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의 악보 - 이론의 교배와 창궐을 위한 불협화음의 비평들 자음과모음 하이브리드 총서 1
최정우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별 보기가 힘들어진 시절이다. '요즘'이라고 쓰려했으나 그 기간이 아주 오래된 것 같기에 '시절'이라고 해야 맞을 것 같다. 그렇게 도시의 밤하늘에서 별이 사라진 것을 보면서 한동안 품었던 의심이 하나 있었다. 늘 불야성을 이루고 있는 도시의 불빛들로 인해 이렇게 별이 보이지 않게 된 것이 혹시 이 자본주의 체제 자체의 음모가 아닐까 하는. 자본주의에서 발현된 제국주의에서도 잘 드러나듯이, 언제나 멈추지 않는 식욕과 모든 것을 자신의 수중에 넣어야만 직성이 풀리는 탐욕을 가진 자본주의가 오로지 자기만이 완결된 체제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밤하늘의 별들을 모조리 '보이지 않게' 만들어버린 것은 아닌지 하고 말이다. 즉, 내가 여기서 생각하는 밤하늘의 별들은 단순히 낭만적 정서를 환기시키는 매개물로서가 아니라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넘어선 그렇게 또 다른 세상이 존재할 수도 있구나 하는 가능성의 상징인 것이다. 체제의 그 '너머'를 사유할 수 있게 해 주는 존재. 이 체제의 외곽에서, 그렇게 바깥에서 다시금 그 체제를 돌이켜볼 수 있게 해 주는 존재로서의 '별들'이다. 고개만 올려 보면 늘 거기 있는 별들은 가장 손쉽게 내가 있는 이 자리를 하나의 '객체'로 사유할 수 있는 여지를 전해줄 수 있었다.  그건 '민족주의'를 만들면서까지 체제내의 노동력과 그로부터의 이윤을 끝없이 빨아들여야했을 자본주의로서는 그 '손쉬움' 때문에 가장 커다란 위협이었을 것이다. 끝없이 흡혈하기 위해서는 그 체제의 사람들이 오로지 이 체제가 '종국적인 것'임을 깨달을 필요가 있으니까 말이다. 마치 리처드 애덤스의 소설 '워터십 타운의 열 한마리의 토끼'에 나오는 워터십 타운에 살고 있는 토끼들처럼 그 바깥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사람들이 늘 토끼들을 식재료로 쓸 수 있듯이 말이다. 때문에 아마도, 어쩌면 틀림없이, 자본주의는 도시의 빛으로 장벽을 쳐서 별들의 존재를 가려버렸을 것이다. 사람들이 다른 가능성을 꿈꾸지 못하도록. 그렇게 자신의 삶이 다른 모습으로도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도록. 오로지 이 체제의 규율만이, 그 체제가 요구하는 인간이 되는 것이 가능한 삶의 방식의 전부라는 것을 납득시키기 위해서... 

   그렇게, 이제 자연적으로 이 '바깥'을 사유할 수 있는 여지는 거의 사라졌다. 도시는 끊임없이 빛으로, 콘크리트로 그러한 사유를 줄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의 존재들을 퇴출시키고 있다.  해서 우리는 이제 르네상스 시대의 인문학자들 처럼 활자를 통해 '그 너머' 혹은 '여기의 바깥'을 사유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물론 다른 가능한 방법들이 여러가지 있겠지만 '별들'이 가지고 있었던 가장 손쉬운 방법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그런데, 왜 우리는 '바깥'을 사유해야 하는가? 그것은 오로지 '내부'에서만 가지고는 자신의 존재가 어디에 자리하고 있는지 제대로 파악하기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왜냐면 내가 속한 이 내부란 것도 어떤 특정한 역사적 시점에 태어난 인위적인 구성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모든 인위적인 구성물이라는 것은 특정한 의도에 따라서 작위적으로 구성된 것들이다. 따라서 그것들엔 그 의도에 봉사토록 하는 이데올로기가 은밀하지만 필연적으로 끼어든다. 따라서 우리가 아무리 그 내부에서 나 자신을 보려해도 이미 작동되고 있는 이데올로기를 통해서 밖에는 볼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즉, 우리는 항상 누가 내게 씌워준 누군가의 시력에 맞춘 안경을 가지고 사물을 그리고 자신을 보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니 내가 알고 있는 것, 혹은 가지고 있는 욕망 등등은 순전히 나의 것이 아닐 수 있다. 그렇게 길지도 않은 인생을 우리는 어쩌면 오로지 남(라캉이 말하는 '대타자'와도 같은)의 욕망을 채우려 살 수도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참된 모습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바로 거기에 '바깥'의 사유는 커다란 도움을 줄 수 있다. 진정한 모습은 '안'과 '바깥'을 모조리 바라볼 수 있을 때 온전히 파악될 수 있으니까 말이다. 근데, 이것은 다만 나를 제대로 바라보기에만 국한된 문제는 아닌 것 같다. 혹시 우리가 리처드 애덤스 소설에 나오는 '워터십 타운'에 살고 있는 토끼들이라면 이것은 그야말로 생존과도 직결된 문제가 아닌가.  

   해서, 어쩌면 절박한 심정으로 그 사유의 계기를 찾고 싶은 요즘, 불현듯 한 권의 책이 '역병'처럼 번지둣 내게로 왔다. 그것이 바로 이 책, '사유의 악보'이다. 이 책은 인문서로 나왔지만 스스로 인문서가 되기를 거부한다. 아니 저자 자신의 서문이라 할 만한 서곡을 읽어보면 널리 이해되는 것도 거부한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유일하게 이해할 '소수'를 위해 메뉴얼, 그렇게 그들을 위한 '악보'로 사용되기를 희망한다. 악보는 해석을 강요하지 않는다. 그것은 물질로 표현된 범위 안에서 모든 주관적인 해석들을 허용한다. 그건은 마치 정해진 한글의 자음과 모음의 갯수를 가지고 무수한 글자들을 만드는 것과도 같다. 

여기 내가 몇 개의 악보들처럼 기보하는 이러한 '사유'의 조각들은 그것들을 서로 맞추고 조율하여 새롭게 연주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해 펼쳐져있고 흩뿌려져 있다.(p.8)

   그렇게 이 책은 널리 다양한 해석을 권장하고 새롭게 다양하게 창출된 의미들이 널리 창궐되기를 원한다. 그렇게 스스로 존재하면서도 종국엔 보이지 않게 되기를 원한다. 그런데 왜 이토록 스스로 그 자취를 감추려는 것일까? 이건 다음의 글에서 어느 정도 감지할 수 있다.  

  이 모든 글들은 어쩌면 오히려 소위 인문학적 사유나 철학적 깊이의 저 진부하고도 암묵적인 강요에 대한 강한 의문, 곧 우리에게 사유해야 한다고 강요하는 - 그러나 어떤 방식으로? 누군가가 우리에게 원하는 방식으로? - 자들의 저 역겨운 교훈과 무의식적 이데올로기 그 자체를 어떻게 사유하고 전복해야 하는가 하는 극단적으로 실천적인 질문으로 부터 탄생한 기형과 잡종의 것들이다.(p.7) 

    여기에서 보듯이 이 책 자체가 그러한 사유의 강요로 부터 이탈하기 위한 실천적 산물이었기 때문이다. 즉 자신의 근원이 이러했으니, 어떻게 독자에게 그러한 것을 강요할 수 있겠는가? 그렇게 이 책은 스스로,관람되기를 원하는 일종의 유물전시장에 그치기를 원한다. 그저 관람객들이 와서 살펴보고 개인적 감상만을 가지고 갈 뿐인 그런 전시장. 그는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는다. 그저 볼 수 있도록 늘어놓을 뿐. 혹 개안이라도 하는 관람객이 있다면 진심으로 행복해 하면서...  나는 여기서 일부러 '유물전시장'이란 비유를 썼는데 그것은 다음의 말 때문이다.

   우리의 시대에는 어떤 '새로운 사유의 프로그램'이 필요하며 그 새로운 프로그램은 '새로운 사유의 가동'으로부터 출발된다는, 일견 신선해보이지만 또한 지극히 오래된 어떤 믿음, 내가 나의 글쓰기로써 도전하고 도발하고 싶었던 믿음은 바로 이것이었다. (...)  오히려 이 글들은 어쩌면 그 '새로움'이라는 자신만만하고 희망찬 환상에 도전하기 위해, 혹은  저' 시대' 또는 '세대'라고 하는 어떤 구성된 집단적 주체와 인위적 시공간에 대해 오히려 어떤 도발적 도박과 내재적 내기를 걸기 위해 반대로 어떤 낡음으로 부터, 어떤 폐허로부터, 어떤 잔해와 잔재로부터 출발한다. 이 글들은 탈근대로의 여정을 위해 근대성의 유적과 지층을 파헤치고 이론 이후로의 이행을 위해 이론의 잔여와 여백으로 돌아간다. 이것이 바로 내가 이 글들을 '사유'의 조각들이 아니라 사유의 '조각들'로 명명하는 이유이다. 이 글들은 기형과 잡종의 조각난 육체들이다.(p.8)

   그렇게 이 책은 일부러 과거의 잔재들을 훑는다. 왜냐하면 이 책이 의문시하는 것은 과거와 새로움을 나누는 그 '사고' 자체이기 때문이다. '3악장, 미학으로 (재)생산되지 않는 미학'에서 알튀세르가 했던 것, 혹은 자크 랑시에르의 '감각적인 분배' 나 바디우의 '비미학'에서 했던 것 처럼 우리에게 익숙하게 혹은 전형적으로 남아있는 모든 사유의 체계들을 의문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책은 하나의 책이 일관된 논리로 이어져야 한다는 통념에도 반대한다. 그렇게 스스로 마땅히 기형과 잡종의 파편이 된다. 

