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부터의 내일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93
하라 료 지음, 문승준 옮김 / 비채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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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다림이 길었다. 

 얼마만의 재회인가? 하라 료가 과작으로 유명하긴 하지만 그래도 14년 만의 신작이라니 너무했다. 그래서 간만에 만난 그의 신작 '지금부터의 내일'은 하루 한 페이지씩 아껴가며 읽어야할 것 같다. 여하튼 우리의 사립탐정 사와자키 역시 흐른 시간만큼 나이를 먹었다. 이젠 20대 청년에게서 "당신이 내 아버지 아닌가요?"라는 말을 들어도 별로 이상하지 않을 나이가 된 것이다. 그러나 흐른 건 그저 세월 뿐이고 그 외는 달라진 게 별로 없다. 사무실도 늘 그 자리에 그 간판 그대로 있고 들어오는 의뢰들도 늘 그게 그거다. 그러나 이제 그렇게 있을 수 없다. 지금 있는 자리에 머무를 수 없다. 변화의 시간이 불쑥 찾아온 것이다. 


 그건 한 사람의 의뢰인과 함께 왔다. 이름은 모치츠키. '파이낸셜 저축 은행 신주쿠 지점장'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사람. 그에게서 사와자키는 참으로 오랜만에 '신사'란 말에 어울리는 사내를 만났다고 생각한다. 모진 세파에 굴하지 않고 양심에 거리낌이 없도록 자신의 윤리 의식을 관철하며 성실하게 뚜벅뚜벅 걸어 온 사람. 어쩌면 사와자키가 되고 싶었던 사람이. 그는 나리히라 요정의 이름을 대며 거기 여주인을 조사해 달라고 말한다. 그 때까진 여느 의뢰와 다를 것 없다고 생각했던 사와자키였다. 하지만 그 의뢰인을 다시는 만나지 못한다. 그렇게 다람쥐 쳇바퀴 돌 듯 하고 있는 의뢰에 변화가 생겼다. 그것 만이 아니다. 그는 부동산 업자의 방문도 받는다. 그녀는 사와자키에게 건물주가 퇴거를 원한다고 말한다. 이제 오래도록 지켜왔던 자리를 내어줘야 한다. 시간은 그렇게 사와자키를 다른 곳으로 데려간다. 지금까지 사와자키의 일상이란 뻔히 예측이 되는 정해진 궤도 위의 것이었지만 이제 문을 열고 들어가야 할 곳은 예측이 불가능한 삶이다. 갑자기 무언가가 엄습하고 생각지도 못했던 상황에 빠지며 아는 것과 전혀 다른 사실을 마주하게 되기도 한다. 그걸 시간이라는 형태로 비유하자면, '내일'이 될 것이다. 내일에 어떤 일이 생길지는 아무도 모르니까. 


 바야흐로 사와자키 앞에서 지금부터 내일이 펼쳐지려 한다.




 말했던 것처럼 평범한 의뢰라고 여겼던 거기엔 뜻밖의 것들이 사와자키를 기다리고 있다. 조사를 요청받았던 요정의 주인은 이미 세상을 떠났고 그 결과를 보고하러 찾아갔던 의뢰인의 직장에선 은행 강도를 당해 인질로 억류되는 상황을 맞이한다. 됨됨이가 올바른 신사라고 생각했던 모치츠키의 삶은 자기가 본 겉모습과 전혀 다른 것이었고 급기야 가족을 떠나 홀로 살고 있는 모치츠키의 아파트에선 얼마 전부터 함께 살고 있다는 간사이 지방의 사내가 욕조에서 죽은 상태로 발견된다. 은행 강도를 당하기 직전에 사라진 의뢰인은 어디서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며 오래도록 질긴 악연인 야쿠자 하시즈메가 불쑥 찾아온다. 사와자키가 당했던 은행 강도 사건에 대해 상세한 정보가 필요하다면서.


