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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프터 안나
알렉스 레이크 지음, 문세원 옮김 / 토마토출판사 / 2016년 5월
평점 :
절판
부모에게 일어날 수 있는 가장 끔찍한 일 중 하나는, 세상에서 단 하나밖에 없는 자식이 누군가에게 유괴되는 일일 것이다. 그런데 그런 일이 로펌의 변호사로 일하고 있는 줄리아 크라운에게 일어나고 말았다. 그녀의 하나밖에 없는 딸, 다섯 살 안나가 누군가에게 유괴된 것이다. 그녀가 바로 알렉스 레이크의 소설 '애프터 안나'의 주인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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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만 해도 그녀에겐 충분히 지옥과 같은 상황일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도 무심하시지, 그녀가 당하는 고통은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로펌 일이 그녀의 예상 보다 길어지는 바람에 그녀가 그만 안나의 학교에서 안나를 데려가야 하는 시간에 지각하고 말았는데, 하필이면 그 때 유괴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언론으로부터 무책임하고 태만한 엄마라는 오명까지 뒤집어써야 했다. 그동안 업무와 양육에 있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려 애를 썼는데도 불구하고.
문제는 바로 이것이다. 직장에서는 그녀에게 클라이언트의 부름에 즉각 응하는 뛰어난 변호사가 되라고 요구하고, 동시에 가정에서는 딸의 부름에도 즉각 반응하는 완벽한 엄마가 되길 기대하고 있다. 두 마리 토끼를 다 잡는 게 불가능하다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그 기대치를 낮출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p. 21 ~ 22)
그녀의 고백대로 그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다. 이것은 멀리갈 것도 없이, 바로 우리 주위의 일하는 엄마의 일상을 조금만 들여다 보아도 충분히 알 수 있는 일이다. 직장과 가정 모두에서 완벽하라고 말하는 것은 한 인간이 부응하기에는 너무 무리한 요구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최선을 다했다. 안나를 데리러 가야 하는 시간에 늦었을 때는 아이에게 미안하고 스스로 무책임한 엄마 같아서 기분이 더럽기도 했다.
복도를 따라 내려가는 그녀의 발걸음이 조급하다. 좀 늦는다고 큰일이야 벌어지겠느냐마는, 그래도 딸을 제시간에 데리러 가지 못했다는 이 기분, 정말 더럽다.(p. 22)
하지만 그런 사정은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다. 그들에겐 그저 그녀가 아이를 데리러 가야 하는 시간에 늦었고, 학교에 늦는다고 미리 연락하지 않은 사실(이것도 마침 그녀의 핸드폰 배터리가 떨어졌기 때문이었다.)만 보일 뿐이다. 그녀가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는가는 전혀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언론은 다짜고짜 그녀를 영국의 위기를 초래하는 태만한 엄마의 대표적인 인물로 1면에 싣고, SNS를 비롯한 여론은 그녀를 미친 엄마, 무자격 엄마, 그리고 난잡한 엄마라는 막말의 별칭으로 조롱한다. 한 마디로 그녀는 결코 고의가 아니었던 지각으로 인해 공공의 적이 되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줄리아는 그런 엄마가 아니다.
그녀는 바람피운 적도 없고 안나를 두고 떠날 생각을 한 적도 없다. 하지만 지금 진실은 중요한 게 아니다. 지어낸 얘기지만 진실 역시 담겨 있다. 적어도 그녀는 이혼을 원한다. 그것 하나가 모든 혐의를 기정사실로 만든다. 그녀의 태만에 이 혐의가 더해져 이제 줄리아는 공공의 적이 되고 말았다. (p. 177)
이런 그녀가 의지할만한 사람이라고는 남편밖에 없지만 설상가상으로 남편조차 그녀의 편이 아니다. 그녀에게 연일 무지막지한 비난이 쏟아지는데도 남편은 그녀를 위해 변호할 생각조차 안한다. 오히려 그들과 같은 편이 되어 그들의 말이 다 맞지 않느냐고 그녀를 공박한다. 시어머니까지 가세해 그녀의 마음을 뒤집어 놓는다. 시어머니는 마치 미드 '위기의 주부들'에서 완벽에 대한 강박으로 가족과 이웃을 오히려 힘들게 만들던 브리가 나이가 들면 될 것 같은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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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하시려나요? '위기의 주부들'에 나온 이 브리를?
시어머니는 시아버지가 젊은 여자랑 바람이 나서 함께 사라져서 그런가 자식에 대한 집착이 여간 심하지 않다. 자식들을 자기 뜻대로 지배해야 직성이 풀리는 그녀는 그로 인해 자식들과 결혼한 며느리들을 조금도 탐탁지않게 여긴다. 결국 며느리와의 갈등으로 남편의 형은 시어머니와 깨끗하게 갈라섰다. 시어머니가 첫째 며느리에 대해 사람들에게 모함하고 다닌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시어머니였다. 마음에 안 들면 뒤에서 비열한 공격도 서슴지 않는 사람. 그런 시어머니의 공격을 이제 하나밖에 없는 며느리가 된 줄리아가 다 감내해야 했다.
