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8, 우연히 데이브 거니 시리즈 1
존 버든 지음, 이진 옮김 / 비채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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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lose Encounters of the Third Kinds! 

 존 버든의 데뷔작 '658, 우연히'를 읽고 났을 때 처음 떠올랐던 것은 이것이었다. 흔히 외계인과의 접촉을 일컫는,  '제3종과의 근접 조우'. 절대적으로 만나지 못할 이종(異種)과의 만남이기도 한 이 말만큼 이 작품이 이루어낸 성취에 걸맞는 말은 없다고 여겨졌다. 그는 정말 흔치않은 일을 해냈다. 고전 미스터리와 노르딕 느와르(NORDIC NOIR)적 세계를 그야말로 하나로 융합시킨 것이다. 사실 그 둘을 모두 즐겨온 팬으로서 자신있게 말하는 바이지만, 이 둘은 절대 만나지 않는 영원한 평행선 같은 존재였다. 고전 미스터리 장르에서는 노르딕 느와르가 보여주는 인간의 삶에 대한 깊이있고도 진지한 시선을 찾기가 사실은 어렵다. 그건 셜록이든 파일로 밴스이든 엘큘 포와로이든 다 마찬가지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삶에 대한 이해의 시선이 아니라 범죄로 인해 드러난 부르조아 세계의 결함을 제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노르딕 느와르도 마찬가지다. 해닝 만켈이든 아날두르 인드리라손이든 이들에게 미스터리 해결의 쾌감을 기대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들이 더욱 천착하는 것은 그 미스터리가 궁극적으로 지우고 싶어하는 사회의 얼룩을 절대 지우지 못할 것으로 만들어 만천하에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고전 미스터리와 노르딕 느와르는 물과 기름처럼 절대로 섞일 수 없는 것이었다.  그것은 삶에 대한 시각의 차이 때문이기도 했고 작가 자신이 서 있는 입장의 차이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독자들로서는, 그것도 양 쪽 모두를 좋아하는 독자들이라면 아무래도 이 사실 만큼 아쉬운 것도 없었다. 양적으로도 하나 보다는 둘이 나을 것이지만 질적으로도 이 둘이 완벽한 조화를 이룬다면 그 독서의 쾌감은 더욱 클 것이 분명하니까 말이다. 그러다 스티그 라르손이 그에 가까운 조화를 보여주었다. 파시즘을 그 근저에서 부터 거부하려는 라르손은 그의 주제의식에 걸맞은 미스터리로 그야말로 성공적으로 노르딕 느와르의 시각과 조화시켰다. 하지만 미처 거기에 환호하기도 전에 라르손은 불과 세 편의 작품만 남기고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고 그 '완성된 조화'를 보고싶은 열망 아닌 열망은 미처 꽃피우지도 못한 채 내내 지연되고 있었다. 

  그러다, 마치 루크레티우스의 빗방울 처럼 이 작가 존 버든이 나타났다. '658, 우연히'란 제목 그대로 문득 이마 위로 차디찬 빗방울을 느끼는 것 처럼 우연히 말이다. 

  존 버든의 이 소설은 하나의 접점이다. 리만 기하학과 같다고나 할까... 영원한 평행선일 것 같았던 고전 미스터리와 노르딕 느와르가 그야말로 한 점에서 감격적으로 포옹한 것과 마찬가지이니까 말이다. 스칸디나비아 반도와는 전혀 상관도 없는 뉴욕 출신의 미국 작가가 그것도 데뷔작으로 이런 성취를 이루어내다니 그저 경이로울 뿐이다. 이건 호들갑일 수도 있다. 좋다. 이왕 이렇게 호들갑을 떨게 된 것 더 떨어볼까. 나는 '658, 우연히'를 이 여름에 읽은 미스터리중 기꺼이 베스트 3의 하나로 꼽겠다. 

  작품에 대한 개인적인 감상은 이정도로 하고 이제 존 버든이 성취한 지점의 그 내막 속으로 한 번 들어가볼까 한다.  

 

 

 주인공 거니는 은퇴한 전직 형사다. 그렇다고 그가 나이가 많은 것은 아니다. 사실 그는 한창 일할 나이에 스스로 은퇴한 것이다. 그렇다고 형사로서 그가 문제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사실 그는 연쇄살인마를 몇 명이나 검거한 아주 유능하고 유명한 형사였다. 그런 그가 아내를 위해 뉴욕에서 벗어나 시골에서 조용하고 소박한 전원생활을 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하지만 전적으로 아내만을 위해서는 아니었다. 그러니까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가 형사일에 너무 열중한 나머지 그만 자신의 아들을 사고로 잃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그는 그 사고를 자기 탓으로 여겼고 은퇴하고 아내가 원하는 대로 전원생활을 하는 것을 일종의 속죄로 여겼다. 하지만 소설을 읽다보면 이것도 진짜 이유가 아닌 것 같이 느껴진다. 왜냐면 우리는 거니의 깊은 곳에 드리우고 있는 아버지의 그림자를 보게되기 때문이다. 일에만 열중해서 가족을 무심하게 내버려두었던, 그래서 어린 거니로 하여금 영원히 혐오하고 결별하게 만들었던 그 아버지의 그림자를 말이다. 사실 거니 역시도 아들 대니의 죽음을 떠올릴 때 그것을 깨닫는다. 바로 그 때의 자신의 모습이 그렇게도 혐오해마지 않았던 아버지의 모습과 똑같이 닮았다는 것을... 

 

  그렇게 이 작품의 중심엔 아버지가 있다. 

  사실, 이 리뷰의 시작을 이성복의 시 '그해 가을' 에 나왔던 이 문장으로 하려고 했었다. 

'아버지! 아버지 씹새끼 너는 입이 열개라도 말을 못해' 

  과연 이 문장 만큼 '658, 우연히'의 주제를 제대로 드러내는 말이 또 있을까 모르겠다. 이 말 그대로 여기의 심층엔 '아버지'에 대한 거부가 있다. 아니, 다시 말하면 프로이드가 '토템과 터부'에서 서양 문명의 근원이라고도 했던 '부친 살해'의 욕망이 있다. 소설의 모든 미스터리, 설정들은 사실 여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일단, 거니가 은퇴후 가지게 된 새로운 취미활동이 흥미롭다. 거니는 우연히 미술 수업을 들었다가 특히 사진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자기가 잡은 연쇄살인마의 머그 샷들을 하나의 작품으로 만드는데 몰입한다.  여기서 버든은 왜 거니에게 '머그 샷'이란 취미를 가지게 한 것일까? 여기엔 내가 보기에 두 가지 이유가 있는 것 같다. 하나는 '머그 샷' 자체가 가지는 투명성이다. 머그 샷은 범죄자가 유치장에 갇히기 직전, 그러니까 현실로 부터 격리되기 직전의 마지막에 찍는 사진이다. 그러니까 여기엔 어떤 꾸밈도 있을 수 없다. 오로지 있는 그대로의 투명한 모습을 드러낼 뿐인 것이다. 그렇게 버든은 그 진실한 모습을 그대로 담아낸다는 의미로 머그 샷을 가져온다. 그렇게 거니는 온전히 드러난 연쇄살인마의 얼굴을 본다. 그런데 버든은 왜 하필 그렇게 드러난 얼굴들에 거니를 그토록 집중시키는 것일까? 더하여 그들은 모두 거니가 제 손으로 직접 체포한 자들인 것이다. 바로 여기에 버든이 머그 샷을 가져온 두번째 이유가 있다. 특히나 버든은 거니가 자기가 체포한 자들의 머그 샷에 너무도 열중하고 있음을 아내의 불평까지 가미하여 강조까지 하는데 그가 그러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거니의 행위와 이 소설에서 거니가 승부하게 되는 연쇄살인마의 살인 행위가 동일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도대체 이 둘의 존재 포획 행위가 하나는 살인이고 하나는 사진인데 어떻게 동일하다는 것일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는데 그것은 머그 샷이 현실에서 격리되기 직전 마지막 찍는 사진이라는 것에서 똑같이 현실에서의 격리라고 볼 수 있는 죽음과 동일하다고 볼 수도 있기 때문이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연쇄살인마의 살인이라는 행위와 거니의 사진 보기가 궁극적으로는 '회상'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일임을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즉 연쇄살인마는 살인을 통해 자신의 기억을 환기시키는 것이고 거니는 자신이 체포한 자들의 모습을 통해 그 기억을 환기하는 것이다. '회상 혹은 환기'는 기억의 한 유형이지만 단순한 기억과는 미묘한 차이가 있다. 즉 외부에 있는 것을 그대로 기억하는 것, 그렇게 현실을 토대로 내용을 구성하는 것을 단순한 기억이라고 한다면 '회상 혹은 환기'는 거꾸로 기억하는 주체가 그 기억을 통해 임의적으로 현실을 구성하기 때문이다. 즉, '회상 혹은 환기'의 차원에서는 단순한 기억과 달리 주체가 아주 적극적으로 개입하게 되는데 바로 그 때문에 '회상 혹은 환기'는 정체성을 형성하는 아주 중요한 요소가 된다. 즉 버든이 여기서 '머그 샷'과 그 행위적 유사성을 가져오는 것은 바로 그 행위에 깔린 보다 근본적 의미, 즉 그들의 정체성 자체가 동일하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함인 것이다. 거니와 연쇄살인마가 결국 똑같은 존재라는 것은 작품 도처에서 나타나는데 일단 거니가 전원생활에 와서 주로 하는 것이 새관찰이었는데 연쇄살인마도 새관찰자로 행세한다는 것 그리고 둘 다 보호해야 할 여성이 하나씩 있다는 것 등등이나(보다 더 주요한 공통점은 스포일러상 말하지 않겠다.) 연쇄살인마가 피해자에게 보내는 메시지가 주로 그들의 기억을 환기시키는데 맞춰져 있다는 것에서도 나타난다. 

  그렇게 둘의 정체성은 동일하다. 차라리 도플갱어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그런데 그 거니의 정체성을 형성한 사람은 앞서도 말했듯 아버지였다. 그가 '머그 샷'을 보면서 내내 환기시키는 기억은 바로 형사로서의 기억이다. 그렇게 형사로서의 정체성이다. 때문에 아내는 그것을 싫어한다. 그 형사로서의 정체성은 아들 대니의 죽음과 더불어 바로 아버지의 아우라라는 것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들이 형사직을 버리고 뉴욕마저 떠난 것은 그 아버지의 그림자로 부터 달아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거니는 계속 머그 샷을 본다. 그렇게 그는 아버지의 아우라를 떠나지 못한다. 당연히 아내와의 사이도 좋을리 없다. 전원생활은 엉망직전이고 전처와의 사이에 난 아들도 여전히 나몰라라 하고 있다. 그렇게 그는 그토록 혐오하는 아버지의 자리에 붙들려 있다. 스킬라와 카리브디스 사이에... 한 마디로 진퇴양난. 

