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우주는 아직 멀다 마스다 미리 만화 시리즈
마스다 미리 지음, 박정임 옮김 / 이봄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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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우주는 아직 멀다'의 쓰치다는 나와 그리 다르지 않은 사람이다. 현재 삶에 썩 만족하지는 않으나 특별히 비관하지도 않는다. 사람들이 뒤쫓는 성공이니 돈이니 하는 것엔 별로 관심 없는데 그래도 한 번 사는 인생이니 이왕이면 제대로 살고 싶을 뿐이다. 그런데 정작 제대로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 몰라 늘 갈팡질팡 한다. 이 정도면 제법 괜찮다 싶다가도 또 어느 순간 곱씹다 보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나도 그렇다. 나랑 비슷한 고민을 하는 후배랑 술 먹다가 '인생에 정답이 어디 있어?' 호쾌하게 부르짖을 때도 있지만 삶의 피로에 찌든 선배가 푸념을 푹푹 늘어놓으면, 나도 저렇게 되겠지 하는 위기감이 퍼뜩 들어 정답을 알려줄 것 같은 책을 찾아다니기도 한다. 분명 이 책을 한달음에 읽었던 것은 쓰치다가 자조와 자위 사이, 자기 최면과 결심 사이를 쉴 새 없이 오고가는 나와 많이 닮아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정적인 점에서 그는 나와 다르다. 바로 질문이 많다는 것이다. 쓰치다는 자신을 둘러싼 세계에 대해, 닥쳐 온 상황에 대해 그리고 만나는 사람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한다. 나와는 반대다. 나는 그러지 않는다. 나는 질문 대신 매뉴얼을 마련한다. 질문 보다는 대응 방법을 먼저 고민하고 잘 해결하려 빈틈없이 준비한다. 질문과 매뉴얼은 근본적으로 다른 삶의 방식이다. 질문은 타자에 대한 관심의 표명이고 그것을 통해 나를 변화시키려는 움직임이다. 타자에 대한 질문은 필연적으로 자신에 대한 질문으로 돌아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매뉴얼은 자기 안위를 굳건히 하려는 노력일 뿐이다. 물론 매뉴얼도 타자에 대한 관심이 지대하긴 하다. 그러나 그 기저에 깔린 마음은 너무도 다르다. 질문은 타자라는 존재 자체에 대한 관심을 가진다. 하지만 매뉴얼은 어디까지나 그것을 통해 무사히 넘어야 하는 장애물로서만 관심을 가진다. 해결과 극복에만 초점을 맞추기 때문에 타자 자체 보다는 그의 약점이나 내게 유리한 점을 중심으로 보게 된다. 결국 나도 변하지 않는다. 나를 고수하기 위하여 타자를 내게 맞출 뿐이다. 쓰치다를 보면서 내게 이런 모습이 있다는 것을 깊이 깨닫게 되었다.

 그런데 나도 원래는 이렇지 않았다. 어릴 때의 나는 어른들에게 '넌 왜 이렇게 질문이 많냐?'는 말을 참 많이 들었던 아이였다. 내가 좋아했던 책도 백과사전이었다. 세상과 존재에 대해 너무나 호기심이 많았던 내게 백과사전은 그런 갈증을 해갈시켜줄 유일한 우물이었다. 수 십 권의 백과사전을, 책 등이 갈라져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반복해서 읽었다. 사람 일은 모른다더니 그랬던 내가 지금은 이런 모습이다. 이제는 아무 것도 질문하지 않는다. 나 자신에게조차 그렇다. 사회에 나온 이후로 내내 별로 다를 것 없는 일상을 영위하고, 매뉴얼로 대충 수습하는 것에만 급급하다 보니 어느새 나에 대한 것들이 뒷전으로 밀려나 버렸다. 그것을 쓰치다의 모습을 보고 비로소 알게 되었다. 내가 큰 것을, 정말 잃어버리지 말아야 할 것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그것이 바로 나다. 지금의 나는 나에 대해 말하는 것이 너무나 어렵다. 내 취향도, 성향도, 생각도 마찬가지다. 다른 주제에 대해선 달변 인데도 나 자신이 주제가 되면 눌변이다. 말 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매뉴얼의 말로는 이렇다. 자아의 상실이다. 계속 나만 고수하다 보면 나를 잃어버린다. 그런데도 때로는 이만하면 괜찮지 않아 만족하고 있었다니! 화끈거린다.

 처음 읽을 때는 너무나 많은 질문들이 거슬렸다. 뭘 이런 것까지 묻나 싶었다. 시시콜콜과 소심이라고 쓴 말풍선이 내 머리 위로 뭉게뭉게 떠올랐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것들 모두가 타자와 자신에 대한 관심이었고 결국은 나다움을 향한 도정이었다. 그렇게 쓰치다는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자신만의 대륙을 만들고 있었다. 나는? 나는 세계에 나를 끼워 맞췄다. 질문을 갖기 전에 타협했고, 관심보다는 단정이 먼저였다. 그래서 나는 상식과 주류 그리고 보편의 식민지가 되었고 알맹이만 놓고 보면 세상에 허다한 그렇고 그런 사람들에 불과한 익명의 존재라고 말해도 무방했다. 

 그리고 그건 내 탓이었다. 나는 삶이 무빙워크가 되길 원했다. 별다른 갈등과 고민 없이. 조금은 수월하게 목적지로 날 데려다줬으면 했다. 그것을 위해 나를 억눌렀다.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날 맞추었고, 그런 나를 되돌아보지 않았다. 쇼윈도의 마네킹이 입혀주는 대로 입듯이. 그랬던 결과, 나는 얼굴을 잃어버렸다. 누구도 마네킹의 옷을 기억하지, 얼굴을 기억하지 않는다. 이제 내게 필요한 것이 질문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이 무빙워크에서 내려, 제대로 가고 있는 것인지, 그 누구의 눈도 아닌 바로 나 자신의 눈으로 가늠해 보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물론 그 방향은 잃어버린 내 얼굴을 되찾는데 맞춰져 있을 것이다. 앞으로는 매뉴얼 보다 질문의 목록을 훨씬 더 많이 늘려가리라. 지금 이 순간 감히 마음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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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 - 위화, 열 개의 단어로 중국을 말하다
위화 지음, 김태성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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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화, 그는 '차이의 사유자'다. 그의 인생엔, 그의 소설 '허삼관 매혈기'에서 허삼관이 그토록 아끼던 첫째 아들 '일락'이 자신의 자식이 아니라는 것을 갑자기 알게 되는 것과 같은, 돌연한 변화의 순간들로 가득하다. 1989년 텐안문 사건이 하루 아침에 아예 일어나지 않았던 일처럼 되는 것을 보았고, 문화대혁명 시절엔 한 통의 편지로 혁명의 영웅이 되어 전국적인 추앙까지 받던 열 두살 초등학생 황솨이가 불과 2년 뒤에 마오쩌둥이 사망하자 이제는 거꾸로 인민의 적이 되어 몰락하는 것도 목격했다. 자신의 아버지 조차 원래는 중국공산당의 적인 지주 가족이었으나 할아버지가 가산을 모조리 탕진하는 바람에 정말 운좋게 타도 대상에서 벗어난 '격세의 수혜자'였다. 하지만 불운한 아버지도 있었다. 초등학교 1학년 때의 친구 아버지가 그랬다. 그는 위화에게 늘 웃어주던 친절하고 자상한 사람이었지만 조반파에 의해 갑자기 타도 대상으로 지목되고 온갖 괴롭힘을 당한 끝에 그만 우물에 뛰어들어 자살하고 말았다. 이 모든 것은 예측이 불가능했다. 한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아득히 넘어서 있었다. 그래서 위화는 이렇게 말한다.


 사실 그런 시대에는 한 개인의 운명을 결코 자기 것이라고 할 수 없었다. 모든 사람이 정치 상황의 파도에 따라 흔들렸고 자기 앞길에 행운이 기다리고 있는지 불행이 기다리고 있는지 아무도 알 수가 없었다.(p. 124)


 그의 삶에 그렇게나 많던 돌연()은 그의 말대로 한 개인을 그저 도구로만 생각하는 전체 때문이었다. 그는 그것을 영수(領袖)'로 표현한다. 영수는 모두가 박수칠 때, 그 박수를 받으며 위에서 홀로 치하 하듯이 손을 흔드는 사람이다. 위화에게 일상생활이란 '평범하고 사소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삼라만상을 담고' 있고, '사람들의 마음을 격동시키기에 충분할만큼 풍부하고 넉넉(p. 18)'한 것이지만 영수는 그 일상을 오로지 자신의 어록과 사상만 존재하는 하나로 만든다. 그 한 사람 때문에 삼라만상은 고유의 목소리와 존재 가치를 잃었고 결국 자신의 운명마저 좌우할 수 없게 되고 말았다. 위화는 처음으로 서점에서 문학 책을 살 수 있었을 때, 서점에서 책을 살 수 있는 유표가 50 장밖에 되지 않아서 책을 살 수 없었던 51 번째의 사람에 대해 말한다. 그 사람은 겨우 한 끗 차이로 오랜 시간 기다린 것에 대한 아무런 보상을 받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 후로도 마을에서 내내 가장 재수 없는 사람의 상징이 되어 평생 놀림을 받아야 했다. 이런 식으로 한 개인의 가치란 것이 영수에 의해 어이 없을만큼 쉽게 지워졌던 것이다.


