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에서 살 생각인가?
이사카 고타로 지음, 민경욱 옮김 / arte(아르테)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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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사카 고타로도 아베 정부에 대해 어지간히 화가 났나 봅니다. 이런 소설을 쓴 걸 보면.

 어떤 소설이냐구요? 이번에 나온, 2015년 작 '화성에서 살 생각인가?'란 소설입니다. 놀랍게도 자경단인 히어로 물이에요. 표지에 점잖게 앉아 있는 인물이 바로 정의의 히어로입니다. 눈만 내 놓은 스키마스크를 쓰고 검은 라이더 복장을 입은 채 목검과 수수께끼의 작고 둥근 물체를 던지며 싸우죠(그 물체의 정체에 대해서는 함구하겠습니다. 이건 읽으면서 확인해야 하는 것이라서^^) 그것도 북한의 '5호 감시제'나 다를 바 없는 감시와 숙청이 마구 자행될 정도로 한 순간에 비민주주의 국가가 되어버린 일본을 상대로 말이죠.



 소설 속 일본에 대해 보다 자세히 말한다면 이렇습니다. 갑자기 테러를 막는다며 '평화 경찰'이라는 게 창설됩니다. 이 아이디어를 낸 것은 야쿠시지 경시장(일본 경찰 계급 중 서열 4위). 그가 '평화경찰'을 만든 장본인이죠. 이름을 '야쿠자'에서 살짝 빌려왔는데 거기서 이 평화경찰이 정말은 어떤 조직인지 힌트를 주고 있네요. 이들은 실제 테러를 일으킨 사람들을 잡는 게 목적이 아닙니다. 그 보다는 테러를 일으킬 만한 인물들을 잡아들이는 게 목적입니다.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에 나왔던 범죄 예방 시스템과 비슷한 역할이죠. 그러나 '마이너리티 리포트'에선 틀림없이 이뤄지는 예언이라는 근거라도 있었지, 이들의 예방에는 아무런 근거가 없습니다. 아무나 닥치는 대로 잡아들일 뿐입니다. 일단 잡아들이고 나서 온갖 비인도적인 고문을 통해 죄를 자백하게 하고 또 다른 이들을 고발하게 만든 다음 광장으로 데려가 시민들이 다 지켜보는 자리에서 길로틴으로 참수시키죠. 그리고 참수된 이의 입에서 나온 사람을 또 잡아들이고. 그런 과정의 무한 반복입니다. 이쯤 되면 '허걱!' 하지 않을 수 없겠죠?


 뭔가 데자뷔가 느껴지신다구요? 어디선가 한 번 본 것 같다구요? 네, 맞습니다. 안타깝게도 여기엔 많은 역사의 실제 사례가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으로 중세의 마녀사냥이 그랬고, 스탈린 체제에서의 소련이 그랬으며, 50년대 미국의 메카시즘이 그랬죠. 물론 우리나라에도 있습니다. 이승만 정권 시절 서북 청년단에 의해 자행된 '빨갱이 사냥'이나 무려 30만 명 가까이 되는 사람들이 우리나라 군인과 경찰에 의해 학살된 '보도 연맹'사건이 그것이죠. 이 압도적이며 남다른 희생자 규모를 보면 이승만과 그의 위세를 등에 입은 친일파들이 얼마나 악질적인 놈들인지 잘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이런 이승만을 국부로 받들자고 하는 사람들은 스탈린을 국부로 받들자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죠. 괴물을 국부로 만들자굽쇼? 국격을 '똥격'으로 내팽개치고 싶은 겁니까?


 앗, 바로 얼마전까지만 해도 이런 미친 놈들이 설치던 나라에 살아서 저도 모르게 그만 이사카 고타로에게 빙의해 버렸네요. 얼른 퇴마의 주문을 외우고 제 정신을 회복한 다음 본래 이야기로 돌아갑니다. 이런 일본을 그리고 있으니, 그러면서 히어로를 통해 그것이 얼마나 커다란 잘못이라는 걸 드러내고 있으니, 분명 이사카 고타로가 아베 정부를 향한 분노에 차서 이런 소설을 썼구나 생각하는 거죠. 왜냐하면 소설 속 일본은 현재 아베 정부가 지향하고 있는 것의 핵심을 조금 극단적으로 드러낸 것일 따름이니까요. 경찰 이름이 하필이면 '평화 경찰'이라는 것에서 나타나지 않습니까? 그 이름을 다른 무엇도 아닌, 아베가 정권을 잡고 나서 일본을 전쟁 가능 국가로 만들기 위해 내내 수정하려 했던 '평화 헌법'에서 차용한 걸 보면.


 이 소설이 2015년에 나와서 하는 말인데, 그 해 아베는 일련의 법안들을 패키지로 통과시켰습니다. 무려 과반수의 국민이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죠. 흔히 '안보 법안'이라 부르는 그 것은 한 마디로 자위대가 외국에서 수시로 PKO(평화유지활동)를 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법입니다. 이처럼 그들의 PKO가, 일본은 평화유지활동이라고 하지만 실은 평화가 아니라 자신의 전쟁 야욕을 위한 활동이듯, 소설 속 '평화경찰'도 사회의 평화를 유지한다고 주창하지만 모두의 평화가 아니라 그들의 평화만 지킬 뿐이죠. 네, 맞습니다. 소설 속 '평화경찰'은 실은 아베가 상시화 하려는 PKO 입니다. 그 '평화경찰'이 소설에서 완전 싸이코패스에다 가학적 성향으로 가득한 악당으로 설정되었으니 이보더 더 PKO에 대한 비판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게 소설이 아니라 현실에서 버젓이 벌어지고 있으니 그렇지 않아도 반골 기질이 강한 '이사카 고타로'로서는 시쳇말로 빡칠 수밖에 없는 것이죠. 아마 할 수만 있다면 자신이 목검을 들고 내려치고 싶었을 겁니다. 그러나 정작 그가 보다 심하게 내려친 곳은 그것을 자행하는 이들이 아니라 그런 짓을 뻔히 보고도 가만히 있는 국민들의 정수리가 아닐까 해요. 무지와 무관심 그리고 알고는 있지만 아직은 내게 피해가 없다는 이유로 이토록 비민주적인 작태를 내버려 두는 사람들. 바로 그런 청맹과니와 같은 시야와 무심함이 결국엔 소설 속 같은 비극적인 파국을 낳는 것이니까요. 그렇게 보자면, 이 소설은 작가에게 문학이라기 보다는 죽비와 같은 것이겠네요. 자신의 삶과 직결된 정치적인 문제들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수동적인 독자들의 정신을 세차게 일깨워 보다 관심을 갖고 능동적으로 참여하게 만들기 위한.