 연쇄살인마가 그 이름을 쓰는 것 역시 둘이 동일성을 나타낸다. 한 마디로 그것은 그야말로 거니의 현재 상황을 나타내는 말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개인적으로 이 책은 내게 운명처럼 여겨졌는데(운명을 예민한 감각이 우연히 겹쳐진 현실을 포착해내는 것으로 정의한다면) 그것은 바로 얼마전에 내가 '스킬라와 카리브디스 사이에'라는 말을 한 페이퍼의 제목으로 썼기 때문이다. 이런 우연적 겹침이 재미있었고 한편으론 그래서 더욱 이 작품에 몰입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가 이 진퇴양난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아버지의 그림자를 벗어나는 길 밖에는 없다. 그렇게 아버지를 영원히 죽이는 수 밖에 없다. 거니는 오디이푸스가 되어야 한다. 즉, 이 소설에서 거니의 모든 추적은 바로 프로이드가 말했던 부친 살해의 과정에 다름아닌 것이다. 

  아버지란 무엇인가? 왜 아들은 아버지를 살해하려는 욕망을 가지게 되는 것인가? 비단 지금 이 작품만이 그렇게 부친 살해의 욕망을 드러낸 것은 아니었다. 영화에서는 이미 92년에 제임스 그레이 감독이 자신의 데뷔작 '리틀 오뎃사'를 통해 공개적으로 아버지를 처형했었다(물론 아들은 직전에 아버지의 머리를 겨누었던 총구를 거둬들이지만...).  이 두 작품이 모두 데뷔작이라는 것에서도 어떤 기묘한 운명이 느껴지는데 제임스 그레이의 경우 아버지의 처형은, 뉴욕의 러시아인 거주지를 '리틀 오뎃사'로 부르는 것에 비추어 보자면, 사실 소련의 사회주의를 구석구석 질서지웠던 존재인 스탈린과도 같은 독재자 아버지의 처형이었다.  

 

                                                                       영화 리틀 오뎃사에서 아버지 처형 장면 

 

 말하자면 여기의 독재자 아버지는 라캉이 말했던 상징계의 질서 자체를 의미하는 아버지와 똑같다고 할 수 있다. 즉 제임스 그레이도 존 버든도 그리고 뒤이어 또 하나의 데뷔작으로 부친 살해를 감행할 존 하트의 '라이어'도 결국 죽이고 싶어하는 것은 이 질서를 떠 받치고 있는  상징적 존재로서의 아버지 자체인 것이다. 이것은 그냥 하는 억측이 아니고 바로 버든이 왜 범인으로 하여금 피해자에게 '1부터 1000까지의 숫자를 떠올리게 하고 그것을 단번에 맞추는' 트릭을 썼는지에서 바로 증명되는 것이다. 바로 그 트릭의 기저에 라캉의 말에 따르면 언어를 습득하는 즉시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아버지의 상징 질서에 편입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개인으로서는 도저히 달아날 수 없는 이미 구조화된 함정 자체가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즉 버든이 그러한 트릭을 전면에 가져온 것은 바로 이 부친 살해의 욕망이 현재 이들의 삶을 구조화하고 지배하고 있는 아버지라는 기표를 향하고 있는 것임을 드러내기 위해서인 것이다. 이것은 모든 범죄의 장소가 '집'이라는 것에서 더욱 강화된다. 

 

  그런데 왜 아버지를 살해하려는 것일까? 

  여기에 소설의 첫 희생자이자 거니를 범죄로 인도하는 존재이며 거니와 또 다른 유사한 존재이기도 한 멜러리의 '내면 분리 이론' 에 이어지는 다음과 같은 말은 정말 의미심장하다. 

"한 몸에 사는 두 사람의 고통보다 더 끔찍한 고통은 없다네...' (p.154) 

  생각해보면 멜러리도 알코올 중독의 과거를 간신히 지우고 새로이 인생을 살게된 자였고 다른 피해자들도 멜러리와 같았다. '알코올 중독'에서 벗어난 자들이었다는 점에서 그들을 모두 아버지의 질서에게로 편입된 자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그들이 두 사람의 고통을 가지게 된 것은 바로 아버지의 질서를 받아들였기 때문인 것이다. 이것은 거니도 마찬가지다. 그 역시 대니의 죽음이 아로새긴 상처가 있으니까. 그리고 그 상처가 아로새겨진 결정적 이유는 바로 거니가 아버지처럼 행동했기 때문이었다. 즉 이 모든 이들이 궁극적으로 두 사람의 고통을 한 몸에 새겨지게 된 것은 바로 '아버지'라는 존재 때문인 것이다. 때문에 부친 살해의 욕망은 바로 이러한 고통을 벗어나고자 하는 몸부림이며 더 나아가서는 아버지가 새겨놓은 질서를 해체하고 새로이 그들만의 질서를 이루고자 함이다. 

 

  모든 질서의 재구축은 구질서의 면모를 파헤치는데서 시작한다. 

  그래서 여기엔 그 과정으로서 '고전 미스터리' 기법이 작용하는 것이다. 고전 미스터리의 기법들은 결함을 제거하는, 다른 말로 치유하는 작용을 하니까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미스터리 기법은 어디까지는 구질서를 치유하는 것이지 새질서를 낳게하는 작용을 하지는 않는다. 아니 오히려 적극적으로 위협이 되는 새질서를 제거하는 작용을 할 뿐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모순적이지 않은가? 하지만 천만에. 바로 여기서 버든의 뛰어난 점이 나타난다.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스포일러상 말하지 못하겠고 곁가지 것들중 하나를 말한다면, 거니가 어디까지나 협력자로서 수사에 참여하는 것이지 경찰로 다시 복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여전히 유동적인 존재로 머무르고 있으며 경찰은 내내 그에게 비협조적이다. 버든은 집에서 조차 그가 자주 머무르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는 자주 차에서 잠이 들고 때로는 그 때 경찰로 부터 위협도 받는다. 버든이 거니를 이렇게 고립적인 존재로 만드는 것엔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바로 범죄자의 유사성 때문이다. 범죄자는 공공연히 경찰과 승부한다. 그는 범죄의 현장에서 은밀하게 자신의 존재를 끊임없이 알린다. 공개적으로 경찰과 게임을 벌이는 것이다. 거니와 범죄자는 동일하게 경찰과 적대적인 존재인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미스터리는 이전의 미스터리와는 다르게 작동된다. 즉 아버지의 질서를 굳건히 지키는 경찰과 싸우기 위해서 미스터리가 작동되는 것이다. 범죄자는 자신의 존재를 보이기 위해서(그렇게 너희의 질서는 결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거꾸로 미스터리를 제시한다. 일종의 구질서를 해체하기 위한 무기로서 제시하는 것이다.(그리고 결말에서 그 모든 것이 그 질서 자체를 와해시켜버리는 데 있음이 드러난다.) 바로 이 미스터리의 반전된 작동을 위해서 나는 버든이 그토록 거니와 범죄자의 동일성을 강조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동일한 존재라야 무기로 제시한 그것이 상대편의 치유가 아니라 바로 자신의 치유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자면 거니와 범죄자의 존재는 어떤 측면에서 엘리아데가 완전함의 이상이라 보았던 '양성(ANDROGYNE)'을 연상시킨다. 엘리아데는 한 인터뷰에서 양성과 자웅동체가 어떻게 다른 것인가에 대해 이렇게 대답한 적이 있다. 자웅동체는 그저 여성과 남성이 공존하는 것이지만 양성은 이 둘이 융합한 것으로 전혀 다른 종류의 인간 존재라고. 라캉의 말대로 언어를 습득한 그 시점에 바로 아버지의 상징 질서로 편입된다고 한다면 인간인 이상 그 아버지의 질서를 벗어나기란 어려울 지도 모른다. 어쩌면 바로 그것을 예상한 나머지 버든은 그들이 전혀 다른 종류의 인간 존재로 여겨질 수 있도록 치밀하게 설정했던 것은 아닐까? 

 

  여기까지의 내 얘기가 전혀 이해불가능하다고 한다면 전적으로 내가 범죄자의 진정한 목적과 결말에서의 버든의 연출을 빠뜨렸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작품의 결함이 아니라 스포일러상 내가 빠뜨린 '결함'의 책임이다. 서두에서 말한대로 이 작품은 정말 뛰어나다. 길이와 공개적인 리뷰라는 한계상 하고 싶은 말을 다 못한다는 게 안타까울 뿐이다. 그래서 더 이해되지 않는 리뷰가 될 것 같아 걱정도 앞선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이상 내가 할 수 있는 것도 없다. 그러고보니 내가 지금 스킬라와 카리브디스 사이에 서 있는 듯 하다. 역시나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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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1-09-16 1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품의 중심에 '아버지' 라는 글을 읽으면서 정말 이건 노르딕 느와르인데,,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런 진한 부분은 결코 정통 미스테리에서 나오지 않으니까요. 분위기 자체가 다르잖아요. 이 작품은 거기에서 독특하군요. 땡기는걸요~ ^^

페이퍼를 읽다보니, 다른 책에서도 비슷한 느낌을 받은 적 있어요,
형사(잡는 자)와 범인은 비슷한 사고를 지녔다는, 서로 이해 가능하다는거, 하지만
행위는 다른 방향으로 흐른다는 그런 것이었죠. 어느 책인지 정확하게 기억은 나지 않네요.

즐거운 주말되셔요. 역시 멋진 리뷰세요.

오드득 2011-09-20 15:36   좋아요 0 | URL
지금에서야 들어와서 이제야 마녀고양이님의 댓글을 보았네요.
잘 지내시고 계시죠?
저도 '658' 읽으면서 미국 작가인데도 너무 '노르딕 느와르'적이라서 놀랐어요^ ^ 고전 미스터리 퍼즐을 푸는 것도 좋아하시고 노르딕 느와르의 분위기도 좋아하신다면 정말 추천드리고 싶은 작품입니다. 스릴러 작가의 경우 자신이 말하고 싶은 주제를 어떻게 표현할까 생각해보면 아무래도 주인공만이 아니라 그 범인에게도 투영을 시킬 것 같아요. 그 생각에 저는 범죄자의 범죄도 작품을 해석하는데 있어 꽤 중요한 단서로 여기고 있는 편이구요. 결국 잡고자 하는 자와 쫓기는 자는 어떤 의미에서 서로의 도플갱어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강한 편이죠. 니체의 말대로 괴물을 오래 들여다보는 자는 그 스스로도 괴물이 된다는 말이 있듯이... 칭찬의 말씀도 감사합니다.^ ^
 
클라인의 항아리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31
오카지마 후타리 지음, 김선영 옮김 / 비채 / 2011년 8월
평점 :
절판


 

 

  

 '클라인의 항아리'는 1989년에 나온 오카지마 후타리(도쿠야마 준이치와 이노우에 이즈미 콤비의 공동필명)의 작품이다. '클라인의 항아리'는 일반적으로 '클라인의 병(The Klein Bottle)'으로 알려져 있다. 왜 항아리가 되었는지는 모르겠는데 어쩌면 일본에서는 그렇게 불려진 게 아닐까 도 싶다. 혹시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읽었다면 이 '클라인의 병'을 보았을 것이다. 거기 그림까지도 나와 있으니까.  그 소설을 읽지 않았거나 그래도 혹시 클라인의 병이 무엇인지 궁금하실 분들을 위하여 그 모습을 올려보자면 이렇게 생겼다. 

