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 - 위화, 열 개의 단어로 중국을 말하다
위화 지음, 김태성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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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화, 그는 '차이의 사유자'다. 그의 인생엔, 그의 소설 '허삼관 매혈기'에서 허삼관이 그토록 아끼던 첫째 아들 '일락'이 자신의 자식이 아니라는 것을 갑자기 알게 되는 것과 같은, 돌연한 변화의 순간들로 가득하다. 1989년 텐안문 사건이 하루 아침에 아예 일어나지 않았던 일처럼 되는 것을 보았고, 문화대혁명 시절엔 한 통의 편지로 혁명의 영웅이 되어 전국적인 추앙까지 받던 열 두살 초등학생 황솨이가 불과 2년 뒤에 마오쩌둥이 사망하자 이제는 거꾸로 인민의 적이 되어 몰락하는 것도 목격했다. 자신의 아버지 조차 원래는 중국공산당의 적인 지주 가족이었으나 할아버지가 가산을 모조리 탕진하는 바람에 정말 운좋게 타도 대상에서 벗어난 '격세의 수혜자'였다. 하지만 불운한 아버지도 있었다. 초등학교 1학년 때의 친구 아버지가 그랬다. 그는 위화에게 늘 웃어주던 친절하고 자상한 사람이었지만 조반파에 의해 갑자기 타도 대상으로 지목되고 온갖 괴롭힘을 당한 끝에 그만 우물에 뛰어들어 자살하고 말았다. 이 모든 것은 예측이 불가능했다. 한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아득히 넘어서 있었다. 그래서 위화는 이렇게 말한다.


 사실 그런 시대에는 한 개인의 운명을 결코 자기 것이라고 할 수 없었다. 모든 사람이 정치 상황의 파도에 따라 흔들렸고 자기 앞길에 행운이 기다리고 있는지 불행이 기다리고 있는지 아무도 알 수가 없었다.(p. 124)


 그의 삶에 그렇게나 많던 돌연()은 그의 말대로 한 개인을 그저 도구로만 생각하는 전체 때문이었다. 그는 그것을 영수(領袖)'로 표현한다. 영수는 모두가 박수칠 때, 그 박수를 받으며 위에서 홀로 치하 하듯이 손을 흔드는 사람이다. 위화에게 일상생활이란 '평범하고 사소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삼라만상을 담고' 있고, '사람들의 마음을 격동시키기에 충분할만큼 풍부하고 넉넉(p. 18)'한 것이지만 영수는 그 일상을 오로지 자신의 어록과 사상만 존재하는 하나로 만든다. 그 한 사람 때문에 삼라만상은 고유의 목소리와 존재 가치를 잃었고 결국 자신의 운명마저 좌우할 수 없게 되고 말았다. 위화는 처음으로 서점에서 문학 책을 살 수 있었을 때, 서점에서 책을 살 수 있는 유표가 50 장밖에 되지 않아서 책을 살 수 없었던 51 번째의 사람에 대해 말한다. 그 사람은 겨우 한 끗 차이로 오랜 시간 기다린 것에 대한 아무런 보상을 받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 후로도 마을에서 내내 가장 재수 없는 사람의 상징이 되어 평생 놀림을 받아야 했다. 이런 식으로 한 개인의 가치란 것이 영수에 의해 어이 없을만큼 쉽게 지워졌던 것이다.


 그래서 위화는 차이에 집중한다. 차이로 단일한 흐름에 균열을 만들고 하나의 목소리에 이질의 목소리를 집어넣어 분산시킨다.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이 바로 그의 독서였고 글쓰기였다. 그 시대엔 오로지 '마오쩌둥 선집'이라는 한 권의 책과 그 사상에 복무하는 '대자보'라는 하나의 글쓰기 유형만이 허용되었다. 하지만 위화는 시대를 거스른 독서와 글쓰기로 '차이의 사유자'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해 나간다. 개인의 격렬한 감정을 담은 문학을, 설령 그것이 앞과 뒤가 잘려나간 것이고 누군가 알 수 없는 글씨로 필사한 것이라 해도 걸신 들린 듯이 읽었고 글쓰기 또한 전체에 대한 봉사 보다는 개인의 감정과 생각을 드러내는 것을 지향했다.


