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 함무라비
문유석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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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심즉여심((吾心卽汝心). 문유석 작가의 소설 '미스 함무라비'를 읽고 가장 먼저 생각 났던 말이다. '오심즉여심'은 '내 마음이 곧 네 마음'이라는 뜻으로 쉽게 표현하자면 몇 해 전에 한 드라마가 유행시킨 대사 그대로  '너도 아프냐? 나도 아프다.'라고 말할 수 있겠다. 내가 이 말을 알게 된 것도 문유석 작가가 어디선가 했던 인터뷰 때문이었는데, 이 말은 그가 싫으면 싫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개인주의자가 되어 자유의 확장을 지향하면서도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직분인 판사로서의 책임 또한 다하고자 타인의 말을 타인의 입장에서 잘 헤아리기 위해서 지니고 있는 태도를 단적으로 나타내는 것이기도 했다. 섣부른 판단일 수도 있으나 작가가 어느 것 하나 버릴 수 없는 자유와 책임을 하나로 융화(融和)시키는 지점 같은 것으로 여기고 있지 않나 생각된다.


 재밌게도 이런 그의 마음은 '미스 함무라비'의 인물 구성에서도 재현되고 있다. 모두 7부에 이르는 여러 개의 에피소드들로 이루어진 이 소설은 크게 두 사람이 이끌고 있는데, 한 사람은 제목인 '미스 함무라비'를 별명으로 가지고 있는 박차오름이고 다른 한 사람은 임바른이다. 둘 다 판사로 경력은 짧다. 박차오름은 이제 갓 판사로 부임했지만 권위와 보수(保守)의 굳건한 성채와도 같은 법원 조직 안에서 그런 분위기에 조금도 굴하지 않고 거침없이 주어진 선을 뛰어넘는 소신과 패기를 보여 준다. 그야말로 작가가 바라마지 않는, 싫다는 것을 싫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 자유가 온전히 구현된 것과 같은 인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임바른은 그러지 못하는 사람이다. 박차오름과는 달리 임바른은 함부로 재판 당사자들에게 감정 이입하지 않으려 애쓰고 법관으로서 자신이 하고 싶은 것보다 그런 자신이 어떻게 보일까를 더 많이 신경쓴다. 한 마디로 자신의 자유보다 자신이 짊어져야 할 책임을 더 많이 생각하는 사람이다. 이렇게 작가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자유와 책임을 박차오름과 임바른이 나눠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소설은 그렇게나 다른 이들이 서로에 대해 알며 이해해 나가는, '오심즉여심'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때문에 내게 소설은, 멀리 떨어져선 서로 외면하는 것들을 하나로 연결지어 가까운 곳에서 상호 이해와 포용으로 안을 수 있도록 만드는 매듭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렇게 박차오름과 임바른을 묶고, 그들과 그들의 직속 상관인 부장 판사 한세상을 묶으며, 그들이 잘 이해할 수 없었던 사법부라는 조직과 옳고 그름을 쉽게 가릴 수 없는 세상을 묶는다.


 그러나 그 매듭이 정말 묶고자 하는 상대는 아마도 우리 독자들일 것 같다. 무엇보다 돈 없고 힘 없는 사람들에게 정말로 가까이 하기에 너무 먼 당신이 되어버린 현재의 사법부를 곱게 보지 않는 바로 나 같은 사람 말이다. 서울올림픽이 열렸던 1988년. 그 때 탈주한 지강헌이 외쳤던 ‘유전무죄, 무전유죄’는 여전히 한국 사법 현실을 바라보는 일반인들의 마음을 강하게 대변하고 있다. 그렇지 않았다면 재벌 앞에서 한없이 약한 사법부의 모습을 가감없이 보여주었던 영화 '베테랑'이 그토록 많은 이들에게 공감을 얻으며 흥행하지 못했을 것이다. 한 교수가 자신에게 불리한 판결을 내린 판사에게 석궁으로 테러를 가한 사건을 다뤘던 영화 '부러진 화살'도 사법부를 부정적으로 묘사했었는데 300만이 넘는 관객이 들었었다. 최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구속 영장 기각에 있어서도 이를 접한 많은 이들이 비난을 쏟아내자 사법부가 법관의 독립을 존중해야 한다고 변호했지만 되려 사람들은 '제발 재벌에게서 독립하라!'고 더 크게 외쳐대고 있는 형편이다. 작가 자신도 책에서 솔직하게 고백하고 있다. 2014년 여론조사업체가 실시한 리얼미터 실시한 '국민으로부터 가장 신뢰받는 기관'에 관한 설문 조사에서 법원이 5위 군대와 7위 국회 사이에 있었다(p. 141)고. 이토록 법관에 대한 신뢰는 무너지고 우리는 그만큼 더 그들에게서 멀어졌다. 작가는 그런 우리들에게 자신들의 현장을 낱낱이 공개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들의 어려움과 고민은 물론 조직 내부의 불합리한 관행과 전관예우 같은 부끄러운 과오까지도 가져와 자신들이 진정 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일하고 있는지 오롯이 보여주려 한다. 이것이 이렇게 좋은 마음으로 열심히 일하고 있으니 어떻게 잘 좀 봐달라 하는 의미는 아닐 것 같다. 아마도 여기에 깃든 본심은 소설에서 박차오름과 임바른이 제출된 기록이나 서류로는 알 수 없었던 진실들을 재판 당사자들을 직접 대면하고 친히 대화하는 가운데 알게 되는 것과 그리 다르지 않아 보인다. 바로 그렇게 독자들에게 자신들의 삶을 직접 피부로 경험토록 하는 것이다. 사실 작가 자신의 말마따나 지금껏 제대로 드러난 적이 거의 없었던 판사들의 삶이 아니었던가. 나도 이제야 책을 통해 실제 법관들에겐 법봉이 없다는 것과 골무가 그들의 가장 요긴한 도구이며 미처 읽지 못한 재판 기록들을 집으로 운반하기 위한 도구인 보따리와 캐리어가 잘 보여주는 것처럼, 그들이 '월화수목금금금'의 과도한 노동 상황에 처해 있다는 것을 비로소 알았다. 이렇게 깊숙이 들여다 볼 수 있게 되자 나 또한 그들을 보는 눈이 '반지의 제왕'의 주인공 프로도가 골룸을 곁에서 오래 가까이 지켜보고서 변했던 것처럼 바뀔 수밖에 없었다. 소설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얼른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으나 여전히 많은 다수의 법관들이 판사로서의 직업적 양심을 고수하며 정의 구현을 위해 치열하게 고민도 하면서 묵묵히 일하고 있다고 한다면 아직은 희망이라는 것이 남아 있다고 기대해도 좋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 부장 판사 한세상은 처음엔 박차오름이 자신의 큰 딸처럼 사사건건 말꼬리나 잡고 대드는 데다  거친 풍파나 몰고오는 사고뭉치라서 못마땅하게 여기지만 끝에 가선 그녀의 됨됨이를 믿고는 그녀가 자신을 대신해서 정의를 잘 세워줄 것이라 생각하며 편한 마음으로 사직서까지 내게 된다. 이런 푸근한 아빠의 미소를 나 역시 소설의 말미에서 짓게 되었다고나 할까. 그러고 보니, 정녕 오심즉여심을 하려면 나태주 시인의 '풀꽃'과 같은 마음이 있어야 할 것 같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소설 속의 진실과 신뢰는 바로 그런 시선들을 통해 발견되고 형성된다. 문득 내가 너무 사람과 사물을 주마간산(走馬看山)으로 보고 있었구나 하고 생각하게 된다. 이제와 안 것은 아니다. 실은 예전부터 이미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사는 게 바쁘고 목구멍이 포도청이란 이유로 사람과 사물을 내 멋대로 재단하는 나를 방치해 왔었다. 어쩌면 나는 소설에 나오는 성공충 판사인지도 모르겠다. 모든 것을 내 식대로 이해하고도 전혀 부끄러움을 몰랐으니. 최근 왠지 모르게 우울에 깊이 물드는 때가 자주 있다. 사람들에게 이것을 고백하면 갱년기가 온 게 아니냐면서 놀리기 바쁘다. 그런데 '미스 함무라비'를 읽고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던 것을 불현듯 하게 되었다. '지금 내가 우울한 것은 전적으로 나 때문인데, 나는 남을 위해선 얼마나 우울을 느꼈거나 눈물을 흘렸던가?' 하고 말이다. 결국 내가 꽤나 타인의 상처와 아픔에 둔감해 있었구나 하는 것을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소설에서 자신의 나약함을 감추기 위해 타인에게 행패를 부렸던 노인처럼 나 역시 내게 있는 이기적인 모습을 정당화시키려고 타자에 대한 깊은 관심과 신중한 이해도 없이 멋대로 단정하고 단죄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제 깊고 좁은 우물처럼 내 내부로만 파고드는 시야를 밖으로 넓혀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나처럼 아프고 힘든 이들을 담을 수 있게 말이다. 생각해 보면 우리가 그토록 바라는 정의라는 것도 누군가 우리 대신 실현시켜주거나, 우리에게 쥐어주기 보다는 우리가 삶에서 스스로 실천할 때 보다 온전하고 확고하게 세워지는 것이 아닐까 싶다. 악이 이기는 것은 딱 하나, 선한 사람들이 아무 것도 하지 않을 때로 모두가 삶의 근본적 태도로써 정의를 일상에서 실천해 나간다면 그런 악들은 더이상 범접할 수 없을 테니까 말이다. 아마도 이 소설의 마지막 에피소드가 배심원인 일반인들이 주된 역할을 하는 국민참여재판인 것도 바로 이것을 암시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한다. 그런 정의를 구현하는데 있어서도 정말 필요한 것이 바로 타인의 처지를 내 것처럼 여기는 '오심즉여심'일 것이다. 나와 너가 다르지 않으며 너의 문제가 나 또한 같이 짊어지고 해결해야 할 것이라면 항상 실천을 유보시키는 대표적인 핑계들이라 할 수 있는 이것들을 - '내가 뭘 할 수 있겠어?'나 '나 하나 안 한다고 별 티가 나겠어?' 혹은 '남들도 다 그렇게 하는데 뭘.' - 생각하는 것조차 부끄러워서 더이상 하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미스 함무라비'는 신기한 소설이다. 나를 자신에게 묶었다가 슬며시 풀어주고는 나로 하여금 다른 이와 묶게 만든다. 작가 역시 오랜 재판 경험을 통해 깨달았던 것 그대로, 우리 모두가 실은 연약하며 상처받기 쉬운 존재라는 점에서 공동 운명이라는 자각 속에서 말이다. 이제 내 삶과 아픔을 주시하는 것처럼 타인의 삶과 아픔도 세밀하게 오래도록 바라볼 것이다. 그렇게 신화 속 오디세우스가 세이렌의 노래에 유혹 당하지 않으려고 돛대에 자신을 단단히 결박시킨 것과도 같이 나를 기꺼이 '오심즉여심'에 나를 묶어둘 것이다. 미니스커트 때문에 구설수에 오른 박차오름 때문에 생각난 말인데, 이탈리아 작가 다차 마리이니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미니스커트를 입은 여자가 진지한 말을 하려 들면 사람들은 듣지 않는다. 그녀의 허벅지가 유창한 입보다 더 많은 말을 하기 때문이다.