 

 

 이것이 바로 '클라인의 병'이다. '클라인의 병'은 독일 수학자 펠릭스 클라인이 1882년 만든 토폴로지로 쉽게 말하자면 '뫼비우스의 띠'를 3차원 입체로 재구성한 것이다. 그러니까 '클라인의 병' 또한 '뫼비우스의 띠'와 마찬가지로 안이 바깥이 되고 바깥이 안이 되는 구조인 것이다. 그림에서 보면 중앙의 구멍으로 따라 들어가면 '안'이었다가 점차 바깥으로 나오게 됨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클라인의 병'이 '뫼비우스의 띠'를 3차원적으로 변형시켰다고 말했지만 사실 이 둘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그것은 뫼비우스의 띠는 어떻게든 윗면과 아랫면이라는 경계가 있지만 '클라인의 병'에서는 그러한 경계가 조금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바로 그렇게 조금의 경계도 가지지 않은 기하학적 공간을 만들기 위하여 펠릭스 클라인은 이 '클라인의 병'을 만든 것이다. 

 

  그러니까 제목 '클라인의 항아리'는 조금의 경계도 가지지 않는 공간을 의미한다. 여기서 눈치빠른 분들이라면 바로 이 소설이 가상현실을 다루고 있다고 알아차릴 것이다. 왜냐하면 장르에 있어서 경계의 상실은 대개의 경우 '가상과 실제의 경계의 상실'인 '가상현실'을 다루고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바로 그대로 '클라인의 항아리'는 가상현실을 다루고 있다. 이러면 어떤 분들은 "뭐야? 매트릭스도 이미 고전이 된 지 오래인데 너무 식상한 소재아냐?" 하실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맨 위에서 나는 이 책이 출간 연도를 일부로 밝혔다. 그렇다. 이 책은 1989년에 나왔다. 당시는 가상현실을 다룬 작품이 아마도 '사이버공간(혹은 '전뇌공간'으로 번역된)'이라는 말을 최초로 생성시킨 윌리엄 깁슨의 '뉴로맨서'(1984)와 루디 러커의 '소프트웨어(1982)'가 유일했다. 그러니까 이 소설이 나왔을 때만 해도 아직 '가상현실'과 소설을 어떻게 접속해야 하는지 그것이 그리 잘 알려지지는 않은 시기였던 것이다. 더구나 이 소설처럼 '미스터리'와는 어떻게 '싱크'시켜야 하는지는 더더욱 전인미답의 처녀지였다. 그런데 거기에 이 일본 작가들이 발을 내디딘 것이다. 역시나 가상현실을 다루었던, 지금은 사이버펑크 소설의 걸작으로 평가받는 닐 스티븐슨의 '스노우크래시'가 나오기 3년 전에(이 소설의 평가를 보려면 스티븐 킹의 '셀' 2권을 보면 된다.) 말이다. 하지만 정작 '가상현실'에 대한 최초의 아이디어는 유감스럽게도 문학이 아니었다. 지금과 같은(그러니까 두뇌에 컴퓨터가 연결되어 전기적 신호(아시다시피 우리의 감각이란 두뇌에 전달되는 일종의 전기적 신호에 불과하므로)를 보내어 마치 그 두뇌가 현실인양 느끼게 한다는) 가상현실의 아이디어 자체는 미국의 철학자 힐러리 퍼트남의 '이성, 진리, 역사'에 먼저 나왔다. 그러니까 1981년에 나온 그 저서의 서장에서 'A BRAIN IN A BRAT(통속의 두뇌)'라는 사고실험 케이스로 나왔던 것이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말보다 직접 그림으로 보면 '가상현실의 최초 아이디어'라는 이 말이 쉽게 수긍이 가리라 생각한다. 

   

 

    바로 이와 같다. 저기 통안에 담긴 두뇌에 컴퓨터의 전선을 연결하고 컴퓨터는 두뇌에게 투손의 햇살 아래 산책하고 있다는 전기적 신호를 만들어 보내는 것이다. 그러면 두뇌는 자신이 통안에 든 두뇌 밖에는 없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다리와 온전한 신체가 있으며 햇살이 내리쬐는 투손의 거리를 산책하고 있다고 느끼는 것이다. 그 두뇌는 그것을 실제와 조금도 다름없다고 여기지만 그것은 컴퓨터가 만들어낸 가상현실에 불과한 것이다. 사실 이러한 구상이 그 이후로 가상현실을 다루는 작품의 일종의 프로토타입이 되었다. 두뇌가 온전한 신체가 되고 두뇌가 담긴 통은 신체가 들어가는 캡슐이 되었을 뿐, 워쇼스키의 '매트릭스'를 포함하여 저 기본적 구성은 조금도 변함없이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이 소설 '클라인의 항아리'도 마찬가지다. 인간이 자극을 받아들이는 온 몸의 신경부위에 컴퓨터와 전선으로 연결되어 투명한 캡슐 속으로 들어가 가득한 점액질의 액체 속에서 컴퓨터가 인공적으로 생성해내는 가상현실을 체험하는 것이다. 

 

  대학을 졸업하고도 이렇다 할 직업없이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프리터 생활을 하던 주인공, 우에스키 아키히코는 어느 날, 그가 쓴 어드벤쳐 게임북(심리 테스트 처럼 독자가 고른 YES 혹은 NO에 따라 시나리오가 전개되는 게임북) 시나리오를 계약하고 싶다는 전화를 받게 된다. 하지만 전화해 온 쪽은 원래 응모했던 게임북 회사가 아니라 진짜 비디오 게임을 만드는 회사였다. '입실론'이란 그 회사는 자신들이 게임의 역사를 바꿔버릴 아주 혁신적인 게임을 만들고 있는데 주인공의 시나리오가 거기에 적격이니 계약하고 싶다고 한다. 응모기준이 정했던 분량을 초과한 관계로 낙선했던 주인공은 당연히 흔쾌히 거기에 응한다.(소설의 맨 앞부분에 바로 그 계약서가 나와있다.) 그러던중 회사로 부터 시나리오 작가로서 게임 테스트에 응해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게임은 놀랍게도 당시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완전 현실과 똑같은 가상현실 게임이었다. 아키히코는 그 가상현실 속에서 자신이 썼던 '브레인 신드롬'이라는 정신개조용 약품에 얽힌 스파이 게임을 하게 된다. 그런데 테스트 참가자가 하나 더 있었다. 아키히코가 보자마자 반해버렸던 미소녀 리사. 돈도 벌고 혁신적 게임에 최초의 플레이어가 되고 거기다 미소녀와 연애까지. 대박이 넝쿨채 굴러왔다고 생각한 순간 일상의 궤도가 뭔가 점점 어긋나는 전조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처음엔 게임 도중 들렸던 목소리. '제어할 수 있을 때 게임을 그만두라'는 목소리. 하지만 게임 제작자들은 그 정체를 모른다. 그런 건 전혀 프로그래밍되어있지 않다는 거다. 일종의 버그인데 하지만 그것은 고쳐지지 않는다. 그러다 점점 게임이 주는 폭력에 중독되어가던 리사가 돌연 사라진다. 처음엔 단순히 테스트를 그만두었나보다 했는데 리사의 친구라는 마카베가 연락을 취해 와 사라졌음을 알린다. 리사의 실종과 더불어 '입실론' 회사 자체의 의혹도 불거지면서 이제 아키히코는 '클라인-2'라는 가상현실 기계를 둘러싼 거대한 음모가 그 뒤에 도사리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플롯이 너무 전형적인가? 하지만 전형적인 것 만큼 속도를 또한 부채질하는 것도 없다. 사실 직접 손에 들고 읽게 되면 전형적인지 아닌지 따질 여유도 없이 단숨에 독파하게 된다. 전성기의 마라도나가 골문을 공략하듯 재빠르고 거침없이 이야기가 전개되는 것이다. 가상현실을 소재로 하고 있으나 복잡한 시스템적 설명은 거의 나오지 않는다. 말하자면 저 위에 썼던 가상현실에 대한 얘기는 그냥 내 얘기지 소설의 얘기는 아닌 것이다. 사실 이 소설은 가상현실 자체에 대해선 흥미가 없다. 그것을 둘러싼 음모도 아니다. 진짜 흥미가 있는 건 가상현실이 줄 수 있는 것, 그러니까 '가상현실과 실제 현실을 도저히 구별할 수 없게 된다면?'하는 상황이다. 당신이 이 소설의 마지막에 가서 맞닥뜨릴 것도 그것이다. 이 소설의 어디서부터가 진짜 현실이고 가상현실인지 내내 자문하면서 당신은 재차 앞 페이지들을 다시금 훑어보게 될 것이다. 

 

 

 