 누구나 일생을 통틀어 표현하고 싶은 무수한 욕망과 감정을 품게 된다. 하지만 실제 현실과 개인의 이성과 지혜가 이를 억누르고 만다. 하지만 글쓰기의 세계에서는 이렇게 억압된 욕망과 감정을 충분히 표출할 수 있다. 나는 글쓰기가 사람의 심신 건강에 큰 도움이 되고 인생을 더욱 완전하게 만들어준다고 믿는다. 또는 글쓰기가 사람들에게 두 갈래 인생의 길을 갈 수 있게 해준다고 할 수도 있다. 하나는 현실의 길이고 다른 하나는 허구의 길이다. 이 두 가지 길은 건강과 질병의 관계와 같아서 하나가 강대해지면 다른 하나가 필연적으로 쇠약해진다. 내 현실에서의 삶의 길이 갈수록 평범해지는 것은 허구에서의 내 삶의 길이 갈수록 풍부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p. 147)



 그러므로 그가 문학을 하게 된 것도 필연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그런 영수의 시대도 지나갔다. 어느새 문화대혁명도 이미 30년 전의 과거가 된 것이다. 그렇게 벌어진 시대의 간극만큼 같은 언어도 이제 다른 뜻을 가지거나 달리 쓰이게 되었다. 위화는 그런 언어를 10개 선정하여 그것을 통해 시대의 변화를 담고자 한다. 그 단어가 바로 인민, 영수, 독서, 글쓰기, 루쉰, 차이, 혁명, 풀뿌리, 산채 그리고 홀유다.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는 그렇게 태어난 책이다. 시대는 물론 많이 달라졌다. 함부로 이름조차 부르기 힘들었던 마오쩌둥이 희화화되어 광고 간판에 등장하고 그 때는 밤새 자지않고 기다려야 겨우 살 수 있었던 책이 현재는 지천에 널려 쉽게 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폐지 값으로도 팔린다.


 하지만 달라진 것은 그런 외양 뿐이었다. 본질은 변한 것이 없었다. 영수는 지금도 존재했다. 바로 돈이었다. 자본 아래서, 한 개인의 가치는 그 때만큼 쉽게 지워졌다. 그 때나 지금이나 지방 권력이 휘두르는 문화대혁명식 폭력이 2006년을 기준으로 빈민으로 부를 수 있는 연 수입이 600위안 이하의 3천만 명(800위안으로 기준하면 1억 명)의 삶을 오로지 돈을 목적으로 가차없이 파괴하고 있었다.


 아이에게 사 줄 바나나 한 개 값이 없어서 부부가 우는 아이를 앞에 두고 자살하고, 한 초등학생 소녀는 이렇게 몸에 열이나고 아픈데도 너무나 가난하여 약 하나 사주지 못하는 부모에게 절망하여 자신이 가장 아끼는 스카프로 목을 매어 자살한다. 달라진 것은 없었다. 다만 그 때는 한 개인을 벼랑으로 내모는 폭력이 보였다면, 지금은 보이지 않을 뿐이었다. 더구나 현재의 중국은 그 때와 똑같이 이런 암흑의 현실을 묵살하고 있었다. 그 때는 모두가 평등해서 계급이란 것이 없었는데도 계급 투쟁을 강조하여 사람들의 희생을 강요했는데, 지금은 엄연히 존재하는 사회적 차별을 위장된 평등으로 은폐하면서, 풀뿌리(위화에 따르면 이 말은 비주류, 비정통 약자층의 대명사라고 한다)의 개인들이 당하는 모든 고통을 자신의 탓으로 여기게 만들고 있었다. 그러니 위화는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중국인의 진정한 비극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빈곤과 기아의 존재를 무시하는 것이 빈곤과 기아보다 더 무서운 것이다.(p. 215)


 오직 하나의 존재, 하나의 목소리만이 존재하는 사회에서 일상의 삼라만상을 복원하듯, 한 개인을 온전한 모습 그대로 건져내기 위한 것이 위화의 문학이었다. 그것이 차이의 사유가 지닌 임무였다. 그런데 이제 그 차이의 의미에 대해 달리 생각해야했다. 그 때는 오로지 전체에 의해 너무 쉽게 좌지우지 되는 개인의 운명을 구제하기 위하여 차이에 집중했지만 이제는 그 차이가 너무도 많아졌고, 현격했기 때문이다.


