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 슬립 레이먼드 챈들러 선집 1
레이먼드 챈들러 지음, 박현주 옮김 / 북하우스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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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타의 매'의 샘 스페이드 나 '빅 슬립'의 필립 말로 같은 하드보일드 장르의 사립탐정들은 일단 슈퍼히어로가 아니다. 그리고 홈즈나 엘큘 포와로 처럼 그리 명석한 두뇌도 없다. 

그들이 내세울만한 건 오로지 튼튼한 다리와 끈기 그리고 두둑한 배짱 정도? 그렇게 그들은 아무리 작은 단서라도 있으면 어디든지 찾아가고 제대로 사태를 파악할 때 까지 몇 번이고 몇 번이고 탐문과 추적을 계속한다. 하지만 그런 과정 역시 그리 쉬운 건 아니다. 끊임없이 사람들을 만나고 누적된 반복과 지루하리만큼 긴 시간이 필요하다는 건 문제도 아니다. 그들을 진짜 힘들게 하는 건 바로 그들에게 아무런 권한이나 권위가 없다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내어 보일 뱃지도, 경찰수첩 같은 것도 없다. 따라서 그들은 언제나 문전박대를 감수해야만 하며 그나마 사람들에게 유일하게 기대할 수 있는 건 오로지 '선의' 이거나 아니면 슬며시 손바닥에 쥐어주는 '돈의 힘' 뿐이다. 

 하지만 그나마도 경찰에겐 통하지 않는다. 경찰은 같은 범죄자를 쫓고 있어도 그를 협력자로 여기지 않는다. 그를 따돌리거나 적대시할 뿐. 그렇게 그는 언제나 핵심정보에서 배제되고 방해물 취급을 받거나 어떤 땐 용의자가 되기도 한다. 

 힘도 지혜도 내세울 권위도... 사립탐정은 하나도 가지고 있지 않다. 

 거기다 그는 언제나 혼자다. 

 고독은 그가 가지고 다니는 권총만큼이나 뗄레야 뗄 수 없는 동반자다. 그가 믿을 것은 오로지 자신의 의지와 육체 뿐이다. 그래서 그가 집요하고 끈기가 있는 것은 그가 할 수 있는 것이 오로지 그것 밖에는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게 그는 가진 것 하나 없이 홀로이다. 마치 자신을 벽처럼 둘러싼 세상 속에서.... 

 세상은 콘크리트 벽처럼 단단하다. 너무나 단단해서 사립탐정이 비집고 들어갈만한 틈 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로...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차이나 타운'

 사립탐정은 세계라는 벽 앞에서 단독자이며, 마주한 세계는 그렇게 바로 그의 한계로서 존재한다.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영화 "차이나 타운"은 이러한 세상 앞에서의 단독자로서 사립탐정이 가지는 한계를 정말 잘 보여주고 있다. 결국 영화가 끝날 때까지 주인공인 사립탐정이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도 없었다. 사건을 해결하지도 못했고, 사랑하는 이의 죽음도 막지 못했다. 거기다 사랑하는 이를 죽인 범인조차 고발하지 못한다. 그는 아무 것도 바꾸지 못했고 그가 가진 건 오로지 자신의 무력함과 가득한 비참함 뿐이다. 사립탐정으로서 그가 유일하게 할 수 있었던 일은 단지 세상의 진실을 확인한 것 뿐이었다. 대낮의 밝은 세상이 숨기고 있었던 어둡고 치욕스런 진실을... 그것을 보게 된 것 뿐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할 수 있었던 것도 없었다. 세상은 그가 알거나 말거나 아무 상관하지 않았고 자기가 구르고 싶은대로 굴러갔다. 그는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무심히 스쳐 지나가는 거대한 공룡 같은 세상 옆에서 그저 지켜보기만 하는 구경꾼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그 공룡의 발 아래 짓밟히는 가여운 영혼들을 목격한다. 그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마구 짓밟고 지나가는 세상이 더럽고 치사하고 잘못되었다는 걸 알지만, 그렇게 짓밟히는 자들에게 안타까운 연민이 들고 뭔가 돕고 싶다는 마음이 가득하지만, 결국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자기 힘으론 저 거대한 공룡 같은 세상의 발가락 하나 들어 올릴 수 없다는 무력감이 가득 찬다. 그런 비참한 심정으로 거리를 바라보고 있는 탐정 제이크에게 친구는 이렇게 말한다. 

 "잊어버려, 제이크. 여기는 차이나 타운이잖아." 

 차이나 타운. 그건 단단하고도 거대한 세상의 한 이름이다. 사립탐정이 아무리 진실을 알아도 끄덕하지 않는.. 그런 세상을 상징하는 일종의 라벨이다. 거기서 사립탐정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그저 지켜보는 것. 즉, '관찰자'가 되는 것 뿐이고 그건 바로 사립탐정의 '레종 데뜨르'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 한계. 그 지켜볼 수 밖에는 없다는 그 한계가 오히려 사립탐정에게는 역설의 신념을 가지게 한다. 마치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 처럼, 세상을 마주한 단독자, 세상의 추악한 진실을 목도한 자로서의 사립탐정에게 개인적인 도덕적 신념을 관철시키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건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르겠다. 이미 세상이 감추고 싶었던 그 이면의 추악한 진실을 보아 버렸으니, 어떻게 그것을 깡그리 잊고 세상과 한데 섞여 살아갈 수가 있을 것인가? 보는 게 달라지면 생각이 달라지고, 생각이 달라지면 행동이 달라지는 법인데... 

 내세울 능력도 머리도 권위도 없는 가난한 사립탐정에게 그의 타협없는 자신만의 도덕적 신념은 그나마 자신을 자신답게 지탱하게 해 줄 유일한 것인지도 모른다. 관찰자로서의 사립탐정이 세상의 추악한 진실을 보기는 하였으나 바꿀 수는 없는 그 한계 때문에 그나마 추악한 이면을 보게 된자로서 가지게 되는 책임이 그러한 도덕적 신념을 관철시키는 것으로 나타나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진실을 아는 자는 그 책임 또한 느끼기 마련이지만 세상 앞에서의 자신의 무능은 그를 좌절시킨다. 그렇다고 이미 본 것을 안 봤다고 할 수도 없으니 책임을 거부할 수도 없는 일. 그러한 조건 위에서 사립탐정이 그나마 자기 책임을 다할 수 있는 일은 남들이 뭐래도 세상이 아무리 부정해도 끝까지 자신의 도덕적 신념을 지키는 일 밖에는 없지 않을까? 어쩌면 그렇게 도덕적 신념이란 사립탐정의 본질 자체가 아닐까? 그렇게 보면, 사립탐정이란 마치 구약성경에 나오는 선지자들과도 같다. 악에 찌든 세상을 홀로 떠돌며 세상의 타락을 목청껏 외쳤던 고독한 선지자들 말이다. 그렇게 어두운 시대 아주 작은 빛이 나마 되고자 했었던 사람들 말이다.

시대가 너무 어두우면, 사람들은 자그마한 빛이나마 찾고 싶어지는 법이다. 

