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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의 밤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1년 3월
평점 :
기독교에서 숫자 '7'은 '절대' 혹은 '완전'을 뜻한다. 따라서 제목인 '7년의 밤'을 기독교적 의미로 풀이하자면 그냥 7년이 아니라 무한한 세월 내내 지속되는 밤이 된다. 그 밤은 말 그대로 도저히 헤어나올길 없는 '절대'의 밤이다. 구원의 가능성이 전혀 없는 완전한 암흑의 밤. 소설의 주인공 '서원'이 보낸 지난 7년의 밤은 정녕 그랬다. 그의 아버지가 일으킨 '세령호의 재앙' 때문에 서원은 7년 동안 늘 쫓겨다니며 정처없이 지내야했고, 어디서든 언제 쫓겨날지 모르는 두려움에 떨며 밤을 하얗게 지새워야했다. 그 7년은 오롯이 불면의 밤이었다. 그는 아버지를 원망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가 당하는 기나긴 불면의 밤이라는 고통은 오로지 아버지가 일으킨 사건 때문이고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당해야 하는, 그렇게 아버지가 던져준 운명이니까. 한 번 읽으면 뇌리에서 쉽게 사라지지 않는 인상적인 소설의 첫 문장, '나는 내 아버지의 사형집행인이었다'는 이런 서원의 마음을 잘 나타낸다.
하지만 소설은 제목 그대로 7년간 서원이 가졌던 고통의 밤을 담지 않는다. 소설은 과거로 뛰어든다. 서원이 왜 그러한 밤들을 맞게 되었는지, 원인을 추적한다. 과거의 복기. 서원의 아버지가 어쩌다 그만한 사건을 일으켰는지, 그 과정을 충실히 재현하는 것이다. 그 시간은 서원에게 원죄의 순간이다. 성경으로 치자면 창세기다. 인간이 창세기의 아담과 하와의 죄 때문에 현재도 남자는 노동으로, 여자는 출산의 고통으로 형벌을 치르고 있듯이, 서원 또한 아버지의 죄로 현재의 고통을 치르고 있으니까. 원인이 자신에게 있지 않으니, 그가 고통 가득한 불면의 밤을 벗어나기 위한 길은 이제 단 하나밖에 없다. 원죄가 잉태된 시간 속으로 뛰어드는 것. 소설의 복기는 필연적이고, 오직 그 시간만이 서원에게 구원을 줄 수 있다.
그렇게 재현된 원죄의 시간 속 세계는 어떠했나?
편의상, 그 세계를 둘로 나눌 수 있다. 바로 '오영제'의 세계와 '강은주'의 세계로 말이다. 굳이 이 둘의 이름으로 부르는 것은 그들이 각자 자신의 세계에서 정점에 서 있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정점이란 그들이 가진 힘을 기준으로 표현한 것이다. 권력은 흔히 타인의 의지를 무시하고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킬 수 있는 힘으로 정의된다. 그렇다면, 오영제와 강은주는 진정한 권력자다. 그들 모두는 상대방의 의지와 상관없이 자의로 정하고 그 자리에다 있도록 만들 수 있다. 서원의 원죄는 결국 이들의 권력이 낳은 것이었다. 원죄가 태어난 당일, 오영제는 희생자인 오세령을 바깥으로 내몰았고, 강은주는 남편 최현수를 '세령호'로 내몰았다. 그리하여 세령호의 재앙도 초래했다. 뱀이 하와와 아담에게 죄를 짓게한 것과 똑같이, 그들이야말로 서원의 고통을 가져온 실질적인 장본인이었다.
물론 여기에 대해선 하나의 반론이 제기될 수 있다. 강은주는 오영제의 고용인이니 사실 권력에 정점에 선 자는 오영제 하나라고 해야하지 않느냐고. 마치 이런 반론을 예상이라도 한 듯, 작가는 정점에 서 있는 자들에게 한 가지 특성을 더 부여했다.