 저도 참 달게 받았고 덕분에 잠시 졸음에 빠지듯 놓아버렸던 관심과 참여의 결기를 다시 벼리게 되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제목인 '화성에서 살 생각인가?'도 이제 달리 보이네요. 소설에서 이 제목은 저항하려는 이들에게 시대의 순리에 따르라는 말로 사용되는데, 지금은 전혀 반대의 의미로 보입니다. 이렇게 말이죠.

 '시대가 이렇게 망가지고 있는데, 네 일 아니라고 내버려 둘 거야? 넌 화성에서 살 수 있는 모양이지? 그게 아니라면 살기 좋은 시대를 만들기 위해 당장 너부터 뛰어들어."


 저도 화성에서 살 수 없으니 당연히 이사카 고타로가 내어주는 목검을 받아야 할 것 같네요.


 개인적으로 추천하고 싶습니다. 지금과 같은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어떤 것이 과연 더 현명하게 대처하는 태도인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보기 위해서라도 한 번 읽어 볼 필요는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자꾸 이런 말을 하는 바람에 혹시 소설이 지루할 것 같은 인상을 받으셨다면 결코 아니라고 말씀드리고 싶군요. 이야기는 492페이지를 한달음에 읽을 수 있을 정도로 재밌습니다. 히어로 물에서 기대하는 활극도 넘치구요. 깊이와 재미가 모두 잘 우러난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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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7-09-04 16: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켄 로치가 은퇴 선언했다가 영국의 보수 정권이 득세하자 다시 영화 만드는 것처럼^^

ICE-9 2017-09-06 14:44   좋아요 1 | URL
그런 시기에 켄 로치가 더 좋은 영화를 만든 것을 보면 나쁜 정치 환경이 예술가들에겐 때로 순기능을 하는 것 같습니다^^ 이사카 고타로도 그렇게 되려나요^^
 
기다렸던 복수의 밤
야쿠마루 가쿠 지음, 김성미 옮김 / 북플라자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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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쿠마루 가쿠의 소설들을 읽으면 '참 한결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는 늘 두 개의 키워드를 중심으로 움직인다. 하나는 과거요, 다른 하나는 복수다. 이것이 다른 미스터리 작가와 구별되는 야쿠마루 가쿠만의 독특성이기도 하다. 그는 언제나 과거에 발목이 잡힌 이들을 그린다. 그 과거란 누군가의 범죄로 인해 혈육을 잃었거나 자신의 삶이 망가진, 한 마디로 상실과 상처로 얼룩진 것이다. 야쿠마루 가쿠의 인물들은 늘 거기에 잡혀 있다. 과거의 덫에 걸려 현재도, 미래도 제대로 누릴 수 없다. '끔찍한 범죄 피해자들의 삶이란 그렇다. 범죄를 당했을 때 이미 자신의 모든 시간 또한 거기에 봉인되어 버린 것이다.' 마치 이것을 자신의 작품을 통해 생생하게 전하려는 것 같다.


 그래서 복수 또한 중요해진다. 여기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우리가 정의를 세우리라 기대하는 법질서가 특히나 범죄 피해자들에겐 아무런 의지도, 위안도 되지 못한다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범죄가 가져온 비극의 상처는 다른 것으로 풀 수 없고 오직 가해자를 통해서만 치유될 수 있다는 것. 다시 말해 결자해지(結者解之)다.


 읽어보면 아시겠지만 야쿠마루 가쿠의 소설들은 늘 이 언저리를 맴돈다. 그래서 그의 소설들을 단적으로 이렇게 정의할 수 있다. 그의 소설은 다른 범죄 소설과 달리 철저하게 피해자를 중심에 둔다고. 최근 형사 정책학에선 형사 정책을 마련하는 근간에 피해자의 삶을 중점적으로 보호하는 '피해자학'이라는 게 주목받고 있는데, 야쿠마루 가쿠는 그 '피해자학'을 소설로 쓰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는 독자에게 범죄로 인해 커다란 상처를 받은 인물을 주시하라고 한다.

 누군가의 악의로 삶의 모든 빛을 빼앗기고 그 먹먹한 어둠 속에서 내내 신음하고 절규하고 있는 한 영혼을 보라고 말이다. 사실 우리는 피해자의 삶을 자주 간과한다. 범인이 체포되면 그것으로 범죄에 대한 우리의 관심을 끊을 때가 많다. 정작 우리가 더 많이 헤아리고 기억해야 하는 것은 그 범죄로 인해 피해를 본 이들의 삶인 데도 말이다. 그러므로 야쿠마루 가쿠는 자신의 소설을 통해 원래 당연히 기울여야 했을 방향으로 우리의 관심을 인도하고 있다고 하겠다.