 더쉴 해미트의 사립탐정 '샘 스페이드'가 최초로 그의 모습을 드러내던 1930년대의 미국은 이른바 '대공황기'였고 그야말로 한 치 앞도 분간하기 힘든 칠흙 같은 밤이었다. 조금의 돈만 준다면 대놓고 사람들에게 총질하던 무렵이었고, 조금의 돈만 준다면 기꺼이 법률도 도덕도 내던져버릴 수 있었던 무렵이었다. 시장, 판사 같은 저 사회 지도층에서 부터 마피아의 똘마니 같은 저 하위 계층까지 모든 사람들이 오로지 몇 푼의 돈을 위해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명예를 헌신짝 처럼 집어던져 버리고 기꺼이 괴물이 되기를 택했다. 샘 스페이드는 바로 그 무렵에 나왔다. 

 그건 여기 '빅 슬립'의 필립 말로도 마찬가지였다... 

 시대가 아무리 그렇게 어두워도 모든 사람들이 돈에 자신의 영혼을 팔아넘겨도 사립탐정은 전혀 상관하지 않는다. 그저 꿋꿋하고 당당하게 자신만의 도덕적 신념을 관철시켜 나갈뿐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환호할 수 밖에 없었다. 시대의 거대한 어둠에 비하면 아주 미약하기 그지없는 빛이었다 해도, 애타게 빛을 바라던 사람들에겐 그야말로 눈부신 태양과도 같았으니까! 그래서 그들은 그 빛으로 몰려들 수 밖에 없었다. 그 사람들은 그런데 어떤 사람들이었나? 

 몇 푼 안 되는 돈에 자신의 영혼을, 명예를 팔아넘기는 일에 점점 더 부끄러움을 느꼈던 사람들이었고 사람답게 살고 싶다는 열망으로 조금의 희망이라도 찾고 싶어 헤메던 사람들이었다. 그렇게 그들은 빛을 필요로 했었다. 어떻게 보면 사립탐정은 바로 이 사람들의 구원을 향한 열망이 요청한 존재일 수도 있다. 더쉴 해미트의 샘 스페이드도 레이먼드 챈들러의 필립 말로우도 그렇게 그 시대의 좀 더 인간답게 살고 싶었던 사람들이 요청한 존재였고 조금의 희망이라도 바랬던 사람들의 부름에 대한 응답이었다. 그들의 타협하지 않는 도덕적 신념은 세상에 마구 휩쓸릴 수 밖에 없었던 사람들 앞에 홀연히 떠오른 구원의 빛이었다. 

 해서, 사립탐정은 아무리 어둡고 비정한 시대의 현실 속을 걸어도 그 존재 자체가 인간에겐 구원의 가능성이 있다는 징표가 된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 눈 앞에 사립탐정이 나타났다는 것은 바로 나만이 이 치욕에서 벗어나 좀 더 사람답게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의 확인이기 때문이다. 나말고 또 다른 누군가도 나처럼 이 세상의 현실에 절망과 그렇게 속절없이 타협하는 자신에게 부끄러움을 느끼고 그렇게 살지 않으려 애쓰고 있다는 무언의 신호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사립탐정은 아무리 홀로 거닐어도, 우리는 그의 존재 자체로 인해 맺어지고 함께하게 된다. 이 광막한 어둠의 장막 아래 어디에선가 홀로 자신의 신념을 관철시키며 우뚝 걸어가고 있는 사립탐정을 응원하고 있을 그 누군가와 말이다. 

 "한 알의 밀알이 떨어져 섞지 아니하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고 했던가... 그 말처럼 사립탐정은 홀로 섞고 우리들은 그의 고뇌와 비통을 함께 하며 자라난다. 그리고 그렇게 고뇌하고 희망이 있는 한 아무리 암흑같은 시대라도 변화 역시 찾아올 것이다.  

 당신은 지금 이 책을 읽고 있는가? 

 그렇다면 당신 역시 우리들의 동료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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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1-02-12 0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등 당첨되신거 축하드립니다. 이벤트 결과 덕분에 헤르메스님 서재를 알게 되었네요^^

오드득 2011-02-12 00:42   좋아요 0 | URL
CYRUS님도 축하드립니다. 그리고 이렇게 구석진 서재 첫 댓글이네요^ ^

starover 2011-02-12 1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전에는 '빅 슬립'이라는 소설을 잘 알 수 없었지만..... 헤르메스 님의 멋진 리뷰 덕분에 레이먼드 챈들러의 작품에 관심이 가네요. 수상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삽하나 2011-02-15 0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조만간 알라딘에서 놀랍니다 ㅋㅋ
그런 의미에서 자주가는 서재 추가. 꾸욱. ㅇㅅㅇ

오드득 2011-02-15 18:31   좋아요 0 | URL
앗! 삽하나님이다.
여기서 보니 왠지 더 반가운데요.^ ^
자주가는 서재로 등록해줘서 고마워요.
 
신데렐라의 함정 동서 미스터리 북스 119
세바스티앙 자프리조 지음, 지정숙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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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 말코비치 되기'의 스파이크 존즈가 감독하고 역시 같은 영화의 각본가이자 '이터널 션사인'의 각본가로도 유명한 찰리 카우프만이 함께 만들었던 '어댑테이션' 이란 영화가 있다. 거기서 분명 찰리 카우프만 자신의 모습으로 보이는 영화 시나리오 작가를 꿈꾸는 동생 니콜라스 케이지가 자신에게 기막힌 아이디어가 있다면서 형에게 이런 얘기를 하는 장면이 나온다. 

 "일단 이건 스릴러인데, 사건이 일어나면 형사가 범죄자를 쫓지. 그런데 결국 형사와 범죄자가 동일 인물이라는 게 밝혀져. 형사는 사실 자신을 고발하기 위해 쫓고 있었던 거지..." 라는.

이 장면을 보고 있으면 슬그머니 그 초짜 시나리오 지망생인 동생에게 이렇게 비웃고 싶어진다. 

 "이봐요, 몽상가 양반. 꿈도 야무지시군. 겨우 그 정도를 가지고 아이디어라고 내밀다니. 당신보다 훨씬 이전에 한 프랑스 작가는 범죄자와 탐정 뿐만이 아니라 증인과 피해자 역할까지 모두 한 사람이 하는, 그야말로 1인 4역이라는 전무후무한 미스테리 소설을 이미 써 버렸단 말입니다." 하고. 

1인 4역? 

 범죄자와 형사 뿐만 아니라 증인과 피해자까지 모두 한 사람일 수 있는 게 과연 가능할까?  나도 처음엔 믿지 않았다. '뭔가 말도 안되는 트릭을 믿으라고 강요하겠지.' 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가능했다. 별다른 트릭도 없었다. 흔해 빠진 기억상실증 그게 다였다. 그런데도 소설이 끝날 때까지 흥미진진. 도대체 결말이 어떻게 될 지 궁금해서 페이지 넘기기를 그만두기가 어려웠다. 이게 가능할까? 오로지 한 인물에만 집중해서, 오로지 플롯의 기교로 독자를 작품의 세계에 가둬두는 게 가능할까? 그런데 가능했다는 거다. 놀라웠다. 