'지금 무슨 뜻으로 하시는 말씀이세요?' 줄리아는 이번에는 자신의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시어머니의 분노에 맞서는 분노다.
'나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는 높단다. 하지만 네 평판은 썩 완벽하진 않잖니? 적어도 너를 잘 아는 이들 사이에선 말이다.(p. 141)
남편이라도 든든한 바람막이가 되어주었다면 결혼 생활이 괜찮았을 지 모른다. 하지만 남편은 거기서도 아무런 의지가 안되는 사람이었다. 그는 시어머니의 뜻대로 움직이는 '마마보이'였다. 무엇이 되었든 시어머니의 말이 옳다고 여기는 사람이었다. 그런 남자가 자기 편에 서서 시어머니와 싸워줄 리는 만무했다. 줄리아가 애초에 남편과의 이혼을 결심한 것도, 야망이 없어서라기 보다는 그런 데에 있었는지 모른다. 결코 자신의 편이 되어주지 않을 사람, 오히려 언제든 적이 될 수 있는 사람. 그런 남자를 어떻게 평생의 반려자로 삼을 수 있을까?
줄리아는 고립되었다. 사회도, 가족도 그녀의 편이 아니었다. 그런 그녀에게 유괴는 시작에 불과했다. 자신의 발 아래로 지옥의 입구가 열리는 시작. 물론 유괴 그것 하나만으로도 삶은 충분히 지옥이 되었지만, 마치 그보다 더한 고통이 있다는 듯이 유괴로 인한 여파가 그녀를 더욱 나락으로 빠뜨렸던 것이다.
그런데 중반에 뜻밖의 사실이 밝혀진다. 안나를 유괴한 범인의 진짜 목표가 바로 줄리아였다는 사실이.
아이가 가고 나면 너의 진짜 표적에게 관심을 줄 차례야.
아이 엄마 말이야. (p. 215)
바로 여기서 '애프터 안나'가 왜 유괴를 다루는 스릴러 소설로써는 다소 특이한 구성을 취했는지 그 이유가 암시된다. 그렇다. '애프터 안나'는 유괴물의 전형적인 전개 방식을 보여주지 않는다. 대부분 유괴를 소재로 다루는 소설들은 범인에게서 아이를 되찾는 과정에 집중한다. 그런 소설들에겐 꼭 나타나는 장면들이 있다. 범인의 연락을 초조하게 기다리는 것이라든지 다른 한편으로 단서를 쫓아 범인을 추적한다든지 또는 몸값 지불을 둘러싼 범인과 경찰들의 두뇌 싸움 같은 것.
그러나 '애프터 안나'에서는 이런 장면들이 하나도 나오지 않는다. '애프터 안나'는 그런 수사 과정들에 무심하다. 잘 보여주지도 않는다. 소설의 카메라는 다만 줄리아를 담는다. 오로지 아이를 유괴당한 어머니의 심리에만 집중하는 것이다. 그녀가 느끼는 고통, 두려움과 절망 그리고 처절한 고독(줄리아 외에 등장하는 내면은 오직 범인의 것 뿐이다.). 더구나 '애프터 안나'에는 다른 유괴 소재 소설에서는 결코 볼 수 없었던, 오로지 자신만이 가지고 있는 뚜렷한 차이점이 존재한다. 바로 유괴 당한 아이가 일주일만에 멀쩡히 살아서 돌아온다는 것. 그리고 그렇게 돌아온 이후의 이야기가 유괴 당했던 때의 이야기와 비슷한 분량으로 펼쳐진다는 것. 소설은 크게 전(before)와 후(afterward)로 나눠어져 있는데, 물론 이 '전과 후'는 안나의 생환을 기준으로 한 전과 후이다. 바로 이 '후'에서 안나가 무사히 돌아오고 난 뒤의 이야기가 진행된다. 유괴가 줄리아에게 고통의 극한이 아니라 더 커다란 아픔을 껴안기 위한 시작이었듯이, 딸의 생환 역시도 그녀의 고통을 끝내는 종지부가 되지 못했다. 오히려 딸의 생환을 기뻐할 여유도 없이, 더 커다란 고통과 위기 그리고 한층 더 끔찍한 진실과 마주해야 했다. 원래 아이 엄마를 노렸다는 범인의 말 그대로 말이다.
그 전과 후를 소설은 줄리아의 심리 묘사에만 일관되게 천착한다. 갑작스럽게 삶의 벼랑으로 내몰렸으나, 누구에게도 도움을 구할 수 없는 여성의 심리를 아주 세밀하게 담아내면서 관통하는 것이다. 사건의 긴박함이 아니라 심리의 긴박함이 있다. 이렇게 오로지 한 여인의 심리로 소설 전체를 일이관지(一以貫之) 하는 것을 보면, 이것이 작가에겐 무엇보다 중요했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정말로 유괴는 다만, '슬램덩크'에 나오는 말마따나 슛을 잘하기 위해 거드는 '왼손'에 지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직장과 가정을 가진 한 여성의 심리를 극한으로 몰고가기 위한 왼손.
