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도자기 여행 : 동유럽 편 - 개정증보판 유럽 도자기 여행
조용준 지음 / 도도(도서출판)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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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럽 도자기 하면 폴란드의 바르샤바에 갔을 때가 생각난다. 

 8월의 여름밤은 대통령 궁 가까이 있는 구시가지에서 보내기 좋다. 늦은 밤에도 많은 사람들이 걸어다녀 떠들석 하고 넓직한 광장 주위엔 앉아서 맥주를 마실 수 있는 데도 많아 여유롭게 이국의 밤을 즐기기엔 제격이기 때문이다. 폴란드의 토속 맥주를 이것저것 맛보다가 술이나 깰 겸 사람들에 섞여 거리를 걸었다. 가는 도중에 갑자기 동행한 지인이 날 어떤 가게로 끌고 들어갔는데 거기가 바로 폴란드 도자기를 전문적으로 파는 곳이었다. 원래 도자기 같은 것에 전혀 관심이 없었으므로 나는 그제서야 폴란드 도자기를 처음 본 것인데 흔히 그들의 말로 공작의 눈이라 부르는 코발트 블루와 흰색의 공백으로 이루어진 도자기들은 단순한 디자인인데도 제법 멋이 났었다. 그 때서야 지인은 바르샤바를 고집했던 것이 폴란드 도자기 때문이라고 털어놓았다. 그는 여러 개를 골랐고 우린 그걸 거의 한 달 가까이 되는 유럽 여행 또한 내내 가지고 다녔다. 가게 주인이 아주 튼튼하게 포장해줘서 다행이었다.




[여행 때 구입한 폴란드 도자기 커피잔과 함께 한 컷^^]



 기자 출신인 조용준 작가의 '유럽 도자기 여행  : 동유럽 편'을 읽게 된 것은 그 기억 탓이 크다. 

 어쨌든 나도 그걸 계기로 폴란드 도자기에 대해 알게 되었고 몇 개도 구입해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관심이 생겼으니 더 많이 알고 싶었다. 이 책은 그런 내게 꽤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예상은 적중했다. 여하튼 이 책엔 제목 그대로 폴란드는 물론이고 독일을 비롯 오스트리아, 체코, 헝가리의 도자기들에 대한 상세한 정보가 많은 도판과 함께 실려 있다. 유럽 자기의 역사는 생각한 것보다 짧았다. 유럽에서 최초로 자기를 만드는 데 성공하여 자기 공장이 설립한 게 1710년이라고 하니까 말이다. 18세기라면 조선 후기고 그 때면 이미 고려 청자는 물론 조선 백자도 한참 시간이 지났을 때다. 유럽 자기의 역사는 그만큼 늦었던 것이다. 자기를 최초로 만든 사람은 베를린 출신의 연금술사 요한 프리드리히 뵈트거다. 그는 기독교에 의해 이단시 되었던 연금술을 했다가 걸려 당시 작센과 폴란드 군주였던 아우구스트 1세 의해 강제로 자기를 만들게 되었다. 자기는 도기와 다르게 철 함유량이 3% 이하인 고령토를 사용해 1300도씨 이상의 고온에서 굽는데(도기는 철 함유량이 3% 이상인 점토를 사용해 900도씨 내외의 온도에서 굽는다.) 마침 독일 작센과 체코 보헤미아의 경계에 있는 에르츠게바르게 산맥에서 일종의 고령토인 슈노르가 발견된 것이다. 그렇게 하여 도자기는 처음 공장이 세워진 마이슨을 시작으로 동유럽 각지로 퍼져나가게 된다. 책은 그 발자취를 따라 나간다. 제목에 여행이 들어간 것은 그래서다. 어디로 가면 어떤 도자기의 역사를 볼 수 있는지 이 책은 설명하고 있다. 동유럽의 도자기 역사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면 이 책이 밟았던 여정을 그대로 답습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개인적으론 한 달 간의 유럽 여행 일정과 비슷해서 더 흥미로웠다. 책에 나왔던 대부분의 장소가 그 때 발을 디뎠던 곳이었던 것이다. 나는 밤베르트가 동유럽 도자기에서 중요한 명소인 줄은 몰랐다. 황혼녁의 밤베르크의 유명한 시청사를 보면서 훈제 맥주인 라우흐비어(이거 정말 추천합니다. 밤베르크에 가시면 꼭 한 번 드셔보세요.)를 마시긴 했어도 초콜릿 제조와 판매로 얻은 막대한 수입을 미술품 수집에 바쳤던 페터 루드비히의 컬렉션을 거기서 볼 수 있다는 건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프라하에서 베를린 갈 때 들렀던 드레스든 또한 커트 보네것의 '제 5 도살장'을 생각하며 명소들을 방문했을 뿐 그 곳의 박물관에서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끌려가 가장 유명한 일본 도자기인 아리타 도자기를 만들어 낸 조선 도공 이삼평의 숨결을 느껴볼 수 있다는 건 몰랐다. 뮌헨의 레지덴츠와 님펜부르크 궁전에서 전시된 허다한 도자기들을 봤어도(이 당시엔 귀족들 사이에서 자신이 수집한 도자기 컬렉션을 전시하는 도자기 방을 만드는 게 유행이었다고 한다.) 그것에 어떤 의미들이 있는 지 또한 몰랐다. 그 도자기들의 흥망성쇠가 바이에른 공화국의 흥망성쇠와도 관련 있었다니. 폴란드 도자기와는 또 다른 디자인을 가진 체코의 쯔비벨무스터와 헝가리의 헤렌드를 알게 된 것도 이 책 덕분이었다. 체코와 헝가리의 도자기들은 유럽의 것과 많이 닮아있어 개성적인 맛은 좀 떨어졌다. 폴란드 도자기들은 미국에서 먼저 유명해져 전 세계로 전파되었다고 한다. 그건 동유럽 국가들 중에서 폴란드가 가장 먼저 민주주의 국가가 된 것과 무관하지 않다. 그 때 동유럽 국가들 중 처음으로 개방 사회가 되어 독일에서 근무하고 있던 많은 미군들이 폴란드로 여행을 갔고 거기서 독특한 미를 가진 폴란드 도자기들을 조국에 귀환할 때 선물로 많이 사갔던 것이다. 