   당신은 구별해낼 수 있을까? 주인공이 지금 처해 있는 현실이 가상현실인지 실제의 현실인지? 아니 당신은 지금 확실히 알 수 있을까? 지금 당신이 있는 현실이 진짜 현실인지 아니면 가상현실 머신 속에서 컴퓨터가 만들어내는 가상현실 속에 있는지? 장자의 '호접지몽'과도 같이 당신이 나비가 된 꿈을 꾸고 있는 것인지, 원래 나비인 당신이 지금 인간의 꿈을 꾸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있을까? 정확히 위에서 언급한 가상현실의 원초적 아이디어라고 제시한 '통 속의 두뇌'라는 사고 실험을 구상했던 힐러피 퍼트남도 그것을 묻고 있다. 퍼트남은 바로 그와 같은 질문을 위해서 '통속의 두뇌'라는 것을 착상한 것이다. 그러니까 저 '통속의 두되'는 지금 완전히 자신이 화창한 투손의 거리를 걷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그렇게 진짜 현실이라고 믿고 있는데 사실 그것은 컴퓨터가 만들어낸 가상현실인 것이다. 혹시 지금 우리들도 '통속의 두뇌' 꼴이 아닐까? 과연 아니라고 누가 증명해낼 수 있을 것인가? 워쇼스키의 '매트릭스'도 마찬가지다. 그 영화도 3부에 이르면 '클라인의 항아리' 처럼 도대체 어디서부터 가상현실이고 진짜 현실인지 구별해 낼 수가 없다. 1부에서 명확히 구분되던 두 현실들은 2부 어디선가 기묘하게 뒤틀리고 다시 조합되어 정말 '클라인의 병'처럼 경계 자체가 사라져버리는 것이다. 감각은 두뇌에 보내는 전기적 신호에 불과하다. 그러니까 파장만 복제하면 얼마든지 현실감각을 재현해 낼 수 있는 것이다. 감각과 경험으로 실제와 가짜를 구별할 수 없다는 생각은 비단 퍼트남의 생각만은 아니다. 그 이전에도 장자를 비롯 무수히 많은 철학자가 그것을 물어왔다. 그 대표적 철학자로 데카르트를 들 수 있을 것이다. 그 역시 감각이 주는 한계를 잘 알았다. 주체는 아무래도 현실과 가짜를 구별할 능력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내가 지금 보고 있고 감각하고 있는 이 현실은 어쩌면 악마가 나에게 보이는 환영일 수 있다고. 퍼트남은 이런 걸 두고 '형이상학적 실재론'이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실제와 가짜를 인간은 도저히 구별할 수 없는데 어떻게 인간은 참된 실재를 가질 수 있을까에 대한 논의를 '형이상학적 실재론'이라고 하며 퍼트남은 이 실재론이 고대 그리스 때 부터 내내 서양 형이상학에 있어 중요한 자리를 차지해왔다고 하고 있다. 그렇다면 '형이상학적 실재론'에 따르면 감각과 경험만으로 도저히 진짜와 거짓을 구분해 낼 수 없는 인간이 어떡하면 참된 실재를 얻을 수 있는지에 대해 뭐라고 말을 할까? 퍼트남은 말한다. 그건 인간의 절대적 한계이므로, 그렇게 완전히 능력 밖의 일이므로 인간 보다 더 나은 존재 초월적 존재가 아니면 불가능하다고. 그러니까 인간에게 참된 실재를 가져다 줄 수 있는 건 '신' 같은 초월적 존재 밖에는 없다는 것이다. 데카르트도 그와 똑같은 말을 한다. 물론 내가 지금 감각하고 경험하는 것이 악마가 내게 보여주는 환영일 수 있지만 우리 세계는 하나님이 다스리시고 하나님의 인격을 생각한다면 그런 환영을 허락할리 없을테니 내가 지금 보고 느끼고 있는 모든 것은 참된 실재라고 말이다. 웃기게 생각되어도 진짜 데카르트의 생각이다. 퍼트남도 진지하게 동의한다. '신'이 없으면 인간은 '진짜'를 하나도 얻을 수 없다고. 그러니까 인간 자신만으로는 지금 당신의 현실이 진짜 현실인지 가짜 현실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것이다. 어떻게 자신하겠는가? 당신이 만일 자살을 했는데 문득 눈을 떠보니 화면에 보이는 게 'GAME OVER'이고 유리창 밖에서 또다른 당신의 친구들이 손 흔들며 웃고 있는 장면을 보게되지 않을거라고. '클라인의 항아리'가 말하고자 하는 것도 정확히 이것이다. 안됐지만 당신에게는 지금 당신이 있는 현실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것. 

  

  그런데도 당신은 살고 있다. 아무리 힘들어도 버터내려 생각한다. 까뮈가 내내 의문스럽게 생각했던 것. 어째서 우리는 자살하지 않는 것일까? 어느 것이 진짜 현실인지 우리는 도저히 알 수 없는데 이러한 까뮈의 질문은 너무도 당연하지 않을까. 하지만 당신은 산다. 자살은 꿈도 꾸지 않는다. 그만큼 지금 이 삶을 '진짜 삶'으로 여긴다. 그러니까 해답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것은 당신에게 '주어진 현실'이 아닌 바로 당신 자신이 '선택한 현실'이기 때문인 것이다.  '우리는 어느 것이 진짜 삶인지 도저히 알 수 없다.' 이 말이 정말 함의 하고 있는 것은, 그리고 퍼트남이 궁극적으로 전하고 싶은 것도, 당신은 그 때 그 때의 선택(혹은 결단)에 따라 당신 자신의 삶을 스스로 형성해왔다는 그것이다. 

 

  까뮈는 당신의 삶을 '천상에서 유배된 삶'이라고 말한다. 하이데거는 '당신의 삶이 문득 지상으로 내던져진 삶'이라고 말한다. 그렇게 우리는 삶이 우리에게 족쇄를 씌워 끌고 가고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 걸 '운명이라 부르며 체념한다. 그렇게 당신은 과연 당신의 삶에서 단순한 객체였을까? 그렇게 당신은 이미 만들어진 현실 속에서 그냥 지내왔던 것일까? 천만에! 그 현실 자체가 이미 당신이 선택한 것인 것이다. '클라인의 항아리'에서 원래 아키히코가 만들려고 했던 '어드벤쳐 게임북'이 그렇듯이 매일 주어지는 선택적 상황에서 YES 혹은 NO로써 당신은 현실을 그때 그때의 결단으로 만들어왔던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 당신의 현실은 당신이 지금까지 해 온 모든 결단의 총합에 다름아닌 것이다. '클라인의 항아리'가 은밀히 주장하는 것도 그것이다. '진짜 삶을 우리가 알 수 없는 게 뭔 상관이냐 그것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얼마든지 우리의 선택에 따라 결정되는 것인데...' '클라인의 항아리'는 내내 그 말의 단서를 보여준다. 앞 서 말한 '어드벤쳐 게임북'도 그 단서이지만, 왜 시나리오 작가인 아키히코가 그 게임의 테스트에 참여해야 되는지에 관해 설명할 때 회사직원은 이런 말을 한다. "이쪽으로 가라 저쪽으로 가라 게임이 제시해도 플레이어는 혹시 그 이정표가 걸린 나무를 올라갈지도 모르거든요. 저희는 그런 상황까지 대비하고 싶은 겁니다."  이 말은 '삶이 아무리 주어졌대도 인간은 얼마든지 다른 선택을 할 수 있고 그러면 현실은 그에 맞게 또 수정되어 변해간다'는 말과 뭐가 다른가? '매트릭스'에서 네오가 직면하게 되는 것도 그와 같지 않나? '아키텍쳐'가 "자, 너는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라는 질문 앞에 섰을 때. 정말 현실이라는 숟가락이 구부러진 것인가 아니면 구부러진 건 우리 마음인가? 깃발(현실)이 흔들리는 건 바람 때문인가 아니면 우리 마음이 흔들려서 그러는 것인가? 선문답 같은 이런 질문이 궁극적으로 당신에게 하는 말은 단 하나다. '당신이 바로 삶의 주인이고 현실은 바로 당신의 손 끝에서 생성된다.'라는 이 단순하고도 어이없는 진실 말이다. 

 

  '클라인의 항아리'의 프로그래밍된 가상현실 처럼, 그렇게 삶엔 다른 자들에 의해서 프로그래밍된 무수한 이념들이 있고, 현혹을 위해 달려드는 프레임들이 있다. 누군가의 프로그래밍에 따라 떠도는 소문들이 있고 쏟아지는 기사들이 있으며 전방위적으로 작동되는 음모와 꼼수들도 있다. 그 모든 것들이 당신을 그저 하나의 객체, 단순히 가공된 자극을 받아들일 뿐인데도 그것을 진짜라 착각하는 '통 속의 두뇌'로 만들려고 하고 있다. '당신의 현실은 그 때 그 때의 결단에 따라 형성된 당신만의 현실이다.'라는 말은 그 모든 것을 받아들임에 있어서 당신 스스로 결단해야함을 의미한다. 물론 우리는 어느 것이 참인지 알 수는 없지만 다행히 최대한 그 참에 가깝도록 선택할 능력은 있다. 데카르트가 그랬듯이 모든 것을 의심하거나 아님 훗설이 그랬듯이 객관적 실체가 어느정도 드러날 때 까지 모든 것을 판단중지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것이다. 그들 역시도 보다 참된 실재의 삶을 얻기 위해 노력했던 이들인 만큼 그들의 방법 또한 귀기울여 들을 필요는 있지 않을까 싶다. 

  '클라인의 항아리'는 당신의 삶이 이미 그들에게 경작된 것이 아니라 아직 미개척지로 오로지 당신에게만 열려있음을 말한다. 맞다. 그것을 경작해야 할 사람은 오로지 당신 자신이다. 왜 함부로 남에게 맡기나? 그들이라고 당신과 별다를바 없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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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9-14 2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대학 숙제로 인해 주제를 잡기 너무 난감했는데 참고하고 주제로 정해버렸습니다.

책도 꼭 읽어 보겠습니다.

오드득 2011-09-15 19:43   좋아요 0 | URL
뭔가 도움이 되었다니 저도 기쁘네요. 좋은 결과 있으시길 바라겠습니다.

 
<소설> 파트의 주목 신간을 본 페이퍼에 먼 댓글로 달아주세요.

 

  처음으로 신간평가단 되고나서 처음 신간 추천 페이퍼 썼던 것이 정말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끝자락에 도달해 있다. 개인적으로 폭풍같은 한 주와 우울로 아슴아슴해지는 며칠을 보냈다. 하지만 그 어느 것도 해결된 것은 없다. 분노도 그대로고 슬픔도 그대로다. 그러면서 가는 거겠지. 이러면서 안고들 가는 거겠지. 그렇게 버티고만 있다. 지금은 바닥없는 공간을 유영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오히려 더 괜찮다고 생각된다. 둥둥 떠다닐 수록 내 몸은 더욱 더 예민해지고 내가 했던 것들과 보았던 것들을 더 잘 기억하게 해주니까. 기억해야 할 것을 잊지 않는 것. 그게 지금으로서는 최선인 것 같다. 

  어쩌면 그런 내게 조금의 중력이라도 가져다 줄 수 있을까 하는 심정으로 8월의 신간 다섯 편을 꼽아 본다. 

 

  

 '이민자들'을 읽고나서 제발트에 빠지지 않기란 정말 어려운 일이다. 을유에서 '아우스터리츠'가 나오더니 드디어 '토성의 고리'가  세번째로 우리나라에 소개되었다. 제발트는 교통사고로 안타깝게 죽기전(왜 정말 반할만한 작가들은 일찍 죽는 것인지...) 네 편의 소설만 세상에 남겼는데 이제 우리나라에 소개될 것도 단 하나만 남은 셈이다. 그렇게까지 조금밖에 남지 않았다니 아쉽고 안타깝다. 그래서 어쩐지 지구에서 토성까지 파이오니어호가 갔던 그 세월 만큼 천천히 읽고픈 생각도 든다. 하지만 사무치게 그리웠던 제발트의 육성을 코 앞에 두고 있으니 그 유혹을 어찌 견딜까 싶기도 하다. 토마스 베른하르트의 '소멸'과 더불어 아마도 오래도록 곱씹게 될 것 같은 예감이다. 

  

 

 

 

  존 코널리의 데뷔작이다. 사립탐정 찰리 파커 시리즈의 첫 작품이기도 한 이 소설은 내가 좋아하는 것 두 가지를 갖추었다. 하나는 주인공의 이름이 내가 좋아하는 재즈 뮤지션의 이름이라는 것.(이 사람의 매력을 알고 싶다면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버드'를 볼 것.) 다른 하나는 사립탐정물이라는 것이다. 가족 모두를 살해한 연쇄살인마를 추적하는 복수의 여정은 많이 반복된 소재이긴 하지만 사립탐정에게 새겨진 상처는 그것 자체가 매력이 되므로 어떻게 살려나갈지 기대가 된다. 사립탐정에게 범인이란 늘 그 자신이 풀어야 할 삶의 숙제와도 같다. 찰리 파커 당신은 나에게 어떠한 시선과 사유의 선율을 들려줄 것인가? 