   이 책은 조각난 육체들이다. 그렇게 어쩌면 의도적으로 아무런 접점을 만들지 않는다. 1악장 ,폭력의 이데올로기에서 종곡, 중독에의 권유까지, 그렇게 저자 자신의 말대로 이 책은 그 어떤 순서로 읽어도 무방하리 만큼  내용적으로 독립적이다. 게다가 스타일에 있어서도 여러가지 글쓰기가 변주되고 있다. 특히나 '7악장, 불가능한 대화를 위한 자동번역기' 같은 경우 '거리에 붙어 있던 한 벽보: 옮길 수 없는 것을 옮겨 적기'에서의 뛰어쓰기의 실종이나 '발전기를 돌릴수록 더 어두워지는 밤: 헤어스탈일에 관한 자기 성찰의 단상'의 마침표의 생략 같은 것이 특히 그렇다.  그렇게 이 책들은 '자고로, 책은, 글은 이래 저래야 한다는'등의 통념들을 한없이 미끄러지며 빠져나간다. 그래서 얼른 이 책들은 아이 앞에 무수히 쏟아져 있는 레고 블럭과도 같아 보인다. 아마도 아이는 그 무수한 조각들 앞에서 당황할 터이지만 언젠가는 - 왜냐면 아무리 무수한 조각이라 하더라도 그 조각을 이어붙이고 싶은 욕망을 참기가 힘드므로. '테트리스'게임이 정확히 인간의 무의식에 호소하듯이 우리 인간이란 아무래도 혼돈 보다는 질서를 좋아하므로 - 하나하나 조각을 이어붙이고 연결해서 자신이 만들고 싶은 무언가를 만들어 갈 것이다. 

   그렇게 결국은 나도 이 책 전체를 가로지르는 어떤 흐름 같은 것을 물론 만들게 되었다. 이것은 분명 오독일지 모르지만 저자는 어차피 오독의 가능성을 더 원하고 있는 것 같으므로 상관없지 않을까. 

   내가 짓고 있는 혹은 연주하고 있는 어떤 조형이나 선율의 바탕은 하나의 느낌인데 이 책만큼 집요하게 그 어디서든 '불가능성'을 추구하는 책이 있었던가 하는 것이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인간은 근원적으로 혼돈 보다는 질서를 원하는데, 이 책은 오히려 계속적으로 질서에다 균열을 만들고 가능성의 영역을 불가능성의 구멍으로 빠뜨리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야말로 '불가능성의 블랙홀'. 

    1악장, '폭력의 이데올로기 비판을 위하여'와 2악장 '페티시즘과 불가능성의 윤리'에서는 윤리가 그야말로 불가능성의 영역에서만 가능하다고 말하고 3악장,'미학으로 (재)생산되지 않는 미학'에서는 알튀세의 연극 비평을 중심으로 미학 역시 그 진정성은 불가능성의 영역 위에서 가능하다고 말한다. 4악장, '문학적 분류법을 위한 야구 이야기'에서는 야구를 소재로 한 문학을 중심으로 책이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수 없다는 불가능성에서 시작해 이사만루 상황에서 무타무주로 끝내는 방법의 불가능성을 지나 근대비평에의 불가능성에로까지 나아간다. 이 뒤로도 우리는 그 어디서든 끊임없이 불가능성의 영역들을 볼 수 있는데, 스스로 기형과 잡종의 조각들로 자처하는 이 책이 왜 이다지도 '불가능성'을 집요하게 추구하고 있는 것인지 그 까닭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이 호기심이 나 스스로 블록 짓기를 감행하게 했는데 결국 내가 만들어낸 것은 이 불가능성이 내포하고 있는 저의가 혹시 우리가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들을, 그 자신이 언급했던 것 처럼, 혹시  모조리 전복시키기 위한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의심이다. 

   예를 들어, 1악장에서 그가 바타유를 끌어와 폭력에 대해 말하는 것은 한 때 우리가 모든 사회 문제를 소통의 부재에서 찾았듯이 그렇게 소통하는 것을 중요하다고 여겼던 우리의 생각을 전복시키기 위해서였고 2악장에서 굳이 페티시즘을 이끌고 오는 것도 우리가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그러한 모든 가치들 역시도 사실은 우리가 그 가치들을 맹목적인 페티시즘에 빠져서 그런 것은 아니었었을지 의심하게 만드는 것이다. 즉, 바타유의 말대로 우리가 생각하는 소통이란 타자를 우리의 입장에 맞도로 바꾸는 폭력적 훼손에 다름 아니며 2악장에서 윤리의 가능조건으로 말하고 있는 페티시즘적 부인도 사실은 우리가 이미 긍정하고 있는 가치들이 관념적인 것들임을 겨냥하고 직립보행이나 바타유의 '유물론'에서 이끌어나온 새로인 유물론적 윤리들을 정초하기 위한 희생물로써 쏘는 총알인 것이다.(즉, 여기서 페티시즘 부인이 기능하는 것은 지금 이 책이 서론처럼 제시한 유물론적 윤리학을 위한 것이다.) 이렇게 저자는 '불가능성'으로 우리가 지금 익숙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 혹은 긍정하고 있는 것을 의문시하고 다시금 바라보게 만든다. 

   즉, 이 불가능성이 진정으로 의미하고 있는 것은 불가능성이 아니라 새로운 출발을 위한 하나의 가능성의 영역인 것이다. 그런데도 '불가능성'이란 이름이 붙은 것은 그것을 최대한 가능성의 범주에 넣지 않기 위해서이다. 즉, 어떤 새로운 출발점을 찾게 되더라도 그것을 영원히 고정된 한 점이 아닌 우연히 발견된 한 점으로 만들기 위해서다. 뭔가 하나를 쥔 것 같더라도 어느새 아래로 새어버리는 모래처럼 만들기 위해서다. 그렇게 '불가능성'이 궁극적으로 의도하고자 하는 바는 끊임없이 독자를 헤엄치게 만드는 것이다. 그는 계속 파도를 일으킨다. 사유의 헤엄치기를 그만둔다면 우리는 익사하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이 책은 '해답자'이기 보다는 영원히 '질문자'로 남기를 원하기 때문에 뭔가 하나의 고정된 해답이란 사유의 죽음과도 같다. 불가능성을 늘 마주하고 살아간다는 건 무엇보다도 스스로를 겸손하게 만드는 일이다. 그것은 저 원시시대 번갯불만 번쩍여도 신에게 기도하던 원시인과도 같다. 하지만 여기서의 겸손이란 어떤 권위 같은 것이 아니다. 그저 '나는 진리를 알지 못하고 다만 언제든 어느 방향으로든 추구할 뿐...'이라는 정도의 겸손이다.  근데 이 불가능성을 마주하고 살아간다는 것에서 문득 나는 '번역자인 그'를 느끼게 된다. 

    불가능성과 더불어 번역은 이 책의 또 하나의 중요한 테마다. 여기서 번역은 굳이 다른 나라말을 옮기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다른 나라 말을 자기네 말로 바꾸는 것이 번역인 것처럼 다른 이의 사유를 자기의 사유로 소화하는 것도 일종의 번역이라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이 책 역시도 그 모두가 아주 많은 책들에 대한 독서 기록인 셈이며 그 많은 책들을 저자가 서로 합종연횡시켜여 재창출한 사유의 전시장인 셈이다. 그렇게 번역가가 자신만의 언어로 번역한 글을 우리는 마주하고 있는 셈이다. 그 번역에 관하여 본격적으로 음미하는 9악장, '랑시에르의 번역을 둘러싸고'의 말미에서 저자는 이런 말을 한다.   

  번역본을 포함하여 하나의 책이 독자에게 진정으로 다가갈 수 있으려면 저자/역자와 독자가 모두 함게 그 책에 진심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다. (p.368)

     이 '진심을 다하는 것'. 이것이 항상 불가능성을 마주하고 살아가는 자의 겸손이지 않을까. 