바로 감정 표현에 있어 타인의 눈치를 안 본다는 것으로 말이다. 오영제와 강은주는 소설에서 가장 극렬하게 자신의 감정을 표출하는 사람이다. 대부분은 분노인데, 주로 자신의 권력이 제대로 힘을 발휘하지 못할 때 그러하다. 분노와 폭력으로 휘청거리는 자신의 세계 질서를 바로잡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감정을 쏟아내면서도 타인의 감정을 절대적으로 무시할 수 있는 자는 오로지 권력의 정점에 선 자 뿐이다. 그렇기에 강은주도 비록 오영제의 피고용인이나 정점에 서 있는 자인 것이다. 그것은 고용주인 오영제와 대면할 때 드러난다. 자신의 세계를 안정시키기 위해 강은주는 자주 오영제에게 이런 저런 요구를 하는데, 그런 요구를 함에 있어서 결코 오영제의 눈치를 안 본다. 언제나 당당하게 요구한다. 그로인해 오영제의 분노가 촉발 되어도 상관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강은주는 오영제에게 종속된 존재로 볼 수 없다. 작가는 어쩌면 이 사실을 이름을 통해서도 밝히고 있는 것 같다. 오영제에겐 제왕을 뜻하는 '제'가 들어있고, 강은주에겐 주인을 뜻하는 '주'가 들어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이렇게 정점에 서 있다는 그들의 지위는 똑같지만, 그들의 세계 자체는 다른 것을 나타낸다. 한 마디로, 오영제의 세계는 '권력'을, 강은주의 세계는 '돈'을 상징한다. 어째서 그러한가? 그것은 바로 권력과 돈의 속성이 오영제와 강은주가 지향하는 목표와 일치하기 때문이다. 오영제는 자신의 세계가 늘 자신이 설정한 형태 그대로 유지되길 원한다. 즉 오영제의 세계는 현상유지를 추구한다. 강은주는 늘 자신의 세계가 확장되길 바란다. 그녀가 어린 시절 늘 꿈꾸었던 것은 쪽방에서 탈출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언제나 보다 넓은 집에서 사는 것을 원했고 그 때문에 그 꿈을 이뤄줄 자본을 뒤쫓았다. 이 현상유지와 확장은 그대로 권력과 돈의 속성과 일치한다. 권력은 현재의 질서가 늘 똑같이 고정되도록 만드는 습성이 있고, 돈은 외부로 끊임없이 증식하는 습성이 있으니까. 이런 의미에서 오영제와 강은주의 세계를 권력과 돈의 세계라 달리 부르는 것도 가능하다. 그런데 권력과 돈, 이 둘은 지금의 현대인들이 가장 욕망하는 대상이기도 하다.
어떻게 보면 현대인들은 권력과 돈 사이에 끼여 있다고도 말할 수 있다. 톱니바퀴 사이에 끼여 있는 존재가 톱니바퀴를 따라 돌 수밖에 없듯이, 그만큼 권력과 돈도 자기를 중심으로 움직이도록 현대인의 영혼을 깊이 지배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이렇게 보면, 이제 우리는 가련한 희생자들인 '오세령'과 '최현수'를 달리 해석하게 된다. 바로 우리 현대인들의 서글픈 자화상이라고 말이다. 이것은 오세령과 최현수가 오영제와 강은주에게 당하는 형태로 더욱 뚜렷하게 드러난다. 권력은 폭력으로, 돈은 욕망으로 현대인을 지배하고 길들인다. 폭력은 육체로 직접 가해진다. 똑같이 오영제는 오세령을 학대한다. 돈은 무한 증식을 향한 자신의 욕망을 남들도 갖도록 만든다. 그것도 스스로 원해서 그러는 것처럼 생각하도록 만들면서 말이다. 똑같이 최현수는 강은주의 욕망을 자신의 욕망으로 알고 기계처럼 강은주의 욕망을 이루며 살아간다. 이렇게 오세령과 최현수는 동일한 부류의 사람들이다.
그런데 오영제와 오세령, 강은주와 최현수가 이루는 세계는 서로 차별되는 또 다른 특징이 눈에 띈다. 그것은 우리나라 역사와도 상관있다.
현상유지를 향한 권력이 폭력으로 발현되는 오영제, 오세령의 세계는 우리나라의 80년대를 연상시킨다. 이와 마찬가지로, 모든 것이 오로지 돈을 중심으로 돌아가며 그것을 향한 욕망만이 가득한 강은주, 최현수의 세계는 IMF 이후, 더욱 거세진 돈에 대한 집착이 거대한 사회적 조류로 일관되게 흐르고 있는 오늘까지의 우리나라를 어쩔 수 없이 떠올리게 만든다. 그러므로, 오영제와 강은주의 세계는 현재이자, 과거이다. 그것은 중첩되어 있다.
왜 작가는 여기에 과거의 시간까지 겹치게 만들었는가?