 그래서 위화는 차이에 집중한다. 차이로 단일한 흐름에 균열을 만들고 하나의 목소리에 이질의 목소리를 집어넣어 분산시킨다.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이 바로 그의 독서였고 글쓰기였다. 그 시대엔 오로지 '마오쩌둥 선집'이라는 한 권의 책과 그 사상에 복무하는 '대자보'라는 하나의 글쓰기 유형만이 허용되었다. 하지만 위화는 시대를 거스른 독서와 글쓰기로 '차이의 사유자'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해 나간다. 개인의 격렬한 감정을 담은 문학을, 설령 그것이 앞과 뒤가 잘려나간 것이고 누군가 알 수 없는 글씨로 필사한 것이라 해도 걸신 들린 듯이 읽었고 글쓰기 또한 전체에 대한 봉사 보다는 개인의 감정과 생각을 드러내는 것을 지향했다.


 누구나 일생을 통틀어 표현하고 싶은 무수한 욕망과 감정을 품게 된다. 하지만 실제 현실과 개인의 이성과 지혜가 이를 억누르고 만다. 하지만 글쓰기의 세계에서는 이렇게 억압된 욕망과 감정을 충분히 표출할 수 있다. 나는 글쓰기가 사람의 심신 건강에 큰 도움이 되고 인생을 더욱 완전하게 만들어준다고 믿는다. 또는 글쓰기가 사람들에게 두 갈래 인생의 길을 갈 수 있게 해준다고 할 수도 있다. 하나는 현실의 길이고 다른 하나는 허구의 길이다. 이 두 가지 길은 건강과 질병의 관계와 같아서 하나가 강대해지면 다른 하나가 필연적으로 쇠약해진다. 내 현실에서의 삶의 길이 갈수록 평범해지는 것은 허구에서의 내 삶의 길이 갈수록 풍부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p. 147)



 그러므로 그가 문학을 하게 된 것도 필연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그런 영수의 시대도 지나갔다. 어느새 문화대혁명도 이미 30년 전의 과거가 된 것이다. 그렇게 벌어진 시대의 간극만큼 같은 언어도 이제 다른 뜻을 가지거나 달리 쓰이게 되었다. 위화는 그런 언어를 10개 선정하여 그것을 통해 시대의 변화를 담고자 한다. 그 단어가 바로 인민, 영수, 독서, 글쓰기, 루쉰, 차이, 혁명, 풀뿌리, 산채 그리고 홀유다.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는 그렇게 태어난 책이다. 시대는 물론 많이 달라졌다. 함부로 이름조차 부르기 힘들었던 마오쩌둥이 희화화되어 광고 간판에 등장하고 그 때는 밤새 자지않고 기다려야 겨우 살 수 있었던 책이 현재는 지천에 널려 쉽게 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폐지 값으로도 팔린다.


 하지만 달라진 것은 그런 외양 뿐이었다. 본질은 변한 것이 없었다. 영수는 지금도 존재했다. 바로 돈이었다. 자본 아래서, 한 개인의 가치는 그 때만큼 쉽게 지워졌다. 그 때나 지금이나 지방 권력이 휘두르는 문화대혁명식 폭력이 2006년을 기준으로 빈민으로 부를 수 있는 연 수입이 600위안 이하의 3천만 명(800위안으로 기준하면 1억 명)의 삶을 오로지 돈을 목적으로 가차없이 파괴하고 있었다.


 아이에게 사 줄 바나나 한 개 값이 없어서 부부가 우는 아이를 앞에 두고 자살하고, 한 초등학생 소녀는 이렇게 몸에 열이나고 아픈데도 너무나 가난하여 약 하나 사주지 못하는 부모에게 절망하여 자신이 가장 아끼는 스카프로 목을 매어 자살한다. 달라진 것은 없었다. 다만 그 때는 한 개인을 벼랑으로 내모는 폭력이 보였다면, 지금은 보이지 않을 뿐이었다. 더구나 현재의 중국은 그 때와 똑같이 이런 암흑의 현실을 묵살하고 있었다. 그 때는 모두가 평등해서 계급이란 것이 없었는데도 계급 투쟁을 강조하여 사람들의 희생을 강요했는데, 지금은 엄연히 존재하는 사회적 차별을 위장된 평등으로 은폐하면서, 풀뿌리(위화에 따르면 이 말은 비주류, 비정통 약자층의 대명사라고 한다)의 개인들이 당하는 모든 고통을 자신의 탓으로 여기게 만들고 있었다. 그러니 위화는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중국인의 진정한 비극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빈곤과 기아의 존재를 무시하는 것이 빈곤과 기아보다 더 무서운 것이다.(p. 215)


 오직 하나의 존재, 하나의 목소리만이 존재하는 사회에서 일상의 삼라만상을 복원하듯, 한 개인을 온전한 모습 그대로 건져내기 위한 것이 위화의 문학이었다. 그것이 차이의 사유가 지닌 임무였다. 그런데 이제 그 차이의 의미에 대해 달리 생각해야했다. 그 때는 오로지 전체에 의해 너무 쉽게 좌지우지 되는 개인의 운명을 구제하기 위하여 차이에 집중했지만 이제는 그 차이가 너무도 많아졌고, 현격했기 때문이다.


 30여 년이 지난 오늘도 우리는 여전히 ‘차이’라는 말을 반복하고 있다. 물론 오늘날의 차이는 공허한 사상의 차이가 아니라 실질적인 사회적 차이다. 빈부의 차이와 도농의 차이, 각 지역의 차이, 발전의 차이, 수입의 차이, 분배의 차이 등 무수한 차이가 존재한다. 사회의 거대한 차이는 필연적으로 과격한 집단행동과 개체행동을 유발한다.(p. 204)


 그 때는 자유가 되었던 차이가 이제는 자신을 가두는 감옥이 되고 있었다. 어린 아이들마저 자신이 처한 사회적 위치에 따라 바라는 소망이 달랐다. 부자 부모를 둔 아이는 진짜 보잉기를 원했으나, 시골의 가난한 소녀는 다만 새 운동화 하나만이라도 가졌으면 했다.


 우리는 현실과 역사의 거대한 차이 속에서 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커다란 꿈의 차이 속에서 살고 있다.(p. 216)


 그러니 이제 위화가 추구하는 차이는 예전 그대로일 수 없었다. 분리가 아닌 연대를, 차별이 아닌 존중과 대화를 이끌어 내는 차이가 되어야 했다. 그래서 그는 초심으로 돌아간다. 태어날 때부터 만났던 혁명의 진실을 다시 헤아려 보는 것이다. 글의 순서에서 이런 의도가 감지된다. 앞서 인용한 아이의 꿈은 '차이'의 마지막에 나온다. 바로 뒤이은 글의 제목은 '혁명'이다. 알고보면 혁명은 가장 커다란 차이를 만드는 행위다. 모든 혁명은 전 시대와 완전히 반대되는 것을 만들어내려 한다. 그 차이는 초기의 위화가 꿈꾸었던 차이와 그리 다르지 않다. 다름을 통한 고유한 개별성의 추구. 하지만 다시 회고한 결과, 그 때의 혁명이 다른 의미를 가진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토록 차이를 강조한 혁명이 그로 인해 오히려 쉽게 한 개인을 절망과 죽음으로 내몰았다는 것을.


 혁명이란 무엇인가? 내 과거 기억 속의 해답은 온갖 주장들로 뒤죽박죽이었다. 혁명은 우리의 삶을 알 수 없는 것으로 가득 채웠다. 한 사람의 운명이 하루아침에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하기 일쑤였다. 어떤 사람은 순식간에 하늘을 날았고 어떤 사람은 눈깜짝할 사이에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으로 추락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사회적 유대도 혁명을 따라 수시로 이어졌다 끊어지기를 반복했다. 오늘까지 혁명의 전우였던 사람이 내일은 계급의 적이 될 수 있었다.(p. 252)


 이것을 통해 위화는 차이를 통한 인정이 아니라 인정을 통한 차이를 추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타자의 존중을 바탕으로 한 개별성을 지향하는 것이다. 뒤에 나오는 '풀뿌리', '산채' 그리고 '홀유'는 이제 새로이 정립된 차이에 대한 시야로 담은 현재 중국의 모습이다. 여기서 '산채'와 '홀유'는 쉽게 말하면 가짜와 사기 보다는 덜한 거짓말을 뜻한다. 덩샤오핑의 개혁개방으로 중국의 풀뿌리 계층은 경제권력을 재분배 받았지만 오히려 '혈두'가 그랬듯이 자신과 같은 풀뿌리 계층 사람들을 더 많이 착취 했고 그것을 통해 스스로 산채 귀족처럼 행세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참된 삶인양 '홀유'까지 했다. 특히나 사회적으로 '산채'는 중국 강자 집단에 대한 약자집단의 혁명행위처럼 되어 가짜와 진짜의 경계를 없애버렸고, '홀유'는 거짓의 정당화로 중국 사회의 윤리와 도덕성 결핍 그리고 가치관의 혼란을 가속화시켰다. 그 결과,인간 관계의 파편화는 점점 심해지고 갈등과 적대가 빈번하게 일어났다.