 30여 년이 지난 오늘도 우리는 여전히 ‘차이’라는 말을 반복하고 있다. 물론 오늘날의 차이는 공허한 사상의 차이가 아니라 실질적인 사회적 차이다. 빈부의 차이와 도농의 차이, 각 지역의 차이, 발전의 차이, 수입의 차이, 분배의 차이 등 무수한 차이가 존재한다. 사회의 거대한 차이는 필연적으로 과격한 집단행동과 개체행동을 유발한다.(p. 204)


 그 때는 자유가 되었던 차이가 이제는 자신을 가두는 감옥이 되고 있었다. 어린 아이들마저 자신이 처한 사회적 위치에 따라 바라는 소망이 달랐다. 부자 부모를 둔 아이는 진짜 보잉기를 원했으나, 시골의 가난한 소녀는 다만 새 운동화 하나만이라도 가졌으면 했다.


 우리는 현실과 역사의 거대한 차이 속에서 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커다란 꿈의 차이 속에서 살고 있다.(p. 216)


 그러니 이제 위화가 추구하는 차이는 예전 그대로일 수 없었다. 분리가 아닌 연대를, 차별이 아닌 존중과 대화를 이끌어 내는 차이가 되어야 했다. 그래서 그는 초심으로 돌아간다. 태어날 때부터 만났던 혁명의 진실을 다시 헤아려 보는 것이다. 글의 순서에서 이런 의도가 감지된다. 앞서 인용한 아이의 꿈은 '차이'의 마지막에 나온다. 바로 뒤이은 글의 제목은 '혁명'이다. 알고보면 혁명은 가장 커다란 차이를 만드는 행위다. 모든 혁명은 전 시대와 완전히 반대되는 것을 만들어내려 한다. 그 차이는 초기의 위화가 꿈꾸었던 차이와 그리 다르지 않다. 다름을 통한 고유한 개별성의 추구. 하지만 다시 회고한 결과, 그 때의 혁명이 다른 의미를 가진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토록 차이를 강조한 혁명이 그로 인해 오히려 쉽게 한 개인을 절망과 죽음으로 내몰았다는 것을.


 혁명이란 무엇인가? 내 과거 기억 속의 해답은 온갖 주장들로 뒤죽박죽이었다. 혁명은 우리의 삶을 알 수 없는 것으로 가득 채웠다. 한 사람의 운명이 하루아침에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하기 일쑤였다. 어떤 사람은 순식간에 하늘을 날았고 어떤 사람은 눈깜짝할 사이에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으로 추락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사회적 유대도 혁명을 따라 수시로 이어졌다 끊어지기를 반복했다. 오늘까지 혁명의 전우였던 사람이 내일은 계급의 적이 될 수 있었다.(p. 252)


 이것을 통해 위화는 차이를 통한 인정이 아니라 인정을 통한 차이를 추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타자의 존중을 바탕으로 한 개별성을 지향하는 것이다. 뒤에 나오는 '풀뿌리', '산채' 그리고 '홀유'는 이제 새로이 정립된 차이에 대한 시야로 담은 현재 중국의 모습이다. 여기서 '산채'와 '홀유'는 쉽게 말하면 가짜와 사기 보다는 덜한 거짓말을 뜻한다. 덩샤오핑의 개혁개방으로 중국의 풀뿌리 계층은 경제권력을 재분배 받았지만 오히려 '혈두'가 그랬듯이 자신과 같은 풀뿌리 계층 사람들을 더 많이 착취 했고 그것을 통해 스스로 산채 귀족처럼 행세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참된 삶인양 '홀유'까지 했다. 특히나 사회적으로 '산채'는 중국 강자 집단에 대한 약자집단의 혁명행위처럼 되어 가짜와 진짜의 경계를 없애버렸고, '홀유'는 거짓의 정당화로 중국 사회의 윤리와 도덕성 결핍 그리고 가치관의 혼란을 가속화시켰다. 그 결과,인간 관계의 파편화는 점점 심해지고 갈등과 적대가 빈번하게 일어났다.