 이번에 나온 2016년작, '기다렸던 복수의 밤'은 그 전해에 나온 '돌이킬 수 없는'과 함께 읽으면 더욱 좋을 작품이다.

 여러 면에서 비슷하면서도 또 다르기 때문이다. 일단 과거에 발목이 잡힌 이가 나오고 그 인물이 복수의 운명에 처해 있다는 게 똑같다. 그러나 '돌이킬 수 없는'은 타인의 복수를 대리해야 할 상황에 처해 있고, '기다렸던 복수의 밤'은 제목처럼 복수를 스스로 집행해야 할 상황에 처해 있다. 이것은 인물에게 다른 갈등을 가져 온다. '돌이킬 수 없는'는 과거를 끊고자 하는데 그럴수록 더 질기게 달라붙는 과거 때문에 괴로워하고, '기다렸던 복수의 밤'은 거꾸로 무수하게 이제는 과거와 단절하라는 요구와 유혹이 자신에게 쏟아지지만 정작 자신이 도저히 그럴 수 없어서 괴로워한다.

 전자는 타인의 비극을 추체험하면서 그 앞에서 우리가 져야 할 책임은 없는가를 묻지만 후자는 돌이킬 수 없는 과거의 비극이 낳은 무저갱 속에 갇혀버린 자에 대해서 그를 구원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를 묻는다. 책임의 형태가 좀 더 명확해지고 개인화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주제가 이어지기에 함께 읽어보면 좋겠다는 말을 한 것이다.


 소설은 30년 전에 일어난 비극적인 사건으로 삶이 모조리 망가져 버린 가타기리 타츠오를 대상으로 하여 다섯 명의 화자가 번갈아 가면서 이야기를 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그 다섯 명이란 첫 번째는 30년 전 사건이 일어난 볶음국수 집의 주인이자 가타기리의 유일한 친구인 기쿠치 마사히로 이고 두 번째는 가타기리를 도와주려 하는 변호사 나카무라 히사시이며 세 번째는 30년 전 사건으로 영영 헤어져 버린, 지금은 아버지에 대한 증오만이 남아 있는 가타기리의 딸 마츠다 히카리이고 네 번째는 30년 전 사건에서 기쿠치 아내에게 시비를 걸다가 결국 가타기리에게 칼을 맞아 버린 가와지리와 현재 함께 살고 있는 여성인  모리구치 아야코이며 마지막은 가타기리 타츠오와 묘한 인연을 맺어버린 아라키 세이지이다.


 이 다섯 명의 고백을 통해 얼굴 한 쪽엔 표범 문신이 있고 왼손은 의수이며 그런 몸으로 30년 내내 편의점 강도를 비롯하여 갖은 범죄로 교도소를 들락날락 거린 탓에 어디를 가나 환영받지 못하는 가타기리 타츠오의 생애란 게 정말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가 밝혀지는 것이다. 또한 그 것을 통하여 소설은 우리가 커다란 비극 때문에 오늘 살아야 할 이유를 잊어버린 이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넌지시 일러준다. 다음과 같은 말로써...


 "아라키 씨 덕분에 그 친구분이 변할 수 있었던 걸까요?"

 "글쎄요. 다만 자신을 외면하지 않는 사람이 있는 한 누구나 변할 가능성은 있다고 생각합니다." (p. 287)


 그러고 보니 나도 군대 훈련소 있을 때, 너무나 힘들었는데 나약해지려 할 때마다 그런 나를 보고 실망할 누군가를 생각하면서 각오를 새로이 하던 기억이 난다. 나를 지켜보고 있는 누군가가 있는 한, 우리는 버티고 이겨나갈 수 있다. 우리가 진정으로 좌절할 때는 정녕 우리에게 아무도 없을 때다. 소설은 누군가에게 그런 한 사람이 되어 줄 것을 청한다. 복수를 기다리는 밤을 보내는 그가 그 밤에서 뛰처나와 사랑과 희망으로 가득한 대낮의 환한 햇살을 껴안을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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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달콤한 고통 버티고 시리즈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지음, 김미정 옮김 / 오픈하우스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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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소설을 읽을 때 꼭 기억해야 할 점이 있다. 그녀가 코뮤니스트에다 레즈비언이었다는 사실. 그가 '열차 안의 낯선 자들'로 데뷔했을 때가 1950년이었다. 아시다시피 그 때는 그녀의 정체성을 이루는 두 가지 중요한 기둥을 남들에게 떳떳하게 밝히지 못하는 시기였다. 드러내면 대놓고 배척을 당했다. 그런 편협과 억압의 시기를 그녀는 견뎌야 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사회 스스로 정상이라고 말하는 시대의 공기가 실은 얼마나 무지와 적의로 오염되어 있는지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늘 사회 속에서 함께 섞일 수 없는 '타자'로 존재해야 했던 그녀는 그런 오염이 점점 보편이 되고 냉전 시대를 빌어 진리가 되려는 것을 보고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그것을 그대로 자신의 작품으로 옮겼다. 언젠가 거대한 파국을 가져올 지도 모를 불길한 시대의 대기를 독자들에게 전하려 한 것이다. 언젠가 그녀는 이렇게 말했었다.


 '나의 개인적인 질병과 불안은 내 세대의 그것이 좀 더 고조된 것일 뿐.'


 그러므로 영국의 유명한 스릴러 작가 그레이엄 그린이 퍼트리샤 하이스미스를 두고 '우려의 시인'이라 부른 것은 어쩌면 당연할 지도 모른다.



 '이토록 달콤한 고통'은 앞서 인용한 작가 내면의 고백이 온전히 그리고 생생하게 드러난 작품이라 할 만하다.