   아마도 이 겸손 때문에 그렇게 그 진심을 다하기 때문에 그의 문체는 상당히 길고 때로는 무수한 반문들이 부기되는 것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이 책의 문체는 특이하리만큼 길다. 길게 길게 이어지는 문체들은 '악보'라는 제목에다 '작곡가'라는 그의 직업 때문에 어쩐지 선율로 들릴 지경이다. 내게는 문장이라기 보다는 글의 흐름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그는 왜 이렇게 단정적이어도 좋을 문장에 굳이 길게 길게 그 사유의 흔적들을 보태는 것일까? 거기다 보통의 인문서들은 스스로 객관적이기 위해 저자를 굳이 감추려 드는데 그는 자주 스스로를 드러낸다. 우리는 이 책에서 자주 '일독을 권한다.'라는 말을 보게 된다. 서곡에서 이 책이 역병처럼 되기를 원한다고 했는데 그렇게 우리들을 감염시키기 위해서인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왜 이렇게 드러내는가?     

   왜 소설가의 모든 이야기는 자신의 이야기가 아니며, 왜 비평가의 모든 이야기는 자신의 이야기일 수 밖에 없는가? (...) 소설가와 비평가라는 정체성 개념에 대한 이런 종류의 보편화에는 숙명적인 어떤 것이 있다. 이러한 숙명에 있어서는 저 두 정체성이 각기 자신만의 것으로 품고 있는 진실성의 형식만이 문제가 된다. 소설가의 정체성이 갖는 진실성이란 자신의 이야기가 아닌 이야기를 자신의 이름으로 이야기하는 형식이며 반면 비평가의 정체성이 갖는 진실성이란 자신의 이름이 아닌 것에 기대어 자기에 관해 이야기하는 '형식'인 것, 말하자면 이것이 근대문학적 정체성에 대한 나의 지극히 개인적인 정리이다. (p.483)

    나는 이 말을 과연 저자가 부정적으로 했는지 긍정적으로 했는지 아직 알 수가 없다. 알려고 몇번을 읽었는데도 정확한 의도를 짚어낼 수 없었다. 아무튼 아마도 그가 그렇게 적극적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은 여기서 보듯이 근대문학의 정체성에 대한 어떤 반발같은 것은 아니었을까 싶다. 하지만 굳이 내가 이런 얘기를 꺼내는 것은 이 반발만을 말하고 싶은게 아니다. 결국 이것이 저술에 대한 일종의 한 태도임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그러니까 5악장, '테제들의 역사를 위한 현악사중주'에서 글렌 굴드에게서 보여지듯이 말이다.  

   이 문장 안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감동적으로 느껴지는 부분은 바로 이것을 '피아노를 실현하려면'이라는 구절이다. (...) 그는 결국 언어적 진술이 아니라 피아노로 '실연'하고 '실현'해야만 하는 것이다.(p.195)

   아마도 물론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저자 역시도 글렌 굴드가 그랬던 것 처럼 이 책을 통해 스스로 사유를 실연했던 것은 아닐런지. 그러니까 결과로서의 사유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과정으로서의 사유'를 보여주는 것. 아마도 이것이 이 책을 저술하는 그의 태도가 아니었을까 싶어진다. 그래서 문체는 끊임없이 자문과 질문이 혼용되어 이어지고 내용면에서나 형식면에서 그토록 이채로운 빛을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닐런지. 

    '바깥'을 사유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부재'를 사유하는 것이다. 하지만 부재는 그야말로 존재하지 않음으로 '불가능성'을 사유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모든 사유들은 내가 확실히 딛고 있다고 여기고 있었던 모든 것을 의심하게 하고 궁극에 가서는 허물어뜨릴 위험을 안고 있다. 하지만 나는 본래의 나가 아니고 내가 딛고 서 있던 것으로 구성되어진 인위적인 인격체라고 한다면 영화 매트릭스에서 네오가 그 가상현실을 빠져나오려고 자발적으로 빨간약을 먹었듯이 그 인위적으로 조합된 환경과 인격이라는 '나'에서 빠져나와 '근원의 나', '바깥의 나', 그렇게 '부재하는 나'로 돌아가고 싶은 열망이 생기지 않을까? 사실 부재란 것도 알고보면 그저 부재인 것 만은 아니다. 부재는 오히려 바깥에서 존재 자체를 지탱하는 토대이기도 하다. 이러한 부재의 성격은 오히려 음악에서 더 두드러진다. 사실 음악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음과 음 사이의 '부재하는 공간'이 있기 때문이니까 말이다. 악보에 음표와 음표 사이 비어있는 공간이 있듯이. 때문에  '바깥' '부재' '불가능성'을 사유한다는 것은 오히려 존재 그 자체를 제대로 사유하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사유의 악보'는 바로 이런 사유를 그 바탕에 깔고 있는 책이다. 적극적으로 그 불가능성을 안고 가려는 책이다. 우리는 여기서 참 많은 불가능성의 현존들을 보게 된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결정적인 것이 아니며 앞서도 말했듯 이제 새로이 자신만의 사유를 이어가기 위한 단초에 불과하다. 진정한 사유의 연주는 오로지 독자 자신에게서 시작되는 것이다. 더하여 여기서는 이 불가능성을 사유하는 한 인간의 면모를 볼 수 있다. 어렵고 난해하지만 꾸준히 숙독을 하면 길고 불가하해하고 파편적인 맥락들 위로 이 모든 사유를 이어감에 있어서 진심을 다하고 있는 한 모습을 보게 된다. 그렇게 그 역시 이 책을 통해 하나의 연주를 하고 있음을 듣게 된다. 나는 기나긴 그의 문장들이 일종의 선율 같았다. 시드니 루멧의 영화 '허공에의 질주'를 보면 이런 장면이 나온다. 음대 교수가 강의실에 들아와 베토벤의 소나타와 마돈나의 '라이크 어 버진'을 들려주며 왜 마돈나의 노래가 더 신나게 들리는지 아느냐고 묻는다. 정답은 리듬. 팝과는 달리 클래식에는 리듬이 없기 때문에 난해하고 지루한 것이라고. 그처럼 아마도 이렇게 긴 선율로만 이루어진 연주이기에 난해하게 들리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클래식도 처음만 어렵지 자주 듣고 또 공부도 하면 언젠가는 친숙해지기 마련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벌써 수백년의 역사를 지닌 클래식이 애저녁에 사라졌을 것이다. 그러니 어떨까? 진정으로 자기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 '바깥' '부재' '불가능성'을 사유해야 한다면  이 책을 곁에 두고 가끔씩 클래식 CD를 듣듯이 펼쳐보는 것도. 아니 읽기가 어렵다면 그냥 곁에 두는 것만으로도 괜찮을지 모른다. 이 책은 존재 자체가 '불가능성'을 웅변하고 있으니까... 개인적으론 이 책을 읽으면서 다시금 인문학에 대한 열망이 불타올랐다. 특히 직립보행이나 '자코토의 고유명' 그리고 '파국의 해석학'은 너무도 신선했고 흥미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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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혼 2011-05-01 1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을 읽는 내내 설레고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습니다. 저는 헤르메스님의 이 글 덕분에 한 사람의 저자로서 온전히 이해받고 있다는 느낌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혹은, '온전히' 이해받는다는 것이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전제한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불가능성을 넘어 온전히 이해받는다는 것의 어떤 다른 '가능성', 다른 변주의 모습을 목격할 수 있었다고 말해야 할까요?

제 책 전체를 관통하는 맥락과 의의를 이렇게 잘 정리하고 평가한 글은, 제가 과문한 탓도 있겠지만, 이전에는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저는 사실 제 책에 대한 일종의 '매뉴얼'적인 성격의 작은 글을 하나 쓰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요, 이미 헤르메스님께서 가장 훌륭한 '매뉴얼'을, 그것도 가장 훌륭한 또 다른 변주곡을 써주셨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읽는 내내 매 문단들마다 소리 내어 감탄사를 연발했고, 글을 다 읽은 후에는 잔잔한 흥분과 감동이 몰려 왔습니다. 그 점에 뭐라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덧붙여 저 소설가와 비평가의 근대문학적 정체성에 대한 제 개인적 정리의 의미에 대해 조금 더 말씀드리자면, 말씀하신 것처럼 그 안에는 어떤 부정성의 느낌이 아예 없지는 않지만, 저로서는 그 자체가 자기고백적인 발언이었다는 점을, 그러므로 그러한 정리 안에는 긍정적인 단정의 요소가 다분히 내재해 있다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러므로 그 부분에 관한 헤르메스님의 분석을 읽었을 때 저는 제가 피분석자가 된 진료실에서 제 무의식의 일단을 발견한 듯한 느낌을 갖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바로 이것이 '온전히 이해되었다는' 느낌(비록 이것이 하나의 '환상'일지라도)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들 중 하나가 아닐까 합니다. 그 점에 대해서 또한 더할 나위 없이 감사드리는 것이기도 하고요.

아무튼 이 글을 읽는다는 것은 제게는 실로 오랜만에 맛보는 어떤 행복 같은 경험이었음을, 역시나 자기고백적으로, 그렇게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을 따라 읽어주신 섬세한 분석에, 때로는 그 결이 담고 있는 것 이상을 추출하면서 새롭게 내주신 독해의 길에, 새삼 깊이 감사드리는 이유입니다.