이 시간적 특성이 내게는 중요한 것으로 생각된다. 바로 여기서 독자가 참여하는 공간이 열리기 때문이다. 오세령과 최현수가 우리의 서글픈 자화상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보라. 그렇다면 각각의 시간들, 그러니까 오영제의 80년대와 강은주의 96년 이후가 현재 우리의 고통을 낳은 원죄의 시간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것은 그대로 소설의 구성과 일치한다. 서원이 현재의 고통을 풀기 위해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그 원죄의 시간을 복기해야 하는 것과 똑같은 것이다. 우리도 그러하다. 우리 역시도 오늘의 고통에서 제대로 헤어나려면 고통이 발아된 원죄의 시간 속으로 들어가 그것을 제대로 직시해야 한다. 직시(直視)는 정유정 작가가 소설에서 한결같이 추구하는 삶에 현상된 고통에 대한 윤리적 태도이다. 그녀는 어떤 것이든 진정한 대면 없이는 극복하기 힘들다고 말한다. 그것이 죄로 인한 것이면 더욱 그러하다. 그래서 과거로 데려가는 것이다. 원죄가 태어났던 그 시간 자체로. 그녀는 독자 역시도 그렇게 되길 바란다. 그리하여 오영제와 강은주의 시간은 이렇게 과거의 시간적 특성까지 지니게 된 것이다.
이로써 더욱 분명해진다. 오세령과 최현수가 당했던 고통이 바로 지금 우리가 당하는 고통이며, 동시에 우리 역시 서원의 자리에 서 있다는 것이 말이다. 서원이 가졌던 7년 동안의 불면으로 가득한 밤들은 사실 우리 모두의 밤이었다. 서원처럼 우리 역시 권력과 자본 사이에 끼어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잃었고, 그 때의 원죄가 낳은 사회의 구조적인 모순 때문에 현재까지도 불가피하게 고통을 당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7년의 밤'은 결코 소설로 그치지 않는다. 서원의 여정은 그대로 우리가 밤에서 빠져나오기 위한 여정인 것이다. 오영제와 강은주, 두 세계가 수렴된 '세령호'는 그야말로 지금 우리 삶의 축소판이다.
그렇다면, 작가는 구원의 여정을 어떻게 드러내는가?
바로 문하영과 최현수 그리고 안승환과 최서원을 통해서다. 물론 그들은 같지 않다. 오히려 정유정 작가가 집요하게 추구하는 테마인 직시(直視)에 대해서라면 정반대다. 한 쪽은 직시를 거부하고 다른 한 쪽은 적극적으로 직시하려 든다.
직시(直視)를 거부하는 존재들은 세계의 폭력적이고 부조리한 면모를 획책 하지는 않았어도 그 존속에는 일조하는 사람들이다. 오영제의 아내 문하영과 강은주의 남편 최현수(여기서 앞서 말한 부조리란, 강은주의 욕망을 최현수가 자신의 욕망으로 알고 강은주의 욕망에 봉사하는 것을 두고 한 말이다.)가 여기에 속한다. 그들은 도피와 방관을 통해 세계의 폭력과 부조리가 지속되는 것에 일조한다. 문하영은 자신의 딸이 오영제에게 학대받는 것을 보면서도 혼자 도망친다. 더구나 오세령이 남편의 학대 끝에 숨졌다는 것을 알면서도 엄마가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자신의 도피가 그저 자기 혼자만 어떻게든 피하고 보자는 얄팍한 심리의 발현이었다는 것을 그녀는 이렇게 스스로 증명한다. 최현수는 방관한다. 강은주가 자신에게 요구하는 것들이, 그리고 그 요구에 맞춰 사는 삶이 결코 옳지 않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늘 묵묵히 감내한다. 엄청난 거구의 몸을 가졌으면서도 그런 태도 때문에 그는 언제나 겁먹은 사슴처럼 행동한다. 때로는 사랑이라는 것으로, 때로는 가장의 책임이라는 것으로 불행을 가져오는 원인을 똑바로 직시하지 않는 것을 정당화하면서 내일은 더 나으리라는 막연한 기대에만 의지하여 방관으로 일관한다. 이렇게 문하영과 최현수는 똑같은 존재들이다. 그들 모두 불행의 원천을 직시하기 보다는 어떻게든 피하고 미루기만 하느 것이다. 그 결과, 얼른 단절되어야 하는 세계의 폭력과 부조리가 항구적으로 지속된다.
결국 하나의 파국과도 같이 오세령이 희생된다. 기이하게도 작가는 오세령의 죽음 장면에서 엄마인 문하영의 이미지와 아빠인 최현수의 이미지를 오세령에게 하나로 통합한다. 즉 오세령은 엄마의 복장을 한 채, 차에 부딪히고 최현수를 아빠라고 부르며 강물 속으로 가라앉는 것이다. 오세령은 문하영과 최현수의 교집합 같은 이미지로 희생된다. 이렇게 하여 작가는 그들의 방관이 아무런 구원을 가져오지 못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도피와 방관은 더 커다란 비극을 부를 뿐이라는 것을 말이다.