 혹자는 '기억상실증' 이라는 아주 편리한 방법을 썼다고, 트릭이 너무 진부하다고 혹평을 하기도했다. 비판 받았던 대로다. 이 소설은 아주 전형적인 트릭을 쓴다. 하지만 아무리 망가진 붓이라도 오언 장승업의 손에 들어가면 걸작을 그려내듯이, 아무리 전형적이고 진부한 트릭이라도 작가가 어떻게 능수능란하게 플롯을 엮어가느냐에 따라 놀라운 효과를 발휘하게 마련이다. 그러니 진부한 트릭이라는 것은 사실 이 소설에서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뻔한 트릭을 가지고도 무릎을 치게 만드는 플롯의 구성, 그리고 그것을 엮어내는 작가의 역량이 그것을 넘치도록 보완해주고 있기 때문에. 

 미스터리 소설에서 트릭은 중요하다. 아무래도 기발한 트릭은 독자들의 호기심을 자아내고 그 궁금증을 풀기 위해 소설을 끝까지 읽도록 만드는 동력이 된다. 그럼, 미스터리 소설에 있어서 트릭과 플롯은 어떤 관계를 가지는 것일까? 

 '트릭'이라는 것은 데리다가 말한 일종의 PARERGON 같은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PARERGON은 '장식'이란 의미로 데리다에 따르면 '작품'을 의미하는 ERGON에서 보자면 부차적인 것에 불과하다고 한다. (물론, 데리다는 장식을 부수적인 것으로 보는 서열의 매김이 본질 우위에 젖어있던 희랍 철학 이래의 부산물로 극복해야 한다고 하면서 오히려 '장식' 자체에 독자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있지만...)

 그렇게 미스터리 소설에서 만큼은, 트릭은 어디까지나 '장식적인 것'으로 아무래도 탄탄한 플롯이 뒷받침 되지 않는다면 어딘가 밋밋하고 앙꼬 없는 붕어빵 처럼 심심해져 버릴게 분명하다. 물론 내 개인적인 견해이지만. 트릭은 역시, 장식이 그 바탕이 되는 작품과 온전히 조화를 이루어야만 그 빛을 발하는 것처럼, 그렇게 작품의 주요한 뼈대가 되는 플롯과 유기적으로 조화를 이루어야만 진정한 빛을 발할 수 있는 것 같다. 뭐, 이런 내 생각조차 데리다는 유기체적 사고의 독단에 빠져있어서 그런거라고 한 소리 하겠지만서두... 

 물론, 미스터리 소설은 탁월한 트릭이 전부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트릭이 훌륭하면 플롯의 허술함이 어느정도 상쇄된다고 말이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물론 훌륭한 트릭도 중요하다. 하지만 아무리 훌륭한 트릭이라도 플롯의 허술함을 보완해 줄 수 없지않을까 싶다. 아니, 애초에 트릭이 '훌륭함'을 느끼려면 플롯이 탄탄히 바쳐주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 아닐까? 그러니까 진짜 문제는 트릭이 플롯에서 얼마나 적재적소에 있냐는 것이리라. 트릭이 자기 자리를 잘 차지하고 있을 때, 그렇게 장식이 작품에서 온전히 있어야 할 자리에 있을 때, 양쪽 모두가 더욱 더 빛을 발하는 일종의 플레시보 효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제 아무리 진부한 트릭이라도 플롯이 훌륭하면 문제가 되지 않지만 거꾸로라면 아무리 기발한 트릭도 허술한 플롯 탓에 원했던 효과를 독자에게 가져다주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조금은 급작스럽게, 트릭과 플롯의 관계를 말하는 것은 당신이 이 소설을 읽어야 하는 이유를 말하기 위함이다. 당신이 만일 미스터리 소설을 쓰는 것에 관심이 있다면, 아니 창작의 열정은 없다고 하더라도 '내가 왜 미스터리 장르물을 좋아하는가 혹은 매혹되는가?'에 대한 그 이유를 조금이라도 알고 싶다면 당장 이 소설을 읽는 것이 좋다. 

 탁월한 플롯이 얼마나 작품을 놀랍게 만드는지 확인할 수 있는 대표적인 작품이니까! 

 이 작품에 대해서는 단지 이 말을 하는 것 만으로도 충분하다. 

  자프리조의 '신데렐라의 함정' 불어판 표지. 

 하지만 미안하게도 당신은 이 책의 탁월함을 제대로 느끼지 못할 지도 모른다. 

그것은 번역 때문이다. 아시다시피 동서 미스터리 문고는 70년대 발간되었던 그대로 지금 발간되고 있기 때문에 시간적 간격에서 오는 어쩔 수 없는 차이로 인해 어색한 문장들이 많다. 거기다 일본어 중역이기 때문에 우리말 같지 않은 표현들이 이 소설의 매력을 맛보는 데 더욱 더 훼방을 놓는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이 책 후반에 실린 자프리조의 데뷔작이라고 할 수 있는 '살인급행 침대열차'이다. 이 소설 역시 꽤 매력적인 소설이지만 '신데렐라의 함정' 보다 더 번역이 엉망인지라 그 매력을 제대로 발산하지 못하고 있다. 미스터리 소설에서는 특히 번역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현장 상황을 제대로 독자가 알 수 있어야 나름의 범인 추적도 가능해지니까 말이다.  미스터리 소설이 여타 다른 장르 문학과 차별되는 점은 작품 스스로가 독자를 단지 지켜보는 관객이 아니라 마치 같이 경주라도 벌이려는 것 처럼 적극적으로 작품에 참여시키는데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를테면 그것은 벨라스케스가 그림 '시녀들'에서 그 그림을 바라보는 관객의 시선을 상정하고 그렸던 것과 같다. 

 그런데, 번역이 엉망이면 독자는 현장을 제대로 파악하기가 어렵다. 거기다 탐문과 심문으로 이루어지는 이러한 장르의 특성상 엉망인 번역은 독자들에게 그 의미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해 결국 독자를 소설의 흐름에서 소외되도록 만든다. 그래서 결국 미스터리 소설을 쓰면서 작가가 의도한 것과 정반대의 결과를 낳고 만다. 독자가 적극적 참여자가 되기는 커녕 구경꾼 노릇 조차 제대로 못하고 마는 것이다. 이만큼, 미스터리 소설에서 번역은 정말 중요하다. 미스터리 장르를 일종의 스포츠로 인식하고 독자와 공정한 게임을 벌여야 한다고 생각했던 작가 녹스는, 독자와 공정하게 게임하기 위해서 작가가 쓰면서 지켜야 할 10가지 규칙을 마련한 바 있는데, 아무래도 번역을 통해 미스터리 작품을 읽을 수 밖에 없는 우리들은 여기에 한 가지 규칙을 더 집어넣을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즉, '정확하고 올바른 번역이라야 독자와의 공정한 게임을 보장한다'고 말이다. 

  '살인급행 침대열차' 영화판 포스터. 