 앞으로는 외면의 허벅지보다 존재의 내면을 들려주는 입을 더 눈여겨 보도록 노력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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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7-01-25 0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름을 재미있게 지었네요 이 책 나왔을 때 라디오 방송에 나온 걸 들었어요 저는 우연히 그런 걸 듣기도 하는군요 그때 법봉 얘기했어요 실제로는 없다고... 그런 거 드라마나 영화에는 나오잖아요 예전에는 없었을까요 말만 하면 좀 심심할 것 같기도 한데... 이렇게 생각하면 안 되겠네요

힘 있는 사람 쪽에서 일하는 사람이 아주 없지 않겠지만, 힘 없는 사람을 생각하고 일하는 사람도 많을 거예요 그런 사람이 더 많아지면 좋겠습니다


희선

오드득 2017-02-05 23:13   좋아요 0 | URL
오, 라디오에서 소개된 책이었군요. 희선님은 라디오를 자주 들으시는군요. 저는 예전엔 주로 새벽에 듣곤 했는데 요즘은 통 안 듣고 있네요. 맞아요. 지금도 드라마에는 판사가 법봉을 두드리는 장면이 나와서 저는 당연히 있는 걸로 알았는데 진실은 없다네요. 힘 없는 이들 편에 쓰는 판사들이 소설이 말하는 것처럼 정말 많다는 걸 저 역시 믿고 싶어요. 그렇지만 보이는 현실은 참 많이 다르죠. 특히 특검이 신청한 영장들이 말도 안되는 사유로 기각 당하는 걸 보노라면 ㅠ ㅠ. 그리고 댓글이 너무 늦었네요. 요즘은 왜 이리 서재 들어오기가 힘든지 흑흑 ㅠ ㅠ
 
열세 번째 이야기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다이안 세터필드 지음, 이진 옮김 / 비채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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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버지의 헌책방을 돕고 있는 아마추어 전기 작가 마거릿 리에게 어느날 손편지 하나가 도착한다. 발신자는 놀랍게도 비다 윈터. '영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작가이자 금세기의 디킨스 혹은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작가라고도 불리는 그녀는 56년 동안 56권의 책을 썼고 그 책들은 49개 언어로 번역되었다'(p. 19). 그런 그녀가 왜 자신에게 편지를 보낸 것일까? 그것도 어떤 소년이 기자 행세를 하면서 자신에게 진실을 말해달라는 내용의 편지를. 마거릿 리는 도무지 이유를 짐작하지 못한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비다 윈터를 만난 적은 물론 그녀의 책조차 전혀 읽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무시하려 했는데 어느날 부모님이 외출한 사이 집에서 우연히 발견한 양철통에서 자신에게 원래 쌍둥이 자매가 있었으며 이미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녀는 그것을 통해 왜 자신이 계속 알 수 없는 상실감에 젖었으며 항상 누군가가 자기 곁에 있는 느낌을 가졌는지 깨닫게 된다. 하지만 부모님은 그녀에게 쌍둥이 자매의 죽음에 대해 말해준 적이 없다. 그 죽음의 진실은 자신에게 영원히 봉인되어 있었다. 마거릿은 엄마와 사이가 좋지 않다. 스스로 엄마와 자신을 결코 만날 수 없는 따로 떨어진 두 대륙으로 여긴다. 마거릿은 엄마와의 관계가 소원해진 것도 죽은 쌍둥이 자매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자신을 보면 죽은 아이가 떠올라 자신과 거리를 둔 것이라고. 마거릿은 그래서 더욱 비다 윈터에게 엄마의 진실을 알려달라고 했던, 편지 속 소년에게 빠져든다


 잠을 이룰 수 없었던 마거릿 리는 집안을 돌아다니다 주로 아버지가 희귀본만 보관하는 캐비넷에서 뜻밗에 비다 윈터의 책 하나를 발견한다. 그 책의 제목이 바로 '변형과 절망의 열세 번째 이야기'. 제목 그대로 변형과 절망의 이야기가 열세 개 모은 책이었지만 마거릿 리는 아무리 읽어봐도 열세 번째 이야기가 책에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아버지가 그 책을 희귀본으로 보관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초판으로 나올 당시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열세 번째 이야기가 아예 없는 채로 발간되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출판사가 그 사실을 깨닫고는 서둘러 발간된 책을 모두 회수한 뒤, 열세 번째 이야기 부분을 아예 삭제하고 '변형과 절망의 이야기'로 바꿔 다시 발간했다. 아버지는 미처 회수되지 못한 몇 권 중의 한 권을 소장하고 있는 것이었다. 마거릿 리는 열세 번째 이야기를 알게 되길 강렬히 원한다. 결국 그녀는 50년 이상 단 한 번도 진실 그대로 노출되지 않았던 자신의 전기를 써달라는 비다 윈터의 제의를 수락한다. 왜 그토록 명망 있는 작가가 자신과 같은 아마추어에게 전기 집필을 맡기는 것인지, 그 의문을 안은 채로 그녀는 비다 윈터의 저택으로 들어간다. 비다 윈터의 첫인상은 좋지 않았다. 언제나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고 그녀에게 무례하고 고압적이었다. 참지 못한 마거릿 리는 뛰쳐 나오려 하는데, 비다 윈터의 다급한 목소리가 그녀를 잡는다. 재밌는 이야기를 들려주겠다면서 '옛날 옛날에 유령이 사는 저택이 있었지' 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한 것이다. 마거릿 리가 돌아다 보니 처음으로 선글라스가 아닌 비다 윈터의 초록빛 눈동자가 자신을 마주 보고 있었다. 그것은 이제 할 이야기는 진실이라는 것을 뜻하는 신호였다. 마거릿 리는 비다 윈터의 이야기를 계속 듣기로 한다. 원래 자신이 살고 있던 엔젤필드라는 저택이 자신이 열여섯 살 때 불타버렸는데 그와 함께 자신의 모든 것도 끝났다는 고백으로 시작하는 쌍둥이와 그 때 나타났던 유령의 이야기를...



 한 마디로, '열세 번째 이야기'는 놀라운 이야기였다. 흡인력이 대단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정말 시간만 허락한다면 한 호흡에 읽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특히나 이 소설이 미스터리 형식으로 되어 있기에 더욱 그랬다. 여기서 마거릿 리는 두 가지 역할을 한다. 하나는 비다 윈터의 고백을 기록하는 일이며 다른 하나는 그 고백이 과연 사실인지 조사하는 역할이다. 바로 거기서 마거릿은 탐정의 역할을 맡는다. 그녀가 탐정의 역할을 해야 할만큼 이 소설엔 수수께끼가 정말 많다. 비다 윈터의 정체도 베일에 쌓여 있고, 저택이 불탄 후에 쌍둥이 자매가 어떻게 되었는지, 비다 윈터에게 엄마의 진실을 알려달라고 간청한 소년의 정체는 또 무엇인지 그리고 가정 교사로 부임해 온 헤스터 배로가 본 유령의 정체는 무엇인지 거기다 마거릿이 비다 윈터 저택에서 본 유령의 비밀도 있다. 소설 도처에 미스터리가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이앤 세터필드는 아무런 무리 없이 자연스럽게 모두 하나의 이야기로 갈무리 하고 있으니 그녀의 능력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녀는 정말로 엔젤필드의 정원을 완벽하게 가꾸었던 정원사 존 같다. 필력도,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솜씨도 모두 만만치 않은 지라 이토록 매혹적인 이야기가 된 것이 아닐까 싶다. 작가 케이트 모스는 이 소설을 읽고, '이토록 푹 빠져 읽은 데뷔작은 없었다'고 얘기했는데 지금 내 심정이 그렇다. 읽는 동안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었고 읽은 뒤에도 여운이 참 많이 남는다.


 플라톤은 '향연'에서 인간은 원래 남성과 여성이 서로 등이 붙은 한 몸의 존재였다고 말하면서 그것을 안드로규노스라 불렀다. 이들은 더없이 완전체였으므로 신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래서 제우스는 몸을 갈라 남성과 여성으로 나눠지게 만들었다. 완벽한 충족감에서 갑자기 분리되어 상대방에 대한 결핍을 느끼게 된 이들은 반대가 되는 서로의 성을 영원히 그리워하면서 영혼 깊이 상실감을 안고 살게 되었다. 원래 샴 쌍둥이로 태어나 분리 때문에 죽은 쌍둥이 자매를 가지고 있는 마거릿은 종종 분리된 옆구리에서 통증을 느끼는데, 여기서 '열세 번째 이야기'가 실은 플라톤의 안드로규노스 신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는 흔적을 볼 수 있다. 더구나 쌍둥이 애덜린과 에멀린이 자신들만의 완벽한 세계를 영유하면서 홀로 살고 있는 이들을 절단자로 부르는 모습은 더욱 심증을 굳히게 만든다. 그렇게 이 소설은 찰리가 여동생 이사벨에게 그랬듯이, 애덜린이 에멀린에게 그랬듯이, 출생의 진실을 모르는 오필리어스가 그랬듯이 그리고 마거릿이 자신의 엄마와 쌍둥이 자매에게 그랬듯이 홀로 떨어져 나와 언제든 존재감 없는 유령이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과 상실이 가져온 아픔에 관한 이야기다. 그렇게 이 소설은 우리 인간의 연약함에 대해 말한다.


 하지만 절망적이지 않다. 우리에게 이 고독에서 비롯된 불안과 상실이 안겨주는 고통을 이겨낼 수 있는 뭔가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이야기다. 이 소설이 비다 윈터의 고백으로 전개된다는 사실에 주목해 보라. 비다 윈터는 자신의 이야기를 마거릿에게 들려주면서 반전이 되는 사실이기에 자세히 말할 수 없지만 어쨌든 스스로의 고통도 치유해 나간다. 하기사 비다 윈터는 이미 마거릿에게 보낸 첫번 째 편지에서 이야기가 지니고 있는 허구의 힘을 이렇게 강조하기도 한다.


 나의 불안은 진실을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것이 아니라 진실 그 자체에 대한 것이지요. 지어낸 이야기와 비교했을 때, 진실이 우리에게 어떤 위안을 주던가요? 포효하는 한 마리 곰처럼 굴뚝 위에서 바람이 거세게 몰아치는 밤, 진실이 도움이 되던가요? 침실 벽에 번개가 번쩍거리고 빗줄기가 그 긴 손가락으로 유리창을 두드릴 때는 또 어떤가요? 전혀 쓸모가 없지요. 오싹한 두려움이 침대 위에서 당신을 얼어붙게 만들 때, 살점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앙상한 뼈다귀 같은 진실이 당신을 구하러 달려올 거라고 기대하진 않겠지요. 그럴 때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포동포동하게 살이 오른 이야기의 위안이지요. 거짓이 주는 아늑함과 포근함이요. (p. 14)


 이 말만큼 소설의 주제를 집약해 보여주는 게 또 있을까 싶다. 저자는 마지막에 마거릿의 쌍둥이 자매가 유령이 되어(혹은 마거릿의 환상일지도 모르지만) 조우하게 하고 또 그것을 통해 오래도록 자리잡았던 마거릿의 상처가 치유되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이것을 더욱 확증한다. 쉽게 말해 '삶에서 겪는 우리의 불안과 고통을 잠재우기 위하여 이야기가 지닌 환상의 힘을 빌리지 않을 까닭이 뭔가?' 하고 저자는 우리들에게 묻는 셈인데, 이것은 '과연 실재(the real)란 게 무엇이냐?' 하는 질문과도 이어진다. 


