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8, 우연히 데이브 거니 시리즈 1
존 버든 지음, 이진 옮김 / 비채 / 2011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Close Encounters of the Third Kinds! 

 존 버든의 데뷔작 '658, 우연히'를 읽고 났을 때 처음 떠올랐던 것은 이것이었다. 흔히 외계인과의 접촉을 일컫는,  '제3종과의 근접 조우'. 절대적으로 만나지 못할 이종(異種)과의 만남이기도 한 이 말만큼 이 작품이 이루어낸 성취에 걸맞는 말은 없다고 여겨졌다. 그는 정말 흔치않은 일을 해냈다. 고전 미스터리와 노르딕 느와르(NORDIC NOIR)적 세계를 그야말로 하나로 융합시킨 것이다. 사실 그 둘을 모두 즐겨온 팬으로서 자신있게 말하는 바이지만, 이 둘은 절대 만나지 않는 영원한 평행선 같은 존재였다. 고전 미스터리 장르에서는 노르딕 느와르가 보여주는 인간의 삶에 대한 깊이있고도 진지한 시선을 찾기가 사실은 어렵다. 그건 셜록이든 파일로 밴스이든 엘큘 포와로이든 다 마찬가지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삶에 대한 이해의 시선이 아니라 범죄로 인해 드러난 부르조아 세계의 결함을 제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노르딕 느와르도 마찬가지다. 해닝 만켈이든 아날두르 인드리라손이든 이들에게 미스터리 해결의 쾌감을 기대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들이 더욱 천착하는 것은 그 미스터리가 궁극적으로 지우고 싶어하는 사회의 얼룩을 절대 지우지 못할 것으로 만들어 만천하에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고전 미스터리와 노르딕 느와르는 물과 기름처럼 절대로 섞일 수 없는 것이었다.  그것은 삶에 대한 시각의 차이 때문이기도 했고 작가 자신이 서 있는 입장의 차이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독자들로서는, 그것도 양 쪽 모두를 좋아하는 독자들이라면 아무래도 이 사실 만큼 아쉬운 것도 없었다. 양적으로도 하나 보다는 둘이 나을 것이지만 질적으로도 이 둘이 완벽한 조화를 이룬다면 그 독서의 쾌감은 더욱 클 것이 분명하니까 말이다. 그러다 스티그 라르손이 그에 가까운 조화를 보여주었다. 파시즘을 그 근저에서 부터 거부하려는 라르손은 그의 주제의식에 걸맞은 미스터리로 그야말로 성공적으로 노르딕 느와르의 시각과 조화시켰다. 하지만 미처 거기에 환호하기도 전에 라르손은 불과 세 편의 작품만 남기고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고 그 '완성된 조화'를 보고싶은 열망 아닌 열망은 미처 꽃피우지도 못한 채 내내 지연되고 있었다. 

  그러다, 마치 루크레티우스의 빗방울 처럼 이 작가 존 버든이 나타났다. '658, 우연히'란 제목 그대로 문득 이마 위로 차디찬 빗방울을 느끼는 것 처럼 우연히 말이다. 

  존 버든의 이 소설은 하나의 접점이다. 리만 기하학과 같다고나 할까... 영원한 평행선일 것 같았던 고전 미스터리와 노르딕 느와르가 그야말로 한 점에서 감격적으로 포옹한 것과 마찬가지이니까 말이다. 스칸디나비아 반도와는 전혀 상관도 없는 뉴욕 출신의 미국 작가가 그것도 데뷔작으로 이런 성취를 이루어내다니 그저 경이로울 뿐이다. 이건 호들갑일 수도 있다. 좋다. 이왕 이렇게 호들갑을 떨게 된 것 더 떨어볼까. 나는 '658, 우연히'를 이 여름에 읽은 미스터리중 기꺼이 베스트 3의 하나로 꼽겠다. 

  작품에 대한 개인적인 감상은 이정도로 하고 이제 존 버든이 성취한 지점의 그 내막 속으로 한 번 들어가볼까 한다.  