 이처럼 그냥 보고 마시고 먹기만 했었던 도자기들에 대한 역사와 여러가지 정보들을 얻을 수 있어서 '유럽 도자기 여행 : 동유럽 편'은 내게 꽤 유용한 책이었다. 또한 코로나 19 때문에 언제 또 다시 가게 될 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더욱 그리워 하게 되는 8월의 유럽 여행을 겹쳐진 여정 때문에 마구 소환하게 되어 더 각별한 독서 경험이었다. 언젠가 다시 가게 된다면 그 때는 도자기들에 대해서도 눈여겨 살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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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3-17 22: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3-19 02: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희선 2021-03-18 0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폴란드 바르샤바 하면 쇼팽 피아노 콩쿠르가 떠오릅니다 거기에는 도자기도 있군요 책 색깔이 바로 폴란드 도자기 색을 나타내는 거였네요 폴란드에서 산 커피잔 멋지네요 저기에 커피 마시기 조금 아깝겠지만, 그래도 자주 쓰시겠지요


희선

ICE-9 2021-03-19 02:25   좋아요 0 | URL
도자기에겐 미안하지만 전혀 아깝지 않게 마구 사용하고 있답니다.^^
저도 동유럽에 그렇게 다양한 도자기들이 있을 줄은 몰랐어요. 여행하면서 많이 봤지만 다 영국이나 프랑스 같은 곳에서 건너온 거겠거니 생각했을 뿐이었죠. 그런데 독일이 그 시작이었다니! 뭐든 쉽게 단정해선 안된다는 걸 그렇게 또 배웠습니다^^
 
웨어하우스 - 드론 택배 제국의 비밀 스토리콜렉터 92
롭 하트 지음, 전행선 옮김 / 북로드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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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세상이 사막으로 되고 있다면 사람들은 생존을 위해서라도 오아시스로 모여들기 마련이다. 그런데 그 오아시스가 누군가의 소유라면 그리고 그가 오아시스의 물을 마시고 싶으면 자신의 정체성을 포기하고 오직 자기가 명령한 것만 철저하게 수행하는 기계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 생존이 얼마나 절박하느냐에 따라 선택의 양상을 달라질 것이다. 어쩌면 단순히 오아시스의 일원이 되어 그렇지 못한 자들 보다 자신이 더 우월하다는 걸 느끼고 싶어서 기계가 되기로 결정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정치부 기자를 역임했으며 정치 경력도 있는 미국의 스릴러 작가, 롭 하트의 '웨어하우스'는 이런 세계를 바탕으로 한다. 





 드론을 통한 택배로 엄청난 부를 거머쥔 회사라는 설정은 실제 그런 서비스를 준비 중인 아마존을 얼른 떠올리게 만든다. 아무튼 이 소설에 나오는 '마더 클라우드'는 그 정도의 대기업이다. 창업자 깁슨은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이라 보면 된다. 소설은 그 깁슨의 말로 시작한다. 그는 어떻게 자신이 마더 클라우드로 성공했는지 밝히는데 그러면서 췌장암 때문에 얼마 살지 못할 거리는 것도 아울러 고한다. 뒤이어 두 사람이 등장한다. 한 명은 남자 팩스턴. 다른 한 명은 여자 지아나


 둘은 같은 날 '긴급 고용'에 뽑히기 위해 마더 클라우드에서 면접을 본다. 원래 팩스턴은 자기 사업이 있던 사람이었다. '퍼펙트 에그'라고 달걀을 안에 집어 넣고 전자레인지에 돌리면 원하는 모든 요리를 만들어주는 기계를 발명해 사업을 했다. 그러나 주 고객이었던 클라우드가 자꾸만 낮은 단가를 원해 거기에 맞추다가 그만 사업이 망하고 말았다. 사업을 하기 전에 교도관이었던 팩스턴은 그 일을 하다가 자기 고유의 정체성을 자꾸만 상실하는 것 같아서 그걸 보존하기 위하여 사업을 한 것이었는데 이제 그것 또한 실패하여 다시 거대한 기계와도 같은 마더 클라우드의 부품이 되려 하고 있었다. 지니아는 처음부터 수상쩍은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녀에겐 뭔가 비밀이 있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는 유능한 산업 스파이이다. 그녀가 마더 클라우드에 입사하는 건 오직 의뢰인이 높은 자릿수의 금액을 입금하고 회사를 망칠 것을 원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각자 다른 이유로 입사하게 된 이들은 우연히 팩맨이란 고전 게임을 통해 인연을 맺게 된다. 팩스턴은 교도관 이력 때문에 보안 업무를 맡게되고 거기서 마더 클라우드에서 유통되고 있는 마약 오블리비언의 입수 경로를 찾아내라는 임무를 받는다. 지니아는 해킹 프로그램을 심을 컴퓨터 단말기를 찾아야 한다. 그러나 접근 하기가 쉽지 않다. 마더 클라우드의 모든 고용인은 손목 시계를 차도록 되어 있는데 그건 언제 어디에 있었는지 철두철미하게 감시하는 기계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시계를 풀고서는 방 밖으로 나갈 수도 없다. 이토록 천라지망과도 같은 감시망 아래에서 지니아는 과연 비밀 임무를 완수할 수 있을 것인가?


 소설은 꽤 다채롭다. 일단 이야기 전개가 세 사람을 중심으로 번갈아가며 행해진다. 언제나 시작을 여는 것은 깁슨이다. 그의 말은 대체로 그가 블로그에 올리는 글을 통해서 독자에게 제시된다. 다른 둘은 물론 팩스턴과 지니아이다. 깁슨이 말할 때는 그가 말을 다 할때까지 도중에 시점의 전환이 일어나지 않지만 팩스턴과 지니아에선 때로 수시로 시점이 이리저리 바뀐다. 말하자면 항구적 존재 하나와 유동적인 존재 둘. 이런 인물의 전환 외에도 팩스턴의 것은 마약이 소재고 그것을 찾아나가는 이야기라 범죄 수사물처럼 보이고 지니아의 것은 첨단 감시 체제를 교묘하게 피해 임무를 완수해야 한다는 점에서 '미션 임파서블' 같은 스파이 물처럼 보여 이야기 자체도 서로 달라진 장르적 분위기로 읽을 수 있기 때문에 한층 더 그렇게 다가온다. 게다가 팩스턴과 지니아, 이 둘 사이의 로맨스도 이뤄진다. 이러니까 이거 뭐, 장르 소설의 종합 선물 세트 같은 느낌마저 난다.


 아무튼 난 앞서 팩스턴과 지니아를 유동적인 존재라 불렀는데, 그건 이 둘의 로맨스와 많이 관계가 있다. 경험한 사람은 다 알 것이다. 사랑이 사람을 얼마나 잘 변화시키는지. 지니아가 그렇다. 그녀는 명확한 목적을 가지고 입사했다. 그녀는 오로지 임무 완수만 생각하고 다른 건 일절 관심 갖지 않는다. 팩스턴과의 관계도 실은 자기 목적에 이용하기 위해 일부러 접근한 것이었다. 둘은 만나게 한 것은 '팩맨'이란 게임이었는데, 지니아야말로 그 팩맨이었다. 조라가 쫓아오든말든 경마장의 말처럼 뒤를 조금도 돌아다보지 않고 죽어라 도트만 먹어치우고 다니는.



