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없는 사회 - 합리적인 개인주의자들이 만드는 현실 속 유토피아
필 주커먼 지음, 김승욱 옮김 / 마음산책 / 2012년 4월
평점 :
절판


 

  어떤 책은 마치 내 마음을 헤아리기라도 한 듯 내가 평소 궁금해왔던 그 문제에 대해 풀어놓을 때가 있다. 바로 필 주커먼의 '신 없는 사회'란 책이 그렇다. 이 책은 기독교든 불교든 신앙생활을 한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한번쯤은 해 보았을 바로 그 의문으로 다시금 인도한다. 즉 종교에서 말하는 것과 그것을 믿는 자들의 실제적인 삶의 모습이 보여 주는 괴리를 보았을 때 가지게 되는 의문 말이다. 그러니까 종교에서 말하는 것을 그대로 실천한다고 하면 누구보다 윤리적이고 자비로로워야 할 것 같은데 정작 오히려 믿지 않는 이들보다 더 배타적이고 이기적인 모습을 볼 때면 스스로 도대체 종교라는 게 뭔가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필 주커먼의 이 책은 바로 그러한 의문에 천착하는 책이다. 단적으로 그는 가장 종교적인 국가 미국과 가장 비종교적인 국가인 덴마크와 스웨덴이 보여주는 모순된 모습을 통해 이것을 풀어나간다. 상식적인 수준에서 보자면 가장 종교적인 국가인 미국이 가장 윤리적이고 행복한 모습을 보여야 하는데 오히려 가장 비종교적인 국가 덴마크와 스웨덴이 가장 윤리적이고 행복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마치 사람에 대해서 보았던 그러한 괴리가 이제는 국가로 확장된 것 같은 모습인데 이에 대한  필 주커먼의 말을 다소 길지만 직접 인용해 본다.

 

 미국은 확실히 서구 민주주의국가 가운데 가장 종교적인 나라다. 그리고 덴마크와 스웨덴은 확실히 서구민주주의국가 가운데 가장 비종교적인 나라다. 그렇다면 신앙심을 자랑스레 내보이는 미국에 총이 범람하고 형벌이 가혹하고 매주 사형선고가 이루어지고 약물 중독자들은 범죄자 취급을 받고 수많은 어린이와 임산부가 기본적인 건강보험의 혜택을 누리지 못하고 수많은 노인들이 제대로 보살핌을 받지 못하고 사회복지사들은 저임금과 과로에 시달리고 정신병 환자들은 길거리에 방치돼 있고 선진국 중 빈곤율이 가장 높다는 사실이 조금 이상하지 않은가 반면 비종교적이 덴마크와 스웨덴, 대부분의 미국인이 보면 거의 '하느님이 없다'고 까지 할 수 있는 이 두 나라에서는 어디서도 총이 보이지 않고 형벌 체계는 감탄사가 나올 만큼 인정과 자비가 넘쳐서 재활에 중점을 두고 있고 사형은 이미 오래전에 폐지되었고 약물 중독자는 의학적 치료나 심리적 치료가 필요한 사람으로 여겨져 보살핌을 받고 모든 사람이 훌륭한 보건 의료 서비스를 받을 수 있고 노인들도 세계 최고의 보살핌을 받고 사회복지사들은 괜찮은 임금을 받으며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양의 일을 맡고 정신병 환자들은 최상급 치료를 받고 빈곤율도 세계에서 가장 낮은 수준이다. 나는 어떻게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진 건지 궁금했다.(p.64)

 

 

 

 '신 없는 사회'는 바로 이런 의문에서 비롯된 것이다. 세속화가 진전된 국가가 더 윤리적이고 행복한 이유가 무엇일까? 물론 이 의문은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평소 느끼는 의문과 그리 다르지 않다. 그런데 이 의문엔 또 한가지가 더 결부되어 있다. 이렇게  보여지는 현실 그대로 딱히 종교가 제대로 살게 하는 것도 아니고 행복하게 만들지도 못한다면 과연 우리에게 있어 종교가 가지는 의미란 무엇일까 하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이 시대가 필 주커먼이 이 책의 서문 첫머리에서 밝혔듯이 종교 과잉이라 해도 무방할 정도로 종교로 넘쳐나는 시대이기 때문에 꼭 한번은 음미해 보아야 할 동시대적 물음이기도 하다.

 

  바로 이러한 의문을 풀기 위해 그 주요한 방법으로 필 주커먼은 면접법을 가져 온다. 대표적인 사회과학연구 방법중 하나이기도 한 면접법은 일종의 인터뷰 같은 것으로 연구 대상자와 직접 깊은 대화를 나누는 것이다. 이 책은 무엇보다 개인의 가장 내밀한 부분이라 할 수있는 '종교에 대한 가치관(이것은 또한 삶을 어떻게 바라보는가 하는 것도 직접 연결되는 문제기 때문에)'을 다루는 것이기에 그와 같은 방법은 적절해 보인다.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이라는 책에서 종교사회학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가 진면목을 보여준 바 있었던 막스 베버 역시도 종교사회학에 있어 이러한 개인적인 접근 방법이야말로 가장 적합한 방법이라고 한 바 있다.

 

내가 사회학자가 된 주된 이유는... 아직까지도 우리 학문을 둘러싸고 있는 집합적 개념이란 유령을 추방하기 위해서였다. 사회학이란 학문 자체는 단지 하나 혹은 그 이상의 따로 따로 분리된 개인들의 행위에서부터만 연구될 수 있으며, 따라서 엄격히 '개인주의적' 연구방법을 채용해야만 한다.

 

- 막스 베버가 그의 친구 리이프만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

 

 

 이렇게 필 주커먼은 많은 수의 인터뷰를 통하여 세속화가 진전된 사회에서 살아가는 이들이 종교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종교가 없으면 삶과 죽음의 문제를 어떻게 인식하는지, 왜 그들이 지금처럼 신과 멀어지게 되었는지 그리고 멀어진 상태에서의 삶은 또 어떠한지 바로 그 심층적인 모습을 인터뷰 대상자들의 생생한 경험까지 더해서 보여준다. 말하자면 이 책은 개개인의 특수 사실에서 일반적인 대답을 끌어내는 일종의 귀납법적인 방식으로 진행되는 셈이다. 그렇게하여 결국 필 주커먼은 덴마크와 스웨덴이 '세속주의 국가'가 된 이유를 찾아낸다. 이유가 모두 일곱개다.

 

 각각을 살펴보면, 그 하나는 게으른 독점이다. 즉 이미 오래전부터 루터교가 국교가 되어 있어 그 스스로 확장할 필요를 못 느껴 구태어 대중들의 관심을 불러 일으킬 노력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는 종교는 특히 사회에 대해 안전의 확신이 없는 가운데 번성하게 되는데 아시다시피 덴마크와 스웨덴을 세계 최고의 안정된 사회이기 때문에 종교에 대한 욕구가 생기지 않는 것이다. 셋째는 여성들 때문이다. 영국의 역사가 캘럼 브라운에 의하면 남성과 아이들이 종교에 관심을 갖고 뛰어들게 만든 것은 순전히 여성들 덕분이라고 한다. 즉 전업 주부인 여성들이 주일마다 남편들과 아이들을 거의 반 강제적으로 종교 행위에 참여시키기 때문에 종교가 번성하는 것을 도왔는데 지금의 덴마크와 스웨덴은 여성들이 대부분 직업 여성들이라 그럴 여력을 가지지 못하기 때문에 종교성이 약화되었다는 것이다. 넷째는 문화적 방어욕구의 결여라 말한다. 그러니까 문화적, 종교적 독점이 위협을 받으면 바로 그 종교적 독점이 사람들의 정체성을 강화해주는 역할을 하여 저항의 중심 기관이 되어 사람들에게 종교에 대한 필요를 불러일으켜 왔는데 덴마크와 스웨덴은 단일민족국가라서 굳이 종교를 통해 정체성을 강화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교육의 발달이다. 덴마크는 초등학교 의무교육을 가장 먼저 시행한 나라이기도 하다. 시작이 무려 1814년이다. 그만큼 교육 수준이 높다. 통계적으로 교육 수준이 높을수록 종교성이 약해진다고 한다. 또 하나는 그들의 대표적인 정책이기도 한 사회민주주의 때문이라고 한다. 사회민주당이 의회를 장악하는 동안 공립교육에서 특정 종교 행위를 하지 못하도록 했기 때문에 그 접할 기회를 많이 상실하는 바람에 종교성이 약화되었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원래 종교가 유포되었던 역사적 경험 또한 한 몫을 했다고 한다. 덴마크와 스웨덴은 모두 부족장과 왕들이 자신들의 정략적인 이유로 종교를 유포시켰다. 즉 아래에서 자발적으로 신앙을 가지게 된 것이 아니라 위로 부터 강제적으로 종교를 가지게 된 것이었다. 애초 부터 존재한 이런 경험 때문에 종교에 대한 긍정적 생각을 가질 수 없어 지금의 종교성 약화를 가져왔다고 한다.

 

 이상의 일곱가지 이유는 그러나 단순히 덴마크와 스웨덴의 종교성 약화를 나타내는 이유로만 그치지 않는다. 이 이유들은 더 나아가 가장 종교적인 국가라는 미국이 왜 그렇게 강한 종교성을 나타낼 수 밖에 없었는지 바로 그 이유를 드러내기도 한다. 즉 미국이 그렇게 가장 종교적인 국가가 된 데에는 우선 역사적인 원인이 있다. 그것은 바로 과거에 종교가 어떻게 유포되었는지에 대한 차이를 말한다. 즉 덴마크와 스웨덴이 위로 부터 '상명하달' 식으로 유포되었던 것과 달리 미국은 처음부터 청교도 신자들이 이주해와서 건국하게 된 것이므로 민중들 스스로 기독교 신앙을 확립했다. 바로 그 위로 부터냐 아니면 아래에서 부터냐 때문에 종교성마저 차이를 가져왔다고 한다. 거기다 지금 미국이 처한 사회적 원인들 역시도 한 몫하고 있다. 무엇보다 이민자들로 이루어진 국가이자 그렇게 인종적으로 계급적으로 문화적으로 다양한 성원들이 한데 어울려 사는 나라이기 때문에 단일 성원, 단일 국가에 비해서는 아무래도 종교에 대한 욕구가 커질 수 밖에 없는데 왜냐하면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종교가 무엇보다 정체성 확보의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즉 다양한 성원들이 뒤섞여 살 수 밖에 없는 미국의 환경이 정체성 확보의 욕구를 낳았고 그 욕구를 종교를 통해서 충족시키고 있는 것이다. 거기다 구조적 요인도 있다. 일단 미국은 정교 분리의 국가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덴마크와 스웨덴 처럼 '게으른 독점'이 성립할 수 없다. 할 수 없이 교회는 자유경쟁시장에 뛰어들어야 하며 때문에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대중들의 관심과 참여를 유발할 수 있는 온갖 마케팅 전략을 구사해야 한다. 후반의 모르텐의 고백에 따르면 이것이야 말로 사람들이 미국 교회를 다니고 있는 이유가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이는 또한 한국 교회가 번성하는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다.) 거기다 미국 사회가 아주 불안하기 때문이다. 안전의 욕구가 바로 종교의 욕구로 나타난다는 건 앞서도 언급했다.