오드득 2011-05-02 0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저자이신 람혼님께서 이렇게 직접 댓글을 달아주시다니 정말 영광입니다. 거기다 부족한 글에 이렇게 과분한 칭찬까지 해주셔서 더더욱 몸둘 바를 모르겠네요. 제가 의문으로 가졌던 점에 대해서도 친절하게 설명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저 역시 람혼님의 책을 읽으면서 새로이 깨닫게 된 부분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다시금 인문학 읽기에 대한 열망도 생겨났구요. 오히려 이런 각성의 기회를 주신 람혼님께 제가 되려 감사를 드려야 겠네요.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좋은 글들로 더더욱 많이 깨우쳐주시기 바랍니다.
 
생강
천운영 지음 / 창비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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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혼돈... 

  읽고나서 처음엔 어떻게 이 소설을 받아들여야 하나 혼란스러웠다. 나는 아직 준비가 안 되었다. 이제는 잊혀졌다고 생각했던 그 시절의 괴물을 마주할 준비가... 더구나 이 소설은 우리를 그  괴물의 내면으로까지 데리고 간다. 난처하다. 당신이 이끄는 손길은. 거부하고 싶었다. 뿌리치고 싶었다. 바라보고 싶지 않았다. 그 괴물의 모습을. 그의 눈으로는 더더욱... 

  왜냐면 난 이미 그 시선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 괴물의 내면으로 들어가 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임철우의 소설 '붉은 방'을 통해서... 그 소설에도 고문기술자의 시선이 나온다. 그의 시선일 때 우리에게 보여지는 모습은 '그도 그저 어쩔 수 없는 인간이었구나' 하는 모습이다. 노모를 걱정하고 자식을 염려하는 보통의 가장... 단지 한국전쟁 때 경찰가족이라는 이유로 가족들이 살해당했던 기억 때문에 '빨갱이'에게 뼈에 사무치도록 원한이 맺혔고 그래서 이성 보다는 감정이 앞설 수 밖에 없었고 그래서 그의 고문이란, 그러한 응어리진 한을 푸는 그래서 어쩌면 인간적으로 이해할만한 폭력이라는 동정... 그도 결국 온전한 폭력의 주체는 아니며 다만 시스템에 의해 움직이는 한낱 연약한 인간에 불과하다는 인식 등등... 하지만 이러한 소설 속 제안들은 오히려 날 미치게 만들었다. 작고하신 이청준의 '벌레이야기'에서 나오는 주인공의 심정과 같았다. 실제 피해자인 자신이 개입할 여지도 없이 이미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다는 범인을 보며 그렇게 용서의 기회마저 박탈당하여 절망 끝에 결국은 자살한 여주인공 처럼, 나 역시 끔찍하게 자행되는 고문에 대한 분노를 '그래, 당신도 피해자였어...'라는 소설의 시선 때문에 어디다 풀어야 할지 몰라 온 영혼이 비틀거렸다. 

  나는 솔직히 가해자를 동정하고 싶지 않다. 가해자의 내면으로 들어가서 그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싶지 않다. 여기에서 만큼은 절대적 이분법을 선호한다. 악은 악일뿐. 그건 전혀 이해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그는 가둬져야 한다. 소설 속 공간 '다락방' 같이 보이지 않는 곳에 가두고 굳게 자물쇠를 채워야 한다. 그렇게 영원히 봉인되어야 한다. 그런데 그 '붉은 방'이 나온지 20여년이 지난 지금 다시금 누군가가 그 문을 열어 젖히고 그 괴물을 소환한다. 

  그가 천운영이고 그렇게 괴물은 다시 나타나 그의 내면 안으로 또다시 우리를 포획한다.  돌연 햄릿 앞에 나타나 숙부가 자신을 죽였음을 말하는 아버지 유령과도 같이... 

  세월이 흘렀다. 그것도 아주 긴 시간이... 그 괴물 조차 이제는 개과선천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다고 하던가... 세월마다 켜켜이 퇴적되는 망각에 힘입어 괴물의 존재가 거의 지워져버린 지금 어쩌자고 작가는 다시 그 괴물을 소환하여 우리에게 마주보기를 원하는 것일까? 그 시선을 거부하면서도 한 편으론 궁금하기도 했다. 하지만 천운영. 솔직히 나는 이 작가를 처음 만난다. 그래서 이 작가의 세계관을 알 길이 없다. 해서 들어야 했다. 그 이유를. 그녀의 말로 직접! 하지만 '작가의 말'을 읽어봐도 알 수는 없었다. 단 하나의 대답이 있긴 했었다. "써야하니까!" 헐~ 어쩌라는것인지?... 

  다만 알 수 있었던 건 그녀가 이 괴물을 소환한 계기였다. 그건 다락방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 괴물이 잡히기 전에 10년간이나 다락방에 은신하고 있었다는 사실에서 그의 이야기를 써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다락방... 다락방이라면 나도 추억이 있다. 하지만 그 추억은 그리움과 공포를 동시에 수반한 것이다. 숨바꼭질 할 때 가끔 다락방에 숨곤 했다. 그건 그리움이다. 가끔 들창으로 햇살이 빠꼼이 비쳐들때면 만화책을 읽다가 졸기도 했다. 그것 역시 그리움이다. 하지만 화난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다락방에서 흠씬 두들겨 맞기도 했다. 그것은 공포였다. 그렇게 광란의 매타작을 당하는 날이면 다락방의 문을 쳐다보는 것 조차 무서웠었다. 낭만과 공포가 기묘하게 공존하는 애증의 공간. 그것이 '나의 다락방'이었다. 그러고 보니 문득 이 소설 '생강' 자체가 어쩐지 '나의 다락방'과도 비슷한 것 같다.  

  나의 다락방에 대한 상반된 감정은 시간을 두고 서로 분리된다. 햇살이 들이치는 낮의 다락방은 온전히 그리움의 공간이다. 하지만 주로 밤에 끌려 올려가 매타작을 당한 탓에, 밤의 다락방은 그야말로 공포의 공간이다. 그렇게 나에겐 다락방이 낮과 밤으로 완전히 나뉘어져 각각 그리움과 공포로 명확히 대응되고 있다. 이 소설 '생강'의 세계도 그렇게 나뉜다. '밤'이라는 고문기술자 '안'의 세계와 '낮'이라는 그의 딸 '선'의 세계... 소설의 초반부 두 세계의 명암의 대비는 극명하다. 어둠의 고문방에서 '안'은 오로지 파괴와 종말만을 가져다 준다. 거기엔 빛 조차 파멸을 위한 무기이다. 반면 '낮'의 '선'은 이제 꿈꾸던 대학생활이라는 희망으로 눈부시다. 거기엔 다락방의 백열 전구 조차 따스함과 정겨움을 담는다. 결국 세상이 바뀌고 '안'은 도피하게 되는데 그 바깥에서의 도피의 여정 또한 여전히 밤이다. 여러 공간을 전전하지만 결국 '밤'이라는 기차에서 이 객차에서 저 객차로 건너가는 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가 운신할 수 있는 공간은 점점 좁아져만 간다. 이러한 두 세계의 대조적인 모습은 외연을 확장한다면, 마치 내 다락방이 시간적 차이를 두고 서로 다른 인상을 불러 일으켰듯이, 그렇게 서로 다른 시간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니까 '안'의 세계는 80년대를. 그리고 '선'의 세계는 지금 우리들의 시대를 말이다. 그렇게 이 소설을 '선'의 세계가 상징하는 지금의 우리들이 ''안'의 세계'에서 묘사된 80년대를 바라보고 그것을 껴안아 가는 과정으로도 읽을 수 있지 않을까 가정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물론 임철우의 '붉은 방'에서도 이렇게 두 개의 시선이 교차하면서 나왔었다. 하지만 그것은 가해자와 피해자의 시선으로 대립적이었다. '생강'의 두 시선들은 모두 한 쪽에 위치한다. '부녀지간'이란 혈연 관계로 묶여있기 때문이다. '선'은 아버지의 행위와는 아무 관련이 없으나 단지 그의 딸이라는 이유로 몰려가게 된다. 그 계기를 만든 사람은 '낯선 남자'이다. 이 남자는 '안'에게 고문을 당한 피해자이다. 말하자면 천운영은 '붉은 방'에서 시선의 주체였던 피해자를 이제는 바라보기의 대상인 '객체'로 만든 것이다. 그 자는 처음엔 '안'과 '선'을 분리시키지만 나중엔 다시 맺게해주는 이중의 역할을 맡는다.이 묘한 관계의 변화, 혹은 수십년을 사이에 두고 일어난 뒤틀림. 천운영은 왜 이런 관계를 설정했을까? 이 호기심이 결국은 괴물의 내면으로 들어가는 것에 대한 혐오에도 불구하고 적극적으로 이 소설을 독해하도록 만든 원동력이 되어주었다.

  내겐 그 낯선 남자의 존재가 여간 흥미롭지가 않다. 그는 내게 예전에 나온 봉준호 감독의 영화 '괴물'에서의 바로 그 괴물을 떠올리게 한다. 그 영화에서 괴물의 의미는 무엇이었나. 그저 내 생각일 뿐이지만, 나는 그 괴물을 다시금 우리를 80년대로 인도하는 존재라고 느꼈다. 분명히 존재했엇지만 서서히 지워져버린 역사. 그렇게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 문득 떠 올리는 이별한 연인의 얼굴 처럼 생생했던 그 얼굴은 어느새 사라지고 다만 아련한 실루엣으로만 남아있는 80년대, 그 암흑의 현장 속으로 다시금 우리를 데려가 그것의 공포를 생생하게 느끼게 하는 존재라고... 