 



 그렇게 주변을 전혀 둘러볼 줄 모르는 이였으나 팩스턴과의 관계를 통해 점점 바뀌어 간다. 해들리란 소녀가 릭이란 사내한테서 괴롭힘을 지속적으로 당하자 그를 혼내주고 급기야 그토록 중요했던 자신의 임무마저 위험에 빠뜨리는 선택을 하게 되는 것이다. 아끼는 사람을 구하려고. 그렇다고 팩스턴에게도 변화가 없는 건 아니다. 그도 바뀐다. 처음엔 그저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잠시만 회사에 몸을 의탁할 요량이었다. 하지만 점점 남들의 인정을 받게 되는 기쁨과 자신의 존재가 차츰 더 중요해진다는 즐거음 때문에 그는 마더 클라우드에 온전히 정착할 생각을 한다. 자신을 몰락시킨 원수임에도 불구하고. 물론 그런 결정을 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지니아였다. 그는 지니아와 함께 하기 위해 안정된 기반을 얻고 싶었던 것이다. 그는 마더 클라우드가 믿을만한 사람들이 질서 체계를 잘 정립한 좋은 곳이라 생각했다. 물론 오블리비언 같은 사소한 결함이 없진 않지만 그런 건 자신이 얼마든지 교정할 수 있는 문제라 여겼다.


 하지만 착각에 지나지 않았다. 마더 클라우드 때문에 망해버린 도시의 폐쇄된 서점에서 우연히 만난, 자신을 저항군이라 소개하던 앰버는 이런 말을 한다.


 "내가 클라우드에 대해 한 말씀 드리지. 그건 우리의 선택이야. 우리가 그들에게 통제권을 줬어. 그들이 식료품점을 다 인수하기로 했을 때, 우린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그들이 농업 운영권을 인수하기로 했을 때도 우린 가만히 있었어. 그들이 언론, 인터넷 제공업체, 휴대 전화를 인수한다고 했을 때, 그 때도 우린 그러라고 했어. 클라우드는 고객만 신경 쓰니까 보다 나은 가격에 동일한 상품을 이용할 수 있으리라는 얘기를 들었지. 고객은 가족이라는 말도 들었어. 하지만 우린 가족이 아니야. 우린 대기업이 크게 성장하기 위해 먹어야 하는 음식에 불과해.(p. 396)"


 마더 클라우드가 드론 택배로 오늘의 자리에 오른 건 '블랙 프라이데이' 사태 덕분이었다. 블랙 프라이데이 때, 쇼핑객들을 상대로 한 학살 사건이 일어났고 그로 인해 사람들이 오프 라인 쇼핑을 꺼려한 탓이었다. 앰버는 그 사건 또한 마더 클라우드가 조장했을 것이라 말한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치료약을 준다고 말했지만 그건 사실 자신들의 독에 더 중독되게 만드는 마약일 뿐이었다. 팩스턴이 훗날 찾아낸 오블리비언 유통의 진실과 똑같이. 앰버의 말 그대로 마더 클라우드의 사람들은 회사의 음식에 지나지 않았다. 나중에 지니아가 충격 속에 발견했던 것처럼 그들이 맛나게 먹던 클라우드 버거의 쇠고기는 사실 그들의 똥으로 만들어진 것이었으니까. 마더 클라우드는 직원의 대변마저 돈을 받고 팔아 다시 그 입에 처넣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짓을 해도 마더 클라우드가 태연자약할 수 있는 건, 팩스턴 같은 사람들 때문이다. 그렇게 당하고 사는데도 조금의 먹을 것과 온기에 스스로를 속이며 착취와 굴욕을 용납하고 사니까. 그런 팩스턴에게 지니아는 자신도 각성을 하게 했던 어슐러 르 귄이 쓴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에 대해 얘기해 준다.


 "어떤 장소에 대한 얘기였죠. 유토피아. 거기엔 전쟁도 없고 굶주림도 없었어요. 모든 것이 완벽했죠. 대신, 그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한 아이가 아두운 방에서 끊임없이 방치된 채 갇혀 있어야 했어요. 아유는 모르겠어요. 그냥... 그게 작동하는 방식이었던 거죠. 빛도 없고 따뜻함도 없고 친절함도 없는 곳에서. 음식을 가져다주는 사람들조차 그 아이를 무시하라는 명령을 받았어요. 사람들은 그걸 받아들였구요. 그게 그곳이 작동하는 방식이었으니까요. 현 상황을 유지하는 것은 일종의 마법의 규칙 같았죠. 거기 사는 사람들은 모두 그 한 아이가 고통받는 대가로 모든 훌륭한 것들을 얻었으니까요. 수십억의 삶을 위해 한 사람쯤 희생하는 게 그리 대수겠어요? (...) 그 이야기는 나를 항상 화나게 했어요. 사람이라면 절대 그런 식으로 살 수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왜 아무도 그 아이를 도와주지 않는 걸까요? 난 항상 그 이야기의 결말을 새롭게 쓰는 상상을 하곤 했죠. 내 상상 속 결말에서는 몇몇 용감한 사람들이 쳐들어가서 그 아이를 안고 나와 그간 누리지 못했던 사랑을 줬어요.(P. 506)



 


 이건 팩스턴이 지니아에게 물었던, 스포일러 상 밝힐 수 없는 일을 감행하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고귀한 인간의 존재를 하찮은 똥으로 변질시키고 있는 걸 눈으로 분명하게 확인했는데 어떻게 아이를 내버려둔 채 오멜라스를 그냥 떠나는 것으로 만족하는 사람이 될 것인가? 팩스턴 또한 그동안 자신이 보아왔던 마더 클라우드가 가진 허다한 비인간적인 처사들을 묵과해선 안된다고 말이다. 그 모두는 누구도 관심 갖지 않고 돌봐주지 않는 한없이 약한 해들리란 소녀의 희생을 바탕으로 만들어지는 것이었기에.


 이처럼 '웨어하우스'는 단순히 재밌는 스릴러를 넘어 세계화가 진전될수록 부와 권력이 소수에게로 집중화되는 현상이 점점 가속화 되는 오늘날의 자본주의에 대한 매서운 비판도 담겨 있는 작품이다. 앰버나 지이나의 말에서 왠지 마음 저 밑바닥에서 치솟는 뜨거운 감정을 느낀다면 그런 당신 또한 지금의 자본주의가 잘못된 길로 가고 있다는 걸 자각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한국 사회도 예외가 아니다. 그런 문제 의식이 있다면 소설이 더욱 잘 읽히게 될 것이다. 결말이 그리 시원하지 않아서 조금 불만이긴 하지만(론 하워드 감독이 영화로 만든다고 하는데 거기서는 결말이 좀 바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살짝 첨부해 둔다.) 그래도 재미와 메시지가 그걸 상쇄하고도 충분히 남기에 좋은 스릴러라 추천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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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1-03-18 0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드론이 택배를 배달하다니... 언젠가는 사람이 아닌 기계가 배달 같은 걸 한다고도 하던데, 그게 잘 될까요 잘 못 받을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누군가 한사람만 희생해야 한다고 하면, 자신만 아니면 된다고 여기는 사람도 많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이야기가 있기도 하네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야 할 텐데...