 이렇게 '살인급행 침대열차'는 영화(1965년작으로 감독은 무려 영화 'Z'로 유명한 코스타 가브라스 이다)까지 만들어질 만큼 평가가 좋았던 작품이지만 지금의 번역으로서는 그 매력을 느끼기가 아주 힘들다. 특히 후반의 범죄자와의 심문 부분은 많은 부분이 엉성해서 범죄자가 어떻게 그리고 무슨 이유로 그러한 범죄를 저질렀는지 도통 알아먹을 수가 없다. 프랑스의 미스터리 소설들은 -조르주 심농이 대표적이지만 - 범죄자들 역시 투철한 개인적 신념을 그린 매력적인 캐릭터로 그려내는 경향이 있어서 캐릭터를 형성하는데 있어서도 꽤 공을 들이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 소설의 범죄자 역시 심농의 그런 경향 속에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역시나 제대로 의미조차 전달하지 못하는 번역 때문에 그 매력이 빛을 많이 잃고 말았다.

 모처럼 플롯의 정점에 있는 미스터리 소설을 만났는데, 번역 때문에 그걸 제대로 느낄 수 없다니 실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제발, 제대로 된 번역으로 다시 발간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이 리뷰는 그것을 호소하는 심정으로 쓰여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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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을 위로해줘
은희경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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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원히 잃어버린 '소년' 시절

 은희경의 소설 '소년을 위로해줘'를 새해 처음으로 읽었다.
몰랐는데, 5년만의 신작이라고 한다. 벌써 5년이라니? 어느새 또 그렇게 세월이 흘렀나 보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한 해를 넘겼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내가 서 있던 그 날로부터 조금씩 멀어지고 있다'라는 소설에 나오는 G-그리핀의 노래 가사 처럼 난 또 그만큼 소년에서 멀어지고 있구나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러자 문득 떠오르는 이미지... 
 혹시 린타로가 감독한 ’은하철도999’ 극장판을 본 적이 있는지?
 본 적이 있다면 그 영화 마지막 장면을 기억하는지?  마지막은 이렇다.
 어쩔 수 없이 메텔과 헤어져야만 하는 철이는 이윽고 메텔이 탄 기차가 점점 멀어지자 마구 따라 뛰어간다. 애타게 메텔의 이름을 부르며... 두 눈 가득 눈물을 흘리면서... 하지만 아무리 애타게 불러도, 절규하듯 소리쳐도 메텔은 돌아오지 않는다. 그저 우주 저 편으로 사라지는 기차의 이별을 통보하는 듯한 비정한 기적소리 뿐...  

 가버린다.... 그렇게 사라진다.... 영원히... 

  
 그 장면을 보고 있으면 왠지 마음 속에 그런 느낌이 가득찬다. 영원한 상실감... 그래서 혹시 감독인 린 타로 자신도 이 '철이'처럼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소년 시절에 대해서 울부짖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여기서 말이지만, 린 타로의 '은하철도 999'의 극장판은 어린 시절 그 만화를 보면서 우주의 동경을 꿈꾸던, 이제는 어른이 되어 버린 그 시절의 소년들을 위해 만들어졌다. 그 시절 열광했었던 만화를 보면서 다시 한 번 그 시절의 기분을 맛볼수 있도록 해주기 위해서 말이다. 그렇게 ’메텔’은 우리가 소년시절에 한번쯤 꿈꾸어봄직 했던 이상화된 첫사랑의 ’연인’으로 ’은하철도 999’는 '소년'으로서 가질 수 있는 다양한 가능성들이 모험으로 나타나 주었던 그 시절의 ’낭만’ 으로 체화된다. 그 시절 소년이었던 우리들이 어떤 것들을 느꼈는지 새삼 깨닫게 만든다.

 하지만 그것은 이제 우주 저편으로 가버렸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소설 속 '태수'처럼...
그 때문일까?
실은 나도 메텔을 애타게 부르며 울면서 달리는 철이의 모습과 저 먼 우주 속으로 가느다란 실이 되어 끝끝내 사라지는 은하철도 999를 보면서 울었던 것 같다.
 이제 우리의 소년 시절은 완전히 끝났어... 하면서... 이건 진짜다.


 때문에 나는 솔직히 이 소설 읽기가 아주 힘들었다.
여기엔 이제 내게는 다시 오지 않을 그 소년 시절이 활짝 펼쳐져 있기 때문이다.
내게는 영원히 허락되지 않을 시간들을 온전히 소유하고 있다는 자체만으로도 그건 부러움의 대상이 된다. 그래서 연우가 아무리 힘들어도 태수가 아무리 방황해도 채영이 아무리 고독해도... 내게 느껴지는 건, 감정에 이입되기 보다는 때로는 질투심으로 까지 변질되곤 하는 부러움이 만들어 낸 거리감이었다. 딱 김종삼 시에 나오는 화려한 크리스마스 카드를 받아 든 아주 가난한 아이 같았다. 영원히 닿을 수 없는 아름다움 덕분에 자신의 초라함만 더욱 더 강조되는...  
게다가 위로를 바란다는 연우는 내가 보기에 정말 멋진 엄마에 듬직하고 의리있는 친구에 거기다 매력적인 연인까지... 소년 시절의 우리들이 한번쯤 꿈꾸어보곤 했을 그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기까지 했으니, 정작 소년시절 그 무엇하나 가져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오히려 거꾸로 내가 연우에게 위로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2. 대체, 누가 누구를 위로해줘야 하나?

 도대체 누가 누구를 위로해줘야 하나?
 나는 완전히 폼 좀 잡으려다 무리해서는 결국 마라톤을 포기하고 '회수버스'에 실려오면서 차창 밖으로 열심히 완주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치욕의 쓰라림을 느끼고 있는 재욱 딱 그 꼴인데 말이다. 그 때의 재욱처럼 그렇게 나 역시 완주를 해낸 연우에게 오히려 위로를 구걸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래서 여기서 부턴, 채영의 아버지처럼 나에게 맞지 않는 옷을 이미 입어버린 그리고 길들여져 벗기도 힘이드는 우리 세대의 하소연을 좀 하려고 한다.