 실재에 대해서라면 요즘 가장 인기 있는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은 이렇게 말했다. 그것은 지워지지 않는 얼룩이며, 메울 수 없는 균열이라고. 왜냐하면 우리가 흔히 상정하는 실재란 무엇보다 언어로 정의되는데, 사실 실재는 언어에 포섭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인간의 상징 질서란 허구의 규칙이며, 그 언어를 통해 어떤 존재가 아무리 실재하는 것으로 보여도 언어에 의해 환상적으로 구축된 것에 불과하다. 다시 말해 실재란 인간이 영원히 다다를 수 없는 저편에 있고, 우리는 그것을 환상의 가면을 씌워 일시적으로 소유하고 있다고 착각할 뿐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보자면 실재와 가상의 구분은 더이상 무의미하다. 


아니, 실은 진정한 실재는 어디까지나 우리가 가상으로 생각하는 것에 존재하므로 실재 자체가 가상을 통해 오히려 건조되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이것을 존재론적으로 말해보면 어떨까? 인간을 실재라고 한다면, 유령은 가상이 될 것이다. 하지만 지젝의 실재는 거꾸로 유령이 실재고, 인간이 가상이라고 한다. 더 나아가 유령 때문에 인간이 인간으로 존립될 수 있는 것이라 말한다. 


 그렇지 않아도 데리다 역시 유령의 재래 때문에 우리가 세계를 구성할 수 있는 것이라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변함없이 한결같은 연속성으로 흐르는 시공간의 세계 속에서 우리가 세계를 파악하고 주체적으로 구성하려면 오직 그 연속된 흐름을 일시에 끊고 정지 상황 속에서 단번에 인식을 상승시키는 '비약'을 통해서만 가능한데 바로 유령의 재래가 가져오는 시간들이 그런 비약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내가 왜 갑자기 유령으로 화제를 전환시켰나 하는 것은 아마도 이 소설을 읽으신 분들이라면 바로 이해하실 수 있을 것 같다. 소설 속에서 유령의 출몰이 그리고 실제적으로 유령의 존재가 마거릿이 대면하고 있는 세계의 진실을 깨닫게 하고, 알고 보면 그 세계를 떠받치고 있었던 진정한 주체였으니까 말이다.


 이런 유령의 존재는 비슷하게 엔젤필드를 관리, 통제하고 사회가 전혀 길들일 수 없었던 에멀린을 사회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애덜린마저 최신 과학적 방법으로 치유하려 함으로써 뚜렷한 존재감을 나타내는 가정교사 해스티에 비한다면 그 존재감이 참으로 얼마나 엷은가? 하지만 그 해스티는 어느 순간 정말 유령인 것처럼 자취도 없이 사라지지만, 유령이었던 그 존재는 소설이 진행될수록 존재감을 더욱 증가시켜 나간다. 지금 생각해 보니, 이 소설은 왠지 회전문처럼 보이기도 한다. 모든 실체로 보였던 존재들은 어느 순간 유령이 사라지듯 사라지고, 마치 회전문을 동시에 들어오는 것처럼 저 바깥에, 가상인 것처럼 존재감이 약했던 이들이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하는 것이다. 이러한 자리바꿈을 통해 소설은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더욱 선명하게 부각시키는 것 같다. 그렇게 소설은 우리에게 고정관념처럼 남아 있는 실용의 개념을 백지화 시키며 허구의 탐닉도 삶에 얼마든지 유용하다는 것을 충분히 설득시킨다. 매혹적인 이야기에 빠지는 것만큼 삶에 매력적인 일도 없다고 말이다. '열세 번째 이야기'는 그것을 납득시키고 경험하게 만드는 멋진 놀이판이다. 이왕 이렇게 놀이판이 마련되었으니, 마음껏 향유할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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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의 감옥 모중석 스릴러 클럽 41
안드레아스 빙켈만 지음, 전은경 옮김 / 비채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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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아주 어릴 때, 익사할 뻔한 적이 있다. 엄마와 시장에 같이 갔는데, 연못 근처에서 까불다가 그만 빠져버린 것이다. 아직도 그 때 물 속으로 가라앉던 내 눈 앞에서 천천히 떠오르던 하얀 물옥잠이 선명하다. 왜 그것만 유독 또렷한 지는 모르겠지만. 물 속의 시간은 참 느리게 흐르는구나 하고 생각했던 기억, 그 시간만큼 천천히 목을 죄어오던 느낌들도 내 육체에 아련한 잔향으로 남아 있다. 엄마가 얼른 연못 속에서 날 건져주지 않았다면 지금 이렇게 글을 쓰지도 못했으리라.


 익사하는 자에게 물은 정녕 감옥이다. 그것도 압도적인 두려움 속에서 서서히 질식되는 공포의 감옥이다. 한 번 그런 경험을 하게 되면 물만큼 무서운 것도 또 없다. 그랬기에 '사라진 소녀들'로 우리나라에 첫 선을 보인, 독일의 스릴러 작가 안드레아스의 빙켈만이 2012년에 발표한 '물의 감옥'은 남들에게는 스릴러 소설로 읽혔을지 모르나, 내게서 만큼은 문자 그대로 호러 소설로 읽혔다. 소설은 처음부터 익사당하고 있는 여자로 시작하는데, 비록 욕조에서 익사당하고 있는 중이었지만, 누군가에게 억지로 익사당하고 있는 그녀의 심리가 너무나 생생하게 묘사되고 있어서 내가 가라앉던 기억이 저절로 오버랩 되면서 정말로 한 문장, 한 문장 읽을 때마다 몸이 차갑게 얼어붙는 느낌이었다. 등 뒤로 비수를 은밀하게 감추고 지어보이는 살인자의 미소만큼이나 차디 찼던 물의 냉기. 육체 아래서 오래 잠들어 있었던 그 감각이 삽시간에 소환되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하필이면 겨울 새벽에 읽어서 더 그랬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내게는 그 어떤 책보다 힘들고 무서운 책이었다. 그런 익사가 한 번도 아니도 내내 계속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이 소설엔 익사로 연쇄 살인을 하는 범인이 등장한다. 그는 희생자를 호수 속으로 끌여들어 밑에서 그 몸을 잡고 익사되려는 순간의 고통을 충분히 느끼게 한 다음, 자기가 원하는 속도로 천천히 물 속으로 데리고 들어가 저 호수 밑바닥 죽음의 심연으로 매장시킨다. 진정 나로선 가장 피하고 싶은 살인자임에 틀림없다. 그 범인은 스스로를 '물의 정령'으로 칭한다.



 물의 정령 하니 얼른 푸케의 '운디네'가 생각난다.

 운디네는 여러 모로 인어공주와 비슷하다. 물의 정령인 그녀는, 어느 날 우연히 만난 잘생긴 기사에게 반하여 그와 결혼하기 위해 인간이 된다. 결국 기사와 꿈에 그리던 결혼을 하게 되었으나 행복은 그리 길지 못했다. 기사가 그만 다른 여자와 정분이 나고 만 것이다. 배신을 당한 운디네는 남편과 결별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키스를 해 달라고 말한다. 남편이 선뜻 키스에 응해주자, 운디네는 그 키스로 남편의 모든 정기를 빼앗고 죽음에 이르게 한다. 그리고 운디네는 배신의 아픔과 남편을 죽인 죄책감까지 더해 샘물이 되어 버린다. 혹시 스스로 물의 정령이라 칭한 범인도 자신이 운디네와 비슷하다고 여긴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왜냐하면 알고 보니 그 역시 타인을 연쇄 익사시키는 무서운 범죄를 저질렀던 이유가 타인의 배신으로 인한 커다란 상처 때문이었으니까 말이다.


 운디네가 그랬듯이, 그의 살인도 복수의 일환이었다. 그에겐 복수해야 할 대상이 있었다. 바로 유능한 독일 형사 에릭 슈티플러다. 범인이 익사시킨 여성들은 무작위로 정해진 것이 아니었다. 범인은 에릭의 전부인이나 관계를 가졌던 매춘부 등 그렇게 에릭과 관계 있는 여성들만 희생시켰던 것이다. 그는 왜 에릭과 아는 사이라는 것말고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여성들을 죽여서까지 복수를 하려는 것일까? 도대체 둘 사이엔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그 의문이 이 소설을 끌고 가는 동력이다. 그런데 여기에 한 가지 사건이 더 끼어든다. 그것이 바로 소설 가장 처음에 나오는 욕조 익사 사건이다. 거기서 죽은 여인은 수잔 호프만. 그녀는 라비니아와 절친인데, 둘에겐 꿈이 있었다. 한때 라비니아 가족의 별장이었던 시칠리아의 작은 집을 다시 사서 둘이서 함께 사는 것. 그것을 위해 수잔은 매춘부 일을 하고, 라비니아는 만나는 남자가 수잔을 위험에 빠뜨리지 못하도록 멀리서 감시하는 일을 했다. 그러다 그만 수잔을 익사시키려 했던 남자를 만나고, 그 일이 있은 후 수잔이 욕조에서 익사당한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살아남은 라비니아는 분명 그 때 수잔을 익사시키려 했던 남자가 범인이라고 생각하고 그를 피해 달아나 숨는다. 그러는 한 편, 수잔의 못 다 이룬 꿈을 이뤄주기 위해 열심히 돈을 모은다. 이 살인 사건과 물의 정령은 과연 어떤 관계일까? 수잔을 익사시키려 했던 남자는 정말 물의 정령이었을까? 그가 수잔을 욕조에서 익사시킨 것일까? 아니면 진범이 따로 있는 것일까? 이렇게 소설은 또 하나의 수수께끼를 독자에게 안기며 놀라운 반전 속에 펼쳐지는 진실을 향해 점차로 다가간다.


 소설은 등장인물의 내면을 한 챕터씩, 번갈아 보여주면서 진행된다. 그렇게 우리는 에릭과 라비니아에게서 일상이 서서히 붕괴되는 것에서 오는 공포를, 프랭크에게선 뜻하지 않게 찾아온 사랑과 그것을 지키지 못하는 순간에 느끼는 절박함을 볼 수 있으며, 범인에게선 너무나 사랑했고 더없이 소중한 것을 갑작스레 상실해 버린 것에서 오는 상처와 원한이 얼마나 큰 것인지 깨닫게 되며, 형사인 마누엘라에게선 남자 중심 조직에서 여성이라는 이유로 당하는 무시와 경멸 등의 성차별적 폭력들이 삶에 어떤 생채기를 남기는지 확인하게 된다.