 

 그런데 이렇게 미국과 덴마크와 스웨덴에 상이한 종교성의 차이를 가져와 버린 그 이유들을 살피다 보면 종교가 지금 사회에서 무슨 의미마저 알 수 있게 된다. 아마도 필 주커먼은 그래서 이러한 공통된 원인들을 중심으로 비교 접근법을 사용한 것이 아닐까 싶다. 종교성의 차이가 바로 역사나 사회 환경 같은 것들에서 유래된 것임을 밝혀 종교가 자발적 생성이 아니요 외부적 요건들로 인해 형성되는 것이며 그래서 종교가 바로 문화적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음을 밝히기 위해서 말이다. 즉 필 주커먼은 미국과 덴마크, 스웨덴의 비교를 통해 바로 이러한 종교가 가지는 문화적 성격을 드러내는 것이다.

 

 전통적인 종교가 반드시 신자들을 위한 깊은 신학적 확신으로 가득한 것이 될 필요는 없다. 신자들이 반드시 독실하고 경건하게 종교를 믿어야 할 필요도 없다. 그보다는 최후에 문화적 정체성의 가장 깊은 곳에 남아있는 종교가 전통적인 종교다.

 - 한스 라운 이베르센 - (p.252)

 

 

 종교가 일종의 문화적 현상으로 규정될 수 있다면 종교가 그럴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정체성을 확인시키고 내내 확보해주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정체성 확인의 통로로 문화로서의 종교가 기능하는 것이다. 즉 종교는 굳이 초월적 존재에 대한 믿음을 가지지 않아도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으며 더구나 자신의 정체성만 내내 확보해 줄 수 있으면 오로지 종교 활동만으로도 유지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이를 필 주커먼은 '문화적 종교'라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문화적 종교'란,

 

 오랜 역사를 지닌 종교적 전통에 일체감을 지닌 사람들이 종교 안의 초자연적인 요소를 진심으로 믿지 않으면서도 확연히 종교적인 행사에 참여하는 현상이다. (p. 261)

 

 

  그런데 이는 어떤 의미로는 초월적인 존재에 대한 믿음이라는 그렇게 종교에 있어 가장 알맹이는 빠지고 오로지 껍데기인 행위만이 남아 그것이 전부가 된 현상을 말할 수도 있다. 즉 신앙이 아니라 형식이 전부가 되어버린 종교이다. 그런데 왜 이런 현상이 가능한 것인가? 그것은 단지 종교 행사만 있어도 자신의 뿌리를 그렇게 정체성을 내내 확인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자신이 누군지를 알게 하고 같은 정체성을 가진 이들에게 섞이어 안정감을 느끼게 해 주는 것은 종교 행위만으로도 충분해서 그런 것이다. 문제는 자신의 정체성 확인을 통한 소속감과 안정감이지 초월적 존재에 대한 믿음이 꼭 종교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는 말인데 이것은 종교의 본질에 대한 것일까? 아니면 원래는 그 두가지가 대등하게 공존하고 있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어느 것 하나가 무색해지는 바람에 결국 남게 된 한가지를 의미하는 것일까? 필 주커면은 이성의 발달과 합리화의 진전이 결국은 초월자의 믿음을 희석시키고 그렇게 남게되어 버린 기능으로 여기는데 그래서 합리화가 가장 진전되었고 또한 미국처럼 정체성의 위기를 겪지 않아도 되는 스웨덴이나 덴마크에서는 종교가 그 힘을 잃게 된 이유를 잘 설명하기도 하지만 문제는 그렇다면 미국이나 한국이 보여주는, 모르텐의 말처럼 '광신'에 가까운 모습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가 남는다. 그러니까 미국이나 우리나라가 합리화가 많이 진전되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 문화적 종교 현상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보아야 하는지 아니면 사실은 종교 자체가 문화적 종교이고 그래서 미국과 우리 나라 역시 이 경향에 깊숙히 함몰되고 있다고 보아야 하는지 궁금한 것이다. 필 주커먼은 물론 전자 쪽이다. 왜냐하면 결론을 내리면서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문화적 종교가 가장 강렬하고 분명하게 나타나는 곳은 아마도 유대인과 덴마크인, 스웨덴인 사회일 것이다. 하지만 다른 종교, 다른 사람들은 어떨까?(p.276)

 

 내가 문화적 종교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서 필 주커먼의 이와 같은 말은 좀 수정되어야 하지 않나 싶다. 개인적으로는 후자쪽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애초부터 종교란 그같은 정체성 확보를 위한 문화적 수단 밖에는 없었으며 덴마크와 스웨덴은 문화적 종교가 가장 강렬하게 나타난 곳이 아니라 사실은 종교 자체의 의미가 희석화되어 버린 곳이 아닐까 싶다. 말하자면 종교의 사르갓소 같다고 해야할까. 아무튼 필 주커먼이 말하는 문화적 종교의 핵심은 신앙이 아니라 그 행위 자체가 신앙(초월적 존재에 대한 믿음)을 대체하는 것이다. 그래서 '문화적 종교'는 오로지 행위만이 내재된 신앙을 가늠하는 것에 대한 의미로도 쓰일 수 있다고 본다. 이를테면 미국 같은 경우 신앙을 고백하지 않으면 공직자가 될 수 없다고 하지만 오히려 그러한 요식행위의 집착이 바로 문화적 종교를 더 드러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것이다. 한국 교회의 경우 이러한 문화적 종교 현상은 심각한 수준이다. 이를테면 내가 아는 어떤 장로는 조의금 때문에 교회 장례식으로 하기 위해서 자신의 부모를 억지로 자기가 있는 교회로 옮겨오게 한 분도 계시다. 물론 이것은 매우 극단적인 사례이지만 그렇다면 한국 교회가 보여주는 선진국 선교에 대한 집착 같은 것은 어떨까?

 

 그러니까 이것은 내가 직접 겪은 바로 얼마전의 일이다. 다니는 교회에서 프랑스로 선교 활동을 가야할지를 두고 토론이 벌어졌던 적이 있다. 사실 나는 우리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이미 기독교를 믿어왔고 사회적 성숙도도 우리보다 앞서는 나라에 왜 굳이 선교를 가야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기에 반대를 천명했다. 하지만 곧 찬성하는 이들에게서 이런 반박을 받았다. 그것은 그들이 선교를 가야하는 주된 이유로 내세우는 것이기도 했다. 즉 프랑스 교회에 출석하는 신도수가 급감하고 있으며 교회의 수 또한 날로 감소 추세라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프랑스의 신앙이 죽고 있는 것이 아니겠느냐며 그렇기에 우리의 선교로 식어버린 이들의 믿음에 다시 불을 지펴야 한다는 이론이었다. 여기에도 드러나듯이 한국 교회는 비정상적일 정도로 교회 출석, 주일 성수, 헌금, 기도와 같은 요식 행위에 집착한다. 아마도 기복 신앙의 '치성'의 개념과 관련되어 더 강조된 것이겠지만 그래도 바로 그렇게 보이는 행위를 통해 신앙을 가늠하는 잣대가 아주 광범위하게 형성되어 있다. 그러니까 프랑스든 독일이든 무모하게 보이기까지 하는 선교를 감행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이렇게 보이는 행위에 집착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책에서 모르텐은 미국은 자신의 신앙을 보여주고 싶어서 안달하는 사회라고도 꼬집었는데 과연 무엇이 그렇게 만들었던 것일까? 여기에 대해서 베버는 아주 좋은 대답을 해주고 있다. 베버는 바로 여기에서 종교에 대한 갈망이 비롯된다고 했었다.

 

 행복한 사람은 자신이 행복하다는 사실만으로 좀처럼 만족하지 못한다. 그것 이상으로 그는 그가 자신의 행운을 누릴 수 있는 권리를 지니고 있는지 알고 싶어한다. 그는 그가 자신의 행운을 마땅히 누릴 만한 자격이 있음을 - 특히나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 확인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그는 또한 자신보다 운이 덜 좋은 사람들도 단지 그들이 응당 치뤄야 될 대가를 경험하고 있을 뿐이라는 믿음이 인정되기를 원한다.

 

 

 바로 이것이다. 그러니까 미국에서 그리고 한국에서 종교의 역할이 정체성을 확보해주는 역할을 한다면 바로 이러한 정체성을 확보해 주는 것이다. 즉 자기는 남보다 낫다는 확인을 신앙을 통해서 하는 것이다. 교회가 자꾸만 대형화되고 화려해지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때문에 정작 실생활에서 종교적 명령을 실천하지 않아도 상관없는 것이다. 기독교적 요식 행위는 오로지 기독교 공동체내에서만 인정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필 주커만이 말한 '문화적 종교'의 진짜 의미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예수님이 말씀하신 '회칠한 무덤'과도 같은 요식 행위의 집착은 분명 문화적 종교의 현상 중 하나이며 그 가장 부작용의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이걸 마르틴 부버의 말로 표현해 보자면, 철학자이자 신학자로도 유명한 마르틴 부버는 '나와 너'라는 책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너'를 만나고 '너'를 '너'로 받아들이는 길 이외에 '나'가 될 수 있는 길은 없다. 그리고 유한한 '너' 속의 무한한 '너'의 만남과 수용 없이는 '너'를 만나며 받아들일 길이 없다. 하지만 이 관계는 계속적으로 '나와 그것'의 관계로 변형되는 존재의 비극적 운명 아래 놓이게 된다.

 