 17살... 소설속 연우의 나이... 부끄럽지만 내겐 그 때의 추억이 별로 없다.
억지로 떠올려봐도 나타나는 건 그저 새벽별 보기 운동이라도 하듯 학교로 가고 다시 그 학교에서 학원으로 그리고 별도 없는 어둔 밤, 가로등 불빛을 축쳐진 어깨로 힘없이 받으며 귀가하는 그런 다람쥐 쳇바퀴 도는 일상만 그득할 뿐이다. 가슴 설레는 '풋풋한 첫사랑'은 커녕 사진첩에 끼워두고 이따금 펼쳐보며 흐뭇해질 수 있는 추억 조차 변변찮다. 일본 영화에서 흔히 가장 눈부신 '여름'으로도 표현되곤 하는 십대 후반의 청춘이란 게 가질 수 있는 낭만은 그저 영화나 만화에 나오는 이야기일 뿐이고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불확실한 미래에 모든 것을 걸고 엎드리면 내 상반신 하나도 감당하지 못하는 작은 책상에 붙박히는 것 뿐이었다.
 물론 이탈과 탈주의 유혹과 욕구는 언제든 있었으나, 평범한 가정에 평범한 성격으로 태어난 죄로 그마저도 상상적으로 충족할 뿐, 부모와 선생님으로 그렇게 이중으로 둘러싼, 넘어야 할 울타리의 벽은 언제나 높았다.
 용기가 없었다고 말을 할 수도 있겠으나, 우리 자신의 말이 아니라 어른들의 말을 읽고 입안에 머금고 채 되새기도 전에 서둘러 뇌리속에 새겨야 했던 우리들이 할 수 있었던게 뭐가 있었을까? 그렇게 뇌리에 새겨진 그 말들을 우리 자신의 말인양 착각하고 읊조리던 우리들이 그런 용기를 만들어내는 건 애당초 불가능했다.
 우리에 오래도록 갇히면 우리 자체가 온전한 세계가 된다.
 연우는 스스로를 '도화선이 없는 폭발물'이라고 불렀지만, 우리는 아예 불발탄이었다.
 그렇게 우리들은 핑크 플로이드의 영화 'THE WALL'에 나오는 것처럼,
하나의 벽돌이 되어 들어갈 자리에 딱 알맞게 들어가 하나의 벽이 되는 게 전부였었다.
그렇게 재욱이 말했던 안전한 시스템의 일부가 되어 어른들이 먹기 좋은 소시지가 되는 것... 그게 흔히 '모범생'이라는 태그가 붙어지던 아이들이 가질 수 있는 가능성의 전부였다.
 그렇게 연우가 G-그리핀의 말이지만 어쨌든 그래도 자신의 말로, 관계로, 형형색색의 계절의 색깔로 채워가던 그 시기는, 다른 가능성이 있다고는 전혀 생각할 수도 없었던 우리들에게는 그저 커다란 공백에 불과했다.
 그러니, 정작 위로를 받아야 할 사람은 누구일까?

 때문에 나는 소설 속 '마리'에게 더욱 더 연민을 느끼게 된다.
 '모범생'의 태그를 붙인, 좋아하는 연우와 이어지지도 못하고(그녀가 할 수 있었던 게 그저 우는 것 밖에는 없었다는 사실이 얼마나 애처롭던지.) 사실은 자신의 정답만 강요할 뿐인 엄마의 기대에 맞춰 살아야 하고 이제는 어쩌면 유일한 의지처였을 수도 있는 오빠 태수 마저 잃어버린 마리에게 내가 할 수 있다면 가능한 한 커다란 위로를 보내고 싶다. 하지만 오빠를 잃고 난 후의 마리는 지나가는 이야기로도 나오지 않으니, 어깨라도 토닥이려 들어올린 손을 어떻게 내려야 할 지 난처할 뿐이다.

 물론 작가가 이 소설에서 무슨 말을 하려는지는 이해가 간다. 자의든 타의든 시스템 바깥으로 밀려난 사람들이 겪어야 할 고독과 아픔들은 충분히 공감할 만하며 나 역시 연우와 채영 그리고 엄마 신민아와 재욱에게 응원을 보내고 싶어진다. 하지만 사물엔 언제나 동전의 양면이 있듯이 위로 또한 시스템 바깥 뿐만이 아니라 그 내부에 있는 자들에게도 똑같이 필요한 게 아닐까? 다행히 작가는 채영의 아버지와 마리의 속내를 밝혀 그 내부의 자들에게 까지 배려해 놓았다. 그게 아니었다면 이 소설은 내게 온전히 질투의 산물이 될 뻔 했으리라.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 '가지 않은 길'처럼 인생은 언제나 선택의 연속이다. 하지만 한 번 선택해서 간 길을 다시 되돌아 와 다시 시작하는 것은 그리 녹록치가 않다. 그렇게 한 번 잘못된 선택으로 자신에게 맞지 않은 옷을 입게 되면 다시 제대로 된 옷을 입기 위해 벗는 건 그다지 수월하지 않다. 그래서 주저하게 되고 결국은 틀린 것을 알면서도 길들여지게 된다. 인간의 의지는 생각보다 강하지 않고 일상의 힘은 생각보다 약하지 않기 때문에...

  그리고 맞지 않는 옷은 누구보다도 입고 있는 스스로가 가장 잘 알게 되는 일이다. 누군가 일부러 일러주지 않아도 자기에게 맞지 않는 옷을 억지로 입고 있다는 건 절절히 느낀다. 어쩌면 시스템 바깥에 있는 사람들은 내부에 있는 사람들 보다 더 나을지 모른다. 무엇보다 그건 자기의 의지로 선택한 것이기 때문이다. 연우도 연우의 엄마도 태수도 채영도... 물론 시스템으로 부터 이탈되기는 했지만 그건 그저 계기였을 뿐, 바깥에 머무르는 건 모두 그들 자신의 의지였다. 그들 중 아무도 시스템에 적응하려 애쓰지 않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연우의 엄마는 말할 것도 없고, 연우의 '심드렁'이 그렇고 태수가 '영어를 섞어 쓰는 것'이 그렇다. 채영은 일부러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재욱은 남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힙합 무대를 일부러 찾아 다닌다.

 하지만 시스템 내부에 머무르는 자들의 경우, 그들에겐 애초부터 선택이란 게 있지 않았다. 마리의 말에서 단적으로 드러나듯이.

  - 음... 꼭 선생님 지시만 기다리는 착실한 반장 같아요. 그런 애들, 자기 생각은 거의 없거든요. 정해진 정답만 열심히 찾아요. 저희 엄마도 그래서 안 행복한 거 같아요.(P. 416) 
 
그리고 채영의 아버지 고백...

 -나는 어떤 집단 속에 있으면 무조건 먼저 유리한 자리를 차지해야 한다는 강박부터 생깁니다.... 나한테는 생존방식이랄까요, 그렇게 안 하면 불안해요. 농촌 가난한 집의 우수한 장남, 이런 얘기 좀 상투적이긴 합니다만 그게 어쩔 수 없이 납니다....하지만 어떡합니까. 어릴 때 부터 입어온 옷이 이미 피부나 마찬가지가 돼어버린 걸. 다른 옷을 입어 볼 여유가 없었던 사람에게는 말입니다. 그 옷이 살을 파고들어 흉터가 되었다고나 할까요.(P. 439)

 이 두 사람의 말에서 보여지듯 이들에겐 자신의 의지가 개입할 여지가 아예 없었다. 그들의 가능성의 영역은 외부로 부터 이미 결정되어 있었고 그들은 어쩔 수 없이 남이 입혀주는 옷을 억지로 입어야 했던 것이다. 자의라면 그나마 덜 했을텐데, 타의로 억지로 입어졌다면 그 아픔이 얼마나 더 컸을 것인가! 그 타의로 입혀진 옷을 입고  "내가 싫어하는 인간으로 늙어가는 나를 보는" 끔찍한 기분으로 살아가던 채영의 아버지는 연우 엄마의 어쩌면 그저 지나가는 말에 불과했을지도 모를 한 마디에 그만 누구에게도 드러낼 수 없었던 흉중의 말을 쏟아내게 된다.
그 만큼 그 사람에게는 그냥 그런 정도의 말이라도 충분할 만큼, 진심어린 어떤 자그마한 위로라도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니, 위로는 누구에게나 필요하다. 그 사람이 어디에 있건 상관없이...
외부에 있는 사람들은 외부에 있는대로, 내부에 있는 사람들은 내부에 있는대로,
각 자만의 삶의 무게와 그 짓눌림에서 오는 아픔을 감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쩌면 제목인 '소년을 위로해줘'의 소년은 '연우'만을 말하고 있는 게 아닌지도 모른다. 그 소년은 어쩌면 나를 비롯하여 아직 날아오를 수 있는 자신의 날개를 가지지 못한,  어른이나 아이 할 것 없이 모든 방황하는 사람들을 가라키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작가는 재욱의 에세이의 결말을 일부러 이렇게 맺은 것이 아닐까?