 '물의 감옥'에서 주로 희생 당하는 자는 여성들이다. 라비니아는 남성 범죄자에게서 달아나고 있으며, 마누엘라는 남성 중심의 강고한 연대 속에서 고립되고 왜소한 섬으로 존재한다. 하나 같이 배제되고, 위축된 여성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때문에 이 소설을 어쩔 수 없이 페미니즘으로 읽게 된다. 더구나 에릭은 마누엘라에게 이루 말 할 수 없는 성차별적인 언어와 적대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어 더욱 그렇게 보도록 만든다.


 이렇게 보자면 소설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두 여성의 이름이 예사롭지 않게 다가온다. 바로 '라비니아'와 '마누엘라'이다. 일단 '라비니아'는 로마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이다. 그도 그럴 것이 로마를 건국한 아이네이스의 아내로, 한 마디로 로마의 어머니라 할 수 있는 존재이니까 말이다. 그러나 그런 라비니아의 존재는 로마 건국의 역사에서 그리 중하게 취급되지 않는다. 역사는 오로지 남자 아이네이스 중심으로만 기술된다. 그 아이네이스를 노래한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 또한 마찬가지다. 라비니아는 아내의 이름으로 단 한 번 언급되는 것으로 끝나고 만다. 라비니아의 존재감은 너무나 미미하다. 마치 로마를 건국하기까지 밥상을 차린 것은 전적으로 아이네이스이고, 라비이나는 그저 숟가락 하나 얹은 것 밖에 없는 것 같다. 하지만 실제 역사는 그렇지 않았다. 로마를 건국하기 위한 모든 힘과 자원을 가진 것은 사실 라비니아였고, 아이네이스야 말로 숟가락 하나 잘 올리고 남우주연상을 거머쥔 것에 지나지 않았다. 라비니아는 라틴족의 기원이 되는 왕국 라티누스의 하나밖에 없는 공주였다. 많은 남자들이 라티누스의 권력과 재력을 가지기 위해 라비니아에게 구혼을 했다. 아이네이스도 그 중 하나였다. 더구나 그는 그 쪽 대지의 사람도 아니고 바다를 건너온 이방인이었다. 아이네이스가 라비니아의 베필로 선택된 것도 그의 신분이나 능력 때문이 아니었다. 어쩌면 전적으로 운이라고 할 수도 있었다. 왜냐하면 라비니아의 아버지인 왕 라티누스가 꾼 꿈 때문에 결정되었으니까 말이다. 그는 어느 날 꿈에서 라비니아의 베필은 바다를 건너 온 자로 해야 한다는 말을 들었고 그 말을 믿은 결과 아이네이스를 선택했던 것이다. 만일 꿈을 믿지 않았다면 결과는 지금과 전혀 달랐을 것이다. 그러나 어쩌면 이런 사실조차 실은 남성 중심 사회가 왜곡한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여기서도 라비니아는 자신의 의지대로 하는 것이 하나도 없고 여전히 소외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저 상자 속에 있는 왕국을 차지하기 위해 필요한 열쇠, 더 큰 야망과 교환되는 전리품에 지나지 않아 보인다. 진실은 전혀 달랐을지 모른다. 그러나 신화와 역사의 기록으로 그려지는 라비니아는 남성 중심 사회에 겹겹으로 포위된 존재다. 어쩌면 바로 이 때문에 정말로 빙켈만은 남성에 대한 두려움으로 달아나는 여성에게 라비니아라는 이름을 준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나 다를까, 소설에서 라비니아는 남성에게 모든 것을 빼앗긴다. 신화와 역사 속에서 로마 건국에 따른 모든 영광을 아버지와 남편에게 빼앗긴 라비니아와 똑같이. 그러고 보니 앞서 말한 물의 정령 운디네도 라비니아와 동일한 희생자라 할 수 있겠다.


 이런 사실 때문에 나는 이 소설에 나오는 여성들을 하나의 상징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가장 처음에 등장하여 욕조에서 죽어가는 수잔은 과거고 라비니아는 현재이며 마누엘라는 미래라고 말이다. 과거는 소설이 재현하고 있는 절망과 죽음만이 가득한 세상이 어떻게 출현했는가를 설명한다. 그런 세계는 바로 여성의 죽음으로 도래했다고 말이다. 이런 수잔의 죽음은 소설에 등장하는 또 하나의 죽음, 그것도 모든 비극의 기원이 되는 한 여성의 죽음 때문에 더욱 명확해진다. 스포일러가 되기에 자세히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두 죽음에 얽힌 설정은 오늘의 어둡고 절망스런 세상이 바로 여성의, 여성성이 상징하는 모든 가치의 죽음으로 비롯되었다는 것을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라비니아는 그 세상이 계속해서 만들어내고 있는 현재 여성의 상징이 된다. 여기에 마누엘라는 미래가 들어온다. 왜 마누엘라를 미래로 생각하는가 하고 묻는다면 역시 이름의 의미 때문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마누엘라는 '신이 우리와 함께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라비니아적 현재에서 벗어날 수 있는 구원의 상징이다. 이런 마누엘라의 의미는 소설 속에서 라비니아와 마누엘라가 보여주는 차이로 인해 부각된다. 라비니아와 마누엘라에겐 가장 대조되는 차이점이 있다. 바로 라비니아는 자신을 포위하고 막다른 골목으로 내모는 남성들과 맞서 싸우지 않지만, 마누엘라는 적극적으로 투쟁한다는 것이다. 라비니아는 가장 친한 친구가 죽었는데도 회피로 일관하고, 마누엘라는 남성 중심의 조직 사회가 무시와 경멸을 연타하는데도 굴하지 않고 정면으로 관통한다. 소설의 결말은 이런 차이가 어떤 종결을 가져오는지 보여준다. 그러므로 마누엘라는 하나의 대안이며 구원이다. 그녀는 정녕 도래해야 마땅한 미래이다. 아마도 빙켈만은 그것을 보다 더 뚜렷하게 보여주기 위해 '신이 우리와 함께 있다'는 이름을 그녀에게 부여했을 것이다.


 내겐 더없이 호러 소설이었지만, '물의 감옥'은 이렇게 페미니즘으로 읽을 수 있는 소설이었다. 현재에도 세계 곳곳에서 양산되고 있을 운디네와 라비니아의 비극을 중지시키기 위하여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소설인 것이다. 그것은 마누엘라가 제대로 보여줬듯이, 적극적으로 싸우는 것이다. 라비니아에게 세상이란 그야말로 '물의 감옥'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스스로 뛰쳐나갈 생각은 하지 않고 바깥에 있는 누군가가 먼저 열쇠로 꺼내주기만을 기다렸다. 여기서 왜 빙켈만이 하필이면 살인의 형식을 익사로 가져왔는지가 보다 분명해진다. 생각해 보면, 익사란 수동성의 결말이다. 물 속에서 아무 것도 하지 않을 때 익사하니까 말이다. 살려고 적극적으로 발버둥치지 않으면 벗어날 수 없는 죽음. 그것이 바로 익사의 정체다. 마누엘라는 발버둥을 쳤다. 상황을 파악하여 오류와 약점을 찾았고 스스로 뚫고 나가는 길을 만들었다. 물론 그녀에게도 위기는 있었다. 그런데 그 위기란, 남성에게 기댔을 때, 그러고 싶은 마음과 타협했을 때 찾아왔다. 그 조그만 타협마저 그녀를 죽음의 위기로 몰고 갔다. 이로써 빙켈만의 진언은 보다 확실해진다. 타협없는 부단한 투쟁만이 진정한 구원의 미래를 열어 젖힌다는 것을.


 '물의 감옥'은 한 마디로 열쇠를 바깥에서 찾으려는 자 모두에게 내리는 준엄한 경고이다. 진정 구원의 열쇠를 원한다면 빙켈만의 제안대로 내 주머니부터 먼저 샅샅이 뒤져보는 게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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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01 02: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1-18 15: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여기 오면 책이 아냐."

  "책이 아니면 뭔데?"

  "파지(破紙)" ('소각의 여왕' p. 20)


 이유의 소설인  '소각의 여왕'에서 중심 무대가 되는, 해미가 일하는 고물상은 '비정상(非正常)'의 장소다. 바깥 세계에선 내부의 질이 가장 중요한 평가 기준이 되는 책이 거기서는 오직 책이 가지고 있는 무게로만 평가받는다는 사실이 대표하듯이, 기존에 우리가 알고 있는 사물의 가치는 여기서 모조리 전복되는 것이다. 고물상이 가진 이러한 특성은 해미의 다음과 같은 말에서 단적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무조건 따로 떨어뜨려놓아야 해. 하다못해 책도. 뭉치면 죽고 흩어지면 사는 거지."(p. 21)


 이런 해미의 말처럼 고물상은 집단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철저하게 개체 중심의 세계다. 그럴 뿐만 아니라 그렇게 분해된 개체가 원래 타고난 재질에 따라서 가치의 위계 질서가 세워진다는 점에서 개인이 아무리 노력해도 신분 상승이 불가능한 엄격한 신분 사회의 면모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이런 점은 해미의 아버지이자 고물상의 주인인 지창씨가 고물상보다 더 나은 삶을 위해 개인적으로 엄청나게 노력하지만 그 보람도 없이 결국은 파멸하게 된다는 것에서도 드러난다. 한 번 금수저는 영원한 금수저이고, 한 번 흙수저는 영원한 흙수저인 것이다. 그리고 지창씨의 운명처럼, 고물상의 모든 것들 역시도 누군가에게 팔리지 못하면 소각된다. 자본으로 될 수 있는 것만이 생명을 보장 받는다. 그렇지 못하면 죽음 뿐이다. 더구나 이런 고물상의 세계에서 고물의 획득은 어디까지나 선착순으로 정해진다. '일찍 일어난 새가 벌레를 잡는다'는 격언은 이 세계에 금과옥조와도 같다.