  문화적 종교란 종교가 바로 부버가 말했던 이 '나와 그것의 관계'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부버가 말하길 '나와 그것'와 관계가 되면 더 이상 '그것'은 존재론적 관심을 잃고 단순히 인식적 관심 그리고 행위적 관심 밖에는 얻지 못하는 존재가 된다고 한다. 그렇게 '그것'은 다만 대상일 뿐이며 그것도 하느님으로 인해 확장되는 존재로서의 '나'가 아니라 그냥 획일적인 '나'로 항구적으로 있게 하는 도구적 의미 밖에는 남지 않는다. 현재 미국과 한국의 기독교는 이러한 '나와 그것'의 관계가 가장 극단적으로 나아간 상황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문화적 종교'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문화적 종교는 어떻게 보면 종교의 가장 진실한 모습일지 모르며 덴마크나 스웨덴 처럼 긍정적인 결과도 얼마든지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국이나 한국과 같이 사회 안전망이 부실하거나 계층간 격차가 자꾸 심해지는 나라들에서 문화적 종교는 훨씬 더 큰 부작용을 가져올 수 있으므로 문제다. 문화적 종교는 정체성 확보를 위해 주로 이루어지는데 이런 나라들에서 정체성 확보는 나의 뿌리가 아니라 나의 우월함(미국 보다는 단일성의 정도가 강한 우리나라에 국한된 특징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을 드러내는데 더 맞춰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지금 필 주커먼의 책은 우리(특히 신앙인)에게 또 한 가지의 의미를 더 가지게 된다. 즉 과연 우리에게 신앙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정말 종교를 믿고자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거기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게 하는 거울의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그렇게 되는 이유는 무엇보다 이 책이 신앙과 관계된 주제에 대해 내밀한 자기 고백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고민들은 언젠가의 내가 했던 고민이거나 누군가로 부터 상담 받던 고민들이기도 하다. 즉 누구나 한번쯤을 떠올려 보았던 그런 고민이나 생각들인 것이다. 그 친숙함 때문에 그들의 고백을 듣는 한 편 그 말에다 바로 나의 모습을 비쳐보게 된다. 즉 나는 어떻게 생각해 왔던가 혹은 나는 지금 어떻게 생각하려 하는가를 비춰보는 거울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도스토예프스키의 '까리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나오는 아버지 표트르와는 달리 신을 믿지 않아도 얼마든지 윤리적이 될 수 있고 죽음 이후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고 여겨도 삶을 있는 그대로 긍정할 수 있으며 삶의 궁극적 의미따위 신경쓰지도 걱정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타인에 대해 관대할 수 있고 보다 정의로운 사회를 위해 노력할 수 있는 그런 고백들을 보면서 더우기 신을 믿는다는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이들이 이정도로 허무와 무상함을 인정하는 가운데에서도 삶을 긍정할 수 있었던 것은 오히려 그것으로 인해 외부에 전혀 기대지 않으려 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즉 외부의 어떤 인정도 필요로 하지 않았던 것이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신을 요청하는 궁극적 이유도 사실은 신 앞에서 제대로 살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신에게 인정받으려는 욕구 때문인 것 같다. 즉 그 인정을 통해서 나를 더욱 더 높이고 싶은 마음인 것이다. 따지고 보면 그렇게 해서 정말은 타인의 인정을 받기 위한 또 하나의 몸부림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아마도 이렇게 종교마저도 내 우월을 위한 수단 정도로만 생각하기에 특히나 더욱 행위에 과도하게 집착하고 오히려 그 때문에 정작 삶을 희생하는 결과를 낳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내 생각에 필 주커먼의 '신 없는 사회'에서 그 '신'은 그저 '신'만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 같다. 더 나아가서는 내 우월을 인정받으려는 모든 수단화된 타자들을 의미할지도 모른다. 마르틴 부버의 말대로 '너'가 아닌 '그것'이 되어버린 타자들 말이다. 그러므로 '신 없는 사회'란 제목에 포함된 뜻은 그 인정을 받으려는 욕망을 끊는 것 부터가 먼저라는 것이 아닐까 싶다. 사실은 그것이 바로 스칸디나비아의 사람들이 보여주고 있는 것이기도 하고 말이다. 즉 삶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고 주어진 한계 내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언어와 틀에 박힌 행위가 아니라 삶 그 자체를 통해 믿음을 드러내는 것. 어쩌면 이것이야 말로 진정한 신앙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왜냐하면 문득 신약에 나오는 예수의 이런 얘기가 떠오르기 때문이다. 누군가 정말 지켜야 할 가장 중요한 계명이 무어냐고 예수에게 물었다. 그러자 예수가 하나는 하느님을 공경하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 했다. 그러자 그래도 굳이 하나만 지킨다면 무엇을 지켜야 하냐고 물었다. 그러자 예수는 이웃사랑이라고 말했다. 그 이웃사랑이 바로 하느님을 공경하는 것이라고. 이렇게 예수마저도 타자를 무조건적으로 포용하고 사랑하는 행위가 곧 신을 믿는 신앙 자체라고 선언했다. 그러니까 '신'이란 단일한 가면 아래에는 내가 포용하고 사랑해야 할 무한의 타자들이 있는 것이다. '신 없는 사회'란 아마도 '신'이라는 그 단일한 가면을 벗어버린 사회를 말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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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도무지 뭣하자는 소린지 모르겠고 - 한국 불교, 이것이 문제다
김영명 지음 / 개마고원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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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일단 전체적인 감상부터 말하자면 속이 시원했다. 나는 기독교를 믿고 이 책의 지은이 김영명은 불교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만 평신도로서 그동안 내가 기독교(정확히는 한국 기독교 교회라고 해야겠다)에서 가지고 있었던 불만이나 교리와 설교만으로는 채워지지 않았던 호기심을 모조리 대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종교가 다른데도 이러한 대리만족을 느끼는 것을 보면 초심자 혹은 평신도가 자신의 종교에 대해서 느끼는 불만이나 부족한 부분은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지 않을까 싶다.

 

 '이게 도무지 뭣하자는 소린지 모르겠고' 제목 부터가 도전적인 이 책의 부제는 더더욱 도전적으로 '한국 불교, 이것이 문제다'이다. 부제만 놓고 보자면 지은이가 불교에 상당히 조예가 있는 사람으로 여기기 쉽겠지만 천만에 그는 스스로도 밝히지만 이제 겨우 불교에 입문한 초심자에 불과하다. 이처럼 종교 경험이 일천한데도 감히 한국 불교의 문제에 대해서 들고 나온 것은 그저 상식적인 견지에서 아무리 따지고 보아도 한국 불교가 도통 무슨 말을 하는지 또 정말은 무엇을 중생들에게 주고자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범인으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너무나 고담준론이라 수양이 깊지 못한 미천한 존재들이라 그런지 그저 뜬구름 잡기 식의 허황된 담론으로 밖에는 여겨지지 않기 때문이다. 지은이 김영명은 그걸 이해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자신도 서울대학교를 나오고 뉴욕주립대학에서 정치학 박사까지 받은 소위 먹물을 먹을만큼 먹은 인사(人士)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불교의 이론이 심오하다해도 그래도 이정도 가방끈이면 수박 껍질에 그려진 줄들의 개수 정도는 헤아릴 수 있어야 되는 거 아닌가? 하지만 그 개수마저도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말들은 한문 투성이고 논리는 비약과 과장으로 범벅이 되어 있으며 강해하는 자들조차 이해할 수 없는 추상적인 이론으로 가득하니 절망하기도 전에 분노부터 이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비록 불교의 내공은 깊지 못하나 "이게 도무지 뭣하자는 소린지 모르겠고'라고 벽력뇌성으로 일갈하며 오직 그의 무기라곤 그동안 닦은 학자적 수련과 상식 밖에는 없지만 '불교'라는 비약과 허장성세 그리고 고담준론들의 춘추전국과도 같은 강호로 나선 것이다. 그렇게 그는 초심자들의 의문과 답답함을 제대로 풀어주겠다는 일념으로 전체 11장에 걸쳐 불교라는 난적들을 하나하나 제거해 나간다. 거기에는 어려운 한문만 고집하며 불교의 가장 기본적 개념 조차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들지 못하는 한국 불교계 뿐만아니라 흔히들 소승불교는 개인 수양 대승불교는 세상에 대한 자비 실천을 주 이념으로 하나 제대로 둘 다 살펴보니 정작 대승불교와 소승불교는 그리 다르지 않는데 굳이 그러는 것은 그냥 자신들을 구분지으려고 억지로 그러한 것들을 갖다 붙인 것은 아닌가 하며 대승불교를 논박하고 거기다 아예 석가모니에게까지 나아가 그가 정말 사람들이 말한는 겸손과 자비의 인물인가를 논하며 아울러 불교의 가장 근본이 되는 고해와 그것을 벗어나는 경지인 해탈과 열반이 사실 제대로 된 개념인지마저 검증한다.

 

  이렇게 그의 칼날은 거침이 없고 위 아래를 따로 두지 않는다. 마치 제대로 살풀이를 하려는 듯 이참에 그는 평신도로서 가지고 있었던 모든 의문점들을 다 해소하려 덤벼든다. 윗 분들의 말씀을 들으면 들을수록 불교라는 것이 도대체 뭣 하는 소리인지 모르겠으니 스스로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제대로 한 번 단단히 마음먹고 파악해 보려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그는 제천대성 손오공이 세상 끝까지 날아가 부처님 손가락에다 자신이 세상의 끝까지 도달했노라 남기듯 그가 찾은 불교의 핵심을 책 마지막에 새겨 둔다. 그가 이해한 불교의 핵심은 바로 이것이다.

 

 불교의 핵심은 수행을 통한 나와 남의 괴로움 제거이다.(P.274)

 

 대단한 것도 아니고 어려운 것도 아니다. 하지만 초심자이자 평신도인 그가 오래도록 고군분투 끝에 도달했어야 할 만큼 한국 불교는 이 단순한 진리를 어렵게 말하고 배배 꼬이고 또한 잔뜩 부풀려 놓았던 것이다. 그리고선 이해를 못하면 친절히 가르쳐 주기는 커녕 믿음이 부족하다는 둥 수양이 덜 되었다는 둥 오히려 못하는 자를 타박할 뿐이었다. 그래서 그는 강조한다.

 

  그들이 아무리 많이 알고 수양이 높더라도 무턱대고 그들의 말에 기대지 말 것을. 아무리 믿음이 강조되는 종교라 하더라도 그 모든 이론과 교리에 관해 자신의 이성을 가지고 맞는지 아닌지 제대로 사유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한 마디로 그들의 권위에 쫄지마라는 것이다. 종교의 이론이나 교리가 아무리 어려워도 모든 건 다 똑같은 사람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니 스스로 찾고 구하고 노력하면 얼마든지 그 대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바로 그것을 실증하기 위해 지은이 김영명은 이 책을 통해 몸소 시전해 준 것이나 마찬가지다.

 

 또한 그것은 나 역시 기독교 생활을 해 오면서 생각했던 것이었고 그래서 이 속내를 솔직하게 털어놓는 지은이에게 적잖이 감명을 받았다. 애초에 내가 불교에 대한 책을 읽기로 한 것은 현재 한국 기독교가 정말로 문제가 많아서였다. 바로 그것을 불교나 여타 다른 종교들을 배워 봄으로써 그 상대적 입장에서 바라보고 싶었다. 지금의 한국 기독교란 한 마디로 딱 장사아치에 불과하다.(물론 여전히 소명을 가지고 일하시는 목사님들이 많다. 하지만 그분들의 노고보다 더 많이 드러나는 건 돈 밖에는 중심에 두지 않는 한국 기독교의 모습이다.) 이렇게 된 데는 무엇보다 성경이 정말 하고자 하는 바를 제대로 전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성경의 진의를 왜곡하여 설교한 목사들의 책임이 크다. 그리고 기복신앙에만 빠져 무분별하게 목사들의 말을 맹종했던 신도들의 책임 또한 크다. 다행히 지금은 헌금이나 십일조에 대해서 비성경적임을 강조하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고 그렇게 스스로 자정하려는 노력들을 보이고 있지만 그래도 아직 기독교가 진정으로 기독교다워지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험란한 고비들이 많다. 이 고비들을 제대로 넘기 위해서라도 이제 평신도가 깨어나야 할 때라고 많은 분들이 목소리를 모아 말한다. 더 이상 예전처럼 목사의 말이라고 무분별하게 수용하지 말고 늘 깨어서 스스로 그것이 참인지 아닌지 정말 말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지 생각해야 한다고 말이다. 이것은 또한 그대로 이 책의 주제와 상통하는 바이기도 하다.