 단순하다고 생각했던 의뢰는 이렇게 야쿠자 조직까지 연루된 상상 이상으로 복잡한 지형을 가지고 있었다. 의뢰인을 시작으로 조사 대상이었던 요정, 동료를 버리고 혼자 달아난 은행 강도가 가진 비밀 등 사와자키가 앞으로 나아갈수록 더 많은 미스터리가 도처에 존재했다. 여기도 '내일', 저기도 '내일'이 고개를 빼곰이 들고 비웃듯 바라보는 것과 같았다. 어쩌면 사와자키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세상은 이미 너무나 복잡해져 버려 더이상 단순 명쾌하게 풀어낼 수 없다는 것을. 예전에 사와자키가 그랬듯이, 휴대폰 없이 혼자 맨 몸으로 돌아다녀도 얼마든지 사건을 해결할 수 있었던 때는 애저녁에 지나가버린 것이다. 그랬기에 사와자키는 모치츠키를 처음 봤을 때 매료되어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아무리 세상이 복잡다변해졌어도 늘 자기 모습을 항구적으로 유지하고 있는 것 같았으니까. 또한 은행 강도를 함께 상대하여 인연을 맺게 된, 자수성가한 가이즈라는 청년을 아끼게 되는 것도 동일한 이유이리라.


 하라 료는 그 가이즈란 청년을 독자에게 마치 어쩌면 모치츠키의 젊은 시절이 이렇지 않았을까 연상하도록 재현한다. 지금 사귀고 있는 여자 친구를 더이상 속일 수 없어서 운영 중인 사업체를 포기하려고 고민하고 있는 가이즈의 모습은 요정의 주인과 하룻밤 얽히게 된 일로 내내 마음의 빚을 떠안고 살았던 모치츠키의 모습과 겹친다. 모두가 돈과 권력을 쫓아 방해되는 인정(人情)은 손쉽게 던져버리는데 오히려 그 둘 만은 그 인정(人情)을 위해 자신의 돈과 지위를 아낌없이 포기하려 하고 있으니까.


 바로 그게 열쇠가 된다. 부단한 변화를 요구하며 이제 좀 달라져야 하지 않겠나는 상황의 압박 - 그건 좀 더 약삭빠르게 굴며 속물적이 되라는 은근한 압박이다 -에 대항하여 아무리 하찮은 의뢰라 하여도 성실하게 수행하며 비용을 받았으면 업무 외에는 한 푼도 허투루 쓰지 않고 꼬박꼬박 정산해서 남은 것은 돌려주는, 단 한 번도 허물지 않았던 자기 스스로 세운 신념을 관철하여 '사와자키'답게 있을 수 있는 길을 알려주는.


 그렇게 소설의 끝에서 사와자키는 더이상 이상한 나라를 헤매는 엘리스가 아니게 된다. 하라 료는 변화의 부름 속에 사와자키가 선택의 기점에 있었음을 여러 곳에서 설정을 매개로 은유적으로 드러내고 있는데 스포일러가 되기에 밝힐 수 없지만 모치츠키에게 이중적인 신분을 가지도록 한 것이 그 하나고, 나중에 밝혀지는 모치츠키의 은신처와 젊은 시절 모치츠키가 하룻밤 보냈던 요정의 뚜렷한 공간 대비가 그 중 하나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두 명의 모치츠키를 만나게 되는데, 현재 지점장 모치츠키의 모습은 젊은 시절 모치츠키가 현실에 타협했을 경우 갖게 될 모습이란 걸 알 수 있다. 어쩌면 사와자키도 잘못된 선택을 한 경우 하게 되었을수도 있는.


 이는 언제나 그 자리에서 처음 열었을 때 초심을 잃지 않고 늘 그 모습 그대로 남아있으려 하는 요정의 묘사를 통하여 더욱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사회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음에도 불과하고 늘 신사의 모습으로 남을 수 있었던 의뢰인 모치츠키. 그가 그렇게 신사로 남아 사와자키마저 감명시킬 수 있었던 건 그 요정에서의 하룻밤을 통하여 요정의 여주인을 통해 받은 것을 늘 마음에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이았으니까.