 그런데 이런 고물상의 모습이 전혀 낯설지 않게 다가온다. 어딘가 모르게 많이 익숙하다. 그도 그럴 것이 바로 우리가 사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철저한 개인주의에 점점 뛰어넘기 힘들어지는 신분 격차 그리고 비정규직이 되면 특히나 더욱 뼈져리게 경험하게 되는, 이익이 되지 못하면 가차없이 폐기되어 버리는 상황이라든가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현저하게 겪어온 경쟁 같은 것들은 사회가 그 어떤 좋은 말로 자신을 형용하였어도 살면서 피부로 경험할 수밖에 없었던 민낯의 진실이 아니었던가. 그런 의미에서 이유 작가가 그려내는 고물상은 바로 지금 우리 현실 세계의 적나라한 모습이 드러난 공간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세계에서 해미는 살아간다. 원래 해미는 재수생으로 사회가 강요한 궤도의 이탈자였다. 하지만 현실 사회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는 고물상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고 그 세계에 쓸만한 인력이 되어 가면서 어느새 그 세계를 지배하는 가치관에 스스로 동화되어 버린다. 이러한 그녀의 변모는 아버지 지창씨에 대한 불만에서 현저하게 나타나는데, 아버지가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사력을 다해 만드는 이트륨 분리 기계가 자신이 보기에는 아무 짝에도 쓸모 없어 보이고 사기꾼 김씨에게 마냥 놀아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 아버지에 대해 해미는 자신의 할아버지가 그랬듯이 '허파에 바람이 들어' 비정상이 된 것으로 단순히 정의해 버린다. 그래서 아버지가 해미에게 자신이 만든 기계의 중심에 가장 중요한 것을 넣었는데 그것이 바로 '진심'이라고 말했을 때도 코웃음 치는 것 이상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정작 비정상이었던 것은 누구였던가? 그것은 바로 해미였다. 그런 그녀의 모습은 타인의 죽음 앞에서 애도 보다는 먼저 이것으로 거머쥘 수 있는 액수를 헤아릴 때 단적으로 나타난다. 생각하지 않고 살게 되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고 하던가? 비정상의 세계에 살면서 오래도록 그것의 유지와 지속에 일조하다 보니 그만 그녀 역시 어느 것이 정상이고 비정상인지 구분할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 스스로 자신의 고유한 존재 가치를 찾으려 했던 몸부림이라 볼 수 있는 기계 제작도 허파에 든 바람으로만 보였던 것이다. 소설에서 말하는 '허파에 든 바람'은 알고 보면 우리가 그 말에 대해 가지고 있는 통념과 다르게 쓰인다. 우리가 생각하는 허황되고 유치한 몽상이 아닌 것이다. 비정상인 세계에 함몰되는 것을 거부하고 자신만의 독자적인 정체성을 가지려는 노력이자, 그 탈주로 비정상 세계의 지속이 점점 정지된다는 점에서 그 세계에 정상성을 가져오는 행위이기도 하다. 결국 해미도 나중에 그 사실을 깨닫는다. '빨간 불이면 서야 하고, 충돌하면 멈춰야 하는' 궤도가 강요한 규칙이 실은 다만 자신을 비정상 세계에 얽매는 쇠사슬일 뿐임을 깨달은 해미는 그 어떤 충돌과 추격 앞에서도 멈추지 않는 영원한 탈주를 감행한다. 그리고 고백한다. 자신도 할아버지와 아빠처럼 허파에 바람이 들었다고.



 비슷한 세계에 살면서도 처음부터 계속 허파에 바람이 들었던 사람이 있다. 그가 바로 보후밀 흐라발의 소설인 '너무 시끄러운 고독'의 주인공 '한탸'다. 한탸 역시 해미처럼 책이 버려지는 곳에서 일한다. 그는 지하실에서 홀로 폐지를 기계로 압축하는 일을 한다. 누구도 잘 오려 하지 않는 곳에서, 누구도 잘 하려 하지 않는 일을 하는 것이다. 그것도 무려 삼십오 년째. 비슷한 공간에서 비슷한 일을 하지만 한탸는 해미와 다르다. 해미는 개체를 나누고 단일한 개체마저 낱낱이 뜯어 팔 수 있는 것과 팔 수 없는 것을 가른 다음, 자본이 될 수 없는 것들은 소각시켜 버리지만, 한탸는 나뉘어진 개체를 한데 모으고 그것이 하나의 총체적인 존재가 될 수 있도록 만들며 그러는 한 편, 그 단일성과 융화 시키기에 아까운 고유한 가치를 발하는 존재들이 있다면 발굴하여 자신이 직접 마련한 서재에서 영원히 존속할 수 있도록 돕는다.


 해미와 한탸가 하는 일은 이렇게나 정반대다. 해미가 하는 작업이 분해와 소각이라는, 결국 타자의 말살을 바탕으로 한 자기 이익 추구의 과정이라고 한다면 한탸의 작업이란 융합과 발굴을 매개로한 타자 보존과 구원의 과정인 것이다. 사실 '너무 시끄러운 고독'에서는 해미에게 그런 작업을 강요하는 세계가 얼마나 커다란 비극을 가져오는 지가 직접적으로 드러나는데, 바로 한탸에게 결코 메울 수 없는 상실감을 안겨준 어린 집시 여인에게서다. 혈육도 아니었고, 연인도 아니었던 그녀가 한탸에게 그런 존재가 되어버린 것은 오직 당시 체코를 지배하던 독일 게슈타포에게 체포되어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끌려가 문자 그대로 소각되었기 때문이다. 바로 그 사실이 한탸를 삼십오 년동안 홀로 자신의 자리만 지키면서 묵묵히 폐지 압축 일을 하게 만든 이유이기도 했다. 이제와 이야기지만, 한탸가 있는 공간은 그야말로 한 개인의 독자성(獨自性)으로 충만한 세계이다. 지창씨가 그토록 만들고 싶었던 이트륨 분리 기계가 공간화되었다면 나타났을 그런 곳인 것이다. 다시 말해 지창씨가 이탈에 성공했다면 보여주었을 그 모습을 우리는 한탸에게서 볼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탈주한 자아만으로 온전히 채워지는, 순전히 개인만의 영토이며, 바깥 세계는 거기서 아무런 힘을 발휘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해미의 고물상이 비정상의 장소라고 한다면, 한탸의 지하실은 '정상(正常)'의 장소라고 할 만 하다.


 이러한 한탸의 공간이 가지는 성격은 역사적으로 비정상 체제였다고 평가 받는 독일 파시즘과의 대비로 더욱 뚜렷해지기도 한다. 아시다시피 독일 파시즘은 개인의 고유한 존재 가치를 전혀 인정하지 않는 체제였다. 거기엔 한탸가 책에게 하듯이, 내적인 면을 헤아려 발굴하는 작업 따윈 없었다. 철저하게 보이는 모습 그대로만 가지고 평가했고, 그 평가 기준 또한 자신에게 얼마나 유용한가 아니면 자신과 얼마나 동일화될 수 있는가만 따져 보는 아주 이기적이고 자의적인 것이었다. 파시즘은 그 기준을 개인과 타자에게 강요했고, 기준에서 벗어나면 가차 없이 배제하거나 소각해 버렸다. 바로 이것이 어린 집시 여인을 죽여버린 독일의 민낯이었고, 그녀의 죽음을 통해 독일 파시즘과 함께 그에 뒤이어 체코에 또 다시 자리 잡은 전체주의의 본성을 깊이 깨달은 한탸에게 그의 작업은 사실 그것에 대한 저항이었다. 이는 그가 세계의 강요로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작업을 떠나게 되었을 때, 끝내 스스로 압축기에 들어가 죽음을 선택한다는 점에서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바로 그 최후의 순간, 한탸는 집시 여인의 죽음 뒤로 내내 잊고 있었던 그녀의 이름을 비로소 기억해 내는 것이다. 


 한 편, 나는 여기서 해미의 고물상과 독일의 파시즘이 서로 꽤나 닮아 있음을 본다. 아마도 해미의 고물상은 해미와 똑같은 오늘날의 청년들에게 '오포(연애,출산,결혼,내 집 마련, 인간관계 이 다섯 가지를 포기하는 것.)'를 강요하는 신자유주의를 소묘하고 있는 것이었으리라. 그렇다면 지금의 신자유주의는 독일의 파시즘과 상당히 유사해 보인다. 이러한 사실은 내게 동일한 하나의 흐름이 다만 얼굴만 바뀌어 역사적으로 반복되고 있다는 인상을 짙게 남긴다. 그렇지 않아도 하이데거는 서양 형이상학 역사를 동일성을 추구하는 일련의 흐름이었다고 말한 바 있다. 자신과 하나가 될 수 있는 것만 인정하고, 닮을 수 없는 것은 배제하고 보는 것이 서양 문명을 이끌어 온 동력이었다는 의미로 한 말이었다. 독일의 파시즘은 다만 그 동력이 다만 극한에 도달한 모습일 뿐이었다. 그랬기에 파시즘이 무너졌다고 해서 끝난 게 아니었다. 뒤이어 출현한,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남미와 아프리카 할 것 없이 세계 각지에서 출몰했던 독재국가들이 이를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한결같이 자신의 체제에 도움이 되거나 순종하는 이들만 받아들이고, 그렇지 않은 개인들은 모조리 억압하거나 배제해 버렸다. 그런 독재 국가조차 역사에서, 최근의 자스민 혁명까지 더하여 쏙쏙 퇴출 되고 있는 형편이지만 그래도 이 질긴 악연은 이어지고 있다. 신자유주의로 남아 여전히 우리들의 통증과 신음을 양산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이제라도 이 흐름과 절연할 필요가 더욱 커지는 것 같다. 제대로 된 결별이 아니었기에 우리는 계속 반복되는 고통과 절망에 노출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어떻게 해야 할까? 그저 취미로 인문서를 주마간산 하는 게 전부인, 일개 필부에 지나지 않는 나로서는 이 물음에 뭐라고 답한다는 것 자체가 주제 넘는 일이다. 다만 오늘 이야기한 두 권의 책이 서로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고, 거기서 도출되는 대안 또한 유사하기에 그것을 바탕으로 하여 말해 본다면, 역시 이런게 되지 않을까 싶다. 즉 그런 흐름에서 스스로 빠져 나오려 노력해야 한다는 것과 그 흐름이란 어디까지나 하나의 중심을 두고 다른 모든 것을 그것과 동일하게 만드는 것이므로 따라서 거기서 빠져나오려 하는 노력이란 다름아닌 자신만의 차이를 발굴하고 형성하는 것으로 이뤄져야 한다는 것 정도다. 그렇게 대체 불가능한 독자성의 영역을 생성하고 지속하는 자발적인 탈주만이 진정한 방법이라고 감히 말해 본다.



 아마도 또 다른 한 권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이 글은 여기서 매듭이 지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이 너머를 생각하게 만든 책을 나중에 만나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안토니오 타부키의 소설, '인도 야상곡'이었다. 주인공의 이름은 호스. 그는 한 여자의 부름을 받고 친구인 사비에르를 찾기 위해 인도를 방문한다. 공교롭게도 호스가 하는 일은 '너무 시끄러운 고독'에서 한탸가 하는 일과 비슷하다. 그는 직업을 묻는 한 여성에게 이렇게 대답한다.


 "그럼 소설가시군요." 여자가 따져 물었다.

 "아닙니다. 그저 경험 삼아 써보는 겁니다. 제 직업은 따로 있어요. 죽은 쥐들을 찾는 일이지요."

 "뭐라고요?!"