 

 즉 불교나 기독교나, 그 종교가 제대로 자기답기 위해서는 일반 신도가 깨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더 이상 설교나 강론에 있어 그저 듣기만 하는 객체가 아니라 스스로 참여하는 주체가 되어야 한다. 역사적으로 진리를 앎이 귄위있는 소수에게만 허락되었을 때는 항상 부패와 타락이 뒤따랐다. 혹세무민은 늘 남의 생각을 무비판적으로 따르는 그렇게 스스로는 생각할 줄 모르는 다수가 있을 때 일어났다. 말들은 언제나 참여하는 자들이 많으면 많을 수록 보다 더 정확해지고 제대로 된 의미를 찾게 되는 법이다. 바로 집단 지성이 그 오염된 말을 정화시키기 때문이다. 흔히들 종교는 믿음이라며 그래서 따지기 보다는 그냥 믿는 것이 진정한 신앙이다라는 말을 한다. 물론 헛소리다. 교부철학의 아우구스티누스나 스콜라 철학의 토마서 아퀴나스, 종교개혁을 가져온 루터나 지금의 개신교를 낳게 한 칼뱅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어디 그저 믿기만 햇던가 제대로 따지고 들었기 때문에 바로 오늘의 기독교가 존재할 수 있게 된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보다 많은 이들이 권위에 주눅들지 말고 자신 역시도 당당히 하나의 대등한 참여자라는 생각으로 핵심, 이론 그리고 교리에 대해 사유하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바로 그것이 불교와 기독교 아니 모든 종교를 본래의 모습 그대로 지켜줄 것이다. 그러니 믿음이 무슨 마법의 지팡이라도 되는 양 얼버무리지 말고 아무리 알 수 없는 것이나 모호한 것이라 해도 끝까지 따지고 의미와 이유를 추구하고 사유할 필요가 있다. 불교에 갓 입문한 초심자인 김영명이 이 책에서 제대로 보여준 것 처럼 말이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두드려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

 

 이제와 생각하면 이 말은 단순히 믿음, 기도에만 해당되는 말이 아니었다. 바로 종교의 모든 것을 그대로 믿지말고 스스로 사유할 것을 요청하는 말이기도 했다. 즉 진리는 그저 다가오지 않는다. 스스로 나서서 찾고 두드리지 않는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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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환의 심판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3-26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3
마이클 코넬리 지음, 김승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2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한 마디로 베트남 전쟁은 미국의 상처였다.

 

  오로지 군산복합체의 돈벌이만을 위해서 벌어졌던 그 전쟁은 그 전까지 급속도로 끓어오르던 미국 내의 모든 이상을 향한 움직임에 동결을 가져왔다. 젊은이들은 영문도 모른 채 전장으로 끌려가야 했고 살아남은 자들 역시 영원히 치유할 수 없는 상처를 안고 돌아와야 했다. 60년대의 다채롭게 빛나던 미국은 베트남 전쟁에 의해 롤링스톤즈의 노래 제목 그대로 'PAINT IT BLACK'이 되고 마이클 코넬리가 '라인업'에서 술회했듯이 해리 보슈를 낳아버린 터널 속 어둠이 되어 버렸다. 보슈는 베트남 전쟁에서 '땅굴쥐'가 됨으로써 어머니의 상실과 더불어 속해버렸던 세상의 어둠 속 그 밑바닥까지 떨어진다. 때로 절망은 그 가장 밑바닥까지 내려가서야 희망의 발판을 마련한다고 하던가. 그 말 그대로 그는 더 이상 그 어떤 외부도 자신을 구원해 줄 수 없음을 거기서 깨닫고 이제 스스로가 직접 구원을 찾아 나서려 한다. 어둠만이 존재하는 터널 속에 스스로 빛을 가져오는 존재가 되려는 것이다. 그렇게 그는 형사가 되고 자신에게 어둠을 가져다 준 그리고 바로 그 어둠이 뱉어 낸 죽음들의 진실을 찾아 나선다.

 

  같은 글에서 코넬리는 살인 사건의 의미에 대해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어쨌든 살인사건 현장이란 세상이 뒤집힌 것과 다를 바 없지 않은가?

 살인 사건 조사란 결국 혼돈과 그로 인한 결과에 대한 조사가 아니겠는가? 라고 (라인업, P.75)

 

 그렇게 그는 관찰자요 순례자다. 광막한 어둠 가운데 빛을 가져와 스스로 경계가 되려는 자다.

 

 

 그리고 여기 또 한 사람이 있다. 그의 이름은 미키 할러.

 그는 변호사다. 보슈가 진실을 찾는 자라면 그는 진실을 만들어내는 자다. 그는 그 어떤 진실이든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가공할 수 있다. 사실 그는 진실이란 것 자체에 별 관심이 없다. 왜냐하면 어차피 세상이란 것 자체가 온통 거짓말 덩어리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거짓말을 한다.

 경찰도 거짓말을 하고, 변호사도 거짓말을 하고, 증인도 거짓말을 하고, 피해자도 거짓말을 한다. 재판은 거짓말 경연장이다. 법정 안의 모든 사람들도 그 사실을 알고 있다. 판사도 알고, 심지어 배심원도 안다. (P.11)

 

 

 그래서 그에겐 언제든지 변할 수 있는 말이 아니라 변하지 않는 것이 진실이다. 그래서 돈에 매달린다. 보슈를 어둠으로 몰고 간 돈이 그에겐 진실인 것이다. 계좌에 찍히는 현금의 액수만이 그가 가진 '정의'라는 법전의 전부다. 그렇게 그는 이 소설 1부의 제목 그대로 '밧줄에 묶인 얼간이'로 살았다. 왜 '얼간이'냐고? 결국 그 '돈'에 의해 총을 맞았으니까. 그렇게 그는 그 자신이 믿었던 진실에 의해 보기 좋게 배신을 당했버렸거든.

 

 

  '탄환의 심판'은 '제리'라는 한 변호사의 죽음으로 시작된다. 그 제리는 1부에서 할러가 돈을 위해서라면 진실이고 뭐고 물 불 안 가리던 관선변호사였던 시절 법정에서 겨룬 검사였다. 그는 할러에게 패했고 결국 검사직에서 물러났다. 그런 그를 돈 좀 만지는 변호사로 만들어 준 장본인이 바로 할러였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 할러는 흡혈귀였다. 정의를 수호하던 검사를 돈만 수호하는 자신의 동류로 만들어버렸으니까. 하지만 제리의 시작은 할러의 시작과 같았다. 그 역시 돈만 수호하던 변호사였던 아버지에 의해 그런 변호사가 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할러와 제리의 관계는 아버지와 할러의 관계의 복제이고 결국 제리는 할러인 것이다. 그렇게 둘은 도플갱어다. 제리가 미처 처리하지 못한 수임된 안건을 할러가 유산처럼 물려받게 되는 것은 그래서이다. 그러므로 제리가 왜 살해당했느냐가 주가 되는 '탄환의 심판'에서 할러가 제리의 죽음을 밝히는 과정은 그대로 전작에서 자신이 (상징적으로)죽어야 했던 그 이유를 밝히는 과정과도 같다. 단적으로 부활한 할러가 자신의 죽음을 다시 조사하는 것이다.  이는 마치 감독 쿠엔틴 타란티노가 영화 '킬빌'에서 했던 것과 유사하다. 말하자면 '예수의 부활편' 같은 것이다.

 

  보슈는 진실을 찾기 위해 타인의 죽음을 매개로 순례를 하지만 할러는 자신의 죽음을 반복한다.

 

  정확히 이것은 보슈의 원래 모델 15세기 플랑드르의 화가 히에로니머스 보슈가 그렸던 그리고 코넬리에게 영감을 주어 그 자신의 탐정이 바로 그 이름을 가지게 만들었던 그림 '쾌락의 3부작'의 구도와 같다.

 

  보슈가 가장 오른쪽의 지옥도에 속한다면 할러는 그 가운데, 두번째 화판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이는 보슈와 할러가 각각 하나는 진실을 찾는 자요 다른 하나는 진실을 만드는 자이기 때문이다. 보슈가 진실을 찾는 자가 된 것은 그 어둠으로 떨어지는 데 있어서 그 스스로에게 책임이 없기 때문이다. 그는 그저 당한 자다. 어머니가 살해 당함과 동시에 내던져졌으니까. 그러므로 그는 자신에게서 이유를 찾을 필요가 없다. 아니 찾을 수가 없다. 그것은 저 바깥에, 어딘가에 있다. 그래서 진실을 찾는 자가 된다. 미노타우르스를 찾아 미궁을 헤메는 테세우스와도 같이. 하데스에게 끌려간 에우리디케를 찾아 내려가는 오르페우스와도 같이. 그렇게 진실을 찾는 자는 코넬리 스스로가 말했듯이 관찰자가 될 수 밖에 없다. 그것은 단적으로 객체와 주체의 관계가 되는 것이다. 지옥이란 보슈에게 바로 그 객체이며 그래서 보슈의 우주는 바로 지옥이 된다. 하지만 할러는 그와 다르다. 할러의 비극은 오로지 할러 자신이 만들어낸 것이다. 그의 세계에 대한 인식은 세계가 그에게 강요한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이 습득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그렇게 해석하고 받아들인 오로지 주체 하나만 있을 뿐이다. 그에게는 관찰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고 그저 끊임없이 그가 하고 있는 생각이 혹은 일이 옳은지 그른지 되새기는 것 뿐이다. 그에겐 반복만이 전부다. 중세의 지배적 가치관에 따르면 이 세상은 천국, 연옥, 지옥으로 되어있다고 한다. 아마도 쾌락의 정원 3부작 역시도 어쩌면 이 구도에 그대로 들어맞을 것 같다. 그렇다면 할러는 연옥에 속한 자가 될 것이다. 지옥으로 떨어질만한 죄를 짓시 않은 자는 연옥(림보)에 갇힌다고 한다. 그리고 거기서 자신이 죽은 줄도 모른 채, 내내 자신이 저질렀던 결국 천국으로 가지 못하게 만든 죄를 영겁에 걸쳐 반복하면서 상처받고 뉘우치게 된다고 한다. 아닌게 아니라 이 소설 '탄환의 심판'은 정확히 할러가 거기에 속해 있는 자임을 보여준다. 사실 따지고 보면 '탄환의 심판'은 '링컨 차를 타는 변호사'에서의 할러의 여정과 참으로 유사하지 않은가?

 

  그렇게 이제 보슈와 할러는 같은 라인에 선다.

 

 사실 '링컨 차를 타는 변호사'에서 할러가 즐겨들었던 '2-PAC'의 'TO LIVE AND DIE IN LA'의 가사처럼 로스엔젤레스와 베트남 전장은 그리 다르지 않다. 로스엔젤레스의 삶 역시도 이 소설 미키 할러의 첫 독백에서 드러나듯이 베트남 전장만큼이나 혼돈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돈을 위해 일으켰던 전쟁에서 영문도 모르고 죽어야 했던 어린 병사들만큼이나 LA 역시 돈 때문에 죽어나가는 이들이 지천으로 널린 곳이다. 제리와 할러 역시도 그 희생자가 아니었던가. 그렇게 어디서 날아올지 모르는 머리를 관통하는 총알에 대한 공포는 그대로 LA에서의 삶에서도 마찬가지다. 단적으로 이러한 LA 의미는 할러의 다음과 같은 말에서 나타난다.(수트케이스 시티는 2장의 제목이기도 하다.)