그렇다면 이 '일이관지(一以貫之)'는 무엇을 위한 것이었나?
작가는 왜 줄리아의 심리에 이토록 집중했던 것일까?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문득 경기도 안양시에 있는 한 대형 마트에서 얼마전에 일어난 폭행 사건이 떠오른다. 그것을 우리는 폭행을 당했다는 여성의 자녀가 자신의 SNS에 공개한 CCTV 영상으로 알게 되었다. 거기엔 마트에서 일하는 남성이 계산대에서 일하는 여성 직원의 머리를 다짜고짜 때리는 장면이 찍혀 있었다. 이것은 많은 네티즌의 공분을 샀다. 많은 이들이 남성을 거세게 비난했고 일부 네티즌은 남성의 신상까지 털었다. 하지만 뒤늦게 밝혀진 사건의 진실은 보이는 것과 전혀 달랐다. 남성은 지금까지 8년동안 마트에서 배달원으로 일해왔다. 그는 5급 지적 장애인이었지만 배달일을 하는 데엔 아무 지장이 없었고 주위 동료들과도 잘 지냈다. 그런데 영상에서 머리를 맞은 여성과는 그렇지 못했다고 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이유 없이 자신을 무시하고, 배달 물품을 잘못 가져가게 하거나 고객이 요구한 사항을 알려주지 않아서 몇 번이나 헛걸음 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영상에 찍혔던 날도 그런 일을 또 당하여 순간 화를 참지 못하고 저지른 짓이라고 했다. 이렇게 사건의 내막은 달랐다. 현실엔 보이는 것 이상의 의미가 엄연히 존재했다.
최근 들어와 SNS가 활발해지면서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 한 샤브샤브 체인점에서 일어난 임산부 폭행 동영상이나 '세모자 사건'들이 대표적인데, 그것도 진실과 가해자는 보이는 것과 아주 많이 달랐다. 하지만 이런 사건들을 두고 '아, 이런 오해해 버렸네.'하고 넘어갈 수 없는 것은 희생자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안양의 CCTV 사건에서도, 샤브샤브 체인점의 동영상 사건에서도, '세모자 사건'에서도 희생자가 있었다. 직장과 가게를 잃은 사람들이 있었고 신상이 공개 되어 수없이 쏟아지는 비난 메일과 5초마다 걸려오는 욕설 전화를 받았어야 했다. 줄리아도 희생자였다. 영화 '곡성'은 우리에게 현혹되지 말라고 하지만, 우리는 정말 쉽게 현혹된다. 하나의 동영상이 유포되면, 제대로 헤아리지도 않고 보이는 그대로 믿어 그것을 유포시킨 자의 의도대로 움직인다. 소설에서 줄리아가 당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므로 작가가 이토록 줄리아의 심리 구현에 집착하는 것엔 소설 상의 재미를 넘어 사회적 의미가 있다고 보여진다. 정보화 시대로 접어 들면서 더욱 빈번하게 된, 함부로 타인의 삶을 재단하는 경향에 대한 신랄한 경고라고 말이다. 그 위험성을, 그리고 우리가 얼마나 쉽게 사건과 사람의 겉모습에 현혹되는 지(무엇보다 나중에 밝혀지는 범인의 정체는 이러한 우리의 경향을 단적으로 지적하고 있다.)를 독자인 우리가 제대로 경험할 수 있도록 그는 이렇게 '유괴물'로써는 이례적일 정도로 독특한 구성을 취한 것이다. 소설에 투영된 작가의 마음이 너무도 선명하게 다가오기에, 읽고 나서 한번쯤은 나는 과연 쉽게 현혹되지 않는지, 그만큼 타인의 삶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단정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
예기치 않게 마음에 드는 작품을 만날 때가 있다. '애프터 안나'가 그랬다. 작가도 누군지 몰랐고, 대강의 설정만 보고 읽게 된 작품이었는데 너무 좋았던 것이다. 단 한 사람의 심리에 초점을 맞추지만 심리 묘사가 좋은 데다가 이야기의 흡인력도 뛰어나 손에서 책을 놓기가 어려웠다. 더구나 이 소설엔 범인의 정체에 대한 놀라운 반전이 존재한다. 그리고 기시 유스케의 '검은집'의 마지막 장면을 연상시키는 범인과 주인공 사이의 처절한 대결도. 끝까지 재밌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이다. 흔히들 '대중성과 깊이를 다 갖추었다'는 말을 하는데, 이 소설이 거기에 해당되지 않을까 한다.
읽고 나면 '알렉스 레이크'라는 작가의 이름이 뇌리에 각인될 것이다. 책날개에 저자에 대한 소개가 나와 있는데, 알려진 것은 영국 출신이고 현재 미국 북동부에 살고 있다는 것밖에 없으며 나머지는 베일에 싸여있다고 한다. 혹시 '은교'의 이적요가 그랬듯이 스릴러 대가가 다른 인물이 쓴 것처럼 내놓은 것은 아닐까? 어째, 작가마저 작품만큼 흥미로워진다. 얼른 다음 작품으로 만나게 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