 "농담입니다. 고문서들을 뒤져서 오래된 연대기들이나 시간 속에 파묻힌 것들을 찾아내는 것. 그게 제 직업입니다. 그걸 죽은 쥐 찾기라고 한 거죠."('인도 야상곡', p. 104)


 그 역시 한탸처럼 발굴과 보존이 주업(主業)이다. 그런 의미에서 호스는 한탸처럼 타자 지향적이고, 그랬기에 만난 적도 없는 낯선 여인의 호출이었지만 기꺼이 자신의 조국을 떠나 자신에겐 더없이 생소한 타자의 땅인 인도로 온 것인지도 모른다. 한탸와 다른 점은, 한탸는 영혼만 탈주했지만, 호스는 육체마저 탈주했다는 것이다. 그에겐 아예 정주(定住)라는 개념이 없는 듯 보였다. 인도에서 내내 호텔에만 머물렀기 때문이다. 인도 자체도 타자의 영토인데, 호텔마저 잠시 깃들다 갈 뿐이라는 점에서 타자의 공간이다 보니, 그는 그렇게 겹쳐진 타자의 영역에서 어디든 고정되지 못하고 계속 이러저리 흐르는 것처럼 보였다. 심지어 만나서 얘기를 나누는 사람들조차 우연의 산물이었다. 그래서 마치 소설 전체가 타자의 영역 속에서 자아는 고정된 자신을 가지기 어려우며 다만 끊임없이 변하는 유동적인 존재가 될 뿐이라고 말하는 듯했다. 그런 의미에서 '인도 야상곡'은 내게 '너무 시끄러운 고독'과는 또 다르게, 타자의 영역으로 완전히 탈주한다면 도대체 어떤 상황이 펼쳐지는지 보여준다고 할 수 있었다. 그것은 한탸가 전혀 나아가 보지 못했던 곳이었기에 의미가 있었다. 어쩌면 타자 속을 거듭 전전했던 예전 한탸의 연인 만차가 자신이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성스러운 존재가 된 것을 보았을 때 한탸가 가지게 되었던 낙담은 바로 거기서 기인하는 지도 몰랐다.


 만차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상상도 하지 않았던 무언가가 되어 있었다. 평생 내가 만난 사람들 중에서 가장 멀리까지 간 사람이 만차였다. 책들에 둘러싸인 나는 책에서 쉴새없이 표징을 구했으나 하늘로부터 단 한 줄의 메시지도 받지 못한 채 오히려 책들이 단합해 내게 맞섰는데 말이다. 반면 책을 혐오한 만차는 영원토록 그녀에게 예정된 운명대로 글쓰기에 영감을 불어넣는 여인이 되어 있었고, 심지어 돌로 된 날개를 퍼덕이며 비상했다. 깊은 밤 환히 불밝혀진 왕성의 두 창문처럼 부드러운 빛을 발하는 날개였다.('너무 시끄러운 고독', p. 104)


 '인도 야상곡'의 호스는 바로 이런 만차와 이어지고 있었다. 흐라발은 만차가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었는지 자세히 보여주지 않는다. 그 내막을 나는 타부키의 소설에서 볼 수 있었다. 바로 그 성스러운 전화(轉化)란, 자신을 타자를 통해 부단히 변화시키는 것에서 도래한다는 것을 말이다. 그런데 이렇게만 말하면 한탸와 그리 다를 게 없어 보인다. 한탸 역시 타자가 쓴 책을 통해 자신을 계속 변화시켜 오지 않았는가 말이다. 하지만 호스와 한탸 사이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한탸의 변화는 고정된 자신에 타자를 계속 덧붙이는 형태로 이뤄졌다. 그가 하는 폐지의 '압축'은 이 변화의 단적인 형상이기도 하다. 그 역시 자신의 독서 행위가 실은 압축이며 자신의 육체 또한 족히 3톤이 되는 책들이 압축된 백과사전과 같다고 고백하고 있다. 압축은 지층이 쌓이는 것과 같다. 타자로부터 오는 것들은 고정된 내 위에 쌓여갈 뿐이다. 변화는 나의 내부에서 자발적으로 오지 않는다. 다만 그 무게에 못 이겨, 타자가 내리 누르는 강압 때문에 나와 타자의 경계가 무너질 뿐이다. 한탸 자신도 어느 게 자신의 생각이고 책에서 읽은 것인지, 또 읽은 것이라면 어떤 책에서 읽었는지 전혀 모르게 된다.


 왜 이렇게 된 것인가? 그 이유를 타부키의 소설에서 찾을 수 있다. 한탸의 변화가 압축을 통해 이뤄진다면, 호스의 변화는 여행을 통해 이뤄진다. 그런데 그 여행이란 것이 끊임없는 질문과 회의(懷疑)의 연속이다. 왜냐하면 전적으로 타자의 영토인 인도는 호스에게 계속해서 과연 네가 알고 있다고 하는 게 정말 알고 있는 것인지 그리고 그것과 연장되어 네가 알고 있는 자신이 진정한 네 자신인지 끊임없이 되묻게 만들기 때문이다.


 케이지 지구는 상상하던 것보다 훨씬 형편없었다. 어느 유명 사진작가의 사진들에서 그곳을 본 적이 있었기에 인간의 비참한 상황에 직면할 준비야 되어 있다고 생각했으나, 사진은 어디까지나 피사체를 장방형에 가둬둔 것이다. 프레임 바깥의 피사체는 언제나 또 다른 무엇이다. 게다가 그 피사체는 너무 지독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아니, 너무나 많은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인도 야상곡', p. 17)


 멀리서 느릿하고 단조로운 소리가 들려왔다. 아마 기도 소리이거나 외롭고 암담한 한탄의 신음 소리일 것이다. 누구에게 어떤 요청도 못 하고 한탄 그 자체만을 표출할 뿐인 그런 소리 말이다. 나로서는 해독하기가 불가능했다. 인도 역시 이와 마찬가지였다. 평탄하고 차이가 없이 모든 게 뒤섞인 것 같은 소리들의 우주.(같은책, p. 42)


  인도에서 그는 자신이 지금까지 알고 있는 것과 전혀 다른 사실을 잇달아 발견하며 결국 자신이 알고 있는 것도, 알 수 있는 것도 확실한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것은 기억 또한 진실된 순간을 담고 있는 게 아니라 다만 인위적 재현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의 확인으로 이어지고 끝내 그런 기억의 집적이라 볼 수 있는 자신의 진정한 자아라는 것 또한 결코 분명하지 않다고 수긍하게 된다.


 지나간 현실은 늘 실제로 그랬던 것보다는 나쁘지 않은 법이다. 기억은 가공할 만한 위조자인 것이다. 그럴 의도가 없더라도 왜곡은 거듭 일어난다. 우리의 환상 속에는 여러 호텔이 가득하다.  조지프 콘래드나 서머싯 몸의 책들에서, 키플링이나 브롬필드이 소설을 각색한 미국 영화들에서, 우리는 벌써 여러 호텔을 만난 바 있다.
 마치 그곳에 가본 듯 친근하다.(같은 책, p. 83)

 이러한 모습은 한탸와는 정반대이다. 한탸는 고정된 자아를 중심으로 타자가 집적되는 형태를 보여주었지만, 호스는 그렇게 이미 정립된 자아라는 것은 없으며, 그 자아조차도 타자의 매개로 이뤄지고 그렇기에 타자를 통한 변화란 원래 없었던 다른 자아로 변하는 것이 아니라 본래부터 있었으나 드러나지 않았던 자아가 그 순간 조우한 타자로 인해 비로소 발현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당장 보이는 것을 너무 확대 해석하지 말라고 충고한다. 

 확대는 맥락을 변조하지요. 사물은 멀리서 봐야 해요. 선택된 부분은 신중히 보시기 바랍니다.(같은 책, p. 113)

 섣부른 정의(定義)가 편견을 만들고 그것이 하나의 한계가 되어 자신의 존재와 가능성을 협소하게 이해하도록 만들며 그것을 통해 타자 또한 무분별하게 가르고 배척하게 되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서 한탸에게 무엇이 문제였는지, 그 정확한 모습이 비로소 드러난다. 한탸는 책의 지식을 아무런 질문 없이 무분별하게 섭취했고, 그것의 진실됨을 회의(懷疑) 속에서 검증하지 않았던 것이다. 다시 말해, 그의 독서엔 자신의 적극적인 개입이라고 할만 한 게 전혀 없었다. 스스로 질문하고 성찰하는 과정이 통째로 생략된 것이되다. 그래서 한탸는 라이프니츠조차 가르쳐 줄 수 없었던 존재의 극한에 이르고자 했었지만, 나 자신의 영역을 벗어날 수 없었고 결국 어떤 의미에선 자신에게 보다 강고하게 유폐되는 것이라 할 만한 자신의 죽음으로 그 여정을 완성하고 만 것이었다.

 울지 말거라. 네 궁금증을 풀어주려고, 이제 나는 라이프니츠조차 가르쳐줄 수 없었던 그걸 보러 갈 테니까. 존재와 무의 극한까지 갈 것이다.('이 시끄러운 고독' p. 130)

 그의 여정은 다른 이에게로, 미래로 이어지지 못했다. 어쩌면 그래서 이미 근대의 초기부터 허먼 멜빌의 단편에서 필경사 바틀비가 주어지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을 시작으로 차이와 균열을 만들어내는 저항의 움직임이 계속 있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사회가 개인을 멋대로 규정하고 억압하는 흐름이 역사적으로 반복되어 왔었는지도 모른다. 한탸가 했던 압축의 독서가 실은 그 본질적인 면에서 수집과 같았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그 어떤 타자에게로 이어지지 않고 개인의 수집으로 그치고 마는 한탸 식의 타자 지향적인 저항은 결국 발터 벤야민이 수집의 종말에 대해 말했던 다음과 같은 예언을 그대로 따르게 된다고 하겠다.

 수집이라는 현상은, 만약 그것이 그 주인을 잃게 되면 그 의미를 상실하고 맙니다(발터 벤야민, '나의 서재 공개' 중에서.)

 이런 면에서 인도 야상곡의 결말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호스는 마지막에 결코 홀로 끝나지 않는다. 크리스틴이란 여인을 만나고 그녀에게 자신을 향한 질문을 남기고 사라지는 것이다. 그의 여정은 여인의 여정으로 이어지고 그렇게 미래를 가져온다. 지금까지도 그랬고 이것 역시도 작위적인 해석에 불과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런 위험까지 무릅쓰고 다시 한 번 감히 말하자면 한탸의 마지막이 끝내 살아서 만나볼 수 없었던 집시 여인의 이름을 부르는 것으로 끝나고 호스의 마지막은 마치 그 부름에 응답하듯 여인이 실제로 나와 대화를 나눈다는 점에서 호스의 길을 좀 더 우리가 취해야 할 대안으로 고려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게 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미래가 응답하여 도래했다는 것인데, 이렇게 되어야 그 반대편의 역사적 반복을 저지할 하나의 흐름이 연속적으로 생성될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호스는 그 만남에서 자신이 정말 찾고 있었던 것이 무엇인지 이렇게 깨닫게 되기도 하니까 말이다.