 "우리 모두는 궁극적으로 우주의 어린 아들, 즉 소년들이다. 서로 위로해주자."(p.389)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렇게 우리는 그가 어디에 서 있든 그냥 그대로 인정하고 위로해주자,
태수가 말했듯, 아픔은 겪는 각자에겐 다 그 무게가 있으니 그 원인이나 크기는 상관말고.
그냥 위로해주자.


 3. 결여의 존재들 그리고 위로

 그건 우리가 잘 나서도 더많이 가져서도 아닌, 우리 모두가 '결여'의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제목도 그렇고
 재욱이 굳이 우리를 '소년들'로 지칭했던 것은 바로 이것을 또한 드러내기 위해서인 것 같다. 
그러니까 여기서 '소년'이란 말은 또 하나의 의미를 가지는데, 그건 날개를 가지지 못한 '결여의 존재'라는 것이다. 소설에서 비행기, 공항, 우주정거장 등등 그토록 비상과 비행에 관련된 말들이 많이 나오는 것은 아마도 그것을 나타내기 위해서였으리라. 거기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 역시도 '결여의 존재'라 할 수 있다. 연우의 가정에 아버지가 없다는 게 가장 대표적이다. 마찬가지로 연우와 채영 그리고 마리, 마리의 엄마가 자신들을 이어주는 태수를 잃는 것도 그렇다.  태수 역시도 과거 미국에서 누군가를 잃은 경험이 있으며 연우 엄마와 재우는 소설의 후반까지 내내 아슬아슬한 관계를 이어간다. 그리고 채영의 아버지와 엄마는 여전히 냉랭한 관계로 남는다. 이렇게 등장인물 모두에게서 공히 나타나는 '존재론적 결여'는 우리가 위로를 해야하는 단 하나의 이유가 된다.  우리는 모두 무언가를 상실한 그래서 부족한 존재들이기 때문에 타인에 대한 의지는 필연적이다. 그러니까 존재 자체가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다. 모든 존재 자체가 일으켜 세워 달라는 작은 아이가 내미는 손이 된다. 거기엔 나도 포함된다. 내 존재 자체도 누군가에게 내미는 작은 아이의 손이 된다. 때문에 누군가 내 손을 잡아주길 원한다면 나 역시 누군가의 손을 잡아주어야 한다. 이렇게 서로는 서로의 손을 잡고 부족한 결여들을 메워가면서 일어나야 한다. 이렇게 '존재론적 결여'는 잡아주는 손길, 즉 위로가 상대와 처지와 이유에 상관없이 마땅히 해야 하는 당위로 되어야 하는 것까지 요청한다.
 이러한 결여된 존재로서의 조건이 위로를 당위적으로 요청하는 것은 소설에서 연우 엄마가 자기가 가장 행복한 꿈이라고 생각한 꿈을 꾸고 난 후에 한 고백에서 잘 드러난다.

  깨어난 뒤에도 한참 동안 그대로 누워 있었어. 짧았고 조용했고 피할 수 없는 것, 결코 지속될 수 없는 것, 사라져버리는 어떤 찰나를 향해 가는 기분이 들어. 유한한 존재들을 스쳐가는 짧고 날카로운 빛... 그런걸까. 무력한 어린 존재가 그보다 조금도 나을 것 없는 무력하고 철없는 젋은 엄마에게 모든 빛은 내쏘며 전 존재를 의지하는 것. 그것을 바라보는 한없이 초라하고 피곤한 젊은 엄마의 가슴 뜨거운 찰나 같은 것. 연우야 생각해 봐. 눈물을 흘리며 내가 너에게로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가고 있는 거야. 응. 너무 행복했어. (P. 404)

 나에게 있어 소설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부분이기도 한 이 독백은 그야말로 우리가 왜 서로에게 위로를 필요로 하고 위로를 해야 하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된다.
연우 엄마의 고백 처럼 우리는 모두 서로에게 전 존재를 의지하는 가련한 소년들이다. 그건 당신이 어디에 있어서건 상관없이 무슨 일을 하건 상관없이 그냥 존재 자체가 그런 것이다. 그렇게 우리 모두는 무겁디 무거운 삶의 중력을 등에 지고 버텨야 하는 고독한 '아틀라스'들이다. 무거운 짐을 들고 힘겹게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는 할머니의 모습 자체가 우리의 도움을 구하는 무언의 호소이듯이 날개를 잃어버린 채 내리누르는 중력으로 버거워하는 우리 '소년'들의 존재 자체가 마땅히 위로를 받아야 할 권리도 그리고 아낌없이 위로를 건네야 할 의무도 역시 갖도록 만드는 것이다.

 '소년을 위로해줘'를 읽으며 난 이제는 다시 오지 않을 소년시절을 떠 올렸고 그 상실감에 소설 속의 연우를 질투하기도 했다. 거기다 커다란 공백으로 남아있는 내 17살.  그래서 소설 속 연우의 여정은 그의 아픔과는 별도로 나 역시 '예쁜 크리스마스 카드를 바라보는 가난한 아이'처럼 괴로움의 과정이었다. 그나마 마리의 얘기가 없었다면 그나마 재우의 넋두리와 채영 아버지의 속내가 없었다면 끝까지 읽기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읽으면서 왠지 어느결에  바로 앞에서 길게 인용한 연우 엄마의 말처럼 이 소설을 읽고 있는 모든 소년에게 진심을 담아 보내는 위로가 느껴졌다. 사실 그 대부분은 연우 엄마, 신민아에게서 온 것이지만...   
그러고 보니 왜 연우는 엄마라 부르지 않고 고집스럽게 신민아라고 부르는 것일까?   엄마라는 영역에서가 아니라 신민아라는 별개의 단독자로서 위로를 건넨다는 그런 의미일까? 하긴, 엄마라서 위로를 한다면 그건 위로에 조건을 부가하는 것이 될 것이다. '위로가 전 존재적 호소이자 응답'이라는 소설의 주제에서 보자면 끝까지 신민아로 남는 게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그녀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는 경구처럼 주옥같기도 했지만 공백으로 허전한 내 마음을 다독여주는 손길이기도 했다. 그래서 배는 아팠지만 소설 속에 나오는 그 누구라도 하다못해 퍼즐카페의 주인 아저씨까지 응원하고 싶어졌다.
 진심으로 응원하고 싶은 마리의 뒷 얘기를 읽지 못하는 것은 그지없이 아쉬웠지만, 그래도 모두들 마지막의 연우와 채영 처럼 봄눈을 맞으며 '돌아오지 못할 것들은 그만 보내주고(이건 나에게 하는 말 같다.) 다른 별에 온 것' 처럼 새로운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기를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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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키스 레인코트
로버트 크레이스 지음, 전행선 옮김 / 노블마인 / 2009년 8월
평점 :
절판


 로버트 크레이스의 1987년도 데뷔작 '몽키스 레인코트'를 읽었다.
 