 

 

 내 생각에는 아무래도 그 로고 때문에 가방이 마음에 들었던 것 같다. 수트케이스 시티는 단순한 상점이 아니라 로스앤젤레스 자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로스앤젤레스는 타지인들끼리 모여 살면서 아무도 진정한 의미의 닻을 내리지 않는 곳이었다. 잠시 스쳐 지나가는 곳. 꿈에 이끌린 사람들, 악몽에서 도망치는 사람들이 오는 곳. 1천2백만 명의 시민들은 모두 필요하다면 탈출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비유적으로도 문자 그대로도 LA의 모든 사람들은 항상 여행 가방을 꾸려놓은 상태였다.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서(P.83)

 

 

  이러한 LA에 대한 시선은 그대로 베트남에 대한 시선과 닮아 보이지 않는가? LA와 베트남의 유사성은 비단 공간적인 면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만일 둘이 비슷하다면 베트남을 초래한 미국이나 현재의 LA를 초래한 미국이나 같다는 것이며 그건 보슈에게 어둠을 안겼을 때의 미국이나 할러에게 상징적 죽음을 가져다 준 지금의 미국이나 똑같다는 그렇게 시간적으로도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는 뜻이 된다. 만일 그렇다면 보슈는 여전히 그 땅을, 그리고 그 때를 떠나지 못한 것이다. 그러니까 베트남의 '땅굴 쥐'라는 지하에서 LA의 형사라는 지상으로의 삶의 전이는 문자 그대로 무덤에서 다시 걸어 나온 자를 형상화하는 것일 뿐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그대로 다시 되살아난 할러가 '수트케이스 시티'로 재정의되는 LA로 다시 돌아오는 것과 또 닮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코넬리의 의도는 여기서 명백해진다. 즉 그는 보슈에게 두번째의 기회를 주었듯이 할러에게도 역시 그 기회를 주려는 것이다.

 

 아마도 그래서 보슈와 할러는 서로 만나야했을 것이다.

 

 (여기에 있어서 의미심장한 장면이 바로 보슈가 할러에게 자기가 듣고 있는 음악이 무엇인지 말해주는 장면이다. 보슈는 자기가 듣고 있는 뮤지션이 프랭크 모건이라고 말해준다. '라인업'에 실린 글에 의하면 프랭크 모건은 보슈의 캐릭터를 형성하는데 있어 결정적인 영감을 준 음악가였다. 코넬리는 말한다.

 

 "내 탐정은 프랭크 모건 처럼 생존자로서 현재 그리고 미래를 살아가기 위해 과거를 극복하는 남자여야 했다.(라인업, P.69)"

 

  말하자면 프랭크 모건은 보슈의 정체성이었다. 그런데 코넬리 자신도 작품을 쓸 때는 꼭 프랭크 모건을 듣는다고 한다. 그러니까 프랭크 모건은 코넬리가 작품 전체에 걸쳐 구현해내려는 우주 자체를 의미한다고도 볼 수 있다. 독자들이 가장 반대할만한 캐릭터를 창조하기 원했던 코넬리가 그 이유로 만들어낸 할러는 바로 거기에서 코넬리의 우주로 초대되는 것이다. 이는 마치 돌아온 탕자의 이야기와도 같다. 그런데 할러 역시도 그 뮤지선을 알고 있다고 한다. 어릴때 모건이 아버지의 의뢰인 중 하나였다고. 아마도 그 유년 기억의 소환은 코넬리가 초대한 것에 대한 기꺼운 응답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보슈와 할러는 동반자가 된다. 이는 다른 면에서도 확인되는데 할러가 소원했던 딸과의 관계를 회복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보슈 역시도 2009에 나온 '9 DRAGONS'에선 태어난 지 몰랐던 딸을 찾게 된다고 한다. 둘이 결국은 동반자라는 사실에 이 보다 더 결정적인 증거가 또 있을까?)

 

  지금껏 같은 산에 살면서도 서로의 반대편에 있었지만 이제는 같은 정상을 추구하기 때문에. 보슈는 순례를 통해 할러는 반추를 통해 둘 모두 어둠을 밝히는 빛이요 거짓말에 더 이상 오염될 수 없는 밝고도 분명한 진실, 즉 말하자면 쾌락의 정원 3부작중 가장 왼 편에 있는 에덴동산으로 가고자하기 때문에 말이다. 어둠이 없고 영원히 변하지 않는 곳. 말 그대로  'THE BRASS VERDICT'의 세상으로. (BRASS는 소설에서 보슈의 말처럼 총알이란 뜻도 있지만 '녹슬지 않는 황동'을 의미하기도 하니까.)

 

  거기서 보슈는 '엔젤스 플라이트'에서 성냥갑에 적혀 있던 '내면의 안식'을 얻게 될 것이고 할러는 5부의 제목 처럼 'THE BRASS VERDICT'의 근본적 의미인 '마지막 평결'을 얻게 될 것이다.

 

  나는 그 뒤로 베란다에 남아 도시를 바라보았다. 불빛이 도시를 가로지르며 움직였다. 수많은 생각들이 내 머릿속에서 걸러져서 저 위의 구름처럼 하늘로 날아갔다. 아름답지만 아주 멀어서 손으로 만질 수 없는 구름. 다시는 보슈를 볼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와 내가 산의 양편을 하나씩 차지하고 그냥 이대로 살아갈 것만 같은 느낌.(P. 550)

 

 

 아마도 우리가 코넬리의 작품에 열광하는 건 그것이 그저 읽는 재미만을 주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내내 긴장을 늦출 수 없게 만드는 이야기적 구성의 완벽함, 놀라운 반전 등이 물론 한 몫을 하긴 하겠지만 보슈와 할러의 다음 이야기를 기다리게 만드는 것은 어쩌면 그들의 삶이 결국은 우리들 자신의 삶과 그리 다르지 않다라는 공감 때문이 아닐까 한다. 보슈는 여전히 내면의 안식을 가져다 줄 진실을 찾아 헤메이고 할러는 마지막의 저 독백 처럼 결코 만질 수 없을 것 같은 구름(아마도 이것은 삶에 있어 종국적인 의미라는 'THE BRASS VERDICT' 가진 또 하나의 의미에 대한 은유일 것이다.)을 쫓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 우리도 내내 그러할 것이다. 하지만 보슈와 할러는 포기하지 않는다. 그 어떤 거대한 세력이 앞을 막아도 배에 총알을 빵빵 맞아도 그들의 시도는, 추적은 포기되지 않는다. 우리가 그들의 이야기에 계속 귀를 기울이는 것은 그래서 아마도 응원을 위해서가 아닐까 싶다. 그들처럼 세상의 거대한 벽을 느낄 때마다 안정이란 유혹속에 쉽게 자신의 신념을 포기할 때 우리는 종종 원하지 않았던가? 이 모든 왜소함과 자괴감을 극복할 수 있도록 누군가 자신만의 신념으로 세상과 대적하는 살아있는 모범이 되어 달라고... 아마도 우리는 보슈에게서 그것을 보았고(아마도 이제는 할러에게서도 보게 될 것이다.) 그래서 응원하게 되었을 것이고 또 계속 그들의 따라 걷게 되었을 것이다. 보슈가(그리고 이제 할러도) 우리들이 치뤄야 할 싸움을 대신해서 혹은 미리 치뤄주는 자들이었기 때문에. 물론 코넬리는 그들이 그러한 사람들이 되길 원한다고 스스로 말했다. 아마도 그래서 이들은 그 어느 캐릭터 보다 생생하게 빚어졌을 것이다. 읽다보면 분명히 느껴진다. 코넬리가 자신의 캐릭터를 얼마나 공들여 형상화 시키고 있는지. 그의 말투, 몸짓, 등장하는 장면 하나 하나마다 말이다. 할러가 헐리우드에서 잘 나가는 의뢰인 엘리엇에게 이제 주도권은 자신에게 있음을 알리기 위하여 엘리엇의 개인 사무실이 아니라 중립적인 회의실에서 만날 것을 강요하는 건 얼마나 디테일한 묘사인가? 코넬리는 이 모든 인물들이 그저 텍스트 상의 가상이 아니라 실제 우리들의 곁에서 호흡하고 행동하는 살아있는 인물들로 여겨지길 원한다. 왜? 여기에 하나의 진심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그 변하지 않는, 바래지 않는 종국적인 진실인 'THE BRASS VERDICT'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하는... 그건 소설에서 할러에게서 단적으로 나타난다. 바로 자신의 새로운 운전기사가 된 패트릭 헨슨과의 관계를 통해서 말이다.

 

  할러는 그 자신의 믿음과 본성에도 불구하고 아무 이유 없이 어려움에 빠진 패트릭을 돕는다. 패트릭이 그 까닭을 묻자 할러는 이렇게 말한다.

 

 "나도 잘 몰라, 패트릭. 하지만 내가 자네를 돕는 게 나 자신을 돕는 일이 되기를 바라고 있어."

 

  그 전에 할러는 이런 생각을 했다.

 

  지난 48시간 동안 새로 맡게 된 사건들의 무게가 나를 짓누르기 시작했다. 내가 다시 유혹을 느끼는 것이, 역이 내게 줄 수 있는 포근한 세계로 가고 싶은 욕망이 느껴졌다. 약은 지금 내가 서 있는 곳과 벽돌담 같은 현실 사이에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 주었다. 나는 그 공간을 점점 갈망하고 있었다. 하지만 다시는 그 곳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것이 내 마음속 깊은 곳의 진심이었다. 어쩌면 패트릭이 나를 도와줄 수 있을 것 같았다.(P. 287)

 

  코넬리가 말한대로 자신의 캐릭터가 프랭크 모건 처럼 과거와 싸우는 인물이기를 원한다면 할러가 두려워하는 약은 돈 밖에 몰랐던, 그래서 죽음을 초래한 예전의 자신이 될 것이다. 그는 세상과 섞일 때 마다 늘 과거로 돌아가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하지만 그 과거란 전부인과의 대화에서도 드러나듯이 딸을 포함한 모든 것을 잃는 일이다. 그리고 또한 자신의 죽음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미지 역시 코넬리는 고정된 공간으로 표현한다. 마치 이대로 정지하면 죽는다는 듯이. 그래서 그는 죽지 않기 위해, 과거의 자신으로 돌아가지 않기 위해, 오로지 자신에게 이익일 돌아올 경우에만 희생을 지불하던 자신을 버리듯이 아무 까닭없이 곤경에 빠진 패트릭을 돕는 것이다. 거기다 그를 정처없이 내내 떠돌아다니게 할 링컨차의 운전기사로까지 고용한다.(이건 내내 탐문을 위해 떠돌아다녀야 할 보슈의 또 얼마나 비슷한가?) 그런 패트릭이 운전기사를 맡는 건 또 얼마나 의미심장한 일인가? 그렇게 패트릭은 내내 할러를 움직여갈 것이다. 그렇게 할러를 살려나갈 것이다. 이 모든 코넬리의 정교한 세팅 속에서 드러나는 목소리는 단 하나다. 내면의 안식을 가져다 줄 변하지 않을 진실을 찾고 싶은가? 그렇다면 머리로만 꿈꾸지 말고 적어도 행동을 하라! 그 것이다. 보슈 처럼 결국은 타인을 살리거나 아니면 적어도 할러 처럼 자그마한 것이라도 타인을 도와주라는 것이다. 바로 그 행위가 그게 언제가 되었든 결국엔 원하는 그것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그러니까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당신이 보슈와 할러의 기꺼운 동지가 되기로 작정했다면 아마도 이런 식의 진심에 감응한 결과라고... 그래서 우리는 응원하는 것이다. 그들이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걸어가 주기를... 마치 보슈와 할러가 희망이란 신기루에 몇 번이나 속아가면서 정처없이 헤메고 있는 사막 위를 우리를 대신 업고 가기라도 하고 있는 것 처럼 말이다. 게오르크 루카치란 한 철학자는 무엇보다도 큰 이 세상의 비극은 우리를 인도해 줄 그 어떤 별자리도 없다는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 루카치의 눈물을 닦아줄 수 있을 것이다. 손가락으로 보슈와 할러를 가리켜 보이며 말이다. 그러니 그들에게 당신의 돈을 걸어라, 몽땅! 그들은 영원히 지지 않는 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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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과 망각의 책 밀란 쿤데라 전집 5
밀란 쿤데라 지음, 백선희 옮김 / 민음사 / 2011년 11월
평점 :
품절


