도 않기 때문에 인민이라는 개념은 필요에 따라, 사정에 따라 얼마든지 확장될 수 있으며 근본적으로는 공존해야 할 모두가 결국엔 하나의 인민이 되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아마도 이러한 석학들의 인민에 대한 정의는 최근 시리아 난민 사태로 더욱 빚어지고 있는 유럽에서의 이주민 유입으로 인한 갈등에 중요한 성찰의 지점들을 제공할 것 같다. 영국은 과거 인민의 개념에 함몰되어 외부에서 유입되는 이주민들을 같은 인민으로 보지 않으려 했고 결국 브렉시트까지 감행하고 말았다. 이주민을 받아들이는 것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독일조차 내분의 반발로 메르켈 총리가 정치적 위기에 처해 있다고 한다. 프랑스 대혁명 시기 처음 등장한 인민은 원래 포용과 관용의 의미가 더 컸다. 그랬던 인민이 어쩌다 이렇게나 협소해져 버린 것일까? 여기에 대해 사드리 키아리는 이렇게 말한다.


 공화국의 그리고/또는 '국가정체성'의 '가치들'이 식민지 이민자 출신의 프랑스인들의 '문화들' 신앙들과 호환 불가능하다는 명목 아래, 밀려드는 이민자들을 통제하고 중단시키며, '프랑스인의' 일자리를 보존하고, 테러리즘이나 범조에 맞서 싸울 '필요성'이라는 명목 아래 인민 개념은 백인, 유럽인, 기독교인, 소위 '토박이 프랑스인'을 중심으로 좁혀졌다. 달리 말해, 이 정책은 프랑스 인민이라는 기운 빠진 개념을 가장 쉬운 곳에서,즉 비백인에 맞서 재건설하고자 하는 야심을 가진 것이다.(p. 158)


 이렇게 지금 우리가 널리 공유하는 국적에 기반한 인민, 즉 국민이라는 개념은 객관적 진리를 쫓아 창안된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뭔가에 반대하여, 누구를 배제할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개념 자체에 이미 배타적인 요소들이 들어가 있는 것이다. 실제 우리가 인민이라는 말이 아니라 국민이라는 말을 쓰게 된 것도 북측을 배제하려고 했던 것이 아니었던가. 이제 왜 여섯 명의 저자가 국적이 아닌 국제를, 현재가 아닌 미래를 인민에게 가져오려는지 이로써 조금은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시작은 순수했더라도 어떤 말이든 시간이 흐르는동안 오염이 일어나게 마련이다. 그 말을 가지고 사익을 추구하려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거기에 속고, 선동되어 오염된 언어를 받아들인 채 또 시간이 흐르게 되면 그것이 상식이 되고 진리로 되어버리기도 한다. 그래서 이제는 그것이 도리어 원래는 공존해야 할 사람들을 공격하는 무기가 되어 버린다. 그러므로 어떤 말이든, 무턱대고 받아들이고 쓰기 보다는 원래의 의미는 어떠한지, 그것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으로 채워져야 하는지 늘 살펴보고 성찰할 필요는 있는 것 같다. 그런 면에서, '인민이란 무엇인가'는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해서 잘 생각해 보지 않았던 인민(국민)이라는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고, 달리 생각해 보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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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6-11-04 0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많은 걸 생각하게 하는 좋은 책인데 많이 안 읽히는 거 같아 아쉬웠어요. 헤르메스님 리뷰로 오랜만에 다시 만나 반갑네요^^

오드득 2016-11-04 16: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아갈마님은 이미 보셨군요. 말씀대로 인민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었던 좋은 책이었습니다.^^
 



 경찰이 항의 방문하여 지금은 철거했다고 하지만

 (내일 구청에 문의해보고 가능하다면 계속 걸겠다고 한다.)

 그래도 멋지다.

 그런데 이런 시국에 이 정도 현수막도 아직 내걸지 못하는 국가인가?

 어쨌든 나이들수록 점점 더 멋있어 진다.

 나도 그렇게 나이들고 싶다.


 그런데 박근혜, 오늘 새로운 소식이 하나 들리더라.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바로 다음날 문체부 2차관을 불러 체육개혁을 지시했다고.

 골자는 승마.

 때는 정유라가 고등학교 3학년으로 대학 입시와 아시안 게임이 코 앞에 있던 시점.

 당시 국가대표 선출 권한을 갖고 있던 교수가 워낙 원칙을 강조하던 사람이라

 압박용으로 승마계 비리를 거론하며 개혁을 추진했다는

 당시 문체부 제2차관이었던 김종의 증언.


 정말 할 말이 없다. 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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