 

 

 주인공 거니는 은퇴한 전직 형사다. 그렇다고 그가 나이가 많은 것은 아니다. 사실 그는 한창 일할 나이에 스스로 은퇴한 것이다. 그렇다고 형사로서 그가 문제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사실 그는 연쇄살인마를 몇 명이나 검거한 아주 유능하고 유명한 형사였다. 그런 그가 아내를 위해 뉴욕에서 벗어나 시골에서 조용하고 소박한 전원생활을 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하지만 전적으로 아내만을 위해서는 아니었다. 그러니까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가 형사일에 너무 열중한 나머지 그만 자신의 아들을 사고로 잃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그는 그 사고를 자기 탓으로 여겼고 은퇴하고 아내가 원하는 대로 전원생활을 하는 것을 일종의 속죄로 여겼다. 하지만 소설을 읽다보면 이것도 진짜 이유가 아닌 것 같이 느껴진다. 왜냐면 우리는 거니의 깊은 곳에 드리우고 있는 아버지의 그림자를 보게되기 때문이다. 일에만 열중해서 가족을 무심하게 내버려두었던, 그래서 어린 거니로 하여금 영원히 혐오하고 결별하게 만들었던 그 아버지의 그림자를 말이다. 사실 거니 역시도 아들 대니의 죽음을 떠올릴 때 그것을 깨닫는다. 바로 그 때의 자신의 모습이 그렇게도 혐오해마지 않았던 아버지의 모습과 똑같이 닮았다는 것을... 

 

  그렇게 이 작품의 중심엔 아버지가 있다. 

  사실, 이 리뷰의 시작을 이성복의 시 '그해 가을' 에 나왔던 이 문장으로 하려고 했었다. 

'아버지! 아버지 씹새끼 너는 입이 열개라도 말을 못해' 

  과연 이 문장 만큼 '658, 우연히'의 주제를 제대로 드러내는 말이 또 있을까 모르겠다. 이 말 그대로 여기의 심층엔 '아버지'에 대한 거부가 있다. 아니, 다시 말하면 프로이드가 '토템과 터부'에서 서양 문명의 근원이라고도 했던 '부친 살해'의 욕망이 있다. 소설의 모든 미스터리, 설정들은 사실 여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일단, 거니가 은퇴후 가지게 된 새로운 취미활동이 흥미롭다. 거니는 우연히 미술 수업을 들었다가 특히 사진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자기가 잡은 연쇄살인마의 머그 샷들을 하나의 작품으로 만드는데 몰입한다.  여기서 버든은 왜 거니에게 '머그 샷'이란 취미를 가지게 한 것일까? 여기엔 내가 보기에 두 가지 이유가 있는 것 같다. 하나는 '머그 샷' 자체가 가지는 투명성이다. 머그 샷은 범죄자가 유치장에 갇히기 직전, 그러니까 현실로 부터 격리되기 직전의 마지막에 찍는 사진이다. 그러니까 여기엔 어떤 꾸밈도 있을 수 없다. 오로지 있는 그대로의 투명한 모습을 드러낼 뿐인 것이다. 그렇게 버든은 그 진실한 모습을 그대로 담아낸다는 의미로 머그 샷을 가져온다. 그렇게 거니는 온전히 드러난 연쇄살인마의 얼굴을 본다. 그런데 버든은 왜 하필 그렇게 드러난 얼굴들에 거니를 그토록 집중시키는 것일까? 더하여 그들은 모두 거니가 제 손으로 직접 체포한 자들인 것이다. 바로 여기에 버든이 머그 샷을 가져온 두번째 이유가 있다. 특히나 버든은 거니가 자기가 체포한 자들의 머그 샷에 너무도 열중하고 있음을 아내의 불평까지 가미하여 강조까지 하는데 그가 그러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거니의 행위와 이 소설에서 거니가 승부하게 되는 연쇄살인마의 살인 행위가 동일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도대체 이 둘의 존재 포획 행위가 하나는 살인이고 하나는 사진인데 어떻게 동일하다는 것일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는데 그것은 머그 샷이 현실에서 격리되기 직전 마지막 찍는 사진이라는 것에서 똑같이 현실에서의 격리라고 볼 수 있는 죽음과 동일하다고 볼 수도 있기 때문이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연쇄살인마의 살인이라는 행위와 거니의 사진 보기가 궁극적으로는 '회상'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일임을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즉 연쇄살인마는 살인을 통해 자신의 기억을 환기시키는 것이고 거니는 자신이 체포한 자들의 모습을 통해 그 기억을 환기하는 것이다. '회상 혹은 환기'는 기억의 한 유형이지만 단순한 기억과는 미묘한 차이가 있다. 즉 외부에 있는 것을 그대로 기억하는 것, 그렇게 현실을 토대로 내용을 구성하는 것을 단순한 기억이라고 한다면 '회상 혹은 환기'는 거꾸로 기억하는 주체가 그 기억을 통해 임의적으로 현실을 구성하기 때문이다. 즉, '회상 혹은 환기'의 차원에서는 단순한 기억과 달리 주체가 아주 적극적으로 개입하게 되는데 바로 그 때문에 '회상 혹은 환기'는 정체성을 형성하는 아주 중요한 요소가 된다. 즉 버든이 여기서 '머그 샷'과 그 행위적 유사성을 가져오는 것은 바로 그 행위에 깔린 보다 근본적 의미, 즉 그들의 정체성 자체가 동일하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함인 것이다. 거니와 연쇄살인마가 결국 똑같은 존재라는 것은 작품 도처에서 나타나는데 일단 거니가 전원생활에 와서 주로 하는 것이 새관찰이었는데 연쇄살인마도 새관찰자로 행세한다는 것 그리고 둘 다 보호해야 할 여성이 하나씩 있다는 것 등등이나(보다 더 주요한 공통점은 스포일러상 말하지 않겠다.) 연쇄살인마가 피해자에게 보내는 메시지가 주로 그들의 기억을 환기시키는데 맞춰져 있다는 것에서도 나타난다. 