  그렇게 소설 '생강'에서 '선' 앞에 나타난 낯선 남자의 존재도 영화 속 괴물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낯선 남자는 '선'에게 아버지의 참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그렇게 그때까지만 해도 '선'이 자신의 삶과 전혀 별개의 것으로 생각하던 역사의 어둠이 사실은 자신의 존재와 아주 단단하게 결부된 것임을 일깨워준다.  동시에 우리들에겐 우리 역시 '선'처럼 전혀 별개의 것으로 치부하고 있었던, 그 시절 80년대의 어둠을 마주하게 만든다. 그렇게 그는 '선'과 우리 모두에게 있어서 80년대에로의 초대장 같은 것이다. 이러한 변형된, 그러니까 객체화된 '낯선 남자'의 존재는 앞에서 말했던, 우리가 바라보는 그 괴물의 내면이 사실은 바로 80년대를 독해하고 있는 것이라는 가정을 더욱 더 신빙성있게 만든다.  

  아무튼 초반부 '선'의 세계는 '안'의 세계와는 극명하게 대비된다. '선'은 자신의 세계에 그러한 '안'의 세계가 있다는 것도 알지 못한다. 임철우의 '붉은 방'에서도, 고문을 당했던 자는 TV 속에 나오는 고문이니 시국선언이니 하는 모든 정치적 사건들을 자신과 전혀 별개의 것으로 여기고 살아가던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이 살고 있는 대한민국에 그러한 '붉은 방'이 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던 사람이었다. 설마 자신이 그러한 붉은 방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리라고는 더더욱 말이다. 이건 어쩌면 지금 우리에게 있어 독재정권으로 정의되는 70년대 80년대의 관계와도 다르지 않는 것 같다. 생채기도 시간이 흐르면 딱지가 안고 결국은 그 딱지 마저 떨어져 나가 버리듯이, 아무리 그 시간들이 고통과 공포의 시간이었다고 해도 결국은 흐르는 시간 속에 그 아픔들과 두려움은 희석되어버리기 마련이다. 그렇게 어느새 우리도 그것들을 그저 책에서나 볼 수 있는 한 때의 전설로 여겼다. 어쩌다 듣게되는 독재의 무시무시한 폭압은 그저 과거의 한 때에 일어난 불쾌한 추억 같은 것으로 여겼다. 하지만 지금 이 시간 우리나라에 곳곳에서 확인되는 현상은 그게 단지 과거의 일만은 아니라는 것을 끊임없이 환기시키고 있다. '선'에게도 '붉은 방'의 피해자에게도 결국은 현실이었듯이, 낯선 남자에게 끌려가 바라보는, 천운영이 이 소설에서 괴물의 내면으로 들어가 풀어놓는 그 시절의 어둠 역시도 언제 어느 때 또다시 반복될지 모르는 엄연한 현실인 것이다. 다만 평소에는 잘 보이지 않는 구석진 다락방에 숨겨져 있을 뿐... 

  그래서 섣불리 외면하거나 망각할수가 없다. 그건 지금 우리들을 상징하는 '선과  그 시대의 어둠을 의미하는 '안'이 혈연으로 맺어진 '부녀관계'라는 점과 다락방의 문 하나를 두고 공존하게 되는 설정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그렇게 그 시절이 어둠은 불가사리의 다리를 잘라내듯 쉽게 잘라내어 버릴 수 없는 역사이다. '선'이 다락방에 숨은 '안'과 함께 살면서 그를 양육하듯이 우리가 안고가야 하는 역사인 것이다. 이러한, 우리 존재에 단단하게 고착된 역사란 인식이 가장 인상깊게 드러난 장면이 개인적으론 '안'과 그 가족이 백숙을 먹다가 갑자기 경찰이 들어오는 바람에 '안'이 다락방으로 숨는 장면이 아닐까 한다. '안'은 서둘러 숨느라 그만 다락방 문을 닫는 것을 잊어버린다. 그 때 '선'은 이미 아버지로 인해 가장 친한 친구인 '진'과 짝사랑하던 '민'에게 버림받은 후였고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쌓일대로 쌓여 있었다.  그는 선에게 제발 문을 닫아달라고 신호를 보낸다.  

 
  그래 착하지. 이제 문만 조용히 닫으면 끝나. 문을 잡고 선 딸애의 얼굴. 아무 표정이 없다. 넋이 빠져나간 사람처럼 문을 붙들고 선 채 꼼짝도 않는다. 텅 빈 눈. 아무것도 담지 않고 아무것도 비치지 않는 눈동자. 어떤 감정도 실려 있지 않고 어떤 이야기도 들려주지 않는 침묵의 눈. 침묵 조차도 숨겨버리는 절대적인 암묵의 구멍 (P.155) 
 

  하지만 선은 문을 닫지고 그렇다고 경찰에게 알리지도 않았다. 그녀는 그냥 그렇게 문을 붙잡고 있을 뿐이었다. 안은 경찰이 물러간 뒤 내려와 딸애를 본다. 

   
문짝 하나를 사이에 두고 저기 내 아내와 딸애가 있다. 문득 딸애의 눈빛이 뇌리를 스친다. 딸애의 눈에 순간적으로 감아돌던 밫은 아버지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 딸애는 버러지를 보고 있었다. 발정난 개를 보고 있었다. 그것은 경멸과 혐오, 절망과 증오, 복수와 처벌을 다짐하는 결의의 눈빛(P.159) 
 

  '안'도 이렇게 느낄 만큼 '선'의 원망은 컸다. 그런데도 왜 대관절 그녀는 경찰에게 알리지 않은 것일까? '부녀지간이니 당연하지 않은가?' 라고 반문한다면 할 말은 없다. 하지만 내겐 좀 다르게 읽혔다. '선'이 만일 경찰에게 그대로 알렸다면 아버지는 체포되고 아버지는 배신감에 부녀지간은 어쩌면 그것으로 완전히 끝났을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그러한 '선'의 행위는 불가사리의 다리를 잘라내듯이 그 역사를 그대로 제거하는 것을 의미할 터이다. 그렇게 완전히 망각해버리는 것을. 하지만 '선'은 계속 열려진 다락방 문을 잡고만 있을 뿐이었다. 그녀가 갈등을 하고 있다는 암시이기도 하겠지만 내게 이 모습은 왠지 우리가 뗄레야 뗄 수 없는 그렇게 완전히 우리에게 달라붙어 함께 안고 가야할 역사임을 상기시키는 것 같았다. 닫을 수도 활짝 열수도 없는... 그렇게 혐오와 포용을 함께 안고 짊어지고 가야하는 절대로 도려내질 수 없는 불치의 환부 같은 것이라고... 

  그래, 환부이다. 불치의 환부... 고통스럽지만 어쩔 수 없이 그대로 안고가야 하는 환부... 

  고통스럽다면 왜 안고가야 하는가? 굳이 그렇게까지 해서 안고가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대답은 역설적이다. 우리가 안고가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고통을 주니까 그것을 안고가야 하는 것이다. '생강'에서 '선'은 일상에서 문득 문득 아버지의 어둠이 엄습해 올 때 마다 반드시 고통을 느낀다. 민가협의 시위 현장에서도 대학을 그만두고 일하던 미용실에서 '진'을 다시 만났을 때도 그렇다. 고통을 받는 건 기억하기 위해서다. 고통이 그 시절의 기억을 육체에 새겨주기 때문이다. 망각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그 고통을 기꺼이 껴 안아야 한다. '안'은 자신의 존재를 잊지 않기 위해 어린 계집에게 자기 몸에다 채찍질을 하라고 한다. 낯선 남자는 자신의 육체에 고문받을 때 들었던 라디오 방송이 생생히 새겨져 있다고 호소한다.  

  '생강'에서 모든 고통은 육체에 잔인하게 각인된다. 그렇게 되어, 이성으로도 의지로도 어쩔 수 없이 고통은 현상되는 순간, 우리에게 바로 그 시절을 기억하게 만든다.  '생강'의 후반으로 갈수록 기억한다'는 건 아주 중요한 모티브가 된다. '선'은 끊임없이 다락방에 숨은 아버지에게 그가 한 일이 기록된 신문 기사를 준다. 그리고 그녀는 그 모든 것을 스크랩한다. 