 위화의 문학은 이제 그것들을 관통해나가야 했다. 결국 그는 자신의 문학을 다시 정립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그에게 문학이란 단일한 전체에서 쉽게 떨어져 나갈 수 있는 개인을 위한 것이 되었다. 누구도 돌아다보지 않는 자들, 쉽게 잊혀져 버린 자들, 지워져 버린 자들. 목소리와 자기 존재마저 잃어버린 자들. 위화의 문학은 바로 그들 곁에 자신의 자리를 찾은 것이다. 가장 약한 자에 대한 존중과 대화를 통해, 사회가 망각하고 고의로 삭제하는 차이를 복원하는 것. 그것이 위화의 문학이 나아갈 길이었다. 나는 그것을 무엇보다 어린 시절 그가 즐겨 찾았던 영안실에서 우연히 들었던 울음소리에 대한 추억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10년이라는 세월 동안 나는 이 세상에서 들을 수 있는 거의 모든 울음소리를 다 들었다.(…) 나는 울음소리 속에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친밀함과 간절함이 담겨 있다고 느꼈다. 고통과는 비교할 수 없는 그런 친밀함과 간절함이었다. 한동안 나는 이런 울음소리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감동적인 노래라고 생각했다.(p. 107)


 그 울음소리는 지금 막 죽은 누군가를 위해 가족이 낸 울음 소리였고, 그렇게 세상은 들을 수 없는, 오직 위화만이 들을 수 있는 울음소리였다. 그는 그 소리를 세상에서 가장 감동적인 노래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자신의 문학은 바로 그 울음소리를 들려주는 것이라 생각한다. 나는 그의 소설 중 최근에 나온 '제7일'이 이런 이유로 유령의 목소리로 채워졌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런 울음의 의미를 온전히 들려주는 것. 듣는 자가 설령 다른 시대, 다른 나라, 다른 민족, 다른 언어, 다른 문화에 속한 사람이라 하여도 그 소리에 공감할 수 있도록 하는 것. 그것이 문학이 가진 신비한 힘이며 위화는 자신의 문학이 바로 그런 힘을 갖게 되길 바란다.


 만일 문학에 정말로 신비한 힘이 존재한다면 나는 아마도 이런 것이 그 힘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독자로 하여금 다른 시대, 다른 나라, 다른 민족, 다른 언어, 다른 문화에 속한 작가의 작품 속에서 자신의 느낌을 읽을 수 있게 하는 힘 말이다.(p. 108)


 나는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를 이렇게 읽었다. 내게 이 책은 개인의 가치가 보잘 것 없는 시대를 연이어 살았던 작가가 헌신해야 할 문학의 방향을 찾아가는 이야기로 다가왔다. 글의 마지막에 울음소리를 언급한 것은 이것이 위화 문학의 핵심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지금 우리에게도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우리에겐 세월호 참사를 비롯하여 많은 아픔들이 있었다. 그로 인한 울음소리를 모으면 분명 하늘을 몇 겹이나 덮고도 남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 우리 사회는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지 못했다. 그러기는커녕 울음을 막고 호소하는 목소리마저 지워버리려 애썼다. 이유 같지 않은 이유로 그들의 아픔을 정당화시키고 온갖 거짓으로 그들의 진심을 왜곡하여 사회적 비난마저 감수하도록 만들었다. '산채'와 '홀유'는 이렇게 우리나라에서도 버젓이 일어나고 있는 일인 것이다. 문학에게 사회적 책임이 있다는 말을 흔히 한다. 그 책임이란 것이 단순히 자신이 말한 내용에 책임을 진다거나 사회에 대해 뭔가 발언한다는 정도의 의미는 아닐 것이다. 아마도 진짜 의미는 사회가 쉽게 무시하고, 돌보지 않는 자들과 그들의 아픔을 시야에 담아, 그들의 목소리를 들려주는 것에 있지 않을까 싶다. 위화의 이 책은 내게 문학의 진정한 사회적 책임이 뭘까 내내 생각하게 만들었다. 우리의 문학은 지금 어디로 향해야 할까 거듭 곱씹게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위화의 방향이 맞는 것 같다. 쉽게 묻히고 왜곡되는 우리 사회의 가장 약하고 아픈 자들의 울음소리를 온전히 듣게 하는 것이 문학이 중시해야 할 태도가 아닐까 싶다. 아니, 그렇게 해줬으면 좋겠다. 아직은 쉽사리 들을 수 없는 많은 울음소리가 위화의 이 책을 통해서라도 더 많이 흐를 수 있게 되길 바란다. 정녕 그들의 울음소리가 빛보다 더 멀리 전해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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