 

 

 

 

 

  '독서의 역사' '밤의 도서관'등 책을 좋아하는 이들로서는 참으로 지나치기 어려운 책을 써내었던 알베르토 망구엘이 이번에는 소설로 다가왔다. 대략의 소개글을 보니 아무래도 '밤의 도서관'의 소설 버전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까 '도서관'이 하나의 인격을 가진 인물이 되었달까? 왜냐하면 '밤의 도서관'에서 '도서관'이라는 하나의 소재를 가지고 그것이 가질 수 있는 혹은 지닐 수 있는 모든 의미에서 마치 거미줄을 뻗치듯 촘촘하면서도 전방위적으로 전개해나갔던 것과 똑같이 이 소설에서도 그런 식으로 한 인물을 담아내고 있으니까. 망구엘의 얼기설기 엮어내는 태피스트리 기법이 소설로는 어떻게 펼쳐질런지 기대가 된다. 

 

 

 

 체코의 SF라면 카렐 차펙 밖에는 모르지만 선집한 이가  야로슬라프 올사 쥬니어와 박상준이라면 한 번 읽어보고 싶다. 거기다 강렬하면서도 마구 호기심을 불러 일으키는 저 제목이 기꺼이 그 속으로 풍덩 뛰어들고 싶게 만든다. 세월이 좀 흐른 것에서 부터 최근작에 이르기까지 그지없이 생소하기만한 이 10편의 작품들이 과연 어떤 맛을 느끼게 해 줄 지 기대가 된다. 

 

 

 

 

 

내가 이 소설을 선택한 것은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의 대상 수상작이라서가 절대 아니다. 순전히 순정만화가의 일상에 대한 리얼한 묘사가 담겨 있다는 한 서평가의 말 때문이다. 예전부터 그 일상이 궁금했었는데 제대로 한 번 엿볼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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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마처럼 비웃는 것 도조 겐야 시리즈
미쓰다 신조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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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요코미조 세이지와 에도가와 란포 

 

  미쓰다 신조는 요코미조 세이지의 계승자라 할 만하다. 그것도 최고의! 요코미조 세이지는 에도가와 란포와 더불어 근대화기의 일본 미스터리계에 있어 양대산맥이라 할만한 작가다. 그는 소년탐정 김전일이 사건 해결에 앞서 입버릇 처럼 말하는 '할아버지의 명예를 걸고'에 있어 그 할아버지인 '긴다이치 고스케'라는, 추리력은 뛰어나지만 범죄를 막기에는 한없이 무기력한 그러나 일본에서 제일 유명하고 인기있는 명탐정을 탄생시킨 장본인이기도 하다. 말이 나온김에 요코미조 세이지와 에도가와 란포를 한 번 비교해 보고자 한다. 그들은 같은 시기 활동했다. 그 시기는 메이지 유신으로 인해 단행되었던 근대화가 거의 완성에 이른, 레닌에 따르면 자본주의의 궁극적 완성이라는 제국주의적 시대이기도 했다. 즉 일본은 에도가와 막부까지 면면히 이어져 온 고유한 전통으로 부터 막부의 필요로 위로부터 적극 유입해온 외래의 서구 자본주의로 급속히 재편되고 있는 시기였다. 요코미조 세이지와 에도가와 란포는 바로 그 시기에 활동한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다루는 방식은 달랐다. 에도가와 란포는 서양의 추리 문학으로 부터 많은 영향을 받은 그답게 철저히 비일본적인 것을 추구한다. 그의 소설은 대부분 거의 일본적 특징을 드러내지 않으며 마치 별개로 떨어져 나온 것 처럼 지극히 서구 '모던'적이다. 반면 요코미조 세이지는 거의 대부분의 작품이 변화의 와중에 있는 일본을 드러낸다. 그는 범죄의 현장을 대부분 일본적 전통이 계승되는 장소로 잡는데 거기서 일어난 범죄는 대부분 위기에 처한 일본적 전통의 징후를 드러내는 역할로 존재를 드러낸다. 그러니까 요코미조 세이지는 바로 외부의 서구 자본주의로 인해 공격받고 단절되는 당시 현재의 일본 모습을 그대로 미스터리 형식으로 담아낸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란포는 거기서 더 나아가 아예 그 모든 것이 평정되어 버린 완성된 서구적 '모던'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바로 이렇게 란포와 대비되어 뚜렷이 떠오르는 요코미조 세이지의 특성이 바로 긴다이치 고스케로 하여금 더할 나위 없는 무기력을 선사하는 이유가 된다. 즉 요코미조 세이지는 란포처럼 서구의 자본주의가 과연 긍정할만한 것인지 자신이 없는 것이다. 거기다 한 편으론 일본의 고유한 전통 문화가 이렇게 마구 단절되어져도 좋은 것인지도 확신이 없는 것이다. 정확히 그러한 작가의 욕망을 대변하고 있는 페르소나 긴다이치 고스케는 그렇기 때문에 사건의 적극적 해결에 나서지 못하고 언제나 후일담 같은 추리를 덧붙이는 것이다. 여기서 받게되는 것은 어쩌면 세이지 자신에게 미스터리 해결 자체는 그리 추구하는 목적이 아닌 것 같다는 인상이다. 아마도 그가 정말 미스터리를 통해 드러내고 싶은 것은 외부의 가치로 인해 부서지고 단절되며 그래서 범죄를 통해서라도 지킬 수 밖에 없는 일본의 고유한 전통의 현장 자체가 아닐까 생각된다. 때문에 미스터리 해결 마저도 범인 찾기가 문제가 아니라 이 상황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어떻게 해야 지금 이 상황을 제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일종의 진실한 해답 찾기라 할 만하다. 즉 요코미조 세이지의 미스터리는 바로 그가 딛고 있었던 사회와 같이 호흡하는 작품이었던 것이다. 

 

  2. 미쓰다 신조와 요코미조 세이지 

 

   

 

  이것이 중요하다. 요코미조 세이지의 소설이 언제나 그 사회와 더불어 호흡한다는 것. 이것은 그대로 미쓰다 신조에게로 이어진다. 요코미조 세이지에게 범죄란 일본 고유의 전통을 단절시키는 것이었다. 그건 미쓰다 신조도 마찬가지다. 이전작 ' 잘린머리처럼 불길한 것'도 그렇고 이번 작품 '산마처럼 비웃는 것'도 그렇고 공통적으로 딱 요코미조 세이지 처럼 일본이 한창 2차 대전을 벌일 무렵 일본 고유의 전통이 계승되는 현장에서 범죄가 벌어진다. '산마처럼 비웃는 것'은 전작 '잘린머리처럼 불길한 것'과 이어지는 작품으로 전작에서 우연히 산마에 대한 얘기를 듣고 갑작스럽게 기차에서 내려버린 도조 겐야가 찾아간 산마가 나온다는 마을이 이번 소설의 주 무대가 된다. 책은 전작처럼 노부요시의 수기가 앞에 붙어 있는데 그 수기란 한 지역을 책임지는 가문의 셋째 아들인 노부요시가 그 지방의 고유한 전통적인 '성인-되기' 참배에 참여했다가(그것은 산에 있는 사당을 돌며 참배를 하는 것인데.) 들어가서는 안되는 '부름산'에 잘못 들어간 나머지 거기서 겪었던 기이한 체험을 기록한 것이다. 이러한 노부요시의 성인-되기 참배는 전작 '잘린머리'에서의 '십삼야 참배'와 동일한 것이다. 미쓰다 신조가 이렇게 반복적으로 성인-되기 참배를 끌어들이는 것은 성인, 즉 어른이 가지는 상징 때문으로 일본 전통의 법칙에 따라 어른이 된다는 것이 바로 전통의 계승, 그렇게 수호된 일본 고유한 전통 가치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요코미조 세이지와 똑같이 미쓰다 신조도 바로 거기서 범죄가 일어나도록 만든다. 요코미조 세이지의 세계에서 범죄란 늘 전통을 단절시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미쓰다 신조에게 있어서도 그건 마찬가지다. 그것은 범죄자의 면모를 확인하면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하지만 여기서 범죄자를 밝히는 것은 그야말로 스포일러가 될테니 이정도로 넘어가자. '당신이 잘린머리처럼 불길한 것'의 범죄자와 이 '산마처럼 비웃는 것'의 범죄자를 알게 된다면 그들이 공통점으로 자연히 내가 얘기하려고 했던 바를 유추해낼 수 있을 것이다.) 

  미쓰다 신조는 요코미조 세이지에게선 완곡하게 표현되었던 것. 그러니까 전통을 단절시키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보다 더 확실하게 언급한다. 그러니까 그 단절을 낳는 것이 바로 전쟁 당시 일본 지역 사회를 가장 급속하게 변화시켜가던 서구적 가치관이라는 것을 보다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미쓰다 신조는 프로이드의 이론을 따른다. 일본 고유의 전통 사회에서 서구적 가치관은 받아들이기 힘든 존재이기 때문에(왜냐하면 그것은 곧 파괴를 가져오므로) 당연히 변형을 거친다. 배척의 타당성을 위하여 보다 혐오스럽고 공포스러운 존재로 말이다. 즉 프로이드가 말했던 '괴물'이 되는 것이다. 그걸 미쓰다 신조는 괴담속의 마물로 다시금 빚어내는 것이다. 즉 미쓰다 신조에게 있어 '잘리머리'에 있어서 '아오쿠비'나 '쿠비나시'라든가 '산마처럼 비웃는 것'에 있어서의 '산녀'나 '산마'의 존재는 바로 그와 같은 상징을 지니고서 태어난 존재라는 것이다. 이제 이들의 의미들이 명확해졌으니 왜 미쓰다 신조가 하나의 산 전체를 밀실로 만들어버리는 지 이해가 된다. 그는 특히 3중 4중의 밀실을 만드는 것을 즐겨하는데 그것은 일본 전통 사회의 폐쇄성을 강조하여 그것이 가지고 있는 고유성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대체로 사건이 한 지역을 책임지는 당주의 집안에서 일어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대대로 이어져 온 가문의 역사를 통해 그렇게 면면히 뿌리내린 일본 전통 가치를 의미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바로 그 곳을 괴담의 존재들이 활동한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그것들이 능력이 실로 막강하다는 것이다. '잘린 머리'에서 아오쿠비의 저주는 실로 굉장하다. 그것은 사람들을 완전히 지배하고 있는데 거기서 이루어지는 구라타 가네의 주술과 아오쿠비의 저주간의 대결은 그야말로 일본 전통적 가치관과 서구적 가치관의 대립을 그대로 은유한 것이라 하겠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 소설을 읽을 때 느끼는 등장인물들의 아오쿠비나 산마에 대한 공포들은 바로 그들로 인해 변해버릴 지도 모를 내가 가진 정체성의 위협으로 인한 공포인 것이다. 이러한 정체성의 변화 그러니까 단순하게 말하자면 변해가는 머리와 기왕의 몸이 따로 노니는 상황은 전작 '잘린머리처럼 불길한 것'에서 '신체' 자체로 형상화된다. 몸에서 머리가 분리되는 것이야 말로 정체성의 변화라는 테마에 딱 적당한 신체적 묘사가 아닌가. 그러니까 미쓰다 신조 작품들에 있어서 하나의 특징이자 굉장한 장점인 조밀하게 엮어가는 공포 분위기는 바로 위험에 노출되어진 정체성 그 자체를 독자들로 하여금 무의식적으로나마 온전히 체험하게 하기 위함인 것이다. 