  당신은 장물이었다. 담벼락에 숨겨둔 스티커 쎄트 처럼, 내가 직접 훔친 것은 아니지만 그 죄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께림칙한 장물이었다. (...) 당신을 잊고 싶었다. 무시하고 외면하고 아주 없는 것이라고 믿고 싶었다. 잊을 만하면 신문에 당신의 이름이 실릴 때나 연례행사처럼 미용실을 찾아오는 기자들을 마주할 때면, 그제야 그들이 지목하는 사람이 당신이라는 사실을 깨닫곤 했다. 그렇게 당신은 유령이 되었다. 다락방의 유령. 보이지는 않지만 엄연히 존재하는, 가끔씩 자신의 존재를 어떤 신호나 징후로 보여주는, 한밤중에 다락 바닥에 덧댄 나무합판을 들썩이는 소리로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키는, 당신은 다락방의 유령이었다. (P.255) 

   기억하는 건 다시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다. 더이상의 아픔을 겪지 않기 위해서다.  

  낯선 남자는 고문 받을 때 자신이 허위 진술한 대가로 희생당한 한 가족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들려준다. 세상에 '붉은 방'이 존재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선량한 가족이었지만 결국은 모두가 정권유지를 위해 희생당해 버린 가족의 이야기를. 그는 그들의 이야기를 라디오 방송으로 자신의 육체에 각인해 놓고 있었다. 잊지 않기 위해서. 들려주기 위해서. 그리고 어느날 미용실을 찾아온 다른 낯선 남자는 이렇게 말한다. 

   잘못된 과거를 그냥 숨겨두고 묻어두면, 언젠가는 그게 다시 유령처럼 튀어나와서 똑같은 과올르 저지르게 되어있거든. 난들 그 때의 일에서 자유로울 수 있겠니? 내가 내뱉은 이름들, 누군가를 보호하기 위해서 희생되어야만 했던 사람들. 아무리 부정하려 해도 그건 어쩔 수 없는 사실인걸. 그러니까 역사는 말이야, 그런 과거의 유령들 때문에... 그래 그냥, 도와주고 싶어서 그래. 예전에 안이 나를 도왔던 것처럼." (P.254)  

  '선'은 이 남자의 이야기를, '낯선 남자'의 이야기를, '안'의 이야기를 듣고 모으고 또다시 우리에게 들려준다. 다시는 이러한 어둠의 역사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선'이 지금 시대의 우리를 대표하는 존재라면 이로써 천운영이 왜 하필 지금 그 괴물의 내면으로 들어가는 고통스런 경험을 하게 만드는가는 보다 분명해진다. 그건 비단 그 '괴물'인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천운영이 우리로 하여금 듣게 하고 바라보게 하는 건, 그 괴물의 내면이 아니라 사실은 그 괴물을 탄생시켰고 활개치게 만들었던 그 '시대' 자체인 것이다. 그 '시대'가 어떠한 시대였는지, 그것이 간직한 어둠이 얼마나 깊었는지 또한 얼마나 편협한 눈으로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사람들을 희생시켰는지 생생하게 각인시키기 위해서인 것이다. 왜? 인용한 한 남자의 말에 잘 나와있듯이, 또 다시 그 아픔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그 시절이 어떠했는지 기억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에필로그처럼 붙어있는 마지막 부분은 더더욱 우리가 기억해야함을 역설하고 있다. 슬금 슬금 그 괴물이 다시금 나오려고 한다는 걸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뭣보다 지금 우리나라의 현실 또한 분명하게 그 괴물들이 날뛰었던 시대로 역행하고 있다는 징후들을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소설에서 '생강'이 직접적으로 언급되는 부분은 딱 한 번 나오는데, 그것은 '선'이 미용실의 점심 시간 우연히 엿듣게된 동료들의 대화에서이다. 그 중 한 여자가 김치를 먹다가 생강을 씹었다고 말한다. 어쩌다 씹게 되는 생강의 맛... 행여 당신이 이 소설을 읽게된다면 그렇게 이 소설 역시도 당신이 우연히 씹게된 생강일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생강은 모든 음식에 반드시 들어가는 재료중의 하나다. 사실 우리가 그 맛을 인지하고 있지 못할 뿐이지 매일 어디서고 우리는 생강을 삼키고 있다. 그래서 우리에게 단단히 결부된 그 어둠의 역사에 대한 은유로도 될 수 있을 듯 하다. 그런데 그렇게 매일 삼키고 있으면서도 우리가 그 맛을 잘 인지하지 못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건 생강이 아주 잘게 썰어있기 때문이다. 그 어둠의 역사가 생강의 맛과 같다고 한다면 우리가 그 맛을 잘 못 느끼는 이유도 이와 같지 않을까? 누군가 우리 전에 미리 그 생강을 덩어리째 삼키고 잘게 빻아놓았기 때문이라고... 그렇게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이 자유 또한  다시금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기억하기 위해서 스스로 생강을 덩어리째 삼켜왔던 사람들 덕분이라고... 때문에 더더욱 비록 괴물의 내면으로 들어가는 혐오나 공포를 무릎쓰고서라도 이 소설을 삼킬 필요가 있다고 조심스럽게 제안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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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만의 비밀스러운 삶
아틀레 네스 지음, 박진희 옮김 / 비채 / 2011년 4월
평점 :
절판


   혹시 그런 때가 있지 않은지? 문득 길을 걷다가 절반 정도 왔는데 생각해 보니 이 길이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이 들 때가...  더구나 분명 제대로 목적지로 가는 길로 왔는데도 불구하고 어쩐지 걸으면 걸을 수록 자꾸만 잘못된 길로 가고 있는게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들 때가...  어쩌면 이것은 비단 길을 걸을 때만이 아니라 인생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일지 모른다. 삶에 있어서도 불현듯 엄습해오는 때가 있는 것이다. 내가 지금 제대로 내게 맞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아닌지 의심스러워지는 때가... 

    바로, 노르웨이 작가 아틀레 네스가 그려내고 있는 소설 '리만의 비밀스러운 삶'의 주인공 역시도 그런 사람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수학자이고 '소수'란 것에 매료된 나머지 수학자로서의 인생을 조금의 의심도 없이 현재까지 이어온 사람이다. 그는 교수이고 아내와 두 아이와 함께 남부러울 것 없는 가정까지 꾸리고 있다. 하지만 그에게 문득 자신이 제대로 잘 살고 있는 것인지 불안감이 엄습한다. 

 그녀는 어린 시절에 꿈꾸던 직업에 종사하고 있는 나, 즉 꿈을 실현한 내 모습에 끌렸다고 했다. 그녀는 나를 묵묵히 성실하게 자신의 길을 가는 젊은이로 여겼던 것이다. 그 당시에는 나도 같은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잘 모르겠다.(P.14~15) 

  그가 이렇게 느끼게 된 것은 나이 때문이다. 

 마흔살이 된다는 것은 현대 수학자들에게 아주 특별한 일이다. 죽은 알프레드 노벨은 유언을 작성할 때 수학자인 우리들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 우리 수학자에게 노벨상 같은 큰 영광이라고 한다면 필즈상이다. 물론 아벨상도 영예롭기는 하지만,  사 년 마다 주는 필즈 메달이야 말로 가장 명예로운 상이다. 어떻게 보면 올림픽의 금메달과도 같다. 그러나 이 상에는 특별한 추가 조항이 있다. 바로 나이 제한이다. 마흔 살 이전의 수학자에게만 수여되는 것이다. 나는 최종 후보로 거론된 적도 없고, 올림피아드 승자도 아니며 국내 대회 결승에도 진출하지 않았다. 하지만 내 꿈은 항상 수학 올림피아드의 금메달이었다. 나는 금메달을 손에 쥐는 모습을 그리며 정말 열심히 연구했지만 이제 마흔세 살이 되었기 때문에 소용없게 되었다. 대신 나는 리만의 평전을 쓰면서 나의 한계를 극복하고 있다.(P.42~43)

  이렇게 나이로 인해 더 이상 의미있는 수학적 업적을 남길 수 없다고 생각한 그는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인생에 하나의 이정표를 세우려 한다. 그것은 바로 곡면기하학으로 아인쉬타인의 상대성 이론에 영감을 주었고 아직까지도 증명되지 못하여 영원한 미제로 남아있는 가설 때문에 불멸의 명성을 누리고 있는 수학자 리만에 대한 평전을 쓰는 것이다. 그 평전이 그에게 그만한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은 리만이 40세라는 짧은 인생을 산 데다가 남긴 논문도 몇 편 안 되어 그의 삶이 그가 수학에 미친 영향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미미하게 밖에는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리만의 삶은 짧고 특색이 없다. 그러나 그의 발견은 영원성을 지닐 정도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가난하고 의기소침하며 서툰 왼손잡이에 폐병까지 걸린 사람이 쓴 가설이 후세에 미칠 영향력과 파급력이 그 당시에는 어느 누구도, 심지어 그 자신조차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가설은 완벽한 증명없이 오로지 그의 직관력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P.111)

  리만의 영원히 증명되지 않은 가설을 풀기위해서라도 그는 리만의 삶이 제대로 세세하게 복원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의욕적으로 시작했지만 그는 석 달이 지나도록 하나의 문장 밖에는 쓰지 못했고 여기에서마저 한계에 봉착한 그는 아무래도 글 쓰는 법을 배워야겠다고 생각되어 작문 교실에 나가게 된다. 그리고 거기서 그는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흔들어버릴 여인 잉빌드를 만나게 된다. 