 위화의 문학은 이제 그것들을 관통해나가야 했다. 결국 그는 자신의 문학을 다시 정립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그에게 문학이란 단일한 전체에서 쉽게 떨어져 나갈 수 있는 개인을 위한 것이 되었다. 누구도 돌아다보지 않는 자들, 쉽게 잊혀져 버린 자들, 지워져 버린 자들. 목소리와 자기 존재마저 잃어버린 자들. 위화의 문학은 바로 그들 곁에 자신의 자리를 찾은 것이다. 가장 약한 자에 대한 존중과 대화를 통해, 사회가 망각하고 고의로 삭제하는 차이를 복원하는 것. 그것이 위화의 문학이 나아갈 길이었다. 나는 그것을 무엇보다 어린 시절 그가 즐겨 찾았던 영안실에서 우연히 들었던 울음소리에 대한 추억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10년이라는 세월 동안 나는 이 세상에서 들을 수 있는 거의 모든 울음소리를 다 들었다.(…) 나는 울음소리 속에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친밀함과 간절함이 담겨 있다고 느꼈다. 고통과는 비교할 수 없는 그런 친밀함과 간절함이었다. 한동안 나는 이런 울음소리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감동적인 노래라고 생각했다.(p. 107)


 그 울음소리는 지금 막 죽은 누군가를 위해 가족이 낸 울음 소리였고, 그렇게 세상은 들을 수 없는, 오직 위화만이 들을 수 있는 울음소리였다. 그는 그 소리를 세상에서 가장 감동적인 노래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자신의 문학은 바로 그 울음소리를 들려주는 것이라 생각한다. 나는 그의 소설 중 최근에 나온 '제7일'이 이런 이유로 유령의 목소리로 채워졌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런 울음의 의미를 온전히 들려주는 것. 듣는 자가 설령 다른 시대, 다른 나라, 다른 민족, 다른 언어, 다른 문화에 속한 사람이라 하여도 그 소리에 공감할 수 있도록 하는 것. 그것이 문학이 가진 신비한 힘이며 위화는 자신의 문학이 바로 그런 힘을 갖게 되길 바란다.


 만일 문학에 정말로 신비한 힘이 존재한다면 나는 아마도 이런 것이 그 힘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독자로 하여금 다른 시대, 다른 나라, 다른 민족, 다른 언어, 다른 문화에 속한 작가의 작품 속에서 자신의 느낌을 읽을 수 있게 하는 힘 말이다.(p. 108)


 나는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를 이렇게 읽었다. 내게 이 책은 개인의 가치가 보잘 것 없는 시대를 연이어 살았던 작가가 헌신해야 할 문학의 방향을 찾아가는 이야기로 다가왔다. 글의 마지막에 울음소리를 언급한 것은 이것이 위화 문학의 핵심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지금 우리에게도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우리에겐 세월호 참사를 비롯하여 많은 아픔들이 있었다. 그로 인한 울음소리를 모으면 분명 하늘을 몇 겹이나 덮고도 남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 우리 사회는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지 못했다. 그러기는커녕 울음을 막고 호소하는 목소리마저 지워버리려 애썼다. 이유 같지 않은 이유로 그들의 아픔을 정당화시키고 온갖 거짓으로 그들의 진심을 왜곡하여 사회적 비난마저 감수하도록 만들었다. '산채'와 '홀유'는 이렇게 우리나라에서도 버젓이 일어나고 있는 일인 것이다. 문학에게 사회적 책임이 있다는 말을 흔히 한다. 그 책임이란 것이 단순히 자신이 말한 내용에 책임을 진다거나 사회에 대해 뭔가 발언한다는 정도의 의미는 아닐 것이다. 아마도 진짜 의미는 사회가 쉽게 무시하고, 돌보지 않는 자들과 그들의 아픔을 시야에 담아, 그들의 목소리를 들려주는 것에 있지 않을까 싶다. 위화의 이 책은 내게 문학의 진정한 사회적 책임이 뭘까 내내 생각하게 만들었다. 우리의 문학은 지금 어디로 향해야 할까 거듭 곱씹게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위화의 방향이 맞는 것 같다. 쉽게 묻히고 왜곡되는 우리 사회의 가장 약하고 아픈 자들의 울음소리를 온전히 듣게 하는 것이 문학이 중시해야 할 태도가 아닐까 싶다. 아니, 그렇게 해줬으면 좋겠다. 아직은 쉽사리 들을 수 없는 많은 울음소리가 위화의 이 책을 통해서라도 더 많이 흐를 수 있게 되길 바란다. 정녕 그들의 울음소리가 빛보다 더 멀리 전해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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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의 밤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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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독교에서 숫자 '7'은 '절대' 혹은 '완전'을 뜻한다.  따라서 제목인 '7년의 밤'을 기독교적 의미로 풀이하자면 그냥 7년이 아니라 무한한 세월 내내 지속되는 밤이 된다. 그 밤은 말 그대로 도저히 헤어나올길 없는 '절대'의 밤이다. 구원의 가능성이 전혀 없는 완전한 암흑의 밤. 소설의 주인공 '서원'이 보낸 지난 7년의 밤은 정녕 그랬다. 그의 아버지가 일으킨 '세령호의 재앙' 때문에 서원은 7년 동안 늘 쫓겨다니며 정처없이 지내야했고, 어디서든 언제 쫓겨날지 모르는 두려움에 떨며 밤을 하얗게 지새워야했다. 그 7년은 오롯이 불면의 밤이었다. 그는 아버지를 원망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가 당하는 기나긴 불면의 밤이라는 고통은 오로지 아버지가 일으킨 사건 때문이고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당해야 하는, 그렇게 아버지가 던져준 운명이니까. 한 번 읽으면 뇌리에서 쉽게 사라지지 않는 인상적인 소설의 첫 문장, '나는 내 아버지의 사형집행인이었다'는 이런 서원의 마음을 잘 나타낸다.

 하지만 소설은 제목 그대로 7년간 서원이 가졌던 고통의 밤을 담지 않는다. 소설은 과거로 뛰어든다. 서원이 왜 그러한 밤들을 맞게 되었는지, 원인을 추적한다. 과거의 복기. 서원의 아버지가 어쩌다 그만한 사건을 일으켰는지, 그 과정을 충실히 재현하는 것이다. 그 시간은 서원에게 원죄의 순간이다. 성경으로 치자면 창세기다. 인간이 창세기의 아담과 하와의 죄 때문에 현재도 남자는 노동으로, 여자는 출산의 고통으로 형벌을 치르고 있듯이, 서원 또한 아버지의 죄로 현재의 고통을 치르고 있으니까. 원인이 자신에게 있지 않으니, 그가 고통 가득한 불면의 밤을 벗어나기 위한 길은 이제 단 하나밖에 없다. 원죄가 잉태된 시간 속으로 뛰어드는 것. 소설의 복기는 필연적이고, 오직 그 시간만이 서원에게 구원을 줄 수 있다.

 그렇게 재현된 원죄의 시간 속 세계는 어떠했나?

 편의상, 그 세계를 둘로 나눌 수 있다. 바로 '오영제'의 세계와 '강은주'의 세계로 말이다. 굳이 이 둘의 이름으로 부르는 것은 그들이 각자 자신의 세계에서 정점에 서 있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정점이란 그들이 가진 힘을 기준으로 표현한 것이다. 권력은 흔히 타인의 의지를 무시하고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킬 수 있는 힘으로 정의된다. 그렇다면, 오영제와 강은주는 진정한 권력자다. 그들 모두는 상대방의 의지와 상관없이 자의로 정하고 그 자리에다 있도록 만들 수 있다. 서원의 원죄는 결국 이들의 권력이 낳은 것이었다. 원죄가 태어난 당일, 오영제는 희생자인 오세령을 바깥으로 내몰았고, 강은주는 남편 최현수를 '세령호'로 내몰았다. 그리하여 세령호의 재앙도 초래했다. 뱀이 하와와 아담에게 죄를 짓게한 것과 똑같이, 그들이야말로 서원의 고통을 가져온 실질적인 장본인이었다.

 물론 여기에 대해선 하나의 반론이 제기될 수 있다. 강은주는 오영제의 고용인이니 사실 권력에 정점에 선 자는 오영제 하나라고 해야하지 않느냐고. 마치 이런 반론을 예상이라도 한 듯, 작가는 정점에 서 있는 자들에게 한 가지 특성을 더 부여했다.

 바로 감정 표현에 있어 타인의 눈치를 안 본다는 것으로 말이다. 오영제와 강은주는 소설에서 가장 극렬하게 자신의 감정을 표출하는 사람이다. 대부분은 분노인데, 주로 자신의 권력이 제대로 힘을 발휘하지 못할 때 그러하다. 분노와 폭력으로 휘청거리는 자신의 세계 질서를 바로잡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감정을 쏟아내면서도 타인의 감정을 절대적으로 무시할 수 있는 자는 오로지 권력의 정점에 선 자 뿐이다. 그렇기에 강은주도 비록 오영제의 피고용인이나 정점에 서 있는 자인 것이다. 그것은 고용주인 오영제와 대면할 때 드러난다. 자신의 세계를 안정시키기 위해 강은주는 자주 오영제에게 이런 저런 요구를 하는데, 그런 요구를 함에 있어서 결코 오영제의 눈치를 안 본다. 언제나 당당하게 요구한다. 그로인해 오영제의 분노가 촉발 되어도 상관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강은주는 오영제에게 종속된 존재로 볼 수 없다. 작가는 어쩌면 이 사실을 이름을 통해서도 밝히고 있는 것 같다. 오영제에겐 제왕을 뜻하는 '제'가 들어있고, 강은주에겐 주인을 뜻하는 '주'가 들어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이렇게 정점에 서 있다는 그들의 지위는 똑같지만, 그들의 세계 자체는 다른 것을 나타낸다. 한 마디로, 오영제의 세계는 '권력'을, 강은주의 세계는 '돈'을 상징한다. 어째서 그러한가? 그것은 바로 권력과 돈의 속성이 오영제와 강은주가 지향하는 목표와 일치하기 때문이다. 오영제는 자신의 세계가 늘 자신이 설정한 형태 그대로 유지되길 원한다. 즉 오영제의 세계는 현상유지를 추구한다. 강은주는 늘 자신의 세계가 확장되길 바란다. 그녀가 어린 시절 늘 꿈꾸었던 것은 쪽방에서 탈출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언제나 보다 넓은 집에서 사는 것을 원했고 그 때문에 그 꿈을 이뤄줄 자본을 뒤쫓았다. 이 현상유지와 확장은 그대로 권력과 돈의 속성과 일치한다. 권력은 현재의 질서가 늘 똑같이 고정되도록 만드는 습성이 있고, 돈은 외부로 끊임없이 증식하는 습성이 있으니까. 이런 의미에서 오영제와 강은주의 세계를 권력과 돈의 세계라 달리 부르는 것도 가능하다. 그런데 권력과 돈, 이 둘은 지금의 현대인들이 가장 욕망하는 대상이기도 하다.