희선

ICE-9 2021-03-19 02:27   좋아요 0 | URL
아마존에서 실현시키려 작업하고 있다는 얘긴 들었습니다.
때로 이기심이란 절박함에서 비롯될 수도 있는 것 같아요. 물론 선한 사람에 한해서지만요^^
 
지금부터의 내일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93
하라 료 지음, 문승준 옮김 / 비채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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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다림이 길었다. 

 얼마만의 재회인가? 하라 료가 과작으로 유명하긴 하지만 그래도 14년 만의 신작이라니 너무했다. 그래서 간만에 만난 그의 신작 '지금부터의 내일'은 하루 한 페이지씩 아껴가며 읽어야할 것 같다. 여하튼 우리의 사립탐정 사와자키 역시 흐른 시간만큼 나이를 먹었다. 이젠 20대 청년에게서 "당신이 내 아버지 아닌가요?"라는 말을 들어도 별로 이상하지 않을 나이가 된 것이다. 그러나 흐른 건 그저 세월 뿐이고 그 외는 달라진 게 별로 없다. 사무실도 늘 그 자리에 그 간판 그대로 있고 들어오는 의뢰들도 늘 그게 그거다. 그러나 이제 그렇게 있을 수 없다. 지금 있는 자리에 머무를 수 없다. 변화의 시간이 불쑥 찾아온 것이다. 


 그건 한 사람의 의뢰인과 함께 왔다. 이름은 모치츠키. '파이낸셜 저축 은행 신주쿠 지점장'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사람. 그에게서 사와자키는 참으로 오랜만에 '신사'란 말에 어울리는 사내를 만났다고 생각한다. 모진 세파에 굴하지 않고 양심에 거리낌이 없도록 자신의 윤리 의식을 관철하며 성실하게 뚜벅뚜벅 걸어 온 사람. 어쩌면 사와자키가 되고 싶었던 사람이. 그는 나리히라 요정의 이름을 대며 거기 여주인을 조사해 달라고 말한다. 그 때까진 여느 의뢰와 다를 것 없다고 생각했던 사와자키였다. 하지만 그 의뢰인을 다시는 만나지 못한다. 그렇게 다람쥐 쳇바퀴 돌 듯 하고 있는 의뢰에 변화가 생겼다. 그것 만이 아니다. 그는 부동산 업자의 방문도 받는다. 그녀는 사와자키에게 건물주가 퇴거를 원한다고 말한다. 이제 오래도록 지켜왔던 자리를 내어줘야 한다. 시간은 그렇게 사와자키를 다른 곳으로 데려간다. 지금까지 사와자키의 일상이란 뻔히 예측이 되는 정해진 궤도 위의 것이었지만 이제 문을 열고 들어가야 할 곳은 예측이 불가능한 삶이다. 갑자기 무언가가 엄습하고 생각지도 못했던 상황에 빠지며 아는 것과 전혀 다른 사실을 마주하게 되기도 한다. 그걸 시간이라는 형태로 비유하자면, '내일'이 될 것이다. 내일에 어떤 일이 생길지는 아무도 모르니까. 


 바야흐로 사와자키 앞에서 지금부터 내일이 펼쳐지려 한다.




 말했던 것처럼 평범한 의뢰라고 여겼던 거기엔 뜻밖의 것들이 사와자키를 기다리고 있다. 조사를 요청받았던 요정의 주인은 이미 세상을 떠났고 그 결과를 보고하러 찾아갔던 의뢰인의 직장에선 은행 강도를 당해 인질로 억류되는 상황을 맞이한다. 됨됨이가 올바른 신사라고 생각했던 모치츠키의 삶은 자기가 본 겉모습과 전혀 다른 것이었고 급기야 가족을 떠나 홀로 살고 있는 모치츠키의 아파트에선 얼마 전부터 함께 살고 있다는 간사이 지방의 사내가 욕조에서 죽은 상태로 발견된다. 은행 강도를 당하기 직전에 사라진 의뢰인은 어디서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며 오래도록 질긴 악연인 야쿠자 하시즈메가 불쑥 찾아온다. 사와자키가 당했던 은행 강도 사건에 대해 상세한 정보가 필요하다면서.


 단순하다고 생각했던 의뢰는 이렇게 야쿠자 조직까지 연루된 상상 이상으로 복잡한 지형을 가지고 있었다. 의뢰인을 시작으로 조사 대상이었던 요정, 동료를 버리고 혼자 달아난 은행 강도가 가진 비밀 등 사와자키가 앞으로 나아갈수록 더 많은 미스터리가 도처에 존재했다. 여기도 '내일', 저기도 '내일'이 고개를 빼곰이 들고 비웃듯 바라보는 것과 같았다. 어쩌면 사와자키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세상은 이미 너무나 복잡해져 버려 더이상 단순 명쾌하게 풀어낼 수 없다는 것을. 예전에 사와자키가 그랬듯이, 휴대폰 없이 혼자 맨 몸으로 돌아다녀도 얼마든지 사건을 해결할 수 있었던 때는 애저녁에 지나가버린 것이다. 그랬기에 사와자키는 모치츠키를 처음 봤을 때 매료되어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아무리 세상이 복잡다변해졌어도 늘 자기 모습을 항구적으로 유지하고 있는 것 같았으니까. 또한 은행 강도를 함께 상대하여 인연을 맺게 된, 자수성가한 가이즈라는 청년을 아끼게 되는 것도 동일한 이유이리라.


 하라 료는 그 가이즈란 청년을 독자에게 마치 어쩌면 모치츠키의 젊은 시절이 이렇지 않았을까 연상하도록 재현한다. 지금 사귀고 있는 여자 친구를 더이상 속일 수 없어서 운영 중인 사업체를 포기하려고 고민하고 있는 가이즈의 모습은 요정의 주인과 하룻밤 얽히게 된 일로 내내 마음의 빚을 떠안고 살았던 모치츠키의 모습과 겹친다. 모두가 돈과 권력을 쫓아 방해되는 인정(人情)은 손쉽게 던져버리는데 오히려 그 둘 만은 그 인정(人情)을 위해 자신의 돈과 지위를 아낌없이 포기하려 하고 있으니까.


 바로 그게 열쇠가 된다. 부단한 변화를 요구하며 이제 좀 달라져야 하지 않겠나는 상황의 압박 - 그건 좀 더 약삭빠르게 굴며 속물적이 되라는 은근한 압박이다 -에 대항하여 아무리 하찮은 의뢰라 하여도 성실하게 수행하며 비용을 받았으면 업무 외에는 한 푼도 허투루 쓰지 않고 꼬박꼬박 정산해서 남은 것은 돌려주는, 단 한 번도 허물지 않았던 자기 스스로 세운 신념을 관철하여 '사와자키'답게 있을 수 있는 길을 알려주는.