 이 소설은 일종의 액자구조를 취하고 있다. 도입부에서 주인공은 실종된 상태로 나타난다. 그의 딸은 혹시 그를 찾는데 도움이 될까 싶어서 그의 컴퓨터에서 찾아낸 일기를 경찰에게 건네준다. 바로 이 일기가 소설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독자는 처음부터 하나의 호기심 - 그는 왜 사라진 것일까? -을 가지고 그의 일기를 읽게 된다. 미스터리를 푸는 것은 사람이 가진 근원적 욕망중의 하나라서 그의 일기에 나온 모든 문장은 그래서 무심히 넘어가지 않는다. 그런데 그 일기는 어떤 일기인가? 

 그것은 바로 그가 스스로 필생의 프로젝트로 여기는 리만의 평전을 써가는 동안의 일상을 그대로 담아낸 일기이다. 그렇게 모든 일기가 그렇듯이 아주 개인적인 내밀한 고백까지 다 담겨져 있다. 평전의 일부인 리만의 삶의 모습 뿐만이 아니라 그 평전을 쓰면서 느끼는 자신의 능력의 한계에 대한 좌절감이나 잉발드를 만나 새롭게 사랑의 기쁨을 느껴가는 과정까지 다 담겨져 있는 r것이다. 우리는 애초부터 보다 분명한 목적, 주인공이 사라진 이유를 찾기 위해 읽기에 이 모든 내밀한 고백들이 언젠가는 우리 앞에 그 이유를 제시해 줄 것으로 믿지만 당신은 아마도 수백년동안 수많은 수학자들이 덤벼들었으나 풀어내지 못한 리만 가설 처럼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할 것이다. 분명, 이 소설 역시 영원히 당신에게 '리만 가설'로 남을 것이다. 

  때문에 나는 이 소설을 미스터리로 읽기 보다는 처음에도 말했듯이, 문득 자신이 지금 제대로 된 길을 가고 있는지 의문이 들기 시작한 남자의, 그렇게 불현듯 가야할 방향을 상실한 자가 느끼는 갈등을 오롯이 건져낸 자기 고백적인 글로 읽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싶어진다. 물론 여기서의 갈등은 새로운 길을 걸으려 할 때 늘 따르게 마련인, 늘 걸어온 길을 계속 걸어감으로써 얻을 수 있는 안정감과 그 길을 벗어나 다른 길로 접어들었을 때 늘 따라다니게 될 불안감 사이의 갈등을 말한다. 쉽게 말해 늘 우리에서 살아온 동물이 갑자기 그 우리를 벗어나게 되었을 때 자기 앞에 놓여진 그 광막한 초원 앞에서 느끼는 불안감과 그 불안감 때문에 더 유혹적으로 다가오는 우리 안에서의 안정된 삶 사이의 그런 갈등이다. 이렇게 보면 이 소설은 단순히 말해 두 개의 세계가 대립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 세계란 각각 아내인 키라로 대표되는 늘 유지해 온 삶의 궤도를 따르는 안정된 세계와 잉발드로 대표되는 이전의 삶의 굴레를 벗어난 자유로운 세계를 말한다. 

  정확히 주인공은 언제나 그 두 세계 사이에서 서성이고 있다. 그가 리만에 대한 평전을 쓰는 것도 아마도 사실은 그러한 욕망, 이전의 삶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싶은 욕망에서 발현되었지 않나 싶다. 왜냐하면 리만은 그 당시까지 정설로 내려오던 유클리드 기하학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사고로써 새로이 '곡면기하학'이라는 비유클리드 기하학을 정초해냈기 때문이다. 단순하게 말해 유클리드 기하학이 '평행한 직선은 영원히 만나지 않는다'고 했다면 리만의 비유클리드 기하학은 '아무리 평행한 직선도 언젠가는 만나게 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리만의 기하학은 완전히 유클리드 기하학에서 벗어났고 그렇게 유클리드 기하학을 전복시켰다. 아인쉬타인이 상대성이론으로서 뉴튼의 기계론적 물리학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 리만의 기하학이 가진 전복적인 힘을 생각한다면 당연해 보인다. 아마도 이렇게 리만이 당시의 통념으로 부터 벗어난 완전히 자유로운 사유를 하는 수학자였다는 것이 주인공 역시 '벗어나 자유롭고 싶은 자'라는 점에서 유혹적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그래서 주인공은 리만이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왕정을 선택했을 때 그렇게 실망을 느꼇던 것이고 리만이 다시 히노버의 자유로운 체제 아래에서 괴팅겐으로 돌아갔을 때는 이렇게 믿고 싶어하는 것이리라. 

  나는 리만이 사고의 자유를 부르짖는 하노버의 진보적이고 자유로운 사상 때문에 괴팅겐으로 돌아왔다고 믿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P.122) 

  하지만 그렇다고 리만이 전혀 자유로운 존재였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가난했고 보잘 것 없는 수입으로 늘 자신의 가족에게 의지해야 했다. 그리고 아버지의 기대에도 부응해야 했다. 일상속에서 그는 전혀 자유롭지 못했다. 그가 자유로울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수학'에서 뿐이었다. 이것은 지금 주인공의 상황과 다르지 않다. 그 역시 언제나 가정의 문제에 신경을 써야 한다. 점점 통제를 벗어나는 아이들 때문에 근심이 끊이지 않고 아내 카린은 그에게 늘 정신이 딴 데 가서 가정을 돌보지 않는다고 타박한다. 그가 유일하게 자유로움을 느낄 때는 언제나 잉빌드와 함께 할 때 뿐이다. 그렇게 리만이 수학을 통해 자유로웠듯이 주인공은 잉빌드를 통해 자유를 얻는다. 따라서 사실은 이 소설에서 리만은 그대로 주인공의 도플갱어라고 할 만하다. 

   하지만 자유엔 늘 불안이 따라다니게 마련이다. 아틀레 네스는 바로 이러한 불안감을 소설에서는 불륜으로 인한 불안감으로 치환해서 보여준다. 주인공과 잉빌드는 서로 거세게 끌리지만 서로가 다 이미 가정을 이루고 있기에 늘 극도로 조심하고 주위 상황에 예민하게 대응한다. 사실 이러한 불안감은 소설 내내 지속적으로 나타나는데 이것은 아마도 안정과 자유 사이에서 주인공이 늘 갈등하고 있음을 에둘러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한다. 

   이렇게 리만의 평전과 새롭게 사랑을 엮어가는 과정으로서의 이 소설은 본래는 다시 새로운 자유를 찾아 떠나려는 자의 내면을 그리고 있는 소설이다. 하지만 네스는 이러한 내면을 충실히 복원만 할 뿐 섣불리 결론을 내리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 소설은 그대로 '과정으로서의' 소설이다. 그가 어떤 선택을 했는지 우리는 알 길이 없고 작가 역시 그리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물론 주인공의 실종이 그 어떤 대답이라고 여길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 실종은 그저 단순한 사라짐 이상의 의미는 없는 것 같다. 소설이 끝났을 때 모든 등장인물이 사라지듯이... 그런 정도의 의미 밖에는 없는 단순한 사라짐... 그렇게 이 소설엔 그 어떤 결말도 없다고 생각한다. 

   왜나면, 이 소설에 지속적으로 나오는, 주인공 역시 매혹시켰던 '소수'의 존재 때문이다. 

  골드바흐는 이미 삼백년 전에 2보다 큰 모든 짝수는 두 소수의 합으로 표시할 수 있다는 추측을 발표했다. 이 명제는 소소한 수수께끼처럼 들린다. 마치 수학선생님이 수업시간 끝나기 십 분 전에 새로운 단원으로 넘어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골드바흐의 추측은 오늘날까지 완벽하게 증명되지 못했다. 이처럼 소수를 공식으로 증명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소수는 모든 규칙을 벗어나 안전한 보호막 속에 있기 때문에 연구 가치가 있다.(P. 14)   

   여기서 보듯이 소수란 단적으로 말해 불규칙적인, 다시 말 해 규칙에서 벗어난 '얼룩' 같은 존재이다. 소수는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도 같이 모든 규정하려는 것으로 부터 탈피한다. 어떤 것을 공식화하려는 순간 불현듯 뛰쳐 나와 그 공식을 전복시켜 버리는 존재. 그것이 바로 소수인 것이다. 그렇게 소수는 모든 불확실성으로 열려진 우리네 삶과 많이 닮아 있다. 누구도 소수를 공식화 할 수 없듯이, 삶이 무엇인지 정의내릴 수 없다. 우리는 늘 '왜 사는가?'하는 의문을 입버릇 처럼 달고 다니면서 자신의 삶을  바라보기 일쑤이지 않는가? 소수가 모든 규정성을 벗어나듯이 우리네 삶 또한 그렇게 모든 규정성으로 부터 벗어난다. 그 어떤 결말도 내지 않고 그대로 공백으로 만들어버린 결말은 어쩌면 작가 자신이 문학을 '소수'적인 것으로 구현하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그런데 작가는 왜 굳이 자신의 소설을 '소수'적인 것으로 구현하려 한 것일까? 바로 이 소설 말미에 나오는 리만 자신의 미발표 논문의 한 부분에서 우리는 그것을 알 수 있다.