 

 

 

 이 책 전체는 변주 형식의 소설이다. 서로 다른 부분들이 나로서는 이해하려면 막막함에 빠져들게 되는 한 테마의 내부로, 한 생각의 내부로, 하나뿐인 독특한 상황의 내부로 인도하는 여행의 서로 다른 단계처럼 이어진다. 이것은 타미나의 소설이다. 타미나가 무대를 떠나는 순간에는 타미나를 위한 소설이 된다. 타미나는 주인공이자 주된 청중이다. 다른 이야기들은 그녀 이야기에 대한 변주들이며 거울 속 처럼 그녀 삶 속에서 서로 만난다. 이것은 웃음과 망각에 관한, 망각과 프라하에 관한, 프라하와 천사들에 관한 책이다.(P.310)  

 

 이렇게 밀란 쿤데라는 작품에서 직접 이 소설 '웃음과 망각의 책'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그는 형식에 있어서는 변주로 하되 주된 주제는 타미나와 관련있다고 말한다. 쿤데라는 변주를 그 형식으로 가져온 이유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변주라는 형식은 집중이 그대로 발휘된 형식이다. 이 형식은 작곡가에게 본질적인 것에 대해서만 말하게 하고 사물의 핵심에 곧장 다가가게 한다.(P. 308)

 

 

 쿤데라가 변주를 소설의 주 형식으로 하는 건 바로 이 때문이다. 본질적인 것을 말하게 하고 핵심으로 곧장 다가서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소설에서 그것이 필요한 것일까? 그것에 대해 쿤데라는 이 소설에서 한 소설가의 입을 빌려 이렇게 대답한다.

 

 소설이란 인간의 착각의 결실입니다. 타인을 이해할 수 있다는 착각말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서로에 대해 무엇을 압니까?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자기 자신에 대한 보고서를 제출하는 것 뿐입니다. 각자 자신에 대한 보고서를 쓰는 거죠. 나머지는 권력의 남용일 뿐이죠. 나머지는 전부 거짓이에요.(P. 172)

 

 즉 쿤데라는 이 소설을 가지고 바로 자신에 대한 보고서를 쓰고 있는 것이며, 그 보고서는 지금 자신이 사유하고 있는 것에 대한 보고서이기 때문에 그 본질만 말하고 핵심에 곧장 다다르게 하는 것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럼, 쿤데라는 무엇을 사유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그가 변주에 대해서 쓴 또 다른 부분에서 드러난다.

 

 변주 또한 여행이다. 그런데 이 여행은 외부세계의 무한을 가로지르지는 않는다. 인간은 거대한 무한의 심연과 작은 무한의 심연 사이에서 산다고 말한 파스칼의 생각을 당신들은 알 것이다. 변주의 여행은 이 다른 무한 속으로, 다시 말해 모든 것 속에 감춰진 내면 세계의 무한한 다양성 속으로 나아간다.(P.307)

 

 여기서 우리가 유념해야 할 것은 쿤데라는 변주라는 것을 또 다른 무한성으로의 여행으로 여기고 있다는 것이다. 왜 다른 무한성으로 여행해야 할까? 거기에 대해서는 하이데거가 '동일성과 차이'에서 말한 것이 도움이 될 것 같다.

 

 그는 고대 그리스 이래로 서양의 형이상학은 하나의 근원, 즉 아르케를 추구해왔는데 무엇보다도 그것은 오로지 하나이며 그렇게 절대인 그것은 결코 자기와 다른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고 한다. 바로 그 '절대적 일자(一者)'의 사상이 로마 시대 기독교와 결합하여 차이는 무조건 배척부터 하고보는  '독단의 일자'가 되었고 그로인해 서양은 결국 '파시즘'이나 '전체주의' 같은 비극을 껴안게 되고 말았다고 한다. 쿤데라가 바라보는 것도 이와 같다. 무엇보다 그는 독재의 극한이라 할 수 있는 스탈린이 보낸 탱크들에 의해 뭔가 다른 것이 되고자 했던 '프라하의 봄'이 무참히 짓밟히는 걸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독재의 폭압에 의해서 많은 이들이 다른 것을 말한다는 이유로 감옥에 가야 했고, 더 많은 이들이 다른 것을 생각한다는 이유로 삶의 터전과 고향에서 쫓겨나야 했다. 운이 좋아 그것을 들키지 않은 자들도 비극적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증가된 비밀경찰들과 그 끄나풀 그리고 더욱 더 치밀해지는 그들의  감시 업무 아래서 그들은 그야말로 고공 100미터에서 외줄타기를 하는 듯한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살아야 했으니까 말이다. 자신 역시도 그런 사람 중 하나였기 때문에 그 마음은 손에 잡힌 듯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그 때의 기분을 소설에서 이렇게 술회한다.

 

 그 때 나는 원이 지닌 마법적 의미를 깨달았다. 열에서 이탈했을 때는 아직 돌아갈 수 있다. 열은 열린 조직이다. 하지만 원은 닫혀서, 떠나면 돌아갈 수가 없다. 행성들이 원을 그리며 움직이고, 떨어져 나온 돌이 원심력에 실려 가차없이 멀어지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행성에서 떨어져 나온 운석처럼 나는 원에서 떨어져 나왔고 오늘날까지도 계속 추락하고 있다.(P. 130)

 

 때문에 자신과 동일하지 않은 것은 모조리 배척하는 그 '독단적 일자'가 어떤 비극을 가져오는지 그는 너무나도 잘 알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그 하나됨, 소설에서 '목가', '원무' 등으로 암시되는 그 하나됨을 허물어뜨릴 수 있는 하나의 대안으로써 다른 무한성으로 떠날 수 있게 만드는 그 '변주'를 가져오는 것이다.

 

  단적으로 그 변주란 소설에 나오는 말로 하자면 경계를 넘나드는 일이다. 이를테면 타미나 이야기에서 나오듯 한 발로 이 칸 저 칸을 넘나드는 일이다. 쿤데라는 바로 그렇게 경계를 넘나드는 것, 그 어디에도 정주하려 하지 않는 것이 바로 그 '독단적인 일자'가 가져올 비극을 줄이는 길이라 믿는다. 소설에서는 3부 '천사들' 이후로 경계를 넘나드는 것을 꾸준히 형상화해서 보여주고 있는데 그 대표적인 모습이 바로 소설에서 그토록 '정사(情事)'가 자주 나오는 이유이기도 하다. 쿤데라에게서 '성적 행위'가 나오는 이유는 마지막 7부 경계선의 얀의 이야기에서 나타나는데 바로 그가 가장 매료되었다는 고대 소설인 '다프니스와 클로에'가 그것이다. 무엇보다 얀이 매료된 부분은 바로 이것이다.

 

  그렇게 오래도록, 아주 오래도록 남아 있다. 그 이상 무얼 할 수 있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 포옹 자체가 사랑의 쾌락의 목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흥분했고 심장이 세차게 뛰었지만 정사를 나눈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P. 370)

 

  이 문장만으로는 그 이유를 얼른 납득하기가 힘들다. 아마도 쿤데라 역시도 그것을 우려했었는지 소설의 마지막에 얀이 매료당했던 진짜 이유를 다음과 같이 풀어놓았다. 

 

 에드위즈와 그는 결코 서로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언제나 뜻을 같이했다. 각자가 상대 말을 자기 식으로 해석해서 그들 사이에는 놀라운 조화가 유지되었다. 몰이해 위에 세워진 경이로운 연대였다. 그들은 그것을 잘 알았고, 그에 거의 흡족해했다. (P. 421)

 

 즉, 바로 이것이 쿤데라가 대지를 지배하는 하나의 목가, 모두가 같은 춤을 추도록 만드는 원무가 가져오는 비극을 없애기 위해서 지향하는 바였다. 굳이 하나의 공간에 머무르려 하지 않으며 비록 상대방이 경계 저 편에 있더라도 아무 이유없이 받아들여 주는 것. 그냥 그렇게 타자 그 자체로서 연대하는 것. 이것이 바로 쿤데라가 이 '웃음과 망각의 책'이 지닌 모든 여정을 통해 보여주고 싶은 것이었다. 그래서 상대방을 순수히 받아들이는 가장 대표적인 행위라 할 만한 '정사'를 쿤데라는 소설 내내 그토록 자주 가져 온

것이다.

 

  이렇게 '웃음과 망각의 책'은 그 자신 역시 희생자였던 무참하게 짓밟힌 프라하의 봄을 통해 체험했던 비극을 어떻게 하면 끊어낼 수 있을까에 대해 천착한 일종의 사유의 여정이었던 셈이다. 한 마디로 쿤데라 자신의 사유의 보고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나다를까 그는 아예 실명으로까지 등장하여 개인 사유의 보고서임을 분명히 보여준다. 그가 이렇게 보고서로서의 성격을 강조하는 것은 왜일까? 그것은 아마도 독자에게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기 보다는 먼저 독자를 자신의 사유 속으로 참여시키려고 하기 때문인 것 같다. 아마도 그래서 이 소설이 다른 소설들과는 다르게 다소 특이한 형태를 띠는 것은 아닌가 싶다. 앞서도 쿤데라가 변주의 형식을 취한다고 고백했음을 말했지만 정말 이 소설은 정형화된 소설의 모습과는 많이 다르다. 작가가 마치 예화를 말하듯 상상된 이야기임을 분명히 드러내는가 하면 곳곳에서 에세이 같은 분석이나 사유의 글들이 출몰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이 소설은 보다 본질적으로는 쿤데라가 그것에 관해 이루어갔던 모든 사유의 결들을 마치 곤충도감을 만들듯 독자가 얼마든지 관찰가능하도록 펼쳐놓은 것과 같다. 그래서 독자 역시도 얼마든지 자신만의 사유로 된 책을 쓸 수 있도록 말이다.

 

 인간은 책을 쓸 때 세계로 바뀐다. 그리고 한 세계의 속성은 그것이 유일하다는 데 있다.(P. 205)

 

 이러한 면모는 제목에서도 나타난다.