단적으로 최현수를 보면 알 수 있다. 오세령의 죽음을 직시하지 않고 회피만 했었던 최현수는 끝내 마을 전체마저 세령호 아래로 수몰시켜버렸다. 한 사람의 수장이 한 마을의 수몰로 거대해져 버렸다. 이보다 더 어떻게 도피와 방관이 가져오는 것은 단지 더 큰 비극 뿐이라는 것을 명확하게 보여줄 수 있을까? 그런데 이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물에 가라앉힌다는 것은 방관을 비유하는 행위다. 수면 아래로 가라앉히게 되면 직시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 마을의 수장 역시 방관에 해당된다. 서원은 그것으로 인해 7년 동안 가장 끔찍한 형태의 벌을 받았다. 서원은 최현수의 삶에 있어서 가장 소중한 것이었다. 작가는 이렇게 세령과 마을의 수장 그리고 서원으로 이어지는 연쇄를 통해 방관의 경로가 비극의 확장 밖에 없다는 것을 선명하게 도려낸다.
이런 그들의 태도가 어딘가 낯이 익다면 그것은 아마도 거울처럼 우리의 모습을 비추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문하영과 최현수는 우리와 그리 먼 존재가 아니다. 사실은 우리와 닮은 모습이다. 그것도 '세월호 참사' 이후의 우리 모습을 말이다. 이 소설이 마치 어떤 예언처럼 보이는 것은 '세령호'와 '세월호'가 유사하다는 점에 있는 것 같다. 거기다 회피와 방관이 비극을 초래했다는 것마저 어찌나 흡사한지.
'7년의 밤'은 '세월호 참사' 이후, 더욱 소설로만 읽을 수 없는 작품이다. 여기엔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모습의 자화상이 선명하게 그려져 있을 뿐만 아니라 거기에 대해 아주 분명하게 경고하고 있어 읽을 때 더욱 부끄러움을 느끼게 된다. 소설은 분명하게 경고했다. 어떤 비극적인 사건이 생길 때마다 그것에 대해 직시하고 분명하게 성찰하지 않으면 계속해서 더 큰 비극이 중첩될 것이라고. 이 소설이 나온 2011년 벽두, 우리는 용산 참사를 겪었다. 우리는 분노했지만 그것은 잠깐에 불과했고 언제나 그랬듯이 곧 잊었다. 내게 닥쳐온 일이 아니었기에. 결국 뒤이어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다. 역시나 방관과 무관심 속에 흐지부지 되는 것 같더니 메르스 사태가 발생했다. 사건은 점점 더 우리 가까이 다가왔다. 마치 '이래도 남의 일처럼 방관할래?' 하는 것처럼.
오세령의 죽은 모습엔 작가의 숨은 뜻이 하나 더 담겨 있다. 작가가 하필이면 문하영과 최현수를 통합시키면서 오세령을 죽게 한 것은 문하영과 최현수를 가해자로 비난하기 위해서였다. 우리는 그들 역시 피해자라는 것을 잘 안다. 하지만 작가는 오세령의 죽음을 통해 그들의 피해가 그들의 가해를 정당화시키지 못한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 영화 '올드보이'에 여기에 딱 맞는 대사가 있다. '절대 고의로 그런 것은 아니야'라고 말하는 오대수에게 유지태가 분한 인물은 이렇게 대답한다. "모래알이나 바위나 물에 가라앉는 것은 마찬가지다."라고. 똑같이 작가는 오세령의 죽음으로 회피와 방관 역시 가해자들만큼이나 책임이 있다고 지적한다. 때문에 그것에 대한 대가로 그들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히 여기는 존재들에게 고통을 가차없이 가하는 것이다.
