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의 감옥 모중석 스릴러 클럽 41
안드레아스 빙켈만 지음, 전은경 옮김 / 비채 / 2016년 11월
평점 :
절판


 아주 어릴 때, 익사할 뻔한 적이 있다. 엄마와 시장에 같이 갔는데, 연못 근처에서 까불다가 그만 빠져버린 것이다. 아직도 그 때 물 속으로 가라앉던 내 눈 앞에서 천천히 떠오르던 하얀 물옥잠이 선명하다. 왜 그것만 유독 또렷한 지는 모르겠지만. 물 속의 시간은 참 느리게 흐르는구나 하고 생각했던 기억, 그 시간만큼 천천히 목을 죄어오던 느낌들도 내 육체에 아련한 잔향으로 남아 있다. 엄마가 얼른 연못 속에서 날 건져주지 않았다면 지금 이렇게 글을 쓰지도 못했으리라.


 익사하는 자에게 물은 정녕 감옥이다. 그것도 압도적인 두려움 속에서 서서히 질식되는 공포의 감옥이다. 한 번 그런 경험을 하게 되면 물만큼 무서운 것도 또 없다. 그랬기에 '사라진 소녀들'로 우리나라에 첫 선을 보인, 독일의 스릴러 작가 안드레아스의 빙켈만이 2012년에 발표한 '물의 감옥'은 남들에게는 스릴러 소설로 읽혔을지 모르나, 내게서 만큼은 문자 그대로 호러 소설로 읽혔다. 소설은 처음부터 익사당하고 있는 여자로 시작하는데, 비록 욕조에서 익사당하고 있는 중이었지만, 누군가에게 억지로 익사당하고 있는 그녀의 심리가 너무나 생생하게 묘사되고 있어서 내가 가라앉던 기억이 저절로 오버랩 되면서 정말로 한 문장, 한 문장 읽을 때마다 몸이 차갑게 얼어붙는 느낌이었다. 등 뒤로 비수를 은밀하게 감추고 지어보이는 살인자의 미소만큼이나 차디 찼던 물의 냉기. 육체 아래서 오래 잠들어 있었던 그 감각이 삽시간에 소환되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하필이면 겨울 새벽에 읽어서 더 그랬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내게는 그 어떤 책보다 힘들고 무서운 책이었다. 그런 익사가 한 번도 아니도 내내 계속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이 소설엔 익사로 연쇄 살인을 하는 범인이 등장한다. 그는 희생자를 호수 속으로 끌여들어 밑에서 그 몸을 잡고 익사되려는 순간의 고통을 충분히 느끼게 한 다음, 자기가 원하는 속도로 천천히 물 속으로 데리고 들어가 저 호수 밑바닥 죽음의 심연으로 매장시킨다. 진정 나로선 가장 피하고 싶은 살인자임에 틀림없다. 그 범인은 스스로를 '물의 정령'으로 칭한다.



 물의 정령 하니 얼른 푸케의 '운디네'가 생각난다.

 운디네는 여러 모로 인어공주와 비슷하다. 물의 정령인 그녀는, 어느 날 우연히 만난 잘생긴 기사에게 반하여 그와 결혼하기 위해 인간이 된다. 결국 기사와 꿈에 그리던 결혼을 하게 되었으나 행복은 그리 길지 못했다. 기사가 그만 다른 여자와 정분이 나고 만 것이다. 배신을 당한 운디네는 남편과 결별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키스를 해 달라고 말한다. 남편이 선뜻 키스에 응해주자, 운디네는 그 키스로 남편의 모든 정기를 빼앗고 죽음에 이르게 한다. 그리고 운디네는 배신의 아픔과 남편을 죽인 죄책감까지 더해 샘물이 되어 버린다. 혹시 스스로 물의 정령이라 칭한 범인도 자신이 운디네와 비슷하다고 여긴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왜냐하면 알고 보니 그 역시 타인을 연쇄 익사시키는 무서운 범죄를 저질렀던 이유가 타인의 배신으로 인한 커다란 상처 때문이었으니까 말이다.