 그렇게 소설의 끝에서 사와자키는 더이상 이상한 나라를 헤매는 엘리스가 아니게 된다. 하라 료는 변화의 부름 속에 사와자키가 선택의 기점에 있었음을 여러 곳에서 설정을 매개로 은유적으로 드러내고 있는데 스포일러가 되기에 밝힐 수 없지만 모치츠키에게 이중적인 신분을 가지도록 한 것이 그 하나고, 나중에 밝혀지는 모치츠키의 은신처와 젊은 시절 모치츠키가 하룻밤 보냈던 요정의 뚜렷한 공간 대비가 그 중 하나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두 명의 모치츠키를 만나게 되는데, 현재 지점장 모치츠키의 모습은 젊은 시절 모치츠키가 현실에 타협했을 경우 갖게 될 모습이란 걸 알 수 있다. 어쩌면 사와자키도 잘못된 선택을 한 경우 하게 되었을수도 있는.


 이는 언제나 그 자리에서 처음 열었을 때 초심을 잃지 않고 늘 그 모습 그대로 남아있으려 하는 요정의 묘사를 통하여 더욱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사회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음에도 불과하고 늘 신사의 모습으로 남을 수 있었던 의뢰인 모치츠키. 그가 그렇게 신사로 남아 사와자키마저 감명시킬 수 있었던 건 그 요정에서의 하룻밤을 통하여 요정의 여주인을 통해 받은 것을 늘 마음에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이았으니까.


 어려서 아버지에게 버림을 받은 가이즈는 사와자키에서 자신은 어른 남자를 만날 때마다 그 사람이 자기 아버지는 아닐까 생각하면서 대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는 그렇게 '아버지'라는 자기 삶의 모델이 되어 줄 존재를 필요로 했다.(어쩌면 지금 청년에겐 따를만한 어른의 모델이 없다는 뜻에서 영어에서 보통 청년을 뜻하는 GUYS가 얼른 연상되는 가이즈란 이름을 준 것은 아닐까 싶다.) 실은 우리 모두가 그러하다. 학교에서 배웠던 도덕이나 상식이 전혀 통하지 않는 세상 속에서 온갖 협잡과 기만, 갑질이 점점 정답이 되어가는 것을 보며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게 맞는 것인가 한번쯤 자문해 본 우리라면. 차마 양심의 상처를 외면할 수 없어서 이익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비도덕적이 될 수 있는 세상의 속률(速率)을 따라가지 못해 '내일'이 두려웠던 우리라면.


 그런 우리에게 사와자키는 담배 한 개비를 건네며 답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냥 자신의 정도(正道)를 걸으라고. 두려움은 속물적 욕망이 가능하다고 속이며 만든 허상에서 비롯되는 것이니까. 마지막에서 하라 료는 그걸 선명하게 제시한다. 사와자키가 사건의 종지부를 찍고 새로 옮긴 사무실에 홀로 있을 때, 커다란 지진이 엄습한다. 전혀 예측할 수 없었던 그 지진은 공간 전체를 뒤흔들어 버린다. 이 소설에서 사와자키가 내내 당했던 것처럼. 사와자키는 생각한다. 예전 사무실이 있었던 노후한 건물이라면 붕괴되었을 것이라고. 그러나 그는 흔들리지 않는다. 여전히 살아있다. 마지막 문장이 감명 깊게 다가오는 건 그래서다. 우리가 찾고 싶은 열쇠를 거기서 발견하기 때문이다. 불안 속에 자신의 모습을 포기하는 '내일'의 문이 아니라 여전히 내 모습 그대로 있으면서 당당하게 마주하는 '내일'의 문을 여는 열쇠를.


 오십 년 이상 살다 보면 놀랄 일이 더는 없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잘못이었다. 탐정 업무를 하는 탓에 죽음의 위협에 빈번이 노출되기도 하지만, 땅 속에서 올라오는 거대한 폭력이 상대라면 악담을 내뱉는 것조차 용납되지 않았다. 미세하게 떨리는 손가락에 들린 담배를 다시 물고 연기를 천천히 빨아들였다. 나는 아무래도 아직 살아 있는 것 같았다.(p. 422 ~ 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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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E-9 2021-03-14 0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진 서재 오류 때문인지 3월 5일날 올렸던 리뷰가 이상하게도 책 소개 페이지에는 나오지 않아 이렇게 중복인 줄 알면서도 다시 올립니다. 이번에 올리는 것은 소개 페이지에 마이 리뷰로 등록이 되는군요.ㅠ ㅠ
3월 5일날 올린 글엔 희선님 댓글이 있어 중복인 줄 알지만 놓아둡니다.

물감 2021-03-14 1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잘읽었습니다. 하라 료의 책을 한번도 읽어보지 않았는데 첫편부터 도전해봐야겠어요. 어쩐지 토미오카의 캐릭터가 작가랑 닮았다고 생각이 드네요ㅎㅎ

ICE-9 2021-03-15 03:18   좋아요 1 | URL
물감님, 말씀 정말 감사합니다.^^
사실 제가 기유의 넨도로이드를 삽입한 것은 그것밖에 가진 게 없어서 그런 것이었는데 물감님 말씀 듣고 보니까 정말 기유의 과묵함이 사와자키의 그것과 닮았다는 생각이 드네요. 어쩐지 우연이 필연이 된 느낌입니다.^^
 
로마 황제 열전 - 제국을 이끈 10인의 카이사르
배리 스트라우스 지음, 최파일 옮김 / 까치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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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로 고대 전쟁사 분야에 있어 탁월한 학자로 알려져 있는 미국 코넬대 역사학 교수인 배리 스트라우스는 '스파르타쿠스 전쟁'을 통해 처음 만났다. 거기서 고대사에 있어서 유명한 사건을 전통적인 견해에 자신을 묶지 않고 직접 발로 뛰며 찾아낸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사건에 대한 풍성하고도 입체적인 묘사와 독창적인 통찰력을 보여주어 내게 깊은 인상을 남겼던 저자는 이번 책, '로마 황제 열전'에서도 여전했다. '로마 황제 열전'은 카이사르에 의해 처음 정립된 황제 체제를 그의 뒤를 이어 굳건히 한 아우구스투스부터 처음으로 기독교를 국가 공인 종교로 인정하고 황제로선 최초의 기독교 신자가 된 콘스타니누스에 이르기까지 모두 10명의 황제를 각 개인 별로 소개하는 책이다. 지금까지 로마 역사에 관한 책은 많았으나 이렇게 황제에게만 초점을 맞춰 이야기하는 책은 없었기에 그렇지 않아도 로마 역사에 관심이 많은 나의 흥미를 대번에 낚아채 버렸다.

 

 

 책은 로마 황제의 궁전들이 있었던 팔라티노 언덕에서 시작하여 로마 제국 말기 마지막으로 로마의 빛이 명멸했던 동방의 라벤나에서 끝난다. 