 이 리뷰를 쓰기 전에 다른 분들은 어떻게 읽었나 하고 몇 개를 읽었는데, 주인공 범죄에 대해 경찰이 대응하는 게 좀 미숙하고 허술하다는 평가가 보였다. 나 역시 그것이 이 소설의 주된 단점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이토록 달콤한 고통'은 스릴러 장르가 가지는 공식에 한정시켜 바라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스릴러라기 보다 시대의 주류적 경향과 전혀 다른 신념을 가진 이가 그 신념을 단념해야 한다는 압박 속에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두고 일어나는 갈등이 전면화 된, 한 마디로 생생한 심리 드라마적 성격이 더 강하기 때문이다. 소설이 나온 것은 60년이다. 냉전 시대가 가파르게 고조되고 있었고 사회주의 국가를 표방한 소련은 전무후무한 전체주의적인 면모를 보여주고 있었다. 게다가 공산주의자와 사회주의자를 가리지 않고 색출하는 '메카시즘'이 있었다.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같은 코뮤니스트에다 레즈비언이라면 여기저기서 자신의 정체성과 신념을 시험 받는 시기였다.

 어디서나 그녀를 범죄자에다 괴물로 규정하는 주장과 구호들을 만나야 했다. 단죄의 손가락들을 피하기 위해 자신의 본성과 신념을 더 철저하게 숨겨야 했다. 실제로 그녀는 레즈비언이라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이성애자인 척 한 적이 있었다. 그녀의 대표작 '리플리'가 위장하는 자의 심리를 그토록 생생하게 드러낼 수 있었던 것은 그녀의 실제 경험이 눅진하게 녹여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소설엔 늘 '리플리' 처럼 다른 사람과 입장을 바꿔보는 게 나타난다. 데뷔작, '열차 안의 낯선 자들' 부터가 그러하다. 어쩌면 그만큼 내면의 고통이 컸다는 방증이고 아니면 절대로 사회가 자신의 진실된 모습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는 절망의 표현이다. 퍼트리샤 하이스미스는 그런 시간을 거쳐왔다. '이토록 달콤한 고통'이 나오기까지 10년이다.


 '이토록 달콤한 고통'은 그 10년 간 자신을 내리누르고 있었던 고민이 그대로 하나의 이야기로 재현되었다.

 자신의 진실된 정체성을 그대로 인정하고 가진 신념을 포기하고 싶지 않다는 갈망이 한 편에 있다면 다른 한 편엔 이제 그만 모든 것을 놓아 버리고 세상이 요구하는 '정상성'이라는 것에 맞춰 살고 싶다는 타협이 있다. 주인공 데이비드 켈시가 오매불망 사랑하는 애너벨이 바로 전자고, 다른 여자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끊임없이 구애하는 에피 브래넌이 후자다. 애너벨은 자신이 꿈꾸는 이상 혹은 관철해야 하는 신념의 상징이고, 에피는 포기를 통해 얻어지는 현실의 안정과 달콤함의 상징이다. 당연히 데이비드 켈시는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분신이다. 그의 고민은 곧 작가 자신의 고민이다. 그런 의미에서 주인공의 집념과 마지막 선택은 작가 자신의 의지 관철이요 선언이기도 하다. 이 소설은 무엇보다 주인공 내면의 심리가 세밀하고 뛰어나게 묘사되어 있는데, 분명 작가의 내면이 그대로 투영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말하고 싶다.

 '당시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내면을 알고 싶습니까? 그러면 좌고우면 하지 말고 '이토록 달콤한 고통'을 읽으세요!'


 그런데 이렇게 말하면 이런 질문이 가능하다.

 '심리 묘사 상세하고 뛰어나다고 하는데, 그것을 어떻게 아는가?'

 생각해 보면 심리 묘사 자체가 그런 평가를 낳지 않는다. 아무리 상세하고 생생하게 심리를 묘사해도 그 묘사가 독자의 공감을 얻지 못하면 쓸데없이 장황하고 뭘 보여주고 싶은지 모르겠다는 반응만 낳을 뿐일 테니까 말이다. 심리 묘사를 읽을 때, '와, 어떻게 이렇게 묘사하지? 굉장한 걸!' 하고 느낄 때는 언제나 나도 언젠가 가졌던 마음을 정확하게 나타내고 있거나 그것이 바탕이 되어 이런 마음도 가능하겠다 생각될 정도로 재현하고 있을 때다. 즉 묘사가 보편적 공감을 얻고 개인적 체험을 반영할 뿐만 아니라 그 묘사의 수준이 세밀한 것을 넘어 막연히 짐작만 하고 있었던 것까지 선명하게 표현할 때 그러하다. 이 소설의 심리 묘사는 정확히 바로 이런 차원을 담고 있다.


 어쩌면 이 말이 얼른 이해되지 않을 수도 있다.

 애너벨을 향한 주인공의 집착은 광기에 가까워서 '거기서 어떻게 보편적 공감을 가진다는 말인가?' 하는 반문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러나 이 주인공의 심리를 현실에 굴복하지 않고 자신의 정체성과 신념을 고수하려는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에 맞춰 본다면, 이러한 주인공의 모습은 우리들도 늘 하기 마련인 이상과 현실 사이의 번민과 갈등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는 걸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자신의 이상과 신념 그리고 타인의 인정이 아닌 나 스스로 인정할 수 있는 모습을 끝까지 추구하는 것은 늘 우리도 바라는 게 아니었던가? 그런 면에서 주인공과 우리는 그리 다르지 않다. 보편적 공감은 바로 거기서 우러난다. 우리도 한 때는, 아니 어쩌면 지금도 나만의 모습과 이상 그리고 신념을 쫓았거나 그러고 있으니까. '이토록 달콤한 고통'은 범죄 소설의 외형을 취하고 있으나 실은 그런 자들을 위한 응원이다. 가고자 하는 길을 내처 걸어가라는 등의 토닥임이다. 그랬기에 제목 역시 '이토록 달콤한 고통'인 것이다. 자신이 원하는 길로 걸어가면서 당하는 고통은 설령 그것이 아무리 크다고 해도 무엇보다 자기 자신이 되고자 하는 것에서 나오는 것이기에 '이토록 달콤한 고통'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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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7-08-28 18: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헤르메스 님 글 읽다가 문득 히치콕이야말로 천재였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열차 속의 이방인‘을 히치콕이 영화화‘합니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히치콕은 남자 배우를 실제 게이를 섭외하죠. 아주 유명한 일화인데...
이걸 보면 히치콕은 하이스미스가 은밀하게 감추고 싶었던 것을 간파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http://blog.aladin.co.kr/trackback/myperu/6971840 ( 마침 제가 쓴 리뷰가 있군요.. )