 어려서 아버지에게 버림을 받은 가이즈는 사와자키에서 자신은 어른 남자를 만날 때마다 그 사람이 자기 아버지는 아닐까 생각하면서 대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는 그렇게 '아버지'라는 자기 삶의 모델이 되어 줄 존재를 필요로 했다.(어쩌면 지금 청년에겐 따를만한 어른의 모델이 없다는 뜻에서 영어에서 보통 청년을 뜻하는 GUYS가 얼른 연상되는 가이즈란 이름을 준 것은 아닐까 싶다.) 실은 우리 모두가 그러하다. 학교에서 배웠던 도덕이나 상식이 전혀 통하지 않는 세상 속에서 온갖 협잡과 기만, 갑질이 점점 정답이 되어가는 것을 보며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게 맞는 것인가 한번쯤 자문해 본 우리라면. 차마 양심의 상처를 외면할 수 없어서 이익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비도덕적이 될 수 있는 세상의 속률(速率)을 따라가지 못해 '내일'이 두려웠던 우리라면.


 그런 우리에게 사와자키는 담배 한 개비를 건네며 답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냥 자신의 정도(正道)를 걸으라고. 두려움은 속물적 욕망이 가능하다고 속이며 만든 허상에서 비롯되는 것이니까. 마지막에서 하라 료는 그걸 선명하게 제시한다. 사와자키가 사건의 종지부를 찍고 새로 옮긴 사무실에 홀로 있을 때, 커다란 지진이 엄습한다. 전혀 예측할 수 없었던 그 지진은 공간 전체를 뒤흔들어 버린다. 이 소설에서 사와자키가 내내 당했던 것처럼. 사와자키는 생각한다. 예전 사무실이 있었던 노후한 건물이라면 붕괴되었을 것이라고. 그러나 그는 흔들리지 않는다. 여전히 살아있다. 마지막 문장이 감명 깊게 다가오는 건 그래서다. 우리가 찾고 싶은 열쇠를 거기서 발견하기 때문이다. 불안 속에 자신의 모습을 포기하는 '내일'의 문이 아니라 여전히 내 모습 그대로 있으면서 당당하게 마주하는 '내일'의 문을 여는 열쇠를.


 오십 년 이상 살다 보면 놀랄 일이 더는 없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잘못이었다. 탐정 업무를 하는 탓에 죽음의 위협에 빈번이 노출되기도 하지만, 땅 속에서 올라오는 거대한 폭력이 상대라면 악담을 내뱉는 것조차 용납되지 않았다. 미세하게 떨리는 손가락에 들린 담배를 다시 물고 연기를 천천히 빨아들였다. 나는 아무래도 아직 살아 있는 것 같았다.(p. 422 ~ 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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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E-9 2021-03-14 0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진 서재 오류 때문인지 3월 5일날 올렸던 리뷰가 이상하게도 책 소개 페이지에는 나오지 않아 이렇게 중복인 줄 알면서도 다시 올립니다. 이번에 올리는 것은 소개 페이지에 마이 리뷰로 등록이 되는군요.ㅠ ㅠ
3월 5일날 올린 글엔 희선님 댓글이 있어 중복인 줄 알지만 놓아둡니다.

물감 2021-03-14 1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잘읽었습니다. 하라 료의 책을 한번도 읽어보지 않았는데 첫편부터 도전해봐야겠어요. 어쩐지 토미오카의 캐릭터가 작가랑 닮았다고 생각이 드네요ㅎㅎ

ICE-9 2021-03-15 03:18   좋아요 1 | URL
물감님, 말씀 정말 감사합니다.^^
사실 제가 기유의 넨도로이드를 삽입한 것은 그것밖에 가진 게 없어서 그런 것이었는데 물감님 말씀 듣고 보니까 정말 기유의 과묵함이 사와자키의 그것과 닮았다는 생각이 드네요. 어쩐지 우연이 필연이 된 느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