 어떻게 보면 현대인들은 권력과 돈 사이에 끼여 있다고도 말할 수 있다. 톱니바퀴 사이에 끼여 있는 존재가 톱니바퀴를 따라 돌 수밖에 없듯이, 그만큼 권력과 돈도 자기를 중심으로 움직이도록 현대인의 영혼을 깊이 지배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이렇게 보면, 이제 우리는 가련한 희생자들인 '오세령'과 '최현수'를 달리 해석하게 된다. 바로 우리 현대인들의 서글픈 자화상이라고 말이다. 이것은 오세령과 최현수가 오영제와 강은주에게 당하는 형태로 더욱 뚜렷하게 드러난다. 권력은 폭력으로, 돈은 욕망으로 현대인을 지배하고 길들인다. 폭력은 육체로 직접 가해진다. 똑같이 오영제는 오세령을 학대한다. 돈은 무한 증식을 향한 자신의 욕망을 남들도 갖도록 만든다. 그것도 스스로 원해서 그러는 것처럼 생각하도록 만들면서 말이다. 똑같이 최현수는 강은주의 욕망을 자신의 욕망으로 알고 기계처럼 강은주의 욕망을 이루며 살아간다. 이렇게 오세령과 최현수는 동일한 부류의 사람들이다.

 그런데 오영제와 오세령, 강은주와 최현수가 이루는 세계는 서로 차별되는 또 다른 특징이 눈에 띈다. 그것은 우리나라 역사와도 상관있다. 

 현상유지를 향한 권력이 폭력으로 발현되는 오영제, 오세령의 세계는 우리나라의 80년대를 연상시킨다. 이와 마찬가지로, 모든 것이 오로지 돈을 중심으로 돌아가며 그것을 향한 욕망만이 가득한 강은주, 최현수의 세계는 IMF 이후, 더욱 거세진 돈에 대한 집착이 거대한 사회적 조류로 일관되게 흐르고 있는 오늘까지의 우리나라를 어쩔 수 없이 떠올리게 만든다. 그러므로, 오영제와 강은주의 세계는 현재이자, 과거이다. 그것은 중첩되어 있다.

 왜 작가는 여기에 과거의 시간까지 겹치게 만들었는가?

 이 시간적 특성이 내게는 중요한 것으로 생각된다. 바로 여기서 독자가 참여하는 공간이 열리기 때문이다. 오세령과 최현수가 우리의 서글픈 자화상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보라. 그렇다면 각각의 시간들, 그러니까 오영제의 80년대와 강은주의 96년 이후가 현재 우리의 고통을 낳은 원죄의 시간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것은 그대로 소설의 구성과 일치한다. 서원이 현재의 고통을 풀기 위해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그 원죄의 시간을 복기해야 하는 것과 똑같은 것이다. 우리도 그러하다. 우리 역시도 오늘의 고통에서 제대로 헤어나려면 고통이 발아된 원죄의 시간 속으로 들어가 그것을 제대로 직시해야 한다. 직시(直視)는 정유정 작가가 소설에서 한결같이 추구하는 삶에 현상된 고통에 대한 윤리적 태도이다. 그녀는 어떤 것이든 진정한 대면 없이는 극복하기 힘들다고 말한다. 그것이 죄로 인한 것이면 더욱 그러하다. 그래서 과거로 데려가는 것이다. 원죄가 태어났던 그 시간 자체로. 그녀는 독자 역시도 그렇게 되길 바란다. 그리하여 오영제와 강은주의 시간은 이렇게 과거의 시간적 특성까지 지니게 된 것이다.

 이로써 더욱 분명해진다. 오세령과 최현수가 당했던 고통이 바로 지금 우리가 당하는 고통이며, 동시에 우리 역시 서원의 자리에 서 있다는 것이 말이다. 서원이 가졌던 7년 동안의 불면으로 가득한 밤들은 사실 우리 모두의 밤이었다. 서원처럼 우리 역시 권력과 자본 사이에 끼어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잃었고, 그 때의 원죄가 낳은 사회의 구조적인 모순 때문에 현재까지도 불가피하게 고통을 당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7년의 밤'은 결코 소설로 그치지 않는다. 서원의 여정은 그대로 우리가 밤에서 빠져나오기 위한 여정인 것이다. 오영제와 강은주, 두 세계가 수렴된 '세령호'는 그야말로 지금 우리 삶의 축소판이다. 

 그렇다면, 작가는 구원의 여정을 어떻게 드러내는가?

 바로 문하영과 최현수 그리고 안승환과 최서원을 통해서다. 물론 그들은 같지 않다. 오히려 정유정 작가가 집요하게 추구하는 테마인 직시(直視)에 대해서라면 정반대다. 한 쪽은 직시를 거부하고 다른 한 쪽은 적극적으로 직시하려 든다.

 직시(直視)를 거부하는 존재들은 세계의 폭력적이고 부조리한 면모를 획책 하지는 않았어도 그 존속에는 일조하는 사람들이다. 오영제의 아내 문하영과 강은주의 남편 최현수(여기서 앞서 말한 부조리란, 강은주의 욕망을 최현수가 자신의 욕망으로 알고 강은주의 욕망에 봉사하는 것을 두고 한 말이다.)가 여기에 속한다. 그들은 도피와 방관을 통해 세계의 폭력과 부조리가 지속되는 것에 일조한다. 문하영은 자신의 딸이 오영제에게 학대받는 것을 보면서도 혼자 도망친다. 더구나 오세령이 남편의 학대 끝에 숨졌다는 것을 알면서도 엄마가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자신의 도피가 그저 자기 혼자만 어떻게든 피하고 보자는 얄팍한 심리의 발현이었다는 것을 그녀는 이렇게 스스로 증명한다. 최현수는 방관한다. 강은주가 자신에게 요구하는 것들이, 그리고 그 요구에 맞춰 사는 삶이 결코 옳지 않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늘 묵묵히 감내한다. 엄청난 거구의 몸을 가졌으면서도 그런 태도 때문에 그는 언제나 겁먹은 사슴처럼 행동한다. 때로는 사랑이라는 것으로, 때로는 가장의 책임이라는 것으로 불행을 가져오는 원인을 똑바로 직시하지 않는 것을 정당화하면서 내일은 더 나으리라는 막연한 기대에만 의지하여 방관으로 일관한다. 이렇게 문하영과 최현수는 똑같은 존재들이다. 그들 모두 불행의 원천을 직시하기 보다는 어떻게든 피하고 미루기만 하느 것이다. 그 결과, 얼른 단절되어야 하는 세계의 폭력과 부조리가 항구적으로 지속된다.

 결국 하나의 파국과도 같이 오세령이 희생된다. 기이하게도 작가는 오세령의 죽음 장면에서 엄마인 문하영의 이미지와 아빠인 최현수의 이미지를 오세령에게 하나로 통합한다. 즉 오세령은 엄마의 복장을 한 채, 차에 부딪히고 최현수를 아빠라고 부르며 강물 속으로 가라앉는 것이다. 오세령은 문하영과 최현수의 교집합 같은 이미지로 희생된다. 이렇게 하여 작가는 그들의 방관이 아무런 구원을 가져오지 못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도피와 방관은 더 커다란 비극을 부를 뿐이라는 것을 말이다.

 단적으로 최현수를 보면 알 수 있다. 오세령의 죽음을 직시하지 않고 회피만 했었던 최현수는 끝내 마을 전체마저 세령호 아래로 수몰시켜버렸다. 한 사람의 수장이 한 마을의 수몰로 거대해져 버렸다. 이보다 더 어떻게 도피와 방관이 가져오는 것은 단지 더 큰 비극 뿐이라는 것을 명확하게 보여줄 수 있을까? 그런데 이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물에 가라앉힌다는 것은 방관을 비유하는 행위다. 수면 아래로 가라앉히게 되면 직시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 마을의 수장 역시 방관에 해당된다. 서원은 그것으로 인해 7년 동안 가장 끔찍한 형태의 벌을 받았다. 서원은 최현수의 삶에 있어서 가장 소중한 것이었다. 작가는 이렇게 세령과 마을의 수장 그리고 서원으로 이어지는 연쇄를 통해 방관의 경로가 비극의 확장 밖에 없다는 것을 선명하게 도려낸다.

 이런 그들의 태도가 어딘가 낯이 익다면 그것은 아마도 거울처럼 우리의 모습을 비추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문하영과 최현수는 우리와 그리 먼 존재가 아니다. 사실은 우리와 닮은 모습이다. 그것도 '세월호 참사' 이후의 우리 모습을 말이다. 이 소설이 마치 어떤 예언처럼 보이는 것은 '세령호'와 '세월호'가 유사하다는 점에 있는 것 같다. 거기다 회피와 방관이 비극을 초래했다는 것마저 어찌나 흡사한지.