  '잘린머리처럼 불길한 것'에서 '산마처럼 비웃는 것'이 일보 전진했다면 그것은 괴담의 존재들이 의미하는 것이 보다 명확해지고 실체를 가지게 되었다는 것에 있다. 전작에서 실체는 없이 오로지 심리적 측면으로만 사람들을 지배했던 아오쿠비와는 달리 '산마처럼'에서는 아예 한 지역이 산마의 존재로 인해 금단의 영역이 되어버린다. 또한 아오쿠비의 저주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작에서는 그리 명확히 밝히지 못했는데 '산마처럼'에서는 금단의 영역인 '부름산'의 의미를 통해 보다 분명한 의미를 갖게 된다. '부름산'의 또다른 이름은 '금산'이다. 말 그대로 금이 나는 산인 것이다. 미쓰다 신조는 '산마처럼'에서 아가사 크리스티의 '열 개의 인디언 인형' 처럼 살인을 예고하는 동요를 등장시켜 이것을 더욱 강조하는데 바로 그 동요는 금을 채광하는 작업을 묘사한 동요였다. 즉 여기서 미쓰다 신조는 아오쿠비 저주의 실체를 명확하게 밝힌다. 그것은 금 즉 '자본'인 것이다. 그렇게 아오쿠비의 저주는 '산마 처럼'에 와서 '서구 자본주의적 가치관'으로 명확해지는 것이다. 이렇게 미쓰다 신조는 요코미조 세이지의 작품 세계를 계승하면서도 요코미조 세이지에겐 그저 '불길한 것'으로 남아있었던 것을 더욱 진전시켜 보다 명확한 것으로 주조해낸다. 세이지는 변화의 양상을 쫓지만 미쓰다 신조는 변화의 원인을 추적한다. 세이지는 느즈막히 변화되어 버렸다는 것을 깨닫지만(그래서 그에게 원인을 생각함은 시기상조다.) 신조는 '왜 우리가 이렇게 되어버렸지?'를 묻는다. 그래서 명탐정들의 반응도 달라진다. 언제나 사건이 대부분 진행되고 난 후에나 마치 후일담 처럼 개입하는 긴다이치 고스케와는 달리 미쓰다 신조의 도조 겐야는 '산마처럼'에서 보듯 먼저 찾아가 적극적으로 시작부터 개입하는 것이다. 

 

  3. 도조 겐야와 긴다이치 고스케 

 

  이 둘이 다른 것. 나는 이것에 미쓰다 신조가 이 작품들을 통해 말하고 싶은 것의 핵심이 있다고 믿는다. 둘은 하는 일도 다른다. 긴다이치 고스케는 뚜렷하게 하는 일이 없다.(있었는데 읽었는지가 오래되어 잊어버렸는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그는 룸펜이다. 반면 도조 겐야는 교고쿠 나쓰히코의 '항설백물어'에 나오는 모모스케 처럼 괴담 수집가이다. 그렇다. 겐야는 일본 전통 사회에 의해 괴물의 가면을 써 버린 존재들의 얘기를 모으는 사람이다. 이것은 지금까지 해온 논의에 따르자면 겐야 자신이 서구 가치관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말이된다. 그는 과연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인가? 그가 지금까지 목도해 온 그것이 가져다 준 폐해를 목격하고서도? 

  '잘린머리처럼'에서 아오쿠비의 저주로 상징되는 서구 자본주의는 분명 위험한 것이었다. 그것은 살인을 불러왔고 일본의 전통 가치는 그에 의해 완전히 사지절단 당하고 말았다. 그런데 명탐정 역할을 하는 도조 겐야는 그러한 가치관을 대변하는 괴담을 수집하는 자다. '잘린머리'에서 초반에서 명탐정 역할을 하는 다카야시키가 기차에서 겐야를 처음 보았을 때 경원시 하는 것도 그래서 이해가 된다. 괴담 수집가가 명탐정 역할을 하며 전면에 등장하게 된 것은 미쓰다 신조가 전편의 작업을 전면 부정한다는 의미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물론 그것은 아니다. 도조 겐야의 존재는 미쓰다 신조가 전작에서 대립적으로 구축해 온 일본 전통 가치관과 서구 자본주의적 가치관의 관계를 전혀 관점을 달리하여 볼 것을 요청한다. 즉 슬라보예 지젝식으로 말하자면 도조 겐야의 존재는 다른 '시차적 관점'으로 보자는 것이다. 

  미쓰다 신조는 이를 위해 하나의 뚝 떨어진 얼룩과도 같은 존재였던 긴다이치 고스케와는 달리 도조 겐야에게 꽤 상세하게 과거를 만들어준다. 물론 그 과거의 대부분엔 아버지가 차지한다. 그는 공작으로 추대된 화족 가문의 장자였지만 스스로 귀족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박차고 나와 경찰을 도와 명탐정 역할을 하고 있는 자였다. 그렇게 그는 기성의 질서에서 벗어난 자였다. 그런데 도조 겐야 역시도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 아버지가 아버지만의 명탐정 영역을 구축하고 살았듯이 괴담 수집이라는 자기만의 영역을 구축하고 살아간다. 그러니까 여기에 '아버지'가 있다. '산마처럼'은 다양한 아버지들이 나타난다. 사실 소설을 읽을 때 우리는 여기에 유념해서 읽을 필요가 있다. 겐야가 가진 존재적 독특성에 집약된 신조의 주제 의식은 바로 소설에서 펼쳐지는 이 아버지의 스펙트럼과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처음 수기를 쓴 노부요시의 아버지를 보게 된다. 그 아버지는 전작 '잘린머리'에서 극단의 가부장적 질서를 보여준 '이치가미 가'를 그대로 이어진다. 그렇게 그 아버지는 일본 전통 사회 자체를 의미한다. 동경에 까지 유학하여 서구 자본주의적 가치에 노출된 노부요시였지만 일본 전통 사회 자체를 상징하는 아버지의 명령을 거역하지 못하고 그는 전통적 성인-되기 참배식에 참여한다. 다른 한 편에는 '가스미 가'의 당주 다쓰지가 있다. 그 역시 노부요시의 아버지 처럼 한 가문의 당주이지만 그와는 극단적으로 대비되게 아주 무기력한 모습을 보여준다. 말하자면 이 소설에서 펼쳐지는 아버지의 스펙트럼은 그처럼 강인한 아버지에서 시작하여 무기력한 아버지로 차례로 이어지는 스펙트럼이다. 재미있는 것은 아버지의 강인함이 그가 소유하고 있는 아들의 숫자에 비례한다는 것이다. '가지토리 가'의 당주 리키히라의 경우, 그는 딸만 가지고 있는데 그래서 그런지 그 어떤 아버지 보다 타인들에 대해 포용적이다. 그는 심지어 아무 인연이 없는 구도승에게 조차 매일 저녁을 갖다주거나 저녁 식사에 초대하는 등 인정을 베풀어준다. 그는 남의 일에도 기꺼이 나서며 누구나 꺼려하는 금단의 영역 '부름산'도 맡아서 관리한다. 이런식의 대비는 전작 '잘린머리처럼'에서 나왔던 철저한 '남존여비'를 생각하면 이해가 된다. 즉 여기서 '아들'은 전통 질서를 강화하는 상징이고 '딸'은 그 질서를 약화시키고 바깥 것을 받아들임의 상징인 것이다. 딸만 가진 리키히라의 성품은 미쓰다 신조가 부여했던 상징 그대로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 도조 겐야는 아들이다. 그렇게 아직 기성의 질서로 부터 완전히 달아난 자는 아니다. 하지만 그는 내내 변화에 열려있는 자다. 그것을 나타내듯 소설에서 유일하게 그는 자신을 맡고 있는 담당 편집자인 여성과 늘 연락을 한다.(신조는 장차 이 둘을 로맨스 관계로 발전시키려 하는 듯 하다.) 즉 그렇게 '변화를 받아들임'을 상징하는 존재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그의 정체성을 반영하듯 그는 괴담을 수집하는 것이다. 즉 여기서 신조는 관점을 살짝 비튼다. 그는 도조 겐야의 존재를 통하여 전통과 외래적 가치관의 대립적 관계를 변화를 거부하고 옛 것 그대로를 지키는 수구적 태도와 기꺼이 변화를 받아들이는 포용적 태도의 대립관계로 비트는 것이다. 그래서 요코미조 세이지가 천착했던 주제를 전혀 새로운 시각에서 접근하도록 하는 것이다. 때문에 어쩌면 '산마처럼 비웃는 것'은 미쓰다 신조가 요코미조 세이지로 부터 벗어나와 그 진정한 출발을 하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하지만 여전히 '잘린머리처럼 불길한 것'이 그의 최고 걸작임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은 또한 이 작품이야 말로 도조 겐야의 그 진정한 시작이라는 점에서 또한 뒷받침 된다. 나는 여기서 스포일러를 피하기 위하여 일부러 범죄자의 존재가 가지는 의미를 언급하지 않았는데 아마도 직접 읽어보고 범죄자의 정체를 알게 된다면 도조 겐야와는 완전히 반대되는 의미를 가진 그로 인해 아버지의 질서에 안주하려는 수구적 태도와 겐야 처럼 변화속에 자신을 내맡기는 포용적 태도의 대립이라는 것을 확인하게 될 것이라 생각한다. 

 

  4. 덧붙임... 

 

  개인적으로 미쓰다 신조는 일본 미스터리 계에서 최고의 실력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된다. 미스터리를 형성하는 능력이나 분위기를 주조해내는 능력 그리고 미스터리와 분위기 모두를 자신이 말하고 싶은 주제에 맞도록 통제해가는 능력, 한 마디로 미스터리 작가로서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능력 중에서 가장 최고의 자질을 미쓰다 신조는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이 작가가 요코미조 세이지 처럼 일본 그것도 한창 변화의 와중에 있는 일본을 담아내고 있는 것에 천착하고 있음은 흥미롭다. 그는 연이어 하나는 걸작이고 다른 하나는 흥미로운 작품을 내어놓고 있는데 아직 그에게 구체적인 해답은 나와있지 않은 것 같다. 그는 여전히 그 자신의 페르소나라고 불러도 무방할 도조 겐야 처럼 해답을 찾아 떠돌아다니는 중이다. 다음 작품에서는 또 어떤 관점의 변화로써 그를 정말 좋아하고 관심있게 지켜보고 있는 나를 또 다른 사유의 시간으로 인도할지 정말 기대가 된다. 한 마디로 미쓰다 신조의 작품들은 모두 강추다. 일독할 것을 강력히 권해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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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yo12 2011-09-06 06: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장바구니에 넣어야하는 거군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오드득 2011-09-07 01:04   좋아요 0 | URL
미쓰다 신조는 개인적으로 추천드리고 싶습니다.
보잘것 없는 리뷰 좋게 봐 주셔서 제가 오히려 감사합니다.^ ^
 
더욱 깊이 내려간 조세핀 테이의 '나사의 회전'...
프랜차이즈 저택 사건
조세핀 테이 지음, 권영주 옮김 / 검은숲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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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먼저 개인적인 고백을 하나 하자면, 나는 조세핀 테이를 좋아한다.