ICE-9 2017-08-28 18:37   좋아요 0 | URL
그러고 보니, 확실히 히치콕은 그런 감이 좀 남달랐던 것 같습니다.
분명 자신이 만들고자 하는 텍스트를 엄청 깊게 헤아리고 있는 게 아닌가 합니다.
역시 타인의 작품에 대해 좋은 감식안을 가진 사람이 자신의 작품도 잘 만드는 것 같네요^^

2017-08-28 18: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8-28 19: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웃는 남자 - 2017 제11회 김유정문학상 수상작품집
황정은 외 지음 / 은행나무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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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을 사기도 하고 팔기도 했다.

그들을 훔치지는 않았다.

아이들을 훔치는 일은 또 다른 사업이다.

그 아이들을 무엇에 썼을까?

괴물을 만들었다.

왜 괴물을 만들었을까?

웃기 위해서였다.


 - 빅토르 위고, <웃는 남자> 중에서



 황정은의 '웃는 남자'는 주위 사물들의 온기를 견디지 못하는 남자의 이야기다. 이름은 d. 소설 속에서 그만 고유명사인 이름이 없다. 그래서 제목이 '웃는 남자'인가 보다. 대문자 D를 시계 방향으로 90도 돌리면 웃는 입이 되니까. '하지만 소설에선 소문자 d로 표기되잖아?' 하고 굳이 반박한다면 할 말은 없다. 어쨌든 그는 사물의 온기를 참을 수 없어한다. 계기가 있었다. 자신의 삶에 있어 가장 신성한 존재인 아내 dd가 죽었기 때문이다. 예고도 없이, 너무나 갑작스레 다가온 상실. 그로 인해 그의 세계는 모든 의미를 잃었다. 어릴 때 그가 살았던 아버지의 목공소처럼 무의미한 잡음만 가득한 소음의 세상이 되고 말았다. 존재가 아닌, 존재의 흔적만 보여주는 소리들로 넘쳐나는. 소설에 나오진 않으나 그가 사물의 온기를 싫어하는 것도 그 때문이지 않을까? 온기는 존재에서 온다. 존재는 자신의 실재를 따스함으로 증명한다. 하지만 그는 안다. 지금 자신은 존재의 잔향만 남은, 비존재들에게 둘러싸여 있다는 것을. 그러므로 손으로 전해지는 사물의 온기는 기만이다. 그것은 자신을 속이려 한다. 무의미한 것들이 자신에게 의미의 환영을 심으려 하고 있다. 그러니 거부한다. 그는 말한다.


 사기를 치지 마라... 인간은 너무도 사물과 같이... 없으면 없어. 있지 않으면 없고, 없으니 여기 없다.(p. 20)


 이처럼 이 소설에서 '소리'는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그것은 d가 처음 세들어 살았던 목2동 505번지의 소유주, 김귀자 할머니의 고백에서도 확인된다. 거기서도 소리가 기만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 부분은 소설 초반에 나오는데, 이로써 작가가 소리를 소설의 중요한 모티브로 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여기서의 소리는 '사이렌' 이다. 6.25 전쟁 중 피난을 하다 끔찍한 광경을 목격한 그녀는 아직도 전쟁의 공포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그녀는 그 때 사이렌 소리를 듣고 주저 앉아 버린다. 하지만 그 소리는 전쟁을 경고하는 게 아니라 실은 이웅평 대위의 귀순을 알리는 것이었다. 파국의 도래가 아니라 김귀순 할머니가 살고 있는 여기가 더없이 좋고 안정적이라는 것의 확언이었다. 하지만 할머니 역시 d가 느끼는 사물의 온기처럼 그 소리가 기만이라는 것을 안다. 그는 그토록 견고해 보였던 세계가 '하루 혹은 반나절도 되지 않은 폭격으로 아무 것도 아닌 것, 잿더미가 될 수(p. 23)' 있다는 것을 목격했기에 사이렌 소리가 아무리 과거와 절연된 현재를 말해도 자신이 '과거의 여전한 현재' 속에 살고 있다는 것을 잘 안다. 오히려 사이렌 소리는 자신의 마음 속에서 전쟁은 완전하게 중단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는 것을 일깨울 뿐이다.


 소리가 그러하기에 d는 '웃는 남자'가 된다. 빅토르 위고의 소설은 아니고, '공각기동대 TV 시리즈'에 나왔던 '웃는 남자'다. 그 '웃는 남자' 심볼 주위엔 J.D 샐린져의 '호밀밭의 파수꾼'에 나왔던 다음과 같은 말이 새겨져 있다.


  'I thought what I'd do was, I'd pretend I was one of those deaf-mutes.'