 정확히 그런 건 아닙니다. 꼭 그렇지는 않아요. 나는 오랫동안 찾아다녔지만, 나를 찾은 지금은 더이상 날 찾으려는 마음이 없는 겁니다. 혼란스럽게 해서 미안합니다만, 사실이 그렇습니다. 나도 그 사람이 날 찾기를 바라는 마음이 없어요. 우리 둘 다 정확히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어요. 서로를 바라보기만 하자는 거지요.(같은 책, p. 111)

  이 모든 여정의 끝에서 마침내 확인하게 되는 것은 나 자신의 적극적인 사유의 개입이 있지 않고서는 우리가 바라는 진정한 변화의 힘은 책을 비롯하여 그 어떤 타자를 통해서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타자를 지향하더라도 거기엔 나의 끊임없는 질문과 회의 그리고 성찰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해미처럼 무분별하게 동조하게 되거나 한탸처럼 변화를 만들어낼 그 어떤 움직임도 자아내지 못한 채, 나 자신의 존재감만 키우는데 국한시키게 되는 것이다. 그런 선동과 유폐의 위험에서 벗어나려면 호스가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부단한 사유 뿐이다. 그렇지 않아도 알랭 바디우는 2015년 11월 13일, 프랑스의 오베르빌리에 시립극장에서 일어난 IS 테러집단에 의해 민간이 무수히 무참하게 학살당한 사건을 추모하면서 이런 비극은 우리에게 단 하나의 의무만을 요구하는데 그것은 바로 사유의 의무라고 말한 바 있다. 왜냐하면 커다란 비극일수록 그것에 대해 신중히 사유하지 않으면 실제 역사가 증거하는 바대로  곧 감정적인 복수와 비이성적인 광기에 휩쓸리고 또다시 누군가를 희생자로 만드는 비극을 반복할 것이기 때문이다. 바디우에게 있어 사유 또한 타부키와 마찬가지로 질문이자 회의의 여정이다. 내게 대한 것을 포함하여 모든 절대적인 것과 확신을 부정하고 차이와 균열을 생성하는 저항의 몸짓, 그것이 바로 사유인 것이다. 지금의 우리는 확신과 고집이 난무하는 세상 속에 있다. 손쉽게 타인의 생각을 재단하여 멋대로 이름 붙이고 서슴없이 혐오와 적대의 감정을 드러낸다. 그 예를 굳이 멀리서 찾아볼 필요도 없다. 얼마 전 세간을 뜨겁게 달군 메갈리아를 둘러싼 논쟁이 이런 실상을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으니까 말이다. 이것도 처음 시작은 참으로 미약하였으나 누군가의 적대가 상대편의 적대를 부르고 그렇게 몇 차례 오고가다 보니 둘러싼 모두를 활활 태우는 거센 불길이 되고 말았다. 그런데 이런 메갈리아 논쟁의 모습은 따지고 보면 테러의 여파와 유사하다. 9. 11의 미국의 시민이 그랬고, 오베르빌리에 극장 테러 이후의 프랑스 시민이 그랬듯이, 갑자기 자신이 속한 사회에 대한 정체성의 충성도가 충동적으로 강해지고, 그렇게 격양된 정서 속에서 전쟁을 불사하는 국가적인 보복이라는 참으로 비이성적인 행위마저 아낌없는 지지를 보내는 것이다. 복수(復讐)는 정의가 될 수 없다. 하물며 한 국가나 성별에게 국한될 수도 없다. 그래도 정의의 이름을 빌어 그것을 관철하고 싶다면 미국이나 프랑스 시민은 현재도 미국이나 프랑스보다 훨씬 더 큰 빈도로 일어나고 있는 이라크나 파키스탄, 나이지리아와 콩고의 학살에도 똑같이 제재하라고 나서야 하며, 남성들 역시 여성이 당하는 다른 모든 차별에도 그러지 말라고 적극적으로 나서야 하는 것이다. 정의는 어느 하나에 편중되지도 않고, 편재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사유는 그러한 충동을 막기 위해서다. 비이성적인 감정의 감염을 저지해, 이성적으로 신중하게 모든 상황을 살펴보도록 하는 것이다. 어디까지나 자신이 잘 모르고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서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도 야상곡'에도 나오는 다음과 같은 페소아의 시, '크리스마스'는 우리가 어떤 사태를 마주할 때 취해야 할 준비 자세에 대해 잘 보여주는 듯하다. 나도 여기서부터 시작해 보려 한다.

 눈먼 과학은 불모의 땅을 일구지요. 미친 믿음은 자기를 찬미하는 꿈을 먹고삽니다. 새로운 신은 그저 하나의 말일 뿐입니다. 찾지도 말고 믿지도 마세요. 모든 건 감춰져 있습니다.(p. 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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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29 18: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12-31 20: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짐승의 성 스토리콜렉터 51
혼다 테쓰야 지음, 김윤수 옮김 / 북로드 / 2016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섬뜩하고 잔혹하며 믿을 수 없다. 오랜만에 돌아온, 히메카와 레이코 시리즈로 유명한 작가 혼다 테쓰야가 선보인 '짐승의 성'을 읽고난 느낌이다. 어디에나 흔히 있는 평범한 맨션인 선코트마치다의 한 집에서 일어난 감금 학대와 일가족 살인을 중심으로 다루고 있는 이 작품은 사람으로써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저런 짓까지 할 수 있을까 싶어서 섬뜩했고, 가족이 다른 누구도 아니고 혈육에게 무참히 살해 당했을 뿐만 아니라 토막 나는 것도 모자라서 살은 모조리 믹서기로 갈려지고, 피는 패트 병 같은 것에 채워지며, 뼈는 흐물흐물해질 때까지 푹 고와져 모조리 버려지는 것을 보고 있자니 잔혹했으며 이 모든 비극이 머리도 능력도 별로 뛰어날 것이 없는 한 남자에게 세뇌 당하고 몸과 마음 모두 지배 당하여 벌어졌다는 사실이 믿을 수 없었다.


 '짐승의 성'은 제목 그대로 인간미 하나 없는 짐승 같은 존재가 다른 가족이 살고 있는 집을 자신의 성으로 삼아 가족을 점령하고 가족을 깡그리 파괴하는 이야기다. 그러나 이 소설엔 아직도 더욱 충격받을 사실이 하나 더 남아 있으니, 소설에 있는 이 모든 이야기가 놀랍게도 실제로 일본에서 일어난 '실화'라는 것이다. 이른바 '기타큐슈 일가 감금 살인 사건'으로 알려진 바로 그 사건이다.



 2002년 3월 6일. 한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자신의 손녀에게서 전화를 받는다. 꽤나 오랫동안 전혀 만날 수 없었던 손녀였다. 모처럼 걸려온 전화에서 손녀는 급박한 목소리로 자신이 현재 있는 곳을 알리며 감금 당하고 있으니 얼른 도와달라고 전한다. 전화를 끊자마자 할아버지는 바로 경찰에게 알렸고, 경찰은 그리로 출동하여 손녀를 감금하고 있었던 한 남자와 한 여자를 체포했다. 그러나 손녀의 아버지인 줄 알았던 남자는 아버지가 아니었고, 손녀의 아버지는 그에게 살해 당했다는 게 밝혀진다. 그러나 그것이 그 집에서 일어난 범죄의 전부는 아니었다. 더 엄청나고 놀라운 범죄가 있었으니, 그것은 체포된 여자의 일가족 6명이 모두 그 집에 감금 되어 살다가 남자에게 재산을 뺏기고 그의 전기 고문과 학대를 받아 죽거나 자신의 딸과 사위에게 살해 당했다는 사실이었다. 이렇게 살해된 이들 중엔 당시 10살인 딸과 5살인 아들도 있었고, 이 딸은 자신의 어머니와 동생까지 살해했다는 점에서 더욱 충격을 주었다. 희생자가 가족 전원이라는 점과 아무리 세뇌와 고문이 자행되었어도 가족이 가족을 죽였다는 점 그리고 범죄를 은폐하기 위하여 가족이 가족의 시신을 낱낱이 조각내고 흔적도 없이 처리했다는 점에서 인간의 금기와 상식을 가볍게 뛰어넘는 이 범죄 앞에서 일본은 오롯이 공포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짐승의 성'은 그것을 거의 그대로 보여준다. 그래서 소설 속 누군가의 말처럼 진실이 드러날수록 페이지를 넘기는 게 두려울 정도로 어둡고 으스스하다. 누구나 이 소설을 읽게 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질문은 아마 이것이지 않을까 싶다. 어떻게 이렇게 멀쩡한 사람들이 이토록 손쉽게 한 남자에게 자신의 더없이 소중한 가족에게 그런 참혹한 짓을 저지를 정도로 지배당해 버렸던 것일까? 얼른 '이런 일이 가능하긴 한 것일까?' 하는 의심이 들지만, 일본에서 실제 일어난 일이니 아무래도 가능하다고 믿을 수밖에 없고, 거기다 작가가 실제 사건에서 일어난 일들은 너무나 잔혹해서 소설에 그대로 담는 것은 무리라 독자를 위해 그 수위를 조절할 수밖에 없었다고 하니 '최순실 게이트'가 터졌을 때 많은 소설가와 시나리오 작가가 한탄한 것처럼 정말 현실은 인간의 상상력을 가볍게 뛰어넘는구나 생각되는 한 편, 짐승과 인간의 차이는 그야말로 종이 한 장의 두께처럼 얇다는 것을 새삼 절감하게 된다. 희생된 이들이 평범한 가족이고, 더구나 한 사람은 경찰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렇게나 짐승으로 추락하는 일이 그렇게 누구에게나 어렵지 않을 것 같고, 어쩌면 인간성을 포기한다는 것이 그토록 쉬운 일이기에 인류는 온갖 사상과 제도를 두텁게 만들어 짐승으로의 퇴로를 두텁게 차단해 온 것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세상이 불안하고 어려울수록 사람들은 더 많이 가족에게 기댄다. 인위적이 아닌, 자연적인 혈연으로 만들어진 유대라 무엇으로도 대체 불가능하기에 가장 강고하고 신뢰할만하다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건은 그 가족이란 것마저 너무나 손쉽게 붕괴될 수 있는 것임을 보여준다. 자식이 부모를 감시하고 학대하며 고문에 살해까지 서슴없이 한 것을 보노라면 가족의 그런 강한 유대도 어쩌면 그저 우리의 상상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절로 드는 것이다.


 사실 이 사건이 일본에 가져다 준 충격과 공포가 너무나 컸기에 작품으로 사건을 다룬 게 혼다 테츠야의 '짐승의 성'만은 아니었다. 지금까지 수차례 논픽션과 픽션으로 만들어졌다. 만화 '사채꾼 우시지마'도 세 권에 걸쳐 이 사건을 다루고 있다. 그렇다면 의문이 든다.


 혼다 테츠야는 왜 이 사건을 소설로 만든 것일까?


 소설을 흔히 사회의 거울이라고 말한다. 소설이 동시대와 조응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어떤 소설이든 나름대로 그 시대상에 대한 상념과 발언을 담고 있기 마련이다. 발터 벤야민에 따르면 이야기를 짓고 나눈다는 것은 고대로부터 자신의 경험을 공유한다는 것에 일차적인 의미가 있었다. 그 본질적인 마음은 지금의 소설가도 다르지 않다고 본다. 그들역시 경험의 형태를 가진 외적 자극이 글을 촉발 시켰을테니 말이다. 그렇다면, '짐승의 성'도 현재 일본의 어떤 모습이 혼다 테츠야로 하여금 쓰게 만든 것은 아닐까? 여기까지 수긍이 가능하다면, 과연 현재 일본의 무엇이 '짐승의 성'을 쓰도록 만든 것일까? 이것은 소설의 내용을 보면 어느정도 추정이 가능하다. 바로 갈수록 우국화 되고 있는 아베 정권에 대해 높아져만 가는 일본 국민의 지지율 상황이 혼다 테츠야로 하여금 '짐승의 성'을 배태하도록 한 것이라고 말이다.