 '7년의 밤'은 '세월호 참사' 이후, 더욱 소설로만 읽을 수 없는 작품이다. 여기엔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모습의 자화상이 선명하게 그려져 있을 뿐만 아니라 거기에 대해 아주 분명하게 경고하고 있어 읽을 때 더욱 부끄러움을 느끼게 된다. 소설은 분명하게 경고했다. 어떤 비극적인 사건이 생길 때마다 그것에 대해 직시하고 분명하게 성찰하지 않으면 계속해서 더 큰 비극이 중첩될 것이라고. 이 소설이 나온 2011년 벽두, 우리는 용산 참사를 겪었다. 우리는 분노했지만 그것은 잠깐에 불과했고 언제나 그랬듯이 곧 잊었다. 내게 닥쳐온 일이 아니었기에. 결국 뒤이어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다. 역시나 방관과 무관심 속에 흐지부지 되는 것 같더니 메르스 사태가 발생했다. 사건은 점점 더 우리 가까이 다가왔다. 마치 '이래도 남의 일처럼 방관할래?' 하는 것처럼.

 오세령의 죽은 모습엔 작가의 숨은 뜻이 하나 더 담겨 있다. 작가가 하필이면 문하영과 최현수를 통합시키면서 오세령을 죽게 한 것은 문하영과 최현수를 가해자로 비난하기 위해서였다. 우리는 그들 역시 피해자라는 것을 잘 안다. 하지만 작가는 오세령의 죽음을 통해 그들의 피해가 그들의 가해를 정당화시키지 못한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 영화 '올드보이'에 여기에 딱 맞는 대사가 있다. '절대 고의로 그런 것은 아니야'라고 말하는 오대수에게 유지태가 분한 인물은 이렇게 대답한다. "모래알이나 바위나 물에 가라앉는 것은 마찬가지다."라고. 똑같이 작가는 오세령의 죽음으로 회피와 방관 역시 가해자들만큼이나 책임이 있다고 지적한다. 때문에 그것에 대한 대가로 그들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히 여기는 존재들에게 고통을 가차없이 가하는 것이다.

 그럼,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것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안승환과 최서원이다. 앞서 이 소설이 서원이 행하는 과거의 복기라고 말했다. 그대로 이것은 서원이 문하영과 최현수와 달리 자신의 불행을 낳은 근원을 직시하려는 움직임이다. 안승환도 마찬가지다. 작가는 공교롭게도 똑같은 직시의 태도를 보여주는 안승환과 최서원을 동일하게 잠수부로 만들었다. 그들이 하는 일은 주로 물 아래 가라앉힌 것들을 건져내는 것이다. 안승환은 소설 초반 잠수부로 등장하여 '세령호' 아래 잠긴 마을을 관찰한다. 즉 아무도 보려하지 않던 수몰된 마을을 그는 직시하는 것이다. 최서원은 해류에 떠밀리다 실종된 잠수부 하나를 건져낸다. 이것은 그대로 세령호에 잠긴 오세령과 이어진다. 최현수가 가라앉힌 존재를, 그의 아들인 서원이 건져내는 것이다. 한 쪽엔 가라앉히는 자가 있고, 다른 한 쪽엔 건져내는 자가 있다. 직시를 거부하는 태도가 가라앉히며 적극적인 직시의 태도가 건져낸다. 한 쪽은 죽음을 초래하고 은페시켜 더 큰 비극을 양산했고 다른 한 쪽은 생명을 건져내어 비극을 종결시켰다. 너무나 선명한 대비가 아닐 수 없다. 작가의 대안이 어디에 있는지 바로 알 수 있다.

 이것을 더욱 확실하게 보여주는 게 있다. 바로 안승환을 작가로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안승환은 원죄가 태어났던 날 밤, 세령호에서 정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소설로 쓴다. 진실을 찾기 위하여. 서원의 과거 복기는 바로 그 소설을 중심으로 이뤄진다. 이보다 더 어떻게 직시의 태도를 명확하게 보여줄 수 있을까? 결국 이것을 통해 서원은 그토록 바랐던 구원을 얻는다.

 어떤 소설들은 자신이 상정했던 수명보다 훨씬 더 오래 살아남는다. 시대가 소설을 요청하기 때문이다. 그런 소설은 시대가 가장 시급히 답을 구하는 문제에 대해 응답할 수 있기에 요청받는다. 나는 '7년의 밤'이 그렇다고 본다. 이 소설은 나온 당시보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금에 더 널리 읽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더구나 지금은 '강남역 묻지마 살인'과 같은 여성 혐오 범죄, '구의역 스크린 도어 기사 사망 사건'과 같은 열악한 노동 계층에 대한 차별 문제, '흑산도 여교사 특수 강간'과 같은 인격 침해 범죄들이 곳곳에서 봇물 터지 듯,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는 사건과 사고의 원인과 대책에 대한 성실한 직시(直視)없이, 어떻게든 일부에게 일어난 특수한 사건으로 무마시키거나 껍데기 뿐인 대책으로 덮으려고만 한다. 문하영과 최현수가 했던 것과 똑같이 말이다. 하지만 그것이 줄 수 있는 것은 오직 더 큰 커다란 비극밖에 없다는 것이 소설에서나, 현실에서나 뚜렷하게 밝혀진 바다. 언제까지 우리는 이 바보 놀음을 계속할 것인가? 이제 진지하게 안승환과 최서원의 직시(直視)를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얼마 전, 정말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다. 세월호와 함께 수장된 아이들 시신을 건져올렸던 민간 잠수사가 돌아가셨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 분을 세월호 청문회 자리에서도 보았고, 정청래가 컷오프 된 날 시민들이 더불어민주당 당사 앞에서 필리버스터를 할 때도 보았다. 세월호 진실 규명을 위해 일한 사람을 아무 이유없이 잘랐다며 강하게 성토했다. 박주민 변호사가 선거 운동을 할 때도 누구보다 열심히 참여했던 분이라, 설마 그렇게 돌아가시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그는 차가운 물 속에서 서로 얽혀 있는 아이들 시신을 '엄마 만나러 가야지' 달래면서 건져낸 사람이었다. 세월호가 얼마나 참혹한 참사였는지 정면에서 직시(直視)한 사람이었고 그랬기에 다시는 이런 비극이 없어야한다는 누구보다 확고한 생각으로 세월호 참사의 진실 규명을 위해 노력한 분이었다. 비록 안타깝게 유명을 달리하셨지만, 직시가 어떤 삶을 살도록 하는지 그분의 생애만큼 잘 보여주는 것은 없다고 생각된다. 소설에서 유일하게 진실을 직시하려 했던 이들이 잠수부였기에, 그 분을 보면서 '7년의 밤'이 많이 떠올랐다. 그래서 이렇게 쓰게 되었다. 사실 이 분의 죽음은 우리 책임이다. 우리의 회피와 방관이 이 분을 죽게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회피와 방관이 있는 한, 비극은 이렇게 계속될 것이다. 고통과 불안만이 가득한 불면의 밤은 언제까지나 끝나지 않을 것이다. 이제 그 밤을 응시해야 할 때다. 어둠에 대한 정직한 대면과 적극적인 참여만이 비극의 연쇄를 끊을 수 있다. 이 소설과 한 민간 잠수사의 삶을 보면서 난 진실로 그렇게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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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6-06-20 0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이 책을 읽으려고 시도하다가 결국 손을 놓았던 기억이 있네요.
읽을 수가 없었어요. 맘이 불편했어요. ㅠ

세월호 잠수부가 돌아가셨다는 뉴스, 저도 봤어요. 찹찹하고, 사회가 어찌 돌아가고 있는지 모르겠고.
응시해야 할 사건들이 하나가 아닌, 점점 수십 개로, 수백 개로 늘어나는 느낌에, 지치는 느낌도 들어요.
그래도..... 그 밤들을 응시해야겠죠, 끝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ICE-9 2016-06-22 02:44   좋아요 0 | URL
지금 새벽인데 잠이 안 와서 글이나 쓸까 들렀다가 마녀고냥이님 댓글을 이렇게 발견하네요.^^
지금 제가 세상을 보며 느끼는 기분이 마녀고양이님과 비슷한 것 같아요. 선거 이후로 더 실망하고, 요즘은 고인이 되신 분 소식도 있고 해서 제법 우울하네요. 이럴 때는 특히 기독교적 구원관에 매달리곤 합니다. 그것은 세계 때문에 개인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개인 때문에 세계가 존재한다고 말하죠. 한 사람의 선의와 그 지속이 세계 전체를 지탱하는 것이라고. 소돔과 고모라가 단 한 명의 선인이 없어서 파멸 되었듯이. 세월호 잠수부 님도 그 중 한 분이셨을 겁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건 그런 분들이 부디 조금이라도 더 오래 버텨주시길,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세계가 조금은 더 아나지기를 기도하는 것 뿐입니다. 누구는 그래 봐야 지옥이 더 지속되는 것 뿐 아니냐라고 하겠지만...
 
애프터 안나
알렉스 레이크 지음, 문세원 옮김 / 토마토출판사 / 2016년 5월
평점 :
절판


 부모에게 일어날 수 있는 가장 끔찍한 일 중 하나는, 세상에서 단 하나밖에 없는 자식이 누군가에게 유괴되는 일일 것이다. 그런데 그런 일이 로펌의 변호사로 일하고 있는 줄리아 크라운에게 일어나고 말았다. 그녀의 하나밖에 없는 딸, 다섯 살 안나가 누군가에게 유괴된 것이다. 그녀가 바로 알렉스 레이크의 소설 '애프터 안나'의 주인공이다.



 이것만 해도 그녀에겐 충분히 지옥과 같은 상황일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도 무심하시지, 그녀가 당하는 고통은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로펌 일이 그녀의 예상 보다 길어지는 바람에 그녀가 그만 안나의 학교에서 안나를 데려가야 하는 시간에 지각하고 말았는데, 하필이면 그 때 유괴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언론으로부터 무책임하고 태만한 엄마라는 오명까지 뒤집어써야 했다. 그동안 업무와 양육에 있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려 애를 썼는데도 불구하고.