 운디네가 그랬듯이, 그의 살인도 복수의 일환이었다. 그에겐 복수해야 할 대상이 있었다. 바로 유능한 독일 형사 에릭 슈티플러다. 범인이 익사시킨 여성들은 무작위로 정해진 것이 아니었다. 범인은 에릭의 전부인이나 관계를 가졌던 매춘부 등 그렇게 에릭과 관계 있는 여성들만 희생시켰던 것이다. 그는 왜 에릭과 아는 사이라는 것말고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여성들을 죽여서까지 복수를 하려는 것일까? 도대체 둘 사이엔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그 의문이 이 소설을 끌고 가는 동력이다. 그런데 여기에 한 가지 사건이 더 끼어든다. 그것이 바로 소설 가장 처음에 나오는 욕조 익사 사건이다. 거기서 죽은 여인은 수잔 호프만. 그녀는 라비니아와 절친인데, 둘에겐 꿈이 있었다. 한때 라비니아 가족의 별장이었던 시칠리아의 작은 집을 다시 사서 둘이서 함께 사는 것. 그것을 위해 수잔은 매춘부 일을 하고, 라비니아는 만나는 남자가 수잔을 위험에 빠뜨리지 못하도록 멀리서 감시하는 일을 했다. 그러다 그만 수잔을 익사시키려 했던 남자를 만나고, 그 일이 있은 후 수잔이 욕조에서 익사당한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살아남은 라비니아는 분명 그 때 수잔을 익사시키려 했던 남자가 범인이라고 생각하고 그를 피해 달아나 숨는다. 그러는 한 편, 수잔의 못 다 이룬 꿈을 이뤄주기 위해 열심히 돈을 모은다. 이 살인 사건과 물의 정령은 과연 어떤 관계일까? 수잔을 익사시키려 했던 남자는 정말 물의 정령이었을까? 그가 수잔을 욕조에서 익사시킨 것일까? 아니면 진범이 따로 있는 것일까? 이렇게 소설은 또 하나의 수수께끼를 독자에게 안기며 놀라운 반전 속에 펼쳐지는 진실을 향해 점차로 다가간다.


 소설은 등장인물의 내면을 한 챕터씩, 번갈아 보여주면서 진행된다. 그렇게 우리는 에릭과 라비니아에게서 일상이 서서히 붕괴되는 것에서 오는 공포를, 프랭크에게선 뜻하지 않게 찾아온 사랑과 그것을 지키지 못하는 순간에 느끼는 절박함을 볼 수 있으며, 범인에게선 너무나 사랑했고 더없이 소중한 것을 갑작스레 상실해 버린 것에서 오는 상처와 원한이 얼마나 큰 것인지 깨닫게 되며, 형사인 마누엘라에게선 남자 중심 조직에서 여성이라는 이유로 당하는 무시와 경멸 등의 성차별적 폭력들이 삶에 어떤 생채기를 남기는지 확인하게 된다.


 '물의 감옥'에서 주로 희생 당하는 자는 여성들이다. 라비니아는 남성 범죄자에게서 달아나고 있으며, 마누엘라는 남성 중심의 강고한 연대 속에서 고립되고 왜소한 섬으로 존재한다. 하나 같이 배제되고, 위축된 여성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때문에 이 소설을 어쩔 수 없이 페미니즘으로 읽게 된다. 더구나 에릭은 마누엘라에게 이루 말 할 수 없는 성차별적인 언어와 적대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어 더욱 그렇게 보도록 만든다.


 이렇게 보자면 소설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두 여성의 이름이 예사롭지 않게 다가온다. 바로 '라비니아'와 '마누엘라'이다. 일단 '라비니아'는 로마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이다. 그도 그럴 것이 로마를 건국한 아이네이스의 아내로, 한 마디로 로마의 어머니라 할 수 있는 존재이니까 말이다. 그러나 그런 라비니아의 존재는 로마 건국의 역사에서 그리 중하게 취급되지 않는다. 역사는 오로지 남자 아이네이스 중심으로만 기술된다. 그 아이네이스를 노래한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 또한 마찬가지다. 라비니아는 아내의 이름으로 단 한 번 언급되는 것으로 끝나고 만다. 라비니아의 존재감은 너무나 미미하다. 마치 로마를 건국하기까지 밥상을 차린 것은 전적으로 아이네이스이고, 라비이나는 그저 숟가락 하나 얹은 것 밖에 없는 것 같다. 하지만 실제 역사는 그렇지 않았다. 로마를 건국하기 위한 모든 힘과 자원을 가진 것은 사실 라비니아였고, 아이네이스야 말로 숟가락 하나 잘 올리고 남우주연상을 거머쥔 것에 지나지 않았다. 라비니아는 라틴족의 기원이 되는 왕국 라티누스의 하나밖에 없는 공주였다. 많은 남자들이 라티누스의 권력과 재력을 가지기 위해 라비니아에게 구혼을 했다. 아이네이스도 그 중 하나였다. 더구나 그는 그 쪽 대지의 사람도 아니고 바다를 건너온 이방인이었다. 아이네이스가 라비니아의 베필로 선택된 것도 그의 신분이나 능력 때문이 아니었다. 어쩌면 전적으로 운이라고 할 수도 있었다. 왜냐하면 라비니아의 아버지인 왕 라티누스가 꾼 꿈 때문에 결정되었으니까 말이다. 그는 어느 날 꿈에서 라비니아의 베필은 바다를 건너 온 자로 해야 한다는 말을 들었고 그 말을 믿은 결과 아이네이스를 선택했던 것이다. 만일 꿈을 믿지 않았다면 결과는 지금과 전혀 달랐을 것이다. 그러나 어쩌면 이런 사실조차 실은 남성 중심 사회가 왜곡한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여기서도 라비니아는 자신의 의지대로 하는 것이 하나도 없고 여전히 소외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저 상자 속에 있는 왕국을 차지하기 위해 필요한 열쇠, 더 큰 야망과 교환되는 전리품에 지나지 않아 보인다. 진실은 전혀 달랐을지 모른다. 그러나 신화와 역사의 기록으로 그려지는 라비니아는 남성 중심 사회에 겹겹으로 포위된 존재다. 어쩌면 바로 이 때문에 정말로 빙켈만은 남성에 대한 두려움으로 달아나는 여성에게 라비니아라는 이름을 준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나 다를까, 소설에서 라비니아는 남성에게 모든 것을 빼앗긴다. 신화와 역사 속에서 로마 건국에 따른 모든 영광을 아버지와 남편에게 빼앗긴 라비니아와 똑같이. 그러고 보니 앞서 말한 물의 정령 운디네도 라비니아와 동일한 희생자라 할 수 있겠다.