 아베 정권을 받치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은, 영국의 브렉시트를 가져 온 마음 그리고 미국에서 트럼프를 당선시킨 마음과 그리 다르지 않다. 이들은 모두 자신이 현재 어렵고 불안하게 살게 된 이유를 자신보다 열등하다고 생각하는 '족속들' 탓이라 여기고 있으며 그것들을 내 눈 앞에서 치워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기꺼이 지지를 한 것이다. 이 모든 경향들이 하필이면 한 때 세계를 주름잡았던 국가들에게서 더 현저한 것을 보면, 우리나라에서 박정희 향수에 빠진 자들과 똑같이 화려했던 과거의 옛 영광을 회복하여 보다 더 강대한 국가의 일원이 되는 것으로 영락한 현재의 처지를 상상적으로 잊고자 하는 마음도 투영된 것으로 보인다.



 알폰소 쿠아론의 아들인 조나스 쿠아론이 감독한 '디시에트로' 영화는 이런 심리를 잘 보여주는데, 거기서 멕시코 밀입국자들을 총으로 마구 학살하는 미국 백인은 집도 없이 사냥개 하나만 데리고 낡은 차 하나를 타고서 황야를 떠도는 아주 보잘 것 없는 사람이다. 그는 한없이 전락한 자신의 처지에 대한 불안과 공포를 자기보다 열등한 존재라고 생각하는 멕시코의 밀입국자들을 처단하는 것으로 치유한다. 그것이 치유가 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 자신이 멕시코 보다 우월한 미국인이라는 사실 뿐이다. 그런데도 살인까지 포함해 모든 것이 정당화 된다. 일본도, 영국도 그리고 미국도 상식적인 차원에서 결코 이해할 수 없는 행위를 하고 있는 근본엔 바로 이런 자의 초상이 있는 것이다. '짐승의 성'은 바로 그런 일본인의 초상을 재현하고, 그 근원에 있는 저열한 심성을 드러내는 것으로 보인다.


 "그 부분은 아직 식구들이 본가와 마치다를 오갈 때 이야기라서 저는 그 쪽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거의 모르지만.... 어머니가 직접 말씀하셨을 가능성도 있다고 봅니다. 요시오 씨와 이어지는 일이 자신의 서열을 우위로 만드는 가장 빠른 방법이니까, 어머니 나름 생각해서 그러신 게 아닐까 하고..."

 모든 암컷이 자신의 몸을 지키기 위해 한 마리의 강한 수컷에게 붙으려고 한다. 그 경쟁에서는 부모자식이나 자매라는 관계도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한다.

 이것이 제대로 된 인간사회의 구도일까.

 이게 짐승의 무리와 다른 게 뭐가 있을까.(p. 193)


 이렇게 내가 달라 붙으려는 그것이 과연 무엇인지 제대로 생각하지 않고 그저 강한 무엇에 달라 붙어 스스로를 상상적으로 우월한 존재로 여기고 싶은 게 아베 정권을 지지하는 현재 일본의 적나라한 초상이라는 것을 일깨우기 위해 혼다 테츠야는 다시 한 번 '기타큐슈 일가 감금 살인 사건'을 세상 속으로 가져온 것이다. 이것은 실제 사건에는 없었던, 그리고 이야기를 선코트마치다와 양분하고 있는 '신고의 가정'에서 나타난다. 소설은 아주 단란한 신혼 생활을 보내고 있는 신고와 세이코 가정에서 시작된다. 그러다 불쑥 세이코의 아버지가 동거하게 되는데, 신고는 이것이 여간 불편하지 않다. 세이코의 아버지인데도 자기가 보기엔 일도 없이 빈둥거리는 게 영 보기 싫은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든 내쫓으려 한다. 나는 이것이 그저 미스터리를 강하게 만들기 위해 나온 설정이 아니라고 본다. 왜냐하면 이런 신고의 반응은 현재 일본 내로 유입된 한국과 중국을 비롯한 제 3 세계 사람들에 대한 일본인들의 시선을 정확히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인들에게 그들은 불쑥 들어와 원래는 자기 자리여야 했을 곳을 빼앗은 사람들이고, 자기보다 훨씬 못한 일들을 하는 주제에 감히 자신과 동등한 권리를 주장하는 자들이다. 신고의 생각 그대로다. 그래서 신고가 그랬듯이, 인권이든 뭐든 필요없고 그저 내 눈 앞에서 얼른 치워주기를 원한다. 이런 마음들이 아베를 지지하고 있다. 일본은 현재 그런 마음들이 점점 주류가 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혼다 테츠야는 여기에 커다란 반전을 가져 온다. 스포일러가 되기에 자세히 밝힐 수는 없지만, 그들이 '훼방자가 아니라 실은 구원자였다'는 식으로 말이다.


 그렇기에 더욱 '짐승의 성'은 혼다 테츠야의 경고로 들린다. 그런 식으로 저열한 욕망에 기대어 자꾸 상식적이지 않은 일을 방치하고 불합리한 행위를 방조하며 비이성적으로 거들고 나서기까지 하면 결국 당신들도 '기타큐슈 일가 감금 사건'의 희생자가 될 뿐이라는 것이다.  바로 다음의 부분에서 그 마음이 엿보인다.


 "하지만 그렇게 장기간에 걸친 감금이라면..."

 "'학습성 무력감' 이야긴가요?"

 그렇다. 바로 시마모토가 하고 싶었던 말이다. 장기간 감금되어 폭력을 당하게 되면 사람은 점차 빠져나가려는 노력을 하지 않게 되고, 결국은 도망칠 기력조차 빼앗기게 된다는 학설이다.(p. 164)


 하지만 이렇게 말하면 모든 범죄에 이유를 밝힐 가치가 없다.(...) 그런데 그 사실을 알면서도 사람은 범죄의 이유를 찾으려고 한다. 범죄가 발생하는 정신적, 사회적 구조를 해명하고 범죄자를 이해하려고 한다.(...)

 하지만 과연 그게 전부일까?

 인간은 무서운 것이 아닐까.

 자신이 피해자가 되는 건 당연히 무섭지만, 가해자가 되는 것도 똑같이 무서운 일이다. 자기 안에도 범죄의 싹이 있을 수 있다. 지금은 괜찮더라도 언제 자신도 범죄자가 될 지 모른다. 그래서 알고 싶은 것이 아닐까. 자신과 범죄자는 뭐가 다른가. 범죄자가 되는 사람과 되지 않는 사람과의 경계선은 어디에 있는가.

 가장 무서운 일은 그 경계선이 없는 것이다. 우메키 요시오를 체포하고 범행 이유를 자백시켜서 그의 지난 인생을 바라보았을 때 자신들과 요시오 사이를 구분 짓는 경계선이 보이지 않는다면, 그게 가장 무서운 일이다.(p. 204)


 소설을 읽어보면 아시겠지만 그 경계선은 보이지 않는다. 때문에 이 소설이 더 공포로 다가오는지도 모른다. '학습성 무력감'은 그대로 생각하지 않고 살면 사는 대로 생각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이는 한나 아렌트가 악의 본질이라고 보았던 '무사유'와 다를 바 없다. 20세기 이후, 인류 최대의 비극이라 할 수 있는 유태인 학살은 바로 이런 독일 인민의 무사유가 만들어낸 것이었다. 제바스티안 하프너가 '비스마르크에서 히틀러까지'에서 잘 보여줬듯이 당시 나치 정권을 탄생시킨 독일 인민의 마음은 현재 일본 아베 정권을 지지하고 인민의 마음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그 때 독일 인민이 자신의 무사유 때문에 자신도 희생자가 되었듯이, 일본도 같은 운명의 길을 걸을지 모른다. 내 몸 하나 편하자고 다른 이의 고통을 못 본 척 할때, 시대가 날로 나쁘게 전락해 가는 것을 모르쇠 할 때, 무사유 속에 드리워져 있는 비극, 다시 말해 그런 자들 역시 반드시 희생자가 된다는 불길한 운명 역시 점점 현실화가 된다는 것을 역사는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으니까. 이것은 '기타큐슈 일가 감금 살인 사건'의 과정과 하나도 다르지 않다. 집약된 모습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 앞에 나와야 했던 것이다. 나의 상상적 우월감에 도취하기 위하여 타인에 대한 적대와 학대가 날로 증가되고 있는 이 시기에 하나의 준엄한 경고처럼 말이다. 비단 일본만의 이야기는 아니라고 본다. 우리나라에도 '박사모'라든가, 세월호 참사가 터졌을 때, '난리났네' 하면서 웃은 당시 청와대 대변인 하며 지금도 여전히 구출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나 청와대의 7시간에 대해서 철저히 모르쇠 하는 사람들과 거기에 맞장구 치는 사람들을 보면 기타큐슈 일가의 참극은 그리 우리와 멀지 않다는 걸 느끼게 된다. 그러므로 그런 자를 볼수록 우리는 더 많이 샤유해야 하고, 약하고 아픈 이 시대의 모든 이들에 대해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광화문 광장의 백만 촛불이 분명히 보여주었듯이, 타인을 구하는 것이 곧 나를 구하는 일이다. '짐승의 성'이 아니라 '인간의 광장' 되는 길은 이리도 단순하다. 진리는 단순하다. 늘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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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오나 2016-12-23 0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 사건을 다룬 게 혼다 테츠야만이 아니었군요. 이 작품은 너무 잔인해서 두번 다시 읽고 싶지 않았는데, 이렇게 사회적으로 읽어내신 글을 보니 언젠가 한번더 봐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ㅎㅎ

오드득 2016-12-23 16:01   좋아요 0 | URL
일본 사회에 안긴 충격이 워낙 컸기 때문에 그런 것 같아요. 평범했던 사람들이 그것도 가족에게 이런 잔인한 짓을 저지를 수 있다니 읽으면서 정말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들더군요. 그래서 아마도 생각이 사회적인 걸로 나아간 것 같아요. 이런 사건이 일본인 특유의 권위 순종적 성향 때문인지 아니면 체면을 중시하는 특성 탓인지, 아직도 이들의 행태가 잘 이해 안됩니다. 그래서 저 역시 또 읽게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하네요^^

2016-12-24 02: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12-24 13: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12-25 02: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녀고양이 2017-01-01 17: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책이었군요. 그냥 추리 소설이라고 지나쳤는데.
제 직업 때문에 이런 관련해서 생각이 점점 많아집니다. 인간을 극단으로 모는 것들에 대해.

헤르메스님, 너무 오랜만에 들리네요.
새해에는 종종 들리겠습니다, 평온하고 건강하고 행복한 2017년 되세요.
변함없는 애정을 보냅니다~ (라고 말해도 되는 사이죠, 우리?)

오드득 2017-01-18 15:02   좋아요 0 | URL
와, 마녀고양이님 정말 오랜만입니다. 댓글은 따로 남기지 않았지만 그래도 마녀고양이님이 글을 올릴 때마다 들러서 읽었었는데 많이 바쁘신 것 같더군요. 새해엔 좀 여유가 많이 생기셔서 마녀고양이님 글을 많이 읽을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저 역시 변함없는 애정을 보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