 공간적 배경은 LA.
 레이먼드 챈들러와 제임스 엘로이가 사랑했던 그 곳.
 왜 사립탐정들은 죄다 서부에 거주하는 걸까?

 더쉴 해미트의 샘 스페이드 조차 샌프란시스코이니...
 어쩌면 누군가(자크 카보)가 말했던 그대로,
 정말 사립탐정 장르는 서부 개척시대를 배경으로 삼았던 웨스턴 장르 소설의 직계비속인지도 모르겠다. 

 시간적 배경은 1980년대의 미국. 

 때는 점차 레이거노믹스의 거품이 빠져가기 시작하고
 서서히 만성적 재정적자와 내수 불황으로 인한 경제적 공황이 사람들을 덮쳐오던 무렵이다.
 탄탄해 보이던 삶이 갑작스레 나락으로 추락하기 시작하고 

 여기저기 사람들이 심리적 공황을 느껴가던 그 시절.
 어쩐지 레이먼드 챈들러의 필립 말로우가 등장하던 무렵의 시대적 상황과 비슷하다.
 그러면, 이렇게 어려운 시절들이 그렇게 사립탐정을 부르는 것일까?
 시대와 타협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만의 '모럴'을 우직하게 밀고나가는 그런 영웅들을...
 과연, 블랙 먼데이가 일어났던 1987년은 또 하나의 사립탐정을 호출(CALL)한다.

 그의 이름은 엘비스 콜(COLE)!

 로버트 크레이스는 책을 펼치자마자 나오는 하이쿠를 통해
 엘비스 콜이 어떤 식으로 의미를 가지는지 분명히 보여준다.
 
  초겨울 찬비
  원숭이도 도롱이를 쓰고 싶은 듯...

 초겨울의 찬비 같은 한파가 몰려오는 1980년대의 사람들에게
 크레이스는 엘비스 콜이 그들을 조금은 따스하게 덮어줄 수 있는 위안이 되었으면 하는 것이다.
 소설에 등장하는 모트, 엘런 랭은 모두 초겨울 찬비를 맞고 있는 사람들이다.
 엘비스 콜은 의뢰에 따라 수사를 하지만 정작 그를 움직이는 것은 돈도 아니고 정의감도 아니며
 진실에 대한 추구도 아니다.
 엘비스 콜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일종의 연민이다.
 118 페이지의 아이의 말을 통해 듣는 밤에 홀로 자신의 사진첩을 보면서 우는 모트의 모습은
 묘하게 가슴을 울리는 장면이다. 엘비스 콜도 늘 그 생각을 한다.
 그렇게 우는 모습을 들킨 아이에게 자신의 사진들을 보여주면서 '이게 다 무슨 사진인지 하나도 모르겠구나"
 하고 말하던 그의 모습을... 그렇게 자신의 잃어버린 삶을 바라보며 울고 있을 모트의 모습을... 
 그리고 그는 나즈막히 읊조린다.

 "토토, 여기는 더이상 캔자스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p. 167)"
( 이 소설에서 최고의 문장을 뽑으라면 이걸 뽑겠다.)
 
 예전에 무라카미 하루키는, 자신은 챈들러 소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하면서
 자기 소설의 구도는 결국 챈들러의 소설처럼, 어떤 것을 추적하지만 결국 밝혀낸 것은
 그것이 변질되고 말았다는 확인 뿐이라는 것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말 한 바 있다.
 이건 정말 레이먼드 챈들러와 역시 그의 영향을 많이 받은 로스 맥도널드로
 계승되는 사립탐정 소설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을 잘 요약해 주고 있다고 보여진다. 


 결국 사립탐정의 '수사'란 '진실의 획득'이 아니라 '변화의 관찰'일 뿐이다.
 그것이 바로 소설 내내 단서와 탐문이 이어지는 주된 이유이기도 하다.
 크레이스의 엘비스 콜 또한 여기저기 흩어진 단서를 쫓고 탐문을 하다가
 결국 남부러울 것 없었던 모트와 엘런 랭이 어쩌다 이렇게까지
 벼랑끝으로 내몰리게 되었나 그 변화를 목도하게 된다.

하지만 크레이스는 그것만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비록 그가 레이먼드 챈들러의 적자이긴 하지만(사실 이 소설에서 모트와 엘런 랭의 고향이
캔자스로 설정된 것은 그가 가장 처음 읽었고 감명받았다고 하는 챈들러의 '리틀 시스터'의 오마쥬임이 분명하다.) 

그는 엘비스 콜을 그냥 거리를 두는 관찰자로 남겨두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는 엘비스 콜이 자신이 느끼는 연민을 통해 뭔가 하기를 원한다.
말 그대로 진짜 위안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몽키스 레인코트'가 되기를...
 
때문에 크레이스는 엘비스 콜을 감성이 풍부한,
시종일관 타인에게 시시껄렁한 간섭일지라도 하지 못하고는 못배기는
뭐랄까 인간적인 면모? 그런 것을 많이 부여하고 있다.
아마도 챈들러의 필립 말로우가 험프리 보가트 특유의 '포커 페이스'가 잘 어울린다면
크레이스의 엘비스 콜은 표지에 나온 그대로 엄지를 치켜들고 짓는 익살스런 표정이
잘 어울리는 탐정이라 하겠다.

크레이스의 이 데뷔작은 비록 챈들러의 아우라가 많이 느껴지긴 하지만
자신이 가고자 하는 길이 어디인지 알고 있고 또 그곳을 향해 뚝심있게 걸어가고
있음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한 번쯤 읽고 그의 걸음에 동참해 볼만한 좋고 재미있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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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주쿠 상어 - 사메지마 형사 시리즈 01 뫼비우스 서재
오사와 아리마사 지음, 김성기 옮김 / 노블마인 / 2009년 7월
평점 :
절판



오사와 아리마사의 ‘신주쿠 상어’를 읽었다.

사실은 두 번째 읽는 것이다. 처음 읽었던 것은 꽤 오래전인데, 그 때는 제목이 ‘소돔의 성자’로
나온 판본이었다. 지금은 벌써 절판되었지만...
그 때 읽었을 때도 워낙 재미가 있어서 단숨에 읽었던 것 같다.
특히나 기억에 남는 것은 총기류에 관한 자세한 서술.
이 책을 통해 산탄총 같은 것을 한 번 꺾었다 펴서 재장전하는 것을 ‘볼트액션’이라 한다는 것도 알았다. 