  말 그대로 귀머거리가 되는 것이다. d는 인간의 마음이 턱에 있다고 생각한다.(p. 26) 그것은 있는 힘껏 앙다문 턱이다. 하나의 강력한 의지로 된 마음이다. 나라도 기만의 소리를 내지 않겠다는 의지. 그는 귀머거리에다 벙어리까지 되어 자신의 세계를 고립시킨다. 홀로 떨어져 녹슨 자물쇠로 단단히 채워진 오두막처럼 속지 않기 위하여 세계와 간격을 둔다. 이제 그렇게 살 것이었다.


 결국 '웃는 남자'는 어떤 이야기인가? 단적으로 소리에 대한 태도가 바뀌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기만의 사이렌에 불과했던 소리에서 상실의 통증에 너무 빠져버린 나머지 자신이 그만 놓쳐 버렸던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내는 것. 바로 이것이다. 소리의 의미에 집착하는 것은 곧 존재에 대한 집착이다. 존재이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자유롭게 되면 잔영이라 하더라도 마냥 무의미한 것만은 아니다. 있는 것과 없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절대적으로 구별되지 않고, 삶에서 그것들은 서로 넘나들거나 섞여든다. 추억이 그렇고, 그리움이 그렇듯이. 때로는 실재의 잔영이, 그 그림자가 삶의 속을 더 채우기도 한다. 더 애틋하고 간절하게. d는 여소녀의 가게에서 그런 것을 찾는다. 여소녀의 오디오 가게는 d의 아버지가 했던 목공소와 여러가지 면에서 대비된다. 다 같이 소리를 모으지만, 목공소는 오로지 소리를 집적할 뿐이나 여소녀의 오디오 가게는 소리를 내보낸다. 그 곳은 고립이 아니라 흐름의 장소이며 이는 여소녀의 가게가 있는 세운상가도 마찬가지다. 오래도록 거기서 장사를 하고 있는 여소녀는 있는 것과 없는 것에 집착하지 않는다. d는 상실로 무의미가 가득한 진공의 간격을 느끼지만, 여소녀는 그 진공에서 오히려 가득한 빛과 신호를 본다. 여소녀에게 그 곳은 끝이 아니고 새로운 수많은 가능성이 태동하는 자궁인 것이다. 여소녀도 d와 같은 상실을 겪었다. 그러나 그는 귀를 막지 않는다. 오히려 타인의 귀를 열어준다. 존재에 집착하지 말고 잔영을 음미하라고. 존재의 확산인 잔영. 바로 그것이 d가 매일 같이 여소녀의 가게에서 듣게 되는 음악이다. d는 여소녀와 박준배를 통하여 그것을 체득한다. 멈춤이 흐름이 되자 소리가 음악이 되었다. 진정한 소통이 열리는 순간, d는 비로소 진실의 온기를 느낀다.


 황정은의 소설을 읽은 것은 처음이라 내가 이 소설을 얼마나 잘 이해했는지는 알 수 없다. 난 그저 소설이 보내는 신호를 해독하고 그것을 하나의 이야기로 만들었을 뿐. 그렇게 작가 역시 여소녀처럼 내 귀를 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고 보면 모든 글은 음악이다. 그것은 열기마저 지니고 있어 귀를 막아도 들리게 만든다. 소리에 공명한 마음이 여운의 진동을 못 이겨 자신만의 악보를 적어나간다. 그렇게 흐름이 된다. 진공에 또 하나의 빛과 신호가 홀연히 떠오르듯. 문득 작가의 다른 연주가 듣고 싶어졌다. 천천히 그리고 찬찬히 들어볼 생각이다.


* * *

 '웃는 남자'는 11회 김유정문학상 수상작이다. 책에는 '웃는 남자' 말고 후보로 오른 다른 작품이 6편 더 실려 있는데, 면면을 보자면 김숨, 김언수, 윤고은, 윤성희, 이기호 그리고 편혜영이다. 하나같이 이름 꽤나 들어본 작가들이다. 모든 단편을 '웃는 남자'처럼 리뷰하려고 하니 분량이 너무 많아져서 안되겠다. 간단하게 다들 '읽어볼만하다'는, 어쩌면 하나 마나한 말을 총평처럼 남기고 이 글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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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8-26 13: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8-26 23: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7-08-28 16: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웃는 남자 하니 킹의 그것에서의 페니와이즈가 생각나는군요. 웃는 데 일가견이 있는 캐릭터 아닙니까..ㅎㅎ

ICE-9 2017-08-28 18:08   좋아요 0 | URL
하하, 그러네요. 이번 영화 편은 그 페니와이즈의 웃음을 더욱 실감나게 묘사해서 더욱 기대가 큽니다.^^
 
괴담의 테이프 스토리콜렉터 57
미쓰다 신조 지음, 현정수 옮김 / 북로드 / 2017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역시 미쓰다 신조로군요. 페이지에 손을 대는 것조차 저어될 정도로 무섭습니다. 미쓰다 신조의 '괴담의 테이프'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제 보니, 저는 확실히 공포 장르를 영화로 보거나 귀로 듣는 것 보다 는 책으로 읽을 때 더 무서움을 느끼네요. 아무래도 책은 다른 것들과 달리 한 가지 감각을 별도로 더 요구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바로 촉각 말이죠. 읽기 위해선 만져야 합니다. 손으로 책을 만지고 또 계속 페이지를 넘겨야 합니다. 공포를 느끼게 만드는, 뭔가 음험한 것이 도사린 그것을 말이죠. 영화는 멀리 떨어져 가만히 보기만 하면 됩니다. 듣는 것도 마찬가지죠. 머리로는 딴 생각을 하면서 듣는 시늉만 할 수도 있습니다. 요컨대 영화를 보고, 무서운 이야기를 듣는 경우 모두 얼마든지 나와 상관없는 구경꾼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책은 다릅니다. 책은 혼자 진행되지 않습니다. 나의 적극적인 행위를, 달리 말해 참여를 요구합니다. 저의 실제적인 개입이 있어야만 이야기가 흐릅니다. 무서운 것을 저 스스로 초래하는 것입니다. 내가 해야 한다는 것, 내가 거기로 뛰어들어야 한다는 것, 그 일부분이 되어야 한다는 것. 바로 그것 때문에 책이 다른 매체보다 더 공포감을 낳는 것 같습니다. 사실 몰입도 다른 것들 보다 훨씬 크구요. 물론 기억도 책으로 만난 공포는 오래 남지요. 이런 것들 때문에 여전히 많은 공포 소설이 나오고 또 그것을 자주 즐겨 읽는 것 같습니다. 