  문제는 바로 이것이다. 직장에서는 그녀에게 클라이언트의 부름에 즉각 응하는 뛰어난 변호사가 되라고 요구하고, 동시에 가정에서는 딸의 부름에도 즉각 반응하는 완벽한 엄마가 되길 기대하고 있다. 두 마리 토끼를 다 잡는 게 불가능하다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그 기대치를 낮출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p. 21 ~ 22)


 그녀의 고백대로 그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다. 이것은 멀리갈 것도 없이, 바로 우리 주위의 일하는 엄마의 일상을 조금만 들여다 보아도 충분히 알 수 있는 일이다. 직장과 가정 모두에서 완벽하라고 말하는 것은 한 인간이 부응하기에는 너무 무리한 요구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최선을 다했다. 안나를 데리러 가야 하는 시간에 늦었을 때는 아이에게 미안하고 스스로 무책임한 엄마 같아서 기분이 더럽기도 했다.


 복도를  따라 내려가는 그녀의 발걸음이 조급하다. 좀 늦는다고 큰일이야 벌어지겠느냐마는, 그래도 딸을 제시간에 데리러 가지 못했다는 이 기분, 정말 더럽다.(p. 22)


 하지만 그런 사정은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다. 그들에겐 그저 그녀가 아이를 데리러 가야 하는 시간에 늦었고, 학교에 늦는다고 미리 연락하지 않은 사실(이것도 마침 그녀의 핸드폰 배터리가 떨어졌기 때문이었다.)만 보일 뿐이다. 그녀가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는가는 전혀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언론은 다짜고짜 그녀를 영국의 위기를 초래하는 태만한 엄마의 대표적인 인물로 1면에 싣고, SNS를 비롯한 여론은 그녀를 미친 엄마, 무자격 엄마, 그리고 난잡한 엄마라는 막말의 별칭으로 조롱한다. 한 마디로 그녀는 결코 고의가 아니었던 지각으로 인해 공공의 적이 되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줄리아는 그런 엄마가 아니다.

 그녀는 바람피운 적도 없고 안나를 두고 떠날 생각을 한 적도 없다. 하지만 지금 진실은 중요한 게 아니다. 지어낸 얘기지만 진실 역시 담겨 있다. 적어도 그녀는 이혼을 원한다. 그것 하나가 모든 혐의를 기정사실로 만든다. 그녀의 태만에 이 혐의가 더해져 이제 줄리아는 공공의 적이 되고 말았다. (p. 177)


 이런 그녀가 의지할만한 사람이라고는 남편밖에 없지만 설상가상으로 남편조차 그녀의 편이 아니다. 그녀에게 연일 무지막지한 비난이 쏟아지는데도 남편은 그녀를 위해 변호할 생각조차 안한다. 오히려 그들과 같은 편이 되어 그들의 말이 다 맞지 않느냐고 그녀를 공박한다. 시어머니까지 가세해 그녀의 마음을 뒤집어 놓는다. 시어머니는 마치 미드 '위기의 주부들'에서 완벽에 대한 강박으로 가족과 이웃을 오히려 힘들게 만들던 브리가 나이가 들면 될 것 같은 모습이다.

 기억하시려나요? '위기의 주부들'에 나온 이 브리를?


 시어머니는 시아버지가 젊은 여자랑 바람이 나서 함께 사라져서 그런가 자식에 대한 집착이 여간 심하지 않다. 자식들을 자기 뜻대로 지배해야 직성이 풀리는 그녀는 그로 인해 자식들과 결혼한 며느리들을 조금도 탐탁지않게 여긴다. 결국 며느리와의 갈등으로 남편의 형은 시어머니와 깨끗하게 갈라섰다. 시어머니가 첫째 며느리에 대해 사람들에게 모함하고 다닌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시어머니였다. 마음에 안 들면 뒤에서 비열한 공격도 서슴지 않는 사람. 그런 시어머니의 공격을 이제 하나밖에 없는 며느리가 된 줄리아가 다 감내해야 했다. 


 '지금 무슨 뜻으로 하시는 말씀이세요?' 줄리아는 이번에는 자신의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시어머니의 분노에 맞서는 분노다.

 '나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는 높단다. 하지만 네 평판은 썩 완벽하진 않잖니? 적어도 너를 잘 아는 이들 사이에선 말이다.(p. 141)


 남편이라도 든든한 바람막이가 되어주었다면 결혼 생활이 괜찮았을 지 모른다. 하지만 남편은 거기서도 아무런 의지가 안되는 사람이었다. 그는 시어머니의 뜻대로 움직이는 '마마보이'였다. 무엇이 되었든 시어머니의 말이 옳다고 여기는 사람이었다. 그런 남자가 자기 편에 서서 시어머니와 싸워줄 리는 만무했다. 줄리아가 애초에 남편과의 이혼을 결심한 것도, 야망이 없어서라기 보다는 그런 데에 있었는지 모른다. 결코 자신의 편이 되어주지 않을 사람, 오히려 언제든 적이 될 수 있는 사람. 그런 남자를 어떻게 평생의 반려자로 삼을 수 있을까?


 줄리아는 고립되었다. 사회도, 가족도 그녀의 편이 아니었다. 그런 그녀에게 유괴는 시작에 불과했다. 자신의 발 아래로 지옥의 입구가 열리는 시작. 물론 유괴 그것 하나만으로도 삶은 충분히 지옥이 되었지만, 마치 그보다 더한 고통이 있다는 듯이 유괴로 인한 여파가 그녀를 더욱 나락으로 빠뜨렸던 것이다.


 그런데 중반에 뜻밖의 사실이 밝혀진다. 안나를 유괴한 범인의 진짜 목표가 바로 줄리아였다는 사실이.


 아이가 가고 나면 너의 진짜 표적에게 관심을 줄 차례야.

 아이 엄마 말이야. (p. 215)


 바로 여기서 '애프터 안나'가 왜 유괴를 다루는 스릴러 소설로써는 다소 특이한 구성을 취했는지 그 이유가 암시된다. 그렇다. '애프터 안나'는 유괴물의 전형적인 전개 방식을 보여주지 않는다. 대부분 유괴를 소재로 다루는 소설들은 범인에게서 아이를 되찾는 과정에 집중한다. 그런 소설들에겐 꼭 나타나는 장면들이 있다. 범인의 연락을 초조하게 기다리는 것이라든지 다른 한편으로 단서를 쫓아 범인을 추적한다든지 또는 몸값 지불을 둘러싼 범인과 경찰들의 두뇌 싸움 같은 것.


 그러나 '애프터 안나'에서는 이런 장면들이 하나도 나오지 않는다. '애프터 안나'는 그런 수사 과정들에 무심하다. 잘 보여주지도 않는다. 소설의 카메라는 다만 줄리아를 담는다. 오로지 아이를 유괴당한 어머니의 심리에만 집중하는 것이다. 그녀가 느끼는 고통, 두려움과 절망 그리고 처절한 고독(줄리아 외에 등장하는 내면은 오직 범인의 것 뿐이다.). 더구나 '애프터 안나'에는 다른 유괴 소재 소설에서는 결코 볼 수 없었던, 오로지 자신만이 가지고 있는 뚜렷한 차이점이 존재한다. 바로 유괴 당한 아이가 일주일만에 멀쩡히 살아서 돌아온다는 것. 그리고 그렇게 돌아온 이후의 이야기가 유괴 당했던 때의 이야기와 비슷한 분량으로 펼쳐진다는 것. 소설은 크게 전(before)와 후(afterward)로 나눠어져 있는데, 물론 이 '전과 후'는 안나의 생환을 기준으로 한 전과 후이다. 바로 이 '후'에서 안나가 무사히 돌아오고 난 뒤의 이야기가 진행된다. 유괴가 줄리아에게 고통의 극한이 아니라 더 커다란 아픔을 껴안기 위한 시작이었듯이, 딸의 생환 역시도 그녀의 고통을 끝내는 종지부가 되지 못했다. 오히려 딸의 생환을 기뻐할 여유도 없이, 더 커다란 고통과 위기 그리고 한층 더 끔찍한 진실과 마주해야 했다. 원래 아이 엄마를 노렸다는 범인의 말 그대로 말이다.


 그 전과 후를 소설은 줄리아의 심리 묘사에만 일관되게 천착한다. 갑작스럽게 삶의 벼랑으로 내몰렸으나, 누구에게도 도움을 구할 수 없는 여성의 심리를 아주 세밀하게 담아내면서 관통하는 것이다. 사건의 긴박함이 아니라 심리의 긴박함이 있다. 이렇게 오로지 한 여인의 심리로 소설 전체를 일이관지(一以貫之) 하는 것을 보면, 이것이 작가에겐  무엇보다 중요했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정말로 유괴는 다만, '슬램덩크'에 나오는 말마따나 슛을 잘하기 위해 거드는 '왼손'에 지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직장과 가정을 가진 한 여성의 심리를 극한으로 몰고가기 위한 왼손.


 그렇다면 이 '일이관지(一以貫之)'는 무엇을 위한 것이었나?