  그렇게 둘의 정체성은 동일하다. 차라리 도플갱어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그런데 그 거니의 정체성을 형성한 사람은 앞서도 말했듯 아버지였다. 그가 '머그 샷'을 보면서 내내 환기시키는 기억은 바로 형사로서의 기억이다. 그렇게 형사로서의 정체성이다. 때문에 아내는 그것을 싫어한다. 그 형사로서의 정체성은 아들 대니의 죽음과 더불어 바로 아버지의 아우라라는 것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들이 형사직을 버리고 뉴욕마저 떠난 것은 그 아버지의 그림자로 부터 달아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거니는 계속 머그 샷을 본다. 그렇게 그는 아버지의 아우라를 떠나지 못한다. 당연히 아내와의 사이도 좋을리 없다. 전원생활은 엉망직전이고 전처와의 사이에 난 아들도 여전히 나몰라라 하고 있다. 그렇게 그는 그토록 혐오하는 아버지의 자리에 붙들려 있다. 스킬라와 카리브디스 사이에... 한 마디로 진퇴양난. 

 연쇄살인마가 그 이름을 쓰는 것 역시 둘이 동일성을 나타낸다. 한 마디로 그것은 그야말로 거니의 현재 상황을 나타내는 말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개인적으로 이 책은 내게 운명처럼 여겨졌는데(운명을 예민한 감각이 우연히 겹쳐진 현실을 포착해내는 것으로 정의한다면) 그것은 바로 얼마전에 내가 '스킬라와 카리브디스 사이에'라는 말을 한 페이퍼의 제목으로 썼기 때문이다. 이런 우연적 겹침이 재미있었고 한편으론 그래서 더욱 이 작품에 몰입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가 이 진퇴양난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아버지의 그림자를 벗어나는 길 밖에는 없다. 그렇게 아버지를 영원히 죽이는 수 밖에 없다. 거니는 오디이푸스가 되어야 한다. 즉, 이 소설에서 거니의 모든 추적은 바로 프로이드가 말했던 부친 살해의 과정에 다름아닌 것이다. 

  아버지란 무엇인가? 왜 아들은 아버지를 살해하려는 욕망을 가지게 되는 것인가? 비단 지금 이 작품만이 그렇게 부친 살해의 욕망을 드러낸 것은 아니었다. 영화에서는 이미 92년에 제임스 그레이 감독이 자신의 데뷔작 '리틀 오뎃사'를 통해 공개적으로 아버지를 처형했었다(물론 아들은 직전에 아버지의 머리를 겨누었던 총구를 거둬들이지만...).  이 두 작품이 모두 데뷔작이라는 것에서도 어떤 기묘한 운명이 느껴지는데 제임스 그레이의 경우 아버지의 처형은, 뉴욕의 러시아인 거주지를 '리틀 오뎃사'로 부르는 것에 비추어 보자면, 사실 소련의 사회주의를 구석구석 질서지웠던 존재인 스탈린과도 같은 독재자 아버지의 처형이었다.  