 지금도 '팍스 로마나'란 말로 유명한 로마 제국의 역사는 사실상 황제 체제의 정립과 더불어 시작되었고 그 체제의 종말과 더불어 끝났기에 '로마 황제 열전'은 로마 제국의 역사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책을 통해 비록 황제가 중심이긴 하지만 로마 제국이 어떻게 운영되었고 유지되었으며 확장되는 반면 수축되어 갔는가 역시 살펴볼 수 있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배리 스트라우스가 이 책에 실린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 네로, 베스파시아누스, 트리야누스, 하드리아누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디오클레티아누스, 콘스탄티누스 도합 10명의 황제 개인의 삶은 물론 그를 둘러 싼 로마와 국제 정세까지 두루 자세하게 밝혀 놓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로마 황제가 얼마나 많은데 왜 10명 밖에 없냐는 의문이 있을 것 같아서 작가의 말을 빌어 얼른 대답해 두자면, 이 10명의 황제가 가장 유능하고 성공적이었던 황제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단 네로만은 성공적이라고 말하긴 어렵겠지만 적어도 가장 흥미를 돋우는 황제라 넣어놓았다고 한다. 어쨌든 뭐, 제국의 역사 어쩌고 저쩌고 하는 거창한 이유를 제외해 놓고서라도 여행을 갔다든가 해서 이탈리아 문화 자체에만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도 이 책을 읽어 볼 가치는 충분하다고 본다. 콘크리트를 처음 만든 것이 네로 황제 때라든지, 로마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축물인 '콜로세움'을 지은 것이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라든지 이탈리아 문화에 관한 이런 저런 소소한 정보들도 많기 때문이다. 거기다 꽤 재밌다. 로마 황제 개인의 사생활은 정말 이혼과 재혼이 반복되고 차기 황제의 승계를 위해 자기 아내를 딸로 입양하는 등 요즘 드라마에 유행하는 막장도 많아서 전혀 지루하지 않다.

 

 그렇다고 재미만으로 퉁치기엔 이 책에 담겨 있는, 이전엔 미처 몰랐던 로마 역사의 새로운 면모가 많아서 좀 아까운 생각이 든다.

 먼저, 우리는 로마 황제들이 마치 조선 왕조가 그렇듯이 하나의 혈통 속에서 계속 계승되었을 것이라 생각하겠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초기 로마 황제를 고르는데 가장 중요한 조건이던 카이사르의 혈통은 불과 4대인 네로를 끝으로 끊어졌다. 네로는 원로원과 군대의 하야 압박에 못 이겨 달아나다 로마 도시 바로 바깥에서 자살했는데 동시에 카이사르의 혈통마저 단절되었던 것이다. 당시 로마인들에겐 카이사르의 혈통이 아니면 황제가 제대로 통치할 수 없다고 여겨 비 카이사르 혈통 황제에 대한 두려움이 컸다. 그것을 보기 좋게 깨뜨린 사람이 바로 로마 북동쪽 사비니 지방 출신인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였다. 그는 로마인도 아니었고 심지어 어릴 땐 염소 치는 일이나 하던 평민이었지만 개인의 능력으로 황제 자리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그런 그는 걸출한 통치력으로 아우구스투스 황제에 버금가는 로마의 전성기를 이룩했으니 로마 사람들은 더이상 황제가 카이사르 혈통이 아니더라도 훌륭히 통치할 수 있다는 걸 믿을 수밖에 없었다.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의 흉상]

 

 그렇게 하여 베스파시아누스 황제 이후에는 비 로마인들이 많이 황제 자리에 올랐다. 로마 역사상 최고의 군주로 알려진 트리야누스 황제는 로마 사람들이 시골로 치부하던 히스파니아 출신이었다. 로마 문화의 모태가 된 그리스 문화를 선망하여 진정한 그리스 가치관으로 로마 제국을 하나로 묶으려 했던 하드리아누스 황제 역시 그 동향이었고 '명상록'으로 유명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역시 그의 조상들은 '스페인 마피아'에 속하는 타지 사람들이었으며 셉티이무스 세베루스 황제는 무려 아프리카 사람이었다.(그가 흑인인지 아닌지에 대해선 아직 명확히 밝혀진 게 없다고 한다. 그건 기록이 없기 때문인데 이건 애초에 로마인들이 황제의 피부색에 연연해하지 않았다는 걸 뜻할 수도 있다.)

 

 이처럼 황제 계승의 역사에서 보듯 로마는 점차 개방성을 뚜렷하게 드러내었다. 그들은 제국을 열심히 확장했지만 그렇다고 오직 로마인만이 그 정점에 서야한다고 여기진 않았다. 그들이 제국의 존속을 위하여 가장 우선적으로 폈던 정책은 속주가 된 지방 엘리트들에게 출세길을 열어주어 포용하는 것이었다.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를 비롯 타 지역 출신의 많은 황제들이 가능했던 건 그런 로마의 기본 정책 때문이었다. 이들의 개방성은 거기에만 그치지 않는다. 그들은 여성에 대해서도 그러했고 다른 지역이 평민들에게도 그러했다. 여성의 경우 공식적으로 정치 진출이 인정되지 않았으나 이런 저런 황제 승계에 있어 가장 커다란 영향력을 미친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여성이었다. 황제들은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거나 물려주기 위해 기꺼이 여성에게 자신의 권력과 부를 나눠주었다. 아무리 다른 남자의 아내이고 그의 아이를 배었다 하더라도 왕비로 삼는 것엔 문제가 없었고 때로 티베리우스처럼 전 남편의 아이가 황제가 될 수도 있었다. 세상엔 이런 말이 있다. '세상을 지배하는 건 남자지만 그 남자를 지배하는 건 여자다.' 나중에 읽어보면 알겠지만 로마 황제의 역사만큼 이 말을 실감시켜 주는 것도 또 없다.

 

 더하여 다른 지방의 평민에 대해서도 로마의 벽은 차츰 허물어져 갔다. 로마에겐 시민권이라는 게 있다. 그건 로마의 혜택을 입을 수 있는 자격이다. 처음엔 오직 로마인에게만 주어졌디만 제국의 역사가 지속될수록 그 범위 또한 비 로마인에게로 넓혀졌다. 마침내 후기의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속주의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로마 시민권을 모조리 부여하는 아주 파격적인 정책을 펼치게 된다. 그건 기독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기독교는 아우구스투스 때부터 왕성한 포교 활동을 펼쳤다. 유대(책에서는 '유다이아'라고 부른다.)지방은 로마 제국 역사 내내 골칫거리 였다. 반란이 잦았던 땅으로 그 유다이아 지방을 평정하는 것이야 말로 황제의 중요한 공적이 되곤 했다. 하드리아누스 때는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가장 거대한 반란이 일어나서 그 진압에 친히 나서야 할 때도 있었다. 유대인들이 가장 저주하는 로마 황제는 디오클레티아누스인데, 그가 이른바 '기독교 대박해'를 자행했기 때문이다. 이런 일들이 있었지만 로마 황제들은 기독교를 폭력적으로 진압하지 않았다. 문제가 되었을 때도 되도록 관대하게 되었고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포교만 한다면 대체적으로 내버려두었다.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로마 제국을 그리스적 문화로 통일하려 했었는데 그건 기독교가 점차 영향력을 넓혀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유일신에다 내세 중심인 기독교가 로마 제국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청년을 신격화하여 이성과 다양성 그리고 현세 중심인 그리스적 종교까지 만들었다. 하지만 역사는 기독교가 국교가 되는 곳으로 흘러갔고 그렇게 되는데 가장 커다란 영향을 미친 것은 역시 필요하거나 인정할만하다면 가리지 않고 받아들였던 로마의 개방성이었다.