그 뒤로 잊고 있었는데, 훨씬 나중에 주간문춘에서 20세기 일본 최고의 미스터리 베스트 30을 선정하였다. 그런데 바로 이 작품과 바로 뒤이어 이어지는 제2작인 ‘독원숭이’가 그것도 나란히 13위와 14위에 랭크(독원숭이가 13위 소돔의 성자가 14위)되어 있는 걸 보고 ‘호오, 이게 그정도로 굉장한 작품이었나.’하고 놀랬더랬다.
벌써 오래전에 읽은지라 기억은 가물가물하고 그래서 정말 제대로 다시 한 번 읽어봐야겠다고 마음먹었는데 책은 이미 절판된지 오래. 구하기도 어려워 재회는 포기하고 있었는데,
고맙게도 ‘노블마인’에서 다시 발간해 주었다.

이번에도 역시나 거의 ‘들이키는’ 수준으로 책을 읽어버렸다.

그만큼, 이 책은 정말 재미가 있다.
대중성이라는 잣대를 ‘재미’로 놓고만 본다면 아마도 ‘high level’에 속하지 않을까 싶다.
‘신주쿠 상어’는 장르로서는 레이먼드 챈들러 식의 ‘사립탐정’물에 넣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주인공 사에지마는 형사지만, 파트너도 없이 상관의 명령도 없이, 완전히 독고다이로 수사하는데 이건 ‘사립탐정’과 별로 다를 바 없지 않은가!
근데, 이 사에지마는 그보다 더 독특한 캐릭터라 할 수 있다.
‘춤추는 대수사선’을 보면 일본 경찰에게 있어 캐리어와 논캐리어의 차이가 얼마나 커다란지 잘 알 수 있다. 사에지마는 캐리어이다. 직책도 간부인 ‘경감’.
하지만 과거의 어떤 일로 인해 그는 영락했고 지금 그의 존재는 일선 형사와 별로 다를 게 없다.(캐리어 출신이 과연 이럴수도 있나 싶을 정도로.)
부릴 수 있는 부하가 없는 것도 모자라서 아예 그가 있는 방범과에서는 ‘왕따’나 마찬가지다. 
 

   
            -  BGM : STAY HERE! PERFORMANCE BY WHO’S HONEY -

                                       -  VOCAL : SHAW  -

                                     
캐리어이자 형사임에도 불구하고, 사립탐정이 오로지 홀로 맞부딪혀야 하는 것처럼 그도 그렇다.
그렇게 그가 홀로 부딪혀야 하는 것은 바로 그가 맡은 구역 ‘신주쿠’다.
이 '신주쿠'가 어떠한 곳인가는 이 소설의 원제인 ‘소돔의 성자’라는 것에도 잘 나타나 있다.
제목의 ‘소돔’이 바로 이 신주쿠인 것이다.
‘신주쿠 상어’의 가장 큰 장점은 아주 리얼한 묘사에 있다고 보여진다.
소설 속에서 신주쿠가 어찌나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는지 마치 손에 잡힐 듯 하다.
그 생생한 현장감으로 우리가 목도하게 되는 신주쿠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그건 소설 속, 주인공의 애인인 쇼의 노래 가사와 같다고 보여진다.

   Get Away, 다들 말하지 얼른 떠나는게 좋다고

   여기는 거리의 밑바닥 밤마다 밤마다 울부짓는 소리 

   Get Away, 다들 말하지. 얼른 떠나는 게 좋다고

   여기는 거리의 밑바닥 오늘도 내일도 비탄에 잠겨드네. (P.49)


소설이 시작되는 남자들간의 동성애가 주로 이루어지는 ‘사우나’는
바로 이러한 소돔으로서의 신주쿠가 가지는 특성에 있어 일종의 상징적인 공간이라 할 만하다.
아리마사는 절묘하게도 바로 여기에 뒤이어 사에지마가 어떻게 해서 캐리어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오늘과 같은 존재가 되었는지 보여주는데, 이는 사우나와 경찰 조직 모두가 오로지 남자들만으로 이루어진 세계라는 공통점에서 볼 때, 이건 두 세계 모두, 누군가를 약자로 찍어 가차없이 폭력을 가하는 것은 똑같다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마치 이것을 강조하기라도 하듯, 초반 사우나에서 폭력을 휘둘렀던 이는 결국 경찰로 밝혀진다. 

이렇게 아리마사는, 동성애가 이루어지는 '사우나'라는 질서 밖의 세계와 '경찰'이라는 질서를 부여하고 유지하는 세계가 결국은 똑같은 모습이며 이 두 개의 세계가 어우러져 형성하는 '신주쿠'라는 공간 역시 폭력과 약자를 린치하는 짐승들의 '소돔'이라는 것을 설득력있게 형상화한다. 

따라서 홀로 정의를 관철하는 우리의 사에지마가 왜 그가 속한 경찰 조직에서조차 왜 홀로가 될 수 밖에 없는지 잘 알게 된다.  

죄악으로 소돔이 되어버린 신주쿠나 그것으로부터 시민을 보호하고 질서를 부여해야할 경찰이나
아리마사에겐 모두 똑 같은 죄악에 물들어버린 존재이니, 어떻게 경찰이 신주쿠의 폭력으로 부터 시민들을 보호한단 말인가? 따라서 아리마사는 사에지마를 철저히 버려지고 홀로인 존재로 만들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이 소설의 기묘한 점이 있다. 그건 시점이 둘로 분산된다는 것이다.               
하나는 사에지마를 중심으로 하지만 다른 하나의 시점이 또 존재한다. 그건 형사를 동경하는 일종의 오타쿠 같은 자의 시선이다. 하지만 그는 끝까지 사건에는 참여하지 않고 늘 '폴리스 라인'의 바깥에서 관찰만하고 사에지마가 보여주는 행동들을 모방하면서 그 흉내를 통해 대리만족을 느낄 뿐이다. 이 모든 것은 혹 작가의 자전적 경험이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꽤 세밀하게 묘사되고 있는데, 왜 하필 이 시점을 소설 속에 등장시켰는지 지금까지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어쩌면 이 시선은 지금 이 소설을 읽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을 희화한 것은 아닐까?   
‘폴리스라인’이 의미하는 것처럼 그렇게 독자가 체험하는 간접 경험과 실제의 현실은
얼마나 괴리가 있는 것일까를 보여주기 위한... 
아니면 본격추리물에 흔히 등장하곤 하는 안락탐정식의 수사물을 엿먹이기 위해서였을까? 

아무튼 잘 알 수가 없다. 그렇다고 두 개로 분산된 시점의 모호성이 주제까지 모호하게 만들지는 않는다. 소설 '신주쿠 상어'의 주제는 그런 것에는 꿈쩍도 안 할 정도로 너무나 명확하다. 그리고 그건 바로 '쇼'가 속해있는 밴드 '후즈허니'의 노래 제목에 아주 잘 나타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STAY HERE!’  

한 마디로, 포기하지 말고, 떠나려 하지 말고, 있는 그 자리에서 맞써서 싸우라는 것!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Stay Here' 마지막 가사가 소설이 끝날 때까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미완으로 남겨진 '말줄임표'는 혹 작가 아리마사가 그래도 이 세상에 어떤 희망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결론을 유보하고 있어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과연 그가 정말 어떻게 세상을 보고 있는지는 아마도 후속편, '독원숭이'에 나타나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이유로, '독원숭이'가 너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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