 

 

 

 

  여기서 '웃음'은 경계를 넘어선 개인의 고유성을, '망각'은 그 고유성을 소멸하여 하나의 전체성으로 포섭하는 것을 암시한다. 그렇게 제목은 이 책이 그 둘이 서로 변증법적 관계를 이루며 지속해 나가는 사유의 과정임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표지에 나온 그림에서도 증명된다. 표지에 나온 저 그림은 르네 마그리트가 그린 것으로 제목이 바로 '헤겔의 휴식'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의 이 리뷰도 어쩌면 쿤데라가 펼쳐보인 그 여정에 참여한 끝에 나온 나만의 표지 그림과 같은 '변증법적 완성형'의 모습이라 할 수 있겠다. 마치 잠언과도 같은 놀랍고 재기발랄한 말들의 향연에서 당신이 결국 집필할 책은 과연 어떤 모습일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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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2-05-20 2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보는 헤르메스님 리뷰!
이번 책과 리뷰는 저에겐 한없이 어려워만 보이는군요. 밀란 쿤데라라는 작가 이름부터 소용돌이에 빠진 듯 쑥쑥.
요새 알라딘이 침체기에 접어든 거 같아요. 분위기도 싸하고 밝지 않고, 많이 보이던 분들이 코빼기도 비치질 않으니 알라딘에 와도 심심하기만 하네요. 그 와중에 헤르메스님께서 글 한편 남겨주셔서 좋군요. 하아. 내일은 또 열심히 학교가고, 일해야 겠죠? 헤르메스님도, 나도 파이팅!

오드득 2012-05-23 01:12   좋아요 0 | URL
소이진님 쿤데라는 저 역시도 어려워요. 아마도 제대로 이해하기가 가장 어려운 작가중의 하나가 아닐까도 싶네요. 그래서 리뷰도 어쩔 수 없이 어렵게 되고 마네요. 제가 제대로 소화시키고 있지 못한 결과로^ ^;
소이진님을 위해서라도 꼬박꼬박 글을 남겨야 하는데 요즘은 통 그런 시간이 안 나더라구요. 그래도 제게 파이팅 해주셔서 고마워요. 요즘 정말 무덥던데 이럴수록 건강 잘 챙기고 학교 생활 제대로 잘 해내시길 빌어요. 아무튼 글을 자주 자주 되는 대로 올리겠습니다.(근데 요즘 정말 글 안 써지네요... 슬럼프인가? ㅠ ㅠ)

프레이야 2012-05-21 09: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르메스님 저는 이 책을 구판으로 읽었는데요 정말 좋아요.
밑줄긋기도 많이. 저 표지 그림의 정체를 알게 됐네요. 헤겔의 휴식! 이군요.^^
변증법적 완성형,이란 말이 쏙 들어옵니다.

오드득 2012-05-23 01:16   좋아요 0 | URL
와! 프레이야님 반갑습니다.
프레이야님이 영화에 대한 글을 많이 읽었는데
그래서 뵙는 건 처음인데도 오래 알던 분 같아요^ ^
쿤데라가 새삼 정말 글을 깊이있게 잘 쓴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 느꼈습니다.
저도 밑줄 긋고 따로 적어 둔 말이 참 많아요. 이런 혜안이 질투날 정도로 부럽더군요^ ^ 이번에 나온 쿤데라 전집엔 모두 마그리트의 그림이 사용되었던데 누가 이 책의 표지로 헤겔의 휴식을 선정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이 표지만큼은 제대로가 아닌가 싶어요. 아무튼 프레이야님 방문도 댓글도 모두 감사드립니다.^ ^

마녀고양이 2012-05-21 1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제가 기억이란 변주와 같다는 요지의 페이퍼를 쓴적이 있었어요...

헤르메스님의 페이퍼는, 제가 인간 관계에서 느끼는, 또는 기억이란 이름으로 만들어진 제 정체감에 대해서 느끼는 부분을 명확하게 말씀해주시네요. 변주, 다들 사실이라고 말할지 모르나, 다들 fact에 대한 변주를 보여줄 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측면으로 아까 '정사'에 관해 인용하신 부분이 마음에 와닿습니다. 그게 한계이지만, 한계를 알아야만 마음의 준비를 하고, 수용하고,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다는 생각도 같이 합니다.

즐거운 한주되셔요.

오드득 2012-05-23 01:30   좋아요 0 | URL
대니얼 카너먼의 '생각에 관한 생각'을 읽어서 더욱 마녀고양이님의 생각에 동의를 하게 됩니다. 지금은 쿤데라의 '불멸'을 읽고 있는데 저 '정사'에 대한 인식이 더욱 깊어졌더군요. 이를테면 쿤데라의 '불멸'은 사실 어떻게 하면 '불멸'하지 않을 수 있을까에 대한 사유의 여정입니다. 불멸은 기억을 통해 이어지는데 쿤데라는 그 기억이 오히려 존재에 대한 피상적 인식만으로 채워지므로(설사 그것이 괴테나 헤밍웨이의 작품에 대한 것이라 하더라도) 오히려 존재의 순수성을 파괴하지 않는가 하는 물음을 이어가고 있는 것 같거든요. 아직 끝을 못 보았기에 결론에 다다르지 못했습니다만 작품에서 이렇게 기억을 의심스럽게 바라보는 것도 그 기억이 우리에게 남겨져 타자를 만날 때 순수하게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기 때문은 아닌가 싶더군요. 그래서 영원이야말로 오히려 우리 존재들에겐 형벌이 아닌가 이렇게 묻고 있는게 아닌가 싶어져요. 이렇게 보면 불멸 보다는 찰라적인 것을, 항구적인 것 보다는 변주적인 것을 그렇게 쿤데라는 꾸준히 자신의 주제를 심화시켜나가고 있는 것으로도 보여지는군요. 제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것들이라 어쩔 수 없이 수다스러워지는 것을 용서해 주세요. 아무튼 말씀하신대로 한계 자체의 긍정이 무엇보다 출발점인 것 같습니다.('불멸'은 그것을 시작점으로 하고 어떻게 나아갈 것인가를 살펴보는 작품 같기도 합니다.) 마고님 댓글에 저도 이렇게 자꾸 생각을 발전시키게 되네요. 늘 좋은 말씀 남겨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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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의 힘 1 밀리언셀러 클럽 124
돈 윈슬로 지음, 김경숙 옮김 / 황금가지 / 2012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베트남 전쟁은 미국에게 있어 최초의 패배였고 그래서 트라우마가 되었다.

건국 이후 미국은 70년대까지 타자들과는 모두 세번의 큰 전쟁을 치뤘다. 40년대의 2차세계대전 50년대의 한국전쟁 그리고 70년대의 베트남 전쟁. 40년대의 2차세계대전은 미국에게 지금과 같은 패권국가의 자리를 가져다주었다. 미국의 달러를 기축통화로 정한 브레턴 우즈 체제는 정치권력 뿐만아니라 경제권력까지 미국에게 넘어갔다는 증거에 다름아니었다. 50년대의 한국전쟁은 휴전선이라는 반쪽의 승리에 그쳤으나 그래도 적어도 패배는 아니었다. 하지만 70년대의 베트남 전쟁은 문자 그대로 완벽한 패배였다. 그토록 유례없는 군비를 투여하고 물량공세를 펼쳤지만 돌아온 것은 전면적 퇴각 밖에는 없었다.

 

 베트남 전쟁은 미국의 오만했던 콧대를 여지없이 주저앉게 만들었으며 그렇게 아무 것도 거칠 것이 없었던 미국이 처음으로 맞딱드린 그 한계는 지울 수 없는 얼룩, 치유될 수 없는 트라우마가 되고 말았다. 하지만 정작 문제는 트라우마가 생겼다는데 있지 않다. 역사적으로 그런 패배 한 번 겪어보지 않은 나라가 어디있겠는가? 어차피 정상에 있는 존재에게 남은 것이라곤 내리막길 뿐이다. 그러니 미국 역시도 언제고 한 번은 당해야만 하는 아픔이었다. 그래도 미국이 조금 다른 경우라면 당시의 미국은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최고의 정점에 서 있는 나라였다는 데 있을 것이다. 자유세계를 마음대로 호령하는 팍스아메리카나! 그게 70년대의 미국이 아니었던가! 마치 소설 '개의 힘'에서 멕시코의 바레라 가문과 같았다고 할 수 있다. 그랬던 미국에게 베트남 전쟁의 패배는 마치 로마의 황제가 변방의 이름없는 부족에게 대패를 한 것이나 다를 바 없었다. 스스로도 적수라 여기지 않았던 상대, 차마 질 것이라 도저히 예측할 수 없었던 상대에게 진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치욕 또한 컸었다. 바로 그 치욕이 오히려 마치 손톱 밑에 박힌 가시처럼 두고두고 곱씹을 수 밖에 없는 아픔을 가져왔던 것이다. 상처받은 자존심. 더구나 당시의 미국은 자유세계의 지도자적 국가. 그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패배는 용납되지 않았다. 패배는 얕보이게 만든다. 미국이 두려워하던 것도 그것이었다. '어라! 미국도 별 거 아니네. 저렇게 큰 힘이 있어도 조그만 베트남 나라조차 이기지 못하잖아'하는 식으로 피식 웃으며 비웃듯 자기를 바라볼 다른 나라들의 시선이었다. 그래서 보스는 더욱 허세를 부리거나 잔인해지게 된다. 소설에서 바레라 가문이 굳이 하지 않아도 되었던 멘데스의 두 아이를 다리 아래로 집어 던졌던 것 처럼...

 

 돈 윈슬로의 '개의 힘'은 75년부터 2003년까지 30년이 넘는 시간 동안의 미국과 멕시코간의 마약전쟁을 다룬다. 압도적인 서사로 독자의 넋을 잃게 만드는 작품이지만 윈슬로가 새삼 과거에 군림했던 멕시코의 마약카르텔에 천착하는 것은 그것이 비단 지금도 지속되고 있는 일이기에 그런 것만은 아니다. 더 큰 이유는 바로 저기에 있다. 그러니까 베트남 전쟁으로 인해 안게 되어버린 미국의 트라우마. 비극이긴 했지만 내부적으로는 보다 현명한 방향으로 나아가게 할 계기가 되기도 했었을 그 사건이 어쩌다 미국을 더욱 더 나쁜 쪽으로 몰아가게 되었던가 하는 것을 살펴보는데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쉽게 말하자면 이 이야기는 상처를 극복하는 방법에 대한 얘기다. 그 상처를 극복하는 데 있어 어떻게 '개의 힘'이라는 악의 유혹에 빠지지 않고 현명하게 극복할 수 있을까 돈 윈슬로는 궁극적으로 그것을 묻고 싶어한다.