  소수가 어떻게 사라지지도 않고 영원히 무한의 길을 가는지 그 이유에 대해 누구도 확실히 말할 수 없었다. 가는 길 중간에는 소수가 전혀 없거나 기나긴 구간이 있었다. 이 숫자들은 예언 시대 이전인 태고적부터 존재해왔다. 우리는 이 수를 잡지 못하고 선회하면서 모호한 중간에 위치해 있다. 그러나 신은 만물의 모습을 통해 현현하신다. 소수는 특별한 방법으로 그가 남긴 족적이자 신이 보다 높은 차원에서 실재한다는 흔적이다. 우리가 수학을 신의 위치인 고차원에서 바라보면, 의심할 바 없이 n차원 공간에서 소수가 신의 규칙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런 숫자가 어떻게 흥미롭지 않을 수 있겠는가? (P.271)

   소수는 인생의 신비를 구현하고 있다. 소수의 비밀을 아는 것은 리만의 고백에서 보듯이 우리 인생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아는 것과 같다. 신의 규칙을 발견한다는 것은 그런 의미이지 않을까? 아마도 바로 이러한 이유로 네스는 자신의 소설을 굳이 '소수'적인 것으로 만드려는 게 아닐까 싶다. 그래서 그는 소수가 영원히 무규정적이듯이 그렇게 일부러 결말을 내지 않는다. 아니 그것이 오히려 작가의 진실한 태도라고 여긴다. 이는 아틀레 네스의 이전작들을 생각하면 보다 명확해진다. 그의 이전작들 대부분은 모두 한 개인의 삶을 충실히 복원한 것들이었다. 그렇게 그는 작품에서 주로 한 인간의 삶을 담아내는 데 주력했다. 그렇게 많은 삶의 모습을 세밀히 바라보았던 그였던 만큼 소설이 인생을 어떻게 구현해야 되는가에 대해서 분명 많은 고민이 있었을 것이다. 아마도 이 소설 역시도 그러한 고민 끝에서 나왔을 것이다. 어쩌면 이 소설의 주인공은 바로 그동안 타인의 삶에 천착해서 충실히 복원해왔던 작가 자신의 모습을 투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무튼 그는 이렇게 '과정으로서' 그치는 것이 인생에 대한 작가의 진실한 태도라고 여긴다. 그것은 인생이 가진 신비 앞에서 작가는 겸허해야 한다는 것이다. 소설에서 주인공은 리만이 아주 겸손한 사람이었다고 말한다. 평생 소수에 집착했던 그토록 가우스 이래 최고의 천재라고 불리었던 리만 마저 소수가 가진 신비 앞에 스스로를 낮추었다면 작가 역시도 소수를 닮은 인생의 깊이 앞에서 겸허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때문에 그는 그 어떤 선택도 주인공에게 강요하지 않으며 그냥 그대로 '공백'으로 만들어 버린다. 거기까지가 그가 할 수 있는 전부라 여긴다. 다만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그렇게 기로에 선 존재가 어떤 내면의 변화를 그려가는지 충실히 담아내는 것만이 전부라고... 

    혹 지금까지 걸어온 길이 왠지 어색하게 느껴지고 다른 길에로의 유혹을 느끼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한 번 이 소설을 읽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물론 여기엔 그 어떤 해답도 없지만 어떤 고민들은 굳이 해답을 구하지 않고 다만 천착하는 것만으로도 가치가 있지 않을까 한다. 다행이 이 책은 작고 가벼워서 어디서든 들고 읽을 수도 있으니, 문득 푸른 하늘에 떠가는 구름 한 조각이 괜스레 인생의 무상함을 일깨운다면 자판기 커피를 마시듯 홀짝여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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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상상력 사전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이세욱.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절대 화장실에선 읽지 말 것. 너무 오래 있게 되어 민폐를 끼치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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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rover 2011-04-20 18: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떤 분은 화장실에서 읽기를 권하셨는데,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거였군요. 물론 저는 화장실에서 책 읽지는 않지만요^^

오드득 2011-04-22 0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실 저거 제 경험담이에요. 화장실에서 읽다가 저도 모르게 너무 오래동안 있어서 불평을 좀 들었거든요^ ^;
 
<소설> 파트의 주목 신간을 본 페이퍼에 먼 댓글로 달아주세요.

 

 9기의 신간평가단이 되었다. 

 "내가 내딛는 것은 작은 한 걸음이지만 

 인류로서는 커다란 발걸음이다."라고 달에 자신의 발을 내딛으며 

 닐 암스트롱이 했던 이런 정도의 말을 나 역시 당당히 말하며 

 이 첫 시작을 해보고 싶지만... 뒷감당이 두려워 못 할 것 같다. 

 그저 작지만 착실하게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야할 것 같다.

 아무튼 신간평가단 초보의 얼렁뚱땅  엉기성기한 주목 신간 

 그 첫 발걸음을 이렇게 내딛는다. 

    

    나의 신간평가단 첫 주목 신간 그 역사적인 시작은... 

   당연히 내가 가장 좋아하는 여류 작가중 하나인 조이스 캐롤 오츠의 '블론드'이다. 조이스 캐롤 오츠는 특히 한 개인사를 다루는 데 아주 뛰어나다. 그녀는 소설에서 복원하고자 하는 개인의 역사를 마치 그녀 자신이 그 개인이 된 양 아주 세밀한 부분까지 가장 가느다란 감정의 선까지 다 놓치지 않고 살려내는 능력이 있다. 그러면 아주 지루할 것 같지만 그런데도 신기하기도 하지 꽤나 재미있다. '멀베니이 가족' 같은 경우 그 어느 소설 보다 읽히는 속도가 빠르다. 그만큼 그녀의 소설은 깊이와 재미 모두에 있어 만족을 준다. 마를린 먼로의 일생을 다루는 '블론드'는 특히나 그녀의 장기가 발휘되는 개인사라서 더욱 기대가 된다. 아니나 다를까 지금 그녀의 최고 걸작중 하나라고 평가받고 있는 것 같다. 3권 분량의 소설이라 이 소설이 선택될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보다 많은 사람들이 조이스 캐롤 오츠의 매력을 느꼈으면 해서 추천해 본다. 

 

 

 

  이 22개의 단편집에 나오는 슈퍼히어로들을 보면 왠지 소오강호에서 초야에 묻혀사는 독고구검을 구사하는 절대 고수 풍청양이 생각난다. 

 우연히 그를 만나 영호충이 왜 그런 실력을 가지고 계시면서도 이런 초야에 짐승처럼 은둔해 사시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말한다. 아무리 절대 고수라도 인간인게야... 그가 아무리 뛰어난 무공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적이 가족이나 연인의 목에 칼을 겨누고 있으면 질 수 밖에 없지... 그래서 나는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 나를 지우기로 했다네...라고. 

 결국 아무리 뛰어난 무공을 가졌다 하더라도 아무리 초월적인 능력이 있다고 하더라도 인간인 것이다. 지구를 구하는 능력이 있어도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기엔 한없이 나약한게 인간이다. 그런데 그 모순은 한계일까 아님 오히려 매력일까? 이 소설을 통해 한 번 알아보는 것도 의미있을 것 같다. 

  

 

 처음 '시인'을 읽었을 때 나는 그의 작품이 가져다주는 재미에 놀랐다. 두번째 해리 보슈의 작품을 만났을 때는 가지고 있는 깊이에 놀랐다. 

 마이클 코넬리는 마치 휴지에 물기가 스며들듯 그렇게 서서히 사람을 침잠시키는 묘한 매력이 있다. '링컨 차를 모는 변호사'의 미키 할러 같은 닳고 닳은 변호사라 해도 왠지 그가 'LIVE AND DIE IN L.A'를 들으며 홀로 잠드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연민을 느끼게 된다.

지옥도를 그렸던 히에로니 보슈의 이름을 따온 보슈, 그렇게 그가 거니는 세상 역시 그대로 지옥인 건 마찬가지지만 그 지옥같은 세상을 함께 살고 있기에 오히려 보슈는 연민을 가지고 그들을 위해 희망을 가지려 한다. 그래서 그에게 언제나 일어나는 범죄는 지옥의 확인이자 더 나음을 향한 반면교사가 된다. 언제나 신뢰를 주었던 보슈의 여정을 이번에도 함께했으면 싶다. 

 

 내가 주목하는 신간은 이 세가지 이다. 첫 시작이니 만큼 조금은 특별하게 뭔가 엑기스한 것으로 남기고 싶었다. 그렇게 가장 많이 주목하는 '넘버 3'만... 이건 그 만큼 무지무지 이 책들을 읽고 싶다는 내 열망의 표현이기도 하다. 과연 어떤 책이 선정되어 내게 올지 모르겠으나 첫 신간평가단으로 받은 책이니 만큼 각별한 의미가 있을 것 같다. 오늘 4월의 봄볕이 아주 따스했다. 만나게 될 책에 대한 두근거림도 그렇게 한동안 내 일상을 채울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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