 

                                                                       영화 리틀 오뎃사에서 아버지 처형 장면 

 

 말하자면 여기의 독재자 아버지는 라캉이 말했던 상징계의 질서 자체를 의미하는 아버지와 똑같다고 할 수 있다. 즉 제임스 그레이도 존 버든도 그리고 뒤이어 또 하나의 데뷔작으로 부친 살해를 감행할 존 하트의 '라이어'도 결국 죽이고 싶어하는 것은 이 질서를 떠 받치고 있는  상징적 존재로서의 아버지 자체인 것이다. 이것은 그냥 하는 억측이 아니고 바로 버든이 왜 범인으로 하여금 피해자에게 '1부터 1000까지의 숫자를 떠올리게 하고 그것을 단번에 맞추는' 트릭을 썼는지에서 바로 증명되는 것이다. 바로 그 트릭의 기저에 라캉의 말에 따르면 언어를 습득하는 즉시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아버지의 상징 질서에 편입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개인으로서는 도저히 달아날 수 없는 이미 구조화된 함정 자체가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즉 버든이 그러한 트릭을 전면에 가져온 것은 바로 이 부친 살해의 욕망이 현재 이들의 삶을 구조화하고 지배하고 있는 아버지라는 기표를 향하고 있는 것임을 드러내기 위해서인 것이다. 이것은 모든 범죄의 장소가 '집'이라는 것에서 더욱 강화된다. 

 

  그런데 왜 아버지를 살해하려는 것일까? 

  여기에 소설의 첫 희생자이자 거니를 범죄로 인도하는 존재이며 거니와 또 다른 유사한 존재이기도 한 멜러리의 '내면 분리 이론' 에 이어지는 다음과 같은 말은 정말 의미심장하다. 

"한 몸에 사는 두 사람의 고통보다 더 끔찍한 고통은 없다네...' (p.154) 

  생각해보면 멜러리도 알코올 중독의 과거를 간신히 지우고 새로이 인생을 살게된 자였고 다른 피해자들도 멜러리와 같았다. '알코올 중독'에서 벗어난 자들이었다는 점에서 그들을 모두 아버지의 질서에게로 편입된 자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그들이 두 사람의 고통을 가지게 된 것은 바로 아버지의 질서를 받아들였기 때문인 것이다. 이것은 거니도 마찬가지다. 그 역시 대니의 죽음이 아로새긴 상처가 있으니까. 그리고 그 상처가 아로새겨진 결정적 이유는 바로 거니가 아버지처럼 행동했기 때문이었다. 즉 이 모든 이들이 궁극적으로 두 사람의 고통을 한 몸에 새겨지게 된 것은 바로 '아버지'라는 존재 때문인 것이다. 때문에 부친 살해의 욕망은 바로 이러한 고통을 벗어나고자 하는 몸부림이며 더 나아가서는 아버지가 새겨놓은 질서를 해체하고 새로이 그들만의 질서를 이루고자 함이다. 

 

  모든 질서의 재구축은 구질서의 면모를 파헤치는데서 시작한다. 