 


  물론 미스터리 작가로서의 그녀도 좋아하지만 그보다는 '그녀 자체'를 좋아한다. 아니 차라리 나의 이상형이라고 해야겠다. 내가 이상형을 꼽는데 있어 가장 우선순위에 있는 것은 바로 그 누구에게도 기대려 하지 않는 '독립적인 여성'인데 조세핀 테이는 거기에 완벽하게 들어맞기 때문이다. 아마도 나와 비슷한 조건으로 이상형을 꼽는 사람은 조세핀 테이의 일생을 들여다보게 되면 분명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지리라 믿는다. 조세핀 테이는 그녀의 두 번째 필명이다. 그녀의 본명은 엘리자베스 매캔토시이다.  그녀는 '조세핀 테이'라는 필명을 1936년 그녀의 두 번째 미스터리 작품 'A Shilling for Candles'을 쓰면서 사용했고 이 소설은 다음 해인 1937년, 알프레드 히치콕에 의해 'Young and Innocent'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된다.(예전에 우리나라에서도 비디오로 나온 적이 있다.) 죠세핀 테이란 이름은 그녀의 어머니 이름과 할머니의 영국식 '성'을 혼합한 것이었다. 그녀는 세 딸들 중 장녀였고 버밍엄의 앤스티 체육 전문학교에 들어갔으며(후일 그러니까 1946년 조세핀 테이는 바로 이 학교를 무대로 한 스릴러 'Miss Pym Disposes'를 쓰게된다.) 체육교사로 지내다가 아버지가 몸져 눕게 되자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아버지를 간호하다가 작가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조세핀 테이는 '작은 아씨들'의 루이자 메이 올콧 처럼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다. 공식적으로 밝혀진 연애담도 하나도 없다. 그녀의 희곡만을 골라 편찬한 바 있었던 John Gielgud 경은 테이의 연인이 1차 대전중 사망했을 것이라 추정했지만 밝혀진 것은 없다. 평소 그녀의 결혼에 대한 지론이 그녀의 대표적 캐릭터 그랜트 형사의 말을 통해 나타난 바가 있다고 한다. 그랜트는 어딘가에서 이렇게 말한다. "성공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은 절대로 타인을 통해서 그 충족을 구하지 않는다네. 결혼도 포함해서 말이지. 오로지 그들 스스로 그 충족을 구한단 말일세." 오로지 홀로 스스로 자신의 인생을 충만케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죠세핀 테이의 모토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녀는 평생 그녀의 모토대로 살다가 삶을 마감했다. 그야말로 '독립적인 삶' 자체였다. 그녀의 전재산은 영국의 'National Trust'에 모두 기부되었는데 흥미로운 것은 그녀의 작품 'A Shilling for Candles'에서 희생자로 나온 유명한 여배우도 똑같이 전재산을 'National Trust'에 기부했다는 것이다. 어쩌면 그 작품을 썼을 때 부터 이미 자신의 삶에 대한 중요한 것들을 미리 결정해두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낚시와 승마를 좋아했다. 직업도 체육교사이고 보면 죠세핀 테이의 삶 전체에서 여성적인 특성이 두드러지는 면은 거의 없다. 이런 면에서 왠지 '고독의 우물'을 쓴 작가 '레드클리프 홀'이 떠오르기도 한다. 특히나 조세핀 테이는 승마를 좋아했는데 이러한 승마에 대한 사랑은 이 작품 '프랜차이즈 저택 사건'에서도 면면히 나타나고 있다. 단적으로 주인공 변호사인 로버트가 자신은 형사사건에 그리 밝지 못하여 유능한 형사 전문 변호사 케빈에게 도움을 요청하는데 하지만 로버트는 케빈이 과연 자신이 맡고 있는 의뢰인 샤프 모녀를 믿어줄지 확신할 수 없다. 로버트는 케빈과 샤프 모녀를 직접 만나게 하는데 케빈은 로버트의 우려와는 달리 샤프 모녀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흔쾌히 사건을 맡는다. 그런데 그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었다. 

  "자네 마녀들이 마음에 들었어. (...) 찰리 메러디스의 동생이라니 참 별일이 다 있지. 최고였다고, 그 영감. 인류 역사상 대략 단 하나뿐인 정직한 말 장수가 아닐까. 그 조랑말을 생각하면 내 정말 한시도 고마움을 잊어본 적이 없다네. 소년이 어떤 말을 처음 갖는지는 아주 중요하거든. 평생을 좌우한단 말이지. 말에 대한 태도뿐 아니라 다른 모든 것까지. 소년과 좋은 말 사이에 존재하는 신뢰와 우정엔..." (p.291)

 

   로버트도 그리 생각했지만 케빈은 그 좋은 말을 정직하게 자신에게 판매해 준 그 찰리 메러디스의 동생이라면 누구를 납치한다는 게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렇게 말에 대한 신뢰가 인간에 대한 신뢰로 이어지는 것은 오랫동안 승마를 하면서 말과의 관계를 다져온 조세핀 테이가 아니라면 할 수 없는 것이며 케빈의 고백은 사실 테이 자신의 말에 대한 사랑을 고백한 것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 같다. 이렇게 '프랜차이즈 저택 사건'은 사실 죠세핀 테이의 자전적인 모습이 많이 나타나 있다. 특히 여주인공 매리언 샤프는 그야말로 죠세핀 테이의 페르소나라고 할 만한데, 스포일러상 여기서 그걸 자세히 밝힐 수 없는 게 안타깝지만 아마도 조세핀 테이의 실제 모습을 떠올리며 이 책을 읽어보면, 왜 매리언 샤프를 죠세핀 테이의 페르소나라고 말하는지 저절로 이해가 갈 것이라 생각한다.

 



 '프랜차이즈 저택 사건'은 1951년 영화화되었다. 왼족이 로버트 가운데가 매리언 그리고 오른쪽이 샤프 부인이다. 영화는 유투브로 감상할 수 있다.

  '프랜차이즈 저택 사건'은 말 그대로 프랜차이즈 저택에서 일어난 사건을 중심으로 한다. 어느날 로버트에게 그 저택에 살고 있는 메리언 샤프가 전화로 의뢰를 해 온다. 평소 마을에서 은근히 기피되고 있던 모녀로 부터 뜻밗의 의뢰인지라 로버트는 사실 내켜하지 않는다. 더구나 의뢰하는 건 또한 자기들로서는 전혀 일면식이 없는 한 소녀가 자기들 모녀가 그녀를 납치하고 가혹행위를 했다고 고발한 사건이었다. 로버트는 형사전문이 아니라서 다른 변호사에게 넘기려고 하지만 매리언의 변호사로서가 아니라 한 마을에 사는 친구로서 진지하게 도움을 구하는 거라는 말에 그만 응낙하고 만다. 매리언의 저택에서 테이의 대표적 캐릭터이자 '시간의 딸'에서 안락탐정의 전형을 보여준 형사 '그랜트'를 만나 사건의 전모를 전해 듣는다.(사실 테이의 소설에 익숙한 사람은 그랜트의 등장과 더불어 그를 주인공으로 생각하겠지만 그는 어디까지나 조연에 그친다. 테이가 그랜트를 등장시켰으면서도 조연에 머무르게 하는 건 이 소설의 주제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어 중요하다. 하지만 그랜트의 의미를 말하려면 아무래도 스포일러를 언급해야 하므로 어쩔 수 없이 이 정도만 언급하고 넘어가려 한다. 이럴 때 마다 미스터리 리뷰로써의 한계를 절감하지만 어쩌겠는가 미스터리는 어디까지는 읽는 자의 즐거움이 그 첫째가 되어야 하니까 말이다.)

  열 여섯이 되는 베티 케인이라는 소녀가 샤프 모녀가 차로 자신을 납치하고 가정부로 삼는 것에 저항하는 그녀를 가혹하게 학대했다는 것이다. 그녀는 정확히 프랜차이즈 저택의 모습을 묘사했고 그 내부까지 묘사했기 때문에 경찰도 직접 수사에 나선 것이다. 샤프 모녀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다. 베티 케인이라는 소녀를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소설의 주가 되는 미스터리는 바로 이것이다. 과연 누구의 말이 맞는 것일까? 소녀의 고발은 정말 고발일까 아니면 무고일까? 소설은 이것을 주된 줄기로 해서 하나하나 가지들을 새로 돋아나간다. 테이는 이 소설의 사건을 18세기에 영국에서 실제 있었던 엘리자베스 케닝 유괴 사건에서 가져왔는데 그 때 케닝은 한 집시무리가 자신을 납치했다고 고발하는 바람에 그 집시 무리는 아무런 증거가 없었는데도 안그래도 집시를 탐탁지 않게 생각했던 사람들로 부터 어마어마하게 박해를 받았다. 여기서 드러나듯, 엘리자베스 케닝 사건에서의 핵심은 바로 '마녀사냥'이다. 별다른 증거가 없는데도 평소 경원시 되던 존재에 대한 무분별한 비이성적 증오가 핵심인 것이다. 그렇다면 테이는 하필이면 왜 그 사건을 모델로 가져온 것일까? 그것은 '프랜차이즈 저택 사건'이 나온 시기를 알면 어느정도 이해가 된다. 이 소설은 1948년에 나왔다. 그러니까 2차대전이 끝나고 난지 얼마 안된 시점, 그러니까 파시즘이 가져온 그 엄청난 물질적 정신적 피해로 부터 자유롭지 못했던 그 시점에 나온 것이다. 2차대전이 가져온 가장 커다란 비극. 나치에 의해서 6백만명 넘게 유태인이 학살당한 것은 아도르노가 '아우슈비츠 이후에도 시를 쓴다는 것이 가능한가?'라고 말했을 만큼 전세계인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그 어마어마한 사람들은 모두 '유태인'이란 이유 하나만으로 처형을 당했다. 테이는 아마 거기서 집시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억울하게 당해야했던 엘리자베스 케닝 사건을 떠올렸던 것이 틀림없다. 테이는 확인했던 것이다. 나치가 초래한 비극은 어떤 특수한 시점에 일어난 유일한 사건이 아니라 역사에서 반복적으로 일어났던 사건임을. 그래서 그녀는 아마도 그것을 알리고 경고하기 위해 이 소설을 썼던 것은 아닐까 생각된다. 우리가 변하지 않는 한 파시즘은 언제 또다시 일어날지 모른다는. 만일 이렇다면 조세핀 테이는 정말 현명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로부터 정말 얼마되지 않아서 우리는 미국에서 '매카시즘'이라는 또 하나의 마녀사냥식 파시즘을 보게 되었으니까 말이다.