 

 이러한 로마 제국의 모습은 타자에 대한 혐오와 배척이 심해지는 오늘날 정말 시사하는 바가 많다. '로마 황제 열전'이 잘 보여주듯이 무려 1,200년에 이르는 로마 제국의 역사가 다른 것도 아닌 특유의 개방성이 원동력이 되었음을 상기한다면 이제 그런 태도들은 버려야한다는 게 절로 자명해진다. 타자에 대한 배척과 차별은 분열과 붕괴를 가져올 뿐이다. 공존을 위한 존중과 배려만이 나의 장기 지속 또한 가능하게 만든다는 걸 '로마 황제 열전'이 상세한 정보와 흥미로운 서술로 세공한 로마 제국의 역사는 선명하게 선언하고 있다.

 

 

-<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객관적으로 쓴 리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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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의 내일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93
하라 료 지음, 문승준 옮김 / 비채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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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다림이 길었다. 

 얼마만의 재회인가? 하라 료가 과작으로 유명하긴 하지만 그래도 14년 만의 신작이라니 너무했다. 그래서 간만에 만난 그의 신작 '지금부터의 내일'은 하루 한 페이지씩 아껴가며 읽어야할 것 같다. 여하튼 우리의 사립탐정 사와자키 역시 흐른 시간만큼 나이를 먹었다. 이젠 20대 청년에게서 "당신이 내 아버지 아닌가요?"라는 말을 들어도 별로 이상하지 않을 나이가 된 것이다. 그러나 흐른 건 그저 세월 뿐이고 그 외는 달라진 게 별로 없다. 사무실도 늘 그 자리에 그 간판 그대로 있고 들어오는 의뢰들도 늘 그게 그거다. 그러나 이제 그렇게 있을 수 없다. 지금 있는 자리에 머무를 수 없다. 변화의 시간이 불쑥 찾아온 것이다. 


 그건 한 사람의 의뢰인과 함께 왔다. 이름은 모치츠키. '파이낸셜 저축 은행 신주쿠 지점장'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사람. 그에게서 사와자키는 참으로 오랜만에 '신사'란 말에 어울리는 사내를 만났다고 생각한다. 모진 세파에 굴하지 않고 양심에 거리낌이 없도록 자신의 윤리 의식을 관철하며 성실하게 뚜벅뚜벅 걸어 온 사람. 어쩌면 사와자키가 되고 싶었던 사람이. 그는 나리히라 요정의 이름을 대며 거기 여주인을 조사해 달라고 말한다. 그 때까진 여느 의뢰와 다를 것 없다고 생각했던 사와자키였다. 하지만 그 의뢰인을 다시는 만나지 못한다. 그렇게 다람쥐 쳇바퀴 돌 듯 하고 있는 의뢰에 변화가 생겼다. 그것 만이 아니다. 그는 부동산 업자의 방문도 받는다. 그녀는 사와자키에게 건물주가 퇴거를 원한다고 말한다. 이제 오래도록 지켜왔던 자리를 내어줘야 한다. 시간은 그렇게 사와자키를 다른 곳으로 데려간다. 지금까지 사와자키의 일상이란 뻔히 예측이 되는 정해진 궤도 위의 것이었지만 이제 문을 열고 들어가야 할 곳은 예측이 불가능한 삶이다. 갑자기 무언가가 엄습하고 생각지도 못했던 상황에 빠지며 아는 것과 전혀 다른 사실을 마주하게 되기도 한다. 그걸 시간이라는 형태로 비유하자면, '내일'이 될 것이다. 내일에 어떤 일이 생길지는 아무도 모르니까. 


 바야흐로 사와자키 앞에서 지금부터 내일이 펼쳐지려 한다.




 말했던 것처럼 평범한 의뢰라고 여겼던 거기엔 뜻밖의 것들이 사와자키를 기다리고 있다. 조사를 요청받았던 요정의 주인은 이미 세상을 떠났고 그 결과를 보고하러 찾아갔던 의뢰인의 직장에선 은행 강도를 당해 인질로 억류되는 상황을 맞이한다. 됨됨이가 올바른 신사라고 생각했던 모치츠키의 삶은 자기가 본 겉모습과 전혀 다른 것이었고 급기야 가족을 떠나 홀로 살고 있는 모치츠키의 아파트에선 얼마 전부터 함께 살고 있다는 간사이 지방의 사내가 욕조에서 죽은 상태로 발견된다. 은행 강도를 당하기 직전에 사라진 의뢰인은 어디서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며 오래도록 질긴 악연인 야쿠자 하시즈메가 불쑥 찾아온다. 사와자키가 당했던 은행 강도 사건에 대해 상세한 정보가 필요하다면서.


 단순하다고 생각했던 의뢰는 이렇게 야쿠자 조직까지 연루된 상상 이상으로 복잡한 지형을 가지고 있었다. 의뢰인을 시작으로 조사 대상이었던 요정, 동료를 버리고 혼자 달아난 은행 강도가 가진 비밀 등 사와자키가 앞으로 나아갈수록 더 많은 미스터리가 도처에 존재했다. 여기도 '내일', 저기도 '내일'이 고개를 빼곰이 들고 비웃듯 바라보는 것과 같았다. 어쩌면 사와자키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세상은 이미 너무나 복잡해져 버려 더이상 단순 명쾌하게 풀어낼 수 없다는 것을. 예전에 사와자키가 그랬듯이, 휴대폰 없이 혼자 맨 몸으로 돌아다녀도 얼마든지 사건을 해결할 수 있었던 때는 애저녁에 지나가버린 것이다. 그랬기에 사와자키는 모치츠키를 처음 봤을 때 매료되어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아무리 세상이 복잡다변해졌어도 늘 자기 모습을 항구적으로 유지하고 있는 것 같았으니까. 또한 은행 강도를 함께 상대하여 인연을 맺게 된, 자수성가한 가이즈라는 청년을 아끼게 되는 것도 동일한 이유이리라.