 그러고 보니 만화도 비슷하네요. 문득 이토 준지의 만화들을 얼마나 힘들게 페이지를 넘겼던가 하는 게 떠오릅니다. 그림 때문에 손을 대기도 싫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야기가 어떻게 결말이 나는지 궁금하여 그것을 보려고 애써 손을 대어 끝까지 읽어버리는 저는 아무래도 이 장르에 매혹되어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늘 그랬듯이, 이번에도 미쓰다 신조의 공포 소설을 나오자마자 만났습니다. 이 작가의 공포 소설엔 뭐라고 분명히 말하기는 어렵지만 확실히 마음을 잡아 이끄는 매력이 있어서 작품이 나올 때마다 손에 잡게 됩니다. 지금까지 각종 매체로 허다하게 공포물을 접해 온 저입니다. 소재에 있어서도, 내용에 있어서도 '와, 이거 정말 새로운 걸!' 하는 것은 그다지 없는 편입니다. 최근엔 영화 '제인 도'를 보면서 그런 걸 느낀 적은 있습니다만. 물론 미쓰다 신조의 소설도 그렇게 새롭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도 나오면 기대하게 됩니다. 읽어보고 싶습니다. 아마도 그건 이야기 자체 보다는 신조 특유의 분위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그 분위기란 단적으로 정의하자면, '경계의 허뭄' 입니다. 여기서 경계란 허구의 이야기와 지금 제가 있는 실제 현실 사이에 놓은 경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신조의 이야기는 자주 그것을 허뭅니다. 그것을 위해 그는 근대 초기의 소설들이 취했던 장치를 씁니다. 영국이나 유럽에서 나온 근대 초기 소설들을 보면, 수기의 형식을 빌린 것이 많습니다. 그 중 가장 많이 수기의 형식을 차용하는 게 바로 공포 소설입니다. 예를 들자면 러브 크래프트의 소설이나 에드가 알란 포의 '어셔 가의 몰락'을 떠올리시면 될 것 같습니다. 아시겠지만 이런 소설들의 수기는 대부분 누구의 목격담, 증언으로 이뤄집니다. 그렇게 지금 재현되고 있는 이야기가 공상이 아니라 어딘가에서 실제 일어난 일이란 것을 독자에게 납득하도록 만들죠. 다시 말해 수기의 형식은, 특히나 이렇게 인간의 이성으로 얼른 헤아리기 어려운 정체불명의 무언가가 초래하는 공포를 다룰 때 이 때문에 가지게 되는  독자가 한낱 망상으로 치부해 버릴 위험을 '있음직한' 사실로 만들어 피해가는 것이죠. 그리고 그 '있음직함' 때문에 소설이 원래 노리던 공포를 더욱 극대화시킬 수도 있고 말이죠. 여기서 우리가 정녕 어떨 때 공포를 느끼는가 하는 게 밝혀지는 것 같습니다. 그건 바로 소설 속 이야기가 바로 내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는 걸 느낄 때라는 게 말이죠.


 '경계의 허뭄'이란 바로 이것입니다. 영화의 스크린처럼 저편의 이야기와 이편의 내 삶의 절대적으로 나뉘지 않고 그 공포의 침입을 막아주는 스크린이 찢어진 것처럼 내 삶으로 침범하여 흘러든다는 것입니다. 나도 그 이야기 속 당사자가 될 수 있다고 말하듯이 말이죠. 상기해 보시면, 무서운 이야기가 정말 무서워지는 것은 바로 그 때입니다. '아, 저 일이 내게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겠구나!' 깨달을 때 말이죠. 미쓰다 신조도 그런 수기 형식을 빌려 왔습니다. 작가가 직접 등장해 아주 일신 상의 일들을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으며 마치 실제 있었던 일인양(어쩌면 정말 있었던 일 일수도 있습니다.) 독자에게 여기도록 한다는 것이죠. 여기에 주안점을 두고 읽다보면, 미쓰다 신조가 독자들에게 자신의 이야기가 실제로 '있음직한' 느낌을 주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하고 있는지 보일 것입니다.


 저는 특히 두 단편, '괴담의 테이프'와 '우연히 모인 네 사람'에 주목하고 싶은데요, '괴담의 테이프'는 마지막 장면 연출이 정말 압권입니다. 마치 자신의 자살을 생중계 하기라도 하듯 자살하려는 사람이 자살할 때까지의 상황을 자신의 육성으로 녹음한 테이프가 이 이야기의 주된 소재인데, 원래 그것을 오래도록 모으고 그 중 특별히 세 편을 골라 책을 쓰기로 했던 저자가 그 세 편을 미쓰다 신조에게 보내오고는 실종되고 마는데, 나중에 실종된 그 작가가 미쓰다 신조에게 이제는 자신이 직접 고백하는 자가 되어 자살을 녹음한 테이프를 보내옵니다. 이 부분에서 작가의 연출이 저는 정말 좋더군요. '괴이'의 공포는 정체 불명에서 나오는데, 그 정체불명을 온전히 남겨두어 현실감과 무서움이란 두 마리 토끼를 다 잡는 연출이었습니다. 분명 공포의 효과에 조예가 많은 작가라 그런 연출을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대부분은 독자에게 더 큰 한 방을 주기 위해 다른 방향을 취할 것이거든요. 독자의 눈 앞에 괴이의 전모를 밝히는 것 같은.