 이런 사실 때문에 나는 이 소설에 나오는 여성들을 하나의 상징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가장 처음에 등장하여 욕조에서 죽어가는 수잔은 과거고 라비니아는 현재이며 마누엘라는 미래라고 말이다. 과거는 소설이 재현하고 있는 절망과 죽음만이 가득한 세상이 어떻게 출현했는가를 설명한다. 그런 세계는 바로 여성의 죽음으로 도래했다고 말이다. 이런 수잔의 죽음은 소설에 등장하는 또 하나의 죽음, 그것도 모든 비극의 기원이 되는 한 여성의 죽음 때문에 더욱 명확해진다. 스포일러가 되기에 자세히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두 죽음에 얽힌 설정은 오늘의 어둡고 절망스런 세상이 바로 여성의, 여성성이 상징하는 모든 가치의 죽음으로 비롯되었다는 것을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라비니아는 그 세상이 계속해서 만들어내고 있는 현재 여성의 상징이 된다. 여기에 마누엘라는 미래가 들어온다. 왜 마누엘라를 미래로 생각하는가 하고 묻는다면 역시 이름의 의미 때문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마누엘라는 '신이 우리와 함께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라비니아적 현재에서 벗어날 수 있는 구원의 상징이다. 이런 마누엘라의 의미는 소설 속에서 라비니아와 마누엘라가 보여주는 차이로 인해 부각된다. 라비니아와 마누엘라에겐 가장 대조되는 차이점이 있다. 바로 라비니아는 자신을 포위하고 막다른 골목으로 내모는 남성들과 맞서 싸우지 않지만, 마누엘라는 적극적으로 투쟁한다는 것이다. 라비니아는 가장 친한 친구가 죽었는데도 회피로 일관하고, 마누엘라는 남성 중심의 조직 사회가 무시와 경멸을 연타하는데도 굴하지 않고 정면으로 관통한다. 소설의 결말은 이런 차이가 어떤 종결을 가져오는지 보여준다. 그러므로 마누엘라는 하나의 대안이며 구원이다. 그녀는 정녕 도래해야 마땅한 미래이다. 아마도 빙켈만은 그것을 보다 더 뚜렷하게 보여주기 위해 '신이 우리와 함께 있다'는 이름을 그녀에게 부여했을 것이다.


 내겐 더없이 호러 소설이었지만, '물의 감옥'은 이렇게 페미니즘으로 읽을 수 있는 소설이었다. 현재에도 세계 곳곳에서 양산되고 있을 운디네와 라비니아의 비극을 중지시키기 위하여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소설인 것이다. 그것은 마누엘라가 제대로 보여줬듯이, 적극적으로 싸우는 것이다. 라비니아에게 세상이란 그야말로 '물의 감옥'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스스로 뛰쳐나갈 생각은 하지 않고 바깥에 있는 누군가가 먼저 열쇠로 꺼내주기만을 기다렸다. 여기서 왜 빙켈만이 하필이면 살인의 형식을 익사로 가져왔는지가 보다 분명해진다. 생각해 보면, 익사란 수동성의 결말이다. 물 속에서 아무 것도 하지 않을 때 익사하니까 말이다. 살려고 적극적으로 발버둥치지 않으면 벗어날 수 없는 죽음. 그것이 바로 익사의 정체다. 마누엘라는 발버둥을 쳤다. 상황을 파악하여 오류와 약점을 찾았고 스스로 뚫고 나가는 길을 만들었다. 물론 그녀에게도 위기는 있었다. 그런데 그 위기란, 남성에게 기댔을 때, 그러고 싶은 마음과 타협했을 때 찾아왔다. 그 조그만 타협마저 그녀를 죽음의 위기로 몰고 갔다. 이로써 빙켈만의 진언은 보다 확실해진다. 타협없는 부단한 투쟁만이 진정한 구원의 미래를 열어 젖힌다는 것을.


 '물의 감옥'은 한 마디로 열쇠를 바깥에서 찾으려는 자 모두에게 내리는 준엄한 경고이다. 진정 구원의 열쇠를 원한다면 빙켈만의 제안대로 내 주머니부터 먼저 샅샅이 뒤져보는 게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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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01 02:2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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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18 15:09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