 하라 료는 그 가이즈란 청년을 독자에게 마치 어쩌면 모치츠키의 젊은 시절이 이렇지 않았을까 연상하도록 재현한다. 지금 사귀고 있는 여자 친구를 더이상 속일 수 없어서 운영 중인 사업체를 포기하려고 고민하고 있는 가이즈의 모습은 요정의 주인과 하룻밤 얽히게 된 일로 내내 마음의 빚을 떠안고 살았던 모치츠키의 모습과 겹친다. 모두가 돈과 권력을 쫓아 방해되는 인정(人情)은 손쉽게 던져버리는데 오히려 그 둘 만은 그 인정(人情)을 위해 자신의 돈과 지위를 아낌없이 포기하려 하고 있으니까.


 바로 그게 열쇠가 된다. 부단한 변화를 요구하며 이제 좀 달라져야 하지 않겠나는 상황의 압박 - 그건 좀 더 약삭빠르게 굴며 속물적이 되라는 은근한 압박이다 -에 대항하여 아무리 하찮은 의뢰라 하여도 성실하게 수행하며 비용을 받았으면 업무 외에는 한 푼도 허투루 쓰지 않고 꼬박꼬박 정산해서 남은 것은 돌려주는, 단 한 번도 허물지 않았던 자기 스스로 세운 신념을 관철하여 '사와자키'답게 있을 수 있는 길을 알려주는.


 그렇게 소설의 끝에서 사와자키는 더이상 이상한 나라를 헤매는 엘리스가 아니게 된다. 하라 료는 변화의 부름 속에 사와자키가 선택의 기점에 있었음을 여러 곳에서 설정을 매개로 은유적으로 드러내고 있는데 스포일러가 되기에 밝힐 수 없지만 모치츠키에게 이중적인 신분을 가지도록 한 것이 그 하나고, 나중에 밝혀지는 모치츠키의 은신처와 젊은 시절 모치츠키가 하룻밤 보냈던 요정의 뚜렷한 공간 대비가 그 중 하나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두 명의 모치츠키를 만나게 되는데, 현재 지점장 모치츠키의 모습은 젊은 시절 모치츠키가 현실에 타협했을 경우 갖게 될 모습이란 걸 알 수 있다. 어쩌면 사와자키도 잘못된 선택을 한 경우 하게 되었을수도 있는.


 이는 언제나 그 자리에서 처음 열었을 때 초심을 잃지 않고 늘 그 모습 그대로 남아있으려 하는 요정의 묘사를 통하여 더욱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사회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음에도 불과하고 늘 신사의 모습으로 남을 수 있었던 의뢰인 모치츠키. 그가 그렇게 신사로 남아 사와자키마저 감명시킬 수 있었던 건 그 요정에서의 하룻밤을 통하여 요정의 여주인을 통해 받은 것을 늘 마음에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이았으니까.


 어려서 아버지에게 버림을 받은 가이즈는 사와자키에서 자신은 어른 남자를 만날 때마다 그 사람이 자기 아버지는 아닐까 생각하면서 대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는 그렇게 '아버지'라는 자기 삶의 모델이 되어 줄 존재를 필요로 했다.(어쩌면 지금 청년에겐 따를만한 어른의 모델이 없다는 뜻에서 영어에서 보통 청년을 뜻하는 GUYS가 얼른 연상되는 가이즈란 이름을 준 것은 아닐까 싶다.) 실은 우리 모두가 그러하다. 학교에서 배웠던 도덕이나 상식이 전혀 통하지 않는 세상 속에서 온갖 협잡과 기만, 갑질이 점점 정답이 되어가는 것을 보며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게 맞는 것인가 한번쯤 자문해 본 우리라면. 차마 양심의 상처를 외면할 수 없어서 이익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비도덕적이 될 수 있는 세상의 속률(速率)을 따라가지 못해 '내일'이 두려웠던 우리라면.


 그런 우리에게 사와자키는 담배 한 개비를 건네며 답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냥 자신의 정도(正道)를 걸으라고. 두려움은 속물적 욕망이 가능하다고 속이며 만든 허상에서 비롯되는 것이니까. 마지막에서 하라 료는 그걸 선명하게 제시한다. 사와자키가 사건의 종지부를 찍고 새로 옮긴 사무실에 홀로 있을 때, 커다란 지진이 엄습한다. 전혀 예측할 수 없었던 그 지진은 공간 전체를 뒤흔들어 버린다. 이 소설에서 사와자키가 내내 당했던 것처럼. 사와자키는 생각한다. 예전 사무실이 있었던 노후한 건물이라면 붕괴되었을 것이라고. 그러나 그는 흔들리지 않는다. 여전히 살아있다. 마지막 문장이 감명 깊게 다가오는 건 그래서다. 우리가 찾고 싶은 열쇠를 거기서 발견하기 때문이다. 불안 속에 자신의 모습을 포기하는 '내일'의 문이 아니라 여전히 내 모습 그대로 있으면서 당당하게 마주하는 '내일'의 문을 여는 열쇠를.


 오십 년 이상 살다 보면 놀랄 일이 더는 없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잘못이었다. 탐정 업무를 하는 탓에 죽음의 위협에 빈번이 노출되기도 하지만, 땅 속에서 올라오는 거대한 폭력이 상대라면 악담을 내뱉는 것조차 용납되지 않았다. 미세하게 떨리는 손가락에 들린 담배를 다시 물고 연기를 천천히 빨아들였다. 나는 아무래도 아직 살아 있는 것 같았다.(p. 422 ~ 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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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1-03-06 0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가가 열네해 만에 쓴 소설이라니, 작가가 다음 소설 쓰기 전에 죽으면 어떡하나 하는 생각이... 사와자키는 사무실을 옮기는군요 지진이 일어났다면 무너졌을지도 모를 곳에서, 그건 다행입니다 그래도 사와자키 자신은 그렇게 많이 달라지지 않을 듯도 합니다 세상에 떠밀리지 않고 자기 생각대로 살겠지요

사진 보고 토미오카 기유가 있어서 반가웠습니다 기유 이름 잊어버렸는데, 찾아봤습니다 언젠가 탄지로도 기유 만큼 물의 호흡을 쓸 날이 오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건 만화책 안 보고 텔레비전 만화영화만 봤습니다 이번 여름에 또 하는가 봅니다


희선

ICE-9 2021-03-14 03:41   좋아요 0 | URL
희선님도 귀멸의 칼날을 보셨군요. 저 또한 애니메이션만 봤습니다. 기유 꽤 매력적인 캐릭터죠^^
사와자키의 태도에서 두 가지가 떠올랐습니다.
하나는 영화 분노의 질주 3편이라 할 수 있는 도쿄 드리프트에서 미스터 한의 대사.
그는 말하죠. 틀에 갇히지 말고 너 자신인 삶을 살아라고
또 하나는 레이 브래드버리의 ‘화성 연대기‘
거기서도 기존의 관습적 생각에 지배 당하지 말고 네 자신의 방식대로 살아라는 말을 최후의 화성인이라고 스스로 선언하면서 함께 온 동료 모두를 죽여서라도 지구의 논리로 화성을 망치는 걸 용납하지 않겠다는 스펜더가 합니다. 모두 사와자키의 동료들인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