  그래서 여기엔 그 과정으로서 '고전 미스터리' 기법이 작용하는 것이다. 고전 미스터리의 기법들은 결함을 제거하는, 다른 말로 치유하는 작용을 하니까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미스터리 기법은 어디까지는 구질서를 치유하는 것이지 새질서를 낳게하는 작용을 하지는 않는다. 아니 오히려 적극적으로 위협이 되는 새질서를 제거하는 작용을 할 뿐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모순적이지 않은가? 하지만 천만에. 바로 여기서 버든의 뛰어난 점이 나타난다.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스포일러상 말하지 못하겠고 곁가지 것들중 하나를 말한다면, 거니가 어디까지나 협력자로서 수사에 참여하는 것이지 경찰로 다시 복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여전히 유동적인 존재로 머무르고 있으며 경찰은 내내 그에게 비협조적이다. 버든은 집에서 조차 그가 자주 머무르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는 자주 차에서 잠이 들고 때로는 그 때 경찰로 부터 위협도 받는다. 버든이 거니를 이렇게 고립적인 존재로 만드는 것엔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바로 범죄자의 유사성 때문이다. 범죄자는 공공연히 경찰과 승부한다. 그는 범죄의 현장에서 은밀하게 자신의 존재를 끊임없이 알린다. 공개적으로 경찰과 게임을 벌이는 것이다. 거니와 범죄자는 동일하게 경찰과 적대적인 존재인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미스터리는 이전의 미스터리와는 다르게 작동된다. 즉 아버지의 질서를 굳건히 지키는 경찰과 싸우기 위해서 미스터리가 작동되는 것이다. 범죄자는 자신의 존재를 보이기 위해서(그렇게 너희의 질서는 결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거꾸로 미스터리를 제시한다. 일종의 구질서를 해체하기 위한 무기로서 제시하는 것이다.(그리고 결말에서 그 모든 것이 그 질서 자체를 와해시켜버리는 데 있음이 드러난다.) 바로 이 미스터리의 반전된 작동을 위해서 나는 버든이 그토록 거니와 범죄자의 동일성을 강조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동일한 존재라야 무기로 제시한 그것이 상대편의 치유가 아니라 바로 자신의 치유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자면 거니와 범죄자의 존재는 어떤 측면에서 엘리아데가 완전함의 이상이라 보았던 '양성(ANDROGYNE)'을 연상시킨다. 엘리아데는 한 인터뷰에서 양성과 자웅동체가 어떻게 다른 것인가에 대해 이렇게 대답한 적이 있다. 자웅동체는 그저 여성과 남성이 공존하는 것이지만 양성은 이 둘이 융합한 것으로 전혀 다른 종류의 인간 존재라고. 라캉의 말대로 언어를 습득한 그 시점에 바로 아버지의 상징 질서로 편입된다고 한다면 인간인 이상 그 아버지의 질서를 벗어나기란 어려울 지도 모른다. 어쩌면 바로 그것을 예상한 나머지 버든은 그들이 전혀 다른 종류의 인간 존재로 여겨질 수 있도록 치밀하게 설정했던 것은 아닐까? 

 

  여기까지의 내 얘기가 전혀 이해불가능하다고 한다면 전적으로 내가 범죄자의 진정한 목적과 결말에서의 버든의 연출을 빠뜨렸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작품의 결함이 아니라 스포일러상 내가 빠뜨린 '결함'의 책임이다. 서두에서 말한대로 이 작품은 정말 뛰어나다. 길이와 공개적인 리뷰라는 한계상 하고 싶은 말을 다 못한다는 게 안타까울 뿐이다. 그래서 더 이해되지 않는 리뷰가 될 것 같아 걱정도 앞선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이상 내가 할 수 있는 것도 없다. 그러고보니 내가 지금 스킬라와 카리브디스 사이에 서 있는 듯 하다. 역시나 운명...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녀고양이 2011-09-16 1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품의 중심에 '아버지' 라는 글을 읽으면서 정말 이건 노르딕 느와르인데,,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런 진한 부분은 결코 정통 미스테리에서 나오지 않으니까요. 분위기 자체가 다르잖아요. 이 작품은 거기에서 독특하군요. 땡기는걸요~ ^^

페이퍼를 읽다보니, 다른 책에서도 비슷한 느낌을 받은 적 있어요,
형사(잡는 자)와 범인은 비슷한 사고를 지녔다는, 서로 이해 가능하다는거, 하지만
행위는 다른 방향으로 흐른다는 그런 것이었죠. 어느 책인지 정확하게 기억은 나지 않네요.

즐거운 주말되셔요. 역시 멋진 리뷰세요.

ICE-9 2011-09-20 15:36   좋아요 0 | URL
지금에서야 들어와서 이제야 마녀고양이님의 댓글을 보았네요.
잘 지내시고 계시죠?
저도 '658' 읽으면서 미국 작가인데도 너무 '노르딕 느와르'적이라서 놀랐어요^ ^ 고전 미스터리 퍼즐을 푸는 것도 좋아하시고 노르딕 느와르의 분위기도 좋아하신다면 정말 추천드리고 싶은 작품입니다. 스릴러 작가의 경우 자신이 말하고 싶은 주제를 어떻게 표현할까 생각해보면 아무래도 주인공만이 아니라 그 범인에게도 투영을 시킬 것 같아요. 그 생각에 저는 범죄자의 범죄도 작품을 해석하는데 있어 꽤 중요한 단서로 여기고 있는 편이구요. 결국 잡고자 하는 자와 쫓기는 자는 어떤 의미에서 서로의 도플갱어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강한 편이죠. 니체의 말대로 괴물을 오래 들여다보는 자는 그 스스로도 괴물이 된다는 말이 있듯이... 칭찬의 말씀도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