 

  

 물론 미국은 실패했다. '개의 힘'은 사실은 그러한 미국의 실패를 복기하는 작품이다. 무엇보다 그것은 이 소설이 하필이면 베트남 전쟁이 종전된 75년부터 시작되는 것에서 나타난다. 1975년 4월 30일. 베트남전쟁은 공식적으로 끝났다. 그리고 그 75년,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던 반은 미국 반은 멕시코인 주인공 아트 켈러는 이제 마약 단속 수사관이라는 새로운 신분을 얻어 멕시코로 파견된다. 바로 그 때 거기서 30년간 피바람을 불러올 비극의 씨앗이 원죄처럼 잉태된다. 아트 켈러가 멕시코로 간 시기는 공교롭게도 미국이 더 이상 베트남에서와 같은 실패를 겪지 않기 위해 더욱 철저하게 그래서 정당하지 않은 방법으로 '개의 힘'에게마저 의지하여 (그러한 불법적은 간섭들은 모두 미국에게 직접적인 위협이 된다는 이유로 용인되었다.) 중앙아메리카의 공산화를 막으려고 개입했던 시기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소설에서 아트 켈러의 이야기는 사실 베트남 전쟁 이후 미국의 역사나 마찬가지다. 그가 티오의 힘을 빌려 처음 했었던 멕시코의 아편 산업에 대한 개입이 그대로 베트남 전쟁을 은유하는 것이라면 그 이후에 벌어지는 아트 켈러의 멕시코 마약 카르텔에 대한 막후 공작은 모두 미국의 중앙아메리카의 개입을 그대로 은유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돈 윈슬로는 분명히 보여준다. 베트남 전쟁이 가져온 트라우마를 지워버리려고 그렇게 '개의 힘'을 빌렸던 미국이 과연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를. 그렇게 아트 켈러를 통해 상징되듯이 그 한 발자욱도 나가지 못하고 여전히 제자리를 맴도는 성찰없는 미국의 반복된 과오가 무엇을 가져오는지 그는 소설을 통해 독자에게 생생하게 느끼게 만드는 것이다. 자신의 고통을 잊기 위해 타인에게 고통을 전가하는 '개의 힘'에 의지하는 것은 그 저 더 큰 불행, 더 큰 지옥을 가져올 뿐임을 말이다.

 

 일단 악이 활동을 시작하고 나면 그 움직임을 멈출 힘이 없다는 사실을 티오는 알고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악과 결탁하기를 멀리하는 일이며 지속하다가 멈추는 일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2권 p. 125)

 

 그 다리 위에서 멘데스의 두 아이를 던져버려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새로운 멕시코 마약 카르텔의 보스 아단은 문득 이렇게 느낀다. 그와 똑같이 아무리 선한 결과를 가져오기 위해 그 힘을 빌렸더라도 한 번 빠져버린 '개의 힘'은 마약과 똑같이 그저 더 한 중독만이 있을 뿐이며 오로지 더 강한 자극의 집착만을 가속화시키는 그 중독이 결국에는 가져오고야 말 파멸만이 있을 뿐이다. 이는 돈 윈슬로가 아트 켈러를 통해 너무도 잘 보여주고 있는 바다. 자신이 마약 수사관으로서의 경력이 끝장날 것을 두려워하여 가벼운 마음으로 아단의 삼촌인 티오와 하게 된 하나의 작은 타협이, 그렇게 '개의 힘'에로의 가벼운 입맞춤이 과연 어떤한 것들을 불러왔던가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멕시코의 막강한 마약 카르텔을 완성시켰을 뿐 아니라 그 카르텔로 인해 '멕시코 트램펄린'이라는 중앙아메리카의 자유화 바람을 조기에 억제하는 미국 정부의 은밀한 작전까지 가져와 중앙아메리카의 자유와 평등을 염원하는 시민들을 케르베로스 혹은 레드미스트 작전으로 무자비하게 짓밟도록 도왔다. 더하여 그렇게 유입된 마약으로 인해 오히려 자신이 지켜야 하는 자국의 미국 빈민계층들의 삶마저 파괴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했다. 아트 켈러가 바레라 카르텔에게 복수를 다짐하게 하는 직접적인 계기인 어니의 죽음 또한 그 자신 고백했듯이 자신이 초래한 것은 둘째치고라도 말이다. (우리는 여기서 돈 윈슬로우가 어니의 죽음을 베트남 전쟁의 패배로 인한 트라우마의 상징으로 만들고 있는 것임을 본다. 결국 그 어니의 죽음으로 아트는 완전히 '개의 힘'에게 지배당해 버렸고 결국 그가 불러온 것은 아단 카르텔의 성장이며 그로 인해 라헬이나 파비안과 같은 괴물들이 몰고 오는 더 큰 고통들 뿐이었다. 그리고 그 중 가장 커다란 고통이 바로 가장 순결한 영혼이라 할만한 후안 신부의 죽음일 것이다. 돈 윈슬로우의 '개의 힘'은 사소한 타협에서 무자비하고도 광대한 학살로 이어지는 고통의 하이퍼 인플레이션적 궤도를 재현한다.)

 

 근데, 돈 윈슬로는 왜 새삼 베트남 전쟁이 가져온 트라우마로 인해 미국이 가장 불법적으로 정치적 혹은 군사적 영향력을 행사한 그 시기의 이야기를 지금 가져오려 한 것일까?  그건 지금도 여전히 그 '개의 힘'이 미국에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2001년의 9.11 사태 이후에 그 보복으로 감행된 이라크 침략 전쟁이 미국이 아직도 그 '개의 힘'에 빠져있음을 증명한다. 그렇게 돈 윈슬로는 보았을 것이다. 자신이 겪은 고통을 여전히 타인에게 가하는 고통으로만 위안 받으려는 미국을. 그렇게 베트남 전쟁 이후로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미국을. 해서 그는 우려했던 것이 아닐까? 단 한 번도 자성의 시간을 가지지 않았던 미국을. 그래서 자꾸만 역사적 과오를 되풀이하고 있는 미국을. 그리하여 두려웠던 것은 아닐까? 그 반성하지 않음에서 오는 반복으로 점철된역사적 잘못이 언젠가의 미래에 또 다시 불러올 지 모르는 비극을... 소설에서 아트의 비극이 칼란의 비극으로 반복되었듯이(아트가 어니로 인해 그렇게 되었듯이 칼란 역시 오밥으로 인해 결정적으로 '개의 힘'에 빠져들게 되지 않았던가? 그렇게 돈 윈슬로는 반복을 통해 아무리 사람을 살리기 위한 길이라 하더라도 불법적인 방법이 가져오는 것은 오로지 비극 밖에는 없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돈 윈슬로의 '개의 힘'은 그래서 보다 본질적으로는 하나의 목소리가 되기 위해서 태어난 소설이다. 미국에게 더 이상 '개의 힘'에 의지하지 말 것을 촉구하는, 그렇게 더 이상 예전의 잘못을 다시는 되풀이 하지 말 것을 호소하는 그런 목소리! 그래서 그는 과거에 일어난 미국의 실패를 이리도 충실히 복원하는 것이다. 독자들에게 그 과오가 얼마나 엄청난 비극을 가져왔는지 제대로 느끼게 하기 위해서. 또한 진정한 성찰이란 무엇보다도 현실을 온전히 인식하는 가운데 가능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런 이유로  그는 장장 5년이라는 시간을 집필에 들이면서까지 사건과 상황을 완벽하게 재현하려고 한 것이다. 그리고 물론 그러한 돈 윈슬로우의 시도는 보기좋게 성공했다.

 

 그러므로 '개의 힘'을 그저 단순히 재미를 위한 스릴러로 생각하고 읽는 것은 큰 오산이다. 개인적으로는 좀 더 숙연한 자세로 경청해야 한다고 생각된다. 물론 개인적인 느낌이지만 이 소설에 나타난 돈 윈슬로우의 어조는 어떻게 보면 안토누치 추기경 앞에서 대답하는 후안 신부의 어조와 닮았다.

 "저의 주요 관심사는 복음이 현재 시점에서 사람들에게 좋은 소식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굶어 죽은 다음이 아니고(2권 p.57)"

 

 또는 아단이 티오 삼촌을 도와달라고 찾아왔을 때 했던 후조의 어조와도 비슷하다.

 "난 운명의 장난이 소리소문없이 지나가도록 놔둘거야. 인과응보라는 개념은 알지?"

 "진심으로 참회하며 자신의 길을 바꾸려고 노력하는 영혼일 경우에나 그렇지. 삼촌이 그러신가?:(2권 p.67)

 

 그러니까 경청해야 한다는 것은 돈 윈슬로의 '개의 힘'이 바로 저 두 가지를 독자에게 전해주기 위해 들려주는 미국에 대한 고해성사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하나는 도움이 되기 위해 다른 하나는 너무 늦기 전에 반성을 촉구하고 경고가 되기 위해. 지금 세계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바라보면 아직도 '개의 힘'이 얼마나 유혹적인지 잘 알 수 있다. 그것은 마치 물리기만 해도 감염되는 광견병을 닮았다. 2008년 미국의 서브프라임으로 촉발된 자본주의의 위기는 여전히 심화중이고 그리스의 재정 위기로 드러난 유로의 위기 또한 가속화되고 있다. 그리고 이로 인해 가중되고 있는 고통이 곳곳에서 갈등과 저항을 부르고 노르웨이에서의 이민자 청소년 학살 같은 무시무시한 범죄마저 양산하고 있다. 한 마디로 파멸을 가져오는 광견병이 언제 범람하게 될 지 모르는 판국이다. 증오와 공격만을 불러오는 광견병의 가장 좋은 특효약은 예방이다. 자신에게 전가된 고통의 의미를 제대로 되새기고 그 속에서 가장 현명한 해결 방법을 찾는 것. 그것만이 파멸로 치달을 고통의 연쇄를 끊는 유일한 길이다. 즉, 내가 지금 안고 있는 고통에 대한 성찰만이 진정한 예방이다. 그런 의미에서 돈 윈슬로의 '개의 힘'은 거기에 대한 진정한 백신이다. 언제 물들게되어 버릴지 모를 파멸의 광견병을 미연에 막기 위해서라도 지금 당장 돈 윈슬로의 이 백신을 접종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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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2-05-14 0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방금요, 에세르님의 서재에서 <개의 힘> 리뷰를 읽었거든요.
그리고 그 서재에서 헤르메스님을 생각했답니다. 그런데 같은 책에 대한 리뷰를
연이어 읽으니 사람마다 다른 관점이 굉장히 흥미롭네요.....

제목이 하두 강렬해서, <개의 힘>의 의미가 뭘까 생각했는데....
무슨 의미인지 다가왔습니다. 네, 광견병, 악의 힘, 비단 미국까지 갈 것도 없겠는데요.
요즘 우리나라 정치 정세를 보면 말입니다. 머, 사회도 나을 것도 없지요, 교육두요. ^^

어떤 형태이든, 중독은 무섭습니다. 다양한 중독이 있죠,
비단 물질 중독-마약, 알콜, 음식- 등만 중독이라고 할 수는 없을테니까요.
권력이나 힘도 중독인거 같아요...

오드득 2012-05-20 21:13   좋아요 0 | URL
정말 우리나라 정치 정세를 보면 '개의 힘'에 어느정도나 중독되어 있는지 잘 알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이 리뷰를 썼더 날이 하필이면 통진당 중앙위원회 회의를 하고 있던 날이었죠. 오후 2시 부터 시작된 회의를 10시간 넘게 지켜보면서 정말 중독된 '개의 힘'의 적나라한 모습을 보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도 꿋꿋하게 민주적으로 회의를 진행했던 심상정이나 유시민 그리고 그 오랜시간 자리를 묵묵히 지키고 자신의 한 표를 끝까지 행사할 것을 결의했던 나머지 중앙위 사람들을 보면서 결국 그것을 치유하는 길도 우리에게 열려있으며 그 무엇보다 옳은 것을 선택할 우리의 결단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희망은 남에게서 받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이란 걸 다시 한 번 깨닫게 된 계기가 아니었던가 싶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