작가는 왜 줄리아의 심리에 이토록 집중했던 것일까?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문득 경기도 안양시에 있는 한 대형 마트에서 얼마전에 일어난 폭행 사건이 떠오른다. 그것을 우리는 폭행을 당했다는 여성의 자녀가 자신의 SNS에 공개한 CCTV 영상으로 알게 되었다. 거기엔 마트에서 일하는 남성이 계산대에서 일하는 여성 직원의 머리를 다짜고짜 때리는 장면이 찍혀 있었다. 이것은 많은 네티즌의 공분을 샀다. 많은 이들이 남성을 거세게 비난했고 일부 네티즌은 남성의 신상까지 털었다. 하지만 뒤늦게 밝혀진 사건의 진실은 보이는 것과 전혀 달랐다. 남성은 지금까지 8년동안 마트에서 배달원으로 일해왔다. 그는 5급 지적 장애인이었지만 배달일을 하는 데엔 아무 지장이 없었고 주위 동료들과도 잘 지냈다. 그런데 영상에서 머리를 맞은 여성과는 그렇지 못했다고 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이유 없이 자신을 무시하고, 배달 물품을 잘못 가져가게 하거나 고객이 요구한 사항을 알려주지 않아서 몇 번이나 헛걸음 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영상에 찍혔던 날도 그런 일을 또 당하여 순간 화를 참지 못하고 저지른 짓이라고 했다. 이렇게 사건의 내막은 달랐다. 현실엔 보이는 것 이상의 의미가 엄연히 존재했다.


 최근 들어와 SNS가 활발해지면서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 한 샤브샤브 체인점에서 일어난 임산부 폭행 동영상이나 '세모자 사건'들이 대표적인데, 그것도 진실과 가해자는 보이는 것과 아주 많이 달랐다. 하지만 이런 사건들을 두고 '아, 이런 오해해 버렸네.'하고 넘어갈 수 없는 것은 희생자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안양의 CCTV 사건에서도, 샤브샤브 체인점의 동영상 사건에서도, '세모자 사건'에서도 희생자가 있었다. 직장과 가게를 잃은 사람들이 있었고 신상이 공개 되어 수없이 쏟아지는 비난 메일과 5초마다 걸려오는 욕설 전화를 받았어야 했다. 줄리아도 희생자였다. 영화 '곡성'은 우리에게 현혹되지 말라고 하지만, 우리는 정말 쉽게 현혹된다. 하나의 동영상이 유포되면, 제대로 헤아리지도 않고 보이는 그대로 믿어 그것을 유포시킨 자의 의도대로 움직인다. 소설에서 줄리아가 당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므로 작가가 이토록 줄리아의 심리 구현에 집착하는 것엔 소설 상의 재미를 넘어 사회적 의미가 있다고 보여진다. 정보화 시대로 접어 들면서 더욱 빈번하게 된, 함부로 타인의 삶을 재단하는 경향에 대한 신랄한 경고라고 말이다. 그 위험성을, 그리고 우리가 얼마나 쉽게 사건과 사람의 겉모습에 현혹되는 지(무엇보다 나중에 밝혀지는 범인의 정체는 이러한 우리의 경향을 단적으로 지적하고 있다.)를 독자인 우리가 제대로 경험할 수 있도록 그는 이렇게 '유괴물'로써는 이례적일 정도로 독특한 구성을 취한 것이다. 소설에 투영된 작가의 마음이 너무도 선명하게 다가오기에, 읽고 나서 한번쯤은 나는 과연 쉽게 현혹되지 않는지, 그만큼 타인의 삶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단정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


 예기치 않게 마음에 드는 작품을 만날 때가 있다. '애프터 안나'가 그랬다. 작가도 누군지 몰랐고, 대강의 설정만 보고 읽게 된 작품이었는데 너무 좋았던 것이다. 단 한 사람의 심리에 초점을 맞추지만 심리 묘사가 좋은 데다가 이야기의 흡인력도 뛰어나 손에서 책을 놓기가 어려웠다. 더구나 이 소설엔 범인의 정체에 대한 놀라운 반전이 존재한다. 그리고 기시 유스케의 '검은집'의 마지막 장면을 연상시키는 범인과 주인공 사이의 처절한 대결도. 끝까지 재밌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이다. 흔히들 '대중성과 깊이를 다 갖추었다'는 말을 하는데, 이 소설이 거기에 해당되지 않을까 한다.


 읽고 나면 '알렉스 레이크'라는 작가의 이름이 뇌리에 각인될 것이다. 책날개에 저자에 대한 소개가 나와 있는데, 알려진 것은 영국 출신이고 현재 미국 북동부에 살고 있다는 것밖에 없으며 나머지는 베일에 싸여있다고 한다. 혹시 '은교'의 이적요가 그랬듯이 스릴러 대가가 다른 인물이 쓴 것처럼 내놓은 것은 아닐까? 어째, 작가마저 작품만큼 흥미로워진다. 얼른 다음 작품으로 만나게 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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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의 아랍인 Vol.1 - 중동에서 보낸 어린 시절 (1978~1984)
리아드 사투프 지음, 박언주 옮김 / 휴머니스트 / 2015년 2월
평점 :
절판


 시리아. 아마도 현재 중동 국가 중 가장 많이 언론에 보도되는 나라가 아닐까 생각된다. 일단 IS가 거기에 있고, 더하여 2011년에 시작된 내전으로 벌써 20만명이 사망하고 인구의 절반이 난민이 되었으니까 말이다. 많은 이들이 인정한다. 지옥이 지상에 존재한다면 그 곳은 시리아일 것이라고. 그래서 궁금했다. 이런 저런 경로로 참으로 많이 접하는 이름이나 시리아에 대해서 아는 것이라고는 정작 하나도 없었기에. 도대체 어떤 나라인지 알고 싶었다.


 한 나라를 아는 방법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외재적 접근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내재적 접근 방법이다. 외재적 접근은 한 나라를 타자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으로, 아무래도 거리가 있는만큼 시각에 있어 객관성을 담보한다고 할 수 있으니 그렇다고 해서 온전히 객관적이 될 수 있는 것은 또 아니다. 그 시각 역시 바라보는 국가가 놓인 정치경제적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왜곡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근대 이후에 서양의 제국주의에 봉사하느라 동양을 열등한 존재로 보는 시선이 널리 퍼진 것처럼 말이다. 에드워드 사이드는 그것을 두고 단적으로 '오리엔탈리즘'이라 표현했다. 그래서 이슬람을 믿는 인구가 무려 86%에 달한다는 시리아처럼, 서양의 기준에서 볼 때 멀리 타자의 영역에 위치하는 나라일수록 외재적 접근이 줄 수 있는 편견과 왜곡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내재적 접근이 필요하게 된다. 내재적 접근이란, 쉽게 말하여 그 나라의 입장이 되어 나라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정치경제상황을 헤아리는 것을 말한다.


 리아드 사투프의 그래픽 노블, '미래의 아랍인'을 손에 들었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시리아를 시리아인의 시선으로 보여주는 작품이었던 것이다.



 리아드 사투프는 1978년 생이다. 그는 시리아인 아버지와 프랑스인 어머니 사이에서 사내 아이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시리아 시골 출신으로, 국가 장학금을 받아 파리의 소르본느 대학으로 유학와서 어머니를 만나게 되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마음에 들었던 여자는 원래 어머니가 아니었다. 실은 어머니의 친구를 더 원했지만 친구가 아버지를 떼어내려고 거짓으로 아버지와 데이트 약속을 했는데, 어머니가 하염없이 친구를 기다릴 아버지가 불쌍해 그 사실을 말해주려 약속 장소로 나갔다가 끝내 사랑에 빠져버린 것이었다.


 솔직히 리아드의 아버지는 그리 매력적인 인물은 못된다. 시리아 문화가 가진 가부장주의를 그대로 가지고 있고, 세속적 성공을 누구보다 바라는 속물이다. 중동 정세에 관심이 대단하지만 그것을 위해서 하는 일은 별로 없다. 그 관심의 대부분이 프랑스에 살면서 시리아의 시골 출신으로서 가지게 된 자괴감이나 차별 받은 경험이 낳은 보복 감정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종교로 인해 무지의 베일에 가려져 있는 조국 사람들을 교육으로 그 종교의 미망에서 벗어나게 해줘야 한다고 말하지만 정작 그가 중동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이유는 그런 신념에 있지 않고 프랑스에서 박사가 된 지식인으로서의 자기 모습과 자신이 얻은 성공에 대한 과시에 있다. 이슬람 문화에서 차남의 지위가 대개 다 그렇듯이, 그 역시 집안에서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다. 바로 그것을 현재 성취한 신분과 성공으로 보상하려는 것이다. 때문에 그는 프랑스에서 박사 학위를 따자마자 아내의 의견은 묻지도 않고 중동 국가에서 일자리를 구한다. 결국 리비아 대학에 자리를 얻은 그는 아내와 아들 리아드를 데리고 리비아로 간다.


 아버지의 뜻대로 살게 될 리아드를 형상화 한 그림. 그림의 황토색은 나라를 나타낸다. 만화는 나라마다 색깔을 달리 하는데, 황토색은 리비아를, 파란색은 프랑스를, 분홍은 시리아를 나타낸다.


 리아드가 언제 리비아로 갔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책의 부제는 '중동에서 보낸 어린 시절'로 그 연도를 1978년 부터 1984년까지라고 명기하고 있으나 만화의 표현은 이것과 모순된다. 리아드는 78년생이니 만일 부제에서 표기한 연도대로 리비아로 갔다면 간난 아기로 묘사되어야 한다. 하지만 만화에서는 어엿하게 자기 다리로 걷고 아빠와 제대로 대화도 가능한 아이로 그리고 있는 것이다. 실수인지 아니면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일부러 모호하게 처리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조금 아쉽게 여겨지는 부분이었다. 어쨌든 이렇게 하여 뜻하지 않게 리아드의 아랍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작품은 리비아와 시리아 그리고 프랑스를 오고가는, 마치 방랑자와도 같았던 어린 시절을 담아낸다.