  조세핀 테이가 '프랜차이즈 저택'을 주 무대로 삼는 것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프랜차이즈' 자체가 마녀사냥과 관련하여 사람들 뇌리에 불러일으키는 그것이다. 그건 바로 프랑스의 드레퓌스 사건이다. 그 때 드레퓌스는 독일과 내통했다는 간첩 혐의에 대해 따로 진범이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군부는 그것을 무시하고 끝까지 그에 대한 재판을 강행했는데 그 이유는 다른 이유는 없고 오로지 드레퓌스가 유태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사회에 만연된 유태인 혐오증 때문에 아무 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드레퓌스는 마구잡이로 박해를 당했던 것이다. 이러한 '마녀사냥'식 몰아대기. 다시 말 해 원래 혐오하고 있던 자에게 '마녀'의 가면을 씌워 전혀 아무런 거리낌 없이 배척하고 폭력까지 가하는 무분별한 증오, 파시즘이 보여주었던 그것과 완벽하게 똑같은 증오를 독자들에게 떠올리기 위하여 죠세핀 테이는 '프랜차이즈 저택'을 주 무대로 삼은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죠지 4세(영화 '죠지왕의 광기'의 그 죠지를 말한다.)의 섭정 시대 유행했으나 그 후 빅토리아 양식에 밀려 거의 찾아보기 힘들어진 '프랜차이즈' 양식으로 지은 저택을 내세워 그와 똑같이 샤프 모녀가  마치 집시나 유태인 처럼 사회에서 고립적이며 열악한 위치를 가지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위함이다. 이것은 로버트가 매리언의 전화를 받고 그 프랜차이즈 저택으로 가는 장면에서 놀랍도록 문학적으로 잘 형상화되어 나타난다. 테이는 로버트가 프랜차이즈 저택으로 가는 과정을 상세히 묘사하는데 거기서 흥미로운 것은 테이가 유독 대립관계를 강조한다는 것이다. 그녀는 먼저 '신'거리에서 마주보고 있는 말을 부리는 가게와 자동차 정비소를 통해 대립 관계를 은연중에 보여주더니 좀 더 나가서는 아예 로버트와 프랜차이즈가 있는 전원적인 밀퍼드와  맞닿은 도시적인 라버러와의 대조를 통해 그 대립적인 관계를 재차 확인한다. 문제는 말도 밀퍼드도 그 대립관계에서 열악한 위치에 있다는 것이다. 말은 시대에 뒤쳐짐을 의미하고 밀퍼드는 프랜차이즈가 현재 있는 곳을 의미한다. 그렇게 프랜차이즈 저택은 열악한 밀퍼드에서 더욱 열악한 자리에 있으며 그들이 그렇게 고립되고 열악한 이유는 '말'에서 드러나듯이 시대에 뒤쳐진 존재들이라는 사람들의 근거없는 인상 때문이다. 라버러 사람들에게 밀퍼드가 그렇게 인식되어 기피되는 것과 똑같이 말이다.

 

  프랑스의 아트락 그룹 '샤일록(세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의 그 '샤일록'이다.)의 데뷔 앨범 LP 커버와 같이 찍어 보았다. 커버에 소설 속 사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둥근 창문이 보인다. 여기에서 보듯이 둥근창문은 프랑스의 전통적인 양식인 것 같다.

 

 

 

 

 

 

 

 세핀 테이의 '프랜차이즈 저택 사건' 영문판 표지. 사건의 주무대가 되는 프랜차이즈 저택을 전면에 내세웠다. 그런데 시선 처리가 오묘하다. 분명 등장인물 누군가의 시선으로 바라본 저택의 모습을 그린 듯 하다. 소설을 읽으시면 누군가의 시선인지 아시게 될 것.

  

  조세핀 테이가 전반부에 이렇게 안정된 일상 같지만 그 이면엔 수많은 대립관계가 은밀하게 흐르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이것은 바로 이 소설의 화자이자 주인공이 되는 로버트와 관계가 있어 중요하다. 소설은 로버트로 부터 시작한다. 그는 변호사이다. 변호사는 그의 가문 대대로 이어내려온 직업이다. 그는 그 가문의 성원으로 당연하다는 듯이 변호사가 되었다. 그렇게 그의 일상은 수백년의 세월이 집적된 견고한 것이었으며 '월, 수, 금요일에는 버터 비스킷이고 화, 목, 토요일에는 다이제스티브'로 집약되듯이 항구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그가 그렇게 견고하고 항구적으로 생각하는 일상은 사실은 그 이면에 저토록 많은 대립관계가 드리워진 것이었다. 그만큼 불안해질 수 밖에 없는 것이었다. 로버트도 무의식적으로나마 이것을 알아차린다. 그는 '이것이 네가 이룬 모든 것이다'라는 생각으로 자신의 일상에 대해 순간 회의감이 든다. 이 정체모를 감정으로 상념에 빠져들 때쯤 매리언에게서 도움을 구하는 전화가 걸려온다. 매리언의 그 전화는 이렇게 묻는 것과 같다.

  "로버트, 당신의 일상은 당신이 믿는 것 만큼 견고한가요? 우리에겐 이리도 많은 대립관계가 불안하게 놓여있는데..."

   매리언 또한 분명 로버트 처럼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비록 은근히 따돌림을 당하고 있는 그녀들이지만 그래도 지킬 것을 지키고만 살면 괜찮다고 생각하던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그녀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알지도 못하는 소녀에 의해서 아무런 이유도 없이 자신들의 일상이 마구 파괴되는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어느새 마녀 사냥을 당하는 '마녀들'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테이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우리들은 로버트나 매리언 처럼 우리들의 일상이 견고하고 항구적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사실 그것은 환상에 불과하다고. 아무 이유나 잘못 없이 우리의 일상은 오로지 타자의 전적인 악의만으로도 무참히 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역사는 이미 드레퓌스나 파시즘을 통하여 이것을 충분히 경험했다. 테이는 일상 속에 수없이 가로놓인 대립관계를 통하여 우리네 일상이 그 대립관계를 먹이로 해서 무럭무럭 자라나는 파시즘에게 얼마든지 먹음직스러운 토양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면서 바로 그 파시즘(여기서 파시즘은 아무 이유 없이 가해지는 개인이나 집단적 폭력 전체를 상징해서 쓰는 말임을 일러둔다. 즉 전적인 이기적인 악의로만 가해지는 폭력 자체를 말하는 것이다.)에 의해 일상 자체 마저 느닷없이 무참히 무너질 수 있다고 경고하는 것이다. 이런 비극을 막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조세핀 테이는 바로 그것을 '프랜차이즈 저택'의 샤프 모녀를 통해 보여준다. 케빈을 비롯 로버트 그리고 그의 조카 네빌 마저도 샤프 모녀 특히 매리언을 직접 만나고 나서는 끌리게 되는데 그 이유는 네빌이 직접 말하듯 '그녀들은 온전히 열려있고 모든 변화를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즉 테이의 대안은 명백하다. 우리의 일상을 언제든지 무참히 깨어버릴 수 있는 파시즘은 어디까지나 대립관계, 즉 나와 남을 결코 조화될 수 없는 '타자'로만 바라보는 그 시각에 있으므로 '샤프 모녀'처럼 스스로를 타자들에게 열려진 존재로 만들자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열려진 존재로 만들자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테이는 소설을 통해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타자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시각'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이 바로 모든 등장인물들이 '프랜차이즈 저택'에 직접 와서 그들과 함께 집 내부를 보고 나서야 그들의 편이 되는 이유이며 왜 결정적인 사건의 전환점이 되는 것이 '둥근 창문'이 되는 것인지의 이유이다.(역시나 스포일러상 자세한 언급을 피한다. 하지만 안에서 바라보는 것과 바깥에서 바라보는 것의 결정적 차이는 무엇보다 죠세핀 테이가 대안으로 제시하는 '타자의 내부에서 바라보는 시각'을 강조하는 것이라 하겠다.)

  조세핀 테이의 '프랜차이즈 저택 사건'은 단순한 미스터리 소설이 아니다. 죽 얘기해 온 것 처럼 파시즘이 남기고 간 그 정신적 폐해와 공황 속에서 다시는 그러한 비극을 겪지 않기 위해 테이 스스로 생각하는 대안을 차근차근 문학적으로 형상화한 작품이다. 그렇다고 미스터리적 재미가 반감되는 것도 아니다. 개인적으로는 미스터리적 재미와 테이 스스로 천착하는 주제가 완벽하게 균형을 이루고 있다고 생각한다. 거기다 로버트가 매리언에 대한 짝사랑과 그의 잠재적 라이벌들에 대한 질투를 통하여 로맨스적 재미까지 덤으로 얻을 수 있다. 무엇보다 테이의 팬으로선 작가 자신을 그대로 녹여낸 듯한 매리언을 보는 재미가 꽤 쏠쏠하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언제든 반복될 지 모르는 파시즘을 어떻게든 막아내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과 가져야 할 것에 대해 교조적이지 않고 공감가능하게 문학적으로 형상화낸 솜씨에는 비견될 수 없다. 죠세핀 테이가 이 책을 통해 나타내고 있는 우려는 한시적이지 않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도 '프랜차이즈 저택 사건'과 똑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지 않은가! 책은 저마다의 운명이 있다고 하더니 정말 그런 것 같다. 이 책은 정말 딱 적당한 시기에 우리에게 도달한 것이다. 무분별한 판단과 성급한 비난을 하기 전에 한번쯤 지금의 나 자신은 어떠한 모습인가 되돌아보기 위해서라도 읽어둘만한 작품이 아닌가 싶다. 지금 이 순간 만큼은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해답을 해 주었다는 점에서 조세핀 테이에게 경배라도 바치고 싶은 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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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더욱 깊이 내려간 조세핀 테이의 '나사의 회전'...
    from 헤르메스님의 서재 2012-12-13 00:06 
    이럴수가! 제가 가장 사랑해마지 않는 여류 미스터리 작가인 조세핀 테이의 또 다른 스탠드 얼론 작품인 '브랫 패러'가 출간되었습니다. 작년에는 '프랜차이즈 사건'이 나와서 저를 들썩이게 만들더니 이번에는 '브랫 패러'로 또한 호들갑을 떨게 만드는군요. '브랫 패러'는 사실상 조세핀 테이의 스탠드 얼론의 마지막 작품입니다. 48년에 나온 '프랜차이즈 사건' 바로 다음 해. 그러니까 1949년에 이 작품이 세상에 나왔죠. 굳이 이 작품들을 스탠드 얼론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