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우주는 아직 멀다 마스다 미리 만화 시리즈
마스다 미리 지음, 박정임 옮김 / 이봄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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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우주는 아직 멀다'의 쓰치다는 나와 그리 다르지 않은 사람이다. 현재 삶에 썩 만족하지는 않으나 특별히 비관하지도 않는다. 사람들이 뒤쫓는 성공이니 돈이니 하는 것엔 별로 관심 없는데 그래도 한 번 사는 인생이니 이왕이면 제대로 살고 싶을 뿐이다. 그런데 정작 제대로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 몰라 늘 갈팡질팡 한다. 이 정도면 제법 괜찮다 싶다가도 또 어느 순간 곱씹다 보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나도 그렇다. 나랑 비슷한 고민을 하는 후배랑 술 먹다가 '인생에 정답이 어디 있어?' 호쾌하게 부르짖을 때도 있지만 삶의 피로에 찌든 선배가 푸념을 푹푹 늘어놓으면, 나도 저렇게 되겠지 하는 위기감이 퍼뜩 들어 정답을 알려줄 것 같은 책을 찾아다니기도 한다. 분명 이 책을 한달음에 읽었던 것은 쓰치다가 자조와 자위 사이, 자기 최면과 결심 사이를 쉴 새 없이 오고가는 나와 많이 닮아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정적인 점에서 그는 나와 다르다. 바로 질문이 많다는 것이다. 쓰치다는 자신을 둘러싼 세계에 대해, 닥쳐 온 상황에 대해 그리고 만나는 사람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한다. 나와는 반대다. 나는 그러지 않는다. 나는 질문 대신 매뉴얼을 마련한다. 질문 보다는 대응 방법을 먼저 고민하고 잘 해결하려 빈틈없이 준비한다. 질문과 매뉴얼은 근본적으로 다른 삶의 방식이다. 질문은 타자에 대한 관심의 표명이고 그것을 통해 나를 변화시키려는 움직임이다. 타자에 대한 질문은 필연적으로 자신에 대한 질문으로 돌아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매뉴얼은 자기 안위를 굳건히 하려는 노력일 뿐이다. 물론 매뉴얼도 타자에 대한 관심이 지대하긴 하다. 그러나 그 기저에 깔린 마음은 너무도 다르다. 질문은 타자라는 존재 자체에 대한 관심을 가진다. 하지만 매뉴얼은 어디까지나 그것을 통해 무사히 넘어야 하는 장애물로서만 관심을 가진다. 해결과 극복에만 초점을 맞추기 때문에 타자 자체 보다는 그의 약점이나 내게 유리한 점을 중심으로 보게 된다. 결국 나도 변하지 않는다. 나를 고수하기 위하여 타자를 내게 맞출 뿐이다. 쓰치다를 보면서 내게 이런 모습이 있다는 것을 깊이 깨닫게 되었다.

 그런데 나도 원래는 이렇지 않았다. 어릴 때의 나는 어른들에게 '넌 왜 이렇게 질문이 많냐?'는 말을 참 많이 들었던 아이였다. 내가 좋아했던 책도 백과사전이었다. 세상과 존재에 대해 너무나 호기심이 많았던 내게 백과사전은 그런 갈증을 해갈시켜줄 유일한 우물이었다. 수 십 권의 백과사전을, 책 등이 갈라져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반복해서 읽었다. 사람 일은 모른다더니 그랬던 내가 지금은 이런 모습이다. 이제는 아무 것도 질문하지 않는다. 나 자신에게조차 그렇다. 사회에 나온 이후로 내내 별로 다를 것 없는 일상을 영위하고, 매뉴얼로 대충 수습하는 것에만 급급하다 보니 어느새 나에 대한 것들이 뒷전으로 밀려나 버렸다. 그것을 쓰치다의 모습을 보고 비로소 알게 되었다. 내가 큰 것을, 정말 잃어버리지 말아야 할 것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그것이 바로 나다. 지금의 나는 나에 대해 말하는 것이 너무나 어렵다. 내 취향도, 성향도, 생각도 마찬가지다. 다른 주제에 대해선 달변 인데도 나 자신이 주제가 되면 눌변이다. 말 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매뉴얼의 말로는 이렇다. 자아의 상실이다. 계속 나만 고수하다 보면 나를 잃어버린다. 그런데도 때로는 이만하면 괜찮지 않아 만족하고 있었다니! 화끈거린다.

 처음 읽을 때는 너무나 많은 질문들이 거슬렸다. 뭘 이런 것까지 묻나 싶었다. 시시콜콜과 소심이라고 쓴 말풍선이 내 머리 위로 뭉게뭉게 떠올랐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것들 모두가 타자와 자신에 대한 관심이었고 결국은 나다움을 향한 도정이었다. 그렇게 쓰치다는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자신만의 대륙을 만들고 있었다. 나는? 나는 세계에 나를 끼워 맞췄다. 질문을 갖기 전에 타협했고, 관심보다는 단정이 먼저였다. 그래서 나는 상식과 주류 그리고 보편의 식민지가 되었고 알맹이만 놓고 보면 세상에 허다한 그렇고 그런 사람들에 불과한 익명의 존재라고 말해도 무방했다. 

 그리고 그건 내 탓이었다. 나는 삶이 무빙워크가 되길 원했다. 별다른 갈등과 고민 없이. 조금은 수월하게 목적지로 날 데려다줬으면 했다. 그것을 위해 나를 억눌렀다.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날 맞추었고, 그런 나를 되돌아보지 않았다. 쇼윈도의 마네킹이 입혀주는 대로 입듯이. 그랬던 결과, 나는 얼굴을 잃어버렸다. 누구도 마네킹의 옷을 기억하지, 얼굴을 기억하지 않는다. 이제 내게 필요한 것이 질문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이 무빙워크에서 내려, 제대로 가고 있는 것인지, 그 누구의 눈도 아닌 바로 나 자신의 눈으로 가늠해 보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물론 그 방향은 잃어버린 내 얼굴을 되찾는데 맞춰져 있을 것이다. 앞으로는 매뉴얼 보다 질문의 목록을 훨씬 더 많이 늘려가리라. 지금 이 순간 감히 마음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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