그럼,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것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안승환과 최서원이다. 앞서 이 소설이 서원이 행하는 과거의 복기라고 말했다. 그대로 이것은 서원이 문하영과 최현수와 달리 자신의 불행을 낳은 근원을 직시하려는 움직임이다. 안승환도 마찬가지다. 작가는 공교롭게도 똑같은 직시의 태도를 보여주는 안승환과 최서원을 동일하게 잠수부로 만들었다. 그들이 하는 일은 주로 물 아래 가라앉힌 것들을 건져내는 것이다. 안승환은 소설 초반 잠수부로 등장하여 '세령호' 아래 잠긴 마을을 관찰한다. 즉 아무도 보려하지 않던 수몰된 마을을 그는 직시하는 것이다. 최서원은 해류에 떠밀리다 실종된 잠수부 하나를 건져낸다. 이것은 그대로 세령호에 잠긴 오세령과 이어진다. 최현수가 가라앉힌 존재를, 그의 아들인 서원이 건져내는 것이다. 한 쪽엔 가라앉히는 자가 있고, 다른 한 쪽엔 건져내는 자가 있다. 직시를 거부하는 태도가 가라앉히며 적극적인 직시의 태도가 건져낸다. 한 쪽은 죽음을 초래하고 은페시켜 더 큰 비극을 양산했고 다른 한 쪽은 생명을 건져내어 비극을 종결시켰다. 너무나 선명한 대비가 아닐 수 없다. 작가의 대안이 어디에 있는지 바로 알 수 있다.
이것을 더욱 확실하게 보여주는 게 있다. 바로 안승환을 작가로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안승환은 원죄가 태어났던 날 밤, 세령호에서 정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소설로 쓴다. 진실을 찾기 위하여. 서원의 과거 복기는 바로 그 소설을 중심으로 이뤄진다. 이보다 더 어떻게 직시의 태도를 명확하게 보여줄 수 있을까? 결국 이것을 통해 서원은 그토록 바랐던 구원을 얻는다.
어떤 소설들은 자신이 상정했던 수명보다 훨씬 더 오래 살아남는다. 시대가 소설을 요청하기 때문이다. 그런 소설은 시대가 가장 시급히 답을 구하는 문제에 대해 응답할 수 있기에 요청받는다. 나는 '7년의 밤'이 그렇다고 본다. 이 소설은 나온 당시보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금에 더 널리 읽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더구나 지금은 '강남역 묻지마 살인'과 같은 여성 혐오 범죄, '구의역 스크린 도어 기사 사망 사건'과 같은 열악한 노동 계층에 대한 차별 문제, '흑산도 여교사 특수 강간'과 같은 인격 침해 범죄들이 곳곳에서 봇물 터지 듯,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는 사건과 사고의 원인과 대책에 대한 성실한 직시(直視)없이, 어떻게든 일부에게 일어난 특수한 사건으로 무마시키거나 껍데기 뿐인 대책으로 덮으려고만 한다. 문하영과 최현수가 했던 것과 똑같이 말이다. 하지만 그것이 줄 수 있는 것은 오직 더 큰 커다란 비극밖에 없다는 것이 소설에서나, 현실에서나 뚜렷하게 밝혀진 바다. 언제까지 우리는 이 바보 놀음을 계속할 것인가? 이제 진지하게 안승환과 최서원의 직시(直視)를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얼마 전, 정말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다. 세월호와 함께 수장된 아이들 시신을 건져올렸던 민간 잠수사가 돌아가셨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 분을 세월호 청문회 자리에서도 보았고, 정청래가 컷오프 된 날 시민들이 더불어민주당 당사 앞에서 필리버스터를 할 때도 보았다. 세월호 진실 규명을 위해 일한 사람을 아무 이유없이 잘랐다며 강하게 성토했다. 박주민 변호사가 선거 운동을 할 때도 누구보다 열심히 참여했던 분이라, 설마 그렇게 돌아가시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그는 차가운 물 속에서 서로 얽혀 있는 아이들 시신을 '엄마 만나러 가야지' 달래면서 건져낸 사람이었다. 세월호가 얼마나 참혹한 참사였는지 정면에서 직시(直視)한 사람이었고 그랬기에 다시는 이런 비극이 없어야한다는 누구보다 확고한 생각으로 세월호 참사의 진실 규명을 위해 노력한 분이었다. 비록 안타깝게 유명을 달리하셨지만, 직시가 어떤 삶을 살도록 하는지 그분의 생애만큼 잘 보여주는 것은 없다고 생각된다. 소설에서 유일하게 진실을 직시하려 했던 이들이 잠수부였기에, 그 분을 보면서 '7년의 밤'이 많이 떠올랐다. 그래서 이렇게 쓰게 되었다. 사실 이 분의 죽음은 우리 책임이다. 우리의 회피와 방관이 이 분을 죽게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회피와 방관이 있는 한, 비극은 이렇게 계속될 것이다. 고통과 불안만이 가득한 불면의 밤은 언제까지나 끝나지 않을 것이다. 이제 그 밤을 응시해야 할 때다. 어둠에 대한 정직한 대면과 적극적인 참여만이 비극의 연쇄를 끊을 수 있다. 이 소설과 한 민간 잠수사의 삶을 보면서 난 진실로 그렇게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