 이런 '적절한 물러남'(저는 작가의 그런 연출을 이렇게 부르고 싶네요.)은 '우연히 모인 네 사람'에서도 나타납니다. 이 역시 결말 부분인데요. 솔직히 이 에피소드는 살만 좀 제대로 붙이면 얼마든지 장편으로 만들 수 있는 이야기 입니다. 아이디어도 좋고, 무대도 적절하며, 미스터리도 꽤 넣을 수 있거든요. 저 역시 읽으며 '아, 좀 더 긴 이야기로 읽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했으니까요. 하지만 미쓰다 신조는 이 좋은 이야기를 그냥 단편으로 마무리 지어버립니다. 후반 부분을 풀어가면 충분히 무서운 쪽으로 더 매력적인 이야기로 만들 수 있는데 그러지 않습니다. 물러나는 것이죠. 그래서 역시 현실감과 그 현실감에서 오는 공포를 얻습니다. 저는 미쓰다 신조의 이런 부분을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픽션을 현실처럼 만드는 능력 말이죠. 실제 이야기처럼 느끼게 하여 '괴이'의 리얼리티를 확보하는 능력. 정말로 그 방면에 있어서 미쓰다 신조의 능력은 최상 입니다. 그래서 그의 소설은 무서운 것이죠. '괴이'가 책 속의 이야기로만 머무는 게 아니라 어느 날 갑자기 내 삶 속에 나타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에.


 별 것도 아닌 이야기를 잡다하게 길게도 썼네요. 그렇지만 이렇게라도 미쓰다 신조의 공포 소설이 갖는 매력을 꼭 한 번 말하고 싶었습니다. 얼마나 설득력을 가질지, 그건 모르겠지만.

 '괴담의 테이프'는 어떤 조우의 산물이기도 합니다. 아시다시피, 미쓰다 신조는 미스터리 작가인 동시에 공포 소설 작가입니다. 두 방면을 그는 다 걸어가고 있지요. 이번 '괴담의 테이프'에선 그 둘이 조우하는 것 같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예를 들어 두 번째 단편, '빈 집을 지키는 밤'은 존 카펜터 감독의 영화 '할로윈'으로 대표되는 슬래셔 무비의 신조식 호러 변형판 같고, 그 다음의 '우연히 모인 네 사람'은 애거사 크리스티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와 같은 클로즈드 서클의 호러적 변형 같습니다. 이렇게 미스터리에서 익숙한 소재들이 호러의 세계로 재탄생 하고 있다는 것이죠. 이번 단편집은 지금까지 말한 점들이 넘치는 책입니다. 권태로운 일상의 균열을 일으킬 공포를 만나고 싶다면 '괴담의 테이프'를 한 번 돌려보시라 권해 드리고 싶네요.


 '괴담의 테이프'는 개인적으로 더 무서웠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테이프들엔 모두 괴이한 존재가 나타나는데, 그 출현의 신호가 하필이면 빗소리 입니다. 그런데 제가 이 소설을 읽을 때는 정말 주구창창 비가 내렸습니다. 이야기와 현실이 이런 식으로 일치하니 좀 오싹 하더군요. 역시 무서운 것은 이야기만으로 안 됩니다. 그것이 현실 속으로 마구 침범해 들어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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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7-08-26 0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을 보면서 사진 속 책 맨 앞에 그림은 자세히 못 봤습니다 마지막에 빗소리가 나고 무언가 나타난다고 한 걸 보고 위로 올리다 책 맨 앞 그림을 보니 오싹했습니다 노란 우비 쓴 사람? 사람이 아닌 것 같은... 《노조키메》에서는 책을 읽다 누군가 자신을 보고 있는 느낌이 들면 그만 보라고도 하죠 책을 볼 때는 그런 말 그렇게 무섭지 않았는데, 시간이 흐른 다음에 갑자기 생각나기도 했습니다 수기형식이 무섭게 만드는군요 다른 사람 소설은 거의 본 적이 없어서 잘 몰랐습니다 미쓰다 신조 소설만 조금 봤어요 공포소설... 미쓰다 신조 소설을 보면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무서운 것만 봐야 할지, 다른 것도 생각해야 할지... 책을 보면 거기에서 무엇을 생각해야 할까 할 때가 많아서... 별로 좋은 버릇은 아닌 듯합니다 알 수 없는 건 그것대로 두어도 괜찮다고 하지만...


희선

ICE-9 2017-08-26 02:48   좋아요 0 | URL
희선님, 잘 지내시고 계시죠? 오랜만에 뵙는 것 같아 일단 이렇게 안부부터 묻게 되네요^^
표지의 노란 우비 사람은 여자로 다섯번째 단편에 나오는 ‘괴이‘인데, 늘 비가 내릴 때마다 나타나 희생자에게 점점 더 다가오는 존재입니다. 저는 미쓰다 신조의 미스터리를 읽을 때는 이것저것 다른 거 많이 생각하는데, 공포 소설은 정말 다른 거 생각 못하겠더라구요.^^ 이야기 자체에 마냥 압도되어서... 그런데 영상으로 보면 아무리 무서운 것이더라도 어느 정도 객관적 관람이 가능하거든요. 그런데 책은 잘 안 되네요. 특히 이렇게 미국식 호러가 아니라 일본식 호러는... 왜 그럴까? 거기에 대해 조금 생각 중입니다. 여하튼, 저도 이렇게 이런 소설은 아무 생각없이 읽는답니다^^;