 이 기록은 어디까지나 리아드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래서 정말 살아본 이가 아니었으면 들려줄 수 없는 이야기를 여기서 참 많이 듣게 된다. 초반에 나오는 리비아부터 솔깃하고 재밌는 에피소드가 많다. 특히 집이 그랬다. 독재가 카다피가 리비아를 다스렸을 때, 그는 리비아의 모든 사유주의 재산을 없앴다. 모든 것은 국가가 배급했다. 집도 마찬가지였다. 특이한 것은 리비아 집에 열쇠가 없다는 것이다. 모든 집은 리비아 국가가 소유한다는 의미로 집의 모든 문을 잠그지 못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놀랄 일은 이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리아드 가족이 잠깐 외출을 다녀와 보니 다른 가족이 그 집에 들어와 살고 있었고 이제 자신들의 집이 되었노라 말하는 것이다. 알고 보니, 리비아 법에 아무도 없는 집은 누구나 들어와 살 권리가 있다고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리비아에서는 어떤 경우든지 가족 전부가 집을 떠나선 안되고 무조건 한 사람은 남아서 집을 지켜야 한단다. 결국 리아드 가족은 집을 잃었고 이 사실로 인해 리아드의 어머니는 리비아에서 사는 동안 단 한 번도 외출하지 못했다.



 아무리 취지가 좋다고 해도 융통성이 없으면 체제가 얼마나 한 개인에게 어처구니 없게 굴 수 있는지 잘 보여주는 대목이었지만 거기에 더하여 외출을 못하는 어머니의 모습은 그대로 시리아인을 남편으로 둔 여자의 삶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것이기도 했다. 만화에서 그녀의 존재는 잘 드러나지 않았다. 대부분 실내에 갇혀 있었고 가족들과 외출할 때는 항상 끝에서 조용히 가족들을 따라다녔다. 자신이 먼저 주장하는 법도 없었다. 말하기 보다는 듣는 쪽이었고 남편의 고향 시리아에 갔을 때는 여성의 존재를 하찮게 취급하는 지극히 가부장적인 관습도 가만히 수용했다. 이 부분에서 내부인의 눈으로 보여준 시리아의 집안 풍경은 정말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시리아의 여인들은 남자들의 대화에 낄 수 없었고 음식도 남자들이 남긴 것을 먹어야했다. 그냥 여인이라도 참기 힘들 것 같은데 하물며 리아드의 어머니는 여성의 권리가 가장 발달했다는 프랑스 여자였다. 그런데도 그녀는 시리아 여인들과 똑같이 받아들였다.


 나는 이런 어머니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는데, 물론 리아드의 기억 그대로이긴 하겠지만 리아드가 어머니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한 것엔 다른 의미도 투영된 것 같았다.


 프랑스에 왔을 때, 리아드의 모습. 이렇게 만화는 부성의 공간과 모성의 공간을 색깔로 구분하고 있으며, 실상 리아드가 경험하는 것도 다르다.


 그것은 그런 어머니의 모습에 대비되어 나타나는 시리아인들의 모습 때문이다. 리아드가  처음으로 시리아인 사촌들을 만나자마자 경험한 것은 유태인을 적대하는 모습이었다. 사촌들이 다짜고짜 리아드를 유태인이라 부르며 공격했던 것이다.


 리아드가 시리아에 와서 가장 처음 만났던 모습이 시리아 편의 처음을 연다. 그곳에서 목격하게 될, 차별과 폭력을 한 컷으로 나타내고 있다. 시작을 여는 한 컷이 의미심장하게 보여서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니라 리아드에게 있어 각 나라가 가지는 의미가 무엇인지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그것만이 아니다. 그 마을에서 살게 되었을 때, 리아드는 또래 아이들이 모두 약한 동물들과 아이들에게 유태인이라 부르면서 폭력을 휘두르는 모습을 보게 된다. 거기서는 폭력이 예사로 행해졌다. 아이들은 버림받은 강아지를 삼지창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찔렀고 강아지가 신음 소리를 내자 한 어른이 뛰쳐나와선 강아지의 목을 태연하게 날려 버렸다.



 이것은 폭력이 가장 극단적인 형태로 발현된 것이었지만, 그래서 결국 어머니도 참지 못하고 리아드를 위해 프랑스 행을 결정하게 만들었지만, 그런 폭력이 전혀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그 곳엔 폭력이 만연해 있었다. 아버지는 자식을 때렸고, 남자는 여자를 때렸다. 그리고 타자에 대한 적대로 그것을 정당화했다. 폭력은 자신의 뜻을 타인에게 강요하는 가장 획일적인 방식이다. 거기엔 타인에 대한 고려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오로지 자신만이 존재하는 그 곳에서 타인에 대한 적대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인지도 모른다. 


 시리아는 이렇게 체제에 저항한 자들을 교수형 시키고 그 시체를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거리에 걸어 놓는다. 아버지의 대사는 시리아에 만연한 폭력이 정확히 무엇을 목표로 하고 있는 것인지 말해준다. 오로지 단 하나인, 자신만의 의지를 관철하기 위한 것임을.


 하지만 리아드의 어머니는 정반대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녀는 많이 듣고, 조용히 판단하며 관용으로 타인의 것을 먼저 받아들이려 한다. 그러면서도 리아드를 그런 폭력적 상황에 방치하는 것과 같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에 대해선 적극적으로 나서 자신의 뜻을 관철시킨다.


 이런 선명한 대비가, 무심히 자신의 자전적 기억만 보여주는 것 같은 이 작품에서 리아드의 어머니처럼 조용하게 하지만 착실히 하나의 의미 지점을 만들어 가고 있는 것 같다. 여전히 항구적인 이슬람과 서양 문명 사이의 싸움만큼이나 이주노동자와 난민 사태 등으로 내부와 외부의 갈등이 점점 치열해지고 있는 요즘, 아무래도 과연 상대를 어떤 태도로 대해야 하는가가 시대의 화두가 될 수밖에 없는데, 바로 그것의 모델을 리아드의 어머니를 통하여 그려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되는 것이다. 물론 이 작품은 총 3부작으로, 난 이제 겨우 1부만 보았을 뿐이니 이렇게 말하는 것은 좀 섣부른 감이 있다. 그러나 분명 리아드 어머니의 묘사는 보이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리아드가 자신의 어머니를 단순하게 존재감이 엷은 여자로 그렸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정말 그랬다면 그래픽 노블계의 노벨문학상이라고 평가받는 앙굴렘 대상을 수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무리 자전적이라고 해도 그러한 여성 묘사는 문제가 있으니까 말이다.


 리아드는 경계의 존재다. 그는 아버지인 아랍인과 어머니인 유럽인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다시 말해, 그에겐 두 개의 모델이 존재하는 것이다. 서로 다른 문화와 역사 그리고 타자에 대한 태도를 보여주는 아버지와 어머니라는 모델들이.

 아마도 이런 모델로써의 의미를 독자에게 강조하기 위해 리아드가 프랑스와 아랍을 오고가는 형식으로 묘사했는 지도 모른다. 색깔까지 달리 써 가면서 말이다. 더구나 아버지는 리아드에게 자주 아랍인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아직 아랍인이 아니다. 그래서 제목도 '미래의 아랍인'일 것이다. 그러나 리아드가 아버지가 바라는 대로 언젠가 미래에 아랍인이 된다고 해도 아버지를 빼다 박은 아랍인이 될 것 같지는 않다. 왜냐하면 작가는 지속적으로 아버지가 그다지 좋은 모델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러니 제목이 뜻하는 바는 분명 현재의 아버지가 대표하는, 그렇게 지금의 아랍이 보여주는 적대의 모습이 아닌, 보다 바람직한 아랍의 모습일 것이다. 그렇게 되기 위해 한계가 있는 아버지의 모델 옆에, 그것의 보완으로써 어머니의 모델을 병치시키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고 해서 어머니 모델이 유럽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현재 유럽의 모습은 아니다. 굳이 유럽이라고 해야 한다면 이상화된 유럽이라고 해야 한다. 왜냐하면 작품에서 어머니가 보여주는 모습이 현재 유럽과 차이나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측은히 여기는 마음으로 받아들였고, 그를 위해 낯설기 그지 없고 이해도 되지 않는 데다 자신의 자유마저 구속하는 타인의 문화와 관습까지 묵묵히 감내했다. 관용과 희생이 전부였다. 이런 모습은 오리엔탈리즘을 부르짓는 유럽의 모습과 달라도 너무 다르다. 굳이 찾자면 이런 어머니의 모습은 그야말로 박애의 구현이라 할 수 있으니, 그런 박애의 정신을 세 가지 기본 정신 중 하나로 천명했던 프랑스 혁명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프랑스가 혁명을 통해 구현하려 했던 박애로 충만한 유럽. 그랬기에 이상화된 모습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리아드의 어머니는 바로 그것을 나타낸다. '미래의 아랍인'은 바로 그 박애가 혼합된, 그래서 어머니처럼 먼저 관용과 희생이 체화된 존재일 것이다.


 물론 이것은 앞서도 말했듯이, 1권밖에 읽지 않은 나로서는 결코 장담할 수 없는, 아주 섣부른 추정이다. 그래서 이런 내 해석이 맞는지 안 맞는지를 보기 위해서라도 얼른 다음 권을 만나고 싶다. 1권의 마지막은 시리아에서 사는 것을 아주 두려워하는 리아드가 아버지 손에 이끌려 다시 비행기를 타고 시리아로 가는 장면이다. 공항에서 리아드 모습은 곧 다가올 미래 때문에 더없이 곤혹스러운 표정인데 그래서 다시 가 본 시리아에서 리아드에게 과연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지 더 많이 궁금해진다. 그리고 어머니가 어떤 모습을 보여 줄 것인가 역시도.


 1권은 2015년 2월 15일에 나왔는데, 1년 하고도 4개월이 다 되어가는 이 시점까지 2권이 아직 안 나오고 있다. 그래서 끝을 이런 말로 끝내고 싶다. '2권과 3권, 빨리 출간해